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가장 정점인 시기인 한낮,
정오에는 그림자 마저 사라져 없다.
분수는 하늘로 올라가 꿈틀거리다가 정상에서
쏟아져 내린다.
하루 중에 상승이자 하락인 그 꼭지점,
그 절정이 정오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절정은 슬픈거란다.
정오가 지나서야 모든 사물에 비로소 그림자가
생긴다고 한다.
이상의
<날개> 마지막 장면에서 정오의 사이렌이 울릴때, 그
순간 '날개야 돋아라, 날자꾸나'
라고 속삭인다.
이렇게 정오가 하루의 절정이듯이 생의 절정은
바로 '죽음' 이라고 말한이는 바로 '이어령'
이다.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은 깍이는데)
풍표만점,정수인(風標滿点,正愁人:
바람 불면 만점으로 떨어지니 참으로 시름겹다)
봄 기운이 최절정에 이르고 난 후에 꽃잎
하나 떨어지자 문득 봄이 서서히 저무는 것에 상심했다는 두보의 당시(唐詩: 曲江
2수)가 떠오른다.
남들은 한창 꽃을 감상하며 봄빛을 만끽할
때 스며든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름과 현대의 이어령이 정오의 절정에서 느낀 슬픔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교감되는 듯 하다.
모든 존재는 가장 화려하고 찬란할 때 가장
절정에 이른것이고 그 순간, 머물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곧바로 쇠락하면서 시름에 겨워지기 시작한다.
그 쇠락의 정점은 죽음이지만 또한 동시에
탄생의 의미도 담겨져 있으리라.
그렇게 삶과 죽음은 영겁의 시간속에서 무한
루프의 주인공이 아닌가?
이 책은 기자출신의 저자인 김지수와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했던 이어령 교수의 말년 인터뷰를 담은것이다.
제자이기를 자처한 김지수와 생의 마지막을
앞둔 스승 이어령과의 '죽음'이라는 큰 주제속에 철학과 기독교적 담론이 폭 넓게 다뤄지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감탄 했던것은 말년 이어령의
통찰들이다.
이어령은 말했다.
젊을때는 관심이 중요하고,
사오십때는 관찰이, 말년은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는 빛이 되지 못한 물질의 찌꺼기,
그 몸을 가지고 사는 거다.
배꼽은 내가 타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다.
컵에 손잡이가 생긴다는것은 관계가 생긴다는
것이다.
손잡이가 달린 인간으로사는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날아다니는 사람은 걷질 못한다.
예술가들은 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먼저 길 잃은 양이 되어야 한다.
길을 일탈해서 길 잃을 자유가 있어야 한다.
(나는)
길을 잃어도 영영 미아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상처와 활을 동시에 가질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은 인터페이스 이다.
즉 머리와 몸을 분리하면서도 이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사잇꾼이 되어야 한다.
사기꾼이 아닌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 줄 수있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인간을 이해 한다는 것은 인간이 흘린 눈물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등등
제자 김지수가 스승 이어령에게 이어지는
질문속에 뜻 깊은 어록들의 성찬을 즐길 수 가 있었다.
이는 이어령 교수의
88년 일생의 통찰이 담긴 보석같은 어록들 구구(句句)
마다 절절(切切)함이
베어들어 있다.
처음 읽을때는 이런 형식의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떠 올랐지만 그 보다 훨씬 내용이 깊고 넓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것은 이어령 교수의 자기 성찰이다.
"지식은
울림을 주지 못해, 생명이 부딪혔을때 나는 파동을 남기고 싶은데 쉽지 않아."
"내
딸 민아 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믿으면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머무는데, 나는
미끄러져서 계속 땅에 떨어져. 그래서 영성이 아니라 땅 지(地)
자 지성이 되는 거야."
이어령교수 당신은 지성을 대표했지만 자기는
영성을 얻지 못했다는 자기 고백을 한다.
마태복음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구절
처럼 이어령 교수의 딸이 결국 먼저 영성의 세계로 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어령교수가 무신론자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계기도 딸의 실명 위기를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고 한다.
당시에 기도 덕인지 딸은 실명 하지 않았지만
훗날에 암으로 먼저 아버지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된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갔다는 것은
꼭 죽음만을 의미하진 않는것 같다.
이어령 자신은 지성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에
속하지만 결국 그런 그도 영성의 세계에서는 자신은 나중 된 자에 지나지 않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이어령 입장에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지성에서 영성의 세계로 이끌었던 딸 이민아 목사가 진정한 스승이라고 여길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김지수 기자가 스승이라 부르는 자신에
대해 한사코 자신은 스승이 아니라고 부인하는것 같다.
어쩌면 겸손의 표현이지만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곁에 두고 아무때나 펼쳐 읽어
볼 만 하다.
지성의 거두를 상대로 깊이 있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작가의 솜씨도 볼 만 하지만 다만 아쉽다면 이어령에 대한 존경이 숭배가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책에서 이성복 시인의 "나의
죽음을 건네 주는 스승을 최고의 스승"
이란 표현이 나온다.
죽음을 건네 준다는것은 나를 살린다는 뜻이다.
나를 살린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결국 스승은 나를 새로이 거듭날
수 있게 이끄시는 분이다.
스승에 대한 진정한 존경은 숭배가 되어서는
안된다.
제자는 스승의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나를
죽이고 다시 진정한 나로서 거듭나야만 한다.
결국 스스로가 거듭 나야 하는것 그것이
바로 스승의 바램이자 그렇게 해내는것 만이 제자가 스승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번 생엔 다 못 갚을
것 같다.
그저 스승이 계셨음에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