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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평점 :
예술가의 삶, 그리고 상실
파스칼 키냐르 저,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고
10월의 첫 아침을 맞이하며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날씨는 흐리고 곧 비가 올 것만 같다. 나는 밑줄 그은 문장을 노트에 옮겼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p112)"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문득 지금 이 순간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하루의 시작에 늘 아침이 있었건만, 그 반복되는 무수한 아침 가운데 똑같은 아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마치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감동에 젖는다. 영원한 것도 없지만 똑같은 것도 없다.
이 책은 내게 두 가지 숙제를 남겼다. 하나는 '예술가의 삶에 대한 숙고'이고, 다른 하나는 '상실에 대한 사색'이다. 두 가지 다 잘해 낼 자신이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장에 꽂아 두기엔 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조금이라도 끄적거려볼까 한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본업인 과학도 어떤 면에서는 예술과 연결이 된다고 믿는다.
첫 번째 숙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한 적이 있다. 의외로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 (특히 소설가들)이 예술 작품에 일가견이 있거나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모든 예술은 결국 통한다'는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글, 그림, 곡은 각각 문학, 미술, 음악의 언어로써 예술가가 관찰한 것, 성찰한 것, 혹은 통찰한 것을 표현해 낸다. 언어만 다를 뿐 결국 예술가의 내면과 그 내면을 통과하고 정제된 비가시적인 것들을 우리가 읽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감각적인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과업이 바로 예술가의 삶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표현만으로 예술가의 삶은 만족되지 않는다. '깊이'라는, 쉽게 말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하지만 모든 예술가들이 궁극적으로 천착하게 되는, 그 무엇이 반드시 맞닥뜨리고 혹은 극복해야만 하는, 그러나 영원히 도달할 수 없고 항상 미끄러질 뿐인 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가들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도 한다. 또 어떤 예술가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모든 것에서 단절시키고 소외시키기도 한다. 극단적인 노력 끝에 '깊이'라는 그 무엇에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업은 영원히 불가능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깊이'의 심연은 아무도 가본 적도 닿은 적도 없기 때문이며, 깊이는 더한 깊이를 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미끄러짐을 예술가의 숙명으로 본다. 정도만 다를 뿐 예술가라면 누구나 이 도상에 서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네 인물, 즉 생트 콜롱브, 마랭 마레, 마들렌, 투아네트는 모두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한다. 마들렌과 투아네트는 생트 콜롱브의 두 딸이자 제자로 등장하며, 마랭 마레는 생트 콜롱브의 제자였는데 사회적인 성공을 위해 속세로 돌아갔다가 나이가 들어 음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다시 스승을 찾아오는 인물로 그려진다. 생트 콜롱브는 은둔형 음악가다. 비올라 다 감바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이나 그는 화려한 궁정이 아닌 자신의 보잘것없는 시골집에 기거하며 음악에 몰두한다. 그에게 돈과 명예는 음악가에게 외계어 같은 것이었다. 마랭 마레가 자기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를 다시 받아준 이유가 담긴 대화의 일부에서 그가 남달리 정의하는 음악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p118)"
음악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대화를 하다가 생트 콜롱브를 흡족하게 만든 마랭 마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p120)"
그리고 생트 콜롱브는 마지막으로 마랭 마레에게 그동안 가르쳐주지 않았던 '눈물들'과 '카론의 배', '회한의 무덤' 전체를 들려주기로 한다. 마침내 마랭 마레가 그 곡들을 들을 만한 귀를 가진 자로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생트 콜롱브가 까칠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예술가 중에서도 부와 명예를 위해 예술을 했던 중간 단계의 마랭 마레 같은 사람들에게도 생트 콜롱브는 까칠하고 극단적인 음악가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언어를 빌려 생트 콜롱브를 표현하고 싶다. 그는 '백치'와 같은 예술가 (음악가)였다고.
상실에 대한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첫 문장을 가져올 필요가 있다.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이 죽었다."
상실을 공연히 선포하는 저 문장은 '백치'와 같은 음악가 생트 콜롱브를 정의하는 상자 역할도 충실히 해낸다. 그는 아내의 죽음이 사무쳤고, 집 안에 틀어박혔으며, 음악에만 몰두했다. 아내가 죽고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연습할 정도로 말이다. 생트 콜롱브는 비올라 다 감바를 양 무릎 사이에 놓고 연주하는 방식을 찾아냈고, 훨씬 더 무게감 있고 훨씬 더 우울한 톤을 만들기 위해 악기에 저음의 현을 하나 덧붙이기도 했으며, 손의 무게감을 덜어주고 검지와 중지만 사용해 말총 활 위에 살짝만 힘을 실어주는 활 기법도 고안해 냈다. 그가 비로소 젊은 여인의 탄식에서부터 중년 남성의 오열까지, 전장에서의 외침부터 그림 그리는 데 열중하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숨소리까지,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거친 헐떡임부터 기도에 몰입한 한 남자의 장식음 거의 없는, 무음에 가까운 저음까지, 인간 목소리의 모든 굴곡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그 발단에 아내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실이 만들어낸 창조. 바로 생트 콜롱브가 이루어낸 과업이었다.
그는 매일 상실을 맞이했다.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그의 삶은 그 위에 세워지고 있었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도, 환각으로 찾아오는 아내를 대면하는 것도 그에겐 상실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바로 그 상실 속에서 그는 음악을 했고 음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재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세로부터 스스로를 더 단절시키고 소외시켰다.
상실은 힘이 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겐 분노가, 누군가에겐 성공욕이, 또 누군가에겐 상실이 목표를 이루게 하는 동력이 된다. 물론 생트 콜롱브의 목표는 부와 명예 혹은 권력 같은 사회적인 성공과는 반대 방향에 있었다. 음악의 본질, 음악의 근원을 찾아 그는 평생을 헤맸던 것 같다. 오로지 상실의 힘을 의지해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건 생트 콜롱브에게도 진실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한 번의 상실이 그에게는 매일 새로운 상실로 갱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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