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철학과 서양불교 대원불교 학술총서 10
패트릭 어셔 지음, 이재석 옮김 / 운주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제목: 스토아철학과 서양불교( 두가지 철학적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

패트릭 어셔 지음, 이재석 옮김

 

선어록에 "달마서래의(達磨西來意)" 라는 구절이 있다.

원래는 "하시조사서래의(何是祖師西來意)" 로 전해지는데 조주선사(778~897 )에게 어느 학인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물은것이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건너온 이후 중국에서는 그전까지 형식에 치우쳤던 불교와 자생 도교와의 융합으로 선불교(禪佛敎)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 선불교는 다시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붓다가 인도에서 탄생하여 일으킨 불교는 약 2500년 동안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중국, 우리나라, 일본순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만 전파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 불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상황을 일컬어 역사학자 토인비는 20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은 불교가 서양으로 전파가 된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님' 은 불교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도 했다.

이제는 명상이라 하면 오히려 '참선(參禪), 좌선(坐禪)'이란 전통적인 불교수행 명칭을 쓰기 보다 명상법이라 하여 서구적 이미지로 다시 역으로 전해져 오는 시기가 된 듯하다.

서양으로 건너간 불교는 이제는 서양인들에게 종교로서의 역할보다 삶에서 철학이나 사색을 하는 명상수행으로 보편화 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런의미에서 이책(스토아철학과 서양불교) 은 나에게 서양불교와 고대그리스 철학인 스토아철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는 계기가 되는 책인것 같다.

 

원래 이책은 고대 그리스 철학인 스토아철학과 현대 서양불교의 비교 연구를 다룬 논문인데 작가 '패트릭 어셔' 는 대중의 눈높이 맞추어 다시 단행본 책으로 편찬한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스토아철학을 깊이 연구하다 현대적 관점에서 대중적으로 스토아철학을 알리고 심리치료에 까지 적용하는 활동중에 불교를 접한것 같다.

그러면서 스토아철학과 서양에 전해진 불교에서 많은 공통점을 발견했고 서로 다른 이 두가지 철학을 상호 보완하며 삶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작가가 책에서 지금의 서양에서 적용되고 있는 스토아철학과 서양불교는 현시대에 맞추어 변용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작가는 이 두가지 철학 모두 현대의 재창조물이라는 견해로 출발한다.

그래서 고대시대의 철학 보다는 현대적 재창조된 이들 철학 사이에서 서로간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 재창조된 두 철학이 공유하는 핵심적인 본질을 작가는 스토아철학을 대표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마 5현제중 마지막 황제),에픽테토스(노예 출신 철학자), 세네카(폭군 네로의 스승) 를 통해 찾았고, 서양불교는 스티븐 배철러(송광사 구산스님 제자), 잭 콘필드(명상 지도자), 팃냑한 스님(서양불교 큰스님)을 통해 찾는 시도를 한다.

 

두 철학이 삶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공통점에 대해서 크게 마음챙김, 이타심, 본성을 구하는 것과 현대의 인지적 행동 치료에 이르는 부분까지 거론한다.

 

무엇보다도 이 두철학의 핵심적 본질은 모두 우리의  '마음' 을 중시한다는데 있다.

그중에서 실질적으로 마음을 수행하는 '마음챙김'에 주목한다.

마음챙김은 요즘 근래 들어 많이들 쓰는 용어인데 아마도 팃냑한 스님의 저서를 통해 새롭게 재창조된 용어이기도 한 것 같다.

원래 마음챙김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에서 '정념(正念)'을 일컫는다.

스토아철학에서 중시한 의식의 흐름을 '지금,여기' 에서 지켜보는 성찰이 불교에서 마음챙김과 같다고 본 것이다.

또한 세상에 대한 이타적인 관점에서 불교의 '자비' 와 스토아 철학이 중시한 '덕()'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나는 이부분에서 동양 철학의 대학(大學)에 나오는 명명덕(明明德: 덕을 밝게 비추는) 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좀더 공부해봐야 할 부분이 될 것같다.

 

철학이 우리의 삶속에서 적용이 되어야 하고 수행적인 가치를 두는면에서 두가지 철학이 상호 보완이 되야한다는 작가의 성찰에 깊이 공감이 된다.

 

다만 약간의 아쉬운점이 있다면 번역문제라고는 보지는 않는데 아마도 서양식 표현을 그대로 표현하다 보니 오히려 한글 해석에서 고개를 갸욱거리기한 부분이 있다.  

책에서는 팔정도에 대한 부분을 '바른 견해, 바른 의도, 바른 말,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  으로만 풀어서 썼다.

 

예전에 팔정도는 한자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 일반화된 용어 였었다.

오히려 한글 해석이 어색하것 같아 한자어(漢字語) 를 다시 찾아보게 됐다.

혹시 시대가 바뀜에 따라 한자적 표현도 점점 사라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서양인들 입장에서 어려운 한자(漢字)가 왜 필요한가?

부처님께서도 깨닫고 나신후 귀족들이 쓰는 '산스크리스트어' 대신 일반 평민들이 쓰는 속어인 '팔리어' 로 설법을 하셨다고 했다.

 

이런 불교의 유연성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면서 전파가 되는게 아닌가 싶다.

다만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선 정작 힌두교에 흡수된게 아이러니 하다.

그래서 1500년전 그걸 미리 내다본 달마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간게 아닌가?

이제는 다시 서쪽으로 갔으니 어쨓든 불교의 유연한 태도와 각기 다른 문화와 종교를 포용하는 면에서 서로 다른 종교간의 벽도 쉽게 허물게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철학(哲學) 이란 한자어는 일본의 학자 '나시 아마네(西周)' 가 만든 신조어 이다.

영어의 Philosophy (philo : 사랑하다 +sophy: 지혜를) 에 해당하는 마땅한 단어가 동양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 일본학자는 처음에 희철학(希哲學: 지혜로와지길 바라는 학문) 으로 지었으나 앞에 '희' 자를 떼어내어 오늘날 한중일은 '철학' 이라고 부른다.

어쨓든 한자가 편하게 느껴진다니.... 나도 점점 늙어간다는 뜻이리라.

늙어서 고지식한 사람이 되기 보단 지혜롭고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토아적 사고, 불교적 수행이 생활화가 되야 되겠지?

 

달마서래의에 대한 조주의 대답은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 였다.

즉 '뜰 앞의 잣나무' 란 뜻이다.

조주 선사는'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 을 왜 '뜰 앞의 잣나무' 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달마재서거의'(達磨再西去意)' 달마가 다시 서쪽으로 간 까닭은?

서양인들은 대답할 수 있을까?

조주선사의 대답은 아직도 이시대에 유효할까?

'지금, 여기!'

마음을 온 천지를 다녀보아도 자신보다 더 귀한 자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네. -붓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게 가장 최우선이며 가장 귀한 대상은 바로 자신의 존재 그리고 그 존재의 의식이다. -제논 - P102

이 도둑이나 간통자를 처형해야 하는가? 당신은 분명, 이렇게 물어서는 안된다. 대신에 이렇게 물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이 사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에 관한 어리석음에 빠진 이 사람.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앎에 눈이 먼 이사람을 사형에 처해야 하는가? 라고 말이다. - 에픽테토스 - P120

나를 나의 진짜 이름으로 불러주오.
내가 깨어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내 가슴의 문이
활짝 열린 채 있을 수 있도록
연민의 문이 열릴 수 있도록 -틱냑한 - P1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