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은미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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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삶이 불편한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박은미 지음

 

236년전의 오늘, 1788년 2월 22일은 쇼펜하우어의 탄생날 이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지금은 폴란드 영토,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던 '단치히' 라는 곳에서 부유한 사업가인 아버지와 여류 문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마디로 쇼펜하우어의 삶을 요약하자면 아빠, 엄마 찬스를 잘 사용했던 철학자?

물론 쇼펜하우어 자신의 의지는 아니였겠지만 요즘 세대의 시각으로 보면 금수저나 엄친아 정도 아니였을까?

아버지가 남겨준 물질적 유산으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았고 또 정신적으로는 어머니의 문학적 재능과 인맥을 이용한 교육을 아주 그것도 잘 받았다.

 

 

어릴때는 유럽 여행을 하다가 아버지 친구가 있는 프랑스에서 2년을 살며 프랑스어를 배웠고, 이후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의 권유로 라틴어와 그리스어 공부를 하게된다.

이때 학교교장에게 직접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니 쇼펜하우어는 부모님 찬스를 아주 잘 쓰며 자란셈이다.

그렇지만 찬스를 잘 썼다고 쇼펜하우어 전반적인 인생은 순조롭고 또 화려하게 살았던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부모님 찬스와는 별도로 당대에 손꼽는 천재중의 한명임은 분명한 것같다.

30세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세상에 내놓았고, 일찍이 당대의 최고 문학가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색채론 연구에 동참하라고 권유를 했다고 한다.

또 훗날 베를린 대학에서 강사를 하며 정반합 변증법으로 유명한 당시 철학계의 거두 이자 이성 철학의 최고봉인 헤겔보다 자신이 한수 위라고 생각 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서 자부심이 대단한 양반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종종 말하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들중 쇼펜하우어도 그들중에 한명이었던것 같다.

당시의 명성은 헤겔에 비해 인지도가 거의 없었다고 하니...

늘 철학계의 비주류로 치부 되었지만 말년이 되서야 자신이 30세때 내었던 책들을 쉽게 대중적으로 다시 써내자 많은 사람들이 알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년에서야 비로서 주목을 받게 되고 사후엔 톨스토이, 바그너, 니체에 이르기까지 쇼펜하우어의 천재성에 탄복하게 된다.

 

 

이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삶이 불쾌한가> 에는 쇼펜하우어가 정의한 '천재' 에 관한 고찰이 나온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직관한 이념을 예술 작품에 구현해 놓는 사람이 천재라 정의 한다.

또한 천재는 천재가 아닌 사람들도 직관을 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천재는 자신의 천재성을 눈앞으로 내보여 준다는 것이다.

대상이 문학이든, 미술 작품이든 혹은 음악이든 또 몸으로 하는 운동이든간에 그걸 사람들 앞에 내놓으면 일반 사람들은 천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천재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통찰해서 전달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천재가 느끼는것을 그대로 느끼게끔 해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재는 항상 통찰을 해야 하는 시간을 허비하느라 일반 세속적인 삶을 잘 영위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쇼펜하우어 본인이 천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바보 같은 면이 있다고 하질 않던가?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천재라기 보다는 뭔가 항상 불쾌함에 찌든 괴짜 철학자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라고 소개하는 사진을 보면 앞머리는 대머리이고 양옆의 부슬부슬 흰머리는 어릴때 로봇 만화영화을 보면 악당의 편에서 일하는 박사 같은 이미지.

염세주의자로 세간에 알려진 철학자라 나에게는 어쩌면 이번생에 그냥 영원히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철학자중의 한사람이였다.

최근 들어서야 이 사람 철학이 단순히 염세주의 철학이 아니란것을 알게 되었다.

이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삶이 불쾌한가> 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이해 하기 좋은 책이다..

지은이 박은미님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입문자들이 쉽게 들어올수 있도록 구성을 잘 한것 같다. (그래 맞다. 달리 EBS 이겠나?)

책의 앞부분은 쇼펜하우어의 전반적인 사상과 철학에 대해 비교적 쉽게 설명되어 있고 뒷 부분의 원래 책을 보는데 참고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철학의 이정표' 란 제목으로 친절히 소개하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는 세계의 본질이며 이것은 이성으로 어떻게 해 볼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며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또한 의지는 고통을 유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

뭔가 비슷 하지 않는가?

 

 

불교의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일체가 다 고통이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라는 소리를 듣는게 다 이것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불교가 허무주의 종교라는 오해를 듣는것 처럼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염세주의라는것 또한 잘못 이해된 면이 많다고 생각되는 지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에 종속되지 말고 의지를 극복하는것으로 '동고(同苦)' 를 설파한다. 동고란 남의 고통을 남 아픔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도 불교의 자타불이(自他) , 나와 남은 둘이 아니다. 라는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즉 나와 남을 둘로 나눌때, 나와 상대를 분별할 때 그것은 의지의 작용으로 고통을 유발하지만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동고일 경우, 본래 하나라는 인식을 한다면 의지로 부터 자유로와 진다는 것이다.

 

즉 불교에서 뜻하는 보살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이는 이책의 지은이 박은미님도 이와 같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 의 상태와 불교에서의 '반야바라밀' 의 경지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척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 그동안 세간에 오해 되어져 왔던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 철학자라는 오명을 씻을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특히 이책에서 동고(同苦)라는 개념을 접했을때 '토리노의 말' 로 유명한 일화를 남긴 니체(1844~1900)가 떠올랐다.

1889년, 니체가 죽기 10년전에, 니체가 토리노 라는 광장을 지나다가 채찍으로 주인에게 얻어 맞는 말을 보게 되었다.

주인의 모진 채찍질에도 꿈쩍도 안하는 말을 보고서 니체는 온몸으로 말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말이 채찍으로 맞는것이 마치 니체 자신이 맞는것 처럼 느꼈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니체가 당신 정신병을 앓아서 그랬다느니 택도 없는 소리라 무시할 수도 있지만.

니체는 젊은 시절에 쇼펜하우어 추종자중의 한사람 이었다.

지금은 니체가 쇼펜하우어보다 훨씬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현대 철학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 하지만 당시의 니체의 정신적 스승들 중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지대했으리라 짐작된다.

 

내가 볼때 어쩌면 진정한 쇼펜하우어 철학의 완성자는 니체가 아닐까 싶다.

망치 철학자 니체에게 망치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스승.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헌책방에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만났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가 직접 만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크나큰 영감을 받고 자신의 철학을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는 셈이다.

니체는 본래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단지 고전문헌학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바로 교수로 임용된것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철학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쇼펜하우어의 책 때문이다.

니체가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현대 철학에서 니체는 없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니체의 영역은 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 종교, 문학,예술에 이르기 까지 니체의 철학은 세계를 뒤덥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 '청색은 남색에서 나왔지만 남색보다 더 푸르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 두사람의 인연도 참 아름답지 않는가?

같은 시대에 접접은 있었지만 둘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인연.

 

니체를 오늘날 니체로 만들어준 인물.

그게 바로 쇼펜하우어가 아니었나 싶다.

 

 

쇼펜하우어는 그때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평가나 인정을 받지 못한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더욱 쇼펜하우어에게 빠지게 되는것 같다.  

 

우울할 땐 쇼펜하우어를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벽에 붙은 서가에서
나는 쇼펜하우어를 꺼내본다
그는 이세상살이를 일컬어 ‘슬픔으로 가득찬 감옥‘이라 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 해도 나는 아무것도 잃은것이 없다.
감옥의 고독 속에서
그 옛날 달리보처럼 행복하게
나 나의 영혼의 현을 깨우니까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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