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행성 밖에서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 1
C. S. 루이스 지음, 공경희 옮김 / 홍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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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알레고리가 가득한 루이스의 SF 소설

C. S. 루이스 저, ‘침묵의 행성 밖에서’를 읽고

읽고 나니 한동안 잊었던 루이스의 매력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소설을 좋아해서인지 나는 루이스의 변증서보다 소설에 더 끌린다. ‘나니아 연대기’의 경우는 잘 만들어진 3부작 영화로 봤지만 (다섯 번은 족히 봤으리라), 나머지 소설들, 그러니까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천국과 지옥의 이혼’, ‘순례자의 귀향’은 모두 책으로 읽었다. 한결같이 내겐 저 유명한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와 같은 변증서보다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논리 정연한 변증은 강하고 빠른 지적 쾌감을 선사하는 반면, 문학소설은 이성과 감정을 넘나들며 공감각적인 향연을 선보인다. 변증은 빠른 직구처럼 타깃에 꽂히고 나면 효과가 금세 사라진다. 소설은 느린 변화구처럼 해석이 까다로운 대신 효과는 오래간다. 변증은 밝은 빛과 같아서 직선으로 날아와 어두운 곳을 드러내고 밝히는 역할을 한다. 소설은 자욱한 안개와 같은 힘이 있어서 어느새 조용히 온몸을 감싸고 흠뻑 적시는 효과를 낸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나 다른 두 스타일의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각각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작가가 바로 C. S. 루이스라는 사실이다. 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이 작품도 소설이다.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SF. 기독교 변증가가 쓴 SF 소설이라니! 루이스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뜻밖의 궁합이라고, 혹시 동명이인 아니냐고 충분히 의문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나니아 연대기’, ‘천국과 지옥의 이혼’, ‘순례자의 귀향’ 모두 판타지 소설이고,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도 신화를 각색한 소설이니만큼 판타지에 넣어도 무방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루이스가 SF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SF와 판타지의 차이는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지에 따른 기준을 제외하면 구별하기가 모호하니까 말이다. 둘 다 작가의 상상력이 최대치로 발휘되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루이스의 저서를 열 권 정도 읽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루이스를 잘 안다고 여겼다. 오산이었다. 이 작품은 2주 전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무려 ‘우주 3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 말고도 두 작품이 더 있다는 말이다. 각각 화성, 금성,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고 한다. 참고로, 3부작을 다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데, 이 작품이 그중 가장 짧다. 

이 작품을 펼치면 가장 먼저 차례가 나오고, 그다음 페이지에는 ‘태양계 언어’라는 제목으로 이 책에서 사용되는 여러 외계어들의 뜻을 풀이해 놓았다. ‘아르볼’은 태양이다. ’글룬단드라’는 목성이다. ‘말라칸드라’는 화성이다. 이 책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다. ‘페렐란드라’는 금성이다.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툴칸드라’는 지구다. 이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침묵의 행성’도 지구를 의미한다. ‘툴칸드라’라는 단어에서 접두사 ‘툴크’는 침묵을 뜻하고, ‘한드라’는 행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툴크’와 ‘한드라’를 합치면 복합명사 ‘툴칸드라’가 된다.

이 태양계 언어를 사용해서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이 책의 공간적 배경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자면, ’툴칸드라-말라칸드라-툴칸드라‘가 되겠다. 즉, 지구-화성-지구 순으로 공간이 이동한다. 루이스는 우주여행이 가능한 과학 기술을 가진 지구인을 통해 지구 바로 옆에 있는 행성인 화성과 금성으로 공간 이동을 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우주 3부작에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생명체는 지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루이스의 상상력에 따르면, 지구에 사는 우리 인간은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저 수많은 다양한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가시적 생명체만 해도 세 종류나 된다. ‘소른’, ‘흐로스’, ‘피플트리그’가 그것이다. 비가시적 존재까지 포함하면 다섯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천사로 여겨지는 ’엘딜’과 창조주이자 신인 ‘말렐딜’을 더하면 그렇다. 아마도 곧 읽게 될 ‘페렐란드라’에서도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3부작 모두 지구 사람이자 언어학자인 랜섬이 주인공인 듯한데, 1부인 이 작품에서 랜섬은 혼자 한적한 시골길을 여행하다가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외딴집에 거주하고 있는 오랜 친구 드바인을 만나게 되고, 그가 물리학자 웨스턴의 비밀 연구를 후원하고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연구는, 비록 랜섬은 둘에게 납치된 채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에 강제로 태워지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지만, 다른 행성을 개척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웨스턴과 드바인은 전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타 생명체를 배제하거나 제거하여 자신들의 사적인 유익을 도모하는 ‘악한’ 인간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랜섬은 어쩌다 선한 영웅이 되는 인물로서 웨스턴과 드바인 무리의 계획과 시도를 방해하거나 막아서 타 생명체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언어학자로 설정된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적인 외계 생명체들의 언어를 금세 배우고 익혀 그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다) 공생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 것 같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랜섬 덕분에 평화로운 마무리로 끝을 맺는다. 

그럼 외계 생명체가 있다는 말이냐, 어떻게 기독교 변증가라는 작자가 지구 아닌 다른 행성에도 생명체가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을 포함한 천지창조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등등의 질문도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의 의도는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인간이 전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과 지구를 타자화시키면서 객관적으로, 또 낯설게, 바라보고 그 의미를 되묻고 고찰하는 데에 있다고 해석하는 게 맞을 듯하다. 말하는 동물들이 주인공이 되고 멀티버스가 하나의 대중화된 개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인간과 지구가 상대화되고 객관화되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동물이 말하면 괜찮고 외계인은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루이스의 매력을 충분히 누리면서 그를 안내자로 삼아 창조주의 섭리와 인간에게 요구되는 윤리,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까지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기독교 알레고리가 가득한 루이스의 SF 소설을 통해서 말이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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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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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역설


장 그르니에 저, ‘섬’을 읽고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일부러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은 무위가 아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그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이 곧 무위의 삶이다. 요컨대, 거스르는 삶이 아닌 흘러가는 삶, 의도나 목적을 내려놓는 삶, ‘채워있음’보다는 ‘비어있음’이 어울리는 삶이 무위의 삶이다. ‘무위의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며 나는 활자화된 사유와 삶이 순리에 따라 흘러간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작품을 번역한 김화영의 글은 옳다. 나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아는 어떤 사람들’ 중 하나이며,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중 하나가 ‘섬’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위의 삶’ 안에 있는 ‘무위의 역설’을 믿는다. 무위가 유위가 되는 순간, 침묵이 말이 되는 순간, 비어있음이 채워있음이 되는 순간을 언제나 고대한다. 그르니에의 ‘섬’을 읽는 시간이 내겐 바로 그런 순간이다.

뒤늦게 독서를 막 시작했을 무렵, 그르니에의 ‘섬’을 추천받았다.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서 책을 덮었다. 그때의 나는 무위의 역설을 모르던 나였기 때문이다. 목적을 이루고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책을 읽던 나였기 때문이다. 그르니에의 글은 의도가 충만한 자의 눈에는 읽히지도 발견되지도 않는 것이다. 한국에 와서 다시 구입한 ‘섬’을 읽고 나는 마치 처음 이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약 7년이란 세월이 내 눈을 뜨게 해 준 모양이다. 앞으로도 이 책은 여러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미처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글들과 행간이 마침내 읽히게 될 그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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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믿음의 글들 322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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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정연하고 진솔한 루이스와 그의 글

C. S. 루이스 저, ‘세상의 마지막 밤’을 읽고

이 책은 C. S. 루이스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제목인 ‘세상의 마지막 밤’은 그중 하나이며, 이 책에서는 맨 마지막으로 소개된다. 일곱 편의 에세이는 각각 다른 지면에 독립적으로 실렸던 글이며 독립적인 주제를 다룬다. 그러므로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가장 먼저 써진 에세이가 1952년이고, 가장 나중이 1959년이며, 1898년생인 루이스는 1963년에 작고하므로, 여기 소개된 일곱 편의 에세이는 루이스가 기독교 사상가이자 작가, 비평가, 영문학자로서 탄탄한 입지를 굳힌 이후의 글로써 루이스의 연륜과 통찰이 잘 묻어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말에 태어난 루이스는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장본인이며, 청년일 때 스스로 무신론자가 되었다가 1929년에 기독교 (성공회)로 회심하여 작고하기 전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작가의 배경을 굳이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에세이란 글쓴이의 사상 혹은 세계관 (혹은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한계를 보았으며, 예기치 못한 순간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경험을 통해 한때 떠났던 하나님을 다시 믿게 된 사람이었다. 또한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기에 인간과 신에 대한 관점이 유달랐을 거라는 추측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의 여러 작품을 읽어오며 내가 느낀 그의 탁월한 매력은 학자로서의 논리 정연함과 겸손함,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진솔함과 성실함이다. 기독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많은 부분이 의외로 지적인 측면, 즉 솔직한 질문과 합리적인 대답 그리고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해소될 수 있음을 나는 루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모든 답을 지적인 방법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어디까지가 과학적인 접근으로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를 분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기독교 변증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데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암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루이스의 개인사를 통해 기독교 신앙에는 논리와 이성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한 역경 가운데서만이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될 수 있음을 나는 루이스를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참 지식인은 지식주의에 빠지지 않고 그것의 한계 혹은 경계를 알고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일 것이다. 나에겐 루이스가 그중 하나다. 

일곱 편의 에세이 중 첫 번째로 소개되는 ‘기도의 효력’이라는 글에서 나에게 잡힌 메시지는 ‘기도는 마법이 아니라 요청’이라는 사실이다. 마법은 효력을 따질 수 있지만, 기도의 경우 효력을 따진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요청의 핵심은 강제성이 없다는 것, 즉 상대가 들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아뢰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되는 ‘믿음의 고집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에서도 찬찬히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너무나 당연한 것 같으나 다시금 유레카를 외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모호함은 믿음과 충돌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믿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 우리는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정적인 확실성이 있어야 믿겠다는 말은 무의미합니다. 그런 증거가 나오고 나면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정적 증거가 주어질 때 남는 것은 그것이 주어지기 전에 믿어서 생겨난 관계, 또는 믿지 않아서 생겨난 관계뿐이겠지요.’ 명문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논리와 이성을 무시하지도 않지만 그것에 갇히지도 않는 그 무엇인 것이다. 

여섯 번째 에세이 ‘종교와 우주 개발’에서 루이스는 외계인의 존재가 가져올 수 있는 신학적인 쟁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고 쉽게 풀어준다. 루이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저는 다른 행성에 사는 생명체가 설령 발견된다 해도, 그 이후의 결과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루이스가 이 글에서 천착하는 논리는 그들은 지구인이 지금까지 겪어왔던 외부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과 그들의 타락 여부에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간파한 인간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루이스의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일 것이다. 

마지막 에세이 ‘세상의 마지막 밤’은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 교리를 다룬다. 이 글은 예배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늘 등장하는 재림에 대한 문구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재림 교리를 강조하기를 주저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희비극으로 끝났던 (지금도 어디선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휴거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사기꾼들의 사례도 언급하면서 루이스는 우리가 강조해야 할 부분은 예수님이 언제 재림할 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반드시 재림하실 테고 그때가 언제인지 하나님 아버지 빼곤 아무도 모르니 항상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요청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요청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떠남과 정착의 무한반복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루이스의 소설을 나는 더 좋아하지만, 오랜만에 루이스의 논리 정연하고 진솔한 글을 읽으니 무언가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다. 오랜 시간 동안 책장에 꽂혀있는 그의 다른 저서, ‘피고석의 하나님’도 다시 시도해 봐야겠다.

* 루이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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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한 일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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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재해석이 만들어낸 창조와 깊고 풍성한 이해

이승우 저, ‘사랑이 한 일’을 읽고

‘생의 이면’ 이후 이승우를 두 번째로 읽게 된 작품으로써, 이 책 안에는 이미 지면을 달리하며 소개되고 읽혔던 네 편의 단편과 한 편의 미발표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생의 이면’에서 기독교의 여러 이미지와 플롯을 직간접적으로 활용했다면, ‘사랑이 한 일’에서 이승우는 거침없이 성경 속으로 들어간다. 창세기 중에서도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이삭의 아들 야곱, 이렇게 삼 대에 걸쳐 소개되는 대표적인 내러티브를 선별하고,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학적 해석, 그리고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허구적인, 그러나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연출해 낸다. 성경의 내용을 잘 모르는 독자라면 어느 부분이 성경의 내러티브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이승우의 상상력과 그것을 현실화시킨 그의 필력은 자연스럽고 완성도 높은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 낸다. 

동시에 이 작품은 원래 성경의 내러티브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충실히 해낸다 (어쩌면 이것이 저자의 주목적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이승우의 상상력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번제 사건 이후 아브라함이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이삭은 홀로 남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삭은 집으로 가기 전, 어릴 적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어머니의 몸종 하갈과 함께 집에서 추방당한 이복형 이스마엘을 방문한다. 물론 성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추가적인 내용으로 말미암아 독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 즉 상대적 강자였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이 아닌 상대적 약자였던 하갈과 이스마엘의 입장에 서서 오래전에 있었던 생이별과 그 추방당한 날 이후 그들이 겪었던 일들을 작가와 함께 상상하며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알다시피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로 직접 약속하셨다. 그 증거를 이승우는 이 작품 속에서 이삭을 만나 자신의 과거를 담담하게 고백하는 이스마엘을 통해 살려낸 것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만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왜 야곱이 아닌 에서를 편애했는지에 대한 한 가지 이유를 설명해주기까지 하는데, 나로선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에서에게서 이스마엘을 보는 이삭의 마음이 묘하게 납득이 되어 지금까지 수십 수백 번 읽으며 언제나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던 이삭의 에서 편애가 처음으로 공감이 되었다. 물론 에서를 탐식가로 만들어버린 점에서는 약간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상상력은 건조하리 만큼 불친절한 성경의 텍스트 사이를 메우고 이어 전체 내러티브의 이해를 돕기도 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승우의 이러한 시도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생의 이면’을 읽으며 계속해서 불편했던 이승우 작가의 중언부언 문체는 이 작품에서 더욱 강화되고 증폭되는 것처럼 보인다. 문장과 다음 문장이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고, 정도만 다를 뿐 연거푸 중첩되는 방식, 그리고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이 단어 저 단어를 모두 사용하여 여러 문장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써내는 방식이 나는 여전히 불편했다. 내가 지향하는, 안정효과 신형철이 강조했던 ‘정확한 글쓰기’에 반하는 문체여서 더욱 그랬나 보다. 반복되는 그의 문장들은 그래서 내겐 정확도가 떨어지는 듯한 인상을 풍겼고, 사물의 정가운데를 찌르는 듯한 명징함이 거세된 채 영원히 근사치만 나타내는 듯한 기분과 늘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굳이 이런 문체를 구사해야 하는가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리고 이러한 문체가 과연 그의 작품을 더 빛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계속 나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나의 사소한 개인적 문제로 남겨두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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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숲에서 만나는 하나님 - 서평의 샘에서 길어 올린 복음
방영민 지음 / 플랜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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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요구: 참 목회자, 참 설교자

방영민 저, ‘책의 숲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읽고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고 캘리포니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즈음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신앙 서적을 시작으로 영성/신학 서적으로 막 진입을 했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들어 성경과 함께 신학교에서 사용하는 조직신학 책과 성서해석학 책을 조금씩, 나의 미천한 이해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읽어보려고, 비록 진도는 안 나갔지만, 발버둥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간증이나 설교 위주의, 상대적으로 읽기 편하고 감정적 위로/공감/치유 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읽는 책이 아닌, 지적인 부분까지 해소시켜주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며, 성경에만 갇히지 않고 시대와 문화를 관찰하고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의 변하지 않는 정체성과 사명과 삶의 방향성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해줄 수 있는 책을 고르기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갈급했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진정한 구원은 언제나 외부에서 오는 법일까. 그 당시 페이스북에는 기독교 서적에 대한 서평가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여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방영민 목사도 그 중 하나였다. 세월이 지나며 대부분의 서평가들은 시들고 말라 자취를 감추었지만, 방영민 목사는 쇠하지 않고 꾸준히, 그것도 갈수록 깊어져가는 통찰력과 필력으로, 서평을 올리고 있다. 방영민 목사의 서평을 초창기부터 읽어오던 팬으로서, 그리고 책 선정에 있어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수혜자로서, 마침내 그의 서평들이 정갈하게 옷을 입고 종이책이라는 모습으로 내 손에 들려 읽혔다는 사실에 나는 기쁨과 감사를 느낀다.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분야에서 계속해서 읽고 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다면, 방영민 목사의 서평을 초창기부터 차례대로 읽어보면 된다. 단순한 기계적인 요약 수준을 넘어, 방영민 목사가 지양하는 인상비평이 아닌, 오랜 관찰과 깊은 성찰을 통과한 통찰이 서서히 견고해져가는 과정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사람을 나는 존경한다. 방영민 목사도 그 중 하나다.

프롤로그에 소개된 것처럼 이 책은 방영민 목사가 써왔던 250여 편의 글을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 네 편씩 선별한 서평 모음집이다. 여섯 개 주제는 교회, 제자도, 설교, 하나님 나라, 시대와 사명, 예수의 십자가이다. 각 부를 여는 서론도 읽을 만하다. 거기에는 저자의 생각과 신앙이 잘 담겨있다. 책을 만들며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여섯 개의 주제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내겐 하나로 읽혔다. 저자의 탄식과 소망, 그리고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전진하는 저자의 성실함과 복음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져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실린 저자의 바람에 더하여 나의 저자에 대한 바람으로 이 감상문을 마치면 어떨까 한다.

저자 스스로가 강조하는 것처럼, 목회자는 기획하고 행정하고 기술에 능통한 기업가와 같은 자가 아니라, 본래 읽고 쓰고 말하고 기도하는 자일 것이다. 이 시대엔 그런 목회자들이 드문 것 같아 평신도인 나는 안타까운 심정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하다. 길 잃은 양이 될까 봐, 하나님 말씀을 읽지 못하는 눈 먼 자가 될까 봐, 하나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 먹은 자가 될까 봐,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모른 채 기계적으로 숨만 쉬며 이벤트화 되어버린 교회 예배에만 참석하게 될까 봐 두렵다. 나 역시 교회의 회복, 기독교의 회복을 갈망한다. 이 부분에서 목회자의 회복이 시급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방영민 목사처럼 꾸준히 작은 등불로 어두운 곳을 비추는 목회자가 많아졌으면 하는 것. 그가 존경하는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김남준, 김영봉 목사처럼 훌륭한 설교자가 되길 바라고, 삶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텍스트가 되어 그의 설교에서, 그의 글에서 넘쳐서 흘러나오는,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갖춘 목회자가 되길 바란다.

#플랜터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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