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 이야기 - 첨단 기술의 원점을 찾아서
정진오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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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이나 소설,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대장장이'라고 하면 드워프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근육질 땅딸보에 털보 수염을 한 드워프가 무기와 방어구 제작을 전담하는 것이 그쪽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스킬과 주문만으로 도구를 만드는 경우도 있더라만 반칙 아님? 열기로 후끈거리는 대장간에서 전심전력 망치를 휘두르며 온 몸으로 땀내를 풍기는 것이 대장장이의 마땅한 이미지이거늘.


<고블린 슬레이어>에 나오는 드워프 장인. 종족 특성 상 성격이 몹시 괴팍하면서 자신의 작품만큼은 투철한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워프의 모습은 원래 중세 시절 많은 대장장이들이 아무런 안전 장구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금속을 만지다보니 중금속에 노출되어 제대로 크지 못했던 것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더라. 그래서 드워프와는 정반대로 미형에 키가 훤칠한 위너 종족인 엘프와는 서로 상극이라는 설정. 손재주가 뛰어난데다 금속을 다룰 줄 알기에 문명 세계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고고한 엘프와 달리 술고래에 탐욕스럽고 속물 근성 가득하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썩 존중받지는 못한다. 이공계가 천대받는 건 판타지 세상도 마찬가지인 듯.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각인된 대장장이의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리들리 스콧의 2005년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올랜드 블룸. 뭐, 이쪽은 엘프가 대장장이를 하는 경우이고.


광석에서 원하는 금속을 뽑아내고 연마하여 도구로 만드는 것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자 부국 강병을 위한 수단이었기에 국가 차원의 극비 사항이었다. 따라서 대장장이들은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기술자로서 그만한 우대는 커녕, 높으신 분들 필요에 따라 무슨 열정 페이마냥 부려먹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일은 농사 이상으로 고되고 직업 훈련은 도제식이었으며 보수는 터무니없이 형편없다보니 대장장이는 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세습되는 구조였다고 한다. 안 그러면 누가 하겠음. 그 시절 그렇지 않은 직종이 있었겠냐만. 어릴 때부터 대장간에서 잔심부름으로 시작하여 괴팍한 아버지한테 머리통 작살나게 맞아가면서 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이들의 고달픔이 와닿는다. 비록 고생스럽기는 해도 그럭저럭 먹고는 살았다고. 어느 시대이건 남들에게 없는 전문 기술 하나 있으면 호구는 해결할 수 있는 법이라.


김홍도의 <대장간>. 모루 위에 집게로 쇠를 올려놓고 있는 초로의 영감님이 이른바 '집게잡이'라 하여 대장간 점주이자 전체 공정을 총괄하는 야장(冶匠, 대장장이), 망치질을 하는 아죠씨들은 대장장이에게 고용된 메질꾼. 그리고 뒷쪽에서 풀무질이나 아랫쪽에서 낫을 가는 일은 어린아이들이 맡고 있다. 즉, 풀무질에서 시작하여 메질꾼을 거쳐서 집게잡이가 되는 도제식 계급 구조를 보여주는 셈.


'대장간'이라고 하면 워낙 예스러운 이름이다보니 사극 속이라면 몰라도 요즘 세상에는 없을 것같지만 아직까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철공소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작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편찬한 <서울의 대장간>에서는 서울에 대장간이 네곳 남아 있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이 기피하는 3D업종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그나마도 오래지 않아 명맥이 끊어질 분위기라는데. 어쩌면 인간 대신 로봇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 매고 망치를 휘두르며 쇠를 담금질하는 날이 올지도. 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같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교유서가에서 지난 3월에 나온 신작 도서 <대장간 이야기>는 산업 혁명 이전 수천년 동안 첨단 기술의 현장이었고 근대화와 함께 이제는 우리 추억 속의 존재가 된 대장간을 다룬 에세이이다. 저자인 정진오 작가는 25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로 아마도 지금은 퇴직하신 듯 한데 한때 대장간에서 제2의 인생을 찾으려 했다는 괴짜. 그 대신 과거의 유물이 되어 그 흔적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우리 전통의 장인 정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오마이 뉴스에서 매주 연재한 칼럼을 엮은 것이라고 한다.

'대장간'이란 대장장이가 일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대장은 흔히 부대 지휘관을 가리키는 대장(大將)이 아니라 순 우리말이다. 언제부터 금속을 만지는 일을 대장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한 어원이 없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대장장이들을 찾아다니며 쓴 21가지 이야기가 있다. 인천에서 전통의 명맥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대장간들, 그리고 이런 대장간에 얽힌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 쓰고 있다. 기자 출신답게 생생한 필체 덕분에 마치 내가 대장간에 앉아 있는 양 우렁차게 귓가를 때리는 망치질 소리, 담금질하는 쇠 냄새, 화로에서 후끈하게 타오르는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다.

85세 대장장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로에서 지름 5센티가 넘는 굵은 쇠막대기가 누런 색깔로 달구어졌다. 대장장이는 커다란 집게로 그 쇠막대기의 끝을 잡고 바로 옆에 놓인 기계 해머 쪽으로 가져갔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로 해머 페달을 밟자 헤머 머리인 네모난 쇳덩이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 p.24

송종화 장인이 대장간에서 일자리를 처음 구한 것은 70년 전인 1953년 1월이었다. 그 대장간은 2023년 지금 일하는 곳에서 불과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황곡철공소.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겨울,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가 대장간에서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전쟁 통에 집에 폭격도 맞았다. 식구들이 밥 먹다가 맨몸으로 뛰쳐나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 어린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대장간에 들어갔다. - p.34

우리는 영화 <토르>를 볼 때마다 주인공 토르와 그가 휘두르는 망치에만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하지만 한번 쯤은 그 망치를 만든 대장장이 형제들의 솜씨에도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토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영어로 목요일을 일컫는 'Thursday'가 바로 '트로의 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앞으로 토르 시리즈가 계속된다면 영화 개봉을 목요일에 맞추어 잡으면 어떨까. - p.79

영조 임금은 대장장이들의 파철전을 비롯해 시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영조나 정조 때처럼 기술자나 상인들이 사농공상의 체계 속에서도 그나마 더 나은 대우를 받았던 호시절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뒤로 조선은 쇠퇴했고 힘없는 나라는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국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확은 1923년 저술한 <조선문명사>에서 "관리들의 탐욕과 침탈로 인하여 공업이 크게 쇠락하고 말았으니! 아! 쇠락한 때의 정치에 대해서는 차마 말조차 할 수 없도다."라고 조선 후기의 타락상을 한마디로 꼬집었다. - p.103

율곡 이이의 삶과 학문세계를 다룬 평전은 대부분 백사 이항복의 <백사집>을 인용하여 율곡이 대장간을 경영했던 일화를 빼놓지 않는다. "율곡은 해주에 살 때 대장간을 차리고 호미를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였다. 의리상 마땅히 해야할 것이라면 대인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행했다."는 내용이다. 율곡이 은퇴하여 처가인 해주에 머물 때 대장간을 했다는 얘기이다. - p.160

온갖 오염물질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갯벌과 바다는 그래도 잘 버티고 있다. 문제는 도구이다. 우리의 맨손어업 도구를 만들어낼 대장간이 문을 닫게 되면 그 도구는 어디서 날 것인가. 정부는 오랜 전통의 갯벌어로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겠다며 나섰지만 정작 갯벌어로의 도구는 우리 어민들의 손에 맞지도 않는 중국산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p.218

이순신은 왜적들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본떠 우리식의 또다른 조총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만이었다. 이순신은 이와 관련한 보고서를 임금에게 올리면서 그 주역인 대장장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고 포상을 요청하기도 했다. 임금이 읽을 문서에 노비인 대장장이 이름을 적는 일은 당시로서는 무척 용기있는 일이었을 게다. 임금에게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대신 대장장이들에게 그 공을 돌리는 일,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도 가능했을까. - p.234

대장간의 핵심 장비 중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망치를 내리쳐 모양을 잡는 모루가 있다. 그 '모루'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라는 말의 내력도 여간 궁금한 게 아니다. 대장간은 이처럼 우리 말의 작은 알갱이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간이다. - p.294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대량 생산하여 스마트폰에서 클릭 한번이면 어떤 물건이건 못 사는 것이 없는 세상에 아직도 수공업으로 망치 두들기며 연장을 만드는 대장간은 민속촌같은 데에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체험 학습하는 것 이외에 어디 수요가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대장간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엿장수들이 엿 자를 때 쓰는 가위라던가, 무당들이 굿할 때 쓰는 소품이라던가, 해녀들이 바다에서 굴을 딸 때 쓰는 어구같은 워낙 희귀하고 수요가 적어 공장에서 찍어내기에는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물건 말이다. 그조차 요즘은 값싼 중국산에게 밀리는 판국이라고 하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로는 대장장이들도 마찬가지. 그들로서도 그저 평생 하는 일이라 업이라고 생각하고 돈 따지지 않고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아버지의 일을 자식이 물려받는 시대도 아니니 대장장이가 사장되는 것도 시간 문제일 듯 하다. 안타깝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일본에서는 '와패니즈'의 영향인지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든 일본도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검이라며 선호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물론 영화와 일본 아니메가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환상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보기에는 일본도가 폼나잖음. 덕분에 일본도를 만드는 도공들이 꽤 있다고. 사실은 야쿠자들만 쓰는 거 아님? 유럽에서는 수공예품이 명품이라며 브랜드화되어 비싸게 팔린다. 여자들이 죽고 못사는 구찌라던가. 알고보면 죄다 중국 공장에 싸게 하청준거지만. 결국 이름값이고 사람들의 이미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그런 궁리를 할 방법은 없을까 문득 생각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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