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작법 수업
이기원 지음 / 오늘산책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잘 팔리는 이야기, 그리고 좋은 이야기


이기원 저,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를 읽고


책을 펼치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영업 비밀을 누설하는 책이구나! 비밀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은 조심스럽게 흥분이 되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는 사람처럼 각성된 상태로 나는 이 책을 새벽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라는 화려한 제목에 낚인 건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책을 펼치고 단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그건 착각 혹은 괜한 의심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정말 제목처럼 나도 더 잘 쓸 수 있겠는걸'하는 생각이 곧 실현될 믿음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뭔가 아주 중요한 무기를 장착하여 업그레이드된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이 책은 부제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작법 수업'에 아주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작법서를 탐독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나조차도 이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공식화된 메시지는 아주 적확하고 유용했으며 시원하기까지 했다. 물론 주요 타깃은 순수문학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를 향하지만, 이 모두가 스토리텔링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기에 소설을 쓰고자 애쓰는 모든 작가에게도 이 책의 내용은 지극히 유효하다. 특히 어떤 인사이트 한두 개에 의지하여 그동안 글을 써오거나 작중 인물이 하는 말에 이끌려 어느 정도 쓰다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 한치도 진전이 없어 글 전체가 흐지부지해진 경험을 해본 작가들에게는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다. 


로그라인, 주제, 하이 콘셉트로 서사의 나침반을 삼고, 주인공, 매력, 감정 이입, 딜레마, 적대자, 조력자, 멘토로 서사의 엔진을 삼으며, 영웅 서사와 패러다임 이론 등으로 서사의 구조를 잡고, 핫 버튼을 잘 찾아 눌러서 서사를 완성하여 성공시킨다는 저자의 가르침을 읽고 지지부진하던 내 소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빈틈이 보이는 것 같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었는지, 무엇이 빠져있었는지 알 것 같다. 이 책은 빛이 되어 내게 드리워진 어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드러나게 해 준 것이다. 고마운 책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메시지들이 성공할 수 있는 스토리, 즉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이 될 수 있고, 책은커녕 긴 동영상도 집중해서 보지 못하는 요즘 시대 사람들(대중)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서 뭔가 서운하고 아쉬운 감도 있다. 잘 팔리는 이야기, 요즘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이야기가 어떤 건지는 충분히 알겠고 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도 알겠는데,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렇게 쓰면 시대를 초월하여 남는 이야기일 수는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은 여전히 답이 없는 채로 내 안에 남아 있다. 결국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에서 말하는 '잘'은 '돈이 되고 요즘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이라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니, 나의 반가운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오늘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을 배우는 시간 -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저,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읽고


죽음은 언제나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특히 주위에 죽어가는 사람이나 최근에 죽은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고, 나도 언젠간 죽는다는 걸 알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대부분 우리들의 현실이다. 이 책은 코로나19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짧은 기간에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어가고 있는 시점에 쓰였다. 저자 역시 의사이고 일반인과 달리 상대적으로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가 가져온 '비일상' 앞에서야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2026년 여름이다. 코로나19가 지구를 휩쓸고 간 지 불과 4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다시 인간들은 망각이 일상인 듯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일상 아닌 일상으로, 그 익숙한 거짓된 세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아, 우린 언제쯤 철이 드는 걸까. 죽음을 멀게 느끼지 않고 겸허하고 낮은 마음으로 죽음을 진지하게 배울 수 있기나 한 걸까. 또다시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을 겪어야 가능해질까. 


누구나 죽음을 겪게 되지만, 아무나 죽음을 공부하진 않는다.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관심을 가져왔지만, 정작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 순서상 죽음 이후보다 죽어가는 과정이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죽음에 대한 무지.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이다. 공부 못하는 걸 그렇게나 부끄러워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죽음에 대해 모른다는 건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죽음이 한 발자국 현실로 침투한다.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준비해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준비하는 과정이 어떠해야 바람직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비로소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저자는 이 시대가 죽음을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점점 더 부자연스러운 사건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의료의 실패로, 의료의 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쓴소리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삶을 마치는 것도 모자라 적어도 서울대학병원을 포함한 소위 빅4 병원(서울대학교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정도는 되는 곳에서 삶을 마쳐야 제대로 보냈다는(혹은 보내졌다는) 인식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도 죽음은 찾아온다는 것을 이 책의 가장 첫 메시지로 던지는 저자는 이러한 뒤틀린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준비 과정을 현실적으로 차근차근 알려준다. 덧붙여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부할 수 없는 묵직한 말을 하면서 병원의 '죽음 비즈니스' 실태를 보여준다. 이어서 "자,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평소에 죽음을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숨을 죽이고 자리에 앉아 진지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웰다잉은 낭만적이지 않다. 이 책 덕분에 죽음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33만여 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지만 그 뜻에 따라 생을 마감한 경우는 725명에 불과했다고 저자는 쓴다. 지금은 나아졌을지는 몰라도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은 10퍼센트대로 올라왔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4년 전(혹은 더 과거)에는 겨우 0.2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알다시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나중에 아파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문서로 남겨두는 법적 효력이 있는 공식 문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정부가 지정한 공식 등록기관을 방문하여 작성해야만 하고, 건강한 사람을 포함한 만 19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문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그대로 실천 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는 병원 측에서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법적인 책임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 환자의 가족들과의 반대나 소통의 부재, 임종기와 말기에 대한 모호한 기준으로 인한 판정의 연기 등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병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죽음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되고 말며, 생사결정권을 병원에 넘겨주게 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쓴다. 참고로 나는 인공호흡기를 단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연명치료와 완화의료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꼭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연명치료는 죽음의 각 단계에 나타나는 증상들을 모두 치료해야 하는 질환으로 보는 반면, 완화의료는 이 모든 증상을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그 과정에서 환자가 통증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것을 최소화하는 치료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흔히 완화의료라고 하면 환자를 포기하는 치료 정도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큰 오해라고 한다. 존엄한 죽음, 사람다운 죽음, 아름다운 죽음 등 웰다잉은 연명치료에 있지 않고 완화의료 쪽에 기울어져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의 개혁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당사자나 그 가족들만이 아닌 병원 관계자들까지 모두 죽음을 질병이 아닌 삶의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자연스러운 관점을 견지했으면 한다. 존엄한 죽음은 결코 방치한 죽음이 될 수 없다.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행위는 결코 죄를 짓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와 맞물려 이제는 어느덧 죽어가는 부모를 향한 효도의 정석이 되어가는 듯한 빅4 병원 중환자실행은 결코 바람직한 마무리가 될 수 없다. 이런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문화가 자리 잡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참고로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의 엔딩노트가 에필로그로 달려 있다. 지금은 건강한 저자가 자녀에게 쓴 유언 같은 글이다. 연명치료 여부, 장례 절차,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 등이 특정한 양식 없이 기술되어 있다. 나는 아직 유언장을 써본 적이 없다. 올해엔 이 엔딩노트를 참고로 하여 나도 이런 글을 한 번 써볼 생각이다.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 달리아 1 밀리언셀러 클럽 53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종인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포와 광기와 집착


제임스 엘로이 저, ‘블랙 달리아’를 읽고


AI나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을 뭔가 대단한 지식인 것처럼 잘도 꾸며 지껄이는 (쉽게 돈 벌려고 하는 수작 그 이상도 이하도 절대 아닌) 수많은 바람 같은 유튜버들보다 나는 책을 가까이하고 많이 읽고 깊은 통찰도 이끌어내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의 조언을 나는 늘 귀담아듣는다. 그동안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여러 북튜버 채널도 많이 접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들의 가벼움에 질려 대부분은 한두 번 보다가 구독을 다 끊어버렸다 (뭐가 목적인지 모호했다. 책 많이 읽었다는 걸 자랑하려는 건지, 읽고도 저 정도밖에 소화해내지 못하는 건지, 등등이 항상 의아했다. 결국 돈 때문에 저러는 건가 하는 결론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팟캐스트 ‘책걸상’은 지금도 즐겨 듣는다. 다른 북튜버 채널들과는 질이 다르다. 3년이 넘게 펀딩에도 참여하고 있다. 책걸상은 진짜 책을 제대로 읽고 저자의 의도는 물론 자신의 해석을 찐으로 나누는 (오프라인 독서모임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잘 형성되어 있다. 조금 꼰대스러운 진행자 한 분 때문에 가끔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어쨌거나 책 읽고 나누는 문화를 어떻게든 지키고 확산하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의 결과 내가 이끄는 오프라인 독서모임의 결은 책걸상의 분위기와 가장 많이 닮아 있다. 


진행자 중 YG님이 수차례 추천하신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를 이번 주말에 드디어 읽었다. 아니, 흡수해 버렸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마침 하루 전까지만 해도 천병희 역의 ‘오뒷세이아’ 원전을 읽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영화를 두 번 보고, 나름대로 그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스스로를 위해 긴 글을 썼던 탓인지 머리를 좀 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차였다. 그리고 내 생각은 한때 내가 사랑했던 추리소설(범죄소설)을 읽어볼까 하는 데까지 옮겨갔다 (내가 안경을 쓰게 된 이유가 추리소설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블랙 달리아’라는 말이 나왔던 데다 그 대사를 듣자마자 ‘아차 내가 사놓고 아직 그 책을 안 읽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책장에 파묻힌 이 책을 손에 들었었다. 


두 권으로 나뉜 이 책의 분량은 약 600페이지 정도다. 그러고 보니 ‘오뒷세이아’와 비슷한 분량이다. 그러나 읽는데 소요된 시간은 훨씬 짧았다. 당연한 말일까. 나는 빨려 들어갔다. 한국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이 아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가장 흡입력이 뛰어났던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보다도 더 훌륭했다고 말해야겠다. 어지간한 책들과 마찬가지로 초반에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느라 조금 더딘 속도였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페이지가 날아가듯 넘어갔다. 


끔찍한 살인사건. 공포와 광기와 집착, 그러나 그것들을 다 합친 무게에 전혀 걸맞지 않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이없는 살인 동기와 살인자의 정체. 나는 허를 찔린 듯했고 작가 제임스 엘로이의 천재성과 필력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의 신체(시체 아님 주의)를 훼손하고, 내장을 다 꺼내어 포름알데히드 병에 넣어 보관하고, 피를 다 뽑고, 그것도 모자라 허리 부근에서 시체를 두 동강 내어 길거리에 버린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공포에 휩싸였고 동시에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소설 끝까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살인자의 정체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것이 인간이지, 이것이 인생이지,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하는 생각을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던 것 같다. 잔인함과 이해할 수 없음, 모순과 이율배반성 때문도 있지만, 그것들보다는 진실이 가진 그 가벼움에 경악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의 끔찍한 사건이라면 뭔가 거대하고 함부로 이해하기 힘든 음모라도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내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추론은 유리잔 깨지듯 박살 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인간과 인생의 진미를 맛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 제임스 엘로이의 천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읽은 스티븐 킹의 ‘빌리 서머스‘보다도 강렬했던 느와르풍의 이 소설은 솔직히 아무에게나 권하고 싶진 않다. 충분히 기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풍성한 독서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성에 대한 광기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고 작품의 중심 결을 따라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미국의 1940년대 상황도 체감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다채롭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음미하며 뜻밖의 성찰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블랙 달리아’는 실제로 1947년 미국 엘에이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써 가장 끔찍한 미제 살인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지어진 것이다. 작품으로부터 전해지는 공포의 무게감도 아마 실제 살인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니 시간 나면 한 번 봐야겠다.


#황금가지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뒷세이아 - (영화 <오디세이> 원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신 같은 인간, 인간 같은 신


호메로스 저, '오뒷세이아'를 읽고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오디세이'를 보고


고전은 존재만으로도 독자를 압도시키는 아우라가 있다. 텍스트를 초월하여 입에서 입으로, 또 노래로 전해져 온 이 오래된 이야기들은 스스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힘과 무게를 지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설령 취향에 맞지 않는다든지, 재미가 없다든지, 기타 여러 면에서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로 실제로 널리 읽히지는 않더라도,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불멸성을 가진다. 이를 단순히 고전에 대한 사람들의 무분별한 경외심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 어린 존경은 당대에 힘을 가질 수는 있어도 숱한 세대를 거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고전의 유용성을 따진다거나 읽을 가치가 없다거나 하는 식으로 고전을 폄하하는 자세는 옹졸한 나르시시스트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가슴으로 몸으로 느껴지는 그 아우라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두 손 높이 항복하며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고전을 읽는 것. 이것이 고전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라고 나는 믿는다.


십 년간 멀리하다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개봉을 핑계로 나는 돌아온 탕자처럼 천병희 역의 ‘오뒷세이아’를 마침내 읽었다. 영화를 먼저 봤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영화를 봤다. 샌드위치 사이에 낀 독서는 먼저 본 영화가 원전과 어디가 다른지 알게 해 주었으며, 독서 후 다시 본 영화는 감독이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이 글은 이 두 가지 관점을 담는 하나의 엉성한 그릇이 될 것이다. 참고로 ‘오뒷세이아’는 ‘오뒷세우스의 노래 혹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디세이'라는 표현은 우리나라 표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것이고, ‘오뒷세이’는 고대 그리스어 원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 방식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는 ‘오뒷세이’, ‘오뒷세이아’를 사용한다. 


원전과 영화


읽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를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책과 영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되기에 잠깐이라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전체 분량을 IMAX 카메라로 찍은 놀란 감독의 이 영화는 인간의 보는 행위를 극대화시킨 효과를 톡톡히 냈기에 그 차이 역시 극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놀란 감독의 영화를 거의 대부분 봐왔지만 ‘오디세이’는 그중에서도 압권이었다. 가상현실이나 우주공간 같은 공상과학 배경이 아닌 인간의 태곳적 모습들을 신과 거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가감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포세이돈의 분노를 선원의 목숨을 가차 없이 앗아가는 폭풍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의 무자비하고 원초적인 본질은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폭로했으며, 그 배후에 있는 신의 존재를 믿고 거기에 의지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었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 하지만 인간은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궁금해하고 그것의 존재를 신화화시키기도 하고 구원을 소망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자연과 초자연을 모두 묶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도 바로 인간이라는 것. 압도적인 영상과 음향 효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금 성찰하게 해 주었으며, 그 덕분에 내 안의 교만이 수그러들고 낮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책만으로는 결코 잘 느낄 수 없었을 부분이었다.


1-4권: 텔레마코스의 여정 (아버지 오뒷세우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아타케를 떠남), 혼돈의 이타케


책과 영화 모두 이야기는 오뒷세우스가 아닌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에서 시작한다. 장소는 그들의 고향 '이타케'이고, 작품 속 현재는 트로이 전쟁을 위해 오뒷세우스가 고향을 떠난 지 이십 년이 지난 시점이다. 십 년간 치러진 트로이 전쟁은 이미 십 년 전에 그리스 연합군 (아가멤논의 미케네, 메넬라오스의 스파르타, 아킬레우스의 프티아, 네스토르의 퓔로스, 그리고 오뒷세우스의 이타케 등)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전쟁이 저 유명한 트로이 목마로 인해 승리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트로이 목마를 고안해 낸 인물이 오뒷세우스였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서 오뒷세우스를 묘사할 때 항상 붙는 수식어구 중 하나도 '지략에 뛰어난'이었다. 오뒷세우스는 용맹스러운 전사인 동시에 뛰어난 지략가였다. 오뒷세우스가 집을 떠난 지 이십 년이 되었다는 것은 트로이 전쟁으로 십 년, 그리고 전쟁 후 아무도 행방을 모르는 방랑 생활로 또 십 년이 지났다는 말이다. 


트로이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대부분의 참전 용사들은 귀향하지 못했다. 아가멤논의 경우는 귀향하고 나서 아내에게 살해당하며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귀향의 의미와 완성에 대해서 다시 묻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책에서 등장하는 주요 귀향 용사는 메넬라오스와 네스토르 정도다. 이들 둘은 이야기의 발단 부분에 해당되는, 즉 텔레마코스가 오뒷세우스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서 텔레마코스를 환대하며 도움을 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오뒷세우스가 살아있는지에 대해서는 전무했다.


이미 이타케에서는 오뒷세우스가 자리를 비운 지 이십 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왕비인 페넬로페를 차지하기 위해 안티노오스를 비롯한 백 명이 넘는 권세 있는 자들이 구혼자로 늘 오뒷세우스의 성 안을 차지하여 시끄럽게 하고 음식과 포도주를 거덜 내며 혼돈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페넬로페의 시녀들과 몸을 섞기도 했으며, 호시탐탐 텔레마코스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짜고 있었다. 빈 왕좌를 이십 년간 지켜내고 있는 오뒷세우스의 아내와 아들의 상황은 이처럼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페넬로페는 오뒷세우스가 이십 년 전 떠날 때 텔레마코스가 턱에 수염이 자라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재혼을 하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페넬로페의 시아버지, 그러니까 오뒷세우스의 아버지인 라에스테르를 위한 수의를 3년간 낮에 짜고 밤에 도로 푸는 작업을 반복하며 구혼자들을 속이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나 시간은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흘렀고, 속임수는 들통나고 말았으며, 어느덧 텔레마코스의 턱에는 수염이 자라났다. 텔레마코스가 갓난아기 때 오뒷세우스가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는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기다리면서도 그가 살아있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확실한 결론을 내려야 어머니를 재혼시키고 벌레 같은 구혼자들을 내쫓아 평화를 찾을 수 있으며, 본인도 정당하게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이 정체된 듯한 상황이 텔레마코스가 이타케를 떠나게 만든 원인이었다. 하지만 원전에서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의 적극적이고 치밀한 개입이 있었다. 신의 직접적인 개입 여부가 원전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텔레마코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만이 아니라 배를 구하고 선원을 모집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테네였고, 적들인 구혼자들의 방해를 줄이기 위해 출항하는 날 구혼자들을 깊은 잠에 빠뜨린 것도 아테네였으며, 오뒷세우스의 오랜 친구인 멘토르의 모습으로 여정 내내 텔레마코스의 옆을 지키고 보호하며 인도한 것도 아테네였다. 원전의 육 분의 일에 해당되는 1-4권까지가 텔레마코스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데, 거의 모든 여정이 아테네 여신의 주도 하에 일어났다. 그러나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아테네의 개입이 배제되어 있었다. 대신 영화에서 젠데이아가 분한 아테네는 오뒷세우스의 환각처럼 나타나 때로는 조언을 하고 때로는 대화 상대가 되어주며 때로는 죄책감을 부각시키고 성찰을 종용할 뿐이었다. 놀란 감독이 영화에서 신의 직접적인 개입을 가능한 배제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른 신은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는 책보다 훨씬 '인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원전처럼 신이 다 주도했다면 영화는 지금 버전의 감동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원전 '오뒷세이아'와 다른 관점으로 영화 '오디세이'를 인간의 대서사로 그려낸 놀란 감독의 판단은 옳았던 것 같다. 


페넬로페의 남편을 향한 사랑과 지조가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였다.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텔레마코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불분명한 생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재산과 평화가 외부와 내부에서 모두 무너지고 있는 꼴을 계속 봐야 한다는 건 끔찍한 게 분명해 보였다. 영화 속에서 페넬로페로 분한 앤 해서웨이와 텔레마코스로 분한 톰 홀랜드는 이러한 부분들을 탁월하게 연기한 것으로 보였다. 원전을 읽기 전과 후, 두 번 영화를 봤지만 원전의 두 인물을 아주 잘 살려냈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원전에서 모자란 부분을 영화가 보충하여 완성도를 높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에서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몰래 이타케를 떠나 퓔로스와 라케다이몬으로 가는 여정을 거친다. 그곳에서 각각 트로이 참전 용사이자 귀향에 성공한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를 만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생사는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영화에서는 텔레마코스가 퓔로스를 생략한 채 곧장 스파르타로 가서 메넬라오스와 그의 아내 헬레네를 만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참고로 라케다이몬이 스파르타다. 


영화에서는 저 유명한 트로이 목마로 인해 트로이 성 안으로 잠입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면들이 메넬라오스가 텔레마코스에게 전해준 회상 이야기로 시각화된다. 그러나 뜻밖에도, 원전에는 트로이 목마 관련 전투 장면들이 거의 적혀 있지 않다. 몇 문장 정도로만 잠깐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료를 좀 찾아보니, 영화에서 보여준 자세한 전투 장면들은 호메로스가 아닌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에 등장한다고 한다. 또한 '오뒷세이아'에서 바라본 트로이 목마는 지략과 승리의 이미지였지만, '아이네이스'는 트로이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 그러니까 전쟁 패배자들의 시선으로 쓰였기 때문에 트로이 목마는 승리의 찬가가 아닌 기만과 학살, 문명 파괴의 이미지를 띤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멧 데이먼이 분한 오뒷세우스가 마치 극심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듯 끊임없이 죄책감에 힘겨워하는 성찰의 영웅으로 그려지는 이유도 '오뒷세이아'가 아닌 '아이네이스'의 영향인 것이다. 놀란 감독은 두 원전을 잘 조합하여 명작을 만들어낸 듯하다.


5-8권: 오뒷세우스가 칼립소에게서 떠나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 도착하는 여정


원전에서 그리는 오뒷세우스의 간략한 여정은 다음과 같다. 


이타케 >>> 트로이 >>> 키코네스족의 섬 >>> 로토파고스족의 섬 >>>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섬 >>>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섬 >>> 식인 거인 라이스트리고네스족의 섬 >>> 마녀 키르케의 섬 >>> 하데스의 지하 세계 >>> 세이렌의 바다 >>>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해협 >>>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 >>> 요정 칼립소의 섬 >>> 파이아케스족의 섬 >>> 이타케


여기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외눈박이 거인 이야기, 마녀 키르케 이야기, 세이렌의 노래 이야기, 요정 칼립소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도 그랬다. 


영화에서 놀란 감독은 원전에 나온 오뒷세우스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고 다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시간상 그렇게 할 수도 없었을 테고, 또 그렇게 했다가는 영화만의 장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영화에서는 로토파고스족의 섬과 요정 칼립소의 섬을 합쳐놓은 것 같다는 것인데, 칼립소가 오뒷세우스에게 기억을 잃게 만드는 로토스 꽃을 먹이는 것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파이아케스족의 섬을 영화에서는 완전히 생략했다는 점이다. 원전에서는 파이아케스족의 전적인 도움으로 오뒷세우스가 이타케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되지만, 영화에서는 칼립소에게서 떠난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섬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폭풍우에 시달리며 이타케로 가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로 보여주기에는 오뒷세우스가 간신히 신의 도움으로 고향에 도착하도록 만드는 것이 항해에 능한 파이아케스족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거라는 판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로서는 충분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파이아케스족을 영화에서 생략한 것은 아주 큰 이야기 흐름에 차이를 가져왔다. 원전의 9권부터 12권까지가 오뒷세우스의 회상 장면들이고, 오뒷세우스 여정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회상을 듣는 사람이 원전에서는 파이아케스족의 알키노오스 왕인 반면, 영화에서는 칼립소로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전보다 칼립소에게 더 큰 비중을 둔 것이다. 그 덕에 영화는 로토파고스족의 섬에 상륙하는 장면도 생략할 수 있었고, 파이아케스족의 섬에 도착하는 것도 생략할 수 있었으며, 그 섬에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알키노오스 왕과 그의 딸 나우시카 공주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을 모두 생략할 수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칼립소로 분한 샤를리즈 테론을 지나가는 행인 정도로만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참고로 원전에서는 칼립소 이야기를 길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오뒷세우스가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면서도 7년이란 긴 세월 동안 칼립소와 함께한 오뒷세우스의 내면에 대해 원전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데 반하여 (솔직히 원전을 읽으면서 낮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울다가 밤에는 칼립소와 함께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이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기억상실도 없는 오뒷세우스가 정신분열이라도 앓는 건지 의아했다. 자발적인 행동이었다면 그건 분명히 외도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로토스 꽃에 의한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을 가져와 개연성을 높여주어 오뒷세우스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 측면이 있었다. 원전의 이야기를 각색한 이 부분 역시 놀란 감독의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칼립소와 함께한 7년을 마치고 칼립소의 도움을 받아 그 섬을 떠나게 되는 이유에 있어서도 원전과 영화는 다르게 표현했다. 원전에서는 역시 신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다. 오뒷세우스가 바다를 떠돌게 된 것은 오뒷세우스가 포세이돈의 아들 거인 폴리페모스의 외눈을 찔러 멀게 만들어 포세이돈의 분노를 샀기 때문인데, 포세이돈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올림포스에서 신들의 회의가 열렸고 아테네의 강력한 설득에 힘입어 제우스가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칼립소에게 보내어 오뒷세우스를 즉시 놓아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제우스나 헤르메스 같은 신들의 모습과 그들의 개입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천둥 소리나 번쩍이는 번개 같은 자연 현상으로 칼립소만이 무언의 메시지를 받는 듯한 모습을 살짝 보여줄 뿐이었다. 그리고 오뒷세우스가 떠나도록 돕는 이유도 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오뒷세우스를 향한 칼립소의 연민과 사랑, 그리고 오뒷세우스가 구구절절 과거를 회상하다가 끝내 고향 이타케와 아내 페넬로페를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9-12권: 오뒷세우스의 회상


앞서 언급한 오뒷세우스의 여정 대부분은 원전의 9-12권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오뒷세우스의 회상에서 비롯된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오뒷세우스 일행은 아가멤논의 대원들과 다른 항로를 선택해 독자적으로 고향에 돌아가기로 한다. 원전과 달리 영화에서는 이 부분에서 오뒷세우스의 모험심과 함께 오만함을 잘 표현했다. 아가멤논과 함께 했다면 십 년의 방랑은 없었을 것이었다. 또한 대원들을 모두 잃는 비참함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영화는 오뒷세우스의 오만한 선택과 그로 인해 잃는 많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오뒷세우스의 심리를 탁월하게 잘 표현했다. 원전에 없던, 혹은 약했던 개연성을 끌어올린 효과를 충분히 낸 것으로 보인다. 원전에서 그린 오뒷세우스는 지략에 뛰어난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영화에서는 ‘성찰하고 고뇌하는 인간 영웅’으로 오뒷세우스를 그려놓은 것 같았다.


영화 속 키코네스족의 섬에서 약탈까지 하며 식량을 구하는 장면은 오뒷세우스의 오만함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이는데, 원전보다 짧고 생략한 부분이 많지만 핵심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였다. 


로토파고스족의 섬에 들러 대원들이 로토스 꽃을 먹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되어 그 꽃을 먹지 않은 오뒷세우스가 대원들을 배 안에 강제로 묶어서 섬을 떠나는 장면은 영화에서는 완전 생략되었다. 


퀴클롭스족의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섬 장면은 영화에서 극적으로 잘 보여준 것 같다. 원전과 영화의 큰 차이점이라면 ‘아무도 아니’라는 이름으로 오뒷세우스가 자기 이름을 폴리페모스에게 알려준 장면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폴리페모스가 오뒷세우스에게 이름을 묻기는커녕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나중에 눈이 찔리고 나서야 거인은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기도를 하는데, 그제야 대원들은 이 거인이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에게 눈이 찔린 폴리페모스가 괴성을 지르며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동료들이 누가 그렇게 했냐고 물을 때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라고, 즉 Nobody라고 대답하여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해프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략에 능한 오뒷세우스를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었던 것이다. 원전에서 발견한 코믹스러운 장면이기도 했다. 


이후 원전에서 오뒷세우스는 일행을 데리고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섬에 들러 아이올로스로부터 바람 주머니를 선물로 받는다. 그 안에는 항해에 도움을 받기 위한 여러 바람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대원들은 그 안에 보물이라도 들어 있을 거라고 오해한 나머지 오뒷세우스가 잠이 든 사이 함부로 주머니를 열어버리는데, 그 바람에 온갖 바람이 다 나와 폭풍우가 몰아쳐서 고향에서 더 멀어졌으며 다시 아이올로스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아이올로스는 다시 돌아온 오뒷세우스에게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매정하게 떠나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완전히 생략된 장면들이다. 


식인 거인 라이스트리고네스족의 섬에 도착하여 무참히 살육당하는 장면은 원전의 메시지를 영화에서도 잘 살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압도적으로 큰 거인들이 은빛 갑옷으로 무장하여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오뒷세우스의 대원들을 집어던지고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은 충분히 공포를 느낄 만했다. 원전에서도 오직 오뒷세우스가 탄 배 한 척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이 섬에서 몰살당한다. 


마녀 키르케의 섬에서 먼저 올라간 대원들 모두가 키르케가 약을 탄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하는 장면도 영화는 원전을 잘 살려놓았다. 특히 키르케로 분한 사만다 몰튼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공포를 연출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원전과 다른 부분도 있었다. 영화와 달리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도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키르케에게 가기 전에 전령의 신 헤르메스로부터 키르케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 약초를 먼저 섭취하여 면역이 생겼기 때문에 오뒷세우스는 돼지로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대원들을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부분은 원전과 영화가 같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오뒷세우스와 일행이 키르케의 조언을 듣고 즉시 섬을 떠나 하데스로 가게 되지만, 원전에서는 키르케와 오뒷세우스가 연인으로 1년을 머물게 된다. 그렇게나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오뒷세우스가 키르케와 1년을 연인으로 지냈다는 건 솔직히 원전을 읽으면서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만나게 될 칼립소에서 극대화된다). 오히려 영화에서처럼 즉시 하데스로 가는 설정이 좀 더 개연성이 높게 느껴졌다.


하데스(저승)로 가게 된 이유는 그곳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야지만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전에서는 테이레시아스뿐 아니라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와 어머니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영화에서는 원전 ‘오뒷세이아’나 ‘일리아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인 시논을 하데스에서 가장 처음 만나게 한다. 시논 역시 ‘아이네이스’에 버림받고 속은 그리스인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놀란 감독은 시논을 통해서도, 특히 저승까지 가서도 오뒷세우스에게 죄책감을 가중시키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놀란 감독이 그려낸 오뒷세우스는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성찰하는 인간 영웅임이 틀림없다.


영화 속 하데스는 괴기스럽고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검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죽은 자들이 만들어내는 음습한 분위기와 피를 마셔야 비로소 진실을 말하게 되는 설정도 원전을 더욱 입체적이고 효과적으로 표현해 낸 것으로 보였다.


이후 향하는 곳은 세이렌의 바다인데, 아마도 영화를 보기 전이나 원전을 읽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에피소드일 것이다. 특히 수많은 문학 작품에 인용되거나 강력한 메타포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전 그대로를 잘 재현한 것을 보였다. 대원들은 귓속에 밀랍을 발라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반해, 오직 오뒷세우스만 돛대에 몸을 묶어 세이렌의 노래를 모두 들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잘 연출했다. 그런데 원전에서는 세이렌 에피소드가 너무 짧게 소개하고 끝내버려서 의외였다. 사실 세이렌의 노래를 어떻게 표현할지 몹시 궁금했는데, 놀란 감독은 오뒷세우스의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이를 대신할 뿐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이렌의 노래에 감히 누가 곡조를 붙인단 말인가. 그랬다가는 아마 아무리 뛰어난 음악이라고 해도 본질을 훼손했다는 평을 피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세이렌의 노래 내용은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를 치켜올려 그의 영웅심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반해, 영화에서는 또다시 오뒷세우스의 죄책을 가중시키는 역할이었다. '가장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 그리고 '이미 가졌으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노래했다고 영화 속 오뒷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가 끝난 뒤 대원들에게 말하는 장면은 멧 데이먼의 심리 묘사가 출중했음을 보여주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해협을 지나는 장면도 영화는 원전을 잘 살려서 시각화했다. 소용돌이로 빠지면 모두가 죽지만, 스킬라라는 머리가 여섯인 괴물에게로 가면 대원 여섯 명만 죽는다는 사실을 오뒷세우스는 키르케로부터 들어서 미리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 놀란 감독은 대원들 스스로가 스킬라에게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만들었고, 키르케의 말대로 여섯 대원이 잡혀 먹었다. 여기에서 어설픈 공리주의를 끄집어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가 일방적으로 카리브디스가 아닌 스킬라 쪽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아마도 놀란 감독이 이런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대원들이 앞장서서 스킬라 쪽을 선택하게 했던 게 아닌가 싶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를 잡아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키르케와 테이레시아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대원들은 굶주린 나머지 소를 잡아먹고 만다. 한 달 동안이나 바람이 계속 섬 쪽으로만 불어 떠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만 고기를 먹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소를 먹지 않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모든 대원은 예언대로 그 섬을 떠날 때 폭풍우를 만나 몰살당한다. 원전에서는 태양신 헬리오스가 제우스에게 소를 먹은 자들을 처벌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고, 제우스가 폭풍우로 그 기도에 응답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기도는커녕 헬리오스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예언이 이루어진 것, 죽을 운명으로 표현될 뿐이었다. 이 부분에서도 놀란 감독은 신을 배제시켰고 대신 대자연을 신의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든 대원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고 오직 오뒷세우스만 돛대 조각을 붙잡고 간신히 살아남아 요정 칼립소의 섬에 당도하게 된다. 칼립소 이야기는 앞에서 다뤘기에 여기에선 넘어가기로 한다. 


13-16권: 오뒷세우스의 은밀한 귀향


아가멤논이 남긴 교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전 대원이 몰살당한 상태에서 오뒷세우스는 금의환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원전에서는 칼립소의 도움으로 파이아케스족의 섬으로 가게 되지만, 영화에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이타케에 간신히 목숨만을 살린 채 당도하게 된다. 


원전의 후반부인 13-16권은 9-12권까지의 오뒷세우스의 회상을 뒤로하고 다시 작품 속 현재 시각으로 돌아온다. 이타케에 도착한 오뒷세우스는 끊임없는 아테네의 계획과 안내로 곧바로 자신의 성으로 가지 않고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에게로 간다. 아테네는 오뒷세우스의 외모를 거지 노인으로 바꾸기도 하고 우람하고 젊게 보이게 바꾸기도 하며 오뒷세우스를 지속적으로 돕는다. 에우마이오스는 원전에서나 영화에서나 오뒷세우스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에우마이오스는 변장한 오뒷세우스를 처음에도 알아보지 못했고 나중에 성으로 가서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오뒷세우스가 스스로 오뒷세우스임을 밝힌 후 확실한 증거로 어린 시절 멧돼지 송곳니에 찔러 허벅지에 남은 흉터를 보여주었을 때 에우마이오스는 눈물을 흘리며 주인을 알아보았다. 영화에서는 에우마이오스가 장님으로 나오는데 (이 역시 단번에 오뒷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한 에우마이오스를 배려한 놀란 감독의 각색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테네 여신의 도움도 가능한 배제해야 했으니 말이다) 오뒷세우스가 자기의 활로 도끼 구멍을 12개 통과하는 시범을 보인 직후 구혼자들을 제거할 때 즈음에야 텔레마코스에게 확인을 받으며 오뒷세우스의 정체를 알게 된다. 


반면 오뒷세우스가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오뒷세우스를 가장 먼저 알아본 존재가 있었으니 자신의 늙은 사냥개 아르고스였다. 아르고스는 마지막 주인을 보고 곧바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에서도 이를 잘 살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아테네는 여전히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 머물던 텔레마코스의 꿈속에 나타나 구혼자들의 암살 매복을 경고하고 이타케로 복귀하면 성으로 가지 말고 곧장 에우마이오스에게로 가라고 지시한다. 이미 에우마이오스에게는 거지 노인으로 변장한 오뒷세우스가 먼저 와 있었다. 흥미롭게도 부자 상봉이 성이 아닌 돼지치기 오두막에서 이십 년 만에 일어나도록 아테네가 계획한 것이었다. 물론 텔레마코스는 오뒷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아테네가 잠시 오뒷세우스의 외모에 변화를 주어 신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는데, 그 변화를 알아챈 텔레마코스는 그가 혹 신인가 하여 두려워했지만 오뒷세우스는 자기가 아버지임을 스스로 밝힌다. 그리고 오뒷세우스와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을 어떻게 몰살시킬지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착수한다.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짧게 다루고 넘어간다. 


17-20권: 오뒷세우스의 복수 준비


이제 아버지 오뒷세우스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힘을 합쳐 그동안 빈 왕좌를 지키던 페넬로페를 농락하며 성을 평화를 어지럽혔던 구혼자들을 몰살시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원전과 영화 모두 텔레마코스가 먼저 성으로 가서 구혼자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성안에 있는 모든 무기들을 창고에 넣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모든 문을 걸어 잠그도록 명한다. 그리고 텃세를 부리던 진짜 거지 이로스가 변장한 오뒷세우스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장면 또한 원전과 영화에서 모두 다루었다. 다만 원전에서는 아테네 여신이 오뒷세우스의 근육을 한층 더 부풀려 이로스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장면이 적혀 있으며, 오뒷세우스가 이로스를 한 방에 죽일지 살짝만 때릴지 고민하는 장면도 적혀 있다. 오뒷세우스가 변장한 신분을 끝까지 유지하며 인내하기 위해 후자를 택하게 되지만, 이로스는 그 한 방을 맞고 턱뼈가 부러졌다. 


이방인을 환대하는 풍습에 따라 변장하여 거지처럼 보이는 오뒷세우스는 페넬로페와 대담하는 기회를 가진다. 지략에 능한 오뒷세우스는 정체를 숨기면서 자신을 크레타에서 온 이방인이라고 소개하며 오뒷세우스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며 거짓말을 또 유창하게 한다 (오뒷세우스가 지략에 능하다는 말을 달리하면 거짓말에 능하다는 말도 될 것 같다). 페넬로페는 남편의 소식에 또 눈물을 흘린다. 


한편 페넬로페의 명령에 따라 이방인의 발을 씻기러 온 시녀 에우리클레이아는 오뒷세우스의 상처 입은 다리의 흉터를 알아보고 그 거지 행세를 한 이방인이 오뒷세우스임을 알아본다. 깜짝 놀란 그녀의 입을 오뒷세우스가 곧바로 다물게 했지만 말이다. 이 긴장되는 상황은 원전이나 영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진짜 정체가 누구나 알아봄직한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닌 숨기고 싶은 치부일지도 모르는 작은 흉터로 인해 탄로 난다는 이 설정은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21-24권: 오뒷세우스의 복수와 이타케의 평화 회복


다음날 페넬로페는 오뒷세우스의 활을 들고 나와 활시위를 걸고 활을 쏘아 열두 개의 도끼 구멍을 통과하는 시합을 선언한다. 시합의 우승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원전의 내용을 영화가 잘 표현했다. 원전에서처럼 영화에서도 모든 구혼자들이 다 활시위를 거는 것조차 실패했고, 마지막으로 거지 행세를 하던 오뒷세우스가 성공하게 되는데, 말하지 않고도 자신이 오뒷세우스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편 원전에서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이 모두 실패함을 보고 마지막으로 거짓 행세를 한 오뒷세우스에게 기회를 주라고 말한 뒤, 이후 일들은 텔레마코스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듣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 잠이 든다. 아테네가 페넬로페의 눈꺼풀에 달콤한 잠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살극을 페넬로페가 직접 보지 못하게 만든 아테네 여신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에서는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을 모두 죽일 때 페넬로페는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활시위 거는 것에 성공하고 도끼 구멍도 모두 통과시킨 오뒷세우스는 이후 구혼자들을 몰살시키기 시작한다. 첫 제물은 안티노오스였다. 그는 구혼자 중에서 가장 권세 있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영화에서도 가장 간교한 인물로 그려졌다. 다만 영화에서는 안티노오스가 첫 제물이 아니라 중간 즈음에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말이다. 안티노오스로 분한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보는 내내 나도 저 자식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로 말이다. 


또한 이 몰살극은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와 텔레마코스, 그리고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소떼를 보살피는 필로이티오스, 이렇게 네 명이 함께 힘을 합쳐 실행했지만, 영화에서는 오뒷세우스가 거의 혼자 싸우는 설정으로 표현했다. 영화에서는 필로이티오스의 존재 자체도 생략했다. 뿐만 아니라, 이 몰살극 역시 원전에서는 아테네 여신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화에서 신과 사람의 도움 없이 오뒷세우스 혼자서 싸워 거의 모두를 죽인다는 설정은 솔직히 현실성이 좀 떨어져 보였다. 오뒷세우스의 영웅화가 좀 지나치게 보였던 부분이었다. 나에게는 이 영화의 유일한 티 같이 느껴졌다.


피의 복수가 끝나고 원전에서는 페넬로페가 남편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이미 복수극 전부터 알아보는 설정으로 나오지만, 원전에서는 나름 널리 알려진 '침대 시험'으로 인해 알아보게 된다.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침대는 예전에 오뒷세우스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살아있는 올리브 나무를 그대로 이용해 침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무의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이동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페넬로페는 그 침대를 끌어내어 사기꾼일지도 모르는 오뒷세우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라고 시녀에게 명령한다.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오뒷세우스는 깜짝 놀라며 말도 안 된다고 말하면서 둘만 아는 침대의 비밀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이로써 페넬로페는 그가 사기꾼이 아니라 진짜 남편 오뒷세우스임을 확신하게 된다. 확실한 증거 없이 아무도 믿지 않는 페넬로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모습이 없었다면 이십 년간 빈 왕좌를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에서는 복수의 성공과 오뒷세우스 귀향의 완성을 보여주면서 텔레마코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오뒷세우스는 페넬로페와 함께 배를 타고 미지의 서쪽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하지만, 원전은 전혀 다른 마무리를 선보인다. 오뒷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구혼자들의 혼령이 하데스로 내려가는 장면이 등장하고, 오뒷세우스는 아버지인 라에스테르를 찾아가 눈물 어린 재회를 한 뒤 안티노오스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구혼자들의 무리가 일으킨 군사들과 짧은 전투를 벌인다. 라에스테르, 오뒷세우스, 텔레마코스, 삼대가 함께 한 전투는 싱겁지만 승리로 귀결되는데, 라에스테르가 던진 창이 안티노오스의 아버지를 정확히 맞혀 죽였고, 제우스가 벼락을 떨어뜨렸으며, 아테네 여신이 전투를 멈추고 서로 화해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타케는 마침내 평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타케의 평화 회복 역시 신의 적극적인 개입을 배제할 수 없었다. 오뒷세우스의 모든 여정에 있어서도 신의 개입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었다. 원전은 철저히 신의 개입으로 인해 역사가 움직이고 변화를 맞이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나는 인간이 그저 신의 장난감처럼 사용되는 것 같은 인상도 받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바로 이 점, 즉 신의 개입 여부가 원전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놀란 감독은 신을 지우는 작업을 철저히 수행했던 것 같다. 인간 오뒷세우스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오뒷세우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아테네 여신만은 간간이 보여주었지만, 그조차도 오뒷세우스의 죄책감이 깃든 환각인지 헷갈릴 수 있도록 교묘하게 표현해 놓았다. 대신 거대하고 원초적이며 인간을 거뜬히 초월하는 힘을 가진 자연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는데, 아마도 놀란 감독은 이 대자연을 신을 대신해서 그려놓았던 게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면서 원전에서도 나온 환대(크세니아)라는 개념을 더욱 명징하게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원전만 읽으면 환대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저 당연한 문화처럼 여겨지고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환대는 조건 없는 환대다. 나그네 혹은 이방인이 오면 그 어떤 것도 먼저 묻지 않고 그의 발을 씻기고 음식을 대접하여 배부르게 한 이후에 어떤 사람이며 어디 출신이며 어떤 가문인지를 묻는 문화다 (물론 잠자리도 제공한다). 놀란 감독은 영화에서 이것을 '제우스의 법'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게 만드는데, 이 법을 대대적으로 깬 장본인이 바로 오뒷세우스라는 설정은 오뒷세우스의 죄책감의 중추를 이룬다. 트로이 목마는 위장이었다. 제물로 위장하여 트로이인들의 환대를 이용하여 성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자의 조건 없는 환대를 이용하여 자신의 실리를 취하는 것. 이것이 오뒷세우스가 스스로 성찰하여 죄책을 느끼는 핵심이었다. 지략에 능한 오뒷세우스는 타자의 환대를 이용해 타자의 죽음을 꾀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전쟁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바로 그 선택 때문에 많은 것들을 잃어야만 했다. 영화는 계속해서 오뒷세우스를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며 성찰하는 인간 영웅으로 그리는데, 그 시작이 전쟁을 승리로 가져다주고 오뒷세우스를 위대한 영웅으로 등극시킨 트로이 목마였다는 것은 기막힌 역설이자 놀란 감독이 노린 가장 강력한 한 수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는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했다. 그 역시 원자폭탄을 발명해서 전쟁 승리를 가지고 왔지만, 많은 이들을 학살한 파괴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고,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놀란 감독만의 영화 세계가 그리는 중심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느낀 게 있다. 원전에서 오뒷세우스는 신 같은 인간으로 표현된다. 그를 수식하는 어구 중에도 '신 같은'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신들도 오뒷세우스에 대해서는 다른 인간과 다르게 보고 대한다. 왜 그랬을까 싶은 의문이 책을 읽고 영화를 두 번 보고도 사라지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신은 공평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가리고 선택하는 신. 자기 맘대로 감정에 치우쳐 함부로 사람의 목숨도 좌지우지하는 신. 이런 존재가 진짜 신이라면 나는 차라리 무신론자가 되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 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을 '신 같은 인간, 인간 같은 신'으로 지은 이유다.


#숲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성이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9
장강명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뒤늦은 실감


장강명 저, ‘서성이다‘를 읽고


밀려드는 감정이 아닌 차오르는 감정은 실감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는 걸까. 아니 어른이 되고 나서 인간은 실감이란 걸 제대로 할 수나 있는 걸까. 어른 인간은 이미 와 버린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성이라는 여과지를 통해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걸 이성이라고 부를 수나 있는 걸까. 사람을 무뎌지게 만드는 이성 따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지부조화일까. 혹시 감정 불능은 아닐까. 혹시 소시오패스는 아닐까.


소설가 장강명은 어느 날 인지적 벼락을 맞는다. 불치병인 교모세포종이라는 뇌종양이 아내의 머릿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흐드러졌던 벚꽃이 다 졌던 2025년 4월 말이었다. 


소설 속 안시찬은 장강명의 분신이다. 현실세계의 장강명과 소설 속 안시찬은 황망한 아내의 뇌종양 소식에 당황해한다. 아내를 둔 남편이라면 그 누가 당황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 모든 남편들은 아마도 소설 속 3일이라는 시간 동안 마치 모든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것처럼 응급실과 병원을 오가며 아드레날린이 치솟은 채 안시찬에 빙의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그랬다. 길지 않은 분량 탓도 있겠지만, 자정을 넘기고도 페이지 넘기는 동작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이미 팟캐스트 ‘암과 책의 오디세이‘를 자주 들어서 그들의 서사를 거의 다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소설은 장강명 작가 본인과의 거리 두기를 위해서인지 3인칭 시점으로 쓰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소설은 주인공 안시찬의 심경을 보다 객관적이고 절제된 문체로 묘사한다. 소설 속 이야기의 발단은 아내에게 생긴 이상 증상이었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남편 안시찬이다. 제목에 등장한 ‘서성이다’의 주체도 안시찬일 것이다. 


이 작품은 팟캐스트 ‘암과 책의 오디세이’와도 초점을 달리하여 날벼락같은 아내의 암 소식을 접하고 그것을 현실로 인지하기까지 남편 안시찬의 서성이는 내면을 조명한다. 그 내면은 불안과 공포, 체념과 자기 비하, 성찰과 자기 합리화 등이 마구 뒤섞여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을 통해 주인공은 이미 먼저 와서 몸을 장악하고 있었던 슬픔과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지울 수 없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실감하게 된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현실에서 터지고, 하필 그것이 내 것일 때 아마도 대부분은 감정과 이성의 부조화를 경험하지 싶다. 사건의 규모와 그것을 인지하는 나의 제한된 능력, 그리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나의 작은 그릇 등으로 인해 이미 내면은 난장판이 되기 마련이다. 여기에 평소 억눌러왔던 감정들(죄책감이나 후회와 미련 같은)마저 끼어들게 되면, 그야말로 죽고 싶은 마음,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감정들을 처리하고 뒤늦은 실감을 하는 동안에도 고통만은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안과 밖 모두를 침투하고 장악한다. 이 부분에서 장강명은 말한다. 자격을 묻지 않고 찾아오는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는 건 기만이라 생각하지만, 사람들을 진정으로 묶어주는 것은 고통이라고.


사람들을 진정으로 묶어주는 고통의 파괴력은 곧 연민이라는 인간다움으로 연결될 것이다. 장강명은 도스토옙스키를 그의 작품 속에서 (이번 작품에도 마찬가지로) 자주 소환하여 무신론과 허무주의의 연장선에서 인물의 부정적인 내면을 궤변 식으로 토로하곤 하는데, 고통과 연민은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코어에 해당된다고 보는 내게 이 문장은 참 마음에 들었다. 무신론과 허무주의의 겉옷을 입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음을 마침내 읽어낸 것 같아서,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이제야 제대로 이해해 준 것 같아서 감사함도 느꼈다.


이 세상 모든 남편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교모세포종 2차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 중인 김새섬 그믐 대표가 완치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장강명 읽기

1. 책 한번 써봅시다: https://rtmodel.tistory.com/1256 

2. 먼저 온 미래: https://rtmodel.tistory.com/2023

3. 재수사: https://rtmodel.tistory.com/2220

4. 서성이다: https://rtmodel.tistory.com/22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