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살림)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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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조조 모예스 저, '미 비포 유'를 읽고


몇 년 전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가족과 함께 매주 서점에서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책 구경도 하고 한두 권씩 사기도 했다. 갈 때마다 매대에 놓여 있던 책이 있었다. 멋진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와 빨간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숙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사진이 책 표지에 띠지처럼 붙어 있었다. 상업성 짙은 3류 소설 티가 강하게 나서 나는 일부러 멀리 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책이 공교롭게도 '그믐'에서 진행 중인 웰다잉 오디세이 9월 도서로 선정되어 버린 것이다. 책을 중고로 구매해 놓고서도 한참을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 읽을 책들이 쌓여 있는 마당에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는 데 내 아까운 시간을 써야 하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믐 모임방에서의 여러 글들을 훑어보며 간을 보던 중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혹시 나의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좋은 작품을 코앞에 두고도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래서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적어도 십 분의 일 정도는 읽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스스로를 타이른 뒤 책을 펼쳐 들었다. 


나의 경솔한 판단이었음이 증명되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줄거리는 물론 설정과 결말까지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조조 모예스라는 낯선 작가의 문체와 필력에 감동까지 하면서. 역시 나 혼자만의 선택과 판단만 의지하면 많은 소중한 것들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사건이었다. 함께 읽기의 힘, 독서 모임의 힘은 그것들을 다년간 경험한 나조차도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신비인 것이다. 언제나 귀를 열고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던 부유한 엘리트 청년 윌 트레이너는 어느 비 오는 날 길거리에서 오토바이에 치여 치명적인 C4/5 척추 손상을 당한다. 가슴 아래, 그러니까 거의 전신 마비에 가까운 상태로 평생 고통 속에서 숱한 감염증에 시달리며 휠체어에서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겨우 연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의 삶은 오토바이 사고 전후로 나뉘었다. 오토바이 사고 전의 삶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누리던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이었다. 반면 오토바이 사고 후의 삶은 그렇지가 않았다. 물론 더 살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었다.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사는 게 오히려 고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손목도 그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의지는 충분히 스스로에게도 가족에게도 알린 셈이었다. 총명했던 그는 스스로 조력자살의 방법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는 실행에 옮기기 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부모에게 허락한다. 부모에 대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던 것 같다. 부모는 그 기간 동안 아들이 마음을 되돌리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우리의 주인공 루이자 클라크가 등장하여 활약하는 주무대가 된다.


윌 트레이너에 비하면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할 수 있는 루이자 클라크에게 윌의 남은 6개월간 간병인 역할이 맡겨진 건 운명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윌의 어머니 카밀라 역시 루이자에게서 뭔가 다른 인상을 받았던 걸로 보인다. 간병 경험이 전무하고 전혀 전문적이지 않아 보이는 루이자를 선택했던 건 카밀라의 신의 한 수였던 걸로 보인다. 카밀라는 끝까지 루이자에게 따뜻하지 않게 대하는데, 그건 루이자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카밀라가 자라온 환경 탓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과연 카밀라가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했다. 


이야기는 예상했던 대로 흘러간다. 처음에 루이자는 윌이 6개월 뒤 스위스로 가서 죽음을 선택하는 계획을 몰랐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찮게 윌의 가족의 대화를 엿들으며 알게 된다. 그리고 루이자는 즉시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 조력자살을 돕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니와, 자신의 간병 행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어떤 가치가 있는지 용납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갈 만한 이유를 발견하게 하고 윌을 행복하게 해주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결국 윌의 자살로 수렴한다는 사실은 제삼자인 나 같아도 끔찍하게 여겨졌을 것 같다.  


여동생과의 대화를 계기로 루이자는 마음을 오히려 바꿔 먹는다. 자기 때문에 말도 많아지고 좀 더 활발하게 변하고 있는 윌을 보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함께하면 윌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처리하는 것처럼 루이자는 윌의 부모와 간병인 네이선을 설득하여 여기저기 여행을 다닌다. 모리셔스 제도에서 며칠을 보내며 루이자는 자신의 계획이 얼추 이루어진 듯한 기분을 느낀다. 루이자는 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윌이 행복해하는 모습도 확인한다. 그러나 윌은 단호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미리 예고했던 6개월이 끝나고, 그러면 곧장 스위스로 가려는 계획을 루이자에게 실토한다. 윌은 루이자가 자신의 스위스행을 모르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루이자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기력함에 화가 났을 것이고, 윌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루이자는 윌이 계속 살아가길 그 누구보다도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윌은 오히려 루이자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고수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를 바로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자의 그 좌절감과 절망감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모두 앗아갈 만큼 컸을 것 같다. 반복되는 감염과 쉬지 않고 찾아오는 고통이 부수적으로 느껴질 만큼 말이다. 


루이자의 마음도, 윌의 마음도 모두 이해가 갔다. 삶에의 의지, 죽음에의 의지, 이 정반대의 마음이 교차하면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삶과 죽음의 정반대 되는 마음을 하나로 묶는 사랑. 결국 이 사랑 때문에 루이자는 한 발 늦게 스위스를 향하고 죽음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윌의 곁을 지킨다. 


정해진 레퍼토리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루이자가 되기도 하고 윌이 되기도 하면서 인간의 다양한 심리와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연민과 사랑, 삶과 죽음, 이성과 감정, 이런 대립되는 것들에 대한 사유도 진지하게 할 수 있었다. 


뻔한 이야기를 전혀 뻔하지 않게 전개해 나간 작가 조조 모예스의 필력에 박수를 보낸다. 여성 특유의 문체도 곳곳에서 통통 튀어나와 읽는 재미를 더했다. 지극히 현대적인 소설이지만, 고전 같은 느낌을 선사해 준 참 드문 작품이었다. 


참고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윌이 아닌 루이자다. 꺼져가는 윌의 생명이 루이자에게 전달된 덕분에 루이자가 성장하는 이야기라는 축을 놓치면 안 된다. 아마도 6개월 동안 루이자 덕분에 윌이 행복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자기의 도움으로 루이자가 알을 깨고 나와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 부분이 묵직하게 강조되는데 소설의 마무리로써 완벽한 감동을 주었다.


#살림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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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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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연민이란


슈테판 츠바이크 저, ‘초조한 마음‘을 읽고


"병신 같은 새끼!" 


책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몰입해서 읽은 장편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며칠간 나는 이 소설 속 세계에 한 발을 담근 채 일상을 보냈다. 사유하지 않는 독서는 쇼츠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내게 이 소설은 적시에 내린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한국어 제목 ‘초조한 마음’은 독일어 원제 ‘Ungeduld des Herzens (마음의 초조함 혹은 조급함)’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어떤 작품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츠바이크가 사용한 ‘초조한 마음’이란 진정한 연민과 대조되는 감정으로써 가식적인 혹은 이기적인 연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 말을 뒤집으면, 가짜 연민은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진정한 연민이 타자를 향한다면, 초조한 마음, 즉 가식적이거나 이기적인 연민은 나를 향한다. 겉으론 비슷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연민의 진정성은 그 감정이 얼마나 이타적인지에 달려 있는 것일까.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감정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연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 걸까. 이 소설은 내게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나름대로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외형은 안톤 호프밀러라는 소위 직급의 장교가 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접경 부근에 위치한 부대와 그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케케스팔바 저택을 배경으로 벌이는 비극적인 로맨스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는다면 그건 이 소설의 작가가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츠바이크의 메시지는 언제나 외형에 있지 않다. 그 어떤 작가보다도 인간 내면의 심리를 해부하고 폭로한다. 이 소설 역시 단순히 한 건장한 남자와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한 소녀와의 개별적인 관계가 아닌 그 이면에 놓인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에 주목한다. 나 역시 며칠간 호프밀러 소위가 되어 초조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미쳐버릴 정도로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체감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병신 같은 새끼!"라고 했겠는가. 


밑줄 긋고 별표까지 친 문장이 있다. 246페이지에 나온다. 이 소설의 본질을 꿰뚫는 동시에 츠바이크의 메시지가 잘 드러난 부분이라 생각한다. 다음과 같다. 


|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사악함이나 잔인함이 아닌 나약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


나약함이 악의 뿌리라도 되는 것 같은 뉘앙스다. 소설을 읽지 않고는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나약함에 대한 인간의 선입견은 우유부단이나 어리석음 정도는 모를까, 좀처럼 악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저 문장이 얼마나 깊이 박힌 못처럼 중심을 관통하는 문장인지 알게 될 것이다. 


책 뒤표지에도 소개되어 있고 작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따로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추출한 문장도 가져와본다. 236페이지에 나온다.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 대한 정의와 나약함의 의미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


두 연민, 그러니까 진정한 연민에 대비되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앞에서 내가 말한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연민이다. 작품 속에서 츠바이크는 진정한 연민을 실제 삶으로 보여준 콘도어 박사의 목소리를 빌려 가짜 연민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호프밀러의 귀에 박히도록 또렷이 말하고 있다. 가짜 연민을 수식하는 단어는 나약한, 감상적인, 도피적, 이기적, 가식적, 자기중심적 등인데 이것들이 츠바이크가 말하는 초조한 마음의 실체다.


나약함 (인간의 약한 마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들었던 작품이 떠올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 중 하나인 '약한 마음'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약한 마음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과 비교하면서 인간의 약한 마음이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 어떤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지, 누구를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재미 삼아 따져보면 좋을 것 같아서 아래에 시도해 본다.


먼저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서 말하는 나약함의 본질은 타자의 시선과 책임으로부터 회피하고 도피하려는 감상적이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연민이다. 걷지 못하는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에게서 뜻밖의 사랑 고백을 받은 뒤 호프밀러는 단순히 장애인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을 평판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밖에 없다고 고백한 에디트의 간절한 마음을 의도적으로 뿌리치고 계속해서 도망을 선택한다. 그 결과로, 호프밀러 스스로도 예측했듯이, 에디트는 높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딸 밖에 없던 케케스팔바 노인 역시 에디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는다. 반면 호프밀러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자 마침 터진 전쟁(1차 세계대전)으로 도피하여 위험한 임무도 가리지 않고 수행한다. 신의 뜻인지 호프밀러는 죽지도 않고 전쟁 영웅이 되어 훈장까지 받으며 제대한다. 호프밀러의 나약한 마음은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 처음에 에디트에게 다가갔던 이유는 전적으로 값싼 동정심과 남들로부터의 평판 때문이었다. 그 이후 전개되는 모든 일들에서도 호프밀러는 한결같이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사수했다. 비록 그때마다 치열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언제나 최종선택은 에디트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에디트를 죽음으로 이끌었고 케케스팔바 가정의 파멸을 가져왔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약한 마음'에서 말하는 나약함의 본질은 자신에게 쏟아진 행복과 호의에 대한 과도한 중압감과 죄책감이다. 리자와의 약혼에 성공한 가난한 하급 관리 바샤 슘코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행복에 짓눌린 인물로 나온다. 상사의 총애 속에서 단순한 서류를 필사하여 마감하면 될 일을 끝까지 하지 못한 채 결국 미쳐버리고 마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등등의 언뜻 겸손해 보이는 생각들이 점점 망상이 되고 집착이 되어 스스로를 갉아먹는 파괴력까지 갖게 되는 과정을 우린 이 짧은 소설을 통해 관찰할 수 있다. 


츠바이크가 말하는 나약함은 가짜 연민의 실체다. 호프밀러는 장애를 가진 에디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선의를 베풀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의 연민은 타자의 고통을 보고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과 부끄러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나약한 마음으로 무책임하게 에디트와 약혼까지 해버린 호프밀러는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사회적 평판을 견디지 못한 채 결국 약혼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고 도망쳐 버린다. 호프밀러의 연민이 가짜이자 나약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책임감과 희생의 결여일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진심으로 연대할 용기도 없으면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위선, 자기는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으면서 뭔가를 크게 기여한 주인공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는 이기적이고 뒤틀린 마음이 결국 타자의 파멸을 불러온다는 것을 츠바이크는 이 작품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나약함은 자학적일 정도로 과도한 양심의 실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지나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주인공 바샤는 너무나 착하고 순수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닥쳐온 갑작스러운 행복 앞에서 얼음이 되어버린다. 최고로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그에겐 치명적인 공포의 순간으로 둔갑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상사의 숙제를 끝내려 하는데, 그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과도한 책임감과 자격지심이 그를 마비 상태로 내몬 것이다. 바샤의 나약함은 비대해진 도덕감과 자기 부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타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망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과 잘못된 죄책감이 그를 불안으로 몰았고 광기 어린 파멸로 이끌었던 것이다. 


츠바이크의 나약함과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의 외형은 비슷해 보인다. 둘 다 선의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츠바이크의 나약함은 타자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도망치려는 자기중심적 나약함인 반면,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은 타자으로부터 주어진 사랑과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자신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타자중심적 나약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나약함은 결국 타자의 파멸을 이끌었고,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은 자기 파멸을 가져왔다. 


앞에서 진정한 연민의 방향성은 타자를 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을 살펴본 결과 단순한 방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방향뿐 아니라 세기도 중요한 것 같다. 한 마디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너무 자기중심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타자중심적이어도 안 된다. 양 극단은 인간의 나약함이 자리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건을 하나 달면 어떨까 싶다. 진정한 연민은 자기가 아닌 타자를 향하되 자기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진정한 연민은 정말 애매모호한 경계선 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칫하다 연민은 타자를 해칠 수도 있고 나를 해칠 수도 있다. 연민은 양날을 가진 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연민이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연민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짐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축복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다움의 중심에도 연민이 자리할 거라 나는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항상 책임과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 책임과 희생이 부재한 연민은 타자를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값싼 동정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임과 희생이야말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6.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https://rtmodel.tistory.com/1923

7. 위로하는 정신: https://rtmodel.tistory.com/2088

8. 초조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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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희망사전 다시 읽는, 복 있는 사람 3
프레드릭 뷰크너 지음, 이문원 옮김 / 복있는사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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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용어에 생기를


프레드릭 비크너 저, '통쾌한 희망사전'을 읽고


박제된 교회 용어들에 신물이 날 때마다 더럭 겁이 났던 이유는 내 신앙이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라 공중에 붕 뜬 채 냄새도 맛도 나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유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안전지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신앙은 변화시켜야 할 세상을 어떻게든 도피할 장소로 여기게 만든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다. 진공 속에서 위로와 치유만 선사해 주는 게으른 마법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단순한 지적 동의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삶의 기준이자 렌즈로써 그것을 실제 몸으로 살아내는 모든 실천을 포괄한다. 반면, 종교적인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삶을 변화시킬 힘이 전혀 없는 신앙은 살아있는 생명력과 실천을 잃어버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신앙, 즉 박제된 신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있는 이들은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자신의 신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박제화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으면 결국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는 신앙으로 전락되고 말지도 모르니까.


익숙하던 모든 것들은 의심할 가치가 있다. 그것이 설사 나를 살려주었던 믿음과 신앙이라도 마찬가지다. 의심은 믿음의 적이 아니다. 의심은 믿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게 한다. 의심의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지 못한 믿음은 확신의 죄에 빠진 채 미풍에도 쉽게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교회 용어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익숙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늘 같은 단어, 같은 문장, 같은 맥락의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똑같은 예배를 하고 똑같은 주일을 보내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가 주신 평안은 단순히 기계적인 익숙함이 아닐 것이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풍지대는 평화가 아닌 죽음의 장소일 뿐이다. 


비크너의 '통쾌한 희망사전'을 두 달에 걸쳐 천천히 읽으며 무미건조하고 무채색이었던 내 신앙의 단면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익숙함에 젖어 그것이 마치 안전한 평화이자 건강한 신앙인 것처럼 나 자신을 별 문제없는 신앙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비크너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 폐부를 찔러 쪼깨는 힘이 있다. 평범하게만 보이는 그의 문장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어느새 나는 그 안에서 의도된 하나님의 신비를 경이와 함께 보게 된다. 평범 속의 비범, 비크너의 매력 포인트이지 않을까. 


다양한 교회 용어들에 대한 비크너 나름대로의 정의를 사전식으로 부여한 책이다. 그렇다고 주관적이지만은 않다. 객관을 전제로 한 주관이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사전 편찬자인 비크너 개인의 신앙이 더욱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사전적 정의들은 허를 찌르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며,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다가, 깔깔대며 웃게도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반응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깨어 있게 한다. 가나다 순으로 이뤄져 있다.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궁금한 단어가 위치한 곳을 찾아 발췌독을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단어들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크너는 그런 작가이다. 그의 매력은 이런 사전식의 책에서도 여전히 통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 프레드릭 비크너 읽기

1. 주목할 만한 일상: https://rtmodel.tistory.com/762

2.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https://rtmodel.tistory.com/1059

3. 진리를 말하다: https://rtmodel.tistory.com/1783

4. 통쾌한 희망사전: https://rtmodel.tistory.com/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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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작법 수업
이기원 지음 / 오늘산책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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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팔리는 이야기, 그리고 좋은 이야기


이기원 저,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를 읽고


책을 펼치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영업 비밀을 누설하는 책이구나! 비밀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은 조심스럽게 흥분이 되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는 사람처럼 각성된 상태로 나는 이 책을 새벽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라는 화려한 제목에 낚인 건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책을 펼치고 단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그건 착각 혹은 괜한 의심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정말 제목처럼 나도 더 잘 쓸 수 있겠는걸'하는 생각이 곧 실현될 믿음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뭔가 아주 중요한 무기를 장착하여 업그레이드된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이 책은 부제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작법 수업'에 아주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작법서를 탐독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나조차도 이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공식화된 메시지는 아주 적확하고 유용했으며 시원하기까지 했다. 물론 주요 타깃은 순수문학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를 향하지만, 이 모두가 스토리텔링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기에 소설을 쓰고자 애쓰는 모든 작가에게도 이 책의 내용은 지극히 유효하다. 특히 어떤 인사이트 한두 개에 의지하여 그동안 글을 써오거나 작중 인물이 하는 말에 이끌려 어느 정도 쓰다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 한치도 진전이 없어 글 전체가 흐지부지해진 경험을 해본 작가들에게는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다. 


로그라인, 주제, 하이 콘셉트로 서사의 나침반을 삼고, 주인공, 매력, 감정 이입, 딜레마, 적대자, 조력자, 멘토로 서사의 엔진을 삼으며, 영웅 서사와 패러다임 이론 등으로 서사의 구조를 잡고, 핫 버튼을 잘 찾아 눌러서 서사를 완성하여 성공시킨다는 저자의 가르침을 읽고 지지부진하던 내 소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빈틈이 보이는 것 같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었는지, 무엇이 빠져있었는지 알 것 같다. 이 책은 빛이 되어 내게 드리워진 어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드러나게 해 준 것이다. 고마운 책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메시지들이 성공할 수 있는 스토리, 즉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이 될 수 있고, 책은커녕 긴 동영상도 집중해서 보지 못하는 요즘 시대 사람들(대중)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서 뭔가 서운하고 아쉬운 감도 있다. 잘 팔리는 이야기, 요즘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이야기가 어떤 건지는 충분히 알겠고 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도 알겠는데,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렇게 쓰면 시대를 초월하여 남는 이야기일 수는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은 여전히 답이 없는 채로 내 안에 남아 있다. 결국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에서 말하는 '잘'은 '돈이 되고 요즘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이라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니, 나의 반가운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오늘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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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우는 시간 -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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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저,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읽고


죽음은 언제나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특히 주위에 죽어가는 사람이나 최근에 죽은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고, 나도 언젠간 죽는다는 걸 알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대부분 우리들의 현실이다. 이 책은 코로나19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짧은 기간에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어가고 있는 시점에 쓰였다. 저자 역시 의사이고 일반인과 달리 상대적으로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가 가져온 '비일상' 앞에서야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2026년 여름이다. 코로나19가 지구를 휩쓸고 간 지 불과 4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다시 인간들은 망각이 일상인 듯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일상 아닌 일상으로, 그 익숙한 거짓된 세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아, 우린 언제쯤 철이 드는 걸까. 죽음을 멀게 느끼지 않고 겸허하고 낮은 마음으로 죽음을 진지하게 배울 수 있기나 한 걸까. 또다시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을 겪어야 가능해질까. 


누구나 죽음을 겪게 되지만, 아무나 죽음을 공부하진 않는다.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관심을 가져왔지만, 정작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 순서상 죽음 이후보다 죽어가는 과정이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죽음에 대한 무지.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이다. 공부 못하는 걸 그렇게나 부끄러워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죽음에 대해 모른다는 건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죽음이 한 발자국 현실로 침투한다.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준비해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준비하는 과정이 어떠해야 바람직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비로소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저자는 이 시대가 죽음을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점점 더 부자연스러운 사건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의료의 실패로, 의료의 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쓴소리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삶을 마치는 것도 모자라 적어도 서울대학병원을 포함한 소위 빅4 병원(서울대학교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정도는 되는 곳에서 삶을 마쳐야 제대로 보냈다는(혹은 보내졌다는) 인식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도 죽음은 찾아온다는 것을 이 책의 가장 첫 메시지로 던지는 저자는 이러한 뒤틀린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준비 과정을 현실적으로 차근차근 알려준다. 덧붙여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부할 수 없는 묵직한 말을 하면서 병원의 '죽음 비즈니스' 실태를 보여준다. 이어서 "자,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평소에 죽음을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숨을 죽이고 자리에 앉아 진지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웰다잉은 낭만적이지 않다. 이 책 덕분에 죽음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33만여 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지만 그 뜻에 따라 생을 마감한 경우는 725명에 불과했다고 저자는 쓴다. 지금은 나아졌을지는 몰라도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은 10퍼센트대로 올라왔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4년 전(혹은 더 과거)에는 겨우 0.2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알다시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나중에 아파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문서로 남겨두는 법적 효력이 있는 공식 문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정부가 지정한 공식 등록기관을 방문하여 작성해야만 하고, 건강한 사람을 포함한 만 19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문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그대로 실천 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는 병원 측에서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법적인 책임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 환자의 가족들과의 반대나 소통의 부재, 임종기와 말기에 대한 모호한 기준으로 인한 판정의 연기 등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병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죽음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되고 말며, 생사결정권을 병원에 넘겨주게 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쓴다. 참고로 나는 인공호흡기를 단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연명치료와 완화의료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꼭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연명치료는 죽음의 각 단계에 나타나는 증상들을 모두 치료해야 하는 질환으로 보는 반면, 완화의료는 이 모든 증상을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그 과정에서 환자가 통증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것을 최소화하는 치료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흔히 완화의료라고 하면 환자를 포기하는 치료 정도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큰 오해라고 한다. 존엄한 죽음, 사람다운 죽음, 아름다운 죽음 등 웰다잉은 연명치료에 있지 않고 완화의료 쪽에 기울어져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의 개혁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당사자나 그 가족들만이 아닌 병원 관계자들까지 모두 죽음을 질병이 아닌 삶의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자연스러운 관점을 견지했으면 한다. 존엄한 죽음은 결코 방치한 죽음이 될 수 없다.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행위는 결코 죄를 짓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와 맞물려 이제는 어느덧 죽어가는 부모를 향한 효도의 정석이 되어가는 듯한 빅4 병원 중환자실행은 결코 바람직한 마무리가 될 수 없다. 이런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문화가 자리 잡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참고로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의 엔딩노트가 에필로그로 달려 있다. 지금은 건강한 저자가 자녀에게 쓴 유언 같은 글이다. 연명치료 여부, 장례 절차,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 등이 특정한 양식 없이 기술되어 있다. 나는 아직 유언장을 써본 적이 없다. 올해엔 이 엔딩노트를 참고로 하여 나도 이런 글을 한 번 써볼 생각이다.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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