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길을 물었다 - 뉴욕식물원 가드너의 식물과 영성 이야기
이성희 지음 / 선율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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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하나님 나라


이성희 저,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를 읽고


이상한 일이다. 한 정원사의 글이 늘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하나님 나라를 재현해 냈다. 마치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내게도 일어난 것 같았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8)." 정원사의 언어가 과학자인 내 귀에 들렸고,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11)." 


저자가 내게 쓴 글귀가 떠올랐다. "자신의 언어로 복음을 담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별다른 통역 없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한 것이다. 그는 정원사이고 나는 과학자이지만, 그래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우리의 공통분모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그 기저에는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기치 못한 순간, 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에게 감사한다.


책을 읽고 동경이 하나 생겼다. 천이를 거쳐 마침내 다다른 극상림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것. 오랜 세월을 통해 최적의 생태적 안정성에 다다른 숲. 다양한 식물들이 햇빛과 공간을 나눠 쓰기에 가장 최적화된 모습으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정원. 숲 자체만 아름답게 빛나는 게 아니라 공기를 정화하고 가뭄과 홍수를 예방하는 기능까지 완벽히 해 내는 그곳. 이러한 '숲 정원'을 머릿속에 그리자 지체 없이 하나님 나라가 떠올랐던 것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천이'란 다양한 식물들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한 지역의 식생이 안정화되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 기나긴 여정이 다다르는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띤다고 한다. 


"이 숲은 전형적인 층위 구조를 보인다. 층위 구조란 성숙한 숲에서 나타나는 수목의 크기에 따른 계층 구조인데 가장 높은 곳에는 느릅나무, 참나무류, 백합나무 등 20-30미터에 이르는 교목들이 숲의 윤곽을 형성하고, 그 아래 그늘진 곳에는 생강나무, 단풍나무, 산딸나무 등 3-7미터 높이의 소교목 또는 아교목이 자리를 잡는다. 지면과 가까운 곳에는 진달래 등 2미터 이내의 관목들이 무성하고 맨 아래는 각종 지피식물들이 담요처럼 흙을 덮는다. (p120)"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인용구가 나에겐 하나님 나라를 생각나게 했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는 그곳 (사11:6). 동물의 왕 사자가 가장 나약한 짐승 중 하나인 어린양을 잡아먹지 않고 함께 뛰노는 그곳. 강한 자와 약한 자, 혹은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구분이 없는 그곳. 이미와 아직 사이인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를 가진 자, 귀신 들린 자, 억눌린 자들이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한 채 함께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눈물 없는 그곳. 그곳은 곧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덤덤히 묘사한 천이를 거친 극상림이 이런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내겐 너무도 닮아 보였던 것이다.


생물학을 전공한 내가 그리는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성이 아름다움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수가 열 개가 아닌 사람들, 입술이나 입천장이 갈라진 채 태어나 평생 그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 다운증후군을 비롯하여 여러 증후군을 가진 채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 그리고 성소수자와 성정체성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개별적인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꽃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곳 말이다. 


나는 창조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생명체들을 연구하는, 생명체들을 섬기는 각 사람의 언어로 복음을 담아 그것을 글로, 그림으로, 혹은 음악으로 다채롭게 표현하는 그날을 꿈꾼다. 그곳이야말로 하나님 백성들로 구성된 극상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극상림이 지금, 여기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이 되기를 책을 덮고 기도했다.


저자는 열두 가지 정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환대의 정원부터 시작해서 겨울 정원까지 이르는 여정은 저자가 미국으로 건너가 정원사로 거듭나기까지의 수년의 세월과 자연주의 정원사가 되어 현재까지 누리고 있는 수년의 세월을 아우른다. 정원사로서 정원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연한 언어가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귀에 들려지고 이해될 수 있게 글을 써낸다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개별적인 한 사람, 혹은 개별적인 한 직업의 언어에 갇히지 않고 그 아래에 뿌리처럼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과하지 않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며, 이는 곧 그 글을 쓴 저자가 성령께 잡힌 바 된 사람이라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신만의 언어로 노래하며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아 전달하는 이 아름다운 과업을 저자는 훌륭히 해 내고 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자만심에 가득한 건축도, 단단하게 막혀 있는 건축도 넉넉하게 다 담아내는 자연주의 정원, 그 환대의 정원에서 나는 자연을 닮은 정원이 갖는 강력한 포용과 조화의 힘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화려한 꽃 잔치가 끝난 6월의 어느 날, 아젤리아 가든에 서서 나도 저자처럼 수수한 수국의 매력을 마음껏 그러나 조용히 느껴보고 싶어졌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빛나는 나의 내면을 비춰보고 싶어졌다. 식물원 방문객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는 9월 말부터 열리는 국화 축제에도 참여해 보고 싶어졌다. 소유하기보다 공유하고 나누는 정원에 앉아 그 일상의 시공간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과거의 기억을 머금고 있는 어떤 것을 기념하는 정원에도 가 보고 싶어졌다. 그곳을 디자인한 정원사의 의도를 이해하고 타자와 세상을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워지는 정원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담아내고 싶어졌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정원의 식물을 통해 느껴보고 싶어졌다. 한 포기 국화에서 천 송이 꽃이 나오게 하는 예술의 극치도 보고 싶고, 숨 가쁘게 이어지는 꽃 잔치의 절정인 6월의 장미를 땡볕에서 마주해 보고도 싶지만, 그것보다 나는 몸을 숙이고 자세를 낮추어 경건한 마음으로 흙을 덮고 바위를 덮은 이끼들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그곳에서 예수의 마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이끼와 고사리가 낀 숲 정원에서 사람들이 오래 머물게 되는 이유를 나는 왠지 알 것만 같다.


덧붙여 나는 저자가 계획한 프로젝트 R을 마음 담아 응원하게 된다. 황폐한 땅을 회복하여 아름다운 숲으로 복원하는 그 계획은 황폐한 이 땅을 복음으로 회복시키는 선교와 닮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흥 Revival, 회복 Restoration, 견고함 Resilience, 화해 Reconciliation가 저자와 저자가 몸담은 정원을 통해서 일어나길 소망한다. 


#선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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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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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 그리고 상실


파스칼 키냐르 저,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고


10월의 첫 아침을 맞이하며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날씨는 흐리고 곧 비가 올 것만 같다. 나는 밑줄 그은 문장을 노트에 옮겼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p112)"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문득 지금 이 순간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하루의 시작에 늘 아침이 있었건만, 그 반복되는 무수한 아침 가운데 똑같은 아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마치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감동에 젖는다. 영원한 것도 없지만 똑같은 것도 없다. 


이 책은 내게 두 가지 숙제를 남겼다. 하나는 '예술가의 삶에 대한 숙고'이고, 다른 하나는 '상실에 대한 사색'이다. 두 가지 다 잘해 낼 자신이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장에 꽂아 두기엔 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조금이라도 끄적거려볼까 한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본업인 과학도 어떤 면에서는 예술과 연결이 된다고 믿는다.


첫 번째 숙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한 적이 있다. 의외로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 (특히 소설가들)이 예술 작품에 일가견이 있거나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모든 예술은 결국 통한다'는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글, 그림, 곡은 각각 문학, 미술, 음악의 언어로써 예술가가 관찰한 것, 성찰한 것, 혹은 통찰한 것을 표현해 낸다. 언어만 다를 뿐 결국 예술가의 내면과 그 내면을 통과하고 정제된 비가시적인 것들을 우리가 읽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감각적인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과업이 바로 예술가의 삶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표현만으로 예술가의 삶은 만족되지 않는다. '깊이'라는, 쉽게 말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하지만 모든 예술가들이 궁극적으로 천착하게 되는, 그 무엇이 반드시 맞닥뜨리고 혹은 극복해야만 하는, 그러나 영원히 도달할 수 없고 항상 미끄러질 뿐인 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가들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도 한다. 또 어떤 예술가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모든 것에서 단절시키고 소외시키기도 한다. 극단적인 노력 끝에 '깊이'라는 그 무엇에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업은 영원히 불가능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깊이'의 심연은 아무도 가본 적도 닿은 적도 없기 때문이며, 깊이는 더한 깊이를 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미끄러짐을 예술가의 숙명으로 본다. 정도만 다를 뿐 예술가라면 누구나 이 도상에 서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네 인물, 즉 생트 콜롱브, 마랭 마레, 마들렌, 투아네트는 모두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한다. 마들렌과 투아네트는 생트 콜롱브의 두 딸이자 제자로 등장하며, 마랭 마레는 생트 콜롱브의 제자였는데 사회적인 성공을 위해 속세로 돌아갔다가 나이가 들어 음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다시 스승을 찾아오는 인물로 그려진다. 생트 콜롱브는 은둔형 음악가다. 비올라 다 감바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이나 그는 화려한 궁정이 아닌 자신의 보잘것없는 시골집에 기거하며 음악에 몰두한다. 그에게 돈과 명예는 음악가에게 외계어 같은 것이었다. 마랭 마레가 자기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를 다시 받아준 이유가 담긴 대화의 일부에서 그가 남달리 정의하는 음악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p118)"


음악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대화를 하다가 생트 콜롱브를 흡족하게 만든 마랭 마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p120)"


그리고 생트 콜롱브는 마지막으로 마랭 마레에게 그동안 가르쳐주지 않았던 '눈물들'과 '카론의 배', '회한의 무덤' 전체를 들려주기로 한다. 마침내 마랭 마레가 그 곡들을 들을 만한 귀를 가진 자로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생트 콜롱브가 까칠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예술가 중에서도 부와 명예를 위해 예술을 했던 중간 단계의 마랭 마레 같은 사람들에게도 생트 콜롱브는 까칠하고 극단적인 음악가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언어를 빌려 생트 콜롱브를 표현하고 싶다. 그는 '백치'와 같은 예술가 (음악가)였다고. 


상실에 대한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첫 문장을 가져올 필요가 있다.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이 죽었다."


상실을 공연히 선포하는 저 문장은 '백치'와 같은 음악가 생트 콜롱브를 정의하는 상자 역할도 충실히 해낸다. 그는 아내의 죽음이 사무쳤고, 집 안에 틀어박혔으며, 음악에만 몰두했다. 아내가 죽고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연습할 정도로 말이다. 생트 콜롱브는 비올라 다 감바를 양 무릎 사이에 놓고 연주하는 방식을 찾아냈고, 훨씬 더 무게감 있고 훨씬 더 우울한 톤을 만들기 위해 악기에 저음의 현을 하나 덧붙이기도 했으며, 손의 무게감을 덜어주고 검지와 중지만 사용해 말총 활 위에 살짝만 힘을 실어주는 활 기법도 고안해 냈다. 그가 비로소 젊은 여인의 탄식에서부터 중년 남성의 오열까지, 전장에서의 외침부터 그림 그리는 데 열중하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숨소리까지,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거친 헐떡임부터 기도에 몰입한 한 남자의 장식음 거의 없는, 무음에 가까운 저음까지, 인간 목소리의 모든 굴곡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그 발단에 아내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실이 만들어낸 창조. 바로 생트 콜롱브가 이루어낸 과업이었다.


그는 매일 상실을 맞이했다.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그의 삶은 그 위에 세워지고 있었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도, 환각으로 찾아오는 아내를 대면하는 것도 그에겐 상실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바로 그 상실 속에서 그는 음악을 했고 음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재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세로부터 스스로를 더 단절시키고 소외시켰다. 


상실은 힘이 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겐 분노가, 누군가에겐 성공욕이, 또 누군가에겐 상실이 목표를 이루게 하는 동력이 된다. 물론 생트 콜롱브의 목표는 부와 명예 혹은 권력 같은 사회적인 성공과는 반대 방향에 있었다. 음악의 본질, 음악의 근원을 찾아 그는 평생을 헤맸던 것 같다. 오로지 상실의 힘을 의지해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건 생트 콜롱브에게도 진실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한 번의 상실이 그에게는 매일 새로운 상실로 갱신되었다.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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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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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소설 쓰기, 그리고 작가와 소설가


김연수 저, '소설가의 일'을 읽고


2년 전에 읽었던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가 자연스레 소환되었다. 글쓰기 대가들은, 특히 소설을 써본 작가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전혀 지루하지 않게, 그것도 과하지 않은 유머를 고수하면서까지,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이 어떠한 것인지 핵심적인 부분들을 쉽게 풀어주는 두 작가는 닮아도 너무 닮아 보였다. 안정효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이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읽었던 것처럼, 김연수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본 적 없이 '소설가의 일'을 읽었다. 글쓰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분들, 읽고 쓰기가 일상이 되어 읽고 쓰지 않으면 허기를 느끼는 사람들 (나는 이들을 감히 '작가'라고 부른다), 특히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에겐 그야말로 명강의가 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주 편안하고 쉬운 문체로 쓰여 있어서 지난 두 주간 거의 매일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조금씩 가볍게 읽다가 오늘 이렇게 다 읽고 소감을 남긴다. 


김연수 역시 안정효 (혹은 신형철)처럼 단어 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짚는다.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한 안정효와 신형철은 '정확한 글쓰기'를 강조했다. 어떤 문장을 이루는 단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가정이 바로 정확한 글쓰기의 기본 전제다. 그만큼 정확한 단어의 사용은 글쓰기에 있어서 치명적이라는 말이다. 정확한 단어 사용은 정확한 문장을 만들어 내고, 정확한 문장들은 정확한 글, 달리 표현하자면 좋은 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연수는 '정확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지만,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단어, 좀 더 감각적인 단어 사용이 필수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소설가를 화가와 비교하면서, 소설가에게 단어란 화가에게는 색채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뻔하고 진부한 표현을 여전히 나도 모르게 사용하는 내가 보였다. 창피했다.


소설을 쓰는 실제 삶을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김연수 작가는 하루에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런 그 세 시간 동안 최대한 느리게, 거의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리게 글을 쓰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는 글을 얼마큼 많이 썼느냐가 아니라 소설을 생각하며 세 시간을 보냈느냐 아니냐로 글쓰기를 판단한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식으로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느리게 쓴다는 것은 문장을 공들여 쓰고 플롯을 좀 더 흥미진진하게 구성한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다. 내가 도스토옙스키나 헤세를 통해 느낀 소설의 본질을 그대로 관통하는 문장이라 나는 이 문장을 박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소설이란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오랫동안 숙고하는 서사예술이라는 인식이 숨어 있다."


이 이상으로 이 책을 요약하거나 평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편의 글을 쓰기도 했으니, 글쓰기에 대한 나의 생각이 궁금한 분들은 찾아보시면 어렵지 않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내가 밑줄 긋고 작가 노트에 옮긴 문장을 아래에 소개하면서 마칠까 한다. 글쓰기에 진심인 사람들, 그중에서도 글쓰기의 여정 중 정체기를 맞이하고 있거나 그랬던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흔한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무나 특별한 일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으로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일들을 문장으로 적기 시작한다면 그게 바로 소설의 미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문장이 된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 소설 속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추잡한 문장은 주인공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인생을 뻔한 것으로 묘사할 때 나온다.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진다."


자, 이제 김연수의 소설을 읽어볼 차례다. 책장에 몇 달째 꽂혀 있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나를 노려 본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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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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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해서 반가웠고, 여전해서 아쉬웠던


정유정 저, ‘영원한 천국’을 읽고


3년 전 그때 그 느낌이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공포가 엄습해 왔고, 내 가슴은 숨 가쁘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미친놈처럼 연신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몰입해서 책을 읽은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아, 역시 정유정이었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그리고 3년 전 출간 즉시 읽었던 ’완전한 행복‘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만나는 정유정은 여전했다. 그녀 특유의 휘몰아치는 서사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정도의 긴장 가운데 이번에도 나를 급박하게 내몰았다. 523 페이지도 단편으로 느껴질 만큼.


'7년의 밤'과 '완전한 행복'을 나는 1, 2순위로 매긴다. 그리고 이 순위는 이번 작품을 읽고 나서도 변동이 없다. 정유정은 여전히 정유정이었지만, 또 여전히 정유정이기도 했다. 기대를 많이 했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대로 정유정 특유의 장점이 고스란히 살아 있어 기대의 절반은 채워졌지만, 작품성이랄까 발전성이랄까 깊이랄까 하는, 딱히 특정한 한 단어로 잡아내기 힘든 그 무엇이 이번에도 갈증으로 남았다. 정유정이 보여줄 수 있는 정점은 이미 보여준 게 아닌가 싶었다. 내 기대의 절반은 그렇게 채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정유정의 차기작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 갈증은 그녀만이 해소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유정 작가를 한강 작가와 비교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작가를 한 단어 안에 욱여넣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각각 서사와 묘사를 대표하는 작가로 해석했었다. 정유정의 소설은 빠르고, 한강의 소설은 느리다. 정유정의 소설은 동적이어서 어떤 커다란 사건과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다. 반면 한강의 소설은 상대적으로 정적이어서 어떤 사건이나 상황의 전개보다는 그 사건이나 상황이 그림처럼 그려져 어떤 이미지로 남는다. 자연스레 정유정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건과 상황의 전개에 발을 맞춰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이미 급박한 전개에 흥분한 독자들은 그들의 내면에 집중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러나 한강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사건이나 상황보다 언제나 한 걸음 앞서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들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다. 


문체도 다를 수밖에 없다. 정유정의 문체는 무거울 수 없다. 쓰나미나 토네이도를 떠올릴 만큼의, 정유정 특유의 급박한 서사에 모든 게 소비되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문장은 단문 위주로 될 수밖에 없고, 사용되는 단어는 통속적인 문화에 녹아든 단어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라도 정유정의 이러한 매력에 흠뻑 젖게 되는 것이다. 한편, 한강의 문체는 무겁다. 사건이나 상황보다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다분히 관념적이다. 관념적이다 보니 사상이나 철학 개념이 녹아 있어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혼이 빠진 독자들은 한강의 작품을 읽을 때면 난해하다거나 지루하다는 평을 하기 쉽다. 그러나 개별적인 작품에서 보편적인 인간을 성찰하고 통찰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강 작가의 소설은 인간의 본성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주고,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어떤 특별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준다. 요컨대 한강의 등장인물은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지만, 정유정의 등장인물은 상대적으로 개별적이고 독특한 인간 유형을 보여준다. 그 결과 한강의 작품을 읽고 나면 잔상이 오래 남아 자꾸만 생각나게 되는 효과를 내는 반면,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나면 잔상이 오래가지 않는다. 물론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한동안 여운이 남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불안과 공포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작품이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 준다면, 정유정 작품은 공포를 조장한다. 한강은 보편적 인간, 즉 나도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인간의 존재론적인 불안을 포함하여 숙명적인 본성에 천착하는 반면, 정유정은 특정 인물을 지정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이용하는 데에서 가히 천재적이다. 일례로 나는 '영원한 천국'을 읽고 여전히 칼잡이가 무섭다. 그러나 이 공포는 금세 사라질 것이다. 칼잡이는 보편적인 인간을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한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도중엔 너무 흥분도 되고 몰입도 하게 되지만, 끝나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는 경험을 다들 한 번쯤은 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비슷하다. '영원한 천국'을 몰입해서 읽었건만, 내 머릿속에서는 벌써부터 이 작품이 가진 세계관이나 인물들의 캐릭터가 빠른 속도로 잊히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의 이미지는 수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이건 나의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에겐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인간 본성의 심연을 충분히 건드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악한 인간, 욕망에 허우적대며 굴복당하는 인간의 여러 유형을 다각도에서 보여줬다는 점에선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나는 그녀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나를 성찰하고 인간을 돌아보게 하는 그녀의 통찰이 묻어나는 소설을 쓰게 되길 이 작품을 읽고 더 기대하게 된다. 


구차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변명은 가능하다고 본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잘 와닿지 않는 가상세계가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작품에 흐르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작동하는데, 정유정 작가가 스스로도 작품 뒤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에서도 고백하듯 그녀는 이런 첨단과학이랄까 공상과학이랄까 하는 것에는 전문가가 아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전문가로서의 공부와 작가의 상상력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착안점은 공감이 간다. 시대의 변화와 과학의 발달, 그리고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 영원을 향한 소망 등이 잘 버무려져 탄생한 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정유정 작가가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될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정유정의 고유한 매력은 대중성과 강렬한 서사 아닌가. 먼 훗날 가능할 수도 있는 가상세계 (이곳에선 인간의 육체를 제외한 모든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감각이 정보화되어 업로드되는 가상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죽으면 다른 삶을 선택하여 살 수 있다. 인간이 아닌 벌레로도 살 수 있다. 기억에 의존하여 세상이 구성되며 그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삶으로, 그야말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제목 '영원한 천국'은 바로 이러한 공간을 희화화한 것이다)를, 과학자가 직업인 나도 잘 이해하기 힘들뿐더러 손에도 잡히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그런 세계를 소재로 삼아 대중성과 강렬한 서사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정유정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처럼 지극히 통속적인 주제, 이를테면 돈, 치정, 살인을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시공간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소설을 써 내려가는 게 그녀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지 않을까 한다. 뻔한 상황, 뻔한 사건 속에서도 뻔하지 않은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까발리는 그녀의 작품을 고대한다. 


* 정유정 읽기

1. 7년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232

2. 28: https://rtmodel.tistory.com/1243

3. 종의 기원: https://rtmodel.tistory.com/1314

4. 완전한 행복: https://rtmodel.tistory.com/1342

5. 영원한 천국: https://rtmodel.tistory.com/1853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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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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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혜자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다시 읽고

재독의 맛은 초독 때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으며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뒤늦게 음미하는 데에 있다. 재방문은 첫 방문의 기억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기억을 벗 삼아 처음보다 더 깊은 단맛을 느끼게 해 주고, 좀 더 느긋하게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어울림을 맛보게 해 준다. 적어도 줄거리를 따라가는 급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까.

정말이지 기적 같은 독서모임 덕분에 나는 일생에 한 번도 읽기 힘든 도스토옙스키 주요 작품들을 두 번이나 읽어 나가는 복을 누리고 있다. 독서모임 일주년에 맞춰 읽은 작품 (이른바 '재독 프로젝트'의 아홉 번째 작품)은 ‘백치’였다. 5년 만에 다시 읽었기 때문일까. 앞의 여덟 작품보다 유난히 이 작품에서 나는 재독의 묘미를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내 시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다르게 읽힌다는 건 시차를 두고 일어난 내 안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때문일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곧 나의 내면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초독 감상문에서 나는 작품 속 주인공이자 백치로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을 전적으로 변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누가 백치인가?'라고 물으면서 나는 미쉬낀 공작이 아닌, 오히려 그를 백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백치일지 모른다고 반박했었다. 이번엔 공작에 대한 나의 스탠스가 조금 달라졌다. 누가 백치인지 묻는 것보다 누가 더 지혜로운지 묻게 된 것이다. 백치로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으로부터 나는 초독 때 착안했던 성스러운 유로지비의 모습만이 아니라, 이상적일 정도로 고결하고 선하고 정직하지만, 인간의 모순된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이율배반성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공포를 느끼며 꼼짝없이 얼어붙고야 마는 공작의 나약함을 주의 깊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선 미쉬낀에 대한 나의 시선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풀어볼까 하는데, 그러기 위해 도스토옙스키의 중기작 중 하나인 '상처받은 사람들'에 등장하는 한 인물, 알료샤를 잠시 소환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두 주인공은 나따샤와 알료샤다. 재독 감상문에서 나는 이미 이 둘을 비교한 적이 있다. 알료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혹은 순수함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았고, 나따샤는 아이와 반대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의 성숙함 혹은 어른스러움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았다. 이 두 주인공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데, 아니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를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었다. 아이의 모습을 상실한 어른은 아이 같은 어른으로부터 순수함에 대한 동경은 할 수 있을지언정 동등한 선상에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으며, 몸은 어른이지만 내면은 여전히 미성숙한 어른은 성숙한 어른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알료샤는 후자에 속했다. 

한편 나는 고결함의 측면에서 알료샤를 또 다른 인물 넬리와 비교하기도 했었다. 알료샤가 인간 수준에서의 고결함이라면, 넬리는 신적인 수준으로 승화된 고결함, 즉 성스러움과 맞닿아 있다고 해석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추구했던 아름다움 (미)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성스러움을 가장 연약한 존재인 넬리에게 심어놓았다고 본 것이었다. 이어서 나는 알료샤의 고결함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변화시키는 힘은 없다고 보았다. 그를 사랑하기까지 했던 나따샤에게까지 알료샤는 결국 커다란 상처만을 안겨주었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료샤는 나따샤를 품을 수 없었다. 그의 고결함은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가지는 동시에 자기만 아는 아이의 이기적인 본성까지도 그대로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순수함을 가진 어른, 그래서 타자를 헤아리지도 품지도 못하는 어른아이가 바로 알료샤였던 것이다. 

'백치'를 처음 읽을 땐 내가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유로지비의 원형으로 보는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의 예고르, 그리고 '죄와 벌'의 소냐나 리자베따, 혹은 앞서 언급한 대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넬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미쉬낀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동일선 상에 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미쉬낀으로부터 넬리가 아닌 알료샤의 모습도 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초독 때와 달리 재독 땐 ‘상처받은 사람들’을 이미 두 번이나 읽은 후였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고결함 측면에서 미쉬낀을 알료샤와 넬리에 비교한다면, 미쉬낀은 알료샤와 넬리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지 않나 싶다. 미쉬낀으로부터는 넬리에게서 느껴지는 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으며, 대신 알료샤의 천진난만함이 오히려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성숙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가까이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인물, 실제론 백치가 아니라 현명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왠지 거리를 두고 지내고 싶은 사람, 이것이 바로 거품을 뺀 현실 속 미쉬낀의 실체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이런 인물을 평가할 때 지혜롭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쓸 수 없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미쉬낀은 백치도 아니지만 지혜자도 아니라는 게 내 지론이다.

미쉬낀 공작의 고결함이 한 가지 색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사실을 착안하고 나니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 속 여러 부분들이 명쾌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 작품의 결말 부분이 납득이 되었다. 미쉬낀은 나스따시야를 살해한 로고진과 함께 시체가 된 나스따시야 옆에서 하룻밤을 잔 뒤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섬뜩하지 않은가?), 로고진은 살해범으로 시베리아 유형을 가게 되고, 미쉬낀은 이전보다 더 심한 백치가 되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해진 걸로 보아 기억 상실이나 치매 증상까지 겹친 듯하다) 다시 스위스 병원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변주로 상징되는 미쉬낀 공작은 결국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도 얻지도 못한 채 모든 걸 잃고 자신은 더 마이너스가 되는 결과를 보여주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미쉬낀은 로고진에게 나스따시야를 살해한 흉기가 무엇인지 묻는, 일견 엉뚱해 보이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사람들로부터 선한 모습을 찾아낼 줄 알며, 자주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람의 내면까지도 꿰뚫어 보아 현명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았던 미쉬낀 공작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채 살인자 로고진에게 연민까지 느끼며, 정상적인 살인사건의 목격자라면 으레 행해야 했던 신고나 자수 권유 등을 무시하고 살인자의 제안을 그대로 따르는, 다분히 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미쉬낀 공작이 모든 것을 이미 다 파악한 뒤 행한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엔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엔 그저 어쩔 줄 몰라 당황한 아이,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의 공포로 인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멘탈이 붕괴된 환자가 서 있을 뿐이었다. 

비슷한 식이다. 결말 부분 말고도 여러 장면에서 미쉬낀 공작은 일견 의아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자주 선보이는데, 그것들을 모두 그가 너무 순수해서, 혹은 너무 고결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내 모습으로부터 나는 이번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를 전적으로 두둔하고 변호하려는 내 모습이 순수하지도 고결하지도 않다는 점과 더불어 그의 모습을 자꾸만 완전성에 비추어 후한 점수를 주려는 내 모습에서 나는 불편함과 부자연스러움과 강박을 느꼈던 것이다. 미쉬낀 공작은 그리스도를 닮았지만, 그 모습은 모든 것이 선하고 좋은 면만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라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가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모두 인간에게 있는 선한 모습만으로 상황이 설명 가능할 때에 유효했다는 생각이다. 그에겐 인간의 모순된 본성, 이율배반성을 깊이 이해하고 품고 다루는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는 어두움의 존재 (이는 작품 속에서 로고진, 혹은 어디선가 불안할 때 느껴지는 로고진의 시선으로도 상징된다)는 인지하고 있으나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며 그것과 접촉하게 되면 얼음이 되고 마는 나약함을 가진 ‘순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지혜로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선하기만 한 자에게 지혜자의 타이틀을 부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거짓과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이라는 배경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로움은 선과 악으로 인해 지난한 변증법적 성장을 버텨내고도 여전히 선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인간에게 숙명적인 본성으로 내재된 이율배반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 이해한 상태로 기꺼이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지 않을까 싶다. 나스따시야와 로고진 덕분에 미쉬낀도 마침내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한 채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부분까지 차단되어 버린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나는 성스러움이 아닌 나약함을 느끼고 애석해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는 그의 말도 다분히 이상으로만 남겨진 것 같다. 적어도 그는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독 감상문을 이렇게 마치려니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독서모임 가족들과 함께 나눈 뒤 더욱 깊고 풍성한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함께 읽기’를 쓸 생각을 하니 큰 위로가 된다. 이 작품 안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들의 관계 또한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도 절대 놓칠 수 없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아직 하지 못한 말들이 많지만, ‘함께 읽기’에서 보충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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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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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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