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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모순으로 보여준 소중한 가치
보후밀 흐라발 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다시 읽고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형용모순적인 상황은 한탸의 존재와 삶 모두를 잠식한다. 독서모임 ‘인생책방‘ 덕에 5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여러 층위의 모순적 상황에 대해 주목할 수 있었다. 이 글은 그것들에 대한 나의 보잘것없는 분석이다.
먼저 이 작품의 심장을 가르는 주제, ‘책을 향한 사랑‘에 대한 두 겹의 점층적인 모순적 상황에 대해서다. 한탸는 폐지 압축공이다. 한탸는 소중한 인류의 자산이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한낱 종이 쪼가리로 취급받게 되는 책들을 파기하는 장본인인 동시에 그 책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겸비한다. 그는 파기되는 책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모으기도 하고, 읽고 온몸으로 흡수하기도 한다. 그 자신의 표현으로는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다. 마치 살인자가 인간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치 백정이 동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첨예한 모순 속에서도 한탸는 책 애호를 넘어 책을 수호하고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폐지 압축기라는 기계로 책을 파기하면서도 책이 상징하는 인간의 고유성을 지키는 존재. 이것이 한탸의 정체성이고 그가 처한 가장 근원에 깔린 모순적 상황이다.
사회주의 체제와 발달된 기술의 여파로 한탸가 사용하는 구형 압축기 시대는 저물고 그것보다 스무 배 효율을 낼 수 있는 신형 압축기가 도입되어 한탸는 필연적으로 직업을 잃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문명화, 기계화로 인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더욱더 냉소적으로 변해가고, 이에 따라 책은 점점 더 전통적인 가치를 상실해 간다. 구형 압축기를 사용하던 한탸는 비록 모순적이었지만 그나마 책을 수집하고 읽고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는 여유라도 있었다. 그러나 신형 압축기의 도입은 곧 한탸의 존재 자체를 근원에서부터 지워버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책을 파기하면서도 수호하고 구원하는 모순적인 역할을 감당하던 한탸는 종국에 가서는 더 이상 책을 파기하는 자가 아닌 파기되는 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책 파기자이면서 책 애호가, 수호자, 구원자의 위치를 넘어 결국 책 자체가 되어버리는 한탸의 강화되고 심화된, 그리고 비극적인 모순적 상황이다.
이러한 두 겹의 모순적 상황은 작품 속에서 수차례 언급되는 상반된 운동법칙, 즉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미래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후퇴)이 점점 혼재되면서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미래로의 후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근원으로의 전진)도 모두 가능하며, 마침내 이 둘은 같은 것이라는 인식에 다다르는 한탸의 의식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한탸가 만지는 압축기에는 초록색과 빨간색의 단 두 개의 버튼이 있다. 기계를 앞뒤로 움직이게 하는 단순한 조종 장치다. 한탸에게도 처음에 미래는 전진하는 것이고, 근원은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을 파기하고 구원하는 모순적 상황 속에 자신을 계속 잠식시키면서 한탸에게 미래는 단순히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는 것이기도 하며, 근원 또한 후퇴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진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책을 파기하는 것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소중한 가치, 이를테면 인간성, 인간다움, 고상함, 고결함 등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책을 파기하는 행위는 후퇴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문명화와 기계화에 추진력을 얻어 효율이 증가하게 된다는 면에서는 미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미래로의 후퇴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책을 더 빨리, 많이 파기하라는 소장의 고함소리와 함께 들리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시시포스 같은 기계적 반복이 아닌 폐지 더미 안에서 활자가 담고 있는 인류의 지적, 정신적 유산을 흡수하는 행위는 미래가 아닌 근원을 향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또한 이 행위는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므로 후퇴가 아닌 전진이라 할 수 있다. 즉, 근원으로의 전진인 것이다. 한탸가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책이 가진 가치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백과사전 의미를 거뜬히 초월하여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존재론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외에도 모순을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들이 작품 속에는 많이 등장한다. 이것들을 찾아내어 생각해 보니 작품 이해를 위해 큰 도움이 되었다. 재독 하면서 내가 발견한 예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지상과 지하. 지상은 문명, 물질, 전쟁, 소란을 상징한다면, 지하는 낭만, 정신, 평화, 고독을 상징한다. 한탸가 구형 압축기로 작업하는 공간이 지하인 반면, 무미건조한 신형 압축기로 젊은이들이 효율 충만한 방법으로 책을 폐지 처리하는 공간은 지상이다. 우유와 맥주의 대조 역시 각각 지상과 지하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 우유는 책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유니폼 차림의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젊은이들의 양식인 반면, 맥주는 한탸의 정신적인 고양을 부추기고 디오니소스적인 낭만을 유지하는 인간 고유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맥주라는 알코올은 지하 작업장에서 한탸의 고독하면서도 은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제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탸의 지하 작업장에는 한탸 말고도 다른 생명체가 한탸와 동고동락하고 있다. 바로 쥐다. 일견 불결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쥐는 한탸가 일하는 작업장의 의미, 혹은 ‘근원으로의 전진‘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한탸의 작업장이 지상으로 대변되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작은 지하 공간이라고 볼 때 그곳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쥐가 들끓을 만큼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배제되고 소외된 공간이라는 의미를 띠게 만들기 때문이다. 근원으로의 전진이라는 형용모순적인 행동법칙은 다수가 아닌 극소수에게만 참인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는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 묘사되는 한탸의 비극적 운명일 것이다. 책을 파기하는 자가 아닌 파기되는 책으로 자신을 스스로 던져 넣는 한탸. 이 끔찍한 자살 장면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답은 묘연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한탸의 심정이 온전히 반영된 행위였다는 점이다. 7장 마지막 부분에서 한탸는 손목을 칼로 그어 자살을 행한 세네카의 환상을 보게 되면서 세네카의 사고가 정확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했다고 쓴다. 그리고 세네카의 자살은 자신의 저작인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를 쓴 것이 헛일이 아님을 입증했다고도 쓴다.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정은 타자와 세상의 시선에 맞춘 공허한 삶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위한 아낌없는 삶이 제공하는 만족이다. 그렇다면 세네카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평정에 다다랐다는 말인가. 한탸 역시 세네카의 뒤를 이어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었다는 말인가.
8장 도입부에서 한탸는 카페 ‘검은 양조장’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홀로 세상을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한탸는 수심에 가득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 환상을 보며, 전진이 곧 후퇴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다는 말까지 한다. 한탸는 홀로 세상을 맞서지 못할 거라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걸까. 그래서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이지 않기를 결정했던 것일까. 자신이 늘 사용하던, 은퇴한 이후에도 구입해서 집으로 가지고 가려고도 계획했던 구형 압축기 안에 자신의 뇌뿐만이 아닌 몸뚱이 전체를 던져 넣음으로써 궁극적으론 포기를 선언한 것이었을까.
한탸는 그렇게 압축기 안으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 과정 모두를 기록한 저자 보후밀 흐라발 덕분에 한탸는 이렇게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 살아있다,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인간의 고유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책 속의 인물이 된 한탸 덕분에 우린 책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곱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나머지 상징들은 독서모임 ‘인생책방’에서 마저 나눌 계획이다. 각자의 고유한 생각을 나누는 풍성한 모임 덕분에 이 책에 대한 이해는 물론 우리 삶 또한 깊어지리라 확신한다. 또한 책은 나에게 무엇인지, 나는 왜 책을 읽는지, 나아가 내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질 계획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초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1020
* 재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2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