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의 길 -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향한 카운트다운
에번 토머스 지음, 조행복 옮김 / 까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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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2015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소설가인 한즈 가즈토시(半藤一利)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국내에서는 사람들이 좀 더 알아먹기 쉽게 '일본 패망 하루전'이라는 훨씬 직설적인 표현이 붙었던 것으로. 그 말대로 패망을 앞둔 일본 지도부 내부에서 항복이냐, 항전이냐를 놓고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3제국의 종말을 다룬 독일 영화 <다운폴(Der Untergang)>의 일본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두 영화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운폴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자들의 추악한 민낯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서 독일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어떤 정신 나간 인간들의 선동에 넘어가서 무책임하게 절대 권력을 맡겼으며 인류 전체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스스로 되짚어 보게 한다. 특히 괴벨스가 독일 국민들이 변변한 무기도 없이 소련군 앞에서 개죽음 당하고 있다는 지적에 "위선 떨지 마시오. 나는 그들을 동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강요한 적이 없소. 그들은 우리를 선택한 댓가를 치룰 뿐이오."라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할 때의 모습은 전율마저 느끼게 할 정도이다. 비록 영화의 각색이라고는 하지만 광기 어린 나치 지도자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반면,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는 한쪽에서는 원폭을 두들고 맞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련군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와중에 이 가망없고 지긋지긋한 전쟁의 악몽이 과연 누구의 소위 '성단(聖斷)' 덕분에 끝날 수 있었으며 궁지에 몰린 일본 민족이 구원받았는지가 있을 뿐이다. 광기는 일본 지도부 전체가 아니라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고 결사항전을 고집했던 육군의 몇몇 과격파 장교들에게만 집중된다. 그리고 이들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할복함으로서 나름의 죄과를 치렀다는 식이다. 애초에 악몽이 왜 시작되었는지, 천황이 성단을 내려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면 어째서 일이 이 지경까지 몰리기 전에 일찌감치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따위의 얘기는 없다. 그저 천황이 '옥음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24시간이 전부이다. 즉, 일본인들 입장에서 불편한 역사는 쏙 빼놓고 기억할 것만 기억하라는 영화이다. 자기네들이야 그만일지 몰라도 그들이 벌여놓은 침략전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정이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히틀러는 죽은 권력이지만 일본에서 천황은 엄연히 살아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전쟁 내내 미국인들이 '진주만을 기억하라'라고 외쳤던 것이 무색하게도 전쟁이 끝난 뒤 트루먼 행정부가 천황 일가에 아무런 죄도 묻지 않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천황만이 아니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는 최소한의 지도자들만이 희생양으로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처벌받았고 나머지는 유야무야되었다.

독일의 과거사 청산이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나치 정권은 철저히 단절되었다. 오늘날 독일에서 나치 경력은 자랑스러운 훈장이 아니라 어떻게든 숨겨야 할 주홍글씨이다. 또한 공개적으로 히틀러의 후계자나 괴벨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자가 공직에 들어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반면, 일본은 침략전쟁에 앞장섰던 자들이 미국의 묵인 아래 고스란히 권력의 중추부에 복귀했고 자신들의 후계자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단적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정치인이며 재작년 정신이상자에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베 신조만 하더라도 외조부가 A급 전범 중 한사람이자 전후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였다. 침략전쟁은 소위 아시아 해방을 위한 대동아전쟁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당시의 고통은 집단 망각을 강요받았다. 일본을 패망으로 몰고간 전범들은 애국자로 둔갑하여 야스쿠니 신사에서 일본 지도자들의 추모를 받고 있다.

흔히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말이 있지만, 승자보다 더 승자같은 패배자 일본의 오만한 태도는 미국이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필리핀이나 남한, 남베트남같은 아시아권 국가에서 미국이 보여준 모습은 물론, 같은 패배자인 독일과 비교하더라도 미국은 일본에 유별나게 관대했다. 정작 진주만을 기습하고 미국 본토에 풍선 폭탄을 날려보냈으며 미군 포로들을 잔혹하게 참수했던 것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었음에도 말이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싸다구를 날려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일본에 혐오감 대신 환상을 품었고 그 건방진 용기를 일본도와 사무라이에서 찾았다. 일본은 비록 싸움에서는 졌지만 그 덕분에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오른팔이 되어 더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으니 이런 걸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독일처럼 갈데까지 가지 않고 적당할 때 천황이 항복을 '성단'한 것은 일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을 듯. 바꾸어 말하여 히틀러 또한 일본인들과 같은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독일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싶기도 하다. 히틀러 자신이야 워낙 저지른 것이 많다보니 벌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그 한 사람에게 죄다 떠넘기는 것으로 나머지 나치 잔당들은 적당히 면죄부를 받았을지도. 누가 알겠는가. 그게 정치라는 것이니 말이다.

역사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까치 출판사에서 태평양전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필히 읽어볼 책이 나왔다. 태평양전쟁 종전을 향한 마지막 5개월을 다룬 <항복의 길(Road to Surrender)>이다. 저자는 에번 토머스.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저명한 미국 언론인이자 뉴욕 타임즈에서 두번이나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 뉴스위크에서 20여년 이상을 근무한 전형적인 뉴워커이기도.


이 책에는 3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미국 전쟁부 장관으로서 루스벨트를 보좌하고 조지 마셜 장군을 비롯한 별들을 지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으로 독일과 일본의 전략폭격을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미 공군 초대 참모총장이 되는 칼 스파츠(Carl Spaatz) 대장, 임진왜란 시절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자 일본 외무대신으로 대표적인 화평파였지만 A급 전범으로 옥사하게 되는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태평양전쟁의 키를 쥔 자들이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고 유럽에서의 총성은 멈추었지만 3개월이 지난 8월 초까지도 태평양전쟁의 앞날은 여전히 예측불허였다. 일본 해군은 괴멸했지만 일본 육군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항복시키려면 해상 봉쇄와 전략 폭격만이 아니라 수십만명의 미군이 직접 상륙하여 독일에서 그러했듯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고 도쿄의 황궁이 점령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독일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조차 연합군이 본토에 상륙한 뒤에야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고 협상에 나섰다는 점에서 일본이 일전 한번 벌이지 않고 백기를 들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적어도 전쟁은 수개월에서 1년은 더 길어질 참이었다. 이 책은 유럽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45년 3월부터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약 5개월 동안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긴박하게 벌어지는 종전을 향한 태평양전쟁의 카운트다운을 사실적이면서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다.

연합군은 적어도 12척의 병원선을 포함하여 어마어마한 대군을 집결시켜서 침공을 준비했지만, 예상된 사상자 규모가 끔찍이 커서 가장 정직한 인간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조차 부하들에게 숫자를 조작하라고 요구했을 정도였다.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정해진 결론이었지만 일본이 정말로 항복할지는 미지수였다. 일본이 전쟁을 계속했다면 일본과 아시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 p.17

찌푸린 얼굴의 르메이는 부당하게도 무자비한 살인자로 묘사되었다. 특히 전략 공군 사령부 사령관으로 근무한 말년에 그는 곧잘 냉혹한 발언을 남기곤 했다. 그는 웃지 않았고(안면 신경마비 때문에 얼굴이 굳어서 웃을 수 없었다.) 캐리커처로 그리기 쉬울 만큼 강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휘하 조종사들의 목숨까지 게의치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 p.51

도고는 성공적인 외교관이었다. 그는 일본의 전형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숙적인 러시아와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39년 두 나라가 몽골 사막에서 격전을 벌이고 일본군이 1만7천명의 사상자를 낸 뒤에 양국 간의 휴전을 마련한 사람이 도고였다. 소련의 냉혹한 외무인민위원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도고의 끈질긴 인내심에 "정치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도" 경의를 표했다. - p.101

4월의 어느 늦은 저녁, 도고는 총리 관저의 집무실에 앉아서 그답게 직설적으로 질문을 꺼냈다. "총리 대신께서는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2~3년은 더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노년의 신사가 대답했다. 도고는 일본이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의 전쟁은 물자와 생산력이 좌우합니다. 일본은 채 1년도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 p.103

6월 18일 워싱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장군들과 제독들을 만나 일본 침공으로 초래될 인명 손실을 논의했다. 최고위층은 규슈에서 35만명의 일본인이 70만명의 미군에 맞서 방어할 것으로 추산했다. 실제로는 일본군은 그 수치의 거의 3배에 달하는 90만명이 규슈 방어를 준비했다. 정규군만 해도 그랬다. 열 다섯살에서 예순살까지의 모든 남자와 열일곱살에서 마흔살까지 모든 여자가 국민의용전투대에 합류해야 했다. 전장식 머스킷, 화궁, 죽창, 쇠갈고리가 이들의 무기였다. - p.129

스파츠는 핵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서를 3번 접어 지갑에 넣고 다녔다. 어느날 스파츠가 샤워를 하는 동안 전령이 들어와 그의 바지를 가져가서는 세탁소에 보냈다. 미친 듯이 뒤진 끝에 지갑을 되찾았다. 명령서는 여전히 지갑 안에 있었다. 8월 1일 스파츠는 마닐라로 가서 일본 침공을 지휘할 맥아더 장군에게 핵폭탄과 다가올 히로시마 공격을 보고한다. 스파츠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나를 보고 말했다. 이것이 전쟁을 바꿀 것이오." - p.171

사람들에게 핵폭탄은 그저 좀 더 큰 폭탄일 뿐이라고 말하던 르메이도 깊은 인상을 받은 것같았다. 이 항공대 장군은 기자가 더 잘 알아보도록 폭탄이 일으킨 충격파를 손가락으로 짚어주었다. 르메이는 전문가다운 감탄의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작품이야." 그러나 머피는 깜짝 놀라서 다시 들여다 봤다. "나는 대단한 규모의 파괴, 적어도 거대한 폭탄 구덩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난 5주일 동안 이곳 마리아나에서 봤던 일본 도시들의 폭격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했다." - p. 185

육군대신 아나미 장군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강화회담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핵폭탄이라는 증거는 없으며 트루먼의 연설은 언제나 그렇듯 허세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을 숨기고 있었다. 그 날 일기를 보면 그는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했고 자신이 우라늄 폭탄의 영향에 관해 과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음을 인정했다. - p.198

경찰 보고서는 사실 지나친 걱정이었다. 일본 국민이 끔찍한 곤경에 처해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그러나 히로히토, 긜고 무조건적인 존경과 숭배에 길들여져 있는 그 측근들은 미세한 분노의 신호만으로도 심각한 위험을 느꼈다. 황궁은 언제나 우익의 반란, 2.26사건을 일으킨 광적인 젊은 군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했다. 이제 히로히토는 공산주의자들에 선동된 노동자, 농민의 소요를 더 걱정했다. - p. 221

라디오 도쿄가 천황의 연설을 방송하던 8월 15일 정오에도 미국의 폭격기들은 여전히 일본에 폭탄을 투하 중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아널드 장군은 그때까지 괌 섬의 사령부에 있었던 스파츠 장군에게 1천대의 폭격기를 출격시키라고 엄명 내렸다. 스파츠는 제509혼성비행전대의 7대를 포함하여 B-29 폭격기 843대를 끌어모았다. 173대의 호위 전투기가 떴기 때문에 항공대의 홍보관들은 1천대의 비행기가 일본 제국 공격의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 p.283

핵폭탄은 많은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스팀슨의 글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틀렸다. 그때의 상황에서는 11월 1일로 예정된 규슈 침공이 실제로 진행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리틀 보이와 팻 맨이 미군과 연합군의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일 자체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증강을 가리키는 첩보를 완강하게 일축했지만 해군 작전 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은 임시로 승인한 침공 계획을 재빨리 철회했다. 육군참모총장 마셜조차 다수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방안을 포함하여 애타게 차선책을 모색했다. 미군은 일본을 침공하는 대신 일본 국민을 굶기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 p.301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핵폭탄이 20만명을 살육했지만 그럼으로써 일본을 굴욕시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 오늘날까지 널리 믿어지는 정설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원폭보다 소련군의 참전이 더욱 결정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적어도 미국에게는 관용을 기대할 수 있지만(실제로도 그러했고) 스탈린에게는 어림없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만약 일본이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미군이 큐슈와 혼슈 서부에서 붙잡힌 사이 북쪽에서 소련군이 먼저 밀고 내려와서 도쿄를 점령했다면 천황을 비롯한 일본 지도부들은 푸이가 그러했듯 최소 시베리아 행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원폭 투하가 일본인들을 침략전쟁의 가해자에서 원폭의 피해자로 둔갑시켰다는 점이다. 냉전 시절 미소 핵공포 속에서 일본 지도자들은 원폭 기억을 자신들의 전쟁 책임에 대한 면죄부로 유리하게 써먹는데 성공했다. 직접 B-29를 조종하여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폴 티비츠 장군은 미국민의 전쟁 영웅에서 말년에는 수십만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살인마로서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텍사스 에어쇼에서는 원폭 투하를 재현했다가 "일본인들을 모욕했다"라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사과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정작 자신들은 무모한 침략전쟁으로 동아시아 주변국들에게 고통을 끼쳤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트루먼을 향해 "내 손은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오펜하이머나 이 책에 등장하는 스팀슨, 스피츠 등 핵무기 투하에 직접 관여했던 미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내린 결정에 죽는 날까지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했다. 과연 천황을 비롯하여 일본 지도자들 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핵폭탄이 떨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비인도적인 무기를 쓴 미국이 나쁜 탓이지 자신들이 우물쭈물하면서 항복을 늦추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라는 영화 역시 천황이 미국의 핵위협에서 일본 민족을 구했다는 얘기가 있을 뿐이다. 세상에는 왕후장상의 법도가 있으며 백성이란 군주를 위해서 마땅히 희생하는 존재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그들로서는 고귀한 천황이 나서서 백성을 위하여 총대를 매었다는 사실 자체가 황송한 일일테니 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태평양전쟁 서적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8월인가 싶다. 하지만 인문학 불모지인 국내에서는 여전히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책이 그리 흔치 않다. 태평양전쟁 통사는 5년 전에 글항아리에서 나온 <일본제국 패망사> 정도이다. 내가 감수를 맡았던 책이기도 하다. 이런 책이 보다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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