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운명과 분노 ㅡ 로런 그로프 , 정연희 역
, 문학동네
다른 이들의 삶은 파편들처럼 한데 모아진다 . 하나의 분리된 이야기를 비추던 조명이 어둠 속에 머물러
있던 또하나의 이야기를 밝힐 수 있다 . 뇌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피조물이다 . 파편들은 제 힘으로 한데 모여
전체를 만든다 .
( 본문 561 쪽 )
이 책엔 한 사람 , 한 사람 , 한 남자 , 한 여자의 인생이 송두리째 들어있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결혼이라는 행위로 묶인 두사람의 결합된 삶이 ,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에 매 장을 넘길 때마다 압축된 폴더를 열듯 운명과 분노를 읽다보면 한
사람에게 배당되는 인생 총량의 길흉화복이란 , 참으로 공평하게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는 인생의 달란트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만다 .
처음부터 말했듯 책의 반은 예정된 수순처럼 너무나 뻔했지만 , 또 그것들이 왜 거기있는지 모른채
읽어내려 가야 했지만 남은 책의 반 , 이후부터 마지막까진 그것들이 왜 거기 있어야 했나를 차근차근 꺼내 우리에게 보여주므로 마치 누군가의
인생을 슬라이드 필름에 넣고 돌려 보는 것 같았다 .
그래서 분노 편이 너무 압도적이다보니 앞의 운명 편이 없었다거나 조금 축소된 채로 발표가 되었데도
어느 정도 상상으로도 이해가 가능한 지점에 있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
그러니까 운명에 크게 실망 할수록 분노에 더 뜨겁게 반응하게 된다 . 그렇기에 어쩌면 반대로 분노의
편에 실망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 그렇다면 역시나 운명의 편에서 깊게 동조를 하지 않을까 ? 사랑을 경험해봤던 이라도 , 혹은 아직
사랑의 경험이 없어 운명이라거나 , 사람에 대한 배신이나 분노가 이해 불가의 미지 영역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같은
부부를 애틋하게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단정마저 마구 내려버리고 싶어진다 .
단적인 예로 마틸다의 생에 있어 태양같은 존재인 로토와 , 로토에게 있어 한 점 의혹없이 수많은
사랑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사랑으로 마침표를 찍게 한 확신의 여신이자 달과 같은 마틸다 . 겨울의 추위가 있어 따듯함을 갈구하게 되고 ,
여름의 뜨거움에 있어 시원함을 갈망하게 되듯이 서로를 희구하게 된 젊음들 .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마지막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
삶의 이면들을 잔뜩 가진 비밀스런 사람들 . 그건 로토는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고 , 그도 모르는 사이 비밀이 만들어져 있었다 . 좋은 환경이 있었던데 반해 그를 스쳐지나간 여자들의 과거는 불행해졌다 . 대체로
사랑의 뜨거움에 불행해졌다 . 특히 로토의 어머니와 연관되면 더 그렇게 되었다 .
그리고 정반대의 환경을 가진 마틸다는 좀더 밝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로토를 희망했고 , 그 희망은
로토의 어머니 앞에서 꺽일뻔 했지만 그녀는 대립하는 마녀들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그래서 로토와 마틸다는 가난한 청춘을 보내야 했다 .
누구보다 능력이 출중한 청춘이었던 이들은 젊음을 그렇게 애쓰느라 지쳐가기도 한다 . 그리고 로토에겐
늘 껌처럼 달라붙어 있는 친구들 몇이 있는데 , 그 친구들 역시 비밀을 가진 친구로 어릴 때 누이가 로토의 아이를 낳고 우울증을 앓다 자살한
것을 로토에겐 사고사로 말하고 계속 로토의 곁에 머물러 있는 친구가 있고 , 그 외에 여전히 로토를 사랑하지만 마틸다를 어쩌지 못하는
여자친구들이 언제고 기회가 되면 마틸다 자리를 노리며 오랜 친구들 노릇을 하고 있다 . 하지만 늘 자신만 의식하는 로토는 다른 사람의 삶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 또 누구도 그에게 그늘의 삶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 그는 쇼윈도 안에 장식된 표본처럼 보기 좋게 있어야만 한다 .
그런 그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안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싶다 . 그가 몰랐기에 마틸다는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 내내 침묵을 비밀이 아니라는 , 거짓이 아니라는 자기 위로를 끌어 안고 , 곁에서 언제든 위협해 오는 로토 주변사람들의
뾰쪽함을 기꺼이 감수해 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
로토가 연극배우에서 희망을 접고 극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성공하며 , 또 나중에 그가 알게된 진실
때문에 충격으로 죽은 후에 밝혀진 건 , 그를 극작가로 이끈 초기작을 빼곤 대부분은 마틸다가 손을 댄 것이라는 사실 역시 무겁고 무서운 진실이고
로토가 모르는 기만이었다 .
그녀의 과거가 불행하고 어두웠다는 건 사실 나에겐 별로 충격을 주지 못했다 . 반전처럼 준비된 그녀의
불행 , 그 일들이 그녀를 로토에게 보내는 추진력이 되고 , 마침내 로토가 마틸다의 운명이 되고 , 그녀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 되었다는 게
나에겐 오히려 충격이었다 . 그녀가 얼마나 능력있는 여자인가 생각하면 , 그녀가 소진한 많은 에너지가 아까워 내가 다 안타까웠다
.
그러면서도 이율배반처럼 그 이유 역시나 알 수 있었다 . 그녀가 무얼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는지를
... 그녀에게 드리워진 유년의 그늘은 얼마나 힘이 쎈가 . 과거의 힘은 얼마나 뾰족하고 날카롭길래 숨겨지지 않고 세월을 20여년이나 보내고도
튀어나와 상대를 찌르고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멎게하나 . 그런 생각을 했다 .
그러므로 읽어라 ,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어가라 . 마침내 분노와 마주칠 때까지 운명을 읽어라 .
예정되고 뻔한 운명에서 실망하고 왜 이런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냐고 책을 앞에 놓고 질문하고 답답해 하면 할수록 분노 앞에서 마주치는 세밀한
장치들에 전율하게 되고 말 것이다 . 그리고 마침내는 어째서 미국 전 대통령이 이 소설 한 권에 극찬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고 말 것이다
.
숨이 멎도록 몰입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 이토록 뻔한 스토리 임에도 불구하고 , 이 작가의 차기작이
벌써 기다려질만큼 ... 아 , 아 , 읽어보지 않으면 이 기대감 , 이 고양감은 알 수 없다 .
결혼 , 서로 다른 부분들이 만나는 결합 . 로토는 소란스럽고 빛으로 가득했다 . 마틸드는 조용하고 신중했다 . 로토 쪽이 더 나은 반쪽 ,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쪽이라고 믿기 쉽다 . 그가 지금껏 경험한 모든 것이 마틸드를 향해 차곡차곡 쌓여간 것은 사실이다 . 그의 삶이 그녀가 나타난 그 순간에 대비해 그를 준비시키지 않았다면 , 그들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본문 16 쪽 )
" 결혼이란 건 거짓말투성이야 . 대체로는 친절한 거짓말이지만 . 말하지 않는 거짓말 말이지 . 날마다 배우자에 대한 생각을 입 밖에 내어 말한다면 결혼생활을 짓밟아 뭉개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야 . 그애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단다 .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 " ( 본문 313 쪽 )
그때조차 그녀는 이 세상에 기꺼이 , 같은 일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신들이란 우리를 엿 먹이기 좋아하는 존재들일 뿐 . ( 본문 351 쪽 )
슬픔은 내면화된 고통 , 영혼의 종기다 . 분노는 에너지로서의 고통 , 갑작스러운 분출이다 . ( 본문 460 쪽 )
그녀의 삶이 크게 베여나간 자리들은 남편에게 흰 공간으로 남았다 . 그녀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말한 것과 산뜻한 균형을 이루었다 . 하지만 세상에는 진실이 아닌 말과 진실이 아닌 침묵이 있었고 , 마틸드는 절대 말하지 않음으로써 로토에게 거짓말을 한 것뿐이었다 . ( 본문 497 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