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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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류' 는 어느 책에서 소설에 대해 이렇게 얘기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소설은 크게 4가지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두사람간의 사랑 이야기, 둘째, 세사람간의 사랑 이야기, 셋째, 권력투쟁 이야기, 넷째, 여행 이야기. "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여행이야기이다.

그런데 내가 볼땐 화자인 '나'가 '조르바'란 선지식(善知識)을 길위에서 만나 깨달음을 얻는 구도기(求道記) 라고 생각된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화자 '나' 는 작가 자신을 말한다.

작중에서 '나'는 작가이자, 사업가 이기도 하다. 동시에 마음속엔 붓다를 염원하고 머리속엔 그리스 민중을 위해 고뇌하는 지식인이기도 하다.

갈탄광 채굴 사업을 위해 크레타섬으로 가기전, '나'는 비 내리는 바닷가카페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운명처럼 만난다.

꺽다리65세 노인이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여느 청년들 보다도 강렬한 기운을 지닌 조르바.

카페에서 만난 자리에서 '나' 의 마음속으로 단숨에 들어와 버리는 조르바의 일침.

<왜요! 왜요!,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왜요?' 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됩니까?>

 

 

그렇게 주인공들의 크레타섬으로 향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마치 서유기에서 불법을 구하러 천축으로 향하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여정처럼 '나와 조르바' 의 구도기가 시작이 된다.

또한 이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53선지식을 찾아 도를 구하는 '선재동자'의 구도기와도 같은 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 여지없는 새로운 구도기로 읽히게 된다.

'나'는 서유기의 시점으로 보면 삼장의 역할을 맡은셈이고 화엄경의 시각으로 보면 선재동자가 된다. 또 다른 주인공 조르바는 서유기로 치면 '손오공'의 역할이지만 화엄경으로 치면 문수보살과 관세음 보살, 뱃사람, 창녀등 53 선지식의 역할을 하는셈이다.

 

 

소설에서 '나'는 30대 중반의 젊은 사장(두목) 이지만, 조르바는 60대 중반의 노인이며 '나'에게 고용된 직원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조르바는 현실의 갑을관계를 훌쩍 벗어나버린다.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이런문제에서 만큼은,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이봐요, 두목, 제발 좀 끼어들지 마시오. 내가 아무리 애써 놓아도 당신이 몽땅 무너뜨리고 말아요. 오늘 인부들에게 한 이야기, 그게 뭐요? 사회주의라고? 개코 같은 소리! 당신은 목자요? 자본주의요? 결단을 내리쇼! ">

 

'나'의 가슴은 끓어 오르지만 행동에는 서툰 지식인, 조르바는 학교근처엔 가본적도 없지만 누구보다도 자비롭고 걸림없는 사람이었다.

<"부끄러운줄 아세요. 두목, 그건 예의가 아니랍니다. 이런 말씀드려서 미안하지만 남자는 그러면 안돼요. 그 여자는 어쨓든 여자 아닌가요? 연약하고 토라지길 잘하는 물건이예요.">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눈을 띄워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자기들 비참한 처지밖에 더 봐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나'는 이성적으로 기독교와 붓다를 공존시키고 통섭하려 했지만 늘 답답했고, 조르바는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면서도 그에 묶여있지 않았다.

<"두목, 당신은 말이오....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먹는 걸로 신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는것 같소.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으니까 괴로워하는 거고, 까마귀에게 일어났던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두목,... 당신 책을 몽땅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은 바보가 아니고 착한사람이니까, 뭔가 괜찮은 사람이 될수 있지도 몰라요">

<"두목, 당신.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게 바로 삶이오!">

 

 

'나' 는 붓다를 추구하고 자유를 갈망했지만 조르바는 자유 그 자체 였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라는 신비는 ?">

<"춤으로 이야기하다니 그게 어디 될법이나 한일인가. 내 맹세코 말하거니와 신과 악마는 이런식으로 이야기 했을겁니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줄 보다 좀 길거예요. 그것 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조르바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았고, 또한 구속하지도 않고 오롯히 '조르바'로만 일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두목, 나 지금 농담하고 있는게 아니외다. 나는 하느님이 꼭 나 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단지 나보다 좀 더 크고, 좀더 힘이 세고, 좀 더 돌았겠지요. 그리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있겠네... 중략...

아시겠지만 하느님은 굉장한 임금이십니다. 굉장한 임금이란게 뭡니까? 용서해 버리는 거지요!">

 

 

소설에서는 '나'와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서 벌이는 메탄광 채굴 사업은 표면적인 사건이다.

그 안에는 크레타 섬에서 만나 조르바와 사랑에 빠진 퇴물 카바레 가수 오르탕스 부인, 팜 파탈의 마성을 지닌 과부여인과 '나' 와의 썸, 겉으론 고고한 금욕주의자 집단의 온갖 추잡한 실태를 보여주는 수도원의 내막, 그리고 크레타 섬사람들의 이해가 되는 민낯이 그려져 있다.

게다가 중간중간 '나'의 죽마고우인 친구 이야기까지 모두가 톱니바뀌 처럼 맞추어져 돌아간다.

모든 소설엔 클라이막스가 있듯이 결국엔 이 모든 사건과 갈등으로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절정으로 향해간다.

과부여인의 충격적인 죽음, 오르탕스의 죽음, 수도승의 죽음등 죽음의 3종 세트로 읽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당겼다가 마지막에 피날레를 장식하는 매탄광 사업의 폭망!

모든게 철저히 실패한 상황에서 그자리를 피해 도망간 크레타섬 사람들만 제외하고 오직 주인공들만 해탈한 모습을 보여준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야호! 이리오쇼!", "조르바, 시작해봐요! 내 인생이 바뀌었어요! 자, 한번 달려 봅시다!">

비극적인 절정에서 돌연히 유쾌한 결말로 화()버린다.

부처를 가슴에 안고 번뇌했던 '나'는 없어지고 결국 조르바와 같은 무애자재(自在)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후 둘은 각자의 삶을 찾아 크레타섬을 떠나게 된다.

 

 

소설에서 조르바는 마치 우리 구한말의 파격적인 선승(禪僧) 경허대사가 연상이 된다.

조르바는 자신이 연약하다고 여기는 여자나 과부들과 숫한 사랑에 빠졌지만 오히려 색정(色情)의 집착을 벗어난 무애행의 경지를 보여준다.

오로지 대상을 대할때 자신을 잊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보인것이다.

소설에서는 시종일관 자유를 언급하며 표현했지만 결국 조르바의 자유는 어느것에도 메이지 않는 무애자재(無碍自在)를 표현 한게 아니겠는가?

만약 조르바가 여자의 몸이였다면 화엄경의 53선지식중 하나인 탐욕의 굴레를 벗어난 '바수밀다 여인(창녀 선지식)' 이 아니였을까?

경허대사 또한 자신은 전생에 기생이었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조르바를 통해 모든 선지식이 도달했던 보살행, 고정됨이 없는 경지를 드러낸것이다.

 

 

선가(禪家)에는 <불립문자, 이심전심(不立文字,以心傳心) 문자에 메이지 않고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한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인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處皆眞) 가는곳 마다 주인이되고, 서는곳 마다 진리가 된다.> 구절이 있다.

소설은 자유인 조르바를 통해 서양식으로 선가에서 전해지는 선지식의 면모를 곳곳에 그려낸것이라 생각 되어진다.

 

 

소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이며 일생을 배가본드(VAGABOND: 방랑자)로 살았다.

길위에서 평생을 돌아다니다가 죽어서도 아테네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문 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후에 유해만 <그리스인 조르바>의 무대인 크레타섬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즉, 소설 속의 '나'는 작가자신 <니코스 카잔차키스> 였던것이다. 실제 자신이 겪은일을 그대로 소설로 끄집어 낸 자전적 소설인 셈이다. 그러니 조르바 또한 실존 인물이었다.

카잔차키스가 존경했다던 4명의 인물, 일리아드 오딧세이의 저자 호메로스, 프랑스 생()의 철학자 베르그 송, 니힐리즘의 니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인 조르바. 

카잔차키스의 생에서 4명의 인물을 변증법적인 구조로 차례차례 만나게 되는것 같다.

그리스 태생인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문명을 누구 보다도 이해했을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무대.

그 신들과 일리아드 오딧세이의 모험을 통해 어린시절 부터 신화의 신들과 서양의 기독교 세계의 유일신을 비교 했을것이라 짐작된다.

카잔차키스는 태어날때 부터 계시로 인해 자신은 주교가 되리라고 생각하며 커왔다고 한다.

그러한 원인으로 수도원에서도 잠시 있었지만 당시 수도승들의 편협된 금욕주의수행에 실망하고 오히려 붓다를 깊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불교 사이에 통섭을 자연스레 시도하지 않았나 싶다.

이후 알게된 생의 철학자 베르그 송의 엘랑비탈(ELAN VITAL) :(생명의 약동)을 통해 그의 철학이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과 다르지 않음을 느꼈지 않았나 한다.

더 나아가 니체를 통해 알게된 위버맨쉬(UBERMENSCH): (초인)로 인해 허무적인 니힐리즘이 아닌 더욱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생의 의지를 굳건히 다졌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 조르바를 통해 지금까지의 동.서양의 모든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체화(體化)할수 있는 인물을 현실에서 만난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이처럼 작가 자신이 소설속의 '나'로 현실에서도 그대로 똑같이 투영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결국 카잔차키스에 대해 좀더 깊게 이해할려면 일리아드 오딧세이나 엘랑비탈, 니힐리즘을 이해하면 좋을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사상과 철학을 잠시 접어두고 선불교를 알고있다면 오히려 곧 바로 카잔차키스의 마음을 엿볼수도 있을듯하다.

베르그송이 주장한 '창조적 진화'나 니체가 주장한 '신은 죽었다'는 개념은 모두 '활발발한 자신의 본성(本性)을 자각하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라' 는 메세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건 불교의 불성(佛性)과 다르지 않은것이다.

즉 소설속의 주제 '자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굴레를 벗어난 자유를 말한다.

서양의 이분법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속에 갇혀버리지 말고 동양이 추구했던 만물의 조화와 자기 완성을 말하고자 했던것이 아니였는가 싶다.

그것이 곧 자유요, 깨달음이란것.

너와 나의 분별이 없고, 세상 모든것은 변화하며 진리는 고정되지 않았다고 하는것.

그럼으로 걸림없는 대자유인이 되자는 메세지를 보여주는것이 아닐까?

그래서 길에서 와서 길로 가는것, '길없는 길의 경지' 를 보여준것이라 생각된다.

길(), 카잔차키스는 길위에서 도를 구한것이었다.

곧 자신의 삶이 바로 구도기 였던것이다.

우리도 역시 각자의 길에서 구도기를 쓰는셈이지 않을까?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 키스 묘비에 새겨진 글귀.

 

<"한동안 나는,조르바의 추억을 모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주저했다. 애들 같은 공포가 나를 사로 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 일을 한다면 조르바가 정말로 죽음의 위기에 빠진게 되어 버리고 만다....나는 이틀, 사흘 , 일주일을 버티었다..... 갑자기 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려 나는 종이를 집어들고.... 나는 미친듯이 써내려갔다... 몇주일 만에 조르바의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갓 나온 아기를 안은 여자 같은 기분이었다... 술라는 편지한장을 내밀고 달아났다...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원고를 무릎위에 올리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정확한 그 순간에 이 편지를 받으리라는것을 알고 있었다.">

<"이게 그분의 유언입니다.... 고인은 자주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자기 사후에는 산투르를 선생님께 드리어 정표를 삼겠다는 분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시면 손님으로 그날 밤을 쉬시고 아침에 떠나실때는 산투르를 가지고 가시라는 겁니다.">

 

 

조르바는 20살때 결혼비용을 모두 털어 '산투르'(기타 악기 일종)를  샀다.

그리고는 터키인 스승을 찾아 1년을 배웠다.

산투르를 배운후 그때 부터 조르바는 딴사람이 되었다.

조르바에게 산투르는 곧 자신이고 자신이 곧 산투르였다.

조르바는 자신을 '나'에게 다시 준것이다. 아니 나는 다시 조르바와 함께 있게 된것이다.

 

지금 나의 조르바는 내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대여 , 그대의 조르바는 그대 안에 있는가?

 

그는 남자나, 꽃핀나무, 냉수 한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의문을 갖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 - P77

나도 사람입니다. 당연히 아프지요. 하지만 이게 자꾸 거치적거리며 신경을 돋우었어요. 그래서 잘라 버렸지요.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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