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3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혜경.심성보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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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속에 빛난 고결함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몽 같은 이야기’를 읽고

도스토예프스키 전작 읽기도 분량으로 따지자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호흡이 긴 장편을 선호하는 취향 덕에 그의 작품 중 장편을 먼저 다 읽고 이젠 중단편을 아쉬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하나씩 까먹고 있다. 쉬이 없어질까 두려워 맛난 간식을 아껴먹으려는 아이처럼 나는 책장에 꽂힌, 의도적으로 아직 읽지 않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일주일에도 여러 번 손에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이전엔 몰랐다. 독서도 즐겁지만 아끼는 것도 즐겁다는 것을.

대부분의 도스토예프스키 중단편들은 책 한 권에 여러 작품이 실려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색을 감히 사랑하는 독자로서 나는 그의 작품 읽기에 익숙하다. 하지만 자연스레 빨라지는 속도에 그대로 내 몸을 맡기지는 않는다. 저항하며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는 건 단순히 텍스트 읽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고, 한편으론 존경하는 작가에 대한 일종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도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평가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작품과 작가의 배경을 따로 공부하는 분석가가 될 필요도 없다. 다만,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문체, 이를테면 신랄하게 비꼬기, 어이없을 정도로 어리석게 행동하기, 섬뜩할 정도로 추악해지기, 그 가운데 고결한 구원의 작은 등불을 잊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상징적으로 그려놓기, 등을 대할 때면 일부러라도 천천히 읽어야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충분히 공감하고 상상하며 텍스트 사이에 써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입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여러 권을 읽은 듯한 효과를 내며, 작품의 재미를 떠나 작품이 가지는 여러 층위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맛을 볼 수 있는 미각을 일깨운다. 나아가 작가의 사상을 대충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작가가 읽어주는 걸 듣는 듯한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독서는 공감각적이고, 그래야만 하며, 그래야 제대로 된 독서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상력이 거세된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특히 문학 영역에서의 읽기라면 더욱 그렇다. 줄거리는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남는 건 결국 그 당시 잠깐이라도 시행했던 공감각적인 경험의 흔적이다. 잊지 말자. 독서는 향유다. 그래야만 한다.

‘악몽 같은 이야기’는 중기 작품에 해당하는 단편소설이다. 기준에 따라 중편으로도 분류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열린책들 판으로 100 페이지 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이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중 나에겐 가장 짧은 작품이었다. 앞으로는 더 짧은 여러 작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 작품으로 그 첫 문을 연 셈이다. 나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늘 긴 호흡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전개와 수 페이지에 걸쳐 진행되는 장광설까지도 즐겼었는데, 이젠 상대적으로 짧은 호흡과 급박한 전개 혹은 간단한 설정 정도에 만족을 해야 하니 조금 아쉬운 감도 없진 않다. 마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전체 이야기 중 한 장면에 불과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생각했던 것보단 걱정을 덜 해도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백 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약 20분의 1 분량이다)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충분히 도스토예프스키다운 문체로 온통 도배를 해놨기 때문이다. 문학을 감상할 때 줄거리를 파악하거나 교훈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벗어난 지 오래인지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체를 조금은 새로운 설정에서 맛보는 경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다만, 여전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장편에서 더 돋보이는 작가라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작품은 염치를 모르는 것 같은 한 고관의 어이없는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짧은 분량 덕분인지 복잡하게 꼬이는 이야기도 없고 상대적으로 단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무엇을 말하려는가가 장편보다 압축적이고 뚜렷하게 드러난다. 상징적인 부분들도 여러 번 등장하며 설명을 대신하여 이야기 전개에 한몫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의도적으로 시대상을 반영한 듯 보이는데, 정치와 사상에 관련된 부분, 특히 복고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그리고 작품을 다 읽고 나서도 모순적으로만 보이는 ‘휴머니즘’이라는 개념 사용에 대한 풍자를 선보인다.  

주인공은 스스로를 휴머니즘을 사랑하고 실천하며 복고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나름대로 앞서간 인물이라고 여긴다. 시대가 자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도 할 정도로 자기애가 강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오래 유지되진 않는다. 대부분의 일상은 늘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거기에 맞춰 사는 비주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입진보’랄까. 남들 앞에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인 것처럼, 헌 것을 뜯어고치며 새로운 것을 향해 먼저 나아가는 선구자로 보이기를 갈망하지만, 그 모두가 허세에 지나지 않는 인물. 정작 그의 관심은 휴머니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만 대접받기를 바라면서 휴머니즘을 부르짖는 건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는 휴머니즘을 실천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남들에게 휴머니스트로 보이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인생 자체가 허세에 쪄든 인물인 셈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인물의 성향을 직접적인 설명 대신 그가 어느 날 밤에 벌인 우스꽝스럽고 창피하기도 한 어떤 해프닝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뒤처리를 하는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언제나 말과 글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효과가 큰 법이다. 소설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은 자신이 얼마나 휴머니즘을 사랑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 밤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부하 직원의 결혼식 피로연에 늦은 시각에 참석하기로 맘 먹는다. 높은 직책의 대단하신 분이 한 달 월급이 10 루블밖에 되지 않는 하급 관리의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참석하여 그 부하 직원을 축하해주고 살며시 나온다면 도덕적으로 고결함을 증명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휴머니즘을 실천하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인물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말이다. 그는 이런 어이없는 자신의 상상만으로도 들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 터무니없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야 마는데, 어지간한 독자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파티 분위기는 망가졌고, 그는 결혼식 피로연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신랑은 잔뜩 눌려서 꼼짝없이 수발을 들었다. 가난한 관리의 집에선 마시기 힘든 샴페인도 두 병이나 대접받으며 불청객처럼 그곳에 머물렀다.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주인공 고관 나리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결과, 술에 취해 뭐라고 지껄이다가 쓰러져 잠들고야 마는데, 그 여파로 사람들은 다 흩어졌고 남은 신랑과 신부, 가족들은 그 고관을 아무 데나 재울 수 없기 때문에 새로 산 신랑 신부를 위한 침대에 눕히기로 결정한다. 신랑은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었고, 신부는 울분이 터져 목청 높여 울기 시작한다. 신부의 어머니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면서 신랑을 구박한 뒤 신부 손을 잡고 집을 나간다. 입이 턱 막히는 상황 전개. 비극적이고 또 한편으론 우스꽝스러운 광경. 아, 나는 '과연 도스토예프스키로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앙 한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침착한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신랑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술에 취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고관을 밤새 침대 옆에서 돌보았고, 아침이 되어 씻으라며 물까지 준비해준 천사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구원의 빛 한 줄기로 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인물인 셈이다. 인간이라면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인내하고 용서하며 악을 선으로 갚는 고결함. 이 우스꽝스러움과 고결함의 극적인 대비. 역시 도스토예프스키구나, 싶어 나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르고, 남의 시선에 맞추어 사는 비주체적인 우리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내 주위에서도 몇몇 비슷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말로만 바르고, 말로만 앞서가고, 말로만 선한, 가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악랄한 인간들. 분노가 살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신랑 어머니의 고결함이 그 분노를 눌러버렸다. 그것도 넉넉하게 말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주인공 고관은 유아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인간 정도로, 그래서 분노해야 할 인물이 아닌 불쌍하게 여겨야 할 인물로 바뀐다. 이 놀라운 관점의 변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할 이유는 이것 말고도 충분하다. 남은 여러 중단편들이 기대가 되는 이유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94599463918140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024470600931025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11384872239590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34426206602123
16. 닮은 듯 다른 우리 (by 김영웅):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57630130948397
17.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5027567450621330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3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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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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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억과 망각의 힘 그리고 신비


가즈오 이시구로 저, ‘파묻힌 거인’을 읽고

기억을 잃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특히 노화, 질병, 사고로 인한 망각은 인생의 무거운 추가 되어 당사자뿐 아니라 그 가족, 친지들을 말 없는 무게로 짓누른다. 개인의 망각은 비단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작게는 가족 문제로, 크게는 사회적인 문제로 확장될 여지를 가진다. 한 사람의 망각은 여러 사람의 슬픔을 동반하는 것이다.

망각이 언제나 부정적인 건 아니다. 사실 우린 망각을 일상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경험하기에 그나마 지금과 같은 Norm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뇌는 사고의 중추를 담당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몸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 필요 (혹은 생존 본능)에 따라 우리 뇌는 기억을 조작하기도 삭제하기도 한다. 이런 작용들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우리 몸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우린 미처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우린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 중 도대체 얼마만큼을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상상해보라. 모든 걸 다 기억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린 알고 보면 무의식적 망각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우린 모두가 기억하고 또 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망각의 힘을 어떤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악이용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 집단이나 국가가 강제적으로 삭제, 왜곡한 역사는 이러한 사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목적은 단 하나다. 세탁. 역사는 사실의 나열이 아닌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악과 불의를 동원하여 승리를 거머쥔 자들의 영웅담이 역사로 둔갑하는 순간, 무고한 후대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유린당하게 된다. 그 악한 승자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애써 진실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달해야 할 이유다. 이때 기억은 약자들의 강력한 저항이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 전작 읽기는 이제 끝이 보인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헤세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다작을 한 작가가 아니라서 전작 읽기를 가장 늦게 시작했으나 가장 빨리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에 출간된 이 작품 ‘파묻힌 거인’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나를 보내지 마’ 이후 10년 만에 낸 장편소설이다. 황혼을 노래하는 그의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은 나를 강렬하게 매혹시켰고, 나는 그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는 이 3부작 이외에 총 5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고, 내가 아끼느라 아직 읽지 않고 있는 ‘녹턴’이라는 제목의 단편집 하나도 출간했다. 첫 작품이 1982년에 출간되었으니 올해로 정확히 40년이 지난 셈인데, 전작이 9권밖에 없는 조촐한 작가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고, 그만큼 한 작품의 밀도가 높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 작품 ‘파묻힌 거인’은 내가 읽은 그의 마지막 장편이 되었다.

‘파묻힌 거인’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기억과 망각의 이야기다. 하지만 치매나 사고로 인한 기억상실증 같은 애처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벌이는 의도적인 망각, 그리고 그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행위에 목숨 걸고 저항하여 다시 찾아내려는 기억, 이 둘 간의 대립이 자아내는 이야기다. 여기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소설가답게 이처럼 사회적인 논쟁거리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주제에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의 옷을 입힌다. 용이 나오고, 도깨비가 등장하며, 기사 (무려 아서 왕의 조카!)가 여전히 살아있는 데다, 이동 수단은 걷고 말 타는 정도밖에 없고 총이 아닌 칼로 싸우는 시대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단편집 하나 빼고 다 읽은 독자로서 이 작품은 나에게 독특한 느낌을 선사해주었다. 여전히 내가 반했던 그의 문체는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너무나도 색다른 스타일의 글쓰기 앞에서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심리 상태와 진행을 기가 막히게 잘 묘사하고 그것을 서사로 사용하는 그의 기술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판타지 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에겐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브리튼 족과 색슨 족의 대립이 발생했던 과거, 브리튼 족 출신이자 위대한 왕이었던 아서 왕은 색슨 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그는 색슨 족이 미래에 저지를 수도 있는 복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멀린에게 주술을 이용하여 모든 사람의 기억을 제거한다. 주술의 매개체는 용이었다. 용이 살아있는 한 그 주술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아서 왕의 후손들은 용의 수호자가 되어 멀린의 주술을 계속 유지하도록 힘쓴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인 가웨인 경 (아서 왕의 조카이자 기사) 역시 사람들을 속인 채 용을 보호하는 비밀 임무를 노쇠할 때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과거에 떠났던 아들을 만나려고 마을을 떠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의아해했다. 여러 경로로 그들은 용이 뿜는 안개가 바로 그 원인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아들을 만나러 가는 목적과 더불어 다시 기억을 되찾고 싶은 목적도 가지게 된다. 그러려면 용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노부부는 가는 길에 만난 전사 위스턴과 용에게 물린 자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며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한 소년 에드윈과 동행하게 된다. 주요 인물은 그러므로 노부부, 기사, 전사, 소년, 이렇게 총 다섯 명인 셈이다. 그들은 중간중간 헤어졌다 만났다 하면서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용의 은신처 앞에서 만나게 되는데, 비밀리에 용을 보호하고 있던 가웨인 경 (브리튼 족)과 용을 죽이라는 왕의 임무를 부여받고 온 전사 (색슨 족) 사이에 결투가 벌어진다. 결국 가웨인 경과 용은 위스턴에게 죽게 되고 안개가 사라지며 사람들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파묻힌 거인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는 색슨 족의 복수가 시작되는 비극적인 시작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는 무거운 의미를 지니긴 하지만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고 눈여겨봐야 할 부분, 혹은 잠시 멈추게 되고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부분은 이러한 이야기에 있지 않다. 적어도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노부부의 우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시 기억을 되찾게 되면, 그때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될까, 하는 질문 앞에서 나는 뒤통수를 한 방 먹은 것처럼 먹먹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 용이 내뿜은 안개로 인한 망각은 좋은 기억만 제거한 게 아니라 기억하지 말아야 할 기억도 제거했다. 그 망각은 선택적 망각이 아닌 무작위적 망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액슬이 비어트리스에게 부탁하던 말이 내겐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다음과 같다.

“케리그 (용의 이름)가 죽고 이 안개가 사라지게 되면 말이오. 그래서 기억들이 돌아오고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던 기억들도 생각나면 말이오. 혹은 한때 내가 저질렀던 어두운 소행들이 기억나서, 당신이 날 다시 보게 되고,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오. 이것만은 약속해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요." (383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뿐만 아니다. 노부부가 고향을 떠나기 전 비어트리스가 만났던 한 여자가 해준 말도 기억에 남는다. 다음과 같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조금밖에 무섭지 않았어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이 땅에 망각의 안개가 덮여 저주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종종 말하던 거잖아요. 그때 그 여자가 내게 물었어요.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 후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을 할 때면 너무 겁이 날 때가 있어요.” (71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과연 이런 관계들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말과 행동이 맺은 열매인 걸까? 혹시 어떤 중요한 망각으로 인한 열매는 아닐까? 파묻힌 거인이 깨어나듯 잊혔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면 과연 우린 이런 관계들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기억뿐만이 아닌 자연스러운 망각에서 나는 신비를 발견한다. 다만, 잊어야 할 것은 잊고,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길 바랄 뿐이다.

#시공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33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7.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8074846530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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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헤르만 헤세 지음, 김윤미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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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헤세

헤르만 헤세 저,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를 읽고

헤세의 작품에는 유독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작품 주인공이 예술가인 경우도 있고, 그림이나 음악이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헤세 자신이 예술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이 책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헤세가 쓴 음악에 관련된 글들을 여기저기서 모아 엮은 책이다. 그가 쓴 소설의 일부분이 소개되기도 하고, 그의 에세이, 시, 편지, 서평, 메모 등의 짧은 글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음악뿐 아니라 미술에 관련해서도 이런 책이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다. ‘헤르만 헤세, 그림 위에 쓰다’ 정도로 말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그의 여러 작품을 훑어보며 예술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면서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써나가도록 하겠다. 음악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예술로 범위를 확장할 때 헤세가 그의 모든 작품에서 조용히 외쳤던 합일 사상을 더욱 명료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을 읽고 단순히 헤세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식으로만 결론을 낸다면, 그건 아마도 곁다리만 짚는 격이 되지 않을까 한다. 헤세는 작가이지 음악가가 아니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되겠다. 음악은 주제가 아니라 소재라는 점도 간과하면 안 된다. 주제는 헤세의 철학 내지는 사상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도 수차례 언급되지만, 그것은 바로 ‘합일’이다. 두 개 이상의 대립된 자아나 성향을 보여주고 그 둘 사이에서 택일하여 하나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닌,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는 일’, 즉 합일 사상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헤세를 이해하는 게 이 책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황야의 늑대’에서 주인공 하리 할러는 음악과 문학,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자다. 그는 두 자아, 즉 ‘늑대’와 ‘시민’ 사이에서 고뇌하는데, 어느 날 꿈에 고전 음악의 대가 모차르트가 나타나 계시와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서로 반대되는 두 자아가 공존하고 상생하는 하나의 큰 자아, 즉 합일을 이루는 자아가 모든 고뇌의 해결책이라는 메시지였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르치스가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학자 스타일로서 정신적인 사람을 대표한다면, 골드문트는  천부적인 예술가 재능을 지진 사람을 대표한다. ‘황야의 늑대’에서는 한 사람 내면의 두 자아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대립되는 두 자아가 독립적인 두 사람으로 그려진다. 골드문트는 조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르치스와는 반대되는 길 위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방랑과도 같은 인생의 긴 여정을 마치고 죽기 직전 어엿한 수도원장이 되어 있는 나르치스에게 돌아와 마지막 조각품을 탄생시키는 장면은 여전히 강한 인상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나르치스에게 비친 그 조각품은 자신이 평생 몸을 담았던 지성의 길만이 아닌 그와 반대될지도 모르는 예술의 길로도 진리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작품이었다. 참고로, 예전엔 이 작품이 한국어판으로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각각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대변하는 단어다. 그리고 골드문트의 마지막 조각상은 바로 지와 사랑을 모두 겸비한 이미지가 구현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우린 헤세의 합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미안’에서도 미술과 음악은 이야기 전개에 있어 꿈과 함께 빠질 수 없이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싱클레어의 자아가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직접 그리는 새 그림 (이 장면에서 ‘데미안’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문구가 등장하게 된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라삭스다”)과 사람 그림 (꿈과 기억을 재료로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싱클레어의 개성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가 그린 사람은 그렸을 당시엔 누군지 몰랐지만, 나중에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과 너무 닮았음을 알게 된다. 비가시적인 아프라삭스는 가시적인 에바 부인과 같은 의미로써 총체적인 삶과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싱클레어에게 개성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피스토리우스는 오르간 연주자였다. 이 작품에서도 그림과 음악은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에서 음악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에서도 ‘유리알 유희’의 일부분과 작업 노트가 일부 소개되어 있다. 헤세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정수가 녹아있는 작품이기도 한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에 위치한 중학교로 부름 받기 위해 어느 날 음악 명인의 방문을 받고 테스트를 받았던 부분이 바이올린 연주였다.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에 가서도 음악과 라틴어에서 최고 점수를 받는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유리알 유희를 알게 되고 그는 그것의 명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유리알 유희란 모든 학문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고, 고도로 발전된 어떤 기호와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비밀 언어로 표현되는 정신적 유희이다. 이를테면, 천문학과 수학과 음악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총체적이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서양의 문화와 전통뿐만이 아닌 동양의 지혜까지도 균형 있게 포함하고 있기에, 유리알 유희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높고 순수한 인간의 정신성을 대변하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놀이인 것이다. 책에서도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는 명료하게 묘사되지 않을뿐더러 헤세의 상상력 속에서 만들어진 놀이이기 때문에 구름 속에 있는 듯 막연한 느낌을 주지만, 음악이 여러 학문들의 조화를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즉, 이 작품 속에서도 헤세는 음악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게르트루트’는 ‘쿤’이라는 한 음악가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다. 쿤은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다. 그와 대립되는 성향의 ‘무오트’라는 인물 역시 오페라 가수로 등장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예술가,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음악가의 두 스펙트럼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게르트루트’라는 한 여인들 두고 벌이는 두 음악가의 경쟁 구도도 엿볼 수 있는데, 소설의 초점은 주인공 쿤의 자아 성장에 맞춰진다. 쿤이 열등감을 가진 자아라면, 무오트는 오만함을 가진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오만함의 주자 무오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열등감의 주자 쿤은 자신의 교만을 이겨내고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비록 게르트루트와 하나가 되는 기회를 놓쳐버리지만 한층 큰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로스할데’에서는 주인공이 화가로 설정되어 있다. 로스할데는 요한 페라구트라는 저명한 화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어린 나이로 죽은 아들 피에르가 살았던 저택의 이름이다. 예술가의 혼에 집중하여 아들까지도 단념하게 될 정도로 그림에 열정을 쏟았던 요한 페라구트의 선택이 내겐 안타까운 결정으로만 보였던 작품이었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헤세가 일반 시민성과는 다른 예술가의 정신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목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헤세는 고전 음악에 심취했던 작가였다. 바흐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들었고 틈만 나면 연주회를 찾았다. 낭만주의 음악도 좋아했다. 슈베르트와 쇼팽을 좋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런 헤세의 음악 사랑을 단순히 음악에 대한 메시지로 읽으면 중요한 사실을 놓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헤세는 음악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철학인 합일 사상을 더욱 꿈꾸고 글로 그려내려고 애썼던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게 헤세를 좀 더 깊게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낫지 않을까 한다. 그는 음악은 이성을 통하지 않고 영혼을 곧바로 울린다고 믿었다. 음악만이 가진 초월적인 힘을 믿었고 그것에 심취하기도 하면서 영감을 얻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예술가 친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는. 어찌 보면 예술은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혹은 글이든 모두 통하는 게 아닌가 한다. 미술가는 그림이나 조각으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그리고 작가는 글로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결과물이 다를 뿐 모두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담고 시간과 공간에 담긴 이미지를 담고 고유한 가치를 창조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 헤세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군요, 하는 정보를 하나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헤세는 예술가로서 다른 예술 분야인 음악과 미술과 조화를 이루며 더욱 풍성한 예술 세계를 맛보고 그것을 살아낸 장본인이었군요, 하는 결론에 이르는 게 어떨까 싶다. 마치 유리알 유희의 기본 정신이 헤세의 인생 전체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북하우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3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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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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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과 가능 사이의 겸손함으로

신형철 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상처와 치유의 무한반복은 빙빙 도는 원과 같아서,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와 치유의 상대적 기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둘 사이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사람으로 변모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상처의 심연에 정체된 채로 원이 아닌 단 한 점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삶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낮은 마음으로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거기엔 상처 받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 어쩌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나로부터 남에게로 향하는 삶. 이 겸손한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공부.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인생은 타인의 상처, 고통, 아픔, 슬픔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공감해 나가는 긴 여정, 다시 말해 슬픔을 공부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나는 묻는다. 나는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목적으로 교활한 눈빛을 숨긴 채 핑크빛 물감이 잔뜩 묻은 커다란 붓을 들고 내가 아닌 타인의 삶과 내가 모르는 세상의 여백을 함부로 칠해왔던 건 아닌지. 공적인 자리에서는 피라미드 무한경쟁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은밀한 곳에서는 누구보다도 승자독식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칙을 고수하며 승자, 강자, 적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숨 가쁘게 타인을 무시하고  짓밟아 내 행복을 이루는 땔감으로 사용하려고 애썼던 건 아닌지. 내 얼굴이 아닌 상대적 약자들의 얼굴에 땀을 흘리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지혜이자 성공이라는 신념에 떠밀려 나도 몰래 무고한 그들의 등에 빨대를 꽂아 단물만을 빨아먹으려고 했던 건 아닌지. 나의 시간과 나의 열정의 방향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조용한 밤, 스탠드 불빛만이 책상을 비추고 있는 조그만 방에 앉아 나는 나 자신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그랬더니 금세 슬퍼진다. 니버가 말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괴리 때문에도 그렇고, 돌이켜보면 해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눈치 보며 망설이다가 결국 행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내 모습이 가소로워져서도 그렇고, 나는 이런 제한을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처량하게 느껴져서도 그렇다.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며 해가 갈수록 살아가는 동안 공부가 점점 더 필요한 것이며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의 가치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지만, 나의 인식과 공감의 한계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나는 슬프다.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전진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기분. 불가능과 가능 사이에 선 자는 존재와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고, 그 답의 파편을 조금씩 알아갈 때마다 조금씩 더 슬퍼진다. 나의 조심스러움이 훗날 미련함과 우유부단함으로 남을까 봐, 나의 용기 있는 결단이 상대방에겐 뜻밖의 상처를 남기게 될까 봐 나는 늘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부를 지속해야 함을 안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슬프다는 신형철의 말은 옳다.

상처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견뎌내는 모습이 각양각색이며, 상처나 슬픔의 정도 또한 아라비아 숫자로 단순하게 디지털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정작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우리들이 그 말에 담긴 진심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지는 언제나 미지수로 남는다.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슬픈 또 다른 이유는 마땅한 교과서의 부재, 아니 존재할 수 없는 교과서의 존재 때문이다. 적당하게 깊은 상처가 아닌 골수를 찌를 정도의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논리와 이성의 단계를 넘어섰고, 감정과 감각의 단계도 넘어서서 혼자만의 섬에 갇힌 채 사람들과의 소통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이라든지 공황장애라든지 하는 불청객과 동거하는 사람들이 상처 입은 사람들 중에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자 우리가 그들에게 마이크를 떠넘기는 행위조차 그들에겐 일종의 폭력으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상처 입은 자들의 말에 신뢰를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자칫 객체로 전락하고 마는데, 이러한 경솔한 현실에서는 아무리 상처와 치유에 대한 무성한 말들이 존재해도 정작 상처가 무엇인지 치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모순된 상황에서 그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어쩌면 우리에게도 아직 양심이 남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양심이 더 많이 발현되어 상처 입은 자들이 상처 받았다고, 그래서 아프다고 죽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꿈꾼다. 함부로 설교를 퍼붓거나 정답을 던져대는 경솔함은 사라지고, 경청하는 마음과 시간을 기꺼이 내는 겸손함이 살아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 바람에서조차도 나는 경솔함의 냄새를 맡는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작은 내러티브들을 마주할 것을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내 안엔 어떤 일괄적인 원칙이나 공식을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서다.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건 결코 일반화시켜 공식화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하게 필요한 건 진정성 어린 교감일지도 모른다는 것. 개별적인 타인의 슬픔 앞에 설 때마다 영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내 마음과 생각은 잠잠해지기가 어렵다. 불안과 초조, 긴장과 두려움이 동반되는 건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슬픈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건, 어쩌면 우리가 타자의 슬픔을 습관처럼 그동안 너무 함부로 대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고 아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신형철이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한 권으로 짜 맞춘 책이다. 제목도 글을 다 모아놓고, 내용이 비슷한 것끼리 분류하고, 출간되기 거의 직전에 아내와의 대화 가운데 우연히 얻어냈다고 한다. 이런 표현이 이 책의 무게를 경감시키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신형철이 직접 고백한 말이기에 사실은 사실인 셈이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평균 서너 페이지 정도의 짧은 기고문들의 모음집인데, 각 부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1부부터 슬픔, 소설, 사회, 시, 문화, 이렇게 다양하게 다뤄진다. 알다시피 신형철은 소설가도 사회부 기자도 시인도 문화평론가도 아니다. 그는 문학평론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문학평론가가 쓴 글로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사실은 특히 1부 슬픔 편을 읽을 때는 더 유념하는 편이 좋은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슬픔이라는 것이 소설, 사회, 시, 문화처럼 어떤 한 장르나 분야를 일컫는 분류가 아니라는 점,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심리학자나 상담가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가르치려 한다는 느낌은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함께 공부해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갈 필요가 없다는 이점을 가진다. 제목에 이끌리어 맘에 드는 글을 골라 그 글만 읽어도 되고, 다섯 중심 주제 중 하나를 택하여 그 부를 먼저 읽어도 된다. 만약 시간이 없다거나 이 책의 코어를 맛보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나는 1부를 추천한다. 

2018년 말, 가족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 중고서점에 들러 한 시간 정도 책을 구경하던 일상을 누리던 시절, 나는 이 책을 출간 즉시 훑어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형철이 누군지 몰랐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이니, 나의 인문학적 소양은 터무니없이 부족했을 때였다. 지금이라고 얼마나 늘었겠냐마는 그 이후 2년 간 내가 꾸준히 읽어온 책이 100권을 훌쩍 넘긴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언가는 달라져도 달려져 있을 것이라 혼자서 생각해본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짚어 들고 찬찬히 훑어보았을 때 내가 느낀 첫인상은 ‘어렵다’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땐 이 책이 이상하게 잘 읽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2년 전의 나와 지금 현재의 나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발견해야 할 터인데, 신형철 글의 난이도나 다루는 주제 등이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을 다루고 있는 건 아니라서, 어떤 구조적인 문제는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이루는 텍스트가 아닌 그 텍스트 이면에 흐르는 콘텍스트를 내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아마도 최선의 설명이 아닐까 한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책을 읽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너무 단순화시켜 비교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공부’가 있었다. 그 공부는 내가 전공했고 현재 밥벌이로 삼고 있는 생물학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신학 분야에서 읽고 쓰고 묵상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온 게 보이지 않는 차이를 조금씩 만들었고, 마침내 이 책이 출간된 지 2년 후 읽게 되었을 때 스스로 그 차이를 체감할 정도로 가시적인 효과를 내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동안 나 하나로 가득 찼던 내 인생에는 위로 향하는 공부만 있었을 뿐 옆을 바라보거나 뒤를 생각하는 공부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더 큰 나를 만드는 공부는 진정한 공부일 수 없다고. 적어도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의 공부와는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진정한 공부는 나를 넘어 남을 향하는 애씀이라고.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치 신형철과 직접 만나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깊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심정이다. 2년 간 그가 추천해준 여러 책을 읽어왔고 감상문도 남겨왔다. 그의 사상과 생각의 흐름과 방향이 나의 그것들과 많이 닮아있음을 느낀다. 글쓰기라는 행위에서도 배울 게 많았다. 글쓰기를 건축과 같은 행위라고 정의하는 그는 문장은 쓰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문장은 하나밖에 없으며 그 문장을 찾아서 사용하는 것. 정확한 글쓰기를 지향하는 그의 조언이 내겐 많은 지침이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쓰기 스타일과는 상극이라 할 수 있고, 소설을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작가의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조언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꼭 새겨들어야 할 말일 것이다. 

겸손한 자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고백한다고 한다. 반면, 교만한 자는 공부와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과 기술을 타인을 억압하고 군림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 대비는 타인의 슬픔을 공부할 때도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경우, 슬픔은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고, 그래서 슬픔을 더 모르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행이다. 겸손이 타인의 슬픔을 공부할 수 있는 문이라면, 적어도 나의 방향이 그리 틀리진 않은 셈이니 말이다.

#한겨레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61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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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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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실격은 없다


다자이 오사무 저, ‘인간 실격’을 읽고.

세상을 탓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그 자체가 비극이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결말을 자살한 개인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폭력이다.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남모르는 마음고생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은 줄 안다. 이성과 논리가 힘을 잃어버리는 영역에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자살 충동의 유경험자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탓하며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공격하는 대상은 세상이나 남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 혐오는 결국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어쩌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에게 자살은 자기혐오의 끝에 위치한 출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 누군가가 세상을 탓하며 술 한 잔 기울이고 있다면, 우린 차라리 안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탓하는 대상이 서서히 자기 자신으로 바뀌고, 또 그 방향이 마치 유일한 길처럼 여겨진다면, 그땐 이미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파멸은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파멸이 자살이라는 가시적인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통한 마음으로 책을 마쳤다. 잠시지만,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도 느꼈고, 그렇게 큰 고뇌 없이 명랑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이 조금은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에 생사가 묘연해진 주인공 요조의 삶,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 책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의 삶 앞에서 모처럼 나는 살아남은 자의 숙명적인 슬픔을 느낀다. 마치 무덤에 서 있는 기분이다. 입에선 쓴 내가 나는 것 같다.

주인공 요조는 저자 다자이 오사무의 분신이다. 동일하지는 않지만, 단순히 상상만으로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한 심리 묘사가 곳곳에 등장해서 요조와 다자이 오사무는 겹치는 부분이 의외로 많을 것 같다. 자살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저 주워듣고 상상만 해본 사람과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행에도 옮겨본 사람 간의 차이랄까. 이 짧은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자살 직전 혹은 이미 자살한 자의 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어 한기마저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책 뒤에 있는 짧은 해설을 읽다가 작가가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인생의 책’이라고 추천하기도 했고, 민음사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품인 데다가, 마침 알라딘 중고책으로 구매가 가능해서 얼마 전 다른 책들과 함께 이 책을 구입했다. 제목에서부터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기 힘들겠다는 확신을 가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음산함, 자기혐오, 파멸이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이렇게 제대로 살려낸 소설은 처음이었다. 자살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나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그 스산함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일본 소설 특유의 느낌이 묻어 나는 작품이었지만, 섬이 된 한 인간의 심리 묘사에 있어서 나는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일본식으로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그 내용이 아무리 처절해도 궁극적으로는 대부분 구원을 빛을 비추는 데 반하여, 이 작품에선 구원과 같은 반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저 세상과 인간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한 인간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서히 술, 담배, 창녀, 마약의 힘에 눌려 파멸해 가는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자살로 마무리를 지을 것 같았는데 저자는 내 예상과는 달리 주인공 요조의 운명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이게 어쩌면 단 한 가지 요조에 대한 저자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요조를 대신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마무리는 저자의 삶 자체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적고 보니 섬뜩하다.

주인공 요조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했던 것 같다. 사람을 생각할 때면 불안과 공포에 짓눌렸다. 이웃과 거의 대화도 못 나누고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내고는 스스로 만족한 채 실행에 옮긴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었던 그가 인간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익살’이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생각해 보면 섬뜩하기만 한 이율배반성이 긴장 가운데 극도로 표출된 사람이 바로 요조였던 것이다.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흔히 타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길들여진다. 술과 담배와 여자, 그리고 나중엔 마약까지 손을 뻗친다. 그런데 요조가 이런 것들을 손댄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안에 속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순된 본능이 요조 안에서도 꿈틀대고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그가 선택한 방법이 하필 타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조의 삶과 그가 토로하는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타락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특히 그가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다는 표현 앞에선 더욱 그랬다.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비난의 화살을 요조가 아닌 세상으로 어느 정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 요조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들었다. 

요조는 합법적인 일이 아닌 비합법적인 일을 할 때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양지가 아닌 음지의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잠시 빠져 지낸 것도 공산당 사상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비합법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익살’이라는 어설프고 서글프기까지 한 방법으로 세상과 사람과 연결되고자 했던 요조가 점점 더 섬이 되어 가면서 어두운 곳으로 은닉해서 위선과 음산함을 즐기게 되고 그 안에서 나름 편안함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요조는 자살을 떠올리게 된다. 자조와 자기혐오에 이어 결국 파멸의 끝에 다다른 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 즉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소설 중간중간에 요조가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등장하는데 나는 그 문장들을 읽으면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 차리기를 꼬집는 요조, 어느 정도 가식과 위선이 일상이 되어야만 ‘원활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눈치챈 요조, 그것들이 흔히 처세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요조. 어쩌면 요조는 가장 순수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의 파멸은 그가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순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자연스레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눈을 들어 내 주위를 살펴본다. 의도적 익살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음산한 속내를 감추고 명랑함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세상 탓에서 자기 탓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자살 직전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모든 인간이 스스로가 평등한 인간임을 인지하고, 서로가 서로의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처세술이라는 명목으로 가식과 위선으로 도배된 인간관계가 아닌 솔직함과 진정성이 투명하게 드러나서 모든 약자들도 마음 놓고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인간에게 실격이란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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