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중일전쟁부터 패전 이후까지
사이토 미나코 지음, 손지연 옮김 / 소명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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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IP TV에서 우연히 <아르키메데스의 대전>이라는 영화가 하더라. 동명의 만화가 원작인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수년 전 동경대 수학과 다닌다는 중2병 꼬꼬마가 항공 주병론을 제창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스카웃 되어서 해군의 전함 꼴통들에 대항하여 훗날 일본을 구하게 된다는 전형적인 일뽕 가공전기라고.

영화 초반부 야마토 특공에 나섰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하는 야마토. 웅장하다기에는 뭔가 값싼 CG 삘이 팍팍. 그렇다고 <남자들의 야마토>처럼 비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원작에 숟가락 얹기에만 급급하여 대충 만들어 욕을 처먹는게 요즘 일본 영화들인지라.


주인공이 야마모토에게 스카웃되는 과정도 일본 만화스러운 전개. 신형 주력전함의 경합을 놓고 수세에 내몰린 야마모토가 단골 기생집에서 술을 걸치면서 상대편의 건조 예산이 엉터리임을 증명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우연히 옆방에서 기생들과 숫자 놀이를 하는 주인공을 발견하고 수학의 달인인 그를 삼고초려한다는 내용. 제아무리 일본인들이 선망하는 동대생이라고 한들 교수도 박사도 아니고 끽해야 스무살 남짓의 학부생인데. 만화니까. 중2병 애송이를 상대로 해군 중장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도움을 애걸하는 야마모토 "이대로라면 전쟁이 일어날 걸세." "전쟁요? 누구랑요?" "미국일세." 어이없다는 듯 비웃는 주인공 "미국과는 절대 전쟁이 일어날 수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건가?" "공업력에서 50대 1, 석유 생산력에서 120 대 1입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죠. 애들도 이런 싸움은 안 해요." "그걸 하려는 게 일본 해군일세."


아버지 뻘의 별 두개짜리 장군(중장)을 상대로 바보같은 소리 말라며 중2병의 패기를 단단히 보여주는 주인공. 실제로 그 바보같은 짓을 벌여서 나라를 패망의 나락으로 몰고갔다는 점에서 진짜 중2병은 이런 꼬꼬마가 아니라 일본 군부였다는 일본인들의 자학 디스.


청나라, 러시아를 꺾은 것만 믿고 자만한 나머지, 정신줄 놓고 미국한테 덤볐다가 영혼을 탈탈 털리고 막판에는 핵폭탄까지 두발 맞은 덕분에 그 트라우마가 뼛속까지 단단히 각인되었는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는 정신줄만큼은 놓지 말자는 것. 그럼에도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은 죽어도 없다는 점에서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약자에는 오만한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보여준다랄까. 하긴 그런 게 세상 이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본이 미국에 다시는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 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패전 이후의 궁핍함 속에서 미국이 공급한 막대한 식량이 일본인들의 위장을 사로잡은 덕분이기도 하다. 일본은 전쟁 통은 물론이고 전쟁 이전에도 영양실조가 만연할 만큼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국가는 근대화에 성공하여 세계 최강 미국과도 맞장을 뜰 만큼 부강해졌다고 하지만 소수 엘리트들을 제외하고 정작 대다수 국민들은 그 수혜를 거의 보지 못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나 싶을 정도.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남아도는 힘을 전쟁이 아니라 국민들 복지에 쏟아야 함에도 그건 일본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다스리고 쥐어짤 대상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한결같은 일본 지배자들의 사고이다. 심지어 명색이 21세기인 지금도 그리 다를 바 없다. 어차피 정치하는 양반들의 영혼이 바뀌지 않는 이상에야.

에도 시절 '마비키(間引き)'라고 하여 가난한 농민들이 입 줄이기 일환으로 영아 살해가 보편적이었던 일본은 근대 이후에도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도시는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농촌에서는 여전히 "이밥에 고깃국"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오죽하면 농촌 출신 병사들이 군대 와서 처음으로 고기라는 것을 접했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패전 덕분에 국민들을 쥐어짜던 일본 지배자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미국 점령군은 일본인들에게 무엇이 진정한 풍요로움인지를 각성시켜 주었고 일본인들이 다시는 배를 곪을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일본인들의 신이 되었다. 이 점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진 뒤 '순무의 겨울'을 보냈던 독일인들이 그때의 치욕을 두고두고 기억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것과 결정적인 차이이다. 제아무리 사무라이 정신이 어쩌구해도 배고픈 놈이 돈 주고 밥 주는 놈에게 어캐 이겨.


맨날 치고 박고 싸우는 전쟁사 말고 독특하거나 별난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라면 한번 주목해 볼만한 신작도서가 나왔다. 소명출판사에서 나온 <전쟁은 일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라는 책이다. 중일전쟁 때부터 태평양전쟁 말기까지 여성 잡지에 실린 요리기사를 통해서 일본인들의 전시 생활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사이토 미나코(齊藤美奈子)라는 여류 문학 평론가. 전문 역사가나 음식과 관련된 사람은 아닌 듯.

도입부에 삽입된 1929년 단오에 일본인들이 먹었다는 군국주의 버전의 오셋쿠 요리(端午の節句料理)라는데. 비행기 미트볼, 군함 샐러드, 철모 메쉬. 여기에 일장기까지 꽂는 센스. 밀덕으로서 한번 먹어 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본문에 레시피도 있다는.

원래는 이렇게 먹는거람서.


중일전쟁이 폭발한 뒤 식량이 부족해지자 관에서 권장하는 소위 절식밥(節約メシ). 현미를 물에 담근 다음 하루종일 불리면 부피가 불어나서 똑같은 양이라도 주부들 입장에서는 든든하게 보인다나. 뭔 눈속임도 아니고. 공무원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그렇지.


그나마 이조차도 나중에는 진수성찬이 되는데.

태평양전쟁 말기 식량이 바닥나고 배급제가 무너지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밥 대신 집 근처에 난 잡초 뜯어 먹는 판국이라. 버마에서 일본군 고위 장군으로 암약하면서 항일을 위해 멸사봉공하시던 어느 분이 그러셨지.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서 풀만 먹어도 된다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은 고사하고 만만한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부터 대번에 식량 부족에 직면한다.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기보다 원래 일본이 인구는 많은데 식량이 부족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평화로운 시절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 수탈하거나 동남아에서 싸게 수입한 쌀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높으신 분들이 우리 일본은 앞으로 공업국가가 될 것이므로 애써 농업을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고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폭발하자 수송선 태반이 전쟁 물자 수송에 동원되면서 국민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 수입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당장 먹거리부터 줄어들었다. 뒤늦게야 식량 증산과 함께 머리 굳은 일본 지도자들이 내놓은 방법이란 게 저런 식의 절식 강요였다. 한마디로 다들 적게 먹으면 그만큼 식량도 덜 필요하다는 것.

이 책에는 전쟁 발발 이전의 평화로울 때부터 패전기까지 당시 일본의 식생활과 다양한 레시피를 소개한다. 처음에는 다양한 식재료로 메인 메뉴는 물론이고 아이들 디저트까지 지금 만들어 먹어도 괜찮다 싶은 것에서 일본이 패전에 가까워지는 뒷페이지로 갈수록 식단이 점점 가난해지는 것이 체감된다는.

전시 레시피에는 가끔 뜬금없는 내용도 보인다. 절미요리가 대표적인데, 대용식을 그토록 열심히 권장하면서 고구마나 감자, 호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절미요리라는 이름으로 우동, 소바, 때로는 쌀을 부족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닌가. 우동과 소바 정도는 그대로 먹어도 될 텐데 말이다. 하물며 쌀은 더더욱 그렇다. 주식을 모두 빵이나 우동으로 대체하면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리하여 반찬에 변화를 주고 주식은 가능하면 밥 한공기, 식빵 한장을 권장했다. - p.55

게다가 이처럼 관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국민들은 닥치고 따라야 하는 전체주의 시절답게 살림 비법이랍시고 앞뒤 맞지 않는 탁상공론적인 권고사항도 난무한다. 한마디로 "쌀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라는 식. 쌀보다 밀가루가 더 비싼 나라에서 말이다. 주부들 앞에서 시장 한번 안 가본 티를 낸담서.

배급된 고기는 여러번 나누어

배급된 고기는 한 번에 다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나누어 사용합시다. 우선 큰 덩어리 째로 기름을 둘러 노릇하게 구은 후 뜨거운 물을 살짝 잠길 만큼 넣어 맛있는 스프를 만듭시다. 그런 다음 고기를 꺼내고 스프에 여러가지 제철 채소를 넣고 푹 익힙니다. 고기는 그대로 2~3일 보관할 수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두세번 나누어 사용하도록 합시다.

적은 양의 고기로 여러번 사용하기

갈거나 작게 다진 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어 섞은 후 미트볼 식으로 졸이거나 볶거나 하고 고르케나 양배추롤, 잡채 등을 만들면 적은 양의 고기로 풍성한 상차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읽고 있으면 빈곤한 식단으로 가족을 위해서 어떻게든 맛있게 창조해야 하는 그 시절 주부들의 애환이 절절이 와닿는달지. 차라리 전쟁을 멈추라고.

말린 밥 이용법

아무리 깨끗하게 먹는다고 해도 밥통이나 찜통에 눌러붙은 밥알이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가는 제반에 널어 바싹 말려두면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름에 튀겨서 국물 요리 건더기로 사용하거나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서 설탕옷을 입히면 아이들 취향을 저격한 맛있는 간식이 됩니다. - p.74

이른바 설탕 누룽지 레시피. 이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에도 있는 듯. 그러고보면 밥솥에서 누룽지 말려서 먹었던 것이 언제던가 싶다는. 요즘이야 인터넷에서나 구경하는 물건이지만.

오징어말이 튀김

달걀 2개에 중간 크기의 오징어 3마리면 5~6인 가족이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오징어는 껍질을 벗기고 배를 갈라 절구공으로 두들기거나 부엌칼로 잘 저며줍니다. 이 안에 오징어 다리와 껍질 벗긴 완두와 당근, 피, 죽순 등 여러 채소를 잘게 썰어넣고 섞어줍니다. 밀가루 적당량을 넣고 소금으로 간합니다. 달걀은 잘 풀어 1할 정도의 물과 소금 한 자밤을 넣습니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얇게 부쳐내어 도마 위에 펼친 다음 밀가루를 뿌리고 갈아 놓은 오징어를 깔아 끝에서부터 말아줍니다. 끝 부분은 물에 푼 전분가루를 발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2~3개 꼬치로 고정한 후 찜통에 넣고 7~8분 찐 후 잘 익으면 꺼내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굴려가며 바싹하게 구워줍니다. 1.5cm 두께로 잘라 접시에 담아내고 국화꽃 등으로 장식합니다. 오징어 유부말이, 갈분 소스 버무림은 오징어말이 튀김과 속은 같으나 달걀 대신 유부로 말고 쩌낸 것을 곱게 썰어 갈분 소스를 걸쭉하게 얹어서 일본식으로 맛을 냅니다. - p.103

태평양전쟁 시절 아버지와 남편에게 인기 있었다는 전시 레피시. 이런 건 요즘도 술안주로 쓸만할 듯. 일본 근해에 오징어가 하도 많이 잡힌 덕분에 오징어의 오자만 들어도 물릴만큼 먹었다나. 아직은 중국 어선 떼가 그 동네까지 마수를 미치지 않을 때인지라.

저자는 전시 레시피를 통해서 그 시절 일본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특유의 역사적 피해 의식만큼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읽다보니 이런 대목이 있더라.

1941년 미국이 대일 석유 수송을 금지하자 일본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진출을 꾀하게 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 p.181

1941년 8월 1일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에 전격적으로 석유 금수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미국의 금수조치가 일본을 궁지로 내몰아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이 프랑스령 베트남에 무력 진주하고 1940년 9월 27일 추축 조약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일 협상 과정에서 베트남에서의 철수와 추축에서 탈퇴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일본이 거부했기에 금수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미국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일본이 미국을 실질적인 적국으로 취급하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이해하는 셈이다. 미국을 신으로 여기는 것과 별개로 자신들의 침략전쟁은 정당하다는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그건 그거고 이거는 이거라는 식. 그러니 뭔 과거사 사죄를 하겠음.

전후의 식량난을 미국의 원조물자로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점령군은 군용 통조림 5천톤을 방출하고 라라물자와 유니세프로부터 기증받은 탈지분유 등도 동원했다고 한다. 같은 해 가을부터는 탈지 분유를 수입하는 등 학교 급식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분투했다. 일본인의 대미감정이 호감으로 바뀐 데에는 이러한 원조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 p.196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과 더불어 부채의식도 함께 안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일본인들의 복잡한 마음이랄까.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트루먼 행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패전 일본인들이 재빨리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이웃한 남한에서 대량의 식량을 수출한 덕분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맥아더 입장에서는 남한보다 자신이 직접 통치하는 일본이 더 중요했고 남한의 미군정은 어차피 자기 부하들이 맡고 있다보니 명령 한마디면 충분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행복은 우리의 불행이었다. 미 군정의 마구잡이식 공출에 따른 물자 부족은 일제 말기를 능가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미 군정의 어떤 양반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조선인들은 미역만 먹어도 된다"라고 하여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해방 직후에만 해도 미군에 우호적이었던 남한이 1년도 되지 않아 반미로 돌아서고 1946년 10월 1일 대구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반미 시위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의 사건이 우리가 잘 아는 제주 4.3 사건이었다. 일본인들이 진작에 패전의 혼란에서 벗어나 미국의 원조로 먹고 살만해졌을 때 우리는 최악의 기근에 직면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신생 남한의 상황이 심각함을 뒤늦게 깨달은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주의에 넘어가지 않도록 일본보다 두발짝 늦게 경제 원조에 나서면서 미제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같은 식량 원조를 받았지만 그 직후에는 한국전쟁이 폭발하는 비극까지 겪어야 했다.

일본인들도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쟁은 너희가 일으키고 벌은 우리가 받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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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
마르크 블로크 지음, 김용자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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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배송받아서 부지런히 읽는 중입니다. 저자는 역사 교수이자 프랑스 장교 출신의 레지스탕스였는데 안타깝게도 프랑스 해방 직전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책상에서 사료가 아닌 당시 상황을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담은 책으로 무척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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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의 길 -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향한 카운트다운
에번 토머스 지음, 조행복 옮김 / 까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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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2015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소설가인 한즈 가즈토시(半藤一利)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국내에서는 사람들이 좀 더 알아먹기 쉽게 '일본 패망 하루전'이라는 훨씬 직설적인 표현이 붙었던 것으로. 그 말대로 패망을 앞둔 일본 지도부 내부에서 항복이냐, 항전이냐를 놓고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3제국의 종말을 다룬 독일 영화 <다운폴(Der Untergang)>의 일본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두 영화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운폴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자들의 추악한 민낯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서 독일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어떤 정신 나간 인간들의 선동에 넘어가서 무책임하게 절대 권력을 맡겼으며 인류 전체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스스로 되짚어 보게 한다. 특히 괴벨스가 독일 국민들이 변변한 무기도 없이 소련군 앞에서 개죽음 당하고 있다는 지적에 "위선 떨지 마시오. 나는 그들을 동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강요한 적이 없소. 그들은 우리를 선택한 댓가를 치룰 뿐이오."라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할 때의 모습은 전율마저 느끼게 할 정도이다. 비록 영화의 각색이라고는 하지만 광기 어린 나치 지도자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반면,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는 한쪽에서는 원폭을 두들고 맞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련군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와중에 이 가망없고 지긋지긋한 전쟁의 악몽이 과연 누구의 소위 '성단(聖斷)' 덕분에 끝날 수 있었으며 궁지에 몰린 일본 민족이 구원받았는지가 있을 뿐이다. 광기는 일본 지도부 전체가 아니라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고 결사항전을 고집했던 육군의 몇몇 과격파 장교들에게만 집중된다. 그리고 이들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할복함으로서 나름의 죄과를 치렀다는 식이다. 애초에 악몽이 왜 시작되었는지, 천황이 성단을 내려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면 어째서 일이 이 지경까지 몰리기 전에 일찌감치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따위의 얘기는 없다. 그저 천황이 '옥음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24시간이 전부이다. 즉, 일본인들 입장에서 불편한 역사는 쏙 빼놓고 기억할 것만 기억하라는 영화이다. 자기네들이야 그만일지 몰라도 그들이 벌여놓은 침략전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정이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히틀러는 죽은 권력이지만 일본에서 천황은 엄연히 살아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전쟁 내내 미국인들이 '진주만을 기억하라'라고 외쳤던 것이 무색하게도 전쟁이 끝난 뒤 트루먼 행정부가 천황 일가에 아무런 죄도 묻지 않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천황만이 아니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는 최소한의 지도자들만이 희생양으로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처벌받았고 나머지는 유야무야되었다.

독일의 과거사 청산이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나치 정권은 철저히 단절되었다. 오늘날 독일에서 나치 경력은 자랑스러운 훈장이 아니라 어떻게든 숨겨야 할 주홍글씨이다. 또한 공개적으로 히틀러의 후계자나 괴벨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자가 공직에 들어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반면, 일본은 침략전쟁에 앞장섰던 자들이 미국의 묵인 아래 고스란히 권력의 중추부에 복귀했고 자신들의 후계자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단적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정치인이며 재작년 정신이상자에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베 신조만 하더라도 외조부가 A급 전범 중 한사람이자 전후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였다. 침략전쟁은 소위 아시아 해방을 위한 대동아전쟁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당시의 고통은 집단 망각을 강요받았다. 일본을 패망으로 몰고간 전범들은 애국자로 둔갑하여 야스쿠니 신사에서 일본 지도자들의 추모를 받고 있다.

흔히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말이 있지만, 승자보다 더 승자같은 패배자 일본의 오만한 태도는 미국이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필리핀이나 남한, 남베트남같은 아시아권 국가에서 미국이 보여준 모습은 물론, 같은 패배자인 독일과 비교하더라도 미국은 일본에 유별나게 관대했다. 정작 진주만을 기습하고 미국 본토에 풍선 폭탄을 날려보냈으며 미군 포로들을 잔혹하게 참수했던 것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었음에도 말이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싸다구를 날려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일본에 혐오감 대신 환상을 품었고 그 건방진 용기를 일본도와 사무라이에서 찾았다. 일본은 비록 싸움에서는 졌지만 그 덕분에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오른팔이 되어 더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으니 이런 걸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독일처럼 갈데까지 가지 않고 적당할 때 천황이 항복을 '성단'한 것은 일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을 듯. 바꾸어 말하여 히틀러 또한 일본인들과 같은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독일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싶기도 하다. 히틀러 자신이야 워낙 저지른 것이 많다보니 벌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그 한 사람에게 죄다 떠넘기는 것으로 나머지 나치 잔당들은 적당히 면죄부를 받았을지도. 누가 알겠는가. 그게 정치라는 것이니 말이다.

역사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까치 출판사에서 태평양전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필히 읽어볼 책이 나왔다. 태평양전쟁 종전을 향한 마지막 5개월을 다룬 <항복의 길(Road to Surrender)>이다. 저자는 에번 토머스.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저명한 미국 언론인이자 뉴욕 타임즈에서 두번이나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 뉴스위크에서 20여년 이상을 근무한 전형적인 뉴워커이기도.


이 책에는 3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미국 전쟁부 장관으로서 루스벨트를 보좌하고 조지 마셜 장군을 비롯한 별들을 지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으로 독일과 일본의 전략폭격을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미 공군 초대 참모총장이 되는 칼 스파츠(Carl Spaatz) 대장, 임진왜란 시절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자 일본 외무대신으로 대표적인 화평파였지만 A급 전범으로 옥사하게 되는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태평양전쟁의 키를 쥔 자들이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고 유럽에서의 총성은 멈추었지만 3개월이 지난 8월 초까지도 태평양전쟁의 앞날은 여전히 예측불허였다. 일본 해군은 괴멸했지만 일본 육군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항복시키려면 해상 봉쇄와 전략 폭격만이 아니라 수십만명의 미군이 직접 상륙하여 독일에서 그러했듯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고 도쿄의 황궁이 점령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독일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조차 연합군이 본토에 상륙한 뒤에야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고 협상에 나섰다는 점에서 일본이 일전 한번 벌이지 않고 백기를 들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적어도 전쟁은 수개월에서 1년은 더 길어질 참이었다. 이 책은 유럽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45년 3월부터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약 5개월 동안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긴박하게 벌어지는 종전을 향한 태평양전쟁의 카운트다운을 사실적이면서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다.

연합군은 적어도 12척의 병원선을 포함하여 어마어마한 대군을 집결시켜서 침공을 준비했지만, 예상된 사상자 규모가 끔찍이 커서 가장 정직한 인간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조차 부하들에게 숫자를 조작하라고 요구했을 정도였다.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정해진 결론이었지만 일본이 정말로 항복할지는 미지수였다. 일본이 전쟁을 계속했다면 일본과 아시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 p.17

찌푸린 얼굴의 르메이는 부당하게도 무자비한 살인자로 묘사되었다. 특히 전략 공군 사령부 사령관으로 근무한 말년에 그는 곧잘 냉혹한 발언을 남기곤 했다. 그는 웃지 않았고(안면 신경마비 때문에 얼굴이 굳어서 웃을 수 없었다.) 캐리커처로 그리기 쉬울 만큼 강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휘하 조종사들의 목숨까지 게의치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 p.51

도고는 성공적인 외교관이었다. 그는 일본의 전형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숙적인 러시아와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39년 두 나라가 몽골 사막에서 격전을 벌이고 일본군이 1만7천명의 사상자를 낸 뒤에 양국 간의 휴전을 마련한 사람이 도고였다. 소련의 냉혹한 외무인민위원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도고의 끈질긴 인내심에 "정치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도" 경의를 표했다. - p.101

4월의 어느 늦은 저녁, 도고는 총리 관저의 집무실에 앉아서 그답게 직설적으로 질문을 꺼냈다. "총리 대신께서는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2~3년은 더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노년의 신사가 대답했다. 도고는 일본이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의 전쟁은 물자와 생산력이 좌우합니다. 일본은 채 1년도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 p.103

6월 18일 워싱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장군들과 제독들을 만나 일본 침공으로 초래될 인명 손실을 논의했다. 최고위층은 규슈에서 35만명의 일본인이 70만명의 미군에 맞서 방어할 것으로 추산했다. 실제로는 일본군은 그 수치의 거의 3배에 달하는 90만명이 규슈 방어를 준비했다. 정규군만 해도 그랬다. 열 다섯살에서 예순살까지의 모든 남자와 열일곱살에서 마흔살까지 모든 여자가 국민의용전투대에 합류해야 했다. 전장식 머스킷, 화궁, 죽창, 쇠갈고리가 이들의 무기였다. - p.129

스파츠는 핵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서를 3번 접어 지갑에 넣고 다녔다. 어느날 스파츠가 샤워를 하는 동안 전령이 들어와 그의 바지를 가져가서는 세탁소에 보냈다. 미친 듯이 뒤진 끝에 지갑을 되찾았다. 명령서는 여전히 지갑 안에 있었다. 8월 1일 스파츠는 마닐라로 가서 일본 침공을 지휘할 맥아더 장군에게 핵폭탄과 다가올 히로시마 공격을 보고한다. 스파츠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나를 보고 말했다. 이것이 전쟁을 바꿀 것이오." - p.171

사람들에게 핵폭탄은 그저 좀 더 큰 폭탄일 뿐이라고 말하던 르메이도 깊은 인상을 받은 것같았다. 이 항공대 장군은 기자가 더 잘 알아보도록 폭탄이 일으킨 충격파를 손가락으로 짚어주었다. 르메이는 전문가다운 감탄의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작품이야." 그러나 머피는 깜짝 놀라서 다시 들여다 봤다. "나는 대단한 규모의 파괴, 적어도 거대한 폭탄 구덩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난 5주일 동안 이곳 마리아나에서 봤던 일본 도시들의 폭격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했다." - p. 185

육군대신 아나미 장군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강화회담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핵폭탄이라는 증거는 없으며 트루먼의 연설은 언제나 그렇듯 허세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을 숨기고 있었다. 그 날 일기를 보면 그는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했고 자신이 우라늄 폭탄의 영향에 관해 과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음을 인정했다. - p.198

경찰 보고서는 사실 지나친 걱정이었다. 일본 국민이 끔찍한 곤경에 처해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그러나 히로히토, 긜고 무조건적인 존경과 숭배에 길들여져 있는 그 측근들은 미세한 분노의 신호만으로도 심각한 위험을 느꼈다. 황궁은 언제나 우익의 반란, 2.26사건을 일으킨 광적인 젊은 군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했다. 이제 히로히토는 공산주의자들에 선동된 노동자, 농민의 소요를 더 걱정했다. - p. 221

라디오 도쿄가 천황의 연설을 방송하던 8월 15일 정오에도 미국의 폭격기들은 여전히 일본에 폭탄을 투하 중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아널드 장군은 그때까지 괌 섬의 사령부에 있었던 스파츠 장군에게 1천대의 폭격기를 출격시키라고 엄명 내렸다. 스파츠는 제509혼성비행전대의 7대를 포함하여 B-29 폭격기 843대를 끌어모았다. 173대의 호위 전투기가 떴기 때문에 항공대의 홍보관들은 1천대의 비행기가 일본 제국 공격의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 p.283

핵폭탄은 많은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스팀슨의 글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틀렸다. 그때의 상황에서는 11월 1일로 예정된 규슈 침공이 실제로 진행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리틀 보이와 팻 맨이 미군과 연합군의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일 자체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증강을 가리키는 첩보를 완강하게 일축했지만 해군 작전 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은 임시로 승인한 침공 계획을 재빨리 철회했다. 육군참모총장 마셜조차 다수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방안을 포함하여 애타게 차선책을 모색했다. 미군은 일본을 침공하는 대신 일본 국민을 굶기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 p.301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핵폭탄이 20만명을 살육했지만 그럼으로써 일본을 굴욕시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 오늘날까지 널리 믿어지는 정설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원폭보다 소련군의 참전이 더욱 결정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적어도 미국에게는 관용을 기대할 수 있지만(실제로도 그러했고) 스탈린에게는 어림없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만약 일본이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미군이 큐슈와 혼슈 서부에서 붙잡힌 사이 북쪽에서 소련군이 먼저 밀고 내려와서 도쿄를 점령했다면 천황을 비롯한 일본 지도부들은 푸이가 그러했듯 최소 시베리아 행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원폭 투하가 일본인들을 침략전쟁의 가해자에서 원폭의 피해자로 둔갑시켰다는 점이다. 냉전 시절 미소 핵공포 속에서 일본 지도자들은 원폭 기억을 자신들의 전쟁 책임에 대한 면죄부로 유리하게 써먹는데 성공했다. 직접 B-29를 조종하여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폴 티비츠 장군은 미국민의 전쟁 영웅에서 말년에는 수십만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살인마로서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텍사스 에어쇼에서는 원폭 투하를 재현했다가 "일본인들을 모욕했다"라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사과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정작 자신들은 무모한 침략전쟁으로 동아시아 주변국들에게 고통을 끼쳤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트루먼을 향해 "내 손은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오펜하이머나 이 책에 등장하는 스팀슨, 스피츠 등 핵무기 투하에 직접 관여했던 미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내린 결정에 죽는 날까지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했다. 과연 천황을 비롯하여 일본 지도자들 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핵폭탄이 떨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비인도적인 무기를 쓴 미국이 나쁜 탓이지 자신들이 우물쭈물하면서 항복을 늦추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라는 영화 역시 천황이 미국의 핵위협에서 일본 민족을 구했다는 얘기가 있을 뿐이다. 세상에는 왕후장상의 법도가 있으며 백성이란 군주를 위해서 마땅히 희생하는 존재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그들로서는 고귀한 천황이 나서서 백성을 위하여 총대를 매었다는 사실 자체가 황송한 일일테니 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태평양전쟁 서적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8월인가 싶다. 하지만 인문학 불모지인 국내에서는 여전히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책이 그리 흔치 않다. 태평양전쟁 통사는 5년 전에 글항아리에서 나온 <일본제국 패망사> 정도이다. 내가 감수를 맡았던 책이기도 하다. 이런 책이 보다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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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
마르크 블로크 지음, 김용자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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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유럽 최강을 자랑했던 프랑스의 어이없는 몰락은 프랑스인들로서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이상한 패배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80년이 지난 지금가지도 수많은 논쟁이 있지만 이 책 또한 무척 흥미로울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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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이야기 - 첨단 기술의 원점을 찾아서
정진오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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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이나 소설,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대장장이'라고 하면 드워프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근육질 땅딸보에 털보 수염을 한 드워프가 무기와 방어구 제작을 전담하는 것이 그쪽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스킬과 주문만으로 도구를 만드는 경우도 있더라만 반칙 아님? 열기로 후끈거리는 대장간에서 전심전력 망치를 휘두르며 온 몸으로 땀내를 풍기는 것이 대장장이의 마땅한 이미지이거늘.


<고블린 슬레이어>에 나오는 드워프 장인. 종족 특성 상 성격이 몹시 괴팍하면서 자신의 작품만큼은 투철한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워프의 모습은 원래 중세 시절 많은 대장장이들이 아무런 안전 장구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금속을 만지다보니 중금속에 노출되어 제대로 크지 못했던 것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더라. 그래서 드워프와는 정반대로 미형에 키가 훤칠한 위너 종족인 엘프와는 서로 상극이라는 설정. 손재주가 뛰어난데다 금속을 다룰 줄 알기에 문명 세계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고고한 엘프와 달리 술고래에 탐욕스럽고 속물 근성 가득하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썩 존중받지는 못한다. 이공계가 천대받는 건 판타지 세상도 마찬가지인 듯.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각인된 대장장이의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리들리 스콧의 2005년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올랜드 블룸. 뭐, 이쪽은 엘프가 대장장이를 하는 경우이고.


광석에서 원하는 금속을 뽑아내고 연마하여 도구로 만드는 것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자 부국 강병을 위한 수단이었기에 국가 차원의 극비 사항이었다. 따라서 대장장이들은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기술자로서 그만한 우대는 커녕, 높으신 분들 필요에 따라 무슨 열정 페이마냥 부려먹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일은 농사 이상으로 고되고 직업 훈련은 도제식이었으며 보수는 터무니없이 형편없다보니 대장장이는 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세습되는 구조였다고 한다. 안 그러면 누가 하겠음. 그 시절 그렇지 않은 직종이 있었겠냐만. 어릴 때부터 대장간에서 잔심부름으로 시작하여 괴팍한 아버지한테 머리통 작살나게 맞아가면서 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이들의 고달픔이 와닿는다. 비록 고생스럽기는 해도 그럭저럭 먹고는 살았다고. 어느 시대이건 남들에게 없는 전문 기술 하나 있으면 호구는 해결할 수 있는 법이라.


김홍도의 <대장간>. 모루 위에 집게로 쇠를 올려놓고 있는 초로의 영감님이 이른바 '집게잡이'라 하여 대장간 점주이자 전체 공정을 총괄하는 야장(冶匠, 대장장이), 망치질을 하는 아죠씨들은 대장장이에게 고용된 메질꾼. 그리고 뒷쪽에서 풀무질이나 아랫쪽에서 낫을 가는 일은 어린아이들이 맡고 있다. 즉, 풀무질에서 시작하여 메질꾼을 거쳐서 집게잡이가 되는 도제식 계급 구조를 보여주는 셈.


'대장간'이라고 하면 워낙 예스러운 이름이다보니 사극 속이라면 몰라도 요즘 세상에는 없을 것같지만 아직까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철공소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작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편찬한 <서울의 대장간>에서는 서울에 대장간이 네곳 남아 있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이 기피하는 3D업종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그나마도 오래지 않아 명맥이 끊어질 분위기라는데. 어쩌면 인간 대신 로봇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 매고 망치를 휘두르며 쇠를 담금질하는 날이 올지도. 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같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교유서가에서 지난 3월에 나온 신작 도서 <대장간 이야기>는 산업 혁명 이전 수천년 동안 첨단 기술의 현장이었고 근대화와 함께 이제는 우리 추억 속의 존재가 된 대장간을 다룬 에세이이다. 저자인 정진오 작가는 25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로 아마도 지금은 퇴직하신 듯 한데 한때 대장간에서 제2의 인생을 찾으려 했다는 괴짜. 그 대신 과거의 유물이 되어 그 흔적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우리 전통의 장인 정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오마이 뉴스에서 매주 연재한 칼럼을 엮은 것이라고 한다.

'대장간'이란 대장장이가 일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대장은 흔히 부대 지휘관을 가리키는 대장(大將)이 아니라 순 우리말이다. 언제부터 금속을 만지는 일을 대장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한 어원이 없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대장장이들을 찾아다니며 쓴 21가지 이야기가 있다. 인천에서 전통의 명맥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대장간들, 그리고 이런 대장간에 얽힌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 쓰고 있다. 기자 출신답게 생생한 필체 덕분에 마치 내가 대장간에 앉아 있는 양 우렁차게 귓가를 때리는 망치질 소리, 담금질하는 쇠 냄새, 화로에서 후끈하게 타오르는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다.

85세 대장장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로에서 지름 5센티가 넘는 굵은 쇠막대기가 누런 색깔로 달구어졌다. 대장장이는 커다란 집게로 그 쇠막대기의 끝을 잡고 바로 옆에 놓인 기계 해머 쪽으로 가져갔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로 해머 페달을 밟자 헤머 머리인 네모난 쇳덩이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 p.24

송종화 장인이 대장간에서 일자리를 처음 구한 것은 70년 전인 1953년 1월이었다. 그 대장간은 2023년 지금 일하는 곳에서 불과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황곡철공소.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겨울,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가 대장간에서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전쟁 통에 집에 폭격도 맞았다. 식구들이 밥 먹다가 맨몸으로 뛰쳐나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 어린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대장간에 들어갔다. - p.34

우리는 영화 <토르>를 볼 때마다 주인공 토르와 그가 휘두르는 망치에만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하지만 한번 쯤은 그 망치를 만든 대장장이 형제들의 솜씨에도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토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영어로 목요일을 일컫는 'Thursday'가 바로 '트로의 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앞으로 토르 시리즈가 계속된다면 영화 개봉을 목요일에 맞추어 잡으면 어떨까. - p.79

영조 임금은 대장장이들의 파철전을 비롯해 시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영조나 정조 때처럼 기술자나 상인들이 사농공상의 체계 속에서도 그나마 더 나은 대우를 받았던 호시절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뒤로 조선은 쇠퇴했고 힘없는 나라는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국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확은 1923년 저술한 <조선문명사>에서 "관리들의 탐욕과 침탈로 인하여 공업이 크게 쇠락하고 말았으니! 아! 쇠락한 때의 정치에 대해서는 차마 말조차 할 수 없도다."라고 조선 후기의 타락상을 한마디로 꼬집었다. - p.103

율곡 이이의 삶과 학문세계를 다룬 평전은 대부분 백사 이항복의 <백사집>을 인용하여 율곡이 대장간을 경영했던 일화를 빼놓지 않는다. "율곡은 해주에 살 때 대장간을 차리고 호미를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였다. 의리상 마땅히 해야할 것이라면 대인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행했다."는 내용이다. 율곡이 은퇴하여 처가인 해주에 머물 때 대장간을 했다는 얘기이다. - p.160

온갖 오염물질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갯벌과 바다는 그래도 잘 버티고 있다. 문제는 도구이다. 우리의 맨손어업 도구를 만들어낼 대장간이 문을 닫게 되면 그 도구는 어디서 날 것인가. 정부는 오랜 전통의 갯벌어로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겠다며 나섰지만 정작 갯벌어로의 도구는 우리 어민들의 손에 맞지도 않는 중국산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p.218

이순신은 왜적들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본떠 우리식의 또다른 조총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만이었다. 이순신은 이와 관련한 보고서를 임금에게 올리면서 그 주역인 대장장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고 포상을 요청하기도 했다. 임금이 읽을 문서에 노비인 대장장이 이름을 적는 일은 당시로서는 무척 용기있는 일이었을 게다. 임금에게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대신 대장장이들에게 그 공을 돌리는 일,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도 가능했을까. - p.234

대장간의 핵심 장비 중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망치를 내리쳐 모양을 잡는 모루가 있다. 그 '모루'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라는 말의 내력도 여간 궁금한 게 아니다. 대장간은 이처럼 우리 말의 작은 알갱이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간이다. - p.294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대량 생산하여 스마트폰에서 클릭 한번이면 어떤 물건이건 못 사는 것이 없는 세상에 아직도 수공업으로 망치 두들기며 연장을 만드는 대장간은 민속촌같은 데에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체험 학습하는 것 이외에 어디 수요가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대장간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엿장수들이 엿 자를 때 쓰는 가위라던가, 무당들이 굿할 때 쓰는 소품이라던가, 해녀들이 바다에서 굴을 딸 때 쓰는 어구같은 워낙 희귀하고 수요가 적어 공장에서 찍어내기에는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물건 말이다. 그조차 요즘은 값싼 중국산에게 밀리는 판국이라고 하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로는 대장장이들도 마찬가지. 그들로서도 그저 평생 하는 일이라 업이라고 생각하고 돈 따지지 않고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아버지의 일을 자식이 물려받는 시대도 아니니 대장장이가 사장되는 것도 시간 문제일 듯 하다. 안타깝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일본에서는 '와패니즈'의 영향인지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든 일본도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검이라며 선호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물론 영화와 일본 아니메가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환상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보기에는 일본도가 폼나잖음. 덕분에 일본도를 만드는 도공들이 꽤 있다고. 사실은 야쿠자들만 쓰는 거 아님? 유럽에서는 수공예품이 명품이라며 브랜드화되어 비싸게 팔린다. 여자들이 죽고 못사는 구찌라던가. 알고보면 죄다 중국 공장에 싸게 하청준 것일 뿐이지만. 원효가 해골물 마시고 "일체유심조"라고 했던가. 결국 모든 게 이름값이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그런 궁리를 할 방법은 없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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