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비커밍 - 미셸 오바마 자서전
미셸 오바마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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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차에서 벌써 압도 되었다.

 

-내가 되다

-우리가 되다

-그 이상이 되다

 

이보다 더 멋진 목차를 본 적이 없었을 것 같은 강렬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내가 된 적이 있었지 싶다.

나는 우리가 된 적도 있었지 싶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이 된적은 있었을까?... 아니, 그 이상이 되고자 한적은 있었을까?...

 

오프라 윈프리 책들을 읽을 때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짐작했던 것 같다.

백인우월주의 속에서 성공한 오프라가 그래서 더 대단하고 위대해 보였었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이 말만으로도 그의 위대함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그것도 재선까지라니!!  책을 읽는 내내 이 부부의 위대함을 경탄해마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보았다.

 

미셸 부부를 보면 머리 좋은 사람이 정말로 부러워진다.

 

번역에 대해 내가 뭘 알겠냐마는 간혹 어떤 책은 번역이 더 매끄럽게 잘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싶은 책이 있더라.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러워서 번역한 책이란 느낌이 전혀 없이 수려했다. 번역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내가 읽는 내내, 이 책은 번역을 정말 잘했네 라는 감탄을 수 번 했으니, 번역 <김명남>, 이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도 남들이 자신을 낮잡아 본다거나 어른들이 자신의 공부를 돕는데 열의가 없으면 귀신처럼 알아차린다. 그래서 쌓인 분노를 막된 행동으로 표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나쁜 애들'이 아니다. 나쁜 환경을 견디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 평소 무덤덤하고 과묵하지만 어느 집단에서든 가장 직설적인 편인 우리 어머니는 그때 2학년 선생님을 일부러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최대한 상냥한 표현을 동원하여 당신에게는 아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으니 차라리 슈퍼마켓 계산원 일이 어울릴 거라고 조언해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은 우리가 정중하게 대하기만 한다면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라는 가설을 지지해주었다.

 

*나는 말했다. "사람들한테 호통 좀 치지 마세요, 할아버지." 혹은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한테 못되게 좀 굴지 마세요." 가끔은 이 말도 덧붙였다. "대체 무슨 일에 그렇게 화가 나시는 건데요?"

 

*그것은 곧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좀 내달라고 부탁하거나, 변변찮은 수입에서 한 푼이나마 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싫다"라는 대답을 수십 수백 가지 방식으로 듣다가 마침내 "좋다"라는 대답을 한 번 듣게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버락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가 말하는 희망은 내 희망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개천에서 난 용이 되는 것은 물론 훌륭한 일이지만, 개천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의지할 것은 전화였다. 1989년은 전화기가 주머니에 쏙 들어가던 시절이 아니었다. 문자메시지란 것도, 키스를 대신할 이모티콘도 없었다.

 

*내 친구들 중에는 잠재적 배우자를 겉에서부터 판단하는 사람이 많았다. 우선 외모와 경제적 저망을 따졌다. 그렇게 고른 상대가 설령 말이 안 통하거나 자신의 약한 면을 내보이기를 꺼리는 사람이더라도, 시간이나 결혼 서약이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버락은 완전히 성숙한 인간으로서 내 인생에 들어왔다. 처음 대화를 나눌 때부터 알 수 있었다. 그는 두려움과 나약함을 드러내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진실함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일터에서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더 큰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욕구와 바람을 흔쾌히 희생할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듯이, 결국에는 인식의 문제였다. 우리가 눈앞의 풍경을 어떻게 보기로 결정하는가에 달린 문제였다.

 

*낯선 사람이 어머니에게 미셸 오바마의 어머니 아니냐고 물으면,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러게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하고 대꾸한 뒤 보던 용무를 마저 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를 초대하여 받아들이자는 것, 그러면 아마 우리는 덜 두려워할 수 있을 테고, 덜 속단할 수 있을 테고, 쓸데없이 우리를 갈라놓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완벽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목표를 정해두고 그곳에 다다라야만 한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자신을 남들에게 알리고 들려주는 것,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는 것, 자신만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힘이 된다. 그리고 기꺼이 남들을 알고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내게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무언가가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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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고전선 7
키에르 케고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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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이 가장 엄밀한 의미로 밝혀져야 한다면, 죽음은 종국적인 것이고 종국적인 것이 죽음인 경우가 아니면 안 된다. 따라서 절망이라는 병이야말로 바로 그것이다. (...) 그와 반대로 절망의 괴로움은 도리어 죽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절망은 모든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증상과 비슷하다. 그는 누워서 죽음과 싸우고 있으면서도 죽을 수 없다. 죽도록 앓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최후의 희망인 죽음마저 없어진 절망을 뜻한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이라면 인간은 삶을 원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위험을 알게 될 때 인간은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위험이 크게 된 경우의 절망이란, 한 번 죽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자기에 대한 관계에 있는 의식, 즉 자기 의식이 결정적인 것이다. 의식이 증가할수록 의지가 증가하고 의지가 증가할수록 자기가 증가한다. 아무런 의지도 갖고 있지 아니한 인간은 결코 자기가 아니다. 그러나 의지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그만큼 많은 자기 의식을 갖게 된다.

 

*노인들로부터 종종 등을 수 있는 예전에 이러이러했다는 과거형은, 청년의 미래형과 똑같이 커다란 환상이다. 노인이나 청년이나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시를 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독에의 욕구는 인간의 내부에 정신이 있다는 표시이며, 또 거기에 있는 정신을 재는 척도이다. '다만 지껄이기만 하는 비인간들 내지 세상 사람들'은 고독에의 요구를 느끼고는 있으나, 다만 한순간이라도 고독해 있어야만 할 때는 마치 군서조처럼 곧 죽어버린다. 갓난아이가 자장가로 잠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기도하며 거기에 흠뻑 빠져들기 위한 전단계로서, 시끄러운 사교의 자장가가 마음을 가라앉혀주기를 바란다.

 

*육체의 죄는 비천한 자기의 모든 고집이다. 하나의 악마가 다른 악마의 도움으로 추방되긴 하나 나중의 악마가 먼저 악마보다도 더 악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신앙이란 '자기'가 자기 자신이며, 또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함에 있어서 신의 내부에 투명하게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 죄의 반대는 신앙이다. 그렇게 때문에 <로마서> 제 14장  23절에는, "신앙에 의하지 않은 모든 것은 죄"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죄의 반대가 덕(德)이 아닌 신앙이라는 말은, 기독교 전체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규정 가운데 하나다.

 

*분노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배우려고 한다면, 인간의 질투심을 연구라는 것이 좋다. (...) 질투란 은밀한 자기 경탄이다. 말하자면 헌신에 의하여 행복하게 되지않는다고 느끼는 경탄자는, 그 경탄의 대상이 시기하게 되는 것을 선택한다. 그렇게 되면 그가 말하는 것도 달라진다. 거기서 신은 그가 경탄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우스꽝스럽고 쓸모없는데다 기묘하고 엉뚱한 것이라고 말한다 경탄이란 행복한 자기 상실이며, 질투는 불행한 자기 주장이다.

 

*기독교계에 있어서 기독교를 변호하려고 처음에 생각한 자는, 사실상 유다 제 2호라고 해도 틀림없다. 그는 또한 키스로 배신한다. 다만 그의 배신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올바른 것과 선한 것을 알고 잇는 자는 이것을 행한다. 올바른 것을 행하지 않고 선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것과 선한 것을 모르고 있기 대문이다. 즉 부정을 행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행한 것은 무지의 소치다. 그렇게 때문에 덕은 知이며, 반대로 말하면 무지는 不德, 즉 죄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죄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인간에 대한 온갖 비꼼이고 고소에 겹친 고소이며, 신이 고발자가 되어 인간에 대하여 제기하는 고소장이다.

 

*신앙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대립자인 악마적인 인간에 있어서도, 죄 그 자체의 일관성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대주가(酒家)는 하루라도 정신이 말짱해 있으면 닥쳐올 무기력과 이것이 가져올 여러가지 결과가 두려워 날마다 끊임없이 취한 상태로 있을려고 하는데, 악마적인 인간도 그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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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친구야 웅진 우리그림책 21
강풀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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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마을을  참 잘 그렸다.

정말 내 앞에 눈이 소리없이 소복소복 쌓이며 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어.

개와 쥐 심지어 다른 고양이랑 이야기한 건 처음이야.

누군가에게 말을 걸면 나도 혼자 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이에게 한 고양이의 이 말이 참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누군가와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 누군가와 이야기했기 때문에 마음 아픈 경우도 있다는 것이 슬프다.

 

적절한 것이 가장 즐겁다는 진리, 그 중도의 아름다움이 마냥 그립고 부럽다.

 

 

-강풀(지은이)의 말

내가 쓴 이야기는 어쩌면 아이가 읽을 동화책에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읽을 동화책인데, 세상은 아름답다거나,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너는 최고다, 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심지어 뭔가를 하려다가 잘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결국 이 이야기로 동화작업을 했다.
난 내 아이가 누구보다 최고이기를 바라지도 않고, 세상은 사실 아름답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내 아이가 공부를 잘 하건 못하건 어떤 뭘 하고 싶어하건 상관없다.
알아야 할 것을 미리 알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자라나면서 스스로 경험하고 알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저 진심을 담아서 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
내가 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으니 이 책을 읽는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도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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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난 고구려 왕자 푸른숲 역사 동화 10
백승남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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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소수림왕의 동생,

그 고국양왕의 청소년기 일부를 아주 잘 엮어서 만든 이야기이다.

 

고구려 무덤의 벽화에 있는 어느 젊은이가 생명을 받아 이야기로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도 잘 엮은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울창한

자연의 모습이 글에서 말하는 대로 상상이 되었다.

나도 그런 자연 속에 있고 싶다는, 그런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일기도 했다.

 

토속신앙 속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는 이러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전쟁이 잦은 옛날에 비하면 지금의 평화가 얼마나 고마운지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고국양왕에 대한 이야기라는데서 상당히 매력있었으며,

그 시대로 돌아가 작가의 상상과 역사를 얼버무려 이야기를 멋드러지게 엮은 재주가

참 대단했다.

 

<사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 봐. 사무를 모셔 가려는 건 고구려를 위해서냐, 너를 위해서냐?>

우리의 정치인들도 이 책의 이련처럼 이런 의문을 늘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들이 하는 일이 나라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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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 암, 임사체험, 그리고 완전한 치유에 이른 한 여성의 이야기
아니타 무르자니 지음, 황근하 옮김 / 샨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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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아일여(梵我 一如), 그대의 영혼이 온 세상이니라.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에도 나오는 말이다.

 

그간 내가 책을 통해서, 유튜브를 통해서, 한마음 선원에서도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아니타 무르자니, 그녀가 똑같이 하고 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다는 말까지!!

범아일여까지!!

그녀의 경험이 나를 휩싸고 되고,

그녀의 경험이 내겐 어느것보다 논리적으로 들리며,

그간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까지 모두 해결해 주어서 참 고맙다.

그녀의 논리가 내 삶의 목적이어야 할 것 같다.

가장 확실해서 거부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것, 세상의 진실!!

 

한마음 선원에서는 예불 마지막에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고 서로를 향해

"성불하십시요!"라는 말을 한다.

감히 성불을? 이라는 마음이 가로막고 있어서 나는 여태 이 말을 뱉어내지를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성불하십시요!"

 

큰 스님들은 이 진리를 수행을 통해서 알게 되고,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알게 되며,

저자는 임사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면

나는 무엇을 통해 이 세상의 진실을 경험하게 될까...

 

양지와 음지가 같이 있듯,

죽음이라는 고통과 그 후의 평안이 함께임을 알겠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야 나를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

나의 생각은 망상임을 알겠다.

분별은 나를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겠다.

한마음 선원 법당에 걸려 있는,

<나 하나를 버린다면 모든 것이 잠자고 쉬게 되니 삼세에 걸림 없는 자유인이 된다>는

이 말의 의미를 아니타 무르자니는 임사체험으로 경험했고, 그녀의 글을 읽어보니

나도 이제는 짐작은 됨직하다.

 

천지의 근본도 내 한마음이요, 태양의 근본도 내 한마음이라 하고선, 나를 버리라 한다.

나를 버리면 나를 찾는다 한다. 내가 없어야 나를 볼 수 있다 한다.

눈물과 기쁨이 둘이 아니라 한다.

법을 설했는데, 법을 설한 바가 없다고 한다.

함(do)이 없는 함이라야 진정한 함이라 한다.

색즉시공공즉시색이라 한다.

진공묘유有라니,

제행무상常이라니 ......

내 보기에 이것이 불교의 묘미이자 백미이며, 나는 이것을 알고 싶다.

 

법상스님의 유튜브를 보다가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인연따라 이 책은 시기적절하게 나에게 참 잘 왔다.

고마운 책이다. 감사한 책이다.

 

 

 

 

 

 

*비록 육신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나는 시시각각으로 주변은 물론 멀리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하나하나 젛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 인지 능력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내가 의식 상태에서 신체감각을 사용할 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것이 그냥 느껴지고 이해되는 듯했다.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까지도 파악되었다.

 

*나는 더이상 오감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인식 능력은 제한이 없었다. 마치 우리가 갖고 있는 보통의 감각보다 훨씬 고양된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360도 시야각으로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 모든 말이 놀랍게 들리겠지만, 그때는 그것이 정상적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오히려 몸 안에 있는 게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는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저 장엄할 뿐이라는 앎이 나를 가득 채웠다.

 

*나는 또 예전에 믿었던 것처럼 암(cancer)이 내 잘못에 대한 처벌도 아니요, 내가 한 어떤 행위의 결과로 암이라는 악업을 경험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매순간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 있고, 시간의 한 지점이란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결정과 선택, 생각 들의 정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 수많은 두려움, 그리고 나의 엄청난 힘이 바로 이 병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확장되는 느낌, 명징함,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됨의 느낌 등을 이야기했다. 아무런 판단도 받지 않는, 지극히 크고 조건없는 사랑만을 느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희생자는 물론 모든 범죄자와 테러범에게도 연민 이외에는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그들 안에 혼란과 좌절, 고통과 자기 증오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임을 난생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충분히 누리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 있으면 즐겁고 남들에게 조건 없이 사랑을 줄 뿐이다.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병들어(감정적으로) 있어야만 했다. 사실 이는 암에 걸린 것과 상당히 비슷했다. (...) 이 모든 것은 내가 더 이상 세상을 '우리'와 '그들'의 관점으로, 즉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점으로 불 수 없게 되었음을 뜻했다. '그들'은 없었다. 오직 '우리'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이며, 우리 스스로가 창조한 산물이자,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과 믿음의 산물이었다. 가해자들조차도 그들 자신의 자기 증오와 고통의 희생자들이었다.

 

*나는 또 내가 그다지 영적이지 못하며, 따라서 그 방면에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믿든 우리는 모두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바로 영적인 존재, 그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실을 늘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란 오직 자신을 사랑함으로써만, 자기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가슴을 따름으로써만, 그리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함으로써만 얻어진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 상황을 물리적으로 바꾸려 하는 대신 내 내면 세계를 들여다본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안하거나 불만스럽거나 할 때면 나는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 느낌을 먼저 들여다 본다. 그리고 혼자 앉아 있는다든지, 자연 속을 걷는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하면서 고요하고 차분한 중심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렇게 할 때 외부 세계 또한 바뀐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실제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장애물들이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는 분리하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행복과 슬픔이 빛과 어둠처럼, 음과 양처럼 맞물려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떨어져 있다는 느낌은 한갓 이원성(duality)이라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원성의 환상 때문에 일견 분리되어 보이는 것들이 하나임(oneness)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중심에 닿아 있다는 것은 이를 꿰뚫어본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만유의 중심', 바로 '하나의 중심'에 있는 우리의 무한한 자리를 다시 한 번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친구가 몇 명 생기기는 했지만-특히 내 경험을 나 스스로 이해해고 소화하도옥 크게 도와준 친구들-옛날 친구들 대부분과는 다시 가까워지기가 힘들 것 같다. 옛날처럼 사교적으로 되지도 않거니와 전에 했던 일들도 더 이상 즐겁지가 않다.

 

*내 인생이 아무런 방향성도 없이 부유하고 있는 듯한 순간에도 나는 인도를 받으며 이끌려지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임사 체험 동안 내가 느낀 것을 여전히 신뢰했고, 만사가 순조롭게, 되어야 할 바대로 되어가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를 벌주는 이는 따로 없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한 것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였음을 나는 마침내 이해했다. 나를 판단한 사람, 내가 저버린 사람, 내가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다른 누구와도 관계가 없었다. 내가 마치 우주의 아름다운 아이처럼 보였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 사랑을 받기 위해 내가 뭔가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도도 간청도 그 밖에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우리가 모종의 방식으로 '믿으면' 질병을 없앨 수 있다거나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때로 지나치게 단순화한 주장일 수 있다. 그것보다 나는 자기 자각(self awarenss)에 더 주목하는 편이다. (...) 자각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아무런 판단 없이 그저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가능한지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알아차리는 데에는 방어가 필요하지 않다. 알아차림 상태는 점점 더 커나갈 수 있고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를 하나임의 상태에 더 가까워지게 해준다. 바로 여기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반면 믿음이란 우리가 믿는 것만을 허용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제외해 버린다. 분명히 말하건대 내 병을 맛게 한 것은 나의 믿음이 아니었다. 임사 체험은 순수한 알아치림의 상태였고, 전에 가졌던 모든 주의와 신조가 완전히 중지된 상태였다. 바로 이 상태가 내 몸을 스스로 '제건'하게 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낫기 위해서는 믿음을 완전히 버려야 했다.

 

*나는 임사체험 상태에 있을 때 온 우주는 조건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는 그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우리가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 대신 그저 자신에게 진실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 에너지의 도구가 되며, 그렇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임사 체험을 하는 동안 나는 우주 에너지 전체와 하나였기 때문에 나의 거대한 앎(awareness)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전체를 다 망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명료했고 모든 것이 다 파악되었다. 나는 모든 것이 된 것 같았고, 내가 모든 것 안에 존재했다.

 

*사실 자신의 장엄함을 깨닫고 우리의 진정한 본성인 사랑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동시성에 의해 자기에게 딱 맞는 선생이나, 책, 영적인 사상을 끌어당기게 된다. 아주 딱 맞는 때에 말이다!

 

*모든 것은 시간의 그 지점에서 응당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 중심에 더 연결되어 있다거나 혹은 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자기 안에 있는 그 무한한 공간을 알아보는 자기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기도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음악이나 미술일 수도 있다. 혹은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심지어는 지식이나 기술을 추구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런 것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장엄함을 더욱 잘 인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기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내부의 자기만의 열정에 연결되고, 선적禪的인 상태가 되며, 삶에 의미와 합일의 느낌을 주는 쪽으로 살기를 선택할 때 우리는 자신의 장엄함을 느낄 수가 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것을 끌어온다'와 같은 말은 포괄적이긴 하지만 늘 타당한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말은 힘든 기시를 지나고 있는 이들한테는 더욱 힘든 말이 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부정적인 것들을 더 많이 끌어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 또 단순히 긍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고 해서 꼭 긍정적인 것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아니다. 이는 정말이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텐데,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지'가 실제로 삶의 조건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긍정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이 들 때 나는 그 느낌을 그대로 허용한다. 감정을 꼭꼭 담아두는 것보다는 그런 감정을 생생히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지금의 내 느낌에 저항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냥 '허용'한다는 말이다. 판단 없이 허락하는 바로 이 행위가 자기 사랑의 행위다. 이처럼 스스로를 친절하게 대하는 행위가 거짓을 긍정적인 척하는 것보다 삶을 훨씬 더 즐겁게 해준다.

 

*임사체험에서의 깨달음 덕분에 나는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 스스로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되었다. 나는 안전하다는, 나는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받고 또 맏아들여진다는 말이 내 안에서 들려올 때, 나는 이 에너지를 바깥으로 퍼뜨리게 되고 그에 따라 내 주변의 세계도 바뀌게 된다.

 

*임사체험하는 동안 나는 내 몸이 물질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나는 그저 순수한 에너지였지요. 아마도 이것을 영혼(soul)아나 영(spirit)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그것은 몸보다 훨씬 컸고, 그래서 내가 '장엄하다'는 표현을 쓰는 거지요. 그 상태에서 내가 정말 그렇게 느꼈거든요. 물질적인 자아가 있다는 건 꼭 나중에 덧붙인 생각인 것만 같았어요. 이 무한한 에너지 덩어리가 진짜 나였고, 몸은 그저 이 생명력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들어오는지' 혹은 표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에 지나지 않았지요. 마치 3차원 세상은 다른 차원의 것이고, 내 에너지 덩어리가 실재라고 느껴졌어요.

 

*만일 어떤 종교가 자신들이 받드는 신보다 당신이 더 작은 존재라고 느끼게 만든다면, 그것 둘 중 하나에요. 당신이 그 종교를 잘못 해석한 것이거나, 그 종교가 당신에게 진실을 잘못 가르친 것이거나. 또 어떤 스승이나 현자가 당신이 '아직' 깨어나지 못했으며, 깨어나려면 '배우고' '버리고' '내려놓아야'할 게 더 남아 있다고 느끼게 한다면, 그들 또한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거에요. 아니면 당신이 그들의 말을 잘못 해석했거나.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은 '단 하나', 당신은 이미 당신이 찾는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당신만의 독특함을 두려움 없이 표현하기만 하면 됩니다. 맘껏이요! 그것이 바로 당신이 지금 이 모습으로 살고 있는 이유이고, 여기 이 물질 세상에 와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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