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밤 랜덤소설선 11
윤영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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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뭔가(잡글이든 리뷰든) 쓰고 싶은 날에 읽어보리라 하고 차일피일 미뤄뒀던 책이었다. 그러니까 사둔 지 꽤 된 책이라 결국 구입 동기를 잊고 지낸 셈이고, 이게 겐지 '사마'식의 산문집이나 되는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구입하게 될 때, 5만 원을 안 넘기면 뭔가 손해보는 느낌인지라, 5만 원을 넘기려다 보니까 항상 무더기로 구입을 하게 된다.(이젠 상술이라고 생각 되지도 않는다. '생존'을 위해 채우게 된다!) 암튼 구입 동기를 잊고 지낸 책의 대부분은 무더기로 책을 샀다는 산 증인들이다.

한국 소설 특히 내가 접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일단 사고 보는지라, 읽고 나서 산뜻한 포만감을 안겨주지 못한 책일지라도 뭐랄까 미지의 세계를 개척했다는 느낌으로 아깝다거나 괜히 샀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드는 편이다. 잡설이 길어졌는데, 요지는  <<소설 쓰는 밤>>,(이하 <소설>이 윤영수 작가와의 첫만남이었고, 나쁘지 않았다는 거다.

그 이유로 단순히 동네 이야기를 잘 쓰고, 문장력이 좋은 여성 작가라고 분류할 수만은 없다는 데 있다. 소설집으로 소개된 책이지만 연작 소설 형식으로 되어 있어 장편 소설인 셈인데, 연작 소설은 각 단편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그 관건을 넘긴 작품이라고나 할까. <무대 뒤의 공연>이라는 단편을 읽었을 때 꼭 <<원미동 사람들>> 도입부에서 나온 장면이 떠올랐다. 물론, 스케일은 더 작았지만. 그러니까 "내과 병동 302호, 4인용 여자 병실" 그 곳에 입원한 사람들의 모습이 첫 단편에서 그려지는데, 그 첫 단편이 마치 소품 하나 등장 인물 하나 다 갖춰진 무대 위를 보는 느낌이라는 거다. 이런 구성은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전율을 느끼게 한다, 좋다는 말이다. 
 
 <<원미동 사람들>>의 도입부가 탁월했던 것도 그 이유라고 본다. 온갖 사건과 사람들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격정을 향해 내달리다 끝이 났을 때, 다시 첫 장면이 떠올려지면서 전율이 느껴지게 하는 것! 이삿짐 트럭이 원미동에 당도했을 때 그 젊은 부부를 둘러싼 국자 형태의 골목길에 옹기종기 얼굴을 내밀었던 사람들. 마치 졸업 앨범을 보는 듯이 얘 하고는 이런 일이 있었고, 쟤 하고는 이런 일이 있었고 하듯 한 장의 사진 속에 그 격정의 순간과 시간들을 담아낸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고 보니  영화 공동경비구역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한 장의 사진 같은 느낌인 거다.  그러니까 또 요지는 <무대 뒤의 공연>을 읽었을 때는 느낌이 좋았다. <원미동>에 비한 전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꾸 비교되네)

이런 구성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 할 힘이 뒷받침 되어야 빛을 발한다고 보기 때문에 기대감을 실어준다는 거다.  물론, 나는 처음에 <소설>을 읽었을 때 단편인 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감상은 두 번째 단편을 읽었을 때 알게 됐다. 그런데 두 번째 단편 <내 창가에 기르는 꽃>을 읽었을 때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갈 사건 자체가 너무 안이했다고나 할까. 진부하고 시시하기까지 느껴질 만큼. 이게 아닌데, 특히나 그 전에 공선옥 작가의 <<명랑한 밤길>>을 읽은 터라 더더욱 고개를 저었던 것 같다. <<명랑한 밤길>> 도 나중에 느낌을 말하겠지만, 여성 작가들의 보여주는 한계 즉 소재의 빈곤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글이었다. 물론, 문장력은 뛰어났고 묘사력도 생생했지만,  나도 '내 이야기, 내 주변 이야기, 가족 이야기 그러니까 동네 이야기'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은 독자이기 때문이다. (덧붙임 : 이 리뷰도 꽤 오래 전에 쓴 건데, 그때는 이런 게 진절머리 났을 때였고, 요즘은 부러 찾아 읽는다. 소소한 내 주변의 일상과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리워질 때, 여성 작가들의 책을 제일 먼저 찾는다.) 

  두 번째 단편은 전형적인 느낌이었기에 내가 이걸 계속 붙잡고 읽어야 하나 심히 고민을 했더랜다. 단편집은 내 마음을 확 끌지 않는 한, 그 자리에서 다 읽지 않는 편이다. 어디에 붙여둔 껌을 씹는 자세로다 한두 편 있다 나중에 읽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만 더 읽어보자 하는 심정으로 <당신의 저녁 시간>을 읽었다. 그런데 어라? 두 번째와 다르게 완성도 높은 구성과 소재를 보여준 거다. 순간 화색이 확 돌았다.  

단편은 분량이 적은 만큼 완성도를 높이기가 어렵다고 본다. 그러니까 장편에서는 살짝 삑사리 나도 흐름만 놓치지 않는다면 눈치를 못 채는데  단편은 단박에 눈에 띈다는 거다. 안일하고 편안하게 쓴 단편이 얼마나 많나, 그러다 치밀하게 내놓은 이런 단편들은 읽는 이들에게 역시 포만감을 안겨준다. 이래야 나도 쓰겠다 라는 말을 목구멍에 쏙 집어넣게 한다. 특히나 등장 인물이나 개별적인 사건이 많아질수록 단편은 탄탄한 구성을 갖추기 어려울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의 저녁 시간>은 꽤 여러 사건과 등장 인물이 나와도 마지막에 탄성을 지르게 한다는 거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다.  

<달빛 고양이>는 소재나 구성에서도 진부하긴 하다. 그럼에도 단숨에 읽게 하는 건, 역시 필력 있는 작가의 힘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메시지(이 책의 구성)에서 모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성주> 역시 연작 소설이라는 톱니바퀴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지막 단편이자 표제작인 <소설 쓰는 밤>을 읽었을 때 생각나는 책이 있었다. 제목은 생각 안 나는데 운명이나 필연에 관한 내용을 철학적으로 풀어쓴 책이다. 예를 들어, 그 책의 서술자가 k 라는 주인공이었다면 k가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미래를 기록한 책을 본 거다. 그게 일종의 예언서인 셈인데, 그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로 인해 괴로워한다. 그 운명에 맞서싸워보기도 하지만 결국엔 그 책의 기록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뭐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예언처럼 말이다. <소설 쓰는 밤>에는 소설가가 나온다. 여기서 내용을 더 쓰면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생략하고. (읽어보시길, 우후훗!) 그 소설가의 이야기에 병원의 경비원이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어찌나 공감이 되는지!  

이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이런 기분이 든다. 글을 쓰기 위한 예비 작업 같은 작가의 마음을 엿본 기분 같은 거. 그러니까 애초에 <<원미동 사람들>>과 비교하는 건, 뭐랄까 공정하지 못한 처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허술하게 뚝딱 써낸 글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긴장하게 되었다. 다음 작품이 몹시 기다려진다!

 

사족:
참, 나중에 다 읽고 보니까 <내 창가에 기르는 꽃> 단편이 구성이나 소재 특히 사건이 진행되거나 나오는 이야기들이 이 책의 단편 중에서 제일 떨어졌다. 그랬으니 그때 더 읽을까 말까로 얼마나 고민이 됐겠는가. 아무튼  책 사이즈가 작고 분량도 많지 않은 데 비해 해설은 분량은 물론 시작부터 장황하길래 처음엔 뭔일인가 싶었다. 그 장황한 해설 속에 "한국 문학에 중요한 전환의 계기"를 안겨준 작가라는 말이 나오는데, 지체없이 그 문제적 소설인 <사랑하라, 희망 없이>는 장바구니로 직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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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 이성복 산문집
이성복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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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컨대, 입을 틀어막아도 막을 수 없었던 울음을 흘렸던 한 시인의 오열이 담긴 산문집을 읽고 어쭙잖은 나의 언어로 그의 산문집에 대한 평을 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치열하게 시인과 시를 혹은 시인의 언어를 생각해보지 못한 나였기에 기껏해야 한두 시간 안에 쓰여질 나의 글은 그의 시를 욕되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는 쉽지 않은 책읽기였고, 책을 읽는 동안 머리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시인의 언어들로 울컥이는 마음을 하염없이 달래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자 끝내 복 받쳐 흘렀던 이 뜨거움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하여 이후의 글은 그의 산문집과 <<아, 입이 없는 것들>> 시집 속에서 인용한 글이라는 것을 밝힌다. 정체모를 이 먹먹함과 타오름을 한 자락이나마 그의 글에 빗대어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 덧붙임 : 이 리뷰는 1년 전에 쓴 글인데, 역시 다르게 수정을 하지 못하고 올린다. 여전히 나는 시와 시인의 언어를 모른다. 정제된 언어의 힘, 그 힘 앞에 나는 불순한 독자일 뿐이다.)
  

이해 가능한 청각 언어로 번역되지 못할 바알간 석류 꽃잎을 두고,
시인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가슴 속에 깊게 패인 못자국을 들여다본다.
시인의 숨결은 그 못자국을 헤집고 너덜거리는 생채기들을 잡아채면서 상처받은 것들에게 끊임없이 제사를 올린다.

제에 올려진 것은 도살장으로 향하는 트럭 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암컷 뒤를 핥다가 가끔 겅중겅중 올라타는 수퇘지들이나, 먼지와 매연, 미세한 세균들을 덮어싸고 입 안으로 올라온 침이나 무수한 죽음의 얼굴을 한 채 모든 것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었던 그 눈이나 환(幻) 에 환(幻)을 보태고 언어에 의한 언어를 통한 언어의 자기 쓰기들.

맨날 와서 피 흘려 좋을 여기가 어디인가,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던가,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시인이 보는 곳은 살얼음낀 우물,
시인의 기억이 머문 곳은 당집 죽은 대나무 앞,
한 고통이 다른 고통을 들여다보듯,
마른 잎새를 흔드는 죽은 대나무 아래서 시인은 자신의 환부를 들여다본다.

시인이 본 것은 진실, 살아내야 할 진실,
진실을 보지 못한 채 글쓰기를 하려는가, 시를 쓰려하는가?

시인은 그 진실을 부등켜 안고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내려 한다.
그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 변증의 여름을 기억하면서,
시인을 배반하는, 시인의 의식을 부정하는 즐거운 일탈을 향해 나아간다.

시인에게 시는 헐벗고 버림받은 존재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존재의 긍정이며 성화였고,
시인에게 시는 가짜 아름다움 속의 추악함과 추악함 속의 진짜 아름다움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상호 모순된 것들을 제 품에 아우르는 것이었다. 

아, 입이 없는 것들
애초부터 죽어 있었던 것들
죽었다는 생각들 이전부터 죽어 있었으며 죽었다는 생각들 이후에도 죽어 있을 것들.

누군가는 인생길 반 고비에 어두운 숲에 들어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순례하고,
누군가는 삶과 삶을 언어와 언어를 다시 삶과 삶을 향한 오열을 터뜨린다.

어느 날 문득 방문을 열다가 보아버리 듯, 그 오열 속에서 시인은 괄호 속에 묶인 애초의 형극을 위해 본래의 시간과 장소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시인은 흠뻑 빗물을 머금고 창유리에 달라붙은 그날의 석류 꽃잎 앞에 두 마음 없이 다가선다.
 

   
  문학은 일종의 삶의 형식화이다. 문학은 자기 위안도 구원의 수단도 아니다. 우리의 감정적 호오에 관계없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여러 조건들의 단순화된 표현이다. (106면)

오늘날 시는 죽었는가, 죽었다면 누가 시를 죽였는가 등속의 질문이 잇따르는 것은 애초에 시를 살아 있는 어떤 것으로 전제하는 데서 출발한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물음들은 특정 사회 속에서의 시의 위의, 문화의 여러 영역들 사이에서의 시의 위치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질문들이리라. 그러나 유독 그에게 그 질문들이 공소하게 들리는 것은 죽음이 곧 시의 본질이라는 뿌리 깊은 생각에서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여, 만약 시가 극진히 대접받고 숭배받는 시대가 있다면, 그 시대의 시는 루비와 사파이어로 장식한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모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와 시의 위의는 최초의 형극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데 있다. (116~117면)

글쓰기에 대한 의식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지양하는 지식만이 ‘즐거운 지식’일 수 있듯이, 글쓰기를 배반하는 글쓰기, 글쓰기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글쓰기만이 즐거운 글쓰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정도는 글쓰기의 낙원에 얼마나 접근했는가를 가리키는 구체적 지표가 될 것이다. (19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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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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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늘어진 시계가 나뭇가지나 정체모를 생명체에 걸려있다,
시간의 흐름은 멈춰지고, 기억은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무의식의 나를 깨운다!

 

 1. 

  이승우 작가의 <<한낮의 시선>>(이하 <시선>)을 다 읽은 순간의 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잖아, 라고 생각했다. <시선>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상황이 전형적으로 등장한다고, 그 책을 다 읽은 지 10분이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너무 'FM'적이었다고, 그 책을 다 읽은 지 10분 1초가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화자인 '나'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종종 꾸는 꿈의 이미지들이 몹시 익숙했다는 말이다. 가장 압권인 장면은 역시 아버지의 묘비명이 등장하는 '나'의 꿈이다. 벌판 앞에서 오줌싸는 그를 향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천둥소리와 같은 아버지의 금령이 울려퍼지면서, 역시 아는 얼굴에 의해 거세를 당하기 직전의 상황을 꿈으로 꾼 '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남근기의 아이는 아버지의 금령을 받아들이면서, 부친과의 '동일시'를 이루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그러나 남근기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던 29살의 '나'는 무의식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고,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정체 모를 남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은 상황 속에서도 '나'를 버린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 대가를 치룬다. '나'는 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고, "청년 같아 보이는가 하면 노인 같아 보이기도" 한 남자와 빛 속에서 조우하면서, 서른 살 생일을 맞이했던 것이다.  

 연극의 무대처럼 배치된 상황들, 작위적인 냄새, 감정이입이 배제된 차갑고 명료한 나의 시선과 분석. 소설이다, 이건 소설이야! 를 외치게 하고, 읽는 이와 화자를 무섭게 분리해 놓고, 진저리 나게 무겁고 재미없게 쓴 소설이었다, 라고 그 책을 다 읽은 지 11분이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2. 

   그렇지만 정말 그것 뿐이었을까? 무의식의 심연을 걷는 듯한 이 모호한 기분은 뭐지? 2009년 11월 25에 초판이 인쇄된 <시선>에서 보여주는 것은 정말 그것 뿐이었을까? 모성애에 관한 '나'의 분석과 심리학 전공이었던 노교수의 등장, 아버지를 찾아가는 나. A5 판형에 작가의 말까지 포함해 160쪽을 채운 얇은 책인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뭉글뭉글한 기분을 남기게 하는 걸까? 사람들이 죽기 위해 도시로 모여든다는 말테 수기의 첫 문장으로 시작해서 성경, 신화, 꿈, 로맹가리나 오르한파묵, 밀란 쿤데라, 아아 카프카까지 이어졌던, 한 낮의 시선!  

어쩌면 '시선'이 갖고 있는 기본 뼈대(plot)만을 따라갈 수 없게 만든 '웅덩이'가 곳곳에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말테의 수기로 문장이 시작됐을 때, 마법은 시작된 거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어봤던 독자라면 혹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콩쿠르 상을 한 번 더 받은 그 작가의 이력과 그의 또다른 글을 읽은 독자라면,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남겨줬던 경이로운 이면의 세계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카프카의 글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독자라면, 그 함정 같은 웅덩이에 몇 번이나 안 안 구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원본이 사라진 자리, 수많은 이미지들이 차용되고 독자는 그 이미지들에 의해 겹겹이 둘러쌓인다. 살려고 가는 것일까, 죽으려고 가는 것일까, 나는 그 문을 열 수 있는 것일까, 그 성에는 갈 수 있는 것일까, 천둥소리처럼 울려퍼지는 아버지의 금령, '나'의 꿈처럼 내 방을 찾아 수없이 문을 연다, 문을 닫는다, 문을 연다, 문을 닫는다, 독자인 나는 '그만'을 외친다! 눈을 질끈 감는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의도했든 독자는 자기가 느낀 만큼, 본 만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라 부재...폐병...어둠...빛...구원...오직 하나의 사랑! 

  <시선>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서의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전작들이 종교적 구원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던 것처럼, 종교적인 관념으로 승화된 나의 이야기라면? 그렇다. '그의 전작들'이 나에게 중요한 단서가 된 거다. 왜 이제서야 생각났을까? 왜 이제서야 첨탑에 걸린 십자가와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그 앞에 흘리고 있겠다던 어떤 시인의 시가 생각났을까? 심리학 전공이었던 노교수의 등장으로 너무 쉽게 함정에 빠진 탓일까?  하루에 한 줄씩 글을 쓰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이 마지막 장에 남겨져 있다. 하루에 한 줄씩의 글과 하루에 몇 페이지의 글.  결국 하루의 한 줄씩의 글이 되지 못해 잃어버린 작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거지? 독자는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있기는 있는 걸까?  

"쓰여지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으킬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156면) 

그러나 '나=작가'는 썼고 피를 토한다. 그러나 독자인 나는 좀 더 썼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서 찾은 이 구원의 이미지에 대한 '정화'를 느끼기에는 '나'의 고뇌가 더 필요했다. 작가는 더 친절했어야 했다. 잃어버린 작가의 목소리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상상되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결국 전율로 폭발되지 않고,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랬었군" 이라고, <시선>을 다 읽은 지 26시간 20분 35초가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3.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의 실존을 3단계로 구분한다. 욕구와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미적 단계, 당위와 보편을 추구하는 인간은 윤리적 단계 그리고 이성에 의한 구원이 아닌 신(무한)에 의해 온전한 자아를 만나게 되는 인간은 종교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고, 이 종교적 단계야 말로 인간을 가장 성숙하게 만드는 최종적인 단계인 것이다. '한명재'가 아버지를 만나는 길은 '나바호족의 쌍둥이 전사'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과 겹쳐치며, 마침내 아버지를 찾음(만남)으로써 온전한 자아를 토해낸 것이다

"아버지를 찾아 바위산과 갈대숲과 선인장 밭과 끓는 사막, 그 죽음의 길을 헤쳐 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왜 나를 찾아왔느냐?"(132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wi elwi lamma' sabacqani, 마태복음 27장 46절) 

아버지 곧 '신'을 찾아 온전한 나를 완성하는 단계, 29살의 결핵 환자이자 대학원생인 내가 "휴전선에서 가까운 인구 3만의 작은 도시"를 거쳐 "나그네 여인숙"을 지나 "영화농장"에 이르러서 서른을 맞아 완성하는 단계. 왜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지, 왜 아버지의 금령에도 아버지를 찾아야 했는지, 왜 그의 '찾아가기'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한명재는 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고, 빛 속에서  "청년 같아 보이는가 하면 노인 같아 보이기도" 한 남자를 만나 비로소 성숙한 나를 만든 것이다. 

  독자인 나는 평생 욕망이나 욕구를 추구하고, 도덕적인 의무감도 결핍되어 있고, 삶의 통일성과 의미를 모르고 사는 원초적이고 현실적인 '미적단계' 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하니,
몸서리 처지게 재미없더라도 한 번쯤 평생에 한 번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종교적 단계'에 이르는 '나'를 따라가보는 것도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메인 요리를 애타게 기다리게 되는 심정이 된다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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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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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을 위한 DVD가 있다. (더 정확히, 혼자 밥을 먹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DVD라고 말하고 싶다.) 내용은 간단하다. 그저 화면 저편에서 같이 밥을 먹는 것. 와글와글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사람, 묵묵히 밥을 먹는 사람 등 직업, 나이, 성별, 성격이 모두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DVD로 재생시킬 수 있다. '홀로임'을 견딜 수 없거나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이들에게 외로움은 질병이라며, 이 병에 대한 처방전을 내려줬던 이도 있다.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원초적 고독에 대한 그의 처방은 '아모르파티'(Amor fati : 운명애). 하지만 고도의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고독이 일상이 되어버린 채, 인간의 삶 속 깊이 뿌리박힌 이 병을 은희경 작가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이하『나를』, 인용문구는 쪽수로 표시)는 좀 더 냉소적으로, 좀 더 은밀하게 삶에 대한 혹은 고독에 관한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요컨대, 『나를』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소통이 단절된 이 시대 속에서 고독을 발견한 은희경 작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리 고백하자면, 은희경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나의 작품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 말, 한 가지 실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호의적이 않던 삶을 살았다. 돌이켜 보건대 만 가지 말, 만 가지 실수에 대해 너그러운 삶을 살고 있는 지금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필자는『나를』를 통해 은희경 작가의 전작들을 모두 읽고 싶어졌다.『나를』은 그녀가 고독을 발견하게 된 그 과정을 무척 궁금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마음 편한" 서른여덟 번째 생일을 맞은 K가 구석진 찻집에 앉아있다. k는 짐 모리슨의 'People are strage'를  들으며 잠들다 자신을 부르는 몽환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고독의 발견」, p. 42) 눈을 뜬 K에 다가온 남자는 K가 하숙집 아주머니의 신뢰를 받았으며, 하숙생들은 모두 K를 좋아했다며(p. 46) K에게 몸을 가볍게 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은희경 작가는 「고독의 발견」 서두에 피노키오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피노키오 이야기. 그녀는 그 이야기에서 거짓말 할 때 코가 아닌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아이의 이야기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묻는다.(p. 40) 이후, K는 어떻게 되었을까?

 K는 꿈인지 현실인지 아득한 경계선에서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져버린 중심”인 W시 찾아가고, 그곳에서 난쟁이 여자 젤소미나를 만난다. “이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p.59)있다고 말하는 젤소미나에게 K는 하숙생들은 모두 나를 싫어했고, 그들은 악의적인 장난으로 자신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말하게 된다.(p.71)   K는 그곳에서 젤소미나를 통해 허공에 떠오르는 자신을 본 것이다. '내 삶'의 진실 혹은 심연과 조우한 나. K. 

  은희경 작가는 고독을 발견한 인간을 부유하듯 형상화한다. 텅빔, 단절된 시간, 결핍, 삶의 부재들이 무수한 파편이 되어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관통한다.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젤소미나와 허공에 떠오르는 K,(「고독의 발견」), “자기 몸 안이 텅 비어가는 느낌에 사로잡혀 우주 미아처럼 돌아올 주소를 영원히 잃어버린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진(「의심을 찬양함」), 다이어트를 하는 나(「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몽상을 하는 소녀(「날씨와 생활」), 자신의 좌표를 잃어버린 P(「지도중독」),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고 말하는 출판사 사장이 잃어버린 청춘(「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낯선 한순간 자신의 존재와 부재 사이의 좁은 틈”(「의심을 찬양함」, p. 27)을 발견하는 과정은 대부분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그려진다. 단절되거나 잃어버린 그 시간들. 어린 시절 뚱뚱한 자신을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항상 슬픈 나(「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p.80)는 서른다섯 번째 생일날 부친의 위독을 통보받는다. 나는 과거와 다른 모습을 아비에게 보여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이어트에 매달린다. 여기서 은희경 작가는 다이어트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 혹을 고독을 말한다. 다이어트가 어려운 것은 몸속에 장착된 수백만 년이나 된 생존본능 씨스템과 싸우는 일(p.96)이라는 것. 인간의 몸은 철저히 지방을 모아 저장하는 돌도끼시대의 시스템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기에 현대인은 빙하기 인간과 다를 게 없는 동물적 존재(p. 97)라는 것. 배고픔을 기억하는 몸은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을 상징한다.  그 원초적인 결핍과 고독에 끈질기게 버텨왔던 나는 아버지의 빈소(또 다른 부재, 결핍, 고독)에서 국밥을 먹는다. 기름진 국물 속의 뽀얀 밥알이 든 국밥을 나는 두 그릇째 달게 비우고 만다. 보띠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처음 본 날을 잊지 못하는(p.78), 아버지에게 축복받지 못한 탄생을 지닌 나는 그 원초적인 결핍을 상징하는 몸의 기억을 거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다.  

 

  「지도 중독」에서 P는 1조 8천만 년 전에는 곰과 인간이 같은 개체였다고 말한다. 그는 현화식물, 곤충, 인간이 모두 하나의 개체에서 네 차례 반복된 간빙기가 거쳐 탄생한 인간은 1만 년이 된 유전자를 지닌 거라고 한다.(p. 220)  『나를』은 이렇게 곳곳에서 과거를 탐닉한다. 어린 시절에서부터 1조 8천만 년 전까지. 인간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나와 그 과거를 잃어버린 채 현재를 살아가고 내가 마주선 순간이다. 내 몸 깊숙이 박힌 고독. 그 절대적 고독과 마주선 나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허공에 매달려야 할지 모른다. 어린 시절의 나, 젊은 날의 나, 지금의 나가 보일 때까지.    

  오직 앞만을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무한 경쟁 시대 속에서, 필연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인간 소외. 통장 잔고가 내 삶의 지표가 되어야 되는 이 시대 속에서 은희경 작가는 "내 몸 깊숙히 박힌 고독"을 돌아보게 한다. 내 안의 고독을 응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고독을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원초적 결핍"을 간직한 우리들의 몸을 돌아보는 순간, 1만 년이 된 유전자를 우리가 함께 돌아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와 너를 보게 되는 게 아닐까.  절망 앞에 선 인간만이 다시 '삶'을 희망할 수 있다면,  내 '심연의 어둠'을 응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너'를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높은 바위에 걸터앉은 여자가 두 발을 번갈아 흔드는 모습을 보며 K는 S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와 가족들과 세상 모두에게. K가 자신은 물에 빠졌고, 남의 신분증을 가진 채로 절 옆의 민박집에서 몸을 말렸다고 말하자 여자는 다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그때였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여자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여자의 치맛자락을 붙들었고 그 순간 내 몸도 함께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붉은 먼지로 감싸인 채 멀리 강이 보였으며 배에 가득 찬 손님들, 검은 외투의 남자, 그리고 흰 입김을 날리며 뭔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강을 내려다보는 젊은날 k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구나 나는 중얼거렸다. 몸을 가볍게 만드는 연구가 드디어 완성되었어.”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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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거기서 뭘 하고 있니? 무엇을 보고 있니? 해가 지고 있어요. 개천물이 흐르고 오리들이 놀고 있어요. 바람이 나무에 사무치구요, 해는 둥글고요, 산은 높고 나무들이 있지요. 새들이 날아다녀요. 선생님은 회색옷을 입었구요. 키가 크고요. 땅은 땅빛이구요." p. 140

 
 『새』는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슬그머니 왔다 가버리는 ‘삶’에게 언제나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하지만 어느덧 짧게나마 돌아볼 수 있는 ‘삶’이 내게도 있게 되자, 끝내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던 ‘삶’ 이라는 게 두려워 장롱 속에 숨어 가만히 지켜보게 된다. ‘삶’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을 읽게 되면, 조금씩 그 장롱 문을 열 수 있을 것만 같다.


2.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니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 없어." p. 74


 추레한 차림의 깡마른 남자가 편의점으로 들어온다. 곧장 주류가 들어 있는 냉장고로 가더니 소주 한 병을 꺼내 와서 값을 치르고는 편의점 밖으로 나간다. 그는 문 밖에 서서 병뚜껑을 돌려 단숨에 소주를 마셔버린다. 한낮에 아무 말 없이 소주 한 병을 마셨던 그 사람의 모습이 깨끗하게 비워진 빈병과 무척 닮아 있다.
 

3.

“인생살이가 소꿉놀이 같아. 한바탕 살림 늘어놓고 재미나게 놀다 보면 어느새 날이 저물어오지. 그러면 제각각 놀던 것 그대로 그 자리에 놓아두고 제집으로 가버리는 거야. 사람 한평생이 꼭 그래” - p. 94

 
  제집으로 가버리는 사람 한평생을 아이는 언제쯤 알게 되는 걸까? 내일도 모레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설명 앞에 조그만 아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는 죽은 이의 몸이 썩어 문드러지고 무덤 위의 풀이 두세 번쯤 색이 바뀌게 될 때까지도 그 사람을 기다린다. 일찍 제집으로 가버린 아이의 삶이 담긴 『새』

 
4. 

"누나. 엄마가 왜 그랬을까. 우릴 발가벗겨 내쫓았었지. 엄마는 늘 울었어. 엄마가 잠자는 동안 엄마 얼굴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나간 혼이 찾아오지 못한 거야. 누가 엄마 얼굴에 그림을 그렸지?" p. 141

 
 삶의 불가역성. 삶을 알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죽음 앞에 마주서게 될 때다. 그가 살았던 집을 떠나 그가 입었던 옷가지를 불태우고 사진을 불태워도 어느 날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를 부르고, 그 사람이 좋아했던 음식을 찾게 되고, 그 사람이 흘렸던 눈물만큼 흘리고 있다. 니 핏줄이 그렇다. 나는 나를 보는 게 무서워졌다. 

 
5.

“아주 먼 옛날의 별빛을 이제사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있었던 것, 지나간 자취는 아주 훗날에라도 아름다운 결과 무늬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부드럽고 둥글게 닳아지는 돌들, 지난해의 나뭇잎 그 위에 애벌레가 기어간 희미한 자국, 꽃지는 나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그 외로움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바람은 나무에 사무치고 노래는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p. 75

 
 불콰해진 얼굴로, “내 인생 풀어보면 책 10권은 더 낼 수 있을 끼다. 어찌나 한 많은 인생인지 저걸로도 다 풀어놓지 못할 걸? 암, 모지르지.” 그 한 많은 인생 풀어놓기도 전에 늘 취기에 먼저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 그 한 많은 인생 말로라도 다 못 풀고 떠난 이들의 이야기, 절실했던 삶의 순간들,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삶의 순간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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