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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여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07년 5월
평점 :
그리스도인보다 더욱 그리스도인다운
엔도 슈사쿠 저, '내가 버린 여자'를 읽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어릴 적 소아마비로 다리를 약간 저는 대학생 요시오카는 친구인 나가시마와 함께 좁고 허름한 하숙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늘 돈과 여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며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는 실정이다. 어느 날 전단지를 돌리는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밝은 별'이라는 낡은 잡지 하나를 줍게 되고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페이지 독자란에 실린 글귀를 읽게 된다. 와카야마 세츠코 씨 팬으로부터 편지를 기다린다고 쓴, 영화를 좋아하는 19살의 여성 모리타 미츠의 글이었다. 요시오카는 여자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과 저급한 욕망에 이끌려 미츠의 이름 옆에 적힌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이것이 요시오카가 나중에 버리게 될 여자, 모든 게 지나고 난 이후 성녀라고 생각하게 될 여자 미츠를 만난 최초의 계기였다.
시골 처녀 미츠는 요시오카가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동경했다. 요시오카가 자신의 성적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만나자고 했던 의도를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미츠는 순박한 사람이었다. 첫 만남에서 요시오카는 미츠를 유흥가로 데려가 술을 마시게 하고 자신의 음흉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여관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미츠가 거부하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미츠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요시오카는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킨다. 요시오카의 집요한 욕망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츠의 측은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요시오카는 첫 만남에서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알아챈 미츠가 갑자기 순수한 연민으로 가득 차올라 계속 거절하던 자신의 요구를 포함하여 모든 걸 다 내어줄 것처럼 태도가 바뀌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서는 거짓으로 동정심을 유발했고 예상대로 미츠는 넘어갔다. 원하진 않지만 미츠는 그 동정심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몸을 내놓았다. 미츠에게 있어선 처음으로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준 순간이었고, 요시오카에겐 처음 여자의 몸을 범한 순간이었다. 이 단 한순간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잊히지 못할 흔적이 되었다. 실제로 작품 마지막에 가서 요시오카가 고백하는 문장이 이를 말해준다. “만일 미츠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것이 있다면 거기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는 사실일까?” 이것은 아마도 저자 엔도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 중 하나일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미츠의 인생에 대해서다. 미츠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가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 견딜 수 없었다. 그 불행한 표정이 자신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런 내면의 속성 때문에 미츠는 비탈길 위의 비 내리는 허름하고 더러운 여관방 안에서 불행해 보이는 요시오카를 위해 단 몇 분이지만 아픔을 참고 견뎠던 것이다. 미츠의 어머니는 미츠를 낳은 후 세상을 떠났고, 새어머니는 아이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미츠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편해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없는 편이 아버지에게도 새어머니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도쿄에 나와 허드렛일을 하면서 혼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순박하고 착한 미츠의 인생에 어느 날 요시오카라는 사람이 침투하여 몸과 마음을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미츠는 연민인지 사랑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는 없지만 요시오카에게 몸을 준 이후 요시오카를 잊지 못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호의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놀랄 만큼 헌신적이 되어 엄마나 누나처럼 되기 때문일까. 미츠는 요시오카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야근을 하면서까지 돈을 모은다. 요시오카가 가난하게 공부하는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미츠는 요시오카의 구멍 난 양말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한편, 요시오카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더 이상 미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버린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이 탄생하게 된다. 미츠는 요시오카에게 ‘내가 버린 여자’가 된다.
요시오카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에 성공한다. 어쩌다가 사장 딸인 마리코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요시오카가 이 부분에 대해서 쓴 문장은 읽어볼 만하다. 다음과 같다. “어쨌든 마리코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옛날에 단 한 번 관계했던 미츠와의 일은 점점 잊혀 갔고, 그녀는 내 안에서 하찮은 존재가 되어갔다. 이미 그것은 존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우리 인생에 있어 타인에게 끼친 행위는, 어느 것이건 태양 아래 얼음이 녹듯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상대에게서 멀어져 전혀 생각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의 행위는 마음속 깊이 흔적을 남긴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미츠와 대조하기 위해 마리코라는 여자를 등장시켰을 것이다. 덕분에 독자는 동일한 남자가 서로 다른 두 여자에게 태도를 어떻게 달리할 수 있는지 명징하게 볼 수 있다.
요시오카는 자신이 그렇게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미츠가 생각이 날 뿐 아니라 그녀와 자꾸만 엮이게 된다. 회사 야유회에 다녀와 터키탕에 들렀는데, 거기서 요시오카에게 서비스를 해주는 여자가 우연히 미츠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미츠가 얼마 전 일을 그만두었지만 함께 일할 땐 요시오카에 대해서 좋은 말을 많이 했다고 하며 애써 미츠의 심정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요시오카의 마음은 그럴수록 더욱 완강해졌고, 미츠가 자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전철을 타고 시부야에 진입할 때 문득 눈에 비친 장소, 즉 처음으로 미츠를 껴안았던 곳, 그 여관과 비탈길을 보았을 땐 요시오카의 마음은 일렁인다. 미츠의 존재가 의식 수준에서는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무의식 수준에서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있었던 것이다.
요시오카는 마리코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요시오카가 마리코에게 대하는 태도는 미츠에게 했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스스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나와 마리코는 아직 한 번도 키스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나는 마리코를 존경하고 있었던 것일까? 미츠 때는 경멸하며 그 몸을 겁탈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왜 마리코의 입술과 순결은 소중히 여겼던 것일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생각을 정리한다. “나는 여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 A라는 여자에게 할 수 없는 일을 B라는 여자에게 태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A라는 여자 부류에는 마리코가 들어 있었고, B라는 여자 부류에는 거리의 매춘부와 미츠가 들어 있었다.” 요시오카는 마리코에게는 키스 한 번 제대로 시도하지 못하면서도 성적 충동을 해소하기 위해 사창가를 여러 번 찾았다. 그는 매춘부를 껴안으면서도 마리코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남자의 심리라면서, 마리코는 마리코, 매춘부는 매춘부라는 논리를 정당화시키면서 말이다. 요시오카의 심리 (어쩌면 많은 남자의 심리)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미츠의 손목에는 커다란 붉은 반점이 있었다. 요시오카도 처음 그녀를 범할 때 보고 혐오해했던 것이었다. 생긴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미츠는 그 반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공장 일을 그만두고 터키탕에서 일하다가 누명을 쓰고 바보처럼 이용당한 뒤 술집에서 일하던 미츠는 몸이 아파 병원을 찾게 되는데, 의사로부터 고텐바 병원을 방문해서 꼭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고텐바 병원은 한센씨병 환자들을 격리해서 치료 및 요양하는 곳이었다. 한센씨병이 나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미츠는 무너졌다.
고텐바 병원에 가자마자 방을 지정받고 한센씨병을 다양한 단계에서 앓고 있는 환자들과 함께 격리 생활을 하게 된다. 미츠는 생각했다. ‘내가 어떤 나쁜 짓을 했다는 말인가 착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쁜 일도 하지 않았다. 새엄마가 들어왔을 때도 내가 집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도쿄로 나왔고, 공장에서도 나는 가능한 열심히 일했다. 동료가 게으름을 피울 때도 나는 포장 일을 성실히 했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끔찍한 병이 내게 왔단 말인가!’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있다가 미츠는 그곳의 사람들 속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고통스러운 것은 몸이 문드러지는 게 아니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견뎌내는 것이었다. 미츠는 마음속으로 준비를 하며 그들과 불행 및 슬픔의 연대를 이루어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날벼락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정밀검사 결과 미츠는 한센씨병이 아니라고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미츠는 뛸 듯이 기뻤다. 가장 먼저 요시오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뻤다. 그 정도로 미츠에게 요시오카는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츠는 병원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음을 돌이킨다. 오히려 원래 있던 곳이 병원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미츠는 병원에서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그곳을 섬기는 수녀에게 말한다. 수녀들을 도와 여기서 일할 수는 없겠냐고. 순간적인 충동이라 여긴 수녀는 미츠를 일단은 받아줬지만 곧 관두고 나갈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건 미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미츠는 그곳에서 사고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 누구보다도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게 된다.
작품은 마리코와 결혼에 성공한 요시오카가 고텐바 병원에 아직 한센씨병 환자로 있을 거라고 여긴 미츠에게 동정심 반 호기심 반으로 보낸 연하장에 수녀가 보낸 답장을 읽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요시오카는 그 의외의 글을 읽으며 충격에 휩싸인다. 모든 게 소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한센씨병으로 진단받아 입원했으나 정밀검사 결과 오진으로 판명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츠는 병원에 남아 수녀들과 함께 한센씨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헌신적으로 했다는, 그러다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누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수녀의 답장을 들고 있는 요시오카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수녀가 쓴 문장의 일부를 옮기는 게 좋아 보인다.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미츠, 미츠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그 무엇이 잘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다. “저는 때때로 저 자신과 미츠를 비교하여 반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는 성서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은 단순하고 순진하게 행복을 기뻐하는 것, 단순하고 순진하게 슬퍼하며 우는 것과 단순하고 순진하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미츠는 예수가 말한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점 한 가지는 미츠가 끝내 수녀가 믿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적힌 문장 역시 읽어볼 만하다. 다음과 같다. "전 하느님 따위는 있다고 생각지 않아요. 있기 뭐가 있어요? 단지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저로서는 하느님이 왜 소 같은 어린애마저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는걸요. 어린애를 괴롭혀서는 안 되잖아요. 어린애를 괴롭히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요." 이 문장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이 신을 믿을 수 없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 그것을 허락하는 신 따윈 믿지 않겠다는 것. 과연 그 누가 이 강력한 논리를 꺾고 신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신정론과 이어지는 이 질문은 아마 영원한 숙제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저자 엔도 슈사쿠는 왜 미츠에게 이런 캐릭터를 허락했을까? 예수처럼, 예수가 말한 대로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적인 캐릭터 가운데 왜 기독교의 신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캐릭터를 심어놓았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적인 동의, 이성으로 깨달은 신을 믿는 사람과 그것과 별 상관없이 그 믿음을 가진다면 행해져야 할 당연한 행위들을 삶에서 실제로 해내고 있는 사람을 대조하고 싶었던 걸까? 진짜 믿음은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여러 가지 질문이 남는다. 엔도에게 직접 묻고 싶을 만큼.
역자 후기에 다음과 같이 써져 있다. “미츠는 수도자처럼 사랑과 헌신을 모토로 살지 않았다. 그러한 용어들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진 않았지만, 그 단어의 의미들과는 상관없이 사랑을 실천한 여인이었다. 인생의 낙오자 자리로 떨어지면서까지 자신보다 더 보잘것없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을 내어주며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에 의해 성녀로 기억될 수 있었다. 이러한 미츠는 실존인물을 소재로 하여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엔도 슈사쿠의 초기 작품인 이 책은 엔도가 결핵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겪고 난 이후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아프고 병든 자들,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심리 묘사가 가슴에 퍽 박히도록 세밀했던 이유를 알 듯했다. 그리고 미츠가 실존인물을 소재로 쓰였다는 사실에서도 나는 한 가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세상엔 그리스도인이 정의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보다 더욱더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엔도가 혹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어문학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엔도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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