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3 월12

 

 

 

제목:  움직이는것은 그대의 마음이다. (仁者心動_ 육조단경 중에서)

두번째 사색

육조혜능이 오조홍인에게서 의발과 법을 전수받고 남방에서 숨어 살다가 어느덧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느낀후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광주의 법성사란 사찰에서 열반경 법회가 열렸는데 혜능은 그 법회에 청중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사찰에 세워진 깃발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는 것을 보고 스님들 의견이 분분했다.

'저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야! 저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바람이 움직이니 깃발이 움직이니 대중들은 설왕설해를 하며 논쟁을 하던중,

그때 혜능이 홀연히 답한다.

'움직이는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그럼 뭔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라고 하자 청중은 놀랐다고 한다.(一衆駭然: 일중해연)

그렇게 5조의 법을 이은 6조가 세상 밖으로 드러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

당시의 대중은 어떻게 혜능이 단지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는 것이다.'

라는 대답에 심상치 않음을 알고 놀랐을까?

무시 할 수도 있는 답이 아닌가?

어떻게 대중들은 혜능의 대답에 탄복할 수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혜능의 대답보다 그당시 대중들이 답을 알아보는 안목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이란 답을 아는 인식을 대중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즉, 혜능이 당시에 깨달음을 지녔다고 하지만  그 깨달음을 아는 대중의 안목 또한 대단한게 아닌가 싶다.

 

쇼펜하우어가 천재는 자신의 경지를 보통일반 사람들도 직관적으로 알수 있게 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한바가 있다.

즉 천재성을 깨달음으로 바꿔 표현한다면 진정한 각자(覺者)의 위대함은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지만 발현 되지 않은 불성을 자각(自覺)하게 해주는데 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은 각자(覺者) 이여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것이 아닐까?

어쩌면 천재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발현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한두명 특출난 천재성을 발현한 사람, 혹은 깨달은 사람이 나타나면 이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숨겨진 천재성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거나 깨달음의 경지를 단박에 알수 있다면 그건 이미 본인 내면에 본래 갖추고 있던 천재성이나 불성을 비추어 본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성본래불(自性本來佛)

이렇게 본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거의 완성형이 아닌가?

다만 아직 알이 깨지기 전 상태, 어미 새가 밖에서 한번 쪼아 주는게 부족한 상태.

선지식의 할과 방의 한방이 필요한 상태가 아닐까?

 

석가모니 부처님과 큰스님을 비롯한 모든 선지식은 지금도 우리에게 줄 한방을 준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알 껍질 안에서 좀 더 쪼아 놓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결국 성장과 완성은 어쩌면 한껍질 벗겨내는가에 달려 있는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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