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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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인식의 다리


파스칼 메르시어 저, '언어의 무게'를 읽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김춘수의 '꽃'에서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그는 그저 하나의 몸짓일 뿐 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일까? 타자에 의해 이름이 불리는 존재만이 비로소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된다는 말일까? 나는 이 시에서 '이름'을 '언어'로 바꿔본다. 그러면 언어는 자연스레 무게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잇는 다리의 무게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겠지만, 작품 속 주인공 레이랜드의 시간도 여러 번 재부팅된다. 그럴 때마다 언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인생의 여러 막을 닫고 다시 여는 무대 커튼 같은 것이었다. 커튼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순간이 그에게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재인식하는 순간이었던 걸까. 일상에 흩어진 소중한 것들이 하나씩 빛을 잃어가는 동안 우리는 점점 무뎌져간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 구원을 맞이하고, 우린 그제야 빛바랜 사진을 눈물을 머금고 다시 바라보듯 잃었던 의미를 재발견하며,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곤 하는 것이다. 언어는 잃었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재해석하게 해 주며 인생의 새 막을 여는 구원의 열쇠이기도 하다.  


레이랜드는 과거에 옥스포드를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러나 그에게 옥스포드는 몸에 안 맞는 옷이었다. 여러 언어를 알던 동양학자였던 삼촌 집을 찾은 어느 날, 거실에 붙어있는 지중해 연안의 지도를 보며 레이랜드는 남다른 꿈을 갖게 된다. 지중해에 접한 모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것. 언어에 재능과 애착이 있던 그는 도망 나오듯 대학을 그만두고 주먹구구식으로 여러 언어를 배우고 익히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무모한 일처럼 보였다. 이 작품의 저자 파스칼 메르시어의 전작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떠오를 만큼 말이다. 그 역시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한 여자를 만나 포르투갈어를 들은 뒤 모든 걸 내려놓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노년의 그레고리우스가 행했던 무모한 일보다는 아무래도 젊은 레이랜드의 무모한 일이 그의 인생을 더 크게 변화시켰을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삶이나 남들의 시선에 맞춘 삶이 아닌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던 레이랜드는 낡은 호텔의 종업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고, 쪽방에서 생활하면서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를 틈타 번역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 연장선의 삶에서 운명처럼 리비아를 만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 당시 기자였던 리비아는 출판사 사장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면서 그녀가 출판사를 물려받게 된다. 영국에서 만난 그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갑작스레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로 이사하게 된 이유였다. 트리에스테는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도시였다.


꾸준히 번역가의 길을 걷던 레이랜드는 트리에스테에서 아내를 심장마비로 잃고 큰 충격에 휩싸인다. 다시 안 맞는 옷을 입듯 출판사를 인계받아 이끈다. 번역 일도 계속하면서 말이다. 이때부터 레이랜드는 죽은 아내에게 남몰래 꾸준히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리비아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리비아는 레이랜드의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그런 존재가 사라졌으니 레이랜드가 느끼는 하루하루는 그저 반복되고 견뎌내야 하는 빛바랜 일상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랜드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청천벽력이었다. 발작을 경험했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뇌 스캔 사진에는 눈부실 만큼 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뇌종양이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하루하루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레이랜드는 출판사를 매각한다. 큰 결단이었다. 매각한 이후에도 그는 그곳을 떠올리면 사장 자리에 자신이 아닌 리비아가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에게 출판사는 죽은 아내의 분신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이어서 그는 아내와 함께 살던, 그리고 아내가 죽었던, 그리고 성인이 된 딸과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 위치한 집을 떠나 홀로 삼촌이 유산으로 남겨준 영국 런던 집으로 향한다. 같은 일상을 그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에겐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이 소설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이후에 소개된다. 그것은 레이랜드의 뇌종양 판정과 출판사 매각 후 삼촌 집으로 향하는 장면 사이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당황스럽기도 한 그 사건은 바로 레이랜드의 뇌종양 판정과 시한부 선고가 오진에 의한 판단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요컨대 사진이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진 아래에 깨알만큼 작은 글씨로 적힌 다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새도 없이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충격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던 것이다. 


아, 오진이라니! 레이랜드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죽었다 살아난 심정이었을까? 감사로 충만한 마음이었을까? 혹시 분노에 사로잡히진 않았을까? 특히 그에게 남다른 의미였던 출판사를 매각까지 한 이후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레이랜드는 나중에 여러 번 출판사를 손님으로 방문한다. 초반에는 돌이키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했다. 단 열흘만 일찍 알았다면 출판사 매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랜드는 무너지지 않고 진화하고 성숙한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 그 사건 때문에 그의 앞에 열렸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레이랜드의 성장기 혹은 성숙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모진 운명의 장난 같은 사건도 언어와 함께였다. 그는 발작을 겪을 때마다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읽을 수는 있는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지 두려워했다. 병이나 발작이 몸은 앗아갈 수 있어도 언어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처럼 레이랜드가 목숨보다 소중히 지키려고 했던 건 어쩌면 언어였다. 그는 결국 그의 언어를 지켜내고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인생의 새 막을 다시 시작했다. 


레이랜드가 성숙해 가는 과정 역시 언어와 함께였다. 출판사를 매각하지 않았더라면, 런던의 집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사람들과 생기지 않았을 사건들로 인해 그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워진다. 중요한 건 그 모든 만남 역시 언어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레이랜드라는 주인공 입장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여러 작가와 번역가와 출판사 관련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다양한 삶의 굴곡과 명암을 훑어보는 것만 해도 이 작품은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이들의 다양하고 독특한 모든 삶이 언어로 수렴된다는 점 또한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누군가 인간은 의미중독자라고 했다.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 성장하고 성숙하며, 또 언어로 끝이 나는 인간의 삶. 정녕 인간의 내적 발생은 언어로 말미암는가. 인간답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과연 언어를 빼고 인간다움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언어의 무게는 결국 삶의 무게이자 모든 의미의 무게이고 결국 존재의 무게가 아닐까. 이 아름다운 작품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찬찬히 읽어온 나날들이 이제 저문다. 하지만 언어로 기록한 이 감상문은 나를 새로운 막으로 인도하리라 믿는다. 내 남은 삶에 하나의 잔상을 남기면서 아름다운 무게를 더하리라 믿는다.


* 파스칼 메르시어 읽기

1. 리스본행 야간열차: https://rtmodel.tistory.com/1203

2. 언어의 무게: https://rtmodel.tistory.com/1726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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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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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지하 세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다시 읽고

차라리 골랴드낀이 나았다,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이 작품 속 일인칭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지하’라는 또 하나의 세상에서 잉태된 최종 병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스로를 소외 혹은 고립시키면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여실히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조금 과장해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를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고안한 가상의 생체 실험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며 다시 조용히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다! 아무렴, 이 맛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그런데 왜 이 말을 하고도 나는 겸연쩍은 걸까!)

이 작품 속 화자는 '분신'의 주인공 골랴드낀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골랴드낀을 거뜬히 넘어서고, 나아가 골랴드낀을 향한 향수마저 들게 할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는 인물로 내게 다가왔다. 단절, 소외, 고립 같은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열등감, 자존감 결여, 과장된 허세 등의 단어로도 결코 해석할 수 없는, 실로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 낸 정신 이상자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골랴드낀은 자신의 분신까지 보고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켜 결국 작품 끝에선 정신병원으로 호송된다. 그러나 이 작품 속 화자는 여전히 건실한 자기만의 세상인 지하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간다. 골랴드낀은 적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제부쉬낀처럼 최하급 공무원도 아니었다.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도 받고 있었다. 비록 타자로부터 소외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반면, 이 작품 속 화자는 타자로부터 소외되는 단계를 이미 지난 상태다. 타자로부터의 소외는 여전히 지상의 일에 속한다. 화자는 그 세상을 뒤로하고 지하 세계의 시민이 된 지 오래다 (화자가 지상 생활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2부를 이룬다). 게다가 타자가 아닌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단계에 안착한 것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그는 그 속에서 마치 삶의 밸런스를 맞춘 것처럼 나름대로의 안정성을 영위해나가고 있는 듯해 보이기까지 한다. 스스로를 소외시킨 결과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살인을 계획하는 기회를 무한히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해도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상황까지 넉넉히 부여한다. 이런 면에서 작품 속 화자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르는 (물론 화자 스스로는 자신이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파악하고 있지만, 정신이 아픈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지상에 머물며 사람들의 눈에 발각되어 정신병원으로 끌려간 골랴드낀이 차라리 더 낫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다. 작품 속 화자가 골랴드낀처럼 차라리 자신의 분신을 보았더라면, 차라리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켜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더라면, 그래서 정신병원에 끌려갔더라면 나는 차라리 안심이 되었으리라.

작품 속 화자는 세상을 피해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먼 친척으로부터 그가 쉽게 벌 수 없는 큰돈을 유산으로 받아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운명적이게도 그에겐 그 유산이 축복이 아닌 지하로부터의 초대장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지하 생활에서 그의 유일한 벗은 책이었다. 독서는 그에게 오로지 비뚤어진 자아를 증폭시킬 뿐이었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선 비딱한 자아를 더욱 비대하게 하고 강화시키기까지 하는 촉매제로 책은 그를 더 그의 내면으로 함몰시켰다. 책은 자아를 발전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타자와의 소통이 거세되면 자아를 파멸로 이끌기도 하는 것이다. 혼자 있는 세상에서 책을 읽고 사유하고, 또 책을 읽고 사유하는 지하 생활. 이 단순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제론 위험천만한 삶의 패턴이 바로 화자의 표면적인 일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세상을 피했지만 세상을 모두 아는 것 같은 뉘앙스로 무수한 말들을 지껄인다. 1부를 이루는 말들은 언뜻 보면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것 같으나, 내겐 분열된 자아의 조각나고 편향된 단상들로 가득 차 보였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그가 말하는 주제는 파악하기 쉽지 않았고 집중하기조차 어려웠다.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말하기보다 반복해서 가상의 독자 혹은 청자의 시선을 의식한 채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고 변명을 일삼는다. 인간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수정궁'으로 상징되는 유토피아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 부분을 읽는 어느 독자라도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나도 공감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화자를 신뢰할 수 있다는 전제가 마련될 때에 한해서다), 그 누구보다도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사람은 내겐 화자 자신인 것처럼 보였고, 자신만의 지하 세계를 수정궁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화자 자신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고로 비판이 힘을 얻기 위해선 비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중요한 법이다. 그리고 적당한 자기 검열은 성찰의 좋은 재료이나 지나치면 자기 의심, 비하, 포기, 낙심, 절망으로의 급행 티켓이 되기 마련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소외시켜 관념적인 자아 안에 영원히 갇힌 신세로 전락해 버린, 치우친 공간에서 평형을 이루고 있는 왕이 아니었을까.

놀랍게도 열등감, 자기 비하, 자존감 결여, 과장된 허세 등 일련의 자기 파괴 과정의 끝에서 그는 쾌락을 발견한다.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그는 쾌락을 느낀다. 결핍을 느낄 때 인간의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을 채우려는 노력이다. 그 거듭된 노력이 실패로 이어지면 그다음 반응으로써 포기를 선택하게 된다. 이 포기도 거듭되다 보면 결국 스스로를 불신하는 단계를 넘어서게 되고 얼굴엔 절망이 아닌 조용한 미소가 지어지게 되는데, 이때의 미소는 광기를 머금게 되는 법이다. 아마도 작품 속 화자 역시 이런 비슷한 과정을 거쳤던 탓에 열등감의 심연에서 쾌락을 발견한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진정으로 지하 세계 시민이었고 왕이었던 것이다.

그의 지식과 사상이 글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현실과의 괴리를 피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내가 1부에서 그가 쓴 독백들을, 비록 공감이 가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창녀인 리자로부터 그가 그녀 앞에서 했던 설교가 책 읽는 것 같았다는 평을 듣게 된다. 그는 학창 시절 자기를 소외시킨 친구들에게 복수하고자 학업에 열심이었던 전력도 가지고 있다. 그가 책을 찾고 공부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아는 지식은 이론에 불과했다. 도저히 힘이 있으래야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자의 열변을 신뢰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열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각할 거리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2부에서 소개되는 에피소드는 3개다. 첫 에피소드는 장교와 마주 보고 지나칠 때 먼저 피하지 않고 어깨를 과감하게 부딪혀 자존감의 회복을 도모하고자 애쓰는 웃픈 장면들인데, 여기에서 알 수 있는 화자의 캐릭터는 찌질하다는 표현밖에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감에 절어 있다. 놀랍고, 한편으론 가슴 아픈 것은 화자 스스로가 맨 정신으로 장교와 마주칠 땐 자신이 먼저 피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제정신으로 자존감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는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이 화자인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초대받지 못한, 학창 시절 친구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스스로를 초대하여 자발적으로 찾아간 장면들이다. 친구들은 이미 학창 시절 화자를 소외시키고 모욕했던 작자들이었다. 이 모임에 가면 그 과거가 재현 및 반복될 것임은 2 + 2 = 4 처럼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임에 찾아간다. 1부에서 지적한 인간의 비합리성과 모순됨을 그는 스스로의 행동으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화자의 캐릭터는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찌질하다는 표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아주 작은 일에 자존심을 부려 체면을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또한 그런 시시콜콜한 일들로부터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요상한 지배욕까지 선보이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 요상한 지배욕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창녀 리자와의 만남에서 화자는 마치 자신이 깨우친 지식인이자 선도하는 계몽가 혹은 말로 사람 마음을 휘어잡고 교정하는 카리스마 있는 설교자로 분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리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화자가 연기한 말과 행동이 아닌, 화자가 미처 숨기지 못한 말과 행동이었다. 그녀만큼 그 역시 인생의 바닥을 헤매고 있는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그녀의 모성애와 동정심과 측은지심 및 동병상련의 마음을 자극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한 가지 더 발견할 수 있는 화자의 모습은, 화자는 사랑받아 보지도 사랑을 베풀어 보지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인데, 타자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되고 단절되었던 과거의 상처 속에서 현재를 살아내고 있으며, 지하 세계에 숨어서 그 상처를 보이지 않게 하여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가 바로 화자 자신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지배받기보다 지배하는 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 하는 모순된 자아로 이뤄진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 그의 비뚤어진 세계관은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인 인간관계도로 압축될 수도 있겠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자에게 구원자 역할을 할 수도 있었던, 어쩌면 그에겐 유일한 기회였던, 리자가 떠나게 되는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를 매개로 구원을 받는 자리로 나아간다. 자기 객관화의 유무에 따른 열매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작품 속 화자를 비판적으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골랴드낀에서 느끼지 못했던 측은지심을 그로부터 느꼈다. 인간 본성을 더 진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로부터 나의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자아를 발견해서일까. 나 역시 '나'라는 지하에 스스로를 가두고 비뚤어진 상태에서 평화나 정의를 운운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나 역시 찌질할 뿐 아니라 요상한 지배욕에 가득 찬 채, 인간이 비합리적이고 모순된다는 명제를 방패 삼아 그 아래에서 마치 나는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행동을 해도 되는 특권을 얻은 것처럼 종종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편안한 곳이, 내가 합리적이고 모순이 없다고 여기는 공간이 지상인지, 혹시 지하는 아닐지 다시 점검할 필요를 느낀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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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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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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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서사에 깃든 지독한 인간의 심리


정유정 저, ‘7년의 밤’을 읽고.

간결한 단문으로 휘몰아치는 정유정의 필력은 치밀한 서사와 정제된 묘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살아난 텍스트의 모든 여백이 긴장과 스릴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단숨에 빨려 들어갔고, 금세 압도되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작품을 함께 하던 약 다섯 시간 동안 나는 마치 오랜 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다섯 시간이 아니라 닷새가 지난 것 같다. 너무 깊게 몰입한 나머지 일으킨 착각일 것이다.

작가가 창조해낸 가상의 공간, 세령호. 나는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작품 속에 빠져든 나는 잠시 동안 작가의 창조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세령호의 안개가 나를 감싸는 것 같고,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세령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크고 검은 눈, 허리까지 닿을 만큼 길게 풀어헤친 머리, 엄마 화장품으로 아무렇게나 칠한 조그맣고 하얀 얼굴, 구석구석 멍든 몸, 흰 팬티 차림의 작고 여린 아이, 이제는 스스로 눈을 감을 수 없는 아이, 오세령. 세령은 공포에 질린 채 도망치고 있었다. 강도나 괴한이 아닌 아빠로부터. 제기랄. 이것이 캄캄한 밤, 인적이 드문 어두운 안개 길을 그 조그만 발로 거침없이 달려야만 했던 이유다.

부와 명예를 등에 업은 사이코패스, 아빠 오영제로부터 폭력과 수치와 모멸을 견뎌내며 간신히 살아오던 열두 살의 초등학생. 엄마 하영은 남편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미리 도망쳤다. 으리으리하지만 텅 빈 그 집에 세령은 늘 교정을 해준답시고 손찌검을 해대는 아빠 오영제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세령이 죽던 날은 마침 세령의 생일이었다. 생일날, 그러니까 세령의 마지막 날이었던 그날에도 세령은 오영제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오영제에게 있어서는 교정, 세령에게는 공포이자 폭력이었다. 세령은 활활 타는 초가 꽂힌 병을 오영제에게 던지고 기회를 틈타 창을 넘어 도망쳤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살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도망은 죽음으로 끝나버린 세령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아아, 아빠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그 길이 이렇게 끔찍한 사건의 전야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오영제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런 게 인간이란 탈을 쓰고 있다니! 내 심장은 쉬지 않고 벌컥댔다. 대동맥으로부터 피가 용솟음치는 게 느껴질 만큼. 그런데 작가 정유정은 여기에 오영제 가족뿐만이 아닌 최현수 가족을 연결시킨다. 세령의 허망한 죽음이 연결고리였다. 세령을 죽인 건 오영제가 아닌 최현수이기 때문이다. 세령은 오영제로부터 도망치던 중, 마침 그곳을 처음 방문한 최현수의 차에 들이 받힌다. 아, 이런 기막히고 비극적인 운명! 물론 최현수가 세령을 차로 친 건 사고였다. 악의가 전혀 없는 순수한 사고였다. 문제는 세령의 사인이 교통사고에 의한 다발성 장기 부전이나 과다출혈이 아닌 질식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 차에 부딪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여자 아이가 살아있었다. 놀란 나머지 최현수는 운전석에서 나와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정신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아빠”라고 읊조렸다. 마음이 무너졌다. 그때 최현수는 아이를 들고 곧장 병원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대신, 솥뚜껑 같은 왼손으로 입을 막아 생사를 오가는 아이의 마저 남은 숨통을 끊었고,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세령호에 던져버렸다.

최현수는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를 당한 상태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면허가 갱신될 참이었다. 불법으로 운전을 해서 곧 살게 될 사택을 확인하러 밤늦게 세령호에 다다른 것이었다. 오는 도중에 술 한 잔 걸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최현수는 잘 나가던 야구 선수였다. 한때 팀의 전성기를 이끌던 포수였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고 왼팔이 마비되는 증세가 잦아지면서 주전에서 밀려나야 했다. 2군에서 뛰다가 결국엔 야구를 그만둬야 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191센티미터, 110킬로그램의 거구를 장점으로 활용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보안업체 경비직이었다. 그렇게 최현수는 자존감을 잃어갔고 술에 절어 살게 되었다. 어쩌다가 만난 아내 은주와의 결혼은 그를 더 깊은 나락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지키고 싶은 존재는 아들 서원이었다. 서원이만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이 작품은 서원의 일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써졌다. 7년 전 사건, 그러니까 세령의 사고, 최현수의 살인, 오영제의 복수극이 빚어낸 재앙이었던 세령 댐 수문 방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그날로부터 7년이 지난 이후, 승환과 함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다니다시피 살다가 그나마 정착한 등대마을에서 서원은 자기에게 배달된 운동화, 승환이 썼음이 분명한 세령호 사건에 대한 소설, 그리고 하영과 승환 사이에 오갔던 편지 다발과 승환이 남긴 컴퓨터 파일들을 훑어본다. 그날은 승환이 갑자기 사라진 날이었고, 서원이 전보 한 통을 받은 날이었다. 전보는 아버지인 최현수의 사형 집행이 치러졌으니 시신을 수습하라고 알리고 있었다. 서원은 이러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사실일 수밖에 없는 추리를 해내고 전율과 함께 깨닫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영제가 실제로 살아있고, 여태껏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7년 전 못다 한 복수를 최현수의 사형 집행일에 맞춰서 완성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동안 전학에 전학을 마다하며 도망치다시피 살아온 나날들도 모두 오영제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형 전 오영제의 행동을 노련한 포수의 육감으로 정확하게 예측한 최현수와 승환, 그리고 두 형사의 도움으로 승환과 서원은 죽을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오영제의 복수극, 아니 미친 살인극을 가까스로 저지하게 된다. 7년의 밤이 비로소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결말에 이른다.

작품 읽으면서 독자가 아닌 소설 지망생으로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 작가는 각 인물의 내면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작가는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각 등장인물이 되어 그 고유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얻은 생동감 넘치는 입체감은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했고 독자의 몰입을 유도했다. 등장인물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오해하게 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러운 부분을 어떻게 추리해나가는지, 그리고 그렇게 감추거나 드러낸, 혹은 감춰지거나 드러나게 된 심리를 어떻게 분석하고 대처해나가는지, 정말이지 정유정 작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등장인물들에게 투영하고 그들만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놀랍도록 입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앞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은 하영 (오영제의 아내), 은주 (최현수의 아내)를 비롯하여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고유한 서사도 소설 전체의 흐름과 완벽하게 맞물린다. 각 인물들이 가진 상처에는 한국인으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정서가 깊이 녹아있다. 허투루 버릴 게 하나 없는 치밀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환상과 사실을 오가는 서술 기법.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단문의 화려한 연타. 탄탄한 서사와 인간 본성의 심연을 깊숙이 파고들지만 결코 직접적이지 않은 묘사들. 나는 독자로서 그리고 소설 지망생으로서 연신 침을 삼키며 이 작품을 읽어냈다. 프로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처음 읽는 정유정 작가. 여태껏 왜 몰랐을까! 그동안 고전소설을 읽는답시고 현대소설을 게을리했던 것, 서양 고전을 탐독한답시고 한국소설을 등한시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한국 현대소설일 텐데 한국 현대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유정 작가를 비롯한 한국 현대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마침 스무 권이 넘는 소설이 중고로 구입이 가능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이번 기회로 인해 한글로 써지고 한국 정서가 녹아있는 한국 현대소설의 세계로 본격적인 진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나에겐 큰 흐름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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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라는 세계
이종태 지음 / 복있는사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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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재료를 아는 사람이 아닌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길


이종태 저, '경이라는 세계'를 읽고


철학, 신학, 문학, 과학 등의 모든 학문, 그리고 모든 지식과 깨달음의 문을 열고 정직하게 걸어가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고, 또 마주해야만 하는 것. 앎이라는 과정의 동반자이자 길잡이, 나아가 그 과정 자체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고, 그것으로 한 걸음 다가간 대상과의 거리를 줄이기는커녕 더 확대시켜 결코 다가설 수 없다는 인정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기쁘게 받아 내고야 마는 것. '경이'일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앎이라는 과정을 겪게 된다. 모름과 앎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변증법적인 발전을 해나간다. 그래서 앎은 앎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모름으로, 그 모름은 다시 앎으로 변모해 나간다. 특히 인간은 눈앞에 있는 어떤 것 하나를 더 알았음에도 그것으로 인한 '플러스 원'만 보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도 채우지 못한 채 더 넓어지기만 하는 '무한대'의 영역도 보게 되는 존재자다. 이런 면에서 나는 파스칼과 같은 생각이다. 인간 내면의 심연에는 신의 흔적이, 신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앎과 모름의 변증법은 의식하든 못하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하는데 그것이 나는 바로 '경이라는 세계'이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제목 말이다.


공부하면서 종종 느끼는 깊은 전율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플러스 원'을 장착했을 때이기보다는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무한대'의 텅 빈 공간이 그제야 눈앞에 드러났을 때에 찾아온다. 하나의 앎은 무한의 모름을 가리키고 나는 그렇게 다시금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다시 출발점에 선 나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앎의 과정은 좁은 탑 꼭대기로 올라가는 여정이 아니라 황량할 만큼 더 넓은 대지로 이끌리는 여정이라 믿는다. 지경이 넓어진 자의 숙명, 그리고 이런 무한반복이야말로 겸손의 통로일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언제나 저 너머를 묻는 존재자다. 표면이 아닌 이면을 궁금해하고, 표층이 아닌 심층을 보고 싶어 한다. 이렇게 인간만이 가진 특징의 기원을 기독교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할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 점이야말로 '경이라는 세계'가 발아하는 근원이지 않을까 한다. 신비를 소멸하고 경이감과 경외감을 거세시키는 무수한 노력들, 이를테면 기계주의나 과학주의 등의 경도된 사상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신앙과 믿음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그 무엇.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이 없다 말하는 사람들까지 그 내면에 동일한 것이 심겨 있다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인간스러움'이 아닌 '인간다움'의 근원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루이스를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경험했던 경이의 순간들.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끈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 저자의 말마따나 경이의 눈은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신비를 풀려고 하기보다 사랑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눈일 것이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무수히 많은 틈새의 신이 사라진 이 시대, 별의 재료를 파악했다고 별이 무엇인지 다 아는 것처럼 여기는 이 시대. 신비 앞에 서서 경이감과 경외감에 잠식되어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닫고 신을 벗고 두 팔을 든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그 경이의 세계를 언제나 감지하려고 또 그 세계와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사람다운 사람, 경건한 사람, 겸손한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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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부근에서 다시 읽고 싶은 명작 6
엔도 슈사쿠 지음, 이석봉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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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아닌 사랑


엔도 슈사쿠 저, '사해 부근에서'를 읽고


묵직한 한 방을 제대로 맞았다. 날카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먹먹한 가슴이 되었다. 꽤 오래갈 것 같은 예감이다. 아, 이렇게 또 엔도 슈사쿠를 만났다.


명쾌한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책.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대신 자명하게 여겼던 것들까지도 반추하게 만드는 책. 내가 알던 지식과 내가 믿던 믿음이 건강한지, 치우치진 않았는지 다시 묻게 만드는 책. 책은 도끼이기도 하지만 안개 자욱한 숲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나는 찍히고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불안과 의심의 깊은 숲을 홀로 통과하게 된다. 확신의 죄에서 해방받는 유일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책을 읽는, 아니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여섯 번째로 만난 엔도 슈사쿠의 작품 ‘사해 부근에서’가 내게 선물한 먹먹함은 엔도 슈사쿠의 인생에 흐르는 깊은 강과 내 안에 꿈틀대는 실개천이 만나 일어난 필연적인 화학반응의 결과일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확신의 정체가 순수함의 옷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미성숙하고 게으른 자아에 의해 쉽게 선택된 신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맞닥뜨려야 했다. 나는 작아지고 잠시 공허해졌다. 작품을 다 읽은 후에도 여전히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고 내가 머무르던 과거는 누군가의 치우친 해석으로만 지어진 온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꽤 급진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작은 우물 안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서 성장과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성장과 성숙은 겹겹의 우물을 나온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단 열매이기 때문이다. 우물 안의 피터팬이 되기보다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만나게 될 우물들을 탈출하면서 점점 더 깊어지는 지혜의 노인이 되고 싶다. 


‘침묵’과 ‘침묵의 소리’, 그리고 ‘깊은 강’에서 동일하게 흐르는 감정은 내겐 불안이었다. 그 불안이 이 작품 ‘사해 부근에서’에서도 그대로 흐른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내겐 불안의 정점을 찍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도를 소설에서 직접 등장시켜서일까. 이 작품은 흔히 알려진 '신성'이라는 속성이 철저히 거세된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총 일곱 명의 화자를 통하여, 마치 증언처럼, 직간접적으로 들려준다. 물론 소설 속 증언이다. 어디까지나 엔도 슈사쿠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춤했고 망설였으며 진지하게 며칠을 생각했다. 그 생각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압축할 수 있다. 


“예수의 기적이 의미하는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는가?”, 

“나는 예수의 기적을 원하는가, 아니면 예수의 사랑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예수를 원하고 믿는가?”, 

“기적이 사랑일 수 있는가, 반대로 사랑은 기적일 수 있는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 하나님이자 인간이셨던 예수.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나에게 예수의 신성은 절대적이었고, 인성은 늘 축소되곤 했다. 그게 당연했고, 그래야만 좋은(?) 믿음을 가진 것처럼 여겨졌다.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하다간 이단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고 신성모독이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에 쉽게 사로잡히곤 했다. 인간 예수를 말하는 건 좌파들이 지껄이는 구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결코 분리할 수는 없다. 인간을 영과 육의 이분법으로 분리하는 어리석은 짓과 다름없을 것이다. 건강한 신앙과 건강한 믿음은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가능하다. 예수의 인성 말하기를 주저하고 무속적인 판단으로 신성 말하기에만 주력한다면 건강한 신앙이나 믿음은 차치하고서라도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조차 답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최후의 유혹‘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최후의 유혹’ 역시 예수의 생애를 다룬다. 특히 고뇌하고 투쟁하는 인간 예수가 그 책의 중심이다. 반면, '사해 부근에서'에서의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 (못하는?) 대신 그 기적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있어 주고 수발을 들어주며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사랑의 인간 예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엔도 슈사쿠의 접점은 묘하게도 예수의 신성이 아닌 인성에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소설이라는 장치를 동원하여 허구 속에서 마음껏 예수의 인성을 다루지만, 정작 작품을 읽는 내 안에는 허구적 상상력을 넘어 지워지지 않을 강력한 신학적인 흔적을 남겼다. 고뇌하는 예수, 투쟁하는 예수, 그리고 사랑의 예수.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만 예수를 이해하는 협소한 지경이 확장되면서 나는 예수를 조금은 더 깊고 조금은 더 풍성하게, 그리고 조금은 더 친근하게 알게 된 기분이다. 사랑이라는 한 단어조차 나는 여전히 이론적으로밖에 모르고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질문들에 대한 나의 답은 여전히 뾰족하지 않다. 사복음서에 쓰인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인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확인 및 증명할 방도가 없다. 그리고 이런 류의 문제는 늘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다. 역사적 사건이든 아니든 증명할 수 없는 문제라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어떤 사건이 역사적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에 따라 해석을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거나 그 예수가 역사적으로 일으킨 기적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게 아니다. 나는 성경에 나온 예수를 믿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처럼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약한 자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고 그들과 동등한 자리에서 하나가 되는 것. 나는 앞의 여러 질문들을 내려놓고 이젠 나에게 묻는다.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조건은 작품 속 예수가 했던 일들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나는 작품 속 예수처럼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 


문득 어딘가 숨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차라리 기적을 행하는 예수를 믿는 게 나의 이기적인 자아로서는 훨씬 쉬운 것 같다. 사랑 없는 기적이 아닌 기적 없는 사랑. 이것이 예수의 인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게 아닐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적 없는 사랑이 인성에만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신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성과 신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인 것이다. 사랑을 행하는 것은 인성과 신성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가 아닐까 싶고, 이 작품 속에 숨겨둔 엔도 슈사쿠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6. 사해 부근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770


* 카잔차키스 읽기

1. 그리스인 조르바: https://rtmodel.tistory.com/686

2. 영혼의 자서전: https://rtmodel.tistory.com/1152

3. 최후의 유혹: https://rtmodel.tistory.com/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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