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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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축 늘어진 시계가 나뭇가지나 정체모를 생명체에 걸려있다,
시간의 흐름은 멈춰지고, 기억은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무의식의 나를 깨운다!
1.
이승우 작가의 <<한낮의 시선>>(이하 <시선>)을 다 읽은 순간의 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잖아, 라고 생각했다. <시선>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상황이 전형적으로 등장한다고, 그 책을 다 읽은 지 10분이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너무 'FM'적이었다고, 그 책을 다 읽은 지 10분 1초가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화자인 '나'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종종 꾸는 꿈의 이미지들이 몹시 익숙했다는 말이다. 가장 압권인 장면은 역시 아버지의 묘비명이 등장하는 '나'의 꿈이다. 벌판 앞에서 오줌싸는 그를 향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천둥소리와 같은 아버지의 금령이 울려퍼지면서, 역시 아는 얼굴에 의해 거세를 당하기 직전의 상황을 꿈으로 꾼 '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남근기의 아이는 아버지의 금령을 받아들이면서, 부친과의 '동일시'를 이루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그러나 남근기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던 29살의 '나'는 무의식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고,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정체 모를 남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은 상황 속에서도 '나'를 버린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 대가를 치룬다. '나'는 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고, "청년 같아 보이는가 하면 노인 같아 보이기도" 한 남자와 빛 속에서 조우하면서, 서른 살 생일을 맞이했던 것이다.
연극의 무대처럼 배치된 상황들, 작위적인 냄새, 감정이입이 배제된 차갑고 명료한 나의 시선과 분석. 소설이다, 이건 소설이야! 를 외치게 하고, 읽는 이와 화자를 무섭게 분리해 놓고, 진저리 나게 무겁고 재미없게 쓴 소설이었다, 라고 그 책을 다 읽은 지 11분이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2.
그렇지만 정말 그것 뿐이었을까? 무의식의 심연을 걷는 듯한 이 모호한 기분은 뭐지? 2009년 11월 25에 초판이 인쇄된 <시선>에서 보여주는 것은 정말 그것 뿐이었을까? 모성애에 관한 '나'의 분석과 심리학 전공이었던 노교수의 등장, 아버지를 찾아가는 나. A5 판형에 작가의 말까지 포함해 160쪽을 채운 얇은 책인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뭉글뭉글한 기분을 남기게 하는 걸까? 사람들이 죽기 위해 도시로 모여든다는 말테 수기의 첫 문장으로 시작해서 성경, 신화, 꿈, 로맹가리나 오르한파묵, 밀란 쿤데라, 아아 카프카까지 이어졌던, 한 낮의 시선!
어쩌면 '시선'이 갖고 있는 기본 뼈대(plot)만을 따라갈 수 없게 만든 '웅덩이'가 곳곳에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말테의 수기로 문장이 시작됐을 때, 마법은 시작된 거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어봤던 독자라면 혹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콩쿠르 상을 한 번 더 받은 그 작가의 이력과 그의 또다른 글을 읽은 독자라면,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남겨줬던 경이로운 이면의 세계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카프카의 글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독자라면, 그 함정 같은 웅덩이에 몇 번이나 안 안 구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원본이 사라진 자리, 수많은 이미지들이 차용되고 독자는 그 이미지들에 의해 겹겹이 둘러쌓인다. 살려고 가는 것일까, 죽으려고 가는 것일까, 나는 그 문을 열 수 있는 것일까, 그 성에는 갈 수 있는 것일까, 천둥소리처럼 울려퍼지는 아버지의 금령, '나'의 꿈처럼 내 방을 찾아 수없이 문을 연다, 문을 닫는다, 문을 연다, 문을 닫는다, 독자인 나는 '그만'을 외친다! 눈을 질끈 감는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의도했든 독자는 자기가 느낀 만큼, 본 만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라 부재...폐병...어둠...빛...구원...오직 하나의 사랑!
<시선>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서의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전작들이 종교적 구원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던 것처럼, 종교적인 관념으로 승화된 나의 이야기라면? 그렇다. '그의 전작들'이 나에게 중요한 단서가 된 거다. 왜 이제서야 생각났을까? 왜 이제서야 첨탑에 걸린 십자가와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그 앞에 흘리고 있겠다던 어떤 시인의 시가 생각났을까? 심리학 전공이었던 노교수의 등장으로 너무 쉽게 함정에 빠진 탓일까? 하루에 한 줄씩 글을 쓰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이 마지막 장에 남겨져 있다. 하루에 한 줄씩의 글과 하루에 몇 페이지의 글. 결국 하루의 한 줄씩의 글이 되지 못해 잃어버린 작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거지? 독자는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있기는 있는 걸까?
"쓰여지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으킬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156면)
그러나 '나=작가'는 썼고 피를 토한다. 그러나 독자인 나는 좀 더 썼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서 찾은 이 구원의 이미지에 대한 '정화'를 느끼기에는 '나'의 고뇌가 더 필요했다. 작가는 더 친절했어야 했다. 잃어버린 작가의 목소리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상상되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결국 전율로 폭발되지 않고,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랬었군" 이라고, <시선>을 다 읽은 지 26시간 20분 35초가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3.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의 실존을 3단계로 구분한다. 욕구와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미적 단계, 당위와 보편을 추구하는 인간은 윤리적 단계 그리고 이성에 의한 구원이 아닌 신(무한)에 의해 온전한 자아를 만나게 되는 인간은 종교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고, 이 종교적 단계야 말로 인간을 가장 성숙하게 만드는 최종적인 단계인 것이다. '한명재'가 아버지를 만나는 길은 '나바호족의 쌍둥이 전사'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과 겹쳐치며, 마침내 아버지를 찾음(만남)으로써 온전한 자아를 토해낸 것이다
"아버지를 찾아 바위산과 갈대숲과 선인장 밭과 끓는 사막, 그 죽음의 길을 헤쳐 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왜 나를 찾아왔느냐?"(132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wi elwi lamma' sabacqani, 마태복음 27장 46절)
아버지 곧 '신'을 찾아 온전한 나를 완성하는 단계, 29살의 결핵 환자이자 대학원생인 내가 "휴전선에서 가까운 인구 3만의 작은 도시"를 거쳐 "나그네 여인숙"을 지나 "영화농장"에 이르러서 서른을 맞아 완성하는 단계. 왜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지, 왜 아버지의 금령에도 아버지를 찾아야 했는지, 왜 그의 '찾아가기'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한명재는 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고, 빛 속에서 "청년 같아 보이는가 하면 노인 같아 보이기도" 한 남자를 만나 비로소 성숙한 나를 만든 것이다.
독자인 나는 평생 욕망이나 욕구를 추구하고, 도덕적인 의무감도 결핍되어 있고, 삶의 통일성과 의미를 모르고 사는 원초적이고 현실적인 '미적단계' 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하니,
몸서리 처지게 재미없더라도 한 번쯤 평생에 한 번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종교적 단계'에 이르는 '나'를 따라가보는 것도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메인 요리를 애타게 기다리게 되는 심정이 된다고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