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 독일 제국의 탄생과 세계대전의 서막
레이철 크라스틸 지음, 이진모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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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클라크 교수의 <몽유병자들>이 풍운의 발칸을 비롯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기까지의 복잡한 유럽의 정세를 서사적으로 묘사한다면, 마가릿 맥밀런 교수의 <파리1919>는 이른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파리강화회담 6개월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에너지 충만했던 유럽 열강들은 4년의 지독한 싸움이 지나간 후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것은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파괴력의 결과였고 무모한 전쟁을 강행한 정치인들, 그리고 기술의 발전을 무시한 채 구태의연한 전술을 고집했던 늙고 고루한 장군들의 합작품이었다. 그 댓가는 기성세대의 아집 속에서 전장으로 내몰려야 했던 젊은 병사들이 치러야 했다. 한 세대가 사실상 파멸했다.

프랑스 만화가 자크 타르디의 그래픽 노블인 <그것은 참호전이었다>의 한 장면. "정신은 물질을 능가할 수 있다"라는 캐캐묵은 신념을 고집하는 책상물림 장군들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나온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화력 앞에서 고기다짐이 되거나 아니면 미쳐버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자기 반성 대신 살육의 모든 책임은 패배자들의 몫으로 돌려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증오심 넘치는 쪽은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의 철천지원수였던 프랑스였다. 선봉에 선 사람이 프랑스 전시 총리였던 조르주 클레망소와 연합국 총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 원수였다. 이들은 독일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고 외쳤다.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의 목소리는 같은 연합국들조차 공감을 얻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이 보기에 물론 가장 큰 잘못은 독일에 있지만 프랑스 또한 이 전쟁의 원죄가 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두 나라의 싸움에 애꿎은 다른 나라들까지 함께 피본 격이었다. 파리강화회담은 관용과 징벌 사이에서 절충되었고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패배자인 독일은 싸움에는 졌지만 프랑스에게 진 것은 아니라며 기세등등한 반면, 승자인 프랑스는 독일의 부활을 두려워하며 겁에 질렸다. SF 소설가 조지 웰스가 거창하게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불과 20년 뒤 더 큰 전쟁으로 이어졌다. 5천만명이 죽거나 다친 인류 최악의 살육전조차 부족했다는 얘기이다.

왜 프랑스와 독일은 그토록 피터지게 싸워야 했던 것일까.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문제였고 프랑스와 독일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정작 제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가장 먼저 터진 쪽은 프랑스-독일 국경이었다. 동맹의 의무라기에는 양측은 유별나리만큼 악에 바쳐 있었다. 대화와 협상은 불가능했다. 어느 한쪽이 나가떨어져야 비로소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이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40년 전 보불전쟁의 연장이었고 그 때의 리벤지전이었다. 마가릿 맥밀런 여사의 또 다른 저서인 <평화를 끝낸 전쟁>를 보면 보불전쟁 이후에 두 나라가 중국 고사성어에 나오는 월나라 구천마냥 와신상담하면서 복수의 칼날만 갈았던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껄끄럽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희석되었고 1900년 파리 엑스포가 열렸을 때 독일은 보이콧하는 대신 많은 기업들이 참여했다. 의화단의 난이 폭발했을 때에는 공동출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언제까지고 지난 일에만 매달리기에는 유럽의 역학 구도는 너무 복잡했고 신경써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끝까지 과거의 응어리를 끊지 못한 채 결국 전쟁을 선택했다. 지난 세대가 남긴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벌이고 인류 전체가 파국에 직면한 뒤에야 비로소 화해를 선택했다. 거의 한 세기 만의 일이었다.

작년 말 인문 전쟁 분야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역덕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더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이다. 보불전쟁을 다룬 책으로는 국내 최초라고. 그러고보니 이 출판사에서 요근래 전쟁사 전문서적을 정말 많이 내는 느낌. 그렇다고 길 모 출판사처럼 밀리터리의 탈을 쓴 라노벨스러운 책이 아니라 하나같이 수준이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서평을 쓰게 되는 듯. 읽고보니 그쪽 출판사 작품이던.

저자 아주매인 레이첼 크라스틸(Rachel Chrastil). 미국 자비어 대학 역사학 교수로서 주로 근현대 프랑스 전쟁사를 다루는 모양. 마가릿 맥밀런 여사도 그렇고 사학과에 여학생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다들 졸업 후에 뭐하고 먹고 사나 싶은 우리와는 천양지차랄지.

이 책은 1870년 7월 15일에 시작한다. 프랑스와 독일 양국이 동원을 선언한 날이다. 나흘 뒤 선전포고와 함께 본격적으로 전쟁이 폭발한다. 바꾸어 말하여 그 앞에 있었던 엠스 전보 사건(Ems Dispatch)을 비롯하여 두 나라가 맞붙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빼놓고 있다. 프랑스인이라면 몰라도 한국인들처럼 보불전쟁이 뭔지 거의 접할 일 없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날부터 프랑스군이 아작나고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2제국의 선포, 파리 국민방위정부(파리 코뮌)의 붕괴, 그리고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체결까지 10개월의 시간을 담고 있다. 자부심 넘치는 프랑스인들로서는 치욕의 역사인 셈. 그래봐야 1940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전쟁이다! 프랑스와의 전쟁!" 1870년 7월 15일 스물 두 살의 뮌헨 출신 장교 디트리히 폰 라스베르크는 바이에른이 곧 프로이센과 연합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 군대와 싸울 것이라는 발표를 듣고 흥분에 빠졌다. 그의 동생 루돌프 역시 군대에 있었고 전쟁 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은 "그 기쁨을 함께 하지 않았다." 바이에른 병사가 프로이센에 맞서는 대신 두 나라가 연합해서 프랑스에 맞서 싸우는 것에 환호하는 모습은 전쟁이 통합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 p.24

많은 예비군은 소집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이미 군복무 의무를 마쳤다고 여겼던 그들은 점차 시무룩해졌으며 이동 중에 점점 더 무질서해졌다. 많은 병사들이 새로 개발된 샤스포 소총으로 정식 사격 훈련을 받지 못했기에 전투 현장에서 대충 배워야 했다. 프랑스군에서 7월 하반기에 실제로 자원 입대한 예비군은 겨우 4천여명에 불과했다. - p.71

프로이센 군대의 집중력은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했다. 프로이센 참모부의 철도 담당 부서는 50여개 노선을 운영했는데 일부는 민간, 일부는 공공, 일부는 민간-공공이 혼합된 방식이었다. 총참모부는 국가권력이 대단위로 작용하는 동원 기간 동안에 민간인의 철도 여행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평시에 집중 지역과 철도 시설을 둘려보고 특정 군단에 선로와 열차 시간표를 배정하는 둥 훈련을 시행했다. 또한 필요한 열차와 객차의 양, 화물 선적장의 위치, 각 노선의 방향, 그리고 각 열차에 수용할 군인과 말, 물자, 수송차량 등의 수를 결정했다. - p.90

8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아무런 대전략적인 지침도 없이 프로사르의 조언에 따라 라인 팔츠의 르브뤼켄 마을을 공격했다. 바젠의 제3군단과 프로사르의 제2군단 소속 6개 사단은 마을을 쉽게 점령했다. 프로이센군 사상자가 83명이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사망자 11명을 포함해 86명이었다. 나폴레옹 3세와 그의 황태자는 말을 타고 제2군단을 순시했는데 병든 황제에게는 고문과 같은 고통을 주었다. - p.105

1914년과 마찬가지로 보불전쟁은 두 나라 모두에게 준비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보다는 프로이센이 좀 더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프로이센은 1864년과 1866년에 두번의 큰 싸움을 치렀고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80여년 뒤 사방에 실속없는 싸움을 걸다가 폭망한 무솔리니와 달리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무의미하게 날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한층 일취월장했다. 1870년의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 대육군에 1:1로 도전할 자격을 가진 유일한 나라였다. 반면, 1850년대에 제정 러시아군을 상대로 지루하고 실망스러운 싸움을 벌였던 프랑스군은 그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에 안주했다. 변화와 개혁은 없었다. 두 나라의 마음 가짐도 달랐다. 프랑스라는 강적에게 도전하는 프로이센인들로서는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라면, 프랑스인들은 분수 모르는 튜튼족을 참교육한 다음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랄까. 무엇보다도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그는 덜 야심적이고 더 무능했으며 신이 삼촌에게 내린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 게다가 62살의 고령으로서 몸은 노쇠하고 병이 들면서 만사가 귀찮다는 식이었다. 기운 넘치는 옆동네 애송이와 타이틀전을 벌이느니 자기 궁전을 지키는 쪽이 나았겠지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도리어 족쇄가 된 꼴이었다. 그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프뢰슈밀레르에서 마크마옹은 휘하 제1군단과 제7군단의 각 1개 사단, 그리고 비치에서 오는 파이 장군의 제5군단을 보유했다. 후자는 긴 행군 끝에 8월 5일에 느린 속도로 도착했으며 무방비 상태로 국경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프랑스군 사령부 내의 혼란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여기저기로 이동 행군해야 했던 프랑스 군인들을 녹초로 만들었다. 비록 이동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비와 햇빛이 번갈아가면서 그들의 진을 빼놓았다. 제7군단 대부분은 독일군이 검은 숲 지대에 모여 벨포르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오판하여 더욱 남쪽에 집결했다. - p.121

8월 6일에 벌어진 두 전투는 프랑스에게 비극이었다. 프랑스군은 잘 싸웠고 잘 방어했으며 끈질기게 반격했다. 샤스포 소총은 약속했던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프뢰슈빌레르에서는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열세했고 스피셰렌에서는 독일군의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대포는 프랑스군을 그들의 진지에서 쫓아냈으며 그들이 전투 초기에 반격을 시도할 때 화력을 소진하도록 유도했다. 퍼커션 퓨즐르 사용한 독일군의 포탄은 물체에 충돌하면서 폭발했으며 포병들은 포탄이 표적을 정확하게 타격하도록 훈련받았다. 대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 p.129

그날 저녁 바젠은 독일군이 왼쪽에서 위협 공격을 해올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16일 아침 5시 15분에 바젠은 라드미로 장군의 전황 평가에 동의했다. 즉 프랑스군은 퇴로가 완전히 막혀 있어 차라리 이동을 연기해야 프로이센의 공격에 더 잘 대응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가 마침내 메스를 떠나 샬롱으로 향했을 때 바젠의 군대는 그 자리에 기다렸다. -p.158

8월 18일 저녁 6시 프랑스군은 모든 지점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작센군이 측면 공격을 시작하여 7시 즈음까지 캉로베르의 제6군단을 생프리바로 밀어내자 프랑스군의 오른편에서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 7시 30분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왕실 근위대와 작센군의 돌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약 한 시간에 걸쳐 육탄전을 벌였지만 결국 프랑스군은 일부는 무질서하고 일부는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독일군은 마침내 생프리바를 점령했다. - p.193

나폴레옹 3세는 마침내 스당에 백기를 내걸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의원 한명을 보내려고 준비했지만 여기에는 발랑으로 행군 중이던 현 사령관 윔펜 장군의 서명이 필요했다. 르브룅이 그를 찾았을 때 윔펜은 발랑에서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부하들은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패배를 인정하고 침묵 속에서 말을 타고 요새로 돌아갔다. - p.252

유럽대륙의 일인자를 놓고 벌어진 결정전은 결코 명승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쉬지 않고 잽과 훅을 날리는 독일군의 공세 앞에서 프랑스군은 정신없이 난타당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유럽판 청일전쟁이었다. 물론 프랑스군은 청군처럼 오합지졸과는 거리가 멀었고 때때로 독일군에게 강력한 어퍼컷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병사들의 용기가 부족하거나 무기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의욕없는 황제와 무능한 장군들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의 최신 샤스포 소총은 한 세대 이전이었던 독일군의 드레이제 니들 소총보다 훨씬 뛰어났지만 정작 소총전에서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쪽은 프랑스군이었다. 특히 프랑스군이 완전히 압도당한 쪽은 독일군의 신형 C64 6파운드 강철 후장식 대포였다. 나폴레옹 3세가 포병 개혁을 등한시한 결과였다.

프랑스군의 M1858 라히테(La Hitte) 전장식 대포(왼쪽)과 독일군의 크루프 C64 후장식 대포(오른쪽). 1866년 보오전쟁 때만 해도 오스트리아군보다도 뒤떨어졌던 프로이센 포병은 4년 사이 환골탈태했다. "신은 가장 강한 포병을 가진 편에 선다"라고 했던 나폴레옹의 격언은 프랑스군 대신 독일군이 새겨들은 셈이었다. 프랑스군은 혁신적인 '프렌치 75'를 개발하여 1914년에 앙갚음한다.

8월 2일 프랑스군은 의기양양하게 독일 국경을 넘었지만 대번에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꼭 한달 뒤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항복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차라리 전쟁이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서로에게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랑스인들은 이런 어이없는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파리에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고 결사 항전을 외쳤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잔다르크와 같은 구세주도, 소련군을 상대로 '비스와의 기적'을 일으켰던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 원수와 같은 전쟁영웅도 없었다. 파리의 지도자들이 가진 것은 의욕이지 능력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아집은 국가를 구하기는 커녕 프랑스인들에게 더 큰 고통만 안겨다 준 꼴이 되었다.

스당에서 독일이 승리하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들도 이 경이로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른 정세 변화가 연달아 이어졌다. 나폴레옹의 제2제정은 몰락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새로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새로운 군대를 창설해 국가를 방어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정당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프랑스가 등장한 것이다. 독일군은 승리를 손에 넣었지만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그들은 파리를 포위했지만 루아르 남쪽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계속되자 더욱 절망에 빠진 군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더 많은 프랑스 마을과 촌락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군은 패배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p.268

하지만 국민방위정부는 파리를 프랑스의 모든 노력이 집중되는 구심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독일군을 당황하게 만들 요소를 잃었다. 전쟁 초기 단계를 특징지었던 요소, 즉 적이 어디에 집결해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진 것이었다.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했다는 사실, 그리고 프랑스 정규군이 수도 인근에서 벌어질 몇 차례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여 파리를 구출하려고 시도할 거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데 집중했다면 국민방위정부는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전략은 너무 늦게 추진되었다. 물론 파리의 포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 p.325

전투에 이어진 몇주에서 몇달 동안 150여명의 마을 주민이 사망했다. 열명 중 한 명 꼴이었다. 83세의 위다르 부인은 군인들에게 걷어차이고 집에서 끌려 나와서 며칠 후 결국 사망했다. 계단에 묶여 있던 아르불로-랑베르씨는 6일 동안 그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는 6주 후에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마을 인구는 1870년에 2048명이었지만 5년 뒤에는 1470명으로 줄었다. - p.454

1월 내내 포위된 도시들이 계속해서 함락되었다. 메지에르, 로크루아, 페론, 롱위. 오직 비치와 벨포르만이 계속 버텼다. 비치는 8월 초에 포위되었고 9월에 포격을 받아 부분적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벨포르는 70일에 걸친 포격으로 마을 주민 4천여명 중 300명이 죽거나 다친 뒤에 결국 굴복했다. - p.586

저자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엄청난 배상금을 강요했지만 그 대신 나폴레옹이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철저히 발라버린 다음 항복을 애걸하는 독일인들에게 요구했던 내용보다는 덜 가혹했다고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조약은 프랑스가 1807년 프로이센에 강요했던 틸지트 조약만큼 가혹하지는 않았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정치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의 규모를 제한하거나 프랑스 해군을 파괴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해외 영토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대국이었다. - p.630

과연 비스마르크가 틸지트 조약이나 나중의 베르사유 조약보다 더 관대했는지는 쉽게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또한 독일인들로서는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했으며 그 전에도 수없이 행패를 부렸다는 점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은 완전히 짓밟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의화단의 난에서 청나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번 다시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하게 싸울 의지를 철저히 꺾어놓기에는 부족했다. 물론 패배자의 징벌만이 아니라 자국의 평판도 신경써야 하는 이들로서는 더 가혹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패전의 충격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던 청나라와 달리 프랑스는 금방 회복했고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복수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실패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깊은 감정의 골이 파였다.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어도 결국 두 나라는 언제이건 맞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인 <로미오의 줄리엣>처럼 비극적인 계기로 양쪽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두 나라의 증오는 양차 대전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세계의 패권이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간 1958년 드골과 아데나워의 극적인 화해로 끝났다.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든다. 만약 승자가 프랑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나폴레옹 3세가 좀 더 잘하거나 몰트케가 좀 더 무능했다면 프랑스가 이길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만큼이나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을까. 알 수 없다. 그 대신 신흥 강국 독일의 등장은 보다 늦었을 것이고 유럽의 시간은 좀 더 느리게 흘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양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 또한 알 수 없다. 우리는 또 어떠했을까.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개방을 선택한 일본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자신들의 롤 모델로 프로이센을 선택했고 프로이센처럼 군대가 나라를 지배하자 침략전쟁에 나섰다. 결과는 패망이었다. 보불전쟁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의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를 수도 있고 어쩌면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란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며 사소한 사건으로도 흐름이 바뀌거나 어떤 노력으로도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불전쟁이 남긴 유산을 말한다. 그것은 유럽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기도 했다. 원시적인 기관총이 등장하고 소총과 대포는 한층 강력해졌다. 양측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대규모의 군대를 등원했으며 전투의 양상 또한 달라졌다. 비록 그 결말은 유럽의 종말이었지만 말이다. 70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당시 현장을 옮겨놓은 듯한 저자의 필력과 깊이 있는 서술은 훌륭한 읽을 거리이다. 올해 전쟁사로서는 첫 책으로 1주일 내내 퇴근 후 쉬지 않고 읽은 듯. 다른 역덕들에게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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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빈트.홍성광 지음 / 틈새책방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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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도쿄에 갔던 것이 기억난다. 그 전에도 일본은 몇 번 갔지만 도쿄는 처음이었다. 워낙 공사가 다망한데다 귀차니즘 덕분에 여행이 취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 눈에 비친 도쿄의 인상은 아시아의 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6년 전 방문했던 베이징이 끔찍할만큼 복잡한 인산인해에 시끌벅적하고 돈과 권력이 넘쳐나지만 밑바닥 시절의 티를 못 벗은 졸부의 도시라면 도쿄는 마치 30년 전 자신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추억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춘 듯한 늙은 여배우랄까. 그렇다고 유럽 도시들처럼 과거로 먹고 산다기에는 또 잿빛의 삭막한 느낌이다. 달리 말해서 도쿄는 현대적이지만 그 안에서 변화와 활력은 느껴지지 않는 도시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같아라던 버블 시대의 도쿄. IMF가 터졌을 때 조중동에서 한다는 소리가 서민들의 과소비 타령을 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과소비는 개뿔, 진짜로 돈지랄한 쪽은 바로 저 동네였다는. 소위 '사토리 세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신화시대 얘기일 듯.


지하철 표를 끊으려면 아직도 동전을 써야 하고 노선은 복잡한데다 국철과 사철이 뒤섞인 덕분에 환승이 너무 헤깔렸던 것이나, 로봇 서빙이나 키오스크는 고사하고 카드 결재도 안되어 아직도 현금을 써야 하는 식당들이 태반이더라는 2000년대의 우리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아날로그 지향적인 모습은 둘째치고, 도쿄를 다니는 내내 우리의 서울역이나 광화문처럼 확성기를 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먹사님도,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는 어르신들도, 살벌한 정치 구호가 적힌 현수막도 없었다. 아키하바라에서 메이드 코스프레 옷을 입고 알 수 없는 호객을 하는 아가씨들은 많이 본 듯. 사람들은 바쁘게 다니지만 영화 <매트릭스> 속 사람들처럼 루프를 도는 것마냥 반복되는 일상을 기계적으로 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요즘 옆동네 섬나라에서 유행한다는 '이세계행 트럭'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레파토리가 인기를 끄는 것은 그만큼 삶이 따분하고 재미없다는 얘기. 한때 미국의 아성조차 위협하던 일본이 어쩌다가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나라가 되었는지. 극동의 나우루가 된 듯한.


솔직히 몇년 산 것도 아니고 고작 며칠 보고 온 주제에 다 아는 양 젠체하는 것도 우습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기서 그기일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의 말마따나 도쿄의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은 아닐까. 오십줄인 내가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을 넘어서 아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급하게 달려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워낙 빨리 바뀌다보니 때로는 따라가는 것조차 힘겹다. 이게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일지도. 이만하면 잠시 한숨 돌린다고 큰 일 날리도 없을 것인데 여전히 부족하다며 더 달려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전 국민이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무한 질주의 경쟁이다. 흔히 말하는 '사교육 망국병'이라는 것도 그저 일부 학부모들의 비뚤어진 자식 사랑 탓이 아니라 남들이 죄다 달리는데 내 자식만 달리지 않으면 도태되어 설 자리조차 없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보니 잠깐을 참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불의를 보면 내 일인양 분노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내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드는 것도 우리의 또 다른 단면이다. 외국인들이 보면 세상에서 이토록 변화무쌍한 사람들이 다 있나 할지 모르겠다.

평소 <톡파원>이나 <걸어서 세계속으로>같은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여행 덕후라면 꼭 읽어볼만한 책이 나왔더라. 틈새책방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지극히 사적인 영국>이다. 시리즈인 모양인데 영국 말고도 러시아, 일본, 프랑스, 심지어 우리같은 일반인으로서는 평생 인연 없을 동네인 네팔도 있더라는. 저자는 피터 빈트. 생긴 걸 봐서는 백인 아닌 거 같은데(뭔가 피부 하얀 인도인같달지.)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는 한국인이라고. 직업군인이었던 부친이 한국에 유엔군으로 복무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주한 영국군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주둔하다가 1993년에 모두 철수했다. 영화 <배트맨>에서 집사 양반(마이클 케인)이 주한 영국군 출신. 무려 6.25 때 중공군과 싸웠던 전쟁영웅이기도.


어린 시절 영국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영어 강사를 한다는데 <벌거벗은 세계사>를 비롯하여 여러 방송에도 출연했다고 한다. 언변과 쇼맨십이 있는 모양. 덕분에 "세계사에서 뭔 일이 있으면 그 뒤에는 대충 영국이 있더라"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담서.


<지극히 사적>이라는 제목따나 이 책은 저자가 지극히 사적으로 얘기하는 영국 이야기이다. 평범한 소시민A인 피터 빈트가 영국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했던 영국 역사, 문화, 정치, 가치관, 정서, 일상, 부랄 친구넘들 농담 따먹기까지 온갖 시시콜콜한 것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 사는 얘기. 그래서 재미있다.

아마 영국에서만 살았다면 '영국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해보지 않았을 것같다. 나는 영국인보다는 잉글랜드인으로 살아왔고 '영국인'이 무엇인지 굳이 따져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영국이라는 나라를 소개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마다 영국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가 조금씩 다르고 궁금해하는 지점도 제각각이다. - p.19

영국은 교육에서 전쟁을 비중있게 다루는 반면, 식민지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최근 들어서야 식민지 역사를 다루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생기고 있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세대의 영국인들은 식민지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거의 알지 못한다. 이런 인식 때문에 외국인들은 불편하고 거부담이 들 것이다. - p.47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층이라고 해서 자신의 계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노동자 계층인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겉으로라도 그렇다. 내 힘과 능력으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딱히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상류층의 품격이나 매너는 관심 밖이다. 노동자 계층은 자신들의 매너를 지키면서 영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 p.108

어쩌면 영국인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항상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다. 자랑스러운 곳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으면 안심하고 만족한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그것을 확인한다. 영연방도 그렇고 축구팀도 그렇다. 나름 자랑할 역사이고 남들이 인정해준다. 그래서 더욱 전통과 역사를 지키는 것같다. - p.129

영국에서는 축구를 보면서도 남자답게 봐야 한다. 주변에 애들이 있든 말든 욕을 하고 상스러운 응원가를 부르고 상대 팀을 깔아뭉개야 한다. 같이 욕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다가 밖에 나가면 표지판을 부수거나 물건을 집에 가져오기도 한다. - p.150

영국 남자들은 많은 걸 할 줄 알아야 한다. 마당 위에 차고를 만들거나 마루를 깔거나 페인트 칠은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 하수구를 손보고 전기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걸 할 줄 알아야 진정한 '가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못해서 다른 사람을 부르면 또 놀림을 받는다. 내 친구 중 한명은 이런 걸 너무 잘해서 다른 집 아내들이 탐을 낼 정도였다. - p.185

한국에 와서 의아했던 것 중 하나는 비가 조금만 내려도 사람들이 우산을 챙기고 약속이나 행사를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그 정도 비는 우산 없이 그냥 다닌다. 날씨에 대해 가끔 불평은 해도 일상을 바꿀 정도는 아니다. 날씨는 그냥 날씨이다. 비 때문에 약속이 취소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 p.248

한국의 아파트는 창문도 이중 새시로 되어 있어서 손을 댈 수 없다. 너무 독특하게 바꾸면 나중에 집값이 떨어질 수도 있고 돈도 많이 드니 그냥 살아야 한다. 다락방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영국의 주택들은 보통 2층이 있고 지붕밑에는 다락방을 만들어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똑같이 생긴 집에서 살아야 한다. - p.289

영국에서는 소재에 제한이 없다. 정치인들은 물론 왕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장애인들도 유머의 소재가 된다. 모든 것이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다. 1984년부터 1996년까지 방영되었던 <닮은 꼴>이라는 정치 풍자 인형극이 좋은 예다. 왕실이나 정치인을 본뜬 우스꽝스러운 인형으로 조롱과 풍자, 패러디를 했는데 선이 없는 영국식 유머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 p.343

영국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은 즐겁지만 그 시간을 보내는 건 힘든 일이 될 때가 있다. 친한 사이일수록 서로 놀리는 게 만나서 하는 일이다. 서로 칭찬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다. 친구끼리는 서로 비하하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사르카즘이 추가된다. 비꼬고 빈정거리고 풍자하는 것이다. 절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는 데 웃어서도 안 된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 나를 비하하면 스스로를 더 비하해 준다. - p.347

한국 문화에 빠진 외국인들에 한국은 판타지 같은 나라이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K-컬처 팬들에게 한국은 완벽한 나라처럼 인식되는 것 같다. 일단 K-컬처는 포장이 완벽하다. 예쁘고 멋있는 모습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말도 통하지 않기에 한국은 이국적이면서 환상적인 나라로 비쳐진다. - p.384

바로 옆동네 섬나라 일본을 가리켜 '가깝고도 먼 나라'라면서 본능적으로 바깥세상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을 느끼는 우리로서는 지구 반대편 나라인 영국은 그야말로 멀고도 먼 이세계이다. 기껏해야 두 세기 전에 중국을 조졌던 아편전쟁이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또는 <킹스맨> 정도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정작 영국인인 저자는 <킹스맨>을 미국넘들이 멋대로 가공한 창작물일 뿐, 진짜 영국이 아니라고 단언하지만 말이다.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영국과 접점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구한말에 영국군이 러시아를 견제한다고 거문도를 잠시 점령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영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왔던 것 정도일까. 서로 다른 것이야 당연하지만 두 나라를 오가면서 살아본 저자의 얘기를 읽어보니 달라도 정말 많이 다른 것같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점에서는 우리가 영국보다 훨씬 편리하겠지만 그 대신 삶의 여유에서는 영국이 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서비스료가 워낙 비싼 탓에 차 수리부터 집안에서 어지간한 일은 스스로 고치는 것이 영국 가장의 기본이라고 하니 손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영국 가서 살 생각부터 접어야 할 듯하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요즘이야 워낙 풍요롭다보니 어릴 때부터 해외 여행은 기본이요, 어학연수, 유학 등으로 외국 물 먹을 기회가 많아지면서 환상이 별로 없겠지만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탈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가 있었다. 워낙 대한민국이 '헬'이다보니 적어도 바깥 세상은 여기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막연한 현실 도피랄까. 요즘 일본 젊은 세대들이 '이세계행 트럭'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봐야 사람 사는 동네가 죄다 그기서 그기이고 좋은 점이 있으면 불편함도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닐 것이다. 요근래 와서는 K-컬처 덕분에 도리어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그런 동경의 대상이라고 하니 이 또한 격세지감이다.

전 세계에 '달고나'라는 K-푸드를 알리는데 일조한 <오징어 게임> 세계 각지에서 달고나 만든다고 국자 태워먹고 마눌님한테 혼난 아재들 많을 듯.



읽다보니 밀덕으로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더라. 영국 해군과 공군은 '왕립(Royal)'인데 육군은 그냥 육군(British Army)이라고. 육군의 뿌리가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찰스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의회파 군대이기 때문. 자기네 손으로 왕 목아지를 잘랐으니 왕의 이름을 들먹일수야. 그럼에도 세계 최초의 기갑연대인 왕립 기갑연대라던가, 왕립 리버풀 연대처럼 '왕립'이 붙었으면 군주가 직접 편성에 관여하거나 충성을 맹세한 부대라는 것. 여태껏 전쟁사를 읽으면서 그냥 그런 갑다 했는데 이런 특수한 역사가 있었던 모양.

예전에 다산초당에서 나온 <30개 도시로 읽는 영국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주요 도시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영국이라는 나라를 알아가는 내용이라면, 이 책은 피터 빈트라는 사람을 통해서 알아가는 셈이다. 남 못지 않은 영국 사랑과 더불어 절반은 한국인이면서 한국에서도 오래 산 사람답게 왕실을 바라보는 영국인들의 시각이라던가 영국 음식도 사실은 맛있다는 둥 영국을 그저 인터넷 잡지식으로만 배우는 우리의 편견을 정면에서 깨뜨리고 영국에 품는 다양한 궁금증에도 대답한다. 물론 그가 영국인 전체를 대표할 수야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도 영국임에는 틀림없다. 오히려 같은 소시민으로서 훨씬 정답게 와닿는 느낌이다. 그러고보면 <지극히 사적인 한국>도 나올만하다. 물론 우리가 아니라 한국에 관심있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말이다. K-컬처로는 알 수 없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줄 기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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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쳐들어오면 어쩌지? -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의 모르는 타이완해협 군사 상식
왕리.선보양 지음, 최종헌 엮음 / 글항아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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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경주APEC에서 돈 많고 만만한 동맹국들 단단히 털어먹을 궁리로 왔다가 뜻밖의 신라 금관을 득템하고 입이 귀에 걸린 트황제.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일본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금단의 테크트리인 핵잠을 해금해주고 갔다.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자 오랜 숙원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핵잠은 핵무기는 아니지만 항모에 버금가는 바다의 전략무기다보니 당장 주변국들이 발칵 뒤집어졌다는.

핵잠을 가진 나라는 5대 상임이사국 외에 자기 동네에서 짱 먹는 인도 정도이다. 북한이야 인간의 상식으로 가늠 불가한 우주적 존재이므로 논외이고. 전임 수령님이 신통력으로 솔방울을 총알로 바꾸었다는데 통나무로 핵잠을 못 만들겠음? 김씨 왕조는 뮤던트인가.


물론 정치적 파장이 큰 핵잠의 특성상 첫 관문을 겨우 통과했을 뿐, 김치국부터 마시기에는 너무 이른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기분 한번 맞추어주었다고 한들 그 변덕스러운 영감이 언제 꼬장을 부릴 지 모르는데다, 실제로 보기까지 앞으로 숱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어쨌든 우리 사회의 유별난 핵 로망은 둘째치고라도 1990년대만 해도 동북아에서 최약체 해군으로 배수량 150톤의 돌고래급 잠수정이나 굴리다가 1200톤급의 독일제 209 잠수함을 도입하여 처음으로 잠수함다운 잠수함을 가지게 된 것이 불과 30년 전이다. 주변국들로서는 실로 괄목상대이자 격세지감이라고 할 듯. 그런데 그런 게 탐탁잖은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전 정의당 의원이자 정욱식씨와 더불어 국내 대표적인 반핵 평화 전문가를 자처하는 김종대씨가 지난 10월 31일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 따르면 "핵잠은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무기"라고 말한다.

실로 단세포적인 발상이다. 이 양반의 뇌내 시계는 아직도 30년 전에서 멈추어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지구 변방의 존재감 없는 나라가 아닐 뿐더러, 우즈벡이나 부탄, 몽골과 달리 우리 생명줄은 전적으로 바다를 통한 해외 수출에 달려 있다. 더욱이 트럼프 복귀 이후 서 태평양에서 미중일 갈등이 나날이 고조되는 주변 상황은 강대국들끼리 해결할 몫이지 우리같은 약소국이 주제넘게 끼어들 수 있냐면서 타조마냥 머리를 땅에 처박고 현실도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양반의 불만은 비싼 세금으로 핵잠 따위를 만들어봐야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첨병 노릇만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다른 동네로 이사가지 않는 한 좋건 싫건 여기에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며 그동안의 우리가 미국의 수혜를 공짜로 누린 게 아닌 것처럼 미국 역시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려면 그만한 댓가를 내놓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핵잠 개발에 도전하는 것은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거래할 나름의 카드를 가지기 위함이지 단순히 돈지랄이나 무슨 절대 병기이기 때문이 아니다. 핵잠 한 척이 전쟁의 판세를 바꾸지는 못해도 그게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말이다. 평소에 반미 자주국방을 부르짖는 좌파라면 오히려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발이라며 앞장서서 반기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초 치는 소리를 하는가 싶다.

과거에 우리 사회에서 밀리터리란 그 분야에 종사하는 소수 전문가들의 전유물일 뿐,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휴전국가로서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오랜 군부 독재로 사회 구석구석에 그 잔재가 남아 있으며 대다수 남성들이 의무 복무로 군대를 체험하는 나라치고는 독특한 현상이랄까. 오히려 너무 잘 알기에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원래 인간이란 미지의 세계에 호기심을 품는 법이고 '덕후 중의 덕후는 양덕'이라는 말마따나 군대 안 가는 놈들이 군인 흉내와 군복 코스프레에는 더 열심이다.

손수 만든 군복과 소총으로 나폴레옹 전쟁 시절의 전열보병을 재현하는 양덕들. 이 정도 퀄리티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듯. 그보다 휴일날에 하라는 집안일 안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이러고 노는데 가만히 내버려두는 마눌님들이 더 대단한지도. 이미 포기했나.


그런데 요 근래에 와서 분위기가 꽤 달라졌다. PC통신과 인터넷의 보급 덕분에 누구나 원하는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른바 '밀덕'이라고 관련 학위와 경력이 없는 일반인이면서 직업적인 사람들보다도 더 박식한 아마추어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유튜브에서는 전쟁사를 다룬 컨텐츠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TV 프로그램에서 저명한 밀덕이 게스트나 고정멤버로 출연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본다. 네이버 카페에는 어떤 주제를 놓고 매번 밀덕들끼리 피터지는 논쟁이 벌어지기 일쑤이다. 전쟁사는 더 이상 썩은 고인물이 아니다. 과거의 일방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각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한다. 모두가 전문가인 시대가 된 셈이지만, 한편으로는 검증되지 않은 얘기가 인터넷을 통해 함부로 난무하고 대중은 사실 여부보다 자극적인 소리에 더 쉽게 빠져든다는 점이다. 여기에 정치권이나 언론, 소위 전문가들까지 가세하여 여론을 자기네 입맛대로 조종하려 든다.

당장 북한에 대해서도 온갖 '썰'이 난무한다. 대개는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섞어서 북한의 군사력을 터무니없이 과장하는 식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절에도 구식이었던 북한의 AN-2 복엽기는 어느 순간 스텔스기로 둔갑하여 남한 여기저기에 특수부대를 침투시켜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느니, 휴전선에 늘어선 북한의 장사정포는 서울을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느니, 언제는 북한의 압도적인 머리수를 그토록 강조하더니 핵무기가 등장한 뒤에는 우리가 아무리 재래식 전력에서 우세해도 핵 한방이면 무용지물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왜곡된 정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겁주고 대중의 관심을 끌 수는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근거가 빈약할 뿐더러, 그래서 어쩌라는건가 싶다. 혹자는 상대를 과장해야 우리가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이라고 어쩌구하겠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북한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과 패배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엄연한 이적 행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가장 큰 이유가 독일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었다. '지피지기이면 백전불퇴'라는 손자병법의 유명한 격언마냥 중요한 것은 과소평가도, 과대평가도 아니라 적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응책도 나온다. 그럼에도 군이나 학계 전문가들이 나서서 안보에 하등 도움 안 되는 헛소리들을 바로잡고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보다 입을 다무는 게 현실이다. 그쪽이 자기들한테는 더 이득이라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밀덕이라면 아주 흥미롭게 읽을 책이 나왔다. <중국이 쳐들어오면 어쩌지?>라는 뭔가 아동틱한 느낌의 이 책은 오늘날 타이완인들에게 가장 큰 위협인 중국의 타이완 침공을 다루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안절부절하는 제목과는 정반대로 중국 위협론이 타이완인들의 막연한 걱정마냥 그리 겁낼 일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한마디로 타이완은 강하다는 것. 저자는 왕리라는 블로거. 찾아보니 원래는 이과를 전공한 과학 교사인데 전쟁사가 좋아서 이쪽 분야에 뛰어든 밀덕인 모양. '왕리의 제2차 세계대전 연구소(王立第二戰研所)'라는 블로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쟁사를 연재하는 중. 그 바닥 밀덕계에서는 나름 유명인사라고. 이 책 또한 타이완 군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은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그런데 왕리라는 이름으로는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오고 정작 타이완쪽 신문에는 선보양 타이베이 법대 교수(沈伯洋, 오른쪽)와 민진당의 MZ 정치인인 린빙유(林秉宥, 왼쪽)라는 사람이 공동저자라고 나온다. 왕리는 필명이고 린빙유가 본명인가. 그런 것도 아닌듯.


전체 GDP가 대한민국 국방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북한을 상대로도 '필패' 타령하는 사람들이 있는 판국에 하물며 체급 자체가 차원이 다른 중국이 타이완을 친다면 미국의 개입 없이는 시작하자마자 게임 끝이라는 게 열이면 열 공통된 대답일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념이 막연한 공포심이며 중국의 선전매체들과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타이완인들에게 패배주의를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낸 근거없는 환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럼으로서 중국은 싸우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은 타이완인들을 손쉽게 굴복시켜 양안을 통일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무력 사용에 앞서 일종의 비대칭 전략으로서 선전선동과 반간계로 적을 분열시키고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오랜 수법이기도 하다. 요즘은 그것을 <초한전(超限戰)>이라고 부르면서 중국의 새로운 미래전인양 포장한다고. 저자는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이런 출처 불분명의 루머들을 자신의 풍부한 밀덕 지식을 근거로 예리하게 반박한다. 상당수는 타이완이 아니라 우리로 바꾸어도 그대로 통용될 정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 개념은 대부분 자신과 친구들의 군 복무 경험에 근거하며, 불합리한 훈련과 낡고 고장이 잦은 장비 등에 대한 기억에 쏠려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국군은 원래부터 엉망이다.'라는 명제는 경험에서 나온 사실이고 이것은 되돌리기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징병제 군대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해보면 실전 경험이 없는 군대는 일반적으로 타이완 군대와 마찬가지로 엉망임을 알 수 있다. 인민해방군의 일반 부대도 똑같이 엉망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 p.23

모든 루머가 거짓으로만 꾸며진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얼버무리거나 과장된 주장과 왜곡된 거짓으로 진실을 감추기도 한다. 거짓 속에 약간의 진실을 섞어 '3할의 사실과 7할의 허구'로 구성된 주장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 '3할의 사실'과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일치한다는 느끼는 순간 나머지 '7할의 허구' 역시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군사 지식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그 진위를 제대로 가려내지 못하고 쉽게 현혹될 수 밖에 없다. - p.33



현재의 교육제도는 그럴듯한 수치나 분석에는 쉽게 설득되면서 상식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은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군사 교육은 더 그렇다. 학교의 교관들은 현역 시절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지만 다른 병과나 군종에 대해서는 일반인 수준에 머물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대부분 문외한이다. 현대 무기는 기술 수준을 매우 중요시한다. 타이완 군대 내에서도 국방대학 이공계 출신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 간부는 공업 기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그 기술 뒤에 숨은 의미에 대한 이해는 더 부족하다. - p.136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제1부의 '대표적인 타이완 침공 루머 파헤치기'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무적이요, 타이완군은 허당"이라는 그간의 상식 깨뜨리기랄까. 여기에는 중국이 수천발의 탄도 미사일만으로도 몇 시간 만에 타이완을 굴복시킬 수 있다거나, 1천대가 넘는 구식 전투기들을 드론이나 심지어 인간 미사일로 사용하여 타이완 방공망을 무력화한다거나(캐스퍼 와인버거 전 미국방장관이 쓴 <넥스트 워>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공수부대를 이용한 타이완 지도부의 참수 작전이라던가, 수천척의 어선으로 100만 대군을 일거에 타이완에 상륙시킨다거나, 민간 화물선으로 위장한 미사일 플랫폼으로 미 항모부대를 괴멸시킨다 등등 모두 대륙의 허장성세라는 것. 중궈의 허세는 중궈가 간파한다?

수천 발에 달하는 탄도미사일의 위협 앞에서도 타이완군이 패트리엇 미사일을 그와 비슷한 규모로 증강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비싸거나 구매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탄도 미사일이 생각만큼 압도적인 무기가 아니기 때문임을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군사 방어 체계이건 원가 대비 효율을 따지기 마련이다. 100억 타이완 달러를 투입해 위험을 50% 줄일 수 있다면 누구든 그 정도는 감수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을 고작 5% 줄이는데 그친다면 망설이게 될 것이고 줄어드는 위험이 0.5퍼센트에 불과하자면 그 막대한 금액을 기꺼이 쓰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p.54

J-6 전투기를 일회용 미사일로 개조하는 것은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J-6의 속도는 간신히 음속을 넘는 수준이며 일반적인 미사일이 마하 2~3의 속도를 내는 것과 견줄 때 J-6의 관통력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미사일은 탄두를 목저에 따라 설계할 수 있지만 J-6은 본체가 매우 취약해 탑재한 미사일은 타이완 상공에서 뿌리는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위력도 기대만큼 높지 않다. 또한 원격 조정을 통해 무인기로 공격하려면 서로 주고받는 신호의 양이 많아져 기지국 한곳으로 다수의 기체를 동시에 조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일대일 조종 방식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다수의 기체를 동시에 조종하려면 개별 통제를 포기하고 전체 기체에 개괄적인 명령만 내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타이완과 일정 범위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는 실전 테스트를 하지 못했으므로 인민 해방군의 무인기가 전시 상태의 전파 간섭 속에서 피해 없이 타이완까지 접근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 p.66

'모든 선박이 일제히 출동한다'라는 이른바 '만선제발(萬船齊發)' 시나리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루머 중 하나이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실행 불가능한데도 오랜 세월 대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엄청난 두력움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왜 이런 엉터리 루머가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앞서 언급했던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나리오 역시 전체 내용은 오류 투성이이고 실현 가능성이 없지만 일부 사실과 역사적 사례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p.92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의 창젠 순항미사일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한 기술 자료를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창젠 순항미사일이 얼마나 강한지 분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분명한 점은 미국의 토마호크보다 더 정밀하다고 주장하는 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라인에서 독자들에게 이야기했던 '중국 순항 미사일이 한번 휩쓸면 타이완 공군은 초토화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검증된 바가 없으며 기술 자료도 없이 문서상의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타이완의 원펑 미사일의 사거리는 1만 km에 달하여 베이징 구석구석을 타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중국의 주장만은 그렇게 쉽게 믿는 것인가. - p.139

2부와 3부는 1부의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했을때 좀 더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에 대한 것이다. 어쨌든 전쟁은 상대가 있는 법이며 중국이 아무리 남는 게 사람이라고 하지만 6.25 때마냥 인해전술이랍시고 무작정 병력을 갈아넣어 물고기 밥으로 만든다고 해서 현대전에서 이길 수는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어설픈 공격이 만의 하나라도 실패로 끝났다가는 타이완에게는 자신감과 독립의 명분을 주는 것이요, 중국 입장에서는 국제적 공적이 되는 것은 물론, 타이완 정복이 영원히 물건너 가는 셈이다. 당장 푸틴만 하더라도 우크라이나를 성급하게 건드렸다가 4년째 수렁에 빠져 있다. 중국에게 남의 얘기가 아닐 것이다.

중국에 있어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완벽한 승리란 타이완의 항복 선언이다. 그것이 전면적인 항복이든 형식적인 귀순이건 간에 어쨌든 타이완의 정치 지도자가 입법기관의 절차를 통해 항복을 공식 선언하는 것이다. 만약 타이완이 항복하지 않고 법적으로 완벽한 독립을 실현한다면 그 순간 중국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중국이 쓸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비정치적인 수단, 즉 군사적 침략이다. - p.168

탄도 미사일 무적론자들은 미사일이 한번 휩쓸고 가면 타이완군의 모든 방공 및 대함 무기가 사라진다고 믿는다. 이는 지나친 환상이며 현실을 벗어난 생각이다. 정부의 공식 수치만 봐도 타이완군이 보유한 위 무기들의 수량과 탄도미사일 1차 공격으로 어느 정도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 대략적인 범위는 예측 가능하다. 분명한 점은 타이완군의 무기가 전부 파괴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 p.202

수년 전 타이완에는 14곳의 상륙 가능한 해안이 있었으나 현재는 5~8곳만 남아 있다. 해안의 콘크리트 구조물 설치 문제 뿐만 아니라 해변 후방 도시 상황과 지상 진격 경로 등을 고려해서 정규적인 상륙전을 하려면 사전에 타이완의 방어망을 충분히 처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습의 위험이 너무 크다. 이는 중국이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수만 대군을 집결시키고 모든 해군력과 공군력 절반을 동원해 타이완을 공격한다고 해도 타이완군이 불시에 기습당할 가능성이 없음을 설명한다. 중국이 움직이는 순간 이미 타이완군은 전군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할 것이고 예비군도 소집 중이거나 일부는 소집이 끝난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인민 해방군이 기습이라는 방식으로 타이완군 전체를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236

타이완이 질 가능성은 오직 하나 뿐이다. 전쟁이 두려워 죽겠고 당장이라도 항복하고 싶은 사람들이 당장이라고 항복하고 싶어하는 총통을 뽑고 항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만 입법원을 구성해서 인민해방군이 상륙하는 걸 보자마자 울면서 항복할 때 뿐이다. 오죽 이런 상황이어야만 인민 해방군은 정말로 타이완을 공격하고 싶을 것이다. 타이완 내부의 사기가 높고 저항 의지가 강한 상황이라면 타이완을 무력 통일하겠다는 생각은 못할 것이다. - p.274

4부는 양안 갈등을 놓고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접근에 대한 것인데 아쉬운 것은 수천 km 떨어진 인도와 호주는 포함하면서 우리를 쏙 빼놓았다는 점. 우리가 타이완을 보는 것만큼이나 그들에게도 한국은 존재감이 없다는 것인지, 어차피 미국 하는 일에 영혼없이 따를테니 굳이 논할 가치도 없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군 출신이 아니라 블로거 작가다보니 전문적인 분야임에도 현학적인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고 요즘 MZ세대풍에 걸맞게 써놓은 게 꽤 재미있다. 또한 그동안 타이완 군에 대한 편견이 상당부분 바뀌었다랄까. 나도 여태껏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타이완을 봉쇄하여 숨통을 쥐어매고 그래도 순순히 말을 안 들으면 탄도 미사일을 무차별로 날려서 주요 도시와 전력 시설, 항구를 초토화하여 단숨에 끝장낼 것이며 소위 딸기 병사라고 조롱당하는 타이완군은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저자의 생각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근거가 빈약하거나 저자의 주관적인 억측도 있고 지나치게 단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분도 있다.

제1부 제8장에는 <컨테이너형 미사일 기습론>에 대해서 언급한다. 저자는 중국이 민간 대형 화물선을 위장하여 미사일을 잔뜩 실고 기습한다는 것은 얼핏보면 그럴싸한 아이디어이지만 한낱 테러무기일 뿐이며 전술적 가치가 거의 없다, 이런 발상은 구 소련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들도 했으며 심지어 그 중에는 타이완도 있었지만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실행에는 옮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중국이 바보가 아니고서 그런 짓을 하겠냐고 말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바로 엊그제 상하이에서 그런 위장함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떴더라.

상하이에 정박 중인 중국의 신형 미사일 컨테이너선 중다(中达) 79호. 분석에 따르면 대형 레이더와 다수의 미사일 발사대, 대형 드론을 탑재했으며 수많은 미사일을 일거에 발사하여 적 함대에 미사일 샤워를 쏟아붓는다고. 그런 뒤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겠지만.


분명 저자의 말도 일리가 있다. 군함이 아닌 화물선을 개조해서 미사일을 암만 주렁주렁 달아봐야 방어력이 취약하여 대함 미사일 한방이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삼척동자도 알 일인데 중국이라고 해서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어쨌든 저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그 이상의 효용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얘기이다. 가령 군함보다는 값싸게 먹힌다는 점을 이용해 1~2척이 아니라 수십척을 만들어 민간 선박들 사이에 위장한다면 타이완과 미 해군도 일일이 추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유사시 정규 군함들과 연계하여 기습 공격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비록 한번 써먹고 격파될 1회성 소모품이라고 해도 말이다.

지난 주말 입만 열면 노벨 평화상 타령을 하던 트럼프가 설마하는 세간의 예상을 깨뜨리고 베네수엘라를 기습 공격하여 마두로를 생포해 미국으로 끌고 갔다. 명분은 미국에 마약을 판 죄라고 하지만 진짜 속내는 중남미에 마수를 뻗히고 있던 중국을 겨냥했다는 게 중론. 한마디로 남미는 내 나와바리이니 건들 생각 말라는 것. 하지만 미국의 힘은 한계가 있으며 중남미에 집중하는 것에 반비례하여 유럽이나 태평양 등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중남미에서 물러나는 대신 서태평양과 동남아에서 한층 공세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가장 위험한 것이 우리와 타이완, 그리고 몽골이 될 수 있다. 소아병적 자기성애자인 트럼프 덕분에 우리네 세상은 냉전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전쟁의 문턱을 향하고 있는 느낌이다. 결국 살길은 각자도생이라는 얘기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진정한 적은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새삼스레 깨우치게 한다. 우리도 허구헌날 실현 가능성도 없는 핵무장론 타령이나 북한군 무적론(대표적으로 유용원씨의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따위의)같은 철지난 소리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책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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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1919 - 새로운 세계 질서를 향한 6개월
마거릿 맥밀런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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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솥밥 전우로 보이는 병사 둘이서 명령서 한장 들고 하루종일 최전선을 내달리며 겪는 모험을 다룬 영화 <1917>은 영국군에게는 지옥도였던 파스샹달 전투가 배경이라고 한다. 영화 자체는 어디까지나 이름없는 쫄다구의 시각에서 묘사되다보니 돌아가는 전황이나 왜 그런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 양측 군대 사정 따위의 복잡한 얘기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건 원래 높으신 분들만의 전유물이라.

<1917>에서 러닝타임 내내 정신없이 구르며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를 보내야 했던 주인공. 특히 영화 막판에 영국군의 돌격과 그 사이를 뚫고 끝까지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하지만 전쟁 전체로 본다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 뿐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이 20년 뒤에 벌어지는 2차 대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거의 마지막까지도 승부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연합군의 한축이었던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나가떨어지자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1918년 3월 21일 루덴도르프 공세에 나섰다. 총력을 기울인 독일군의 최후 공세는 연합군을 파멸직전까지 내몰았다. 쓸데없이 미국을 적으로 돌리는 삽질만 벌이지 않았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쪽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낸 연합군이었다.

연합군과 동맹군은 4년 동안 그야말로 서로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난타전을 벌였다. 루덴도르프 공세를 격퇴한 연합군이 100일 공세에 나서고 1918년 11월 11일 11시에 휴전조약이 체결되어 모든 총성이 멈추었을 때 승리의 영광 대신 상처와 독기만이 남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물며 전쟁의 트라우마로 가득했을 그 시절 사람들을 향해 관용과 용서라는 도덕 교과서같은 말을 떠들 수 있을까 싶다. 산업혁명으로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객기마냥 벌인 어리석은 싸움의 결과라고 해도 말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역사 시간에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이 독일인들의 분노를 자아내어 히틀러라는 악마를 탄생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고 배웠다. 물론 이 캐캐묵은 얘기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베르사유 조약이 관대하지는 않았어도 특별히 가혹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독일이 1871년에 프랑스에 강요한 것이나 1918년 2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러시아가 당했던 것에 비하면 독일인들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긴 쪽이 독일이었다면 관용은 고사하고 패배자들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을 참이었으니 말이다. 진짜 이유는 베르사유 조약이 아니라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큰 전쟁에서 철저히 박살난 뒤에야 터무니없는 자존심과 오기가 비로소 꺾일 수 있었다. 하긴 그 덕분에 우리는 독립을 얻었고 세상은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으니 모든 게 신이 짜놓은 판일지도.

202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연말, 내가 즐겨 보는 출판사 중 하나인 책과 함께에서 역덕이라면 올해의 피날레를 장식할 대작 도서가 나왔더라. 제1차 세계대전의 결산이었던 파리 강화회의를 파헤친 <파리1919>이다. 저자는 이 바닥에서 보기 드문 여류 전쟁사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마거릿 맥밀런 여사. 그러고보니 이 할머니 또 다른 저서인 <평화를 끝낸 전쟁>의 서평을 썼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던. 재작년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책이 출간된 바 있으니 국내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있을지도.

1943년생이라고 하니 벌써 82살인데 머리 염색과 사진빨인지 몰라도 정정하신 듯. 무려 외증조부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전시 총리였던 로이드 조지였다고. 정작 이 책에서는 로이드 조지를 우유부단한 인물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라.

지난 번에 읽은 <평화를 끝낸 전쟁>이 19세기 말부터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고 전쟁으로 돌입하기까지 유럽의 상황을 다루었다면 <파리 1919>는 그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리고 종전 협상을 위해 당사국들이 파리에서 한 자리에 모인 반년을 다룬 책이다. 언제 어디서건 열강들의 복잡한 셈법은 한결같지만 파리 강화 회의는 1953년 7월 27일의 휴전이나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러 사이에서 지리하게 벌어지는 협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단순히 전후 처리만이 아니라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시도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최대 최악의 싸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나폴레옹 전쟁과 달리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고 원치 않았음에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작된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은 두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 시절 사람들의 바램이었다.

파리 강화 회의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주요 연합국 이외에도 루마니아, 그리스, 세르비아처럼 승리에 나름 기여를 했다고 여기는 약소국들과 중립국들, 패전국의 해체로 독립을 얻어낸 신생국가들까지 32개국을 망라하는 거대한 국제 모임이었다. 그 밖에도 공식 초청은 받지 못했지만 이참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파리에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상하이 임시정부였다. 물론 열강들의 무관심과 일본의 방해로 회의석상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세상은 힘 없는 자들의 편이 아닌지라. 반면,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볼셰비키 혁명 탓에 이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협정문에 서명하는 각국 대표단. 이 때문에 '베르사유 강화 회의'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조약만 여기서 체결되었을 뿐, 회담 기간 내내 회의가 열린 장소는 파리 중심가의 오흑세에 있는 프랑스 외무부 건물이었다.


원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라지만, 파리 강화 회의는 사공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게다가 서로의 꿍꿍이도 제각각이었다. 세계 평화보다 제 나라 국익이 먼저였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어낼 속셈이었다. 30년 뒤에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은 사실상 미국이 주도했지만 1919년에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미국은 고립주의로 물러났고 영국은 독일을 혼내주는 일보다 프랑스가 너무 크지 않도록 견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정작 프랑스는 영국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며 이탈리아는 능력은 없는 주제에 한 몫 단단히 챙기겠다는 욕심만 넘쳐났다. 저 멀리 떨어진 일본은 유럽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고 적백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는 아예 참석도 못했다. 나머지는 숟가락 얹어볼 궁리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다 같이 절충할 방법을 찾아서 조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였을 것이다. 결국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언제나 그러하듯 강자들에 의한 밀실 야합과 뒷거래였다. 희생양은 약자들이었다.

빈의 중재자들이 그 시절 직면한 문제도 엄청나기는 했지만 파리 회의에 비하면 훨씬 단순했다. 단시 영국 외무장관 케슬레이 경은 14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빈으로 왔다. 1919년 영국 대표단은 거의 400명에 달했다. 그리고 1815년의 의제들은 차분하고 여유있게 해결되었다. 캐슬레이와 그의 동료들이 1919년 회의를 보았다면 대중의 철저한 감시에 놀랐을 것이다. 파리 강회회의에는 훨씬 많은 인원이 참가했다. 30여개국이 대표단을 보냈고 그 중 이탈리아, 벨기에, 루마니아, 세르비아는 1815년에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빈 회의는 노예무역을 비난하는 선언을 제외하고는 비유럽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파리 강화회의는 북극에서 남극까지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대륙 전체에 이르렀다. - p.27

처음에 영국과 미국은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흥분을 잘하는 프랑스인들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고 회의에 필요한 차분한 분위기를 제공하기에는 독일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컸다. 윌슨은 스위스가 거의 혁명 직전 상황이고 독일 스파이가 넘쳐난다는 경고를 듣기 전까지는 회의 장소로 제네바를 원했다. 클레망소는 파리에서 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로이드 조지는 나중에 말했다. "나는 피를 많이 흘린 수도에서 회의를 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와 하우스 모두 중립 지역이 더 낫다고 여겼지만 그 노인이 워낙 눈물을 흘리고 항의하다보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75


이 책은 자신의 이상주의를 반영한 14개조 원칙이 세상을 바꿀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비롯하여 각국 대표단들이 파리에 도착하고 첫 회의가 열리는 1919년 1월 18일부터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는 6월 28일까지 대략 반년에 걸친 시간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주요 열강들만이 아니라 여느 책에서는 기껏해야 한두줄 언급될 뿐인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중국, 그리스, 오스만 등 파리 강화 회의와 관련되었던 거의 모든 나라가 한 챕터씩 차지한다. 심지어 이승만도 등장한다. 딱 한번이지만. 분량만도 900여 페이지에 달할 정도. 저자의 방대한 연구와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셈.

클레망소가 생각하기에 로이드 조지는 위트는 있지만 기만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중동을 놓고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길고도 험악한 협상에서 클레망소는 로이드 조지가 양국 간 합의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두 사람 모두 급진주의자였고 무자비할 정도로 효율적이기는 했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클레망소는 지식인이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그렇지 않았다. 클레망소는 합리적이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직관적이었다. 클레망소는 18세기 신사의 취향과 가치를 갖추었지만 로이드조지는 전형적인 중류층이었다. - p.86

로이드 조지는 전임자인 솔즈베리나 훗날 후임자가 되는 처칠처럼 외교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지식에는 허점이 많았다. 1916년 로이드조치는 "슬로바키아인들이 누구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지리 지식도 얕았다. 1918년 그는 부하에게 뉴질랜드가 호주 동쪽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냐고 말하기도 했다. - p.101

강화회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며칠 전 약소국 가운데 벨기에와 세르비아만이 회담장에 초청될 것이라는 소문이 루마니아에 돌았다.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루마니아 총리 이온 브러티아누는 연합국 대사들을 불러 모아 "루마니아는 정의에 대한 권리를 가진 동맹국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거지처럼 대접받고 있다."라고 불평했다. - p.246

훨씬 후에 분명해진 연합국의 실책은 강화의 결과 독일인 대다수가 자국의 패배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라인란트를 제외하고 그들은 점령군을 보지 못했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1871년 파리에서 한 것처럼 베를린에서 승리의 행진을 하지 않았다. 1918년 독일군은 질서정연하게 고향으로 돌아갔고 군중은 그들의 행진에 환호를 보냈다. 베를린에서 새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어느 적도 여러분을 정복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그들을 맞이했다. - p.304

역사학자들은 그 부담이 독일인들이나 독일에 동정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았다는 결론으로 점점 더 기울고 있지만 전쟁 배상금 문제는 파리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베르사유 조약의 440개 조항 대부분은 오래 전에 잊혔지만 전쟁 배상금을 다룬 일부 조항은 징벌적이고 단견적이며 독소적인 조약의 증거라는 것이 표준적 시각이다. 새로운 바이마르 민주주의 체제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태어났고 나치당은 독일인들의 당연한 불만을 자극해 이익을 얻었다. 재앙과 같은 결과에 대한 책임은 1919년 중재자들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 p.343

보헤미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이 더 강력한 독일 경제에 흡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베네시는 수데텐란트의 설탕 공장, 유리 공장, 면방직 공장, 용광로, 양조장이 없으면 제코슬로바키아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변했다. 또한 체코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산과 언덕으로 이어진 옛 국경이 필요했다. - p.441

로버트 세실은 이탈리아 주재 영국 대사에게 이렇게 썼다. "이탈리아 외교정책의 탐욕은 사방으로 이탈리아를 심각한 어려움에 빠뜨리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정당한 권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소니노의 고집과 이탈리아의 과장된 주장으로 인해 이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우리 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 되었으며 그 고립을 완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 p.527

구웨이쥔은 산둥반도가 "중국 문명의 요람이고 공자와 맹자의 탄생지이며 중국인들에게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산둥반도가 외국의 통제에 들어가도록 허용한다면 "단검이 중국의 심장을 겨누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나다의 보든은 중국의 설명이 아주 뛰어났다고 말했고 랜싱은 구웨이진이 일본 대표단을 완전히 압도했다고 평가했다. 비공개를 전제로 한 클레망소의 따뜻한 축하는 그날 저녁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었다. 언변으로 본다면 중국이 분명한 승자였다. - p.612

사실 독일 외무부는 강화 협상을 준비하면서 군축과 라인란트의 비무장화 및 점령, 영토 손실, 적어도 600억 마르크의 배상금 등 대부분의 평화 조건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독일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1919년 4월 한 미국인 관찰자가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인들에게는 희망 외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미국인들이 뭔가 해줄 거라는 희망, 최종조건이 정전 협정처럼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에만 매달렸다. 독일인들은 잠재의식에서 자신들이 인식한 것보다 더 낙관적이었다." 그는 예상했다. "독일인들은 인쇄된 평화 조건을 보는 순간 강한 유감, 증오, 절박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 p.841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이 조약의 존재를 자신의 선전선동을 위한 천재일우의 재료로 사용했다. 그러나 독일이 과거 국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원하는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고 오스트리아와의 병합을 허용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을 것이다. 그는 독일국민이 확장할 공간과 유대인이건 볼셰비키건 적의 파괴를 요구했을 것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이런 것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p.879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였던 1815년 빈회의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천년이 넘도록 끝없는 전쟁의 반복이었던 유럽에서 처음으로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물론 크림 전쟁이나 보불전쟁, 발칸전쟁 등 크고 작은 싸움은 계속 되었지만 적어도 그 이전에 비하면 훨씬 안정적이었고 더 이상 자기들끼리 치고박기보다는 넘치는 힘으로 다른 세계를 정복하는 쪽을 선택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그다지 파괴적이지는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 세상이 한 세기 뒤보다 훨씬 단순했던 덕분이기도 했다. 모든 것은 나폴레옹 한 사람이 나빴던 탓으로 돌려졌고 다시는 그런 인간이 등장하지 않도록 세력균형과 현상 유지에 합의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인들이 또다시 유럽을 정복하겠다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기에는 너무 많은 힘을 써버린 뒤였다.

파리 강화회담에 참여한 사람들 또한 자신들이 평화의 시대를 다시 한번 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화는 커녕 불과 20년 뒤 인류는 더 큰 전쟁을 맞딱들여야 했다. 파리 강화회담의 주도자들이 빈 회의 참가자들보다 더 무능하거나 탐욕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지고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3대 연합국 지도자이자 파리 강회 회의를 이끈 윌슨, 클레망소, 로이드 조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해야 했다. 관용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승전국 국민들은 보복과 응징을 원했고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아직 싸울 수 있는데 윌슨의 거짓 약속에 넘어가 너무 쉽게 기권했다고 착각했다. 모처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어낸 약소국들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는 점에서 탐욕만큼은 열강들 못지 않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설령 메테르니히를 무덤에서 부활시켰어도 더 나을 수는 없었을 듯하다.

과연 파리 강화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었을까. 독일에 좀 더 관대했더라면 히틀러는 등장하지 않을까. 베르사유 조약의 문제점은 정말로 가혹해서가 아니라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데 있었다. 오히려 독일의 재기는 막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복수의 명분만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1919년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론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결말부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이 좀 더 잘 할 수도 있었겠지만 더 나쁠 수도 있었다." 그 말에 공감한다. 파리 강화 회담은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지만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았을 샌프란시스코 회담 역시 냉전을 막지는 못했다. 냉전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핵무기로 인한 공멸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몇 번이나 인류는 핵전쟁 문턱까지 갔고 그 위험은 푸틴이 불리할 때마다 핵공갈을 일삼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파리 강화 회담이 아니라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 깨닫지 못하는데다, 설사 불에 데이고 나서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까먹고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탓이 아닐까 싶다. 매일 퇴근 후 900여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차고도 넘치는 책이다. 올해의 독서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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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굶주림 - 우크라이나 대기근, 기획된 종말
앤 애플바움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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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여파 속에서 개막한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면서 막을 내린 지 불과 한 달여 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2022년 2월 24일 새벽 4시, 20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푸틴은 자신의 행위가 침략이 아니라 돈바스의 친러시아 주민들을 우크라이나의 위협에서 보호하기 위한 ‘특별군사작전’에 불과하다고 선언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개전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여 수많은 민간인의 피해를 초래했을뿐더러, 돈바스 주변에서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내는 것을 넘어서 수도인 키이우를 노렸다. 그의 진짜 속셈은 이참에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고 자신에게 충실히 복종하는 괴뢰정권을 세워서 러시아의 속국으로 삼는 데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사흘이면 백기들고 항복할 거라고 여겼던 푸틴의 안이한 생각과 달리, 우크라이나인들은 끝까지 버텨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망명을 거부하고 수도에 남아서 항전을 지휘한 덕분이었다. 특히 포화가 쏟아지는 수도 한복판에서 그가 SNS에 직접 올린 “나는 키이우에 남을 것입니다.”라는 영상은 전 세계에 깊은 감동을 남겼다. 그때까지 코미디언 출신의 아마추어 지도자로만 여겼던 젤렌스키를 온 세상이 다시 보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사기가 올라간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을 막아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2014년 크름 반도를 무기력하게 빼앗겼을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병참선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전쟁의 첫 번째 전환점이자 푸틴의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강 건너 불구경하던 미국과 서방은 그제야 우크라이나가 이길 수도 있다는 것에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개전 이틀 째인 2월 25일 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젤렌스키의 SNS 영상. 제 가족과 재산만 챙겨 해외로 달아난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나 아프간의 아슈라프 가니같은 쓰레기들과 달리, 그는 망명을 권유하는 미국을 향해 "내게 필요한 것은 피신차량이 아니라 무기입니다."라고 단칼에 거절했다. 이전의 부패하고 무능한 우크라이나 지도자라면 보여줄 수 없는 결단력이었다.


유엔이 러시아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전 세계가 공분하는 가운데, 여기에 앞장서야 할 서방의 일부 지식인들은 도리어 푸틴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두둔하고 나섰다. 물론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지만(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따지고 보면 우크라이나도 잘한 것은 없다는 둥, 전쟁 책임은 푸틴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돈바스의 친러 분리주의자들을 탄압한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포위할 요량으로 우크라이나를 무책임하게 선동했던 미국, 공공연히 나토 가입을 떠들어 푸틴을 자극했던 젤렌스키의 분별없는 행태가 더 크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은 물론이고 러시아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어떤 제제조차 실효성이 없다는 핑계로 발목잡기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와 그리 좋은 인연이 없는 국내에서도 함부로 푸틴에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군 장성 출신의 어느 정치인은 "우크라이나는 6.25 때 우리의 적이었는데 왜 도와야 하느냐"고 질타하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우리가 말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 정치하는 양반들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무지하며 여전히 구한말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냉전 시절 우크라이나가 구소련의 일부였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 뿐, 우크라이나가 어쩌다가 소련에 편입되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입장 바꾸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중국의 일방적인 선전만 듣고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카더라."라고 한다면 우리로서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이 지난 4번의 중동전쟁이나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두 나라가 지역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이 극심한 경제난과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의 불만을 외부로 돌릴 속셈에 의도적으로 영국을 도발했다가 여지없이 박살났던 포틀랜드 전쟁과도 다르고 인도-파키스탄의 영토 분쟁과도 다르다.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총을 쏘아서가 아니라 푸틴이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믿고 약자인 우크라이나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침략전쟁이다. 그런 점에서 1937년 일본의 군부 모험주의자들이 저지른 불장난에서 비롯된 중일전쟁과 1939년 스탈린의 핀란드 침공, 1940년 무솔리니의 충동적인 그리스 침공을 연상케 한다.

푸틴은 그동안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에 부득이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사실상 무장 해제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토가 러시아에 무슨 위협이 되었으며 유럽이 러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쏙 빼놓은 억지일 뿐이다. 그보다도 미국과 서방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쪽에 따질 일이지 만만한 우크라이나를 때리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평화를 깨뜨린 쪽은 서방이나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푸틴이지만 자신의 의심은 언제나 정당하며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합리적 의심을 들도록 만든 것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는 것이 그 양반 논리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푸틴은 우크라이나라는 나라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 왔다는 점이다. 원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였으며 1991년에 독립을 허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러시아의 품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전에 이혼한 옛 마누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마음을 돌리도록 애쓰기보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고 폭력을 서슴치 않는 러시아 남자 특유의 썩어빠진 마초 근성을 보여주는 게 푸틴이랄까. 정작 자신은 마누라를 몇번이나 갈아치웠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는 서방의 압제에서 해방할 동포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우크라이나의 자원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의 식민지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때부터 이어져 온 러시아인들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결같은 태도이다.

러시아군 철수 후 부차에서 발견된 시신 더미들. 부차만이 아니라 러시아군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 전쟁 범죄의 현장이었다. 푸틴으로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 의지를 철저히 짓밟고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멀고도 먼 나라이지만 우크라이나가 당하는 모습은 결단코 남의 집 불구경할 일이 아니다. 우리 이웃에는 푸틴 이상으로 탐욕스러운 독재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다. 실제로 시진핑은 예전에 트럼프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라고 발언하여 뒤늦게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트럼프 이후 제 잇속만 챙기는 행태로 미국과 동맹국들이 갈등을 빚는 가운데 중국이 그 빈틈을 노리고 있다. 오늘의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우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망국의 황제가 된 하일레 셀라시에가 국제연맹에서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이며 여러분의 내일이 될 것입니다.(It is us today. It will be you tomorrow.)"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간의 관심이 쏠리면서 시중에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이 나왔지만, 글항아리 출판사의 신작도서인 <붉은 굶주림>은 그 중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눈물'을 다룬 책이다. 어째서 우크라이나인들이 그토록 러시아에 이를 박박 갈면서 푸틴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하는지 이유가 담겨 있다랄까. 저자인 앤 애플바움은 미국 언론인이자 여류 역사학자로서 대표적인 반러 반푸틴 학자이기도. 특히 2000년 푸틴이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많은 서방 지식인들은 그가 비록 독재 성향은 있지만 친서방에 실용적이며 적어도 말은 통하는 상대일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착각인지 지적하여 논란을 일으켰다고.

이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저자인 앤 애플바움 교수.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에서는 기피인물이며 트럼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홀로도모르(Holodomor)'란 우크라이나어로 대기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책은 스탈린 시절인 1932년~33년 지구에서 가장 풍요로운 옥토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다루고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500만명이 아사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600만명이라고 하니 여기에 비견될만한 참사였다. 기근의 원인은 경신대기근처럼 소빙하기나 천재지변이 닥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엉터리 농업 정책이 초래한 결과였다. 이들은 니콜라이 2세의 가장 무능한 관료들조차 감히 하지 않을 국가적 자살이나 다름없는 정책을 인민들에게 강요했다. 심지어 농업 총책임자였던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는 식물들도 마르크스 이념에 따라 계급투쟁을 한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비료와 살충제를 쓰지 못하게 하여 농사를 완전히 망치는 데 일조했다.

기근은 소련 전역에서 벌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우크라이나였다. 남편이 아내를 잡아먹고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카니발리즘이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소위 강성대국의 꿈에 눈이 먼 스탈린은 외화 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식량까지 빼앗아 외국에 수출했다. 국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한 셈이었다. 그에게 인민은 구제가 아니라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경고를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인양 취급하면서 눈과 귀를 막고 고집스레 현실을 부정했던 스탈린은 체제 자체가 무너질 판국에 몰린 뒤에야 자신이 한 일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반성과 개혁이 아니라 한층 강력한 통제와 억압이었다. 나는 옳았지만 남들이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은 우주의 섭리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스탈린의 편협한 사고방식이었다. 게다가 불만 가득한 인민들의 분노를 억누르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나머지 더욱 편집광적인 공포와 광기에 사로잡혔다. 결과는 스탈린 치세 내내 광풍으로 불어닥칠 ‘대숙청(Great Purge)’이었다.

하르키우의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사자의 시신들. 피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할 요량으로 일부러 대기근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반면, 러시아 학자들은 소련 전체에서 광범위한 기근이 초래되었다는 점에서 스탈린이 의도했다기보다 잘못된 경제 정책의 결과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에서 최악의 대기근이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막대한 식량을 강제 공출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가 제정 러시아의 일부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언젠가 퀴리 부인 전기에서 나라 잃은 민족으로 말과 글을 쓸 수 없는 설움을 겪었고 옛 조국인 폴란드를 기리기 위해 자신이 발견한 원소에 '폴로늄'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일화를 읽었는데 그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갖은 구박에 시달렸던 것이 우크라이나. 원래 인간이란 내가 남에게 저지른 건 까먹어도 남한테 당한 건 두고두고 기억하는 법이라.

그런 우크라이나에게 가장 큰 실수는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었을 때 독립 국가를 세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잠시나마 그들 역사상 최초의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잠시 세웠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독일과 폴란드, 소련의 침략, 무엇보다도 독립의 의지가 아직은 부족했기에 4년 만에 멸망했다. 레닌은 제정 러시아의 유산, 특히 '러시아의 빵바구니'였던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나라는 둘로 쪼개져서 서부는 폴란드에, 동부는 소련에 흡수되었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민족들 역시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거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레닌의 약속만 믿고 독립을 포기했다. 이들이 볼셰비키의 거짓말에 속았음을 깨닫고 땅을 치고 후회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련 체제의 일원이 되는 것은 독립을 위해서 무수한 피를 흘리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악몽이었다.

짧은 존속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정부는 얼마나 외교적 성공(나중에는 대부분 잊힌)을 거두었다. 1918년 1월 20일 독립 선언을 한 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스물여덟살 난 외교장관 올렉산드르 슐힌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불가리아, 튀르키예, 심지어 소련을 포함한 모든 주요 유럽 국가들로부터 사실상 승인을 얻어냈다. 12월에는 미국이 외교관을 보내 키이우에 영사관을 열었다. - p.58

레닌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보낸 전문 내용은 이보다 더 노골적이기도 힘들었다. 그는 1918년 1월에 이렇게 썼다. "제발 부탁이오. 모든 힘과 혁명적 수단을 써서 곡문을 보내시오. 곡문을, 곡물을! 그러지 않으면 페트로그라드는 굶어 죽을 것이오." 3월 초 우크라이나를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에 빠르게 빼앗기자 모스크바는 분통을 터뜨렸다. 성난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과 고집스러운 농민 지지자들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달아난 우크라이나 볼세비키도 욕했다. - p.74


1919년 레닌에게 곡물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집단 농업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 공화국의 문제가 의제로 떠오를 때마다 그는 곡물 문제부터 꺼냈다. 우크라이나만 언급되면 레닌은 매번 얼마나 많은 곡물이 그곳에 있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나 가져올 수 있느냐, 또는 이미 가져온 게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 p.91

10년 뒤에도 그랬듯, 농민들은 개, 쥐, 벌레를 먹기 시작했다. 잎사귀와 풀을 끓여 먹었다. 식인 행위도 간혹 일어났다. 가까스로 사라토프에서 리가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던 일단의 피난민들은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낡은 쓰레기차들이 매일 돌아다니며 시체를 모았다. 사람들이 보통 쓰레기를 뒤지다가 쓰러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페스트에 걸린 시체들을 숱하게 봤다. 이런 사실은 소련 언론에 전혀 나오지 않았다. 관리들은 전염병이 돌고 있음을 대중에 알리지 않았다." - p.143

한때 러시아 전역을 전란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던 적백내전은 1920년에 오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다. 핀란드와 발트 3국, 폴란드 동부를 제외하고 제정 러시아 영토 대부분은 소련으로 계승되었다. 우크라이나도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내전의 끝은 안정의 시작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고난이 닥쳤다. 새로운 적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레닌의 '신경제 정책'이 자초한 결과였다. 차르 체제를 가리켜 무능하다고 비웃었지만 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이상주의를 앞세운 무모한 실험으로 소련 인민의 번영은 커녕 경제적 파국을 초래하고 나라 전체를 아사에 내몰았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이제부터였다. 레닌 사후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가장 광기어린 절대 권력자였다. 그가 진시황이나 네로, 이반 대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한 광기를 넘어서 자신만의 비뚤어진 신념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인민의 일거수 일투족은 물론, 필요하다면 우주의 진리까지 내 방식으로 바꾸겠다고 굳게 결심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손에는 조금도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잘 되면 내 덕분이요, 안되면 남탓으로 돌려서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는 비범한 재주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공포와 폭력으로 인간의 저항 의지를 어떻게 해야 굴복시킬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불만을 떠넘길 희생양을 교묘하게 만들어내어 죽는 순간까지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권력을 유지했다. 그 방법은 약자 중 한쪽을 '쿨라크(반동)'라고 규정하고 인민의 적으로 만들어 서로 싸움 붙이는 것이었다. 30년이나 이어진 스탈린 체제는 소련 인민 전체에게 악몽이었지만 그 중 가장 큰 피해자는 우크라이나였다. 특히 '대기근' 시절 이 비옥한 땅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수많은 증언과 폭로는 충격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1927년이 되자 체제는 다시 불안정해졌다. 그해 국가는 540만 톤의 곡물을 확보했다. 그러나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관료들에게 엄격하게 규정된 양의 빵을 나눠주던 식량 배급 기관은 곡물 770만 톤을 기대하고 있었다. 전 연방 조사에서 OGPU는 소련 전역의 식량 배급 줄에서 '폭도 진압과 고성을 지르는 싸움'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 p.187

코펠레프와 나디아,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람들은 불만에 찬 시간을 보내왔다. 볼셰비키는 인민에게 부와 행복, 토지 소유권, 권력을 선물하겠다느 대담한 약속을 했다. 그러나 혁명과 내전은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웠으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혁명 후 10년이 지나자 많은 사람이 실망했다. 그들에게는 볼셰비키 승리가 왜 공허한지에 관한 설명이 필요했다. 공산당은 그들에게 희생양을 제공해 왔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부추겼다. (중략) 어느 날 한 농부가 그에게 쿨라크를 너무 잔인하게 대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자 다비도프는 격렬하게 반박했다. "당신은 그들이 불쌍하군요. 동정심을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우릴 불쌍히 여긴 적이 있습니까? 적들이 우리 아이들의 눈물을 보고 운 적이 있나요? 부모가 죽은 뒤 남겨진 고아를 보고 운 적이 있단 말입니까?" - p.245

때로는 몰수가 신속하게 폭력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체르니히우 주에서는 지역 단체들이 한겨울에 한 농민 가족을 집에서 내쫓았다. 길에서 온 가족의 옷을 벗겼고 난방도 되지 않는 건물로 끌고 가서 그곳을 새집으로 정해줬다. 베레즈네후바테 현에서는 열두 살 소녀가 셔츠 한벌만 빼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옷이 벗겨진 채 어머니와 함께 거리로 내쫓긴 아기도 있었다. 한 활동가 단체는 10대 소녀의 속옷을 빼앗은 다음 알몸으로 길거리에 방치하기도 했다. - p.263

비밀경찰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의 시위가 집단화를 늦췄지만 국가는 대량 체포, 대량 추방, 대량 탄압으로 반격했다. 공산당은 일단 기다린 후 밀어붙였다. 스탈린이 '도취할 만한 성공' 기고문에서 사용한 온건한 말은 결국 말에 불과했음이 입증되었다. 동일한 정책이 계속 적용되었고 심지어 더 가혹해졌다. 1930년 7월 격렬한 3월 열병 시위가 일어난 지 불과 몇달 후 정치국은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1931년 9월까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주요 곡물 재배 지역의 가구 중 최대 70퍼센트를 집단 농장에 가입시키는 것이었다. 1930년 12월 정치국 위원들은 자신의 열의를 증명하기 위해 목표를 전체 가구의 80퍼센트로 상향 조정했다. - p.324

스탈린의 바람대로 교육적인 언론 캠페인이 이어졌다. 법령 발표 후 2주가 지나자 프라우다는 붉은 건설자 집단 농장의 밭에서 곡물을 훔친 쿨라크 여성 그리바노바 사건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는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우크라이나 언론은 오데사에서 절도죄로 총살당한 부부의 이야기를 포함한 세 건의 재판을 자세히 보도했다. 보도된 다른 사건 중에는 열 살짜리 딸이 주운 소량의 밀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총살당한 농민의 사건도 있었다. - p.364

여러 젊은 집단 농부, 마을 소비에트와 코펠레프 자신으로 구성된 팀들이 오두막, 헛간, 마당을 수색하고 저장한 씨앗을 모조리 빼앗고 소와 말, 돼지를 가져갔다. 그들은 성상, 겨울 외투, 카펫, 돈을 비롯한 귀중품은 무엇이든 가져갔다. 여성들은 집안의 가보를 붙잡고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지만 수색은 멈추지 않았다. 코펠레프 자신도 이 일이 매우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혐오스러운 선전을 끊임없이 반복하면 당면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p.451

일부 매장 팀은 무관심을 넘어 잔인한 수준에 도달했다. 우크라이나 여러 지역의 생존자들은 심하게 아픈 사람들이 생매장당했다고 반복해서 증언했다. "반쯤 살아 있는 사람을 묻기도 했습니다. '시체'들은 이렇게 외쳤어요. '선량하신 여러분, 절 내버려두세요. 전 죽지 않았습니다.' 대답은 이랬어요. '지옥에나 떨어져! 내일 또 오란 말이야?'" 또 다른 팀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데리고 갔는데 어차피 내일이면 다른 거리에 쓰러져 있을테니 지금 데리고 가서 '시체' 하나 당 더 많은 보수를 받아 음식을 챙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총을 쏘지도 않았습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밀어넣었죠." 심지어 가족들도 죽어가는 가족 구성원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 p.499

1932년부터 쿠반에 숨어 있는 젤렌키 주, 보후슬림스키 현 출신의 50세 쿨라크 여성이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옴. 그녀는 호로디센스카 역에서 코르순으로 가던 중 지나가던 열두 살 소년을 유인해 목을 그었음. 자익와 다른 신체 부위를 가방에 넣었음. 호리디세 마을에서 살던 시민 셰르스튜크가 하룻밤 재워줌. 그녀는 송아지 장기라고 속이고 노인에게 심장을 삶고 구워달라고 함. 노인의 온 가족이 그 심장을 먹었고 노인 자신도 먹었음. 밤이 되자 가방에 있는 고기 일부를 더 사용하려고 하던 노인이 잘게 잘린 신체 일부를 발견함. 범인들은 체포됨. - p.504

소비에트의 공식적인 세계에서 우크라이나 기근은 더 광범위한 소련 기근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신문에 나오지 않았고 대중 연설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와 지역 지도자 모두 기근을 언급하기는 커녕 앞으로도 언급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1921년에는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원조를 요청했다면 1933년의 대응은 소련 내외부 모두에서 심각한 식량 부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목표는 기근을 치우는 것, 기근을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 p.578

스탈린은 자신이 사실은 아주 무능한 인간이며 직접 관여했을 때 일이 잘되기보다 주로 망치는 쪽임을 인정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더 중요한 점은 그에게 감히 도전할 용기가 없었던 소련 인민들은 물론이고, 스탈린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서방 세계 또한 침묵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지배는 '지옥의 식민지'라면서 악명 높았으며 국제 사회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 특파원이었던 시어도어 화이트는 중국 허난성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폭로하여 장제스 정권을 궁지에 내몰기도 했지만 무능한 지도자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초래한 천재지변이었다. 정작 서방 기자들은 소련에서 평화로운 시절에 벌어진 대기근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했다.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 있게 폭로한 소수의 동료들을 비난하는데 앞장섰다. 서방 좌파 지식인들의 선별적인 분노와 이중 잣대가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서방 정부 역시 정치논리에 따라 소련의 치부를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이유로 방관했다. 이들은 엄연히 스탈린 체제의 공범자들이었다.

작가인 버나드 쇼는 1931년 하원의원 낸시 애스터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자신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현외에 참석했다. 연회는 그의 기호를 고려해 채식 요리로 전비했다. 쇼는 매우 들뜬 기분으로 소련 관료와 저명한 외국인 청중 앞에서 연설했다. 그는 주최측에 감사를 표하면서 자신을 반소련 유언비어 유포자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여행 중에 먹으려고 음식 통주림을 주었다고 청중에게 말했다. "친구들은 러시아가 굶주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련 국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폴란드에서 모든 음식을 창밖으로 던져버렸죠." 한 기자는 청중이 숨을 맺을 듯 조용해졌다고 회상했다. "영국산 소고기 통조림 하나면 모임에 참석한 노동자와 지식인 가족은 기억에 남을 휴일을 즐겼을 것이다." 적어도 일부 소련 지식인들은 이 거만한 외부인에게서 냉소적인 피로감을 느꼈다. - p.597

월터 듀린티의 씁쓸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게임을 특히 잘 수행한 사람드에게는 추가적인 보상이 제공되었다. 듀런티는 1922년부터 1936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뉴욕 타임스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역할 덕분에 한동안 상당한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정권에 매우 유용한 존재로 여겨졌고 모스크바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를 받았다. 그는 큰 아파트에서 살았고 장도차와 애인이 있었으며 어떤 특파원보다도 접근 권한이 높았고 모두가 탐내는 스탈린과의 인터뷰를 두번이나 할 수 있었다. 그가 소련에 아첨하는 보도를 한 주 동기는 그러한 보도를 통해 누릴 관심이었을 것이다. - p.601

1933년 말 새로운 루스벨트 행정부는 소련을 둘러싼 나쁜 소식을 무시해야 할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았다. 대통령 참모진은 독일이 발전하고 있고 일본을 봉쇄해야 할 필요도 있기에 이제는 미국이 모스크바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루스벨트는 중앙 계획 경제와 자신이 생각했던 소련의 엄청난 경제적 성공에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상업적으로도 유익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 p.617

제정 러시아 시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농노였다면 스탈린 시절에는 아예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아야 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일제 36년 동안 우리의 경험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무리 일제의 지배가 억압적이었다고 해도 적어도 수백만명이 굶어죽는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레닌의 말만 믿고 독립을 쉽사리 포기한 댓가를 뼈저리게 치른 셈이었다. 지금에 와서 제아무리 푸틴이 동포 운운하면서 서방 대신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오라"라고 회유한들, 우크라이나가 베알이 없지 않고서야 순순히 굴복할 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푸틴은 과거사를 인정하기는 커녕 시계바늘을 그 시절로 되돌릴 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홀로도모르는 단순히 스탈린 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괴물을 만들어낸 공산주의 체제의 산물이었다. 설령 스탈린이 없었어도 똑같은 일은 벌어졌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외치던 19세기의 독일은 산업혁명 속에서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피를 무한 흡입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썩어빠진 세상을 때려 부수고 싶은 마음이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알았지만 정작 자신의 모순은 깨닫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였다. 말로는 민주와 평등을 외치면서도 그 방법은 대화와 설득이 아니라 공포와 폭력이었다. 만약 그가 한 세기 뒤에 자신의 추종자들에 의해 벌어질 참사에 대해서 알았더라면 뭐라고 했을까. 나는 옳은데 무식한 놈들이 내 뜻을 함부로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이 저주받을 사상을 쓴 내 손목아지를 자르겠다고 했을까. 실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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