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수업 - 삶을 창조하는 법상 스님의 마음학교 1
법상 글.그림 / 무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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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 쪽에 온 자연이, 정성이 다 담겨있음을 알았다.

그런 사과가 내게로 왔다.

감사합니다, 스님!

 

 

 

 

 

 

*이것!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이 자리에 깨어 있을 수 있는 것, 이 자리로 가져다 주는 것! 그것만이 실재입니다. 내가 온전히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때 모든 걸 포용하게 되고, 내가 완전히 觀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 내 인생에서 뭔가 껄끄러운 평상심에서 벗어나는 무언가의 경계가 나타난다면 '아, 이게 바로 나를 붙잡는 방어벽이구나. 이게 바로 나의 행복과 자유로움과 깨달음을 방해하는 방어벽이구나'하고 바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포용하길 바랍니다. 나한테 오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용하기 바랍니다. 허용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진리는 나에게 엄청난 파동으로 파도쳐 들어올 것입니다. 그 파도쳐 들어오는 것을 내가 막지만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이미 수도 없이 경험해 보았고, 전혀 새롭지 않으며 다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없이 매 공양 시간을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전혀 새로운 일을 할 때나 전혀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날때는 어때요? 온 감각이 다 깨어나고, 집중하게 됩니다. 그것처럼 밥 먹을 때도 밥 먹는데 온전히 집중하게 되면서 깨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밥 먹을 때 오직 밥만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뿐만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이다.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e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느 ㄴ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단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덤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켜보는 것이 바로 나의 본체이고 당체입니다 그래서 '관찰하라' '깨어 있으라' '어떤 놈이 관하고 있는가 그것을 돌이켜 보아라' '보는 놈을 돌이켜 보아라' 하는 얘기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본다는 것, 주시한다는 것, 분별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그 상황을 지켜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순간순간 부처로 만들어 준다 이 말입니다.

 

*현실을 창조하려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어야 합니다. 맑고 깨끗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깨끗하고 텅 비어 있을 때 어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강력한 에너지를,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항상 혼란스럽고 망상이 들끌고 온갖 생각들이 죽 끓듯이 왔다갔다 오락가락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도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니 한 가지 원하는 것에 힘이 집중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잘하는 말로 몰입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흐트러져 우리 마음에너지를 강력하게 쓸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명상과 기도 끝에 하는 발원이 힘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창조해 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원하던 모든 것이었음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깨달을음 얻고자 하는 모든 목적이 자비와 사랑에 있다면, 사실 내가 수행을 해 나가면서, 마음공부를 해 나아가면서 또 절에 다니면서, 내가 어느 정도 마음공부가 되었느냐, 내가 어느정도 영적으로 성숙되었느냐, 나의 삶에 어떤 진보가 있었느냐, 내가 조금 더 깨달음에 가까워졌느냐, 이것을 살펴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얼마만큼 자비로워지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절에 다니기 전보다 절에 다니면서 조금 더 자비로워졌느냐, 무자비하고 악의에 찬 화와 증오에 물든 행동을 얼마만큼 더 줄여 나아가고 있느냐, 내가 많은 사람들을 볼 때 얼마만큼 더 사랑이 깊어지고 있느냐, 내 마음이 사랑과 자비로 넘쳐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내가 얼마만큼 수행이 되어가고 있고, 얼마만큼 삶을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판가름해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잣대가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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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oming 비커밍 - 미셸 오바마 자서전
미셸 오바마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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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차에서 벌써 압도 되었다.

 

-내가 되다

-우리가 되다

-그 이상이 되다

 

이보다 더 멋진 목차를 본 적이 없었을 것 같은 강렬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내가 된 적이 있었지 싶다.

나는 우리가 된 적도 있었지 싶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이 된적은 있었을까?... 아니, 그 이상이 되고자 한적은 있었을까?...

 

오프라 윈프리 책들을 읽을 때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짐작했던 것 같다.

백인우월주의 속에서 성공한 오프라가 그래서 더 대단하고 위대해 보였었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이 말만으로도 그의 위대함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그것도 재선까지라니!!  책을 읽는 내내 이 부부의 위대함을 경탄해마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보았다.

 

미셸 부부를 보면 머리 좋은 사람이 정말로 부러워진다.

 

번역에 대해 내가 뭘 알겠냐마는 간혹 어떤 책은 번역이 더 매끄럽게 잘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싶은 책이 있더라.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러워서 번역한 책이란 느낌이 전혀 없이 수려했다. 번역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내가 읽는 내내, 이 책은 번역을 정말 잘했네 라는 감탄을 수 번 했으니, 번역 <김명남>, 이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도 남들이 자신을 낮잡아 본다거나 어른들이 자신의 공부를 돕는데 열의가 없으면 귀신처럼 알아차린다. 그래서 쌓인 분노를 막된 행동으로 표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나쁜 애들'이 아니다. 나쁜 환경을 견디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 평소 무덤덤하고 과묵하지만 어느 집단에서든 가장 직설적인 편인 우리 어머니는 그때 2학년 선생님을 일부러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최대한 상냥한 표현을 동원하여 당신에게는 아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으니 차라리 슈퍼마켓 계산원 일이 어울릴 거라고 조언해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은 우리가 정중하게 대하기만 한다면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라는 가설을 지지해주었다.

 

*나는 말했다. "사람들한테 호통 좀 치지 마세요, 할아버지." 혹은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한테 못되게 좀 굴지 마세요." 가끔은 이 말도 덧붙였다. "대체 무슨 일에 그렇게 화가 나시는 건데요?"

 

*그것은 곧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좀 내달라고 부탁하거나, 변변찮은 수입에서 한 푼이나마 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싫다"라는 대답을 수십 수백 가지 방식으로 듣다가 마침내 "좋다"라는 대답을 한 번 듣게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버락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가 말하는 희망은 내 희망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개천에서 난 용이 되는 것은 물론 훌륭한 일이지만, 개천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의지할 것은 전화였다. 1989년은 전화기가 주머니에 쏙 들어가던 시절이 아니었다. 문자메시지란 것도, 키스를 대신할 이모티콘도 없었다.

 

*내 친구들 중에는 잠재적 배우자를 겉에서부터 판단하는 사람이 많았다. 우선 외모와 경제적 저망을 따졌다. 그렇게 고른 상대가 설령 말이 안 통하거나 자신의 약한 면을 내보이기를 꺼리는 사람이더라도, 시간이나 결혼 서약이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버락은 완전히 성숙한 인간으로서 내 인생에 들어왔다. 처음 대화를 나눌 때부터 알 수 있었다. 그는 두려움과 나약함을 드러내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진실함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일터에서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더 큰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욕구와 바람을 흔쾌히 희생할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듯이, 결국에는 인식의 문제였다. 우리가 눈앞의 풍경을 어떻게 보기로 결정하는가에 달린 문제였다.

 

*낯선 사람이 어머니에게 미셸 오바마의 어머니 아니냐고 물으면,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러게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하고 대꾸한 뒤 보던 용무를 마저 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를 초대하여 받아들이자는 것, 그러면 아마 우리는 덜 두려워할 수 있을 테고, 덜 속단할 수 있을 테고, 쓸데없이 우리를 갈라놓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완벽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목표를 정해두고 그곳에 다다라야만 한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자신을 남들에게 알리고 들려주는 것,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는 것, 자신만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힘이 된다. 그리고 기꺼이 남들을 알고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내게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무언가가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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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고전선 7
키에르 케고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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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이 가장 엄밀한 의미로 밝혀져야 한다면, 죽음은 종국적인 것이고 종국적인 것이 죽음인 경우가 아니면 안 된다. 따라서 절망이라는 병이야말로 바로 그것이다. (...) 그와 반대로 절망의 괴로움은 도리어 죽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절망은 모든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증상과 비슷하다. 그는 누워서 죽음과 싸우고 있으면서도 죽을 수 없다. 죽도록 앓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최후의 희망인 죽음마저 없어진 절망을 뜻한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이라면 인간은 삶을 원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위험을 알게 될 때 인간은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위험이 크게 된 경우의 절망이란, 한 번 죽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자기에 대한 관계에 있는 의식, 즉 자기 의식이 결정적인 것이다. 의식이 증가할수록 의지가 증가하고 의지가 증가할수록 자기가 증가한다. 아무런 의지도 갖고 있지 아니한 인간은 결코 자기가 아니다. 그러나 의지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그만큼 많은 자기 의식을 갖게 된다.

 

*노인들로부터 종종 등을 수 있는 예전에 이러이러했다는 과거형은, 청년의 미래형과 똑같이 커다란 환상이다. 노인이나 청년이나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시를 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독에의 욕구는 인간의 내부에 정신이 있다는 표시이며, 또 거기에 있는 정신을 재는 척도이다. '다만 지껄이기만 하는 비인간들 내지 세상 사람들'은 고독에의 요구를 느끼고는 있으나, 다만 한순간이라도 고독해 있어야만 할 때는 마치 군서조처럼 곧 죽어버린다. 갓난아이가 자장가로 잠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기도하며 거기에 흠뻑 빠져들기 위한 전단계로서, 시끄러운 사교의 자장가가 마음을 가라앉혀주기를 바란다.

 

*육체의 죄는 비천한 자기의 모든 고집이다. 하나의 악마가 다른 악마의 도움으로 추방되긴 하나 나중의 악마가 먼저 악마보다도 더 악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신앙이란 '자기'가 자기 자신이며, 또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함에 있어서 신의 내부에 투명하게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 죄의 반대는 신앙이다. 그렇게 때문에 <로마서> 제 14장  23절에는, "신앙에 의하지 않은 모든 것은 죄"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죄의 반대가 덕(德)이 아닌 신앙이라는 말은, 기독교 전체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규정 가운데 하나다.

 

*분노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배우려고 한다면, 인간의 질투심을 연구라는 것이 좋다. (...) 질투란 은밀한 자기 경탄이다. 말하자면 헌신에 의하여 행복하게 되지않는다고 느끼는 경탄자는, 그 경탄의 대상이 시기하게 되는 것을 선택한다. 그렇게 되면 그가 말하는 것도 달라진다. 거기서 신은 그가 경탄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우스꽝스럽고 쓸모없는데다 기묘하고 엉뚱한 것이라고 말한다 경탄이란 행복한 자기 상실이며, 질투는 불행한 자기 주장이다.

 

*기독교계에 있어서 기독교를 변호하려고 처음에 생각한 자는, 사실상 유다 제 2호라고 해도 틀림없다. 그는 또한 키스로 배신한다. 다만 그의 배신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올바른 것과 선한 것을 알고 잇는 자는 이것을 행한다. 올바른 것을 행하지 않고 선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것과 선한 것을 모르고 있기 대문이다. 즉 부정을 행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행한 것은 무지의 소치다. 그렇게 때문에 덕은 知이며, 반대로 말하면 무지는 不德, 즉 죄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죄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인간에 대한 온갖 비꼼이고 고소에 겹친 고소이며, 신이 고발자가 되어 인간에 대하여 제기하는 고소장이다.

 

*신앙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대립자인 악마적인 인간에 있어서도, 죄 그 자체의 일관성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대주가(酒家)는 하루라도 정신이 말짱해 있으면 닥쳐올 무기력과 이것이 가져올 여러가지 결과가 두려워 날마다 끊임없이 취한 상태로 있을려고 하는데, 악마적인 인간도 그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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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친구야 웅진 우리그림책 21
강풀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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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마을을  참 잘 그렸다.

정말 내 앞에 눈이 소리없이 소복소복 쌓이며 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어.

개와 쥐 심지어 다른 고양이랑 이야기한 건 처음이야.

누군가에게 말을 걸면 나도 혼자 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이에게 한 고양이의 이 말이 참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누군가와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 누군가와 이야기했기 때문에 마음 아픈 경우도 있다는 것이 슬프다.

 

적절한 것이 가장 즐겁다는 진리, 그 중도의 아름다움이 마냥 그립고 부럽다.

 

 

-강풀(지은이)의 말

내가 쓴 이야기는 어쩌면 아이가 읽을 동화책에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읽을 동화책인데, 세상은 아름답다거나,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너는 최고다, 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심지어 뭔가를 하려다가 잘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결국 이 이야기로 동화작업을 했다.
난 내 아이가 누구보다 최고이기를 바라지도 않고, 세상은 사실 아름답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내 아이가 공부를 잘 하건 못하건 어떤 뭘 하고 싶어하건 상관없다.
알아야 할 것을 미리 알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자라나면서 스스로 경험하고 알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저 진심을 담아서 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
내가 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으니 이 책을 읽는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도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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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난 고구려 왕자 푸른숲 역사 동화 10
백승남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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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소수림왕의 동생,

그 고국양왕의 청소년기 일부를 아주 잘 엮어서 만든 이야기이다.

 

고구려 무덤의 벽화에 있는 어느 젊은이가 생명을 받아 이야기로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도 잘 엮은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울창한

자연의 모습이 글에서 말하는 대로 상상이 되었다.

나도 그런 자연 속에 있고 싶다는, 그런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일기도 했다.

 

토속신앙 속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는 이러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전쟁이 잦은 옛날에 비하면 지금의 평화가 얼마나 고마운지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고국양왕에 대한 이야기라는데서 상당히 매력있었으며,

그 시대로 돌아가 작가의 상상과 역사를 얼버무려 이야기를 멋드러지게 엮은 재주가

참 대단했다.

 

<사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 봐. 사무를 모셔 가려는 건 고구려를 위해서냐, 너를 위해서냐?>

우리의 정치인들도 이 책의 이련처럼 이런 의문을 늘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들이 하는 일이 나라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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