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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평점 :
관념과 몽상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여주인‘을 읽고
금세 바닥날까 두려워 아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 하나를 조심스레 까먹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다 읽는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러나 이제 내겐 슬픈 일이기도 하다. 몇 페이지 되지 않는 단편까지 포함하여 열린책들에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개수는, 내가 파악하기로는, 모두 서른다섯인데, 이번에 읽은 ‘여주인’을 빼면 이제 네 작품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문호의 작품을 읽어나가는 성취감이 남모를 아쉬움으로 변한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독서모임과 함께 내가 선별한 총 열다섯 편의 대표작을 재독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곧 맞닥뜨릴 상실로 인한 슬픔, 즉 읽지 않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사라질 시기를 늦추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주인‘은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 중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 중 하나다. 우리가 잘 아는 그의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 그에 이은 ’분신’ 이후에 급하게 쓰였던 소설 중 하나다. ‘가난한 사람들‘로 높이 올라갔던 그의 명예가 ’분신‘으로 본의 아니게 실추된 이후 도스토옙스키 내면에서 일었을 심적 동요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적이고 집요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가 텍스트의 옷을 입고 잘 드러나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성급함이 느껴졌다. 그 성급함은 이야기 전개의 미완결성과 미숙함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장편이 아닌 단편만의 특징이 잘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작품들을 거의 모두 섭렵한 내 눈에는 무언가 아쉬운 점이 많았다. 물론 등장인물의 인생 전체를 단편에 모두 녹여낼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개연성이랄까 핍진성이랄까 하는 부분에서 선뜻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남성의 정체가 모호했는데, 마치 관념과 몽상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 아닌 사람 같았다. 물론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이보다 더 강한 캐릭터가 등장했었지만 적어도 모호하진 않았다. ’백야’에서도 비슷한 인물이 등장했으나 나름대로 낭만을 느낄 수 있었고, 주인공과 대비되는, 여자가 기다렸던 남자가 작품 끝에 등장하는 바람에 주인공의 개성이 도드라졌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이도 저도 아닌 인물이었다. 맥락 없이 무대 위에 잠시 등장한 배우 같은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다. 그가 첫눈에 사랑에 빠진 ‘여주인’인 여성 역시, 비록 저자가 그녀의 과거사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유로지비를 연상케 하는 순진함과 광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격정적인 감정으로 채색되어 있어 내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또한 갑작스러운 친구의 등장도, 그 친구의 역할도 전체 서사와 무슨 연관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등장인물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소수만 나오는 작품인데도 서사가 엉성하게 보였다. 가독성도 좋지 않았다. 나 같은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에 도전하는 소수의 찐 독자만이 자발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모호하고 관념적인 이 작품의 결말을 처리하는 부분도 도스토옙스키다운 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현대문학의 단편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였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 같은데 뜬금없이 끝나버리는 찝찝함이 작품을 다 읽고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내게 아직 남아 있다. 다만 주인공 남자의 꿈꾸는 듯한 관념적인 표현들이 하나의 어떤 독특한, 신비감까지 느껴지는, 아우라를 형성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관념과 몽상, 이 두 단어는 '분신'의 골랴드낀을 창조한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품들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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