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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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연한 건 없다


위화 저, ‘인생’을 읽고


며칠간 푸구이의 인생을 들으며 어느새 높아졌던 내 마음이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낮아졌다. 내게 주어진 것들, 그리고 내가 무감각하게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로 가득했던 내면에 여백이 생겼다. 감사와 겸손과 사랑이 그 빈 곳을 채웠다. 잊고 있던 충만함이 느껴졌다. 


한 사람의 인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넉넉한 열매를 안겨준다. 눈은 가까운 곳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게 되며, 나 하나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비좁던 마음 밭엔 어느새 따스한 미풍이 불어 날카롭기만 하던 이성과 논리를 내려놓고 내가 인간임을, 나약하고 불완전하며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며, 비로소 삶은 더욱 깊고 풍성해진다. 


푸구이의 인생은 개별적인 서사가 깃들어있는 동시에 보편성을 띤다.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문화,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고유한 가문의 맥락과 한 사람의 개성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개별성과 고유성을 하나로 꿰뚫는 키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단어다. 한 사람의 인생은 저마다 다르지만, 아무리 달라도 그것은 인간의 삶이기에 보편적일 수 있다. 이것이 푸구이의 인생이 나의 인생이 되고 또 우리의 인생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제목 '인생'이 상징하는 바일 것이다. 


아버지를 꼭 빼닮은 탓인지 도박을 하다가 가산을 탕진하게 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하나씩 잃어버리게 되는 푸구이의 인생은 그 누구의 인생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도박이 아니더라도 다른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휘말려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은 아마도 모든 인생에서 정도를 달리하며 존재할 것이다. 저자 위화가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히 푸구이라는 가상의 인물의 삶을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 푸구이의 인생 서사로부터 우리들 개개인의 인생 서사를 읽어내어 성찰해 보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밑줄을 그은 부분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이후 장인어른의 강압으로 인해 푸구이를 떠났던 아내 자전이 다시 돌아온 장면이다. 푸구이는 말한다. "자전이 돌아와 우리 집은 완전해졌다네. 내 일을 도울 조수도 생긴 셈이고,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 여자를 아끼기 시작했지." 


사람들은 어떤 큰 사건을 당하면 크게 두 가지 행보를 보인다. 이전보다 더욱 비뚤어져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막무가내인 경우, 그리고 전화위복으로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경우. 푸구이는 후자였다 (여기서 나는 위화가 도스토옙스키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아내 복이 있어 더욱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 아내를 아끼기 시작했다고 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도박을 한창 할 땐 아내를 때리기도 하고 면박을 주기도 하는 등 개망나니처럼 굴던 푸구이였는데 말이다. 왜 사람은 이런 극한 고난을 겪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일까.


두 번째는 도박으로 날린 집을 차지했던 룽얼이 공산당 정권으로 바뀌고 난 이후 악덕지주로 몰려 사형을 당하는 장면이다. 푸구이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룽얼이 그렇게 죽고 나니,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뒷목이 서늘하더군. 생각하면 할수록 아찔한 기분이었다네. 옛날에 아버지와 내가 집안을 말아먹지 않았다면 그날 사형당할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었겠나." 


인생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바로 푸구이와 룽얼의 운명이 저렇게 뒤바뀌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할 때다. 과거에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던 사건이 현재 푸구이의 생명을 보존하게 해 준 셈이 되어버렸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푸구이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자전의 말이 맞아. 가족끼리 매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복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부할 정도로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룽얼이 사형당한 직후 푸구이의 맥락을 고려할 때 내겐 전혀 다르게 들렸다. 마음 깊이 동의가 되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세 번째는 둘째인 아들 유칭을 학교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첫째인 딸 펑샤를 다른 사람 집에 맡기게 된 푸구이가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찾아온 펑샤를 업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 자전에게 결연하게 말하던 장면이다. "우리 모두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펑샤를 돌려보내지 않겠소." 아내 자전은 배시시 웃어 보였고, 웃는 얼굴 위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은 함께한다는 것. 효율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 가족과 함께하는 것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가치 중 하나라는 것. 저자 위화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기본적이고 당연한 가치들을 다시금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펑샤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남편이 되었던 얼시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는 장면이다. "아버님, 어머님, 저는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펑샤는 어릴 때 병을 앓은 이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푸구이가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농사일을 해왔다. 결혼할 때가 되었으나 장애를 가진 펑샤를 데려갈 사위가 과연 있을까 걱정했었다. 그때 머리가 어깨에 붙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얼시가 나타났다. 얼시와 펑샤 부부가 아이까지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왜 나는 마치 푸구이와 자전이 된 것처럼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던 것일까. 얼시가 저렇게 고백하는 자세 또한 감동이었다.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가던 얼시가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여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겐 과연 얼마나 큰 축복으로 다가갔을까. 내 가슴도 벅차올랐다. 그리고 내가 당연하듯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게 기적 같이 느껴졌고, 모든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가슴 벅찬 순간을 뒤로하고 펑샤는 아이 쿠건을 낳다가 죽고 만다. 몇 년 후 얼시도 죽고, 또 얼마 후 쿠건도 죽고 만다. 푸구이의 가족은 푸구이 손으로 모두 묻었다. 푸구이 가문에 불어닥친 시련의 시작이 푸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 역시 푸구이였다. 그렇게 혼자 살아남은 푸구이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화자인 '나'에게 들려주어 이 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혼자 살아남은 푸구이로부터 소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내 이런 결론이 더 현실 같다는, 그래서 더욱더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인생은 계속 굴러가는 것이다. 계속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지는 것이다. 그 어떤 가슴 아픈 큰 사건과 사고도 세월에 묻어가며 지나가고야 마는 것이다. 덕분에 그런 것들에 무너지는 인간형을 다루는 신파조의 소설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들이 이 작품 '인생' 때문에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여전히 낙관적으로, 그러나 연륜을 지닌 지혜자의 낙관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푸구이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이지 않아 책을 덮으며 마음이 흐뭇했다. 


자극적이고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로 도배되어 실제 우리의 인생을 오염시키고 있는 많은 문학작품들에 혈안이 된 현대인들에게 나는 위화의 '인생'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푸구이의 인생을 자극적인 문학작품 속 주인공의 인생과 비교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느 것이 진짜 인생 같은지, 어느 것이 진짜 인생이어야 할 것인지 깊이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위화의 작품들을 더 읽어볼 요량이다. 그의 낯선 시선이 반갑고 도전이 된다. 


#푸른숲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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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여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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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보다 더욱 그리스도인다운


엔도 슈사쿠 저, '내가 버린 여자'를 읽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어릴 적 소아마비로 다리를 약간 저는 대학생 요시오카는 친구인 나가시마와 함께 좁고 허름한 하숙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늘 돈과 여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며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는 실정이다. 어느 날 전단지를 돌리는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밝은 별'이라는 낡은 잡지 하나를 줍게 되고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페이지 독자란에 실린 글귀를 읽게 된다. 와카야마 세츠코 씨 팬으로부터 편지를 기다린다고 쓴, 영화를 좋아하는 19살의 여성 모리타 미츠의 글이었다. 요시오카는 여자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과 저급한 욕망에 이끌려 미츠의 이름 옆에 적힌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이것이 요시오카가 나중에 버리게 될 여자, 모든 게 지나고 난 이후 성녀라고 생각하게 될 여자 미츠를 만난 최초의 계기였다. 


시골 처녀 미츠는 요시오카가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동경했다. 요시오카가 자신의 성적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만나자고 했던 의도를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미츠는 순박한 사람이었다. 첫 만남에서 요시오카는 미츠를 유흥가로 데려가 술을 마시게 하고 자신의 음흉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여관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미츠가 거부하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미츠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요시오카는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킨다. 요시오카의 집요한 욕망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츠의 측은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요시오카는 첫 만남에서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알아챈 미츠가 갑자기 순수한 연민으로 가득 차올라 계속 거절하던 자신의 요구를 포함하여 모든 걸 다 내어줄 것처럼 태도가 바뀌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서는 거짓으로 동정심을 유발했고 예상대로 미츠는 넘어갔다. 원하진 않지만 미츠는 그 동정심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몸을 내놓았다. 미츠에게 있어선 처음으로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준 순간이었고, 요시오카에겐 처음 여자의 몸을 범한 순간이었다. 이 단 한순간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잊히지 못할 흔적이 되었다. 실제로 작품 마지막에 가서 요시오카가 고백하는 문장이 이를 말해준다. “만일 미츠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것이 있다면 거기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는 사실일까?” 이것은 아마도 저자 엔도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 중 하나일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미츠의 인생에 대해서다. 미츠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가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 견딜 수 없었다. 그 불행한 표정이 자신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런 내면의 속성 때문에 미츠는 비탈길 위의 비 내리는 허름하고 더러운 여관방 안에서 불행해 보이는 요시오카를 위해 단 몇 분이지만 아픔을 참고 견뎠던 것이다. 미츠의 어머니는 미츠를 낳은 후 세상을 떠났고, 새어머니는 아이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미츠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편해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없는 편이 아버지에게도 새어머니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도쿄에 나와 허드렛일을 하면서 혼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순박하고 착한 미츠의 인생에 어느 날 요시오카라는 사람이 침투하여 몸과 마음을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미츠는 연민인지 사랑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는 없지만 요시오카에게 몸을 준 이후 요시오카를 잊지 못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호의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놀랄 만큼 헌신적이 되어 엄마나 누나처럼 되기 때문일까. 미츠는 요시오카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야근을 하면서까지 돈을 모은다. 요시오카가 가난하게 공부하는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미츠는 요시오카의 구멍 난 양말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한편, 요시오카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더 이상 미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버린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이 탄생하게 된다. 미츠는 요시오카에게 ‘내가 버린 여자’가 된다. 


요시오카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에 성공한다. 어쩌다가 사장 딸인 마리코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요시오카가 이 부분에 대해서 쓴 문장은 읽어볼 만하다. 다음과 같다. “어쨌든 마리코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옛날에 단 한 번 관계했던 미츠와의 일은 점점 잊혀 갔고, 그녀는 내 안에서 하찮은 존재가 되어갔다. 이미 그것은 존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우리 인생에 있어 타인에게 끼친 행위는, 어느 것이건 태양 아래 얼음이 녹듯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상대에게서 멀어져 전혀 생각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의 행위는 마음속 깊이 흔적을 남긴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미츠와 대조하기 위해 마리코라는 여자를 등장시켰을 것이다. 덕분에 독자는 동일한 남자가 서로 다른 두 여자에게 태도를 어떻게 달리할 수 있는지 명징하게 볼 수 있다.


요시오카는 자신이 그렇게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미츠가 생각이 날 뿐 아니라 그녀와 자꾸만 엮이게 된다. 회사 야유회에 다녀와 터키탕에 들렀는데, 거기서 요시오카에게 서비스를 해주는 여자가 우연히 미츠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미츠가 얼마 전 일을 그만두었지만 함께 일할 땐 요시오카에 대해서 좋은 말을 많이 했다고 하며 애써 미츠의 심정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요시오카의 마음은 그럴수록 더욱 완강해졌고, 미츠가 자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전철을 타고 시부야에 진입할 때 문득 눈에 비친 장소, 즉 처음으로 미츠를 껴안았던 곳, 그 여관과 비탈길을 보았을 땐 요시오카의 마음은 일렁인다. 미츠의 존재가 의식 수준에서는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무의식 수준에서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있었던 것이다. 


요시오카는 마리코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요시오카가 마리코에게 대하는 태도는 미츠에게 했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스스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나와 마리코는 아직 한 번도 키스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나는 마리코를 존경하고 있었던 것일까? 미츠 때는 경멸하며 그 몸을 겁탈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왜 마리코의 입술과 순결은 소중히 여겼던 것일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생각을 정리한다. “나는 여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 A라는 여자에게 할 수 없는 일을 B라는 여자에게 태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A라는 여자 부류에는 마리코가 들어 있었고, B라는 여자 부류에는 거리의 매춘부와 미츠가 들어 있었다.” 요시오카는 마리코에게는 키스 한 번 제대로 시도하지 못하면서도 성적 충동을 해소하기 위해 사창가를 여러 번 찾았다. 그는 매춘부를 껴안으면서도 마리코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남자의 심리라면서, 마리코는 마리코, 매춘부는 매춘부라는 논리를 정당화시키면서 말이다. 요시오카의 심리 (어쩌면 많은 남자의 심리)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미츠의 손목에는 커다란 붉은 반점이 있었다. 요시오카도 처음 그녀를 범할 때 보고 혐오해했던 것이었다. 생긴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미츠는 그 반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공장 일을 그만두고 터키탕에서 일하다가 누명을 쓰고 바보처럼 이용당한 뒤 술집에서 일하던 미츠는 몸이 아파 병원을 찾게 되는데, 의사로부터 고텐바 병원을 방문해서 꼭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고텐바 병원은 한센씨병 환자들을 격리해서 치료 및 요양하는 곳이었다. 한센씨병이 나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미츠는 무너졌다.


고텐바 병원에 가자마자 방을 지정받고 한센씨병을 다양한 단계에서 앓고 있는 환자들과 함께 격리 생활을 하게 된다. 미츠는 생각했다. ‘내가 어떤 나쁜 짓을 했다는 말인가 착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쁜 일도 하지 않았다. 새엄마가 들어왔을 때도 내가 집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도쿄로 나왔고, 공장에서도 나는 가능한 열심히 일했다. 동료가 게으름을 피울 때도 나는 포장 일을 성실히 했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끔찍한 병이 내게 왔단 말인가!’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있다가 미츠는 그곳의 사람들 속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고통스러운 것은 몸이 문드러지는 게 아니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견뎌내는 것이었다. 미츠는 마음속으로 준비를 하며 그들과 불행 및 슬픔의 연대를 이루어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날벼락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정밀검사 결과 미츠는 한센씨병이 아니라고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미츠는 뛸 듯이 기뻤다. 가장 먼저 요시오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뻤다. 그 정도로 미츠에게 요시오카는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츠는 병원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음을 돌이킨다. 오히려 원래 있던 곳이 병원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미츠는 병원에서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그곳을 섬기는 수녀에게 말한다. 수녀들을 도와 여기서 일할 수는 없겠냐고. 순간적인 충동이라 여긴 수녀는 미츠를 일단은 받아줬지만 곧 관두고 나갈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건 미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미츠는 그곳에서 사고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 누구보다도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게 된다.


작품은 마리코와 결혼에 성공한 요시오카가 고텐바 병원에 아직 한센씨병 환자로 있을 거라고 여긴 미츠에게 동정심 반 호기심 반으로 보낸 연하장에 수녀가 보낸 답장을 읽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요시오카는 그 의외의 글을 읽으며 충격에 휩싸인다. 모든 게 소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한센씨병으로 진단받아 입원했으나 정밀검사 결과 오진으로 판명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츠는 병원에 남아 수녀들과 함께 한센씨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헌신적으로 했다는, 그러다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누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수녀의 답장을 들고 있는 요시오카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수녀가 쓴 문장의 일부를 옮기는 게 좋아 보인다.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미츠, 미츠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그 무엇이 잘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다. “저는 때때로 저 자신과 미츠를 비교하여 반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는 성서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은 단순하고 순진하게 행복을 기뻐하는 것, 단순하고 순진하게 슬퍼하며 우는 것과 단순하고 순진하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미츠는 예수가 말한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점 한 가지는 미츠가 끝내 수녀가 믿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적힌 문장 역시 읽어볼 만하다. 다음과 같다. "전 하느님 따위는 있다고 생각지 않아요. 있기 뭐가 있어요? 단지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저로서는 하느님이 왜 소 같은 어린애마저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는걸요. 어린애를 괴롭혀서는 안 되잖아요. 어린애를 괴롭히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요." 이 문장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이 신을 믿을 수 없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 그것을 허락하는 신 따윈 믿지 않겠다는 것. 과연 그 누가 이 강력한 논리를 꺾고 신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신정론과 이어지는 이 질문은 아마 영원한 숙제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저자 엔도 슈사쿠는 왜 미츠에게 이런 캐릭터를 허락했을까? 예수처럼, 예수가 말한 대로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적인 캐릭터 가운데 왜 기독교의 신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캐릭터를 심어놓았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적인 동의, 이성으로 깨달은 신을 믿는 사람과 그것과 별 상관없이 그 믿음을 가진다면 행해져야 할 당연한 행위들을 삶에서 실제로 해내고 있는 사람을 대조하고 싶었던 걸까? 진짜 믿음은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여러 가지 질문이 남는다. 엔도에게 직접 묻고 싶을 만큼.


역자 후기에 다음과 같이 써져 있다. “미츠는 수도자처럼 사랑과 헌신을 모토로 살지 않았다. 그러한 용어들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진 않았지만, 그 단어의 의미들과는 상관없이 사랑을 실천한 여인이었다. 인생의 낙오자 자리로 떨어지면서까지 자신보다 더 보잘것없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을 내어주며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에 의해 성녀로 기억될 수 있었다. 이러한 미츠는 실존인물을 소재로 하여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엔도 슈사쿠의 초기 작품인 이 책은 엔도가 결핵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겪고 난 이후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아프고 병든 자들,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심리 묘사가 가슴에 퍽 박히도록 세밀했던 이유를 알 듯했다. 그리고 미츠가 실존인물을 소재로 쓰였다는 사실에서도 나는 한 가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세상엔 그리스도인이 정의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보다 더욱더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엔도가 혹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어문학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엔도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6. 사해 부근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770

7. 내가 버린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2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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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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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몫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남아 있는 나날'을 다시 읽고


밤늦게 책을 덮고 먹먹한 심정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스탠드 불빛에 비친 내 모습만이 흐릿하게 어려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훑을 수 있었다. 놀라운 건 그게 내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처럼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어떻게 해도 완독 후 내 감정을 텍스트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을 테지만, 긴 잠을 자고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다고 하면 조금은 설명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이런 책들을 사랑한다. 읽고 나서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지는 책. 책이 던져주는 무언의 아우라가 나를 가뿐히 압도하여 나로 하여금 스스로 내 껍질을 뚫고 나오게 만드는 책. 그리고 내가 살지 않은 인생, 그러나 마치 내가 산 것 같은 인생을 맛볼 수 있는 책. 이런 소설이 아니면 어떻게 내가 나와 무관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을까. 소설은 타자의 인생을 읽다가 어느새 나의 인생 중심으로 곧장 진입하게 만드는 웜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나의 인생을 한 걸음 떨어져 조망하며 내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조금 더 깊고 풍성하게 가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절한 이야기 선생님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마지막 장에 다다라서야 마침내 작품 중심을 관통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으며, 동시에 제목의 의미가 단박에 이해되는 소설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바닷가 마을 웨이머스 선창에서 형형색색의 전구들이 곧 빛을 발할 저녁 시간을 기다리며 웅성거리고 있는 인파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주인공 스티븐스 집사와 5미터 정도 떨어져 사그라드는 박명에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이미 저녁을 맞이한 그의 육체를 뒤에서 바라보는 나는 애잔함을 느낀다. 해가 저물 때 느껴지는 특유의 정서 때문만은 아니다. 마지막 장에 다다르기까지 그가 줄곧 회상했던 과거의 복잡 미묘한 추억들 때문도, 켄턴 양을 직접 만나고 확인한 그녀의 상황이 그의 예상과 달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그가 곱씹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아마도 나는 그런 스티븐스 집사의 축 처진 어깨에서 나의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이미 지나가버린 내 과거에 대한 깊은 한숨 어린 회한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구차할 정도로 먼저 내놓게 되는 내 과거 행위들에 대한 이런저런 변명과 합리화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스스로 느끼는 나의 이율배반성과 모순됨이 영사기가 돌아가듯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형형색색의 전구들이 켜지는 바로 그 시간, 그 황홀한 마법 같은 시간,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스티븐스 집사와 하나가 되었다.


스티븐스 집사가 홀로 떠난 자동차 여행의 외형적 목적은 지극히 공적인 차원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최근 스티븐스는 주인이 바뀐 달링턴 홀 운영 중 발생한 자잘한 문제점들의 원인이 인원 부족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예전에 달링턴 홀에서 총무로 완벽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결혼 때문에 떠났던 켄턴 양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마침 얼마 전 켄턴 양으로부터 편지가 배달되었고, 스티븐스 집사의 눈에 그 편지는 켄턴 양이 마치 현재 결혼 생활에서 불행을 느끼는 동시에 옛날을 그리워하는 듯해 보였고, 다시 달링턴 홀에서 일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충분히 착각일 수 있고, 또 충분히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것일 수도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읽어내기까지 했었다. 여행을 빌미로 켄턴 양을 직접 방문하여 그녀의 의중을 묻고 자신이 생각해 낸 해결책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외형적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켄턴 양은 나름대로의 지난한 과정 끝에 마침내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달링턴 홀로 갈 수도, 갈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스의 여행을 실패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은 이 여행의 진짜 목적은 제목에서 드러난 것처럼 스티븐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작은 소망의 씨앗을 손에 넣게 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스가 일주일간의 자동차 여행에서 얻은 것은 켄턴 양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과거가 아닌 미래였다. 켄턴 양이 합류하지 못하게 된 것은 스티븐스 집사의 합리적인 계획과 사적인 미련이 좌절되는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회환과 변명과 합리화를 치열하게 거친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눈을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에 두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티븐스 집사는 이번 여행 덕에 비로소 과거의 연장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두 팔 벌려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여행 중 시종일관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지, '품위'란 무엇인지 묻고 스스로 답하는 지난한 여정을 거쳤다. 나치에 부역한 셈이 되어버린 달링턴 경의 몰락 과정을 한 순간도 빠짐없이 바로 곁에서 지켜본 장본인으로서 스티븐스는 집사라는 직분에 자신이 얼마나 합당했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그가 묻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건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위대함에 대한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위대한 집사로서 품위를 지켰다고 볼 수는 있으나 그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보이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지켜내지 못했던 것이다. 달링턴 경의 충견이었던 그는 해적선에서 가장 성실한 해적이었고, 자신의 충직함으로 결국 나치에 부역하는 꼴이 되어버려 한나 아렌트로부터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도출하게 만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같은 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집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할 줄 아는 품위, 자신이 몸담은 직장이 불의를 행하는 곳인지 따져볼 줄 아는 품위, 그리고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옳지 못한 것이라면 스스로의 냉철한 판단으로 거절할 수 있는 소신과 용기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품위 말이다. 그가 자꾸만 자신이 위대한 집사였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그가 이미 스스로 더 중요한 차원의 품위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인지했으나 그것을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행한 변명과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 지나간 일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지만 스티븐스는 어쨌거나 살아남아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돌이켜보며 반성과 성찰을 거듭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앞에는 인생에서 가장 좋고 기다려지는 저녁 시간이 놓여 있다. 모든 게 만족스럽고 떳떳한 과거를 지닌 사람이 우리 주위엔 과연 얼마나 될까. 한때 가졌던 투철한 신념도,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신봉했던 사상도 모두 지나가버린 과거에 속하게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모순되고 이율배반 투성인 우리의 삶을 그러나 우린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남아 있는 나날을 가장 좋은 시간으로 만드는 것.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스티븐스의 앞길을 응원한다. 그리고 나와 우리의 앞길도. 이왕이면 유머와 농담을 동반하면서.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rtmodel.tistory.com/855

2. 클라라와 태양: https://rtmodel.tistory.com/1308

3. 나를 보내지 마: https://rtmodel.tistory.com/1318

4.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https://rtmodel.tistory.com/1354

5. 창백한 언덕 풍경: https://rtmodel.tistory.com/1359

6. 우리가 고아였을 때: https://rtmodel.tistory.com/1368

7.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https://rtmodel.tistory.com/1369

8.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86

9. 파묻힌 거인: https://rtmodel.tistory.com/1433

10. 녹턴: https://rtmodel.tistory.com/1457


* 가즈오 이시구로 다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rtmodel.tistory.com/2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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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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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과 떠남의 경계에서


줌파 라히리 저, '내가 있는 곳'을 읽고


줌파 라히리가 미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로 읽고 쓰고 말하고 생각하는 삶을 살던 시절 썼던 세 번째 책이다. 첫 책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와 두 번째 책 '책이 입은 옷'이 산문집이었다면, 이 책 '내가 있는 곳'은 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목소리는 한층 더 뒤로 물러나 있다. 이탈리아어에 조금 자신이 붙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소설가로서 이탈리아어 소설 한 편을 꼭 써보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형식은 달라졌고, 화자 뒤에 숨어 목소리를 아꼈지만, 세 번째 책인 이 소설에서도 앞의 두 산문에서 보였던 존재에 대한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은 그대로 이어진다.


이 책은 46개의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묘사와 서사를 동원해 들려주는 작품이다. 각 꼭지의 제목만 봐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제목이 '내가 있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자는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일상을 이루는 모든 곳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떤 감정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그 어디를 가도 온전히 정착할 수 없고, 동시에 늘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하는 자신의 존재론적 불안감을 여러 평이한 문장들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마치 화자가 처한 상황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 나아가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나는 45번째 꼭지에서 이 책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아무 데서도'라는 제목의 꼭지이다. 화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조금만 진지하면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여러 군데에서 보여줌으로써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 기법이 의외로 신선하게 다가온 작품이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고, 평이하지만 결코 평이하지 않은 인간의 존재, 그것이 가진 원초적인 불안을 이렇게 조명할 수 있다는 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언제 어디서나 정착과 떠남의 경계에 서서 머뭇거리는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 줌파 라히리 읽기

1.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https://rtmodel.tistory.com/2035

2. 책이 입은 옷: https://rtmodel.tistory.com/2055

3. 내가 있는 : https://rtmodel.tistory.com/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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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입은 옷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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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으로 숨길 수 없는 정체성


줌파 라히리 저, '책이 입은 옷'을 읽고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인도 벵골 출신이자 미국 이민자로서 평생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전성기를 누리던 2012년, 그녀는 돌연 이탈리아 로마에서 2년간 거주하며 벵골어도 영어도 아닌 이탈리아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 책은 이탈리아어로 탄생한 그녀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이탈리아어로 쓴 첫 번째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 '책이 입은 옷'은 말 그대로 책의 표지를 뜻하지만 단순히 표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옷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고백한다. 미국으로 이민 후 다른 미국 아이들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옷 때문에 더더욱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책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평생을 벵골 고유 의상만을 고집했던 어머니와의 갈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마도 줌파 라히리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여러모로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것 같다. 그녀는 콜카타에서 사촌들이 입는 교복을 부러워하기도 했다고 쓴다. 교복은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동시에 익명성을 보장하는 이중 효과를 내는데, 그녀는 바로 그것의 혜택을 누리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교복이란 제도가 없었고, 각자 입고 싶은 대로 입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 이 자유가 싫었다." 


줌파 라히리는 어릴 적 옷으로 인한 갈등과 스트레스 때문에 옷이 옷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통찰을 책의 표지에 적용한 글이 바로 이 책이다. 표지는 내용을 보호하고 담아내고 전달해야 하는 고유한 사명을 띠지만,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때론 표지는 내용과 독립적인 가치를 띠고 책의 상품성을 좌우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내용이 말하는 것을 말해야 하는 표지의 정체성은 내용과 별개의 무엇인가를 말하는 정체성까지 띠게 되는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줌파 라히리가 어릴 적 옷 때문에 겪었던 것처럼 말이다. 


표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줌파 라히리는 기본적으로는 발가벗은 책, 즉 표지가 표지만의 개성을 내뿜지 않고 아무런 포장 역할을 하지 않는 책, 그 어떤 보조 설명도 덧붙여지지 않은 채로 텍스트의 신비를 그대로 전달하는 책이야말로 텍스트와 독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물론 표지의 상업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대두된 21세기 현재에는 불가능한 바람으로 그치게 되지만 말이다. 


나 역시 내 책의 표지들이 모두 맘에 든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표지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고, 설사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 방면으로 아는 지식이 미천하기에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책의 표지는 디자이너와의 만남이 잘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만 대체된다. 표지의 중요성을 알지만, 저자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표지와 상관없이 텍스트만으로 그 책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독자들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표지가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내용을 깎아먹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표지로 독자들을 낚는 상업주의는 작가로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이다. 저자나 작가는 이런 것들에 적당히 무심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또한 책의 진정한 정체성은 텍스트에 있지 표지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되는 것 같은 발가벗은 책이 진정한 책의 정체성과 더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 줌파 라히리 읽기

1.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https://rtmodel.tistory.com/2035

2. 책이 입은 : https://rtmodel.tistory.com/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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