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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1919 - 새로운 세계 질서를 향한 6개월
마거릿 맥밀런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11월
평점 :
한솥밥 전우로 보이는 병사 둘이서 명령서 한장 들고 하루종일 최전선을 내달리며 겪는 모험을 다룬 영화 <1917>은 영국군에게는 지옥도였던 파스샹달 전투가 배경이라고 한다. 영화 자체는 어디까지나 이름없는 쫄다구의 시각에서 묘사되다보니 돌아가는 전황이나 왜 그런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 양측 군대 사정 따위의 복잡한 얘기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건 원래 높으신 분들만의 전유물이라.

<1917>에서 러닝타임 내내 정신없이 구르며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를 보내야 했던 주인공. 특히 영화 막판에 영국군의 돌격과 그 사이를 뚫고 끝까지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하지만 전쟁 전체로 본다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 뿐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이 20년 뒤에 벌어지는 2차 대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거의 마지막까지도 승부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연합군의 한축이었던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나가떨어지자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1918년 3월 21일 루덴도르프 공세에 나섰다. 총력을 기울인 독일군의 최후 공세는 연합군을 파멸직전까지 내몰았다. 쓸데없이 미국을 적으로 돌리는 삽질만 벌이지 않았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쪽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낸 연합군이었다.
연합군과 동맹군은 4년 동안 그야말로 서로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난타전을 벌였다. 루덴도르프 공세를 격퇴한 연합군이 100일 공세에 나서고 1918년 11월 11일 11시에 휴전조약이 체결되어 모든 총성이 멈추었을 때 승리의 영광 대신 상처와 독기만이 남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물며 전쟁의 트라우마로 가득했을 그 시절 사람들을 향해 관용과 용서라는 도덕 교과서같은 말을 떠들 수 있을까 싶다. 산업혁명으로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객기마냥 벌인 어리석은 싸움의 결과라고 해도 말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역사 시간에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이 독일인들의 분노를 자아내어 히틀러라는 악마를 탄생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고 배웠다. 물론 이 캐캐묵은 얘기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베르사유 조약이 관대하지는 않았어도 특별히 가혹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독일이 1871년에 프랑스에 강요한 것이나 1918년 2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러시아가 당했던 것에 비하면 독일인들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긴 쪽이 독일이었다면 관용은 고사하고 패배자들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을 참이었으니 말이다. 진짜 이유는 베르사유 조약이 아니라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큰 전쟁에서 철저히 박살난 뒤에야 터무니없는 자존심과 오기가 비로소 꺾일 수 있었다. 하긴 그 덕분에 우리는 독립을 얻었고 세상은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으니 모든 게 신이 짜놓은 판일지도.

202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연말, 내가 즐겨 보는 출판사 중 하나인 책과 함께에서 역덕이라면 올해의 피날레를 장식할 대작 도서가 나왔더라. 제1차 세계대전의 결산이었던 파리 강화회의를 파헤친 <파리1919>이다. 저자는 이 바닥에서 보기 드문 여류 전쟁사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마거릿 맥밀런 여사. 그러고보니 이 할머니 또 다른 저서인 <평화를 끝낸 전쟁>의 서평을 썼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던. 재작년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책이 출간된 바 있으니 국내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있을지도.

1943년생이라고 하니 벌써 82살인데 머리 염색과 사진빨인지 몰라도 정정하신 듯. 무려 외증조부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전시 총리였던 로이드 조지였다고. 정작 이 책에서는 로이드 조지를 우유부단한 인물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라.
지난 번에 읽은 <평화를 끝낸 전쟁>이 19세기 말부터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고 전쟁으로 돌입하기까지 유럽의 상황을 다루었다면 <파리 1919>는 그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리고 종전 협상을 위해 당사국들이 파리에서 한 자리에 모인 반년을 다룬 책이다. 언제 어디서건 열강들의 복잡한 셈법은 한결같지만 파리 강화 회의는 1953년 7월 27일의 휴전이나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러 사이에서 지리하게 벌어지는 협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단순히 전후 처리만이 아니라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시도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최대 최악의 싸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나폴레옹 전쟁과 달리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고 원치 않았음에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작된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은 두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 시절 사람들의 바램이었다.
파리 강화 회의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주요 연합국 이외에도 루마니아, 그리스, 세르비아처럼 승리에 나름 기여를 했다고 여기는 약소국들과 중립국들, 패전국의 해체로 독립을 얻어낸 신생국가들까지 32개국을 망라하는 거대한 국제 모임이었다. 그 밖에도 공식 초청은 받지 못했지만 이참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파리에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상하이 임시정부였다. 물론 열강들의 무관심과 일본의 방해로 회의석상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세상은 힘 없는 자들의 편이 아닌지라. 반면,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볼셰비키 혁명 탓에 이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협정문에 서명하는 각국 대표단. 이 때문에 '베르사유 강화 회의'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조약만 여기서 체결되었을 뿐, 회담 기간 내내 회의가 열린 장소는 파리 중심가의 오흑세에 있는 프랑스 외무부 건물이었다.
원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라지만, 파리 강화 회의는 사공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게다가 서로의 꿍꿍이도 제각각이었다. 세계 평화보다 제 나라 국익이 먼저였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어낼 속셈이었다. 30년 뒤에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은 사실상 미국이 주도했지만 1919년에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미국은 고립주의로 물러났고 영국은 독일을 혼내주는 일보다 프랑스가 너무 크지 않도록 견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정작 프랑스는 영국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며 이탈리아는 능력은 없는 주제에 한 몫 단단히 챙기겠다는 욕심만 넘쳐났다. 저 멀리 떨어진 일본은 유럽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고 적백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는 아예 참석도 못했다. 나머지는 숟가락 얹어볼 궁리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다 같이 절충할 방법을 찾아서 조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였을 것이다. 결국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언제나 그러하듯 강자들에 의한 밀실 야합과 뒷거래였다. 희생양은 약자들이었다.
빈의 중재자들이 그 시절 직면한 문제도 엄청나기는 했지만 파리 회의에 비하면 훨씬 단순했다. 단시 영국 외무장관 케슬레이 경은 14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빈으로 왔다. 1919년 영국 대표단은 거의 400명에 달했다. 그리고 1815년의 의제들은 차분하고 여유있게 해결되었다. 캐슬레이와 그의 동료들이 1919년 회의를 보았다면 대중의 철저한 감시에 놀랐을 것이다. 파리 강회회의에는 훨씬 많은 인원이 참가했다. 30여개국이 대표단을 보냈고 그 중 이탈리아, 벨기에, 루마니아, 세르비아는 1815년에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빈 회의는 노예무역을 비난하는 선언을 제외하고는 비유럽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파리 강화회의는 북극에서 남극까지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대륙 전체에 이르렀다. - p.27 |
처음에 영국과 미국은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흥분을 잘하는 프랑스인들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고 회의에 필요한 차분한 분위기를 제공하기에는 독일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컸다. 윌슨은 스위스가 거의 혁명 직전 상황이고 독일 스파이가 넘쳐난다는 경고를 듣기 전까지는 회의 장소로 제네바를 원했다. 클레망소는 파리에서 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로이드 조지는 나중에 말했다. "나는 피를 많이 흘린 수도에서 회의를 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와 하우스 모두 중립 지역이 더 낫다고 여겼지만 그 노인이 워낙 눈물을 흘리고 항의하다보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75 |
이 책은 자신의 이상주의를 반영한 14개조 원칙이 세상을 바꿀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비롯하여 각국 대표단들이 파리에 도착하고 첫 회의가 열리는 1919년 1월 18일부터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는 6월 28일까지 대략 반년에 걸친 시간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주요 열강들만이 아니라 여느 책에서는 기껏해야 한두줄 언급될 뿐인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중국, 그리스, 오스만 등 파리 강화 회의와 관련되었던 거의 모든 나라가 한 챕터씩 차지한다. 심지어 이승만도 등장한다. 딱 한번이지만. 분량만도 900여 페이지에 달할 정도. 저자의 방대한 연구와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셈.
클레망소가 생각하기에 로이드 조지는 위트는 있지만 기만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중동을 놓고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길고도 험악한 협상에서 클레망소는 로이드 조지가 양국 간 합의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두 사람 모두 급진주의자였고 무자비할 정도로 효율적이기는 했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클레망소는 지식인이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그렇지 않았다. 클레망소는 합리적이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직관적이었다. 클레망소는 18세기 신사의 취향과 가치를 갖추었지만 로이드조지는 전형적인 중류층이었다. - p.86 |
로이드 조지는 전임자인 솔즈베리나 훗날 후임자가 되는 처칠처럼 외교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지식에는 허점이 많았다. 1916년 로이드조치는 "슬로바키아인들이 누구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지리 지식도 얕았다. 1918년 그는 부하에게 뉴질랜드가 호주 동쪽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냐고 말하기도 했다. - p.101 |
강화회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며칠 전 약소국 가운데 벨기에와 세르비아만이 회담장에 초청될 것이라는 소문이 루마니아에 돌았다.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루마니아 총리 이온 브러티아누는 연합국 대사들을 불러 모아 "루마니아는 정의에 대한 권리를 가진 동맹국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거지처럼 대접받고 있다."라고 불평했다. - p.246 |
훨씬 후에 분명해진 연합국의 실책은 강화의 결과 독일인 대다수가 자국의 패배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라인란트를 제외하고 그들은 점령군을 보지 못했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1871년 파리에서 한 것처럼 베를린에서 승리의 행진을 하지 않았다. 1918년 독일군은 질서정연하게 고향으로 돌아갔고 군중은 그들의 행진에 환호를 보냈다. 베를린에서 새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어느 적도 여러분을 정복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그들을 맞이했다. - p.304 |
역사학자들은 그 부담이 독일인들이나 독일에 동정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았다는 결론으로 점점 더 기울고 있지만 전쟁 배상금 문제는 파리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베르사유 조약의 440개 조항 대부분은 오래 전에 잊혔지만 전쟁 배상금을 다룬 일부 조항은 징벌적이고 단견적이며 독소적인 조약의 증거라는 것이 표준적 시각이다. 새로운 바이마르 민주주의 체제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태어났고 나치당은 독일인들의 당연한 불만을 자극해 이익을 얻었다. 재앙과 같은 결과에 대한 책임은 1919년 중재자들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 p.343 |
보헤미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이 더 강력한 독일 경제에 흡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베네시는 수데텐란트의 설탕 공장, 유리 공장, 면방직 공장, 용광로, 양조장이 없으면 제코슬로바키아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변했다. 또한 체코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산과 언덕으로 이어진 옛 국경이 필요했다. - p.441 |
로버트 세실은 이탈리아 주재 영국 대사에게 이렇게 썼다. "이탈리아 외교정책의 탐욕은 사방으로 이탈리아를 심각한 어려움에 빠뜨리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정당한 권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소니노의 고집과 이탈리아의 과장된 주장으로 인해 이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우리 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 되었으며 그 고립을 완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 p.527 |
구웨이쥔은 산둥반도가 "중국 문명의 요람이고 공자와 맹자의 탄생지이며 중국인들에게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산둥반도가 외국의 통제에 들어가도록 허용한다면 "단검이 중국의 심장을 겨누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나다의 보든은 중국의 설명이 아주 뛰어났다고 말했고 랜싱은 구웨이진이 일본 대표단을 완전히 압도했다고 평가했다. 비공개를 전제로 한 클레망소의 따뜻한 축하는 그날 저녁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었다. 언변으로 본다면 중국이 분명한 승자였다. - p.612 |
사실 독일 외무부는 강화 협상을 준비하면서 군축과 라인란트의 비무장화 및 점령, 영토 손실, 적어도 600억 마르크의 배상금 등 대부분의 평화 조건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독일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1919년 4월 한 미국인 관찰자가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인들에게는 희망 외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미국인들이 뭔가 해줄 거라는 희망, 최종조건이 정전 협정처럼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에만 매달렸다. 독일인들은 잠재의식에서 자신들이 인식한 것보다 더 낙관적이었다." 그는 예상했다. "독일인들은 인쇄된 평화 조건을 보는 순간 강한 유감, 증오, 절박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 p.841 |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이 조약의 존재를 자신의 선전선동을 위한 천재일우의 재료로 사용했다. 그러나 독일이 과거 국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원하는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고 오스트리아와의 병합을 허용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을 것이다. 그는 독일국민이 확장할 공간과 유대인이건 볼셰비키건 적의 파괴를 요구했을 것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이런 것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p.879 |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였던 1815년 빈회의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천년이 넘도록 끝없는 전쟁의 반복이었던 유럽에서 처음으로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물론 크림 전쟁이나 보불전쟁, 발칸전쟁 등 크고 작은 싸움은 계속 되었지만 적어도 그 이전에 비하면 훨씬 안정적이었고 더 이상 자기들끼리 치고박기보다는 넘치는 힘으로 다른 세계를 정복하는 쪽을 선택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그다지 파괴적이지는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 세상이 한 세기 뒤보다 훨씬 단순했던 덕분이기도 했다. 모든 것은 나폴레옹 한 사람이 나빴던 탓으로 돌려졌고 다시는 그런 인간이 등장하지 않도록 세력균형과 현상 유지에 합의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인들이 또다시 유럽을 정복하겠다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기에는 너무 많은 힘을 써버린 뒤였다.
파리 강화회담에 참여한 사람들 또한 자신들이 평화의 시대를 다시 한번 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화는 커녕 불과 20년 뒤 인류는 더 큰 전쟁을 맞딱들여야 했다. 파리 강화회담의 주도자들이 빈 회의 참가자들보다 더 무능하거나 탐욕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지고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3대 연합국 지도자이자 파리 강회 회의를 이끈 윌슨, 클레망소, 로이드 조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해야 했다. 관용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승전국 국민들은 보복과 응징을 원했고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아직 싸울 수 있는데 윌슨의 거짓 약속에 넘어가 너무 쉽게 기권했다고 착각했다. 모처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어낸 약소국들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는 점에서 탐욕만큼은 열강들 못지 않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설령 메테르니히를 무덤에서 부활시켰어도 더 나을 수는 없었을 듯하다.
과연 파리 강화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었을까. 독일에 좀 더 관대했더라면 히틀러는 등장하지 않을까. 베르사유 조약의 문제점은 정말로 가혹해서가 아니라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데 있었다. 오히려 독일의 재기는 막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복수의 명분만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1919년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론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결말부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이 좀 더 잘 할 수도 있었겠지만 더 나쁠 수도 있었다." 그 말에 공감한다. 파리 강화 회담은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지만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았을 샌프란시스코 회담 역시 냉전을 막지는 못했다. 냉전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핵무기로 인한 공멸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몇 번이나 인류는 핵전쟁 문턱까지 갔고 그 위험은 푸틴이 불리할 때마다 핵공갈을 일삼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파리 강화 회담이 아니라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 깨닫지 못하는데다, 설사 불에 데이고 나서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까먹고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탓이 아닐까 싶다. 매일 퇴근 후 900여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차고도 넘치는 책이다. 올해의 독서를 이렇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