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하나님 -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할까?
존 레녹스.케이티 모건 지음,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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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하나만 선택할 필요 없다


존 레녹스, 케이티 모건 공저, '과학과 하나님'을 읽고


손에 딱 잡히는 판형에 걸맞게 한 시간 채 걸리지 않아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 독자의 시선은 달라지는 법이기에 나는 책을 읽은 후에는 읽기 전에 놓친 게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도 그 오랜 습관을 좇아 책을 덮고 앞표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왼쪽 위에는 이중나선 구조의 DNA가 보이고, 오른쪽 위에는 토성 같아 보이는 띠를 두른 행성 하나가 그려져 있다. 각각 생물학과 천체물리학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는 기원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기원 말이다. 오래전부터 이 문제는 과학만이 아니라 종교도 깊이 관여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이 문제는 질문으로 남았다. 과학은 무에서 유로의 생성을 설명할 수 없고, 종교는 이성을 초월하는 신앙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이해가 깊은 얕든, 종교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기원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 과학은 일반계시 영역인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설명한다. 신앙은 특별계시 영역인 성경을 읽고 믿는 자들의 반응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연과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두 개의 책으로 고백한다. 저자가 한 분이시기에 두 책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과학을 통해 자연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경이를 느끼며 찬양할 수 있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수용하여 삶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양립 가능하며 서로가 상호보완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그러나 과학이 아닌 '과학주의'의 등장과 순수한 신앙이 아닌 하나의 폭력적이고 전제군주적인 주류 세계관으로의 변질로 인해 (이를 편의상 '신앙주의'라고 하자) 과학과 신앙 사이에는 마치 거대한 틈이 생겨난 것처럼 오인되었다. 과학주의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우기는 세계관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에 과학과 신앙은 과학주의와 신앙주의라는 두 세계관의 대립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주의의 오류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또한 과학을 통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신앙은 틈새의 신 논리로 인해 과학이 더욱 발전하면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말 거라고 보는 시선, 그리고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불안과 공허를 달래기 위해 창조해 낸 정신승리의 도구 같은 것으로 보는 시선에서도 비롯된다. 반면 신앙주의의 오류는 과학주의가 아닌 과학을 적으로 삼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적인 신앙관과 직결되며, 믿음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비합리적이고 반지성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데에서도 비롯된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학과 신앙의 대립은 알고 보면 과학주의와 신앙주의의 대립인 것이다. 과학과 신앙은 대립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것은 존 레녹스의 일관된 메시지이기도 하다 (저 유명한 '주전자 비유'를 떠올려보라).


사족이 길었다. 앞표지로 돌아가자. 행성 바로 아래에는 피사의 사탑이 보이고, 그 아래 중간쯤에는 한 사람이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모두 갈릴레오를 상징하는 듯하다. 피사의 사탑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무게가 다른 두 공을 동시에 떨어뜨려 자유낙하 실험을 했다고 알려진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이 실험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선 중요하지 않다. 실험이 아닌 실험자 갈릴레오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존 레녹스는 갈릴레오의 이단 재판 사례를 언급하며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갈릴레오와 의견을 달리 한 사람들은 교회 관계자들만이 아니라 먼저는 대다수 다른 과학자들이었다는 진실을 공개한다. 즉,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처럼 보이는 갈릴레오 사건은 과학자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빚어진 사례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갈릴레오는 이단 재판 전후 상관없이 평생 하나님과 성경을 믿었다. 


앞표지 왼쪽 중간에는 성경으로 보이는 책이 펼쳐져있다. 종교, 신앙, 하나님 등을 상징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맨 아래쪽엔 저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따온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을 상징하는 두 손이 그려져 있다. 내게 이 그림은 마치 존 레녹스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성을 주셔서 과학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탐구하여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양하길 원하신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근원적인 사실을 다시 한번 짚는 역할도 한다. 


이 책에는 존 레녹스 특유의 쉬운 설명으로 과학, 신앙, 믿음, 기적, 증거 등의 개념들을 짚어가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불필요한 오해를 풀어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부제는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할까?'인데, 그에 대한 결론으로 저자는 과학과 신앙은 양립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여러 책에서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책은 특히 아기자기한 사이즈와 어울리게 독자들이 좀 더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호기심이나 의문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부터 손에 들어도 손색이 없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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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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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그러나 공감할 수 없는


스즈키 유이 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읽고


무명 혹은 신진 작가에게만 주어지는 아쿠타가와 상을 거머쥔 이 유명한 작품은 평론가를 포함하여 여러 매체와 지면에서 칭찬 일색이었다. 그것들을 보고 나는 의문이 들었고 직접 확인하고 싶어 수개월 전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 단순히 이 책이 왜 유명한지가 아니었다. 언론을 도배한 글들은 작품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작가의 젊은 나이와 그의 독특한 이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작품에 대해서는 어디서 베꼈는지 대동소이한 몇 줄로 일축되어 있어 도저히 이 소설이 어떤 작품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량도 길지 않을뿐더러 마침 배송비 무료 혜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주어져 덥석 구매하고 말았다. 


액자식 구성의 이 소설의 도입부는 흥미를 유발했다. 주인공 격이나 다름없는 도이치 교수가 식사 후 차를 마실 때 티백에 달려있는 글귀 (마치 포츈 쿠키 안에 있는 문구를 떠올리면 될 듯하다)를 읽게 되는 사건이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다. 괴테의 명언이라고 쓰여있었지만, 정작 괴테 전문가인 도이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 사소한 사건이 전체 이야기를 이끄는 주동력이 된다. 그리고 책의 결말 부분에 다다르도록 그 글귀의 출처를 찾아 나서는 도이치에게 저자는 초점을 맞춘다. 이 부분에서 나는 참신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런 도입부로 도대체 어떤 결말을 선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지성적으로는 흥미를 보였지만, 감성적으로는 벌써부터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 글귀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기본적인 서사이지만, 다행히 이 소설은 단지 이 서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찾아가는 과정 중에 그 글귀, 그러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가 도이치의 삶에서 실현되어 가는 잔잔하고도 훈훈한 이야기가 주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 끝에서도 도이치는 끝내 그 글귀의 출처가 괴테인지에 대해서는 묘연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도이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아내와 딸, 사위와 직장동료, 장인과 옛 친구들과의 소통을 통해 도이치는 모든 게 다 연결되어 있다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글귀의 기원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가 그걸 말했든 그 글귀가 도이치 자신의 마음으로 고백되고 입으로 시인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여러 소설적 장치들이 치밀하게 짜여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 기술적인 면에서 이 소설은 좋은 점수를 받을 만했다는 데에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유명인들이 쓴 고전들과 명언들이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기이한 장면들 앞에서 나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여러 언론에서 공통적으로 이 소설이 지적인 유희를 제공한다고 쓰고 있는데 나로서는 오히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이 책에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물론 그것들을 다 미리 알고 있어야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몰라도 된다. 맥락만 파악하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세상이 나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다. 요컨대 내게 이 소설은 핍진성은 높은 편일 수 있겠지만, 개연성은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의 눈으로 봤을 때 이 소설은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 느낌은 수백 년 전에 쓰인 고전소설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낯섦이었다. 


추천할 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짧아서 다행이었다. 하긴 길었으면 중도포기했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추천한 신형철과 이동진의 코멘트도 내겐 변죽만 울리는 듯했다. 만약 이 책이 아쿠타가와 상을 받지 못했다면 과연 그런 추천사를 쓸 수 있었을까 싶은 의구심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


#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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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재수사 1~2 - 전2권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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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적인 빌드업이 돋보이는 범죄소설


장강명 저, ‘재수사’를 읽고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여는 이 문장들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책을 두 번 이상 정독했지만, 주인공의 사상이 듬뿍 담긴 1부를 여전히 나는 다 이해하지 못한다. 2부를 거울삼아 다시 1부로 돌아왔을 때 그나마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장강명의 ‘재수사’를 펼치자마자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라는 렌즈를 착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결코 예사롭지 않겠구나, 하고 예감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문장이 이어진다. “나는 22년 전에 사람을 죽였다. 칼로 가슴을 두 번 찔러 죽였다.”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살인자다. 스스로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백한다. 따지고 보면 ‘지하로부터의 수기’ 주인공보다 더 진화한 캐릭터인 것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주인공은 살인을 할 만큼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찌질하고 허세 저는 캐릭터였고, 자신의 독단적이지만 이론적이고, 대단한 것 같지만 가소로운 사상 속에 갇힌 옹졸한 몽상가 축에 속했다. 그런데 ‘재수사’의 주인공은 범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살인을 하고도 태연하게 회고록 따위를 쓰면서 살인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22년이나 지난 현재 시점까지. 이 설정 하나만으로도 나는 소름이 돋았고 긴장이 되었다.


뿐만 아니다. 세 번째 꼭지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도 언급된다. 다음과 같다. “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거울상이다. 나는 내가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획 없이 살인을 저지른 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토록 되고 싶어 했던 비범인이 되었다. 원치 않게, 서서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이 같은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찍어 살해하고 곧바로 자신이 범인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재수사’의 주인공은 이를 뒤집은 것이다. 주인공은 라스꼴리니꼬프와는 달리 아무런 살인 계획이 없었다. 테스트해 보고 싶은 사상도 없었다. 그저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을 뿐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계획 후 실행으로 자신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여 비극에 휘말렸다면, 이 주인공은 실행을 먼저 해 버린 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비범인이 되어버린(혹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사상은 객관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저지른 범행을 묵인하고 나름대로의 합리화된 변명이 필요했을 테니).


라스꼴리니꼬프와 이반 카라마조프를 비교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라스꼴리니꼬프보다도 못했다. 자기가 직접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 때문에 무너졌다.” 그리고 한 술 더 뜨는 문장. “아마 도스토옙스키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어서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무리 대문호라 한들, 살인자에게도 일상이 찾아온다는 진리를 알 수 없었을 테니.” 아… 말문이 막혔다. 주인공의 거침없는 문장들은 분명히 주인공이 ‘지하로부터의 수기’ 주인공보다 더 지능적이며 더 계몽되었으며 더 현실적인 캐릭터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총 백 꼭지로 이뤄진 이 소설의 홀수 꼭지는 주인공의 회고록이고, 짝수 꼭지는 주인공이 22년 전에 범했으나 미제로 남은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는 (결국 주인공을 22년 만에 범인으로 잡는) 형사들의 이야기다. 홀수 꼭지는 비교적 짧은 대신 ‘지하로부터의 수기’ 1부만큼은 아니지만 난해한 편이고, 짝수 꼭지는 소설 전반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축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장단의 리듬의 타며 읽어가도록 설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리듬을 과연 독자들이 얼마나 잘 타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갈 수 있을지 나는 솔직히 우려가 되었다. 홀수 꼭지를 읽고 다 이해하는 독자는 아마도 거의 없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 엘리트 지식인층에 속하지 않았을까. 그걸 다 이해하려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뿐 아니라 5대 장편들도 꿰고 있어야 하고,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계몽주의 등의 철학 및 사상들의 골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짝수 꼭지를 읽을 땐 장강명 특유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듬뿍 담긴 르포르타주식의 소설 맛을 만끽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손에 든 절반 이상의 독자들은 홀수 꼭지는 초반에나 읽다가 중반부터는 대충 읽거나 건너뛰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나도 도스토옙스키 관련 내용은 흥미롭게 읽고 감탄을 했지만, 철학과 사상, 특히 장강명 작가가 만들어낸 ‘사실-상상 복합체’ 개념을 풀어놓을 땐 자주 집중력을 잃어버렸고 읽었던 곳을 읽은 줄도 모르고 또 읽기도 했다. 책을 읽어 나갈 때 저자가 쓴 텍스트들이 나를 관통하지 않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 같은 느낌은 결코 유쾌하진 않은데, 이런 경험은 이 책을 완독 하기 위한 필수 코스이지 않나 싶다. 


반면 짝수 꼭지는 정말 재밌다. 중간쯤 살짝 긴장이 풀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그러니까 범인 색출에 점점 가까이 갈수록 이 책은 페이지 터너가 되었다. 혼자 밥 먹으면서도 계속 페이지를 넘길 만큼. 장르를 따지자면 범죄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 이 소설은 긴장과 스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어떤 부분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눈앞에 그려지기도 했다. 장강명 작가의 필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반전도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수상하다 싶었던 인물이 범인으로 드러나 그렇게 놀라진 않았지만 (나름 추리소설로 독서의 세계에 입문했다는 게 도움이 되었던 걸까),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 용의자를 체포할 때 이야기가 끝난 줄로 알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 부분에서 오히려 그게 연막이라는 걸 알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대충 짐작하고 읽어도 정말 끝까지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만큼 잘 쓰인 작품인 것이다. 


홀수 꼭지가 없었다면, 그러니까 짝수 꼭지만으로 이 소설이 구성되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뭐 그래도 전체 이야기를 파악하는 덴 큰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이 소설의 가치가 현격히 떨어진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소설의 절정과 결말까지 가는 빌드업이 약해진다는 것. 이 소설은 범인의 고백부터 시작하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정체가 드러난다. 회고록의 절반 이상은 주인공의 철학 및 사상을 설파하는 내용으로 이뤄지지만, 중간중간 단서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것들을 수집하는 재미와 그것으로 주인공의 정체를 추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쓰인 짝수 꼭지만으로 추리 과정을 거치는 것과 범인의 독백을 도움 받아 추리 과정을 거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외형적인 서사에서 안으로 서서히 좁혀가는 방식과 내면적인 독백에서 점점 자신의 정체를 밝혀가는 방식이 조화롭게 춤을 추며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입체적인 빌드업을 경험하며 나는 쫄깃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인데, 이 소설이 중후함을 주는 요인은 짝수 꼭지가 아니라 홀수 꼭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회고록은 얼마나 주인공이 비뚤어져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능을 충실히 담당하는 동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비뚤어진 이유에 대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주인공이 살인자가 된 것도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지 않도록 만드는 역할도 담당한다. 사회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시스템의 문제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장강명 작가의 숨은 메시지가 홀수 꼭지에 많이 담겨 있다는 말도 된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우리나라의 ‘형사사법시스템’과 장강명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말하는, 이 시대 한국 사회가 깊이 내재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제인 ‘불안’과 ‘공허’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정확히 짚고 공론장에 올리기 위해 전직 기자 장강명의 르포르타주식 글쓰기와 소설가 장강명의 허구적 상상력이 만나 쓰인 열매가 바로 이 작품 ‘재수사’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미래의 독자에게 조언을 한다면, 홀수 꼭지에서 난해한 부분이 나와서 이해가 안 가더라도 적어도 맥락만은 파악하겠다는 마음으로 절대 건너뛰지 말고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홀수 꼭지와 짝수 꼭지의 리듬과 화음이 이 소설의 중추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고 충분히 맛보며 작품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묵직한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장강명 작가가 이 정도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더 써주었으면 한다. 우리나라엔 그런 작품이 필요하다.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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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 일기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3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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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수도원


헨리 나우웬 저, '제네시 일기'를 읽고


이 책은 헨리 나우웬이 일곱 달 동안 머문 제네시 수도원에서 거의 매일 써나갔던 기록이다. 그는 1974년 6월부터 12월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제네시 수도원은 기도와 참회, 침묵과 노동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전 세계에 흩어진 약 85개의 가톨릭교회 소속 트라피스트 수도원 중 하나로써 미국 뉴욕주 북부 피파드에 위치한다.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 헨리 나우웬은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성찰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지내기보다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기도에 관한 글을 쓰기에 바빠서 기도할 여유가 없었는지 모른다. 주님의 사랑보다 인간의 칭찬에 관심이 많았는지 모른다. 거룩한 언약에 기대어 자유를 누리기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기대에 얽매인 죄수 신세로 전락했는지 모른다." 그는 삶에서 뒤로 물러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쓴다. 영적으로 갈급한 상태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도중 잠시 들린 켄터키 주에 위치한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우연찮게 존 유드 신부와 만나게 된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의 축복이었다. 헨리 나우웬은 존 유드로부터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뛰어난 통찰력과 따뜻한 마음을 갖춘 영혼의 안내자'로서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그 후 유럽에서 3년간 머물던 시기에 존 유드 신부가 제네시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렇잖아도 삶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탓에 그는 짧은 기간이라도 좋으니 존 유드 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단기수도사로 생활할 수 있는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존 유드 원장으로부터 예외적인 상황이지만 일곱 달 동안 수도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 헨리 나우웬에게는 예기치 못한 축복이었을 것이다.


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책을 다 읽는 데에는 약 1년이 걸렸다. 정작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다 합치면 10시간 정도 되겠지만, 한 번에 읽지 않고 책상 옆에 항상 놓아두고 일부러 조금씩 천천히 읽었다. 누군가의 일기를 단숨에 흡입해 버리는 건, 그것도 영성이 느껴지는 텍스트를 그런 식으로 대우한다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 나가며 밑줄을 그은 부분이 많았다. 헨리 나우웬의 수도원 경험담 정도의 내용이었다면 아마도 이 책은 그리 가치가 높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경험담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에 걸친 근원적인 질문들을 다시 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솔직하게 답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시공을 초월하여 언젠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할 물음들을 하나씩 마음에 담다 보니, 어느새 내가 얼마나 육신에 치우친 삶을 살고 있었는지, 얼마나 가식적으로, 이중적으로, 위선적으로 살아왔는지를 정직하게 뒤돌아 볼 수 있었다. 시끄럽던 내 안의 소리들이 잠잠해지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가질 수 있었다. 회개하는 마음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다잡는 시간이 되었다. 동시에 이 책에는 헨리 나우웬이라는 영성가 역시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과정을 겪어나가는 모습이, 한 인간의 모습이 솔직 담백하게 담겨 있어 은근한 위로도 받을 수 있었다. 정도가 조금씩 다를 뿐 아마 진지한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읽고 한동안 멈춰야 했던 문장들을 추려보았다. 나의 반응도 짧게 덧붙인다.


1. "영적인 삶에 관한 책을 읽는 건 좋아하면서도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려 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 헨리 나우웬이라는 위대한 영성가도 이런 질문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의외의 위로와 함께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다. 위선을 가장하여 영적이고 선한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2. "가장 신령해 보이는 행동들조차도 허영심에 오염될 가능성이 있음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 역시 위선에 관련된 문장이다. 헨리 나우웬의 성찰이 예리하고 깊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성경구절도 생각이 났다. 두 주인을 섬기면서 마치 아닌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지혜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 세대가 두렵다는 생각도.


3. "육체노동은 환상을 벗겨낸다. 내 벌거벗은 실체와 무기력함, 유한성, 연약함 따위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흥미롭고, 신나며, 정신을 쏙 빼놓은 만한 활동들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따분한 단순작업은 무방비상태의 밑바닥을 공개해서 더 연약한 심령을 갖게 한다. 이 새로운 연약함이 두려움이나 분노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을 활짝 열도록 이끌어주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 제네시 수도원에서 헨리 나우웬이 일곱 달 동안 실행했던 루틴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육체노동이었다. 그는 빵 만드는 작업과 암석을 채취하고 나르는 작업을 번갈아 가며 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글을 쓰고 상담하는 일로 언제나 바빴던 그가 노동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서툰 손으로 작업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낯설지만 반갑게 느껴졌다. 그가 느꼈던 감각이 저 문장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4. "적잖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에 내 삶에서 침묵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었다. 침묵이 사라져 간 곳에 내면이 오염되었다는 감각이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어째서 자꾸 지저분하고, 찜찜하고, 불순한 느낌이 드는지 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침묵의 결핍이 주원인이라는 걸 또렷이 알 수 있었다."

>>> 침묵의 결핍이 지금 현대인의 삶에서 얼마나 부재했는지, 그러면서도 감히 거룩한 척, 믿음 좋은 척, 괜찮은 척하는 나의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불필요한 말과 생각들로 나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도 오염시켰던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5. "가난한 삶을 살려는 일정한 노력 없이 진실한 크리스천을 자부한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얘기다."

>>>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청빈해야 하느냐,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가난해야 하느냐, 하는 말들이 한때 유행이었다는 걸 기억한다. 그때에도 나는 그 무리에 동조하지 않았다. 가난한 삶을 살려는 일정한 노력은 정말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한다 해도 가난한 이들을 백 퍼센트 공감할 수 없겠지만, 내 입이 기름지고, 내 허리가 비갯덩어리로 출렁대면서 구제를 한다는 게 나로선, 특히 진실성 여부를 따지면,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6. "비가 아름답지 않나요? 어째서 다들 비를 피하려고만 할까요? 비에 푹 젖어야 할 순간에도 왜 햇살만을 원하는 걸까요? 자녀들이 은혜와 사랑에 푹 빠지길 하나님은 바라세요. 이처럼 다채로운 경로를 통해서 그분을 느끼고 점점 더 잘 알아갈 수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죠."

>>> 허를 찌르는 문장이다. 비를 맞아야 할 때 맞을 줄 아는 것. 비를 내리시는 분도, 햇살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 마치 햇살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것처럼 프레임을 씌우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박스 안에 가두는 행위와 같을 것이다. 우린 모든 것들로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원하고 편한 방식으로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7.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해 늘 거절당하고 고립된 느낌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는 이를 만난 사람에 빗대어 설명했다. 그런 이들에게는 상대방의 보살핌에 진정과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어진 사랑을 받아들이고 의혹과 불신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내면의 확신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 그렇다.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들은 갑자기 한없는 사랑을 받게 될 때 의심하게 된다.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내면의 확신, 그것을 위한 믿음의 결단,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이신 예수 이름으로 의인으로 칭해졌다는 사실도 함께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후자로 연결되지 못하고 전자에만 머물면 자기 자신에게 갇힌 신세가 된다. 그건 믿음이 없는 것과 같다. 후자를 고백해야 한다. 가치 없던 자가 가치 있는 자로 옮겨졌다는 고백 말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고백 말이다.


8.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실수해도 매서운 비판을 당하지 않으며, 훌륭한 일을 해도 유난히 칭찬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고, 성공이나 실패와 상관없이 한 차원 높은 사랑을 받는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무척 깊게 접촉할 수 있었다."

>>> 이게 공동체의 힘이지 않나 싶다. 이런 공동체가 우리의 교회 공동체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 믿음과 신뢰가 가는 공동체, 늘 새로워질 수 있는 공동체 말이다.


9. "일곱 달을 보낸 뒤에 내가 완전히 달라져서 훨씬 일관되고, 신령하며, 의로우며, 긍휼히 여기며, 온유하고, 유쾌하며, 이해의 폭이 넓은 인간이 되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다시 예전의 삶의 패턴으로 돌아가는 데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 기억은 단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관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앞장서서 인도해 준다. 온갖 충동과 환상, 비현실성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이 기억은 언제나 헛된 꿈을 몰아내고 정확한 방향을 가리켜 보인다."

>>> '맺는 글'에 적힌 문장들이다. 제네시 수도원 생활을 마친 지 반년 남짓한 시기에 쓴 글이다. 그의 솔직하고 정직한 문장들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일곱 달 수도원 생활로 인해 바뀐 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러나 그 기억은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가늠하는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준다는 것. 이 문장을 읽고 문득 우리도 굳이 수도원에 가지 않더라도 수도원 생활의 효과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스마트폰을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내려놓는 것, 단 하루라도 인터넷과 동영상으로부터 훌쩍 떠나 있는 것, 등등의 작은 실천이 그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잠깐 멈춤의 시간들도 분명 우리의 현재와 미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나침반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바빠지고 혼란스러워진 이 시대에 일상 속 수도원 생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헨리 나우웬이 제네시 수도원에서 이 일기를 썼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일상 속 수도원 생활 (온라인 디톡스 같은)로부터 우리만의 일기를 쓸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드는 이 시대의 급류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절제하면서 지켜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삶의 작은 습관의 변화가 침묵의 결핍을 채워주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지 않을까 싶다. 성 베네딕트가 말한 대로, 예배의식과 영적인 독서, 그리고 육체노동으로 바로 그 시간을 채워 넣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매일 십 분씩이라도 이러한 일상 속 수도원을 맛보고 그 시간을 지켜내기 위해 애쓸 수 있다면 말이다. 


#포이에마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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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살림지식총서 369
박영은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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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도스토옙스키


박영은 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책을 다 읽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이 내 인생에 남긴 많은 흔적들에 대해 생각했다. 독서의 마무리로 감상문을 작성하는 습관이 큰 도움이 되었다. 기록을 훑어보니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던 시기는 2019년 3월이다. 지금이 2026년 7월이니 7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동안 나는 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거의 다 읽었고,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단편을 제외한 중장편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 독서모임과 함께 다시 읽었으며, 그 기록들을 독서모임과 같은 이름을 가진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내게 이 7년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였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러시아 문학 전공, 그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 전공자가 아닌 순수한 독자로서는 아마도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축에 속하지 않나 싶다. 생각해 보면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한 번도 하기 힘든 도스토옙스키라는 거대한 산맥을 두 번이나 종주하다니 말이다. 나의 오십 년 인생에서도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고 나는 이를 영광으로 생각한다. 


몇 달 전 페친 덕분에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망설임 없이 구입했지만 한동안 책장에서 대기하다가 어젯밤에 내 손에 들렸다. 박영은 교수가 재해석하여 쓴 ‘도스토옙스키 소개서’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한 책이었다. 손에 잡힐 만한 판형에 백 페이지 채 되지 않은 분량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의 작품을 하나 이상 읽어 보고 그에 대해 잘 알려진 정보들을 대충이라도 섭렵한 독자라면 별 어려움 없이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도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것들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만나볼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애피타이저 정도로 여기고 먼저 읽어 봐도 좋을 듯하다. 


아쉽게도 저자의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재해석에서 나는 고유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내가 이미 이런저런 도스토옙스키 작품 이외의 2차 자료들도 섭렵한 탓일 테다. 각 작품에 대한 저자만의 해석이 간간이 적혀 있었지만 너무 짧기도 하고 모두 잘 알려진 것들이라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저자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 책의 의의를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아닌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조명하여 소개하는 거라고 책 서두에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의 삶을 그의 작품과 함께 다시 한번 훑어보는 시간은 내게 유익했다. 이런 책이 몇 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양한 문체로, 다양한 관점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조망하는 글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출간이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살림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 백치: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3. 악령: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4. 미성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6.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7.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8. 분신: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9.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0. 노름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8.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9. 악몽 같은 이야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0. 악어: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

40.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867

41. 여주인: https://rtmodel.tistory.com/1917

42.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https://rtmodel.tistory.com/1930

43.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by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https://rtmodel.tistory.com/1995

44.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by 김정아): https://rtmodel.tistory.com/2175

45. 도스토예프스키 (by 박영은): https://rtmodel.tistory.com/2217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 분신: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4.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5.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6.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7.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8. 노름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9. 백치: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0. 악령: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1. 미성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 도스토옙스키 관련 저서

1. 닮은 듯 다른 우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4551437

2.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161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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