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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분 -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
애니 제이콥슨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벌써 40여년이나 되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때에는 핵전쟁이 주제인 영상물이 많았던 것같다. 그때만 해도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소련이 건재했고 미국과 상호 공멸식 핵군비 경쟁에 여념이 없었으니 말이다. 대표적인 영화가 우리가 잘 아는 주지사 형님의 터미네이터 시리즈. 미국이 정신줄을 놓고 AI한테 핵무기 통제권을 넘겼다가 핵전쟁이 일어나면서 인간들은 멸망직전까지 내몰린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스럽게 미국인(그것도 백인 남자)이 세상을 구하지만. 그리고 그 놈을 지키기 위해 미래에서 터미네이터가 호위 무사로 넘어 온다는 뻔한 설정. 시리즈마다 존 코너도 바뀌고 빌런도 바뀌지만 주지사 형님은 고정 출연이람서.

터미네이터 도입부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위 "심판의 날" 스카이넷이 인구 밀도 따지지 않고 일정 거리마다 한방씩 먹이는 느낌.
물론 터미네이터야 핵전쟁과 인류 멸망은 곁가지에 불과하고 현실 세계에서 구형과 신형이 치고박고 싸우는 액션신이 주된 내용이지만, 핵전쟁으로 인한 대재앙을 다룬 영화로는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1959년작 <그날이 오면>과 1983년 미국 ABC방송국에서 만든 <그날 이후>이 있다. 토요일 저녁에 하는 주말의 명화같은데서 했던 것같은. 지금 본다면 조잡한 고전 영화이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고.
하지만 두 영화는 어디서 핵전쟁이 시작되었고 방사능 낙진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묘사하는지라 핵무기에 대한 경각심을 알려주는 교육용이라면 몰라도 영화로서의 재미는 그다지.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퓨쳐워 198X>라는 일본 애니가 기억난다. 국내명은 <가공스런 미래전쟁>. 그 시절 작명센스 보소. 미소 냉전이 절정이던 1980년대 소련 파일럿이 최신 전투기를 타고 서독으로 탈출하고 소련 스페스나츠가 출동하여 나토군과 교전이 벌어지면서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는 내용. 스케일이 전 세계 규모일 뿐더러, 유럽 평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기갑전과 공중전은 박진감 뿜뿜이다. 또한 소련의 ICBM을 우주 공간에서 레이저로 격추하는 것은 레이건 시절의 스타워즈 계획이 성공했다는 설정. 엄연히 반전 애니임에도 너무 리얼하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시민 단체들이 상영반대 운동을 벌였다는 뒷얘기도.

그림체는 완전 양키풍이지만 엄연히 일본인이 그린 일본 작품이람서. 버블 시절의 일본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명작임에도 반일 감정이 한창이던 시절 작품이라서 그런지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괴작 취급.
이제 미소 냉전이 끝난지도 30여년이 넘었다. 소련도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는 여전히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냉전 종식에도 불구하고 핵 보유국들은 그 때보다 더 늘어났다. 심지어 파키스탄, 북한처럼 가진 게 쥐뿔도 없는 나라들까지도 온 국민들이 풀을 뜯더라도 핵무기만큼은 있어야 한다며 핵군비 경쟁에 뛰어든 판국이다. 지난 1월 28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운명의 날 시계가 자정 89초 전으로 당겨졌다. 미소 군비 경쟁이 절정이었던 1980년대보다도 지금이 더 지구 종말의 위기에 가까워진 셈이다. 뭐 사람들 관심을 끌 궁리에 여념없는 과학자들의 약팔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언제라도 영화 속의 핵전쟁 아포칼립스가 어느 순간에라도 현실로 닥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단지 우리가 관심이 없을 뿐. 하긴 요즘은 핵무기나 외계인의 침공보다 좀비 때문에 인류가 멸망할 듯한.

문학동네에서 주목할 신작이 나왔다. 핵전쟁 가상 시나리오를 다룬 <24분>이다. 여기서 24분이란 북한이 발사한 ICBM이 워싱턴 상공에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저자인 애니 제이콥슨(Annie Jacobsen)은 밀리터리 분야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작가로 언론 기자이자 TV 프로그램 제작자. 아마존 스튜디오에서는 붉은 10월의 저자이자 밀리터리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 시리즈의 TV판 제작을 맡았다. 2016년에는 <펜타곤의 두뇌>라는 책으로 퓰리처상 역사 분야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고. 수상은 못한 모양.

저자 아주매. 주로 전쟁과 무기, 첩보 등을 다룬다고. 이런 건 여자가 가까이 할 것이 못된다며 거부감부터 앞세우는 울 집사람과는.
이 책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핵공포의 시대가 처음으로 시작된 지 80여년이 지난 현재,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한다. <퓨쳐워 198X>에 나오는 것마냥 양측 군대가 대치한 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순간과는 거리가 멀다는게 오히려 긴장감을 자아낸다랄까. 그리고 평양 근교에서 갑자기 한발의 ICBM이 발사된다. 사거리 15,000km를 자랑하는 북한의 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 화성-17였다. 실제로 북한은 몇번의 실패 뒤 2022년 11월 18일 시험 발사에 성공함으로서 미국은 물론 전세계 어디이건 핵무기로 때릴 수 있는 공격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 그 놈의 이밥에 고깃국은 못 먹어도 말이다.

딸래미 손잡고 신형 미사일 구경하는 김씨 아저씨. 세계적인 여류 밀덕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조기 특훈이랄지. 울 딸래미도 이랬으면.
ICBM이 향하는 곳은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심장부였다. 왜 북한이 미국을 향해 자멸이나 다름없는 핵공격을 감행하는지 이유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뜻밖에도 미국에게는 북한의 공격을 막을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한해 국방비가 북한 전체 GDP의 50배가 넘고 동맹국들에게는 MD 체제에 협조하라며 윽박지르던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 의외로 취약하다는 얘기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북한 미사일을 미국 대통령은 손가락 빨면서 지켜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몇 안 되는 방공 미사일이 발사되지만 죄다 빗나간다. 미국은 언제나 공격하는 쪽이지 공격받는 쪽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발사 24분 뒤 캘리포니아 중부 해안가에 300kt의 핵폭탄이 직격한다. 나가사키 이후 처음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순간이었다. 그것도 맨하탄 계획으로 인류에게 핵공포의 시대를 열었던 미국 자신에게 말이다.
핵 전쟁은 레이더 화면의 깜빡이는 신호로 시작된다. 북한 시간으로 오전 4시 3분, 해 뜨기 전 어두운 시각이다. 수도 평양에서 32km 떨어진 황량하게만 보이는 들판 지면에서 불과 얼마 안 되는 높이에서 거대한 불의 구름이 피어오른다. 북한의 강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즉 ICBM의 꼬리에서 뜨거운 로켓 배기가스가 뿜어나온다. 이 미사일은 이곳 흙바닥에 주차된 바퀴 22개 짜리 차량에서 발사된다. 분석가들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화성-17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 p.59(발사 후 0.4초) |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말한다. "북한이 미국을 향해 공격용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진술처럼 들린다.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말한다. "NORAD와 STRATCOM 지휘관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알래스카 주 지상 레이더 기지에서 2차 확인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자문위원에게 훈련상황이냐고 묻는다. "이런 훈련이 아닙니다." - p.97(발사 후 3분 15초) |
페어뱅크스 남동쪽 160km 떨어진 알래스카주 황야에서 조개껍데기 모양의 지하 저장고 문 여러 개가 활짝 열린다. 무게 2만2600kg, 높이 16미터에 달하는 요격 미사일이 프트그릴리의 미 육군 우주미사일방어사령부에서 공중으로 폭음을 울리며 날아간다. 요격 시스템의 목적은 미 본토를 핵 공격에서 제한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제한적'이라는 단어인데 이유는 요격 미사일이 도합 44발 뿐이기 때문이다. 2024년 초 기준으로 러시아는 1674발의 핵무기를 배치했고 그 중 대다수는 발사 대기 상태이다. 또한 중국은 500발 이상, 파키스탄과 인도가 각각 165발, 북한이 50발을 비축했다. 요격 미사일의 전체 보유량이 44발에 불과한 미국 요격 프로그램은 사실상 보여주기용이다. - p.117(발사 후 7분) |
그는 버섯구름을 본다. 목장주의 증조부가 1900년대 초반에 이 땅을 샀다. 포드의 자동차가 발명되기도 전이다. 버섯구름이 땅 위로 솟아오르는 걸 보면서 그는 자기 눈을 믿지 못한다. 몽장주의 소들은 열복사에 의해 털이 그을린 채 언덕으로 달려간다. 그는 홀로 서 있다. 늙고 벌거벗은 남자. 그는 1945년 7월에 태어났다. 맨하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이 암호명 트리니티인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고 실험한 때와 같은 해, 같은 달이었다. - p.198(발사 후 24분) |
뒤이어 워싱턴 교외 남쪽에 있는 미국의 중추부인 펜타곤에 두번째 ICBM이 떨어져서 펜타곤에 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워싱턴 전체가 잿더미가 된다. 미국은 북한의 핵공격을 막지 못했지만 그 대신 북한에 당한 것의 몇 배로 되갚아줄 능력은 있다. 20분 뒤 미 잠수함에서 발사된 트라이던트 핵미사일이 평양을 비롯하여 북한의 주요도시와 군사시설을 강타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북한 주민 수백만명이 먼지가 된다. 정작 그들 중에는 김씨 일가와 북한 지도부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이들은 평양에 멍청하게 앉아서 미국의 분노어린 공격을 기다리는 대신 이럴 때를 대비하여 건설한 핵벙커 속에 일찌감치 숨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벙커는 길게는 수십년 동안 자급자족하면서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먼 훗날에 땅 위로 기어나와서 자신들의 불장난으로 세상이 파멸한 모습을 감상할지도 모른다.

김정은은 마음만 먹으면 안전한 곳에 숨은 채 핵전쟁으로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놈들과 황야를 내달릴지도.
게다가 핵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북한은 최후의 발악으로 미국 상공에 EMP 폭탄을 터뜨려 미국 전체를 마비시킨다. 여기에 러시아와 중국 또한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공격으로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핵버튼을 누른다. 인류 멸망의 아마겟돈이 개막하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어수선한 시대에 흔히 보는 작가의 뇌피셜 가득한 가상 군사 소설이 아니다. 여기에는 저자가 독점적으로 인터뷰한 전직 미 국방부 장관, 핵잠수함 사령관, 대통령 자문 등 그 방면의 권위자들의 증언이 등장한다. 물론 북한에게 어느 정도의 핵능력이 있는지, 이 책에 나오는 것마냥 정말로 그럴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 대상이 러시아이건 중국이건 미국이 정말로 핵공격을 받았을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942년 8월 13일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맨하튼 프로젝트가 처음 발동했을 때 미국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들이 만들지 않아도 히틀러가 만들 것이고 적어도 나치보다는 먼저 만들어야 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고작 단 한발의 폭탄이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3년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고 공격을 당한 쪽보다 공격한 쪽이 오히려 겁을 먹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했다. 맨하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우리는 모두 개자식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며칠 뒤 일본의 항복으로 핵무기의 존재 가치는 사라졌다. 폐허가 된 일본 도시들의 참상은 인류가 가지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순간이 핵무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기왕 손바닥에 들어온 전지전능한 무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치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골룸처럼 말이다. 열강들은 너도나도 더 강력한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냉전이 끝난 뒤에도 정치인들의 탐욕은 핵공포 시대를 끝내지 못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자신을 비난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에게 핵공갈을 서슴치 않는다. 오늘날 인류는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누군가의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라도 한순간에 끝장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한편의 다큐멘타리를 책으로 감상한 느낌이다. 충격을 받기에는 충분하다. 과연 우리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이라도 우리가 아는 세상이 사라지고 폴아웃같은 아포칼립스가 열릴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