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은 삶 - 하나의 경계선이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조세프 응우옌 지음, 박영준 옮김 / 서삼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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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는 삶(하나의 경계선이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지은이: 조세프 응우엔/ 박영준 옮김

   : 삼반견해(三般見解)중 두번째 견해

 

 

 

조세프 응우엔의 신작<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는  삶>은 '바운더리 (Boundary)  가  곧  자유'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세운다.

상대가 불편해 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를  향해 나는 ''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는 내용만 보면.

마음을  닦아 내면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언뜻 이해가 안갈 수 있는 내용이다.

보편적으로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남과 나를 차별 하지 말고 항상 둘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상대와 나를 둘로 보지 말고, 항상 내 탓으로 돌리는 삶이 수행이라 여긴다.

하지만 조세프 응우엔은  경계선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고 말하다.

무념의 전도사를 자처했던  저자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 인가?

 

 

 

저자의 전작인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 말라>를   읽었다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대략 감이 오리라 생각 된다.

'조세프 응우엔' 은  전작<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 말라> 을 통해서  '생각하기(사고 하기:Thinking) 를 멈추고  무념(non-thinking) 속에서  떠오르는  직관을 믿어라' 고 했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짓는 모든 생각하기,  사고하기를  멈춰야만 비로소 내 안에 본래 있는 근원적인 무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었다.

저자는 무념에 대하여 '인더존(in the zoon)' , '(zoon) 안에 들어 간다' 는 스포츠 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통해  무념무상의 경지를 설명하였고 이때  무념의 상태에서 떠오르는 직관의 힘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 조세프 응우엔이  전하고자 하는 요지 였다.

즉 억지로 지어내는 생각이나   알음알이가 아닌  무념의 상태에서 떠오는 직관을  따르라는 뜻이다.

작가가 말하는 '무념' 은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생각과 같은 의미이다.

이는 '신성(神性)'이나 '불성(佛性)' 이라 불러도  무방할  용어라고 생각 된다.

그런데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무념과 동떨어진 선긋기를 말하고 있다.

 

그럼 그는 이번의 신작에서는 왜 경계를 세우는 것, 바운더리를 치는것을 내세웠을까?

왜  바운더리가 곧  자유라고 했을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운더리, 내안의 경계는 '내 중심' 을 지키라는 말과 상통하는것이 아닐까 싶다.

내 중심이라면  내 근본 마음을 말한다.

즉 내가 남에게서 의견을 구하고 남의 말에 따르는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근본 마음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에 따르라는 뜻이다.

작년에 읽었던 남들이 믿고 있는 상식에 대하여 'Say No' 라고 할 수 있어야 된다고 했던 <세이노의 가르침> 의  구절과도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내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직 나에게   좀더 집중을 해야 한다.

 

 

 

듣고 보고 행하는 모든 것을 주체가 되는 나에게로 돌려야지 타인의 말과 소리, 뜻에 맹목적으로 쫓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 <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는 삶>이 되는 것은 곧 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는 내 인생, 내 삶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작가는 남이 소중하고 귀하듯이 나도 귀하고 소중하다고 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게 아니고 또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논리가 아닌 남은 남대로 소중하고 나는 나 대로 전부  다 소중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바운더리, 경계선은  사실 내  안의 참나를 오롯이 세우는 것을 뜻한다.

결국 남과 나를  구분 하고자 했던 '분별' 이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나 다운 나' 로 살기 위한 '방편'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작에서 언급 했던 '무념'과 이번  책에서 언급한 '경계선' , 모두 참나를  알기 위한 과정을 담아내기 위한 방편이라 여겨진다.

 

 

이 처럼 독자의 마음을  깨닫게 위해 저자가  이끌어주는 방법을 보면 유명한 선어록 구절이 떠오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 법어중 마지막 구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는 성철 큰스님(1912~1993)께서 1981년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 하실때  남기신 어록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원래는 중국 선어록에  나오는 말로 송나라때 '청원 유신 선사(?~1117)'가 남긴 어록이다.

 

 

<견산시산 수시산(見山是山 見水是山)

견산불시산 견수불시수(見山是山 見水佛是水)

견산시산 견수시산(見山是山 見水是水)

이 세가지 견해(三般見解)가 같은것 인가? 다른 것인가?

누가 이것을 가려 낼 수 있는가? >

 

청원 선사는 산과 물을 보는  시선(見)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를 설(說)해 주었다고 한다.

선사는 깨닫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좀더 확철대오(廓撤大悟: 큰 깨달음)를  해보니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견해가 과연 같은 것인가다른 것인가를  대중들에게 물은 것이었다.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를 보는 단계의  마지막 단계는  첫번째 단계와 다르지 않지만  다르다.

중요한 것은 두번째 단계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를 반드시 거쳐야지 만이 세번째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헤겔의 변증법 처럼 정() 다음에  반()이 있어야  합()이 되는 것과 같다.

 

조제프 응우엔이 이번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번째 단계로 가기 위한 반(反): '분별' , 즉 삼반견해중 두번째 견해에  해당 된다고 본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바운더리는 곧  주체적으로  살기 위한 참나인 '주인공' 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곧 자유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자신만의 간결한 어조로 담아내는 작가의 통찰에  공감하며 그래서 그의 다음 책이  더욱 기대가 된다.

 

남들의 기준에 맞춰 모든 일을 올바르게 했는데도 왜 과도한 일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함을 느끼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에 시달리는지 스스로 의아해합니다.
그것이 바로 경계선이 없는 삶을 살아갈 때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 P21

오직 직관에 따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경계선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 합니다. - P41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을 때 당신은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됩니다. - P62

한 분야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그 변화를 다른 분야에서도 적용하여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P71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창조하는 일은 자신을 파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중략...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세계가 아닌 이것도 저것도 소유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 P103

예전의 경계선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경계선을 설치해도 당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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