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입은 옷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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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으로 숨길 수 없는 정체성


줌파 라히리 저, '책이 입은 옷'을 읽고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인도 벵골 출신이자 미국 이민자로서 평생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전성기를 누리던 2012년, 그녀는 돌연 이탈리아 로마에서 2년간 거주하며 벵골어도 영어도 아닌 이탈리아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 책은 이탈리아어로 탄생한 그녀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이탈리아어로 쓴 첫 번째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 '책이 입은 옷'은 말 그대로 책의 표지를 뜻하지만 단순히 표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옷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고백한다. 미국으로 이민 후 다른 미국 아이들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옷 때문에 더더욱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책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평생을 벵골 고유 의상만을 고집했던 어머니와의 갈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마도 줌파 라히리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여러모로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것 같다. 그녀는 콜카타에서 사촌들이 입는 교복을 부러워하기도 했다고 쓴다. 교복은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동시에 익명성을 보장하는 이중 효과를 내는데, 그녀는 바로 그것의 혜택을 누리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교복이란 제도가 없었고, 각자 입고 싶은 대로 입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 이 자유가 싫었다." 


줌파 라히리는 어릴 적 옷으로 인한 갈등과 스트레스 때문에 옷이 옷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통찰을 책의 표지에 적용한 글이 바로 이 책이다. 표지는 내용을 보호하고 담아내고 전달해야 하는 고유한 사명을 띠지만,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때론 표지는 내용과 독립적인 가치를 띠고 책의 상품성을 좌우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내용이 말하는 것을 말해야 하는 표지의 정체성은 내용과 별개의 무엇인가를 말하는 정체성까지 띠게 되는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줌파 라히리가 어릴 적 옷 때문에 겪었던 것처럼 말이다. 


표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줌파 라히리는 기본적으로는 발가벗은 책, 즉 표지가 표지만의 개성을 내뿜지 않고 아무런 포장 역할을 하지 않는 책, 그 어떤 보조 설명도 덧붙여지지 않은 채로 텍스트의 신비를 그대로 전달하는 책이야말로 텍스트와 독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물론 표지의 상업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대두된 21세기 현재에는 불가능한 바람으로 그치게 되지만 말이다. 


나 역시 내 책의 표지들이 모두 맘에 든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표지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고, 설사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 방면으로 아는 지식이 미천하기에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책의 표지는 디자이너와의 만남이 잘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만 대체된다. 표지의 중요성을 알지만, 저자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표지와 상관없이 텍스트만으로 그 책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독자들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표지가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내용을 깎아먹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표지로 독자들을 낚는 상업주의는 작가로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이다. 저자나 작가는 이런 것들에 적당히 무심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또한 책의 진정한 정체성은 텍스트에 있지 표지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되는 것 같은 발가벗은 책이 진정한 책의 정체성과 더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 줌파 라히리 읽기

1.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https://rtmodel.tistory.com/2035

2. 책이 입은 : https://rtmodel.tistory.com/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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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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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의 이면


프랑수아즈 사강 저, '패배의 신호'를 읽고


양은냄비처럼 쉬이 뜨거워지는 사랑, 한동안 꺼질 줄 모르는 굶주린 호기심,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환상과도 같은 착각. 풋풋하고 솔직한 젊음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은 '패배의 신호'다. 승리처럼 보이는 젊음에 대한 찬사만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 안 된다는 저자의 암묵적인 메시지일까. 내게 이 제목은 불꽃같은 젊은 사랑의 이면을 함축하는 표현으로 읽혔다. 이상보다 현실을 보는 저자의 시선도 느껴졌다. 그렇다면 패배란 어떤 패배였을까. 한 계절에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사그라드는 사랑의 종국을 말하는 건 아니었을까. 루실의 처음과 마지막 위치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루실과 앙투안의 첫 만남부터 불꽃이 튀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봄에 시작해서 여름에 절정을 이루고 가을에 소멸했다. 샤를 곁에 잡히지 않는 공기처럼 있던 루실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어떤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결혼을 하면 아내와 남편의 역할이 있고, 아이를 낳으면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 있다. 서로의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역할도 부여된다. 사랑은 공중에 붕 떠서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체이고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루실을 바라보면, 루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에 소유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어찌 보면 자유로운 영혼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또 어찌 보면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게 기생하는 인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가 가슴에 가지고 있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열정이었을까? 아니면, 공허함 혹은 허무함이었을까? 루실과 결국 결혼하게 되는 샤를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루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루실을 향한 배려와 존중과 사랑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모두 현실세계에서의 어떤 역할을 모두 배제시켜야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것들은 모두 돈이 없으면 유지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루실이라는 인물이 과연 실재하는 인물이었나 하는 의심마저 들기도 할 정도다. 사회부적응자 같은 이미지도 겹쳐지면서 말이다. 어쩌면 저자 사강은 의도적으로 현실에서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사랑을 그려내보이면서 인간의 어떤 감정과 심리를 파헤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물론 문화적으로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경솔하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 소설은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미세한 감정의 탄생과 발전과 소멸을 섬세한 문장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톡톡 튀는 천재 작가 이미지의 문체 때문인지 남성이 아닌 여성의 시선으로 감정을 포착했기 때문인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느꼈지만, 사람 심리를 그려내는 기술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화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도스토옙스키보다도 사람의 본성을 깊숙이 통찰한 것 같기도 했고, 인간의 다채롭고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보기 드문 기술을 구사하는 작가로 보였다.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 녹색광선 읽기

1. 감정의 혼란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결혼, 여름 (by 알베르 카뮈): https://rtmodel.tistory.com/1646

3. 미지의 걸작 (by 오노레 드 발자크): https://rtmodel.tistory.com/1650

4. 눈보라 (by 알렉산드르 푸시킨): https://rtmodel.tistory.com/1682

5. 보통 이하의 것들 (by 조르주 페렉): https://rtmodel.tistory.com/1735

6. 낯선 여인의 키스 (by 안톤 체호프): https://rtmodel.tistory.com/2034

7. 패배의 신호 (by 프랑수아즈 사강): https://rtmodel.tistory.com/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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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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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으로 보여준 소중한 가치


보후밀 흐라발 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다시 읽고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형용모순적인 상황은 한탸의 존재와 삶 모두를 잠식한다. 독서모임 ‘인생책방‘ 덕에 5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여러 층위의 모순적 상황에 대해 주목할 수 있었다. 이 글은 그것들에 대한 나의 보잘것없는 분석이다.


먼저 이 작품의 심장을 가르는 주제, ‘책을 향한 사랑‘에 대한 두 겹의 점층적인 모순적 상황에 대해서다. 한탸는 폐지 압축공이다. 한탸는 소중한 인류의 자산이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한낱 종이 쪼가리로 취급받게 되는 책들을 파기하는 장본인인 동시에 그 책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겸비한다. 그는 파기되는 책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모으기도 하고, 읽고 온몸으로 흡수하기도 한다. 그 자신의 표현으로는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다. 마치 살인자가 인간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치 백정이 동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첨예한 모순 속에서도 한탸는 책 애호를 넘어 책을 수호하고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폐지 압축기라는 기계로 책을 파기하면서도 책이 상징하는 인간의 고유성을 지키는 존재. 이것이 한탸의 정체성이고 그가 처한 가장 근원에 깔린 모순적 상황이다.


사회주의 체제와 발달된 기술의 여파로 한탸가 사용하는 구형 압축기 시대는 저물고 그것보다 스무 배 효율을 낼 수 있는 신형 압축기가 도입되어 한탸는 필연적으로 직업을 잃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문명화, 기계화로 인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더욱더 냉소적으로 변해가고, 이에 따라 책은 점점 더 전통적인 가치를 상실해 간다. 구형 압축기를 사용하던 한탸는 비록 모순적이었지만 그나마 책을 수집하고 읽고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는 여유라도 있었다. 그러나 신형 압축기의 도입은 곧 한탸의 존재 자체를 근원에서부터 지워버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책을 파기하면서도 수호하고 구원하는 모순적인 역할을 감당하던 한탸는 종국에 가서는 더 이상 책을 파기하는 자가 아닌 파기되는 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책 파기자이면서 책 애호가, 수호자, 구원자의 위치를 넘어 결국 책 자체가 되어버리는 한탸의 강화되고 심화된, 그리고 비극적인 모순적 상황이다. 


이러한 두 겹의 모순적 상황은 작품 속에서 수차례 언급되는 상반된 운동법칙, 즉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미래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후퇴)이 점점 혼재되면서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미래로의 후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근원으로의 전진)도 모두 가능하며, 마침내 이 둘은 같은 것이라는 인식에 다다르는 한탸의 의식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한탸가 만지는 압축기에는 초록색과 빨간색의 단 두 개의 버튼이 있다. 기계를 앞뒤로 움직이게 하는 단순한 조종 장치다. 한탸에게도 처음에 미래는 전진하는 것이고, 근원은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을 파기하고 구원하는 모순적 상황 속에 자신을 계속 잠식시키면서 한탸에게 미래는 단순히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는 것이기도 하며, 근원 또한 후퇴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진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책을 파기하는 것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소중한 가치, 이를테면 인간성, 인간다움, 고상함, 고결함 등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책을 파기하는 행위는 후퇴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문명화와 기계화에 추진력을 얻어 효율이 증가하게 된다는 면에서는 미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미래로의 후퇴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책을 더 빨리, 많이 파기하라는 소장의 고함소리와 함께 들리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시시포스 같은 기계적 반복이 아닌 폐지 더미 안에서 활자가 담고 있는 인류의 지적, 정신적 유산을 흡수하는 행위는 미래가 아닌 근원을 향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또한 이 행위는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므로 후퇴가 아닌 전진이라 할 수 있다. 즉, 근원으로의 전진인 것이다. 한탸가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책이 가진 가치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백과사전 의미를 거뜬히 초월하여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존재론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외에도 모순을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들이 작품 속에는 많이 등장한다. 이것들을 찾아내어 생각해 보니 작품 이해를 위해 큰 도움이 되었다. 재독 하면서 내가 발견한 예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지상과 지하. 지상은 문명, 물질, 전쟁, 소란을 상징한다면, 지하는 낭만, 정신, 평화, 고독을 상징한다. 한탸가 구형 압축기로 작업하는 공간이 지하인 반면, 무미건조한 신형 압축기로 젊은이들이 효율 충만한 방법으로 책을 폐지 처리하는 공간은 지상이다. 우유와 맥주의 대조 역시 각각 지상과 지하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 우유는 책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유니폼 차림의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젊은이들의 양식인 반면, 맥주는 한탸의 정신적인 고양을 부추기고 디오니소스적인 낭만을 유지하는 인간 고유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맥주라는 알코올은 지하 작업장에서 한탸의 고독하면서도 은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제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탸의 지하 작업장에는 한탸 말고도 다른 생명체가 한탸와 동고동락하고 있다. 바로 쥐다. 일견 불결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쥐는 한탸가 일하는 작업장의 의미, 혹은 ‘근원으로의 전진‘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한탸의 작업장이 지상으로 대변되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작은 지하 공간이라고 볼 때 그곳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쥐가 들끓을 만큼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배제되고 소외된 공간이라는 의미를 띠게 만들기 때문이다. 근원으로의 전진이라는 형용모순적인 행동법칙은 다수가 아닌 극소수에게만 참인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는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 묘사되는 한탸의 비극적 운명일 것이다. 책을 파기하는 자가 아닌 파기되는 책으로 자신을 스스로 던져 넣는 한탸. 이 끔찍한 자살 장면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답은 묘연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한탸의 심정이 온전히 반영된 행위였다는 점이다. 7장 마지막 부분에서 한탸는 손목을 칼로 그어 자살을 행한 세네카의 환상을 보게 되면서 세네카의 사고가 정확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했다고 쓴다. 그리고 세네카의 자살은 자신의 저작인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를 쓴 것이 헛일이 아님을 입증했다고도 쓴다.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정은 타자와 세상의 시선에 맞춘 공허한 삶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위한 아낌없는 삶이 제공하는 만족이다. 그렇다면 세네카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평정에 다다랐다는 말인가. 한탸 역시 세네카의 뒤를 이어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었다는 말인가. 


8장 도입부에서 한탸는 카페 ‘검은 양조장’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홀로 세상을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한탸는 수심에 가득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 환상을 보며, 전진이 곧 후퇴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다는 말까지 한다. 한탸는 홀로 세상을 맞서지 못할 거라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걸까. 그래서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이지 않기를 결정했던 것일까. 자신이 늘 사용하던, 은퇴한 이후에도 구입해서 집으로 가지고 가려고도 계획했던 구형 압축기 안에 자신의 뇌뿐만이 아닌 몸뚱이 전체를 던져 넣음으로써 궁극적으론 포기를 선언한 것이었을까.


한탸는 그렇게 압축기 안으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 과정 모두를 기록한 저자 보후밀 흐라발 덕분에 한탸는 이렇게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 살아있다,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인간의 고유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책 속의 인물이 된 한탸 덕분에 우린 책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곱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나머지 상징들은 독서모임 ‘인생책방’에서 마저 나눌 계획이다. 각자의 고유한 생각을 나누는 풍성한 모임 덕분에 이 책에 대한 이해는 물론 우리 삶 또한 깊어지리라 확신한다. 또한 책은 나에게 무엇인지, 나는 왜 책을 읽는지, 나아가 내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질 계획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초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1020

* 재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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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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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컴플리케이티드 휴먼 네이처


스콧 스미스 저, ‘심플 플랜’을 읽고


결국 심플 플랜은 심플하지 않았다. 플랜이 아무리 심플할지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주체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편소설의 방점은 플랜이 아닌 플래너, 즉 인간에 있다. 플랜이 아무리 심플해도 절대 심플하게 처리할 수 없는 존재, 인간 말이다. '심플'은 '컴플리케이티드'를 가리키고, '플랜'은 플래너인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제목, '심플 플랜'은 '컴플리케이티드 휴먼 네이처'라고 나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한 시골 마을, 한 해의 마지막 날, 행크라는 이름의 화자는 자신의 친형과 형의 친구, 이렇게 셋이서 함께 우연히 추락한 경비행기를 발견하게 된다. 조종사는 이미 죽어 까마귀에게 눈알을 파 먹힌 상태였고, 바닥에 놓인 더플백 안에는 사백만 달러가 넘는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 하지만 평상시에는 이성적이기보다는 습관을 쫓아 살아가는 동물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약간의 스크래치를 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인간이 가장 이성적인 상황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된 일을 수습하려고 할 때가 아닐까 싶다. 평소에는 존재하는지조차 의식되지 않던 머리가 활발하게 돌아가는 순간, 우린 자신이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제삼자의 눈으로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 가끔 바보처럼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습관을 쫓아 살아간다는 건 다분히 감정에 이끌리는 생활 패턴을 가리킨다. 늘 해오던 대로, 편리한 대로, 쉬운 길로, 그것이 정의로운지 옳은지 이타적인지 도덕적인지에 대한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자신의 유익을 더하는 방향으로만 살아가는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방식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서게 될 때가 있는데, 그 생활 패턴은 지나친 탐욕으로 드러나게 되고 인간은 실수랄까 범죄랄까 하는 행동을 종종 하게 되는데, 나는 바로 이때가 이성이 최고조로 활동하게 되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은 일을 벌이기 전이 아닌 이미 벌어진 일을 처리하는 데 더 활발하게 사용되곤 하는 것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인 이 작품을 가득가득 메우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유익, 탐욕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 계획을 계속 수정해 나가며 일을 눈덩이처럼 부풀리게 되는 이야기. 그 과정 중에 아홉 명이라는 적지 않은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게 되는 스릴 넘치는 이야기. 놀라운 건 그 살인조차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합리화를 하며 그다지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만의 이기적인 목적을 완벽히 성취하기 위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읽을 때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주인공인 화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 그 심리 변화로 인한 행동의 변화, 그리고 그 행동의 변화로 인해 빚어지는 돌발적인 상황들을 수습해 나가는 일련의 모습들일 것이다. 


플랜이 아무리 심플해도 절대 심플하게 처리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탐욕 때문일 것이다. 탐욕은 왜곡시키는 힘이 있다. 그것에 의해 객관성은 증발되고, 이성 대신 감정이 더욱 우세하게 되며, 범죄에 대범해지게 되며, 급기야 모든 이성을 총동원하여 합리화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인간 심리의 변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도 우리도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기도 한다. 언제나 섬뜩함의 심연은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본성을 자각할 때이지 않은가. 비록 벽돌책이지만 페이지터너인 이 책을 나는 휴가 때나 휴일에 꼭 손에 들고 읽어보길 강력하게 추천한다.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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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0-14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벽돌책 소설이 마치 심리학이나 자기계발 이슈를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인간의 뇌는 원시 인류로부터 물려받은 생존 본능 때문에 익숙함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를 크리티칼 패스라고 부르는데, 행동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게 종종 오류라는 결과를 불러온다고 하더군요. 즉 이성적인 판단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Youngwoong Kim 2025-10-15 15:50   좋아요 0 | URL
네 인간의 본성을 깊이 파헤치는 소설은 모두 그러한 특징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몸글에도 적었지만 제가 보는 인간은 이성적이기보다는 습관을 쫓아 살아가는 동물인 것 같습니다. 그게 생존 본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이성적인 판단이 자기의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걸 선택하지 않는다는 게 저의 지론이고요. 그걸 해내는 사람만 존재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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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박과 대박 사이: 작가, 운명, 기적


폴 오스터 저, '빵 굽는 타자기'를 읽고


이 책을 손에 집어든 건 비단 문지혁 작가를 작가로 만든 문장,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를 직접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목 ‘빵 굽는 타자기‘의 원제 ’hand to mouth'가 내 관심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원제는 말 그대로 하루살이를 뜻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삶 말이다. 


작가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라는 문장을 잇는 다음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부분이 원제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동시에 폴 오스터의 담백한 심정을 잘 묘사한 것이라 생각한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 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각오도 되어 있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 물질적으로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었고, 내 앞에 가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겁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 것은 재능 (나는 이것이 내 안에 있다고 느꼈다)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어지는 문장은 작가의 이중 직업에 대해서다. 글만 쓰고 사는 건 금수저로 태어나거나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이 문장들뿐 아니라 이 책 저변에 깔려 있다. 이 일관된 논리를 작가는 선택되는 것이라는 문장과 연결시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필연적으로 탄생하게 된다. 


“작가는 쪽박 차게 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다.” 


이 간결한 문장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작가들이 공감할 수 있고, 또 많은 경우 자신의 삶에서 직접 체험한 적이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알기론 저 유명한 도스토옙스키도 생계형 작가였다. 폴 오스터 역시 시대만 다를 뿐 같은 족속에 속하는 작가였던 것 같다. 이 책은 폴 오스터의 자전적 이야기로써, 그의 작가로서의 시작과 초창기 무명시절의 일대기를 에세이로 쓴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두 가지 단어가 남았다. 하나는 자유, 다른 하나는 믿음이다. 두 가지는 모두 폴 오스터의 작가 초창기, 아니 그의 젊은 시절을 모두 아우르는 키워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자유라 함은 선택의 기로에서 그의 태도를 말한다. 이는 두 번째 단어인 믿음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에 인생의 연륜이란 걸 쌓을 순 없으므로 폴 오스터의 자유로워 보이는 선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라기보다는 근거 없는 믿음, 혹은 객기가 기반이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그는 어떤 규칙이나 의무에 묶여 있길 싫어했다. 자기 옷이 아닌 옷을 입는 걸 참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청소년 시기를 갓 벗어난 자가 어떤 옷이 자기 옷인지 아닌지 분별하기란 어려웠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수학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닌 영혼이 끌리는 일을 언제나 선택했다. 가까운 미래에 생계가 어려워지리라는 수학적인 계산 결과가 나와도 그는 입에 풀칠을 하면서도 읽고 쓰는 일을 선택했다. 어찌 보면 폴 오스터는 그의 현재 모습이 아닌 미래 모습에 대한 믿음을 그때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24년에 타개한 폴 오스터는 전 세계적인 대작가 반열에 그의 이름을 당당하게 올렸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실제 살아온 자유분방한, 동시에 현재 모습이 아닌 미래의 자기 모습에 대한 믿음을 기반한 삶을 "작가는 쪽박 차게 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다"라는 문장과 연결시키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폴 오스터는 작가는 쪽박 차게 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 삶을 선택했고 그렇게 살아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대박을 터뜨리는 운명의 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만약 폴 오스터가 무명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였다면 이 책은 출간되지도, 아니 써지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이제야 보인다. 자신의 하루살이 시절을 각색하여 책으로 만들었다는 건 그렇게 해도 충분히 괜찮기 때문이었다는 것. 즉, 무명 시절 하루살이 생활을 솔직하게 꺼내보아도 더 얻었으면 얻었지 잃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 말하자면 성공한 작가 스스로의 입을 빌린 자신의 어려운 시절 이야기는 오히려 작가의 생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인간미를 불어넣어 더욱 멋진 작가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며 폴 오스터의 초창기 시절을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많은 작가들은 위로와 공감을 얻는 동시에 희망과 용기도 얻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전업작가라는 단어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이 세상에 속한 단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요원한 직업인 것이다. 그것을 꿈꾸는 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무명작가 혹은 초보 작가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작가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폴 오스터처럼 자유와 믿음 (가난과 경험을 필수적으로 전제한다)의 자세로 삶을 살아가면 언젠간 성공한 작가가 되리라는 바람은 허황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운명처럼 폴 오스터에게 찾아온 만남과 기회의 기적이 전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폴 오스터 읽기

1.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 https://rtmodel.tistory.com/1788

2.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https://rtmodel.tistory.com/1791

3.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 https://rtmodel.tistory.com/1794

4. 굽는 타자기: https://rtmodel.tistory.com/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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