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 라이프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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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 라이프: 현대인의 삶


요시다 슈이치 저, ‘파크 라이프’를 읽고


사소한 일상을 덤덤하게, 그러나 진부하지 않게 그려나가면서 끝까지 책을 놓지 않게 만드는 묘한 매력의 에세이 같은 소설. 섣불리 어떤 교훈을 던져주려 하지도 않고, 인간의 내면이나 사회의 부조리 등과 같은 굵직한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지도 않는다. 더도 덜도 아닌, 딱 적당한 수위를 유지하며 인물과 배경의 내면과 외면을, 자칫 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법한 필체로 묘사해나갈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참 이상하게도 나는 주인공과 동행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이 갔고, 그가 보는 것과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남자라는 사실 빼곤 나와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직장과 집을 오가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나’는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고 그렇다고 은둔형도 아닌, 어쩌면 평범한 현대 도시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 인물이다. 나이가 얼추 들었지만 여전히 싱글이며, 보아하니 앞으로도 한동안은 싱글일 것 같은 사람이다. 그는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영업 사원으로서 늘 히비야 공원 안에 있는 같은 벤치에 앉아 혼자 점심을 먹는다. 어느 장소나 자주 가게 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늘 비슷한 시간이라는 조건까지 갖춰지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눈에 익게 되고,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연결망이 형성된다. 서로 남이지만 남이 아닌, 낯선 사람이지만 낯설지 않고 익숙한 사람으로 서로에게 각인되기 시작한다. 오늘은 그 사람이 안 보이는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하는 혼자만의 생각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이로 어느샌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제목 ‘파크 라이프’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점을 내포하지 않을까 싶다. 모르지만 알고, 이웃이 아니지만 이웃인 관계로 서로 얽히고설킨 삶이 펼쳐지는 곳, 히비야 공원은 어쩌면 바로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파크 라이프’는 곧 우리 현대인의 삶인 것이다. 


커다란 공원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여럿이 함께 오거나 어쩌다가 방문한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파크 라이프를 이루는 암묵적인 연결망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 연결망을 이루는 주요한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혼자 그 공원을 자주 찾는 이들이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치이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러 오는 사람, 집에 혼자 있기 적적해서 잠시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마실 나온 사람 등등. 그들은 모두 각자 고독한 삶을 외로이 살아가고, 그 삶을 그대로 짊어진 채 그 삶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공원을 찾는다. 그리곤 어느덧 보이지 않게 연결된 관계 속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안정감은 서로 공인된 관계에서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철회할 수도 있다. 혼자만의 착각이라 치부하고 훌훌 털어버릴 수도 있다. 현대인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책임감을 따지기엔 서로가 남이고, 생경함을 말하기엔 이미 서로가 잘 아는 사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뉘앙스를 가진 인간관계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현대 인간관계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내가 주인공에게 묘한 공감을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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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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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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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단어, 정확한 문장, 깊고 풍성한 글


김소연 저, ‘마음사전’을 읽고

신형철은 글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하다고 했다.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했다. 정확한 문장은 단 하나의 문장이 존재한다고 했다. 좋은 글, 잘 쓴 글은 곧 정확한 글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유일한 문장들을 찾아내어 모아놓은 정확한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휘력이 관건이다. 많고 다양한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한다. 문장력은 그다음이다. 문장력은 글쓴이가 가진 어휘력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적은 어휘로도 간결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 하지만 입체적인 의미를 담는 장문의 글을 써낼 수는 없다. 간결함이 단조로움으로 수렴된다면, 그렇게 써진 글 역시 단조로운 글에 머물 뿐이다. 

신형철이 말한 대로 글짓기가 집 짓기와 같다면, 높은 어휘력은 다양한 건축 자재의 소유와 같다.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하지만 아무런 특징 없이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집보다는 아무래도 꾸밀 곳은 꾸미되 과하지 않고, 고유한 매력을 발산하면서도 단정함과 균형을 잃지 않아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것처럼 보이는 집이 아름답다고 말해야 한다. 높은 어휘력과 간결한 문장력은 단조로움이 아닌 깊음과 풍성함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단어들의 미세한 차이를 분별하여 그 단어가 가지는 적확한 의미를 명료하고 유려하게 밝혀주는 참 고마운 도우미를 우연찮게 만났다. 만남의 축복일 것이다. 이 책 ‘마음사전’의 저자 김소연 시인은 두루뭉술하게만 알고 있던 비슷한 의미의 낱말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고유한 옷을 입히는 작업을 시행한다. 정확한 문장이 정확한 단어들의 집합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 책의 도움으로 독자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어휘력에 분별력을 가하여 보다 정확한 문장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딱딱한 느낌의 ‘사전’이라는 단어와 ‘마음’이라는 따뜻한 단어의 절묘한 조합이다. 수십 가지가 훌쩍 넘는 마음의 낱말들을 하나씩 방문하여 고유한 색을 찾아준 저자의 노력이 알알이 담겨있다.

읽어나가다가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이 하도 많아 밑줄 대신 수줍게 체크 표시를 여백에 해두었다. 그래서 어떤 문장인지 명확하게 지칭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나중에 다시 들여다볼 때 그 페이지 전체를 다시 읽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충분히 좋을 것 같다. 그런 수고는 기꺼이 하고 싶다. 

몇 군데 특별히 마음에 와닿은 부분들을 발췌해본다. 이 책이 이런 내용이라는 것을 내가 허접하게 손을 대어 설명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다. 딱 열 문장이다.

1.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돈은 전혀 소중하지 않은 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다. 너무 중요한 나머지 소중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57p

2.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62p

3. 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 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63p

4. 동정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나 자신은 그것을 이미 갖고 있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느낀다면, 연민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나 자신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결핍감을 느낀다. 요컨대 동정은 이질감을 은연중에 과시한다면, 연민은 동질감을 사무치게 형상화한다. 66p

5. ‘외롭다’라는 말에 비하면, ‘쓸쓸함’은 마음의 안쪽보다는 마음 밖의 정경에 더 치우쳐 있다. 외로움은 주변을 응시한다면, 쓸쓸함은 주변을 둘러본다. 마음을 둘러싼 정경을 둘러보고는, 그 낮은 온도에 영향을 받아서 마음의 온도가 내려가는 게 바로 ‘쓸쓸함’이다. 92p

6. 허전함이 무언가를 잡았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손이라면,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보았던 손이다. 98p

7.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182p

8. 솔직함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정직함은 남을 배려하려는 것이다. 200p

9. 질투는 자기가 못 가진 것을 향해서만 생기는 감정이지만, 시기는 자기가 갖고 있으면서도 생기는 탐욕이다. 202p

10. 착함은 현상이고 선함은 본질이다. 착한 사람은 불의를 보고 화낼 줄 모르지만 선한 사람은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착함은 일상 속에서 구현되고, 선함은 인생 속에서 구현된다. 204p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모르던 단어는 없었지만 알고 있던 한 개의 단어가 여러 개로 불어난 기분이다.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저자가 궁금했다. 시인일까 싶어 저자의 이력을 찾아보니 역시 시인이다. 시인이 쓴 산문. 치명적인 매력이다. 나로선 언제나 반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마음의 낱말뿐만이 아닌 인생의 낱말들도 두루 살피고 있는데 유독 육아에 관련된 이야기가 빠져있다. 인생의 시간을 다루는 장에서도 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만 나와 있다. 사랑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연애와 이별에 관련된 낱말들로 가득 차 있다. '함께'를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책 전체의 행간에선 '혼자'인 저자가 읽혔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남는 여운도 조금 쓸쓸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새롭게 보이는 인생의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가능하다면 그것들이 추가되면 좋겠다 싶다. 2008년에 첫 출간되었으니 13년이 지난 2021년 현재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면 꼭 그 부분이 추가되어 좀 더 풍성하고 좀 더 따뜻한 느낌의 책이 되면 좋겠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좋지만 말이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2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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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7 1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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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훔친 소설가 -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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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문학과 뇌과학의 접점


석영중 저, ‘뇌를 훔친 소설가’를 읽고
(책의 부제: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

석영중의 글쓰기는 그녀가 강연할 때 사용하는 말투가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자동 음성 지원이 되어 강연을 듣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빠진다. 그만큼 쉽고 매끄러운 글을 쓴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러시아 문학의 정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동시에 작품을 읽고 싶게 만드는 힘까지 구사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난해하고 전문적인 이야기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풀어줄 수 있다는 건 탁월한 전문성을 갖춘 여유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배울 게 많은 교수이자 작가다. 

유튜브에 올라온 몇 편의 강연을 나는 지난 2년 간 모두 챙겨봤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러시아 문학 전문가로서 석영중 교수는 지금도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번역가로도, 대중 강연자로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학자다. 1991년부터 교수 생활을 했으니, 96학번인 내가 이과를 택하지 않고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문과를 선택했더라면 아마도 나는 석영중 교수의 제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의 경제 사정이 좋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이과를 선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석영중이 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설이라고 볼 수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 특히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는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읽은 나는 이미 그녀의 작품을 모두 보관함에 넣어두고 책을 구매할 때가 되면 한두 권씩 사서 보고 있다. 이 작품 ‘뇌를 훔친 소설가’도 최근에 중고로 구입한 책이다. 제목만 읽으면 금방 와닿지 않지만, 부제를 보면 무슨 내용인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뇌과학 (신경과학)과 문학과의 접점을 찾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조명하여 인간을 보다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뇌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이 꽤 많이 등장한다. 문학 교수로선 결코 적지 않은 공부를 병행하며 이 책을 썼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해준다. 

언뜻 보면 뇌과학과 문학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석영중은 이 둘 간의 만남에서 접점을 찾아내고야 마는데,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이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뇌과학이나 문학이나 모두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상적인 인간에 대한 정보가 아닌 인간의 내면과 본성에 해당하는 부분을 비추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둘은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이 책은 총 네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목만 봐도 흥미를 끈다. 각각 흉내, 몰입, 기억과 망각, 그리고 변화이다. 나에겐 첫 번째 챕터인 ‘흉내’가 가장 인상적이었기에 여기에선 이 챕터만 짧게 언급하기로 한다. 저자는 '감정이입'이라는 문학적 용어와 '거울 뉴런'이라는 뇌과학적인 용어를 연결하여 설명한다. 푸슈킨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안나 카레니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등의 작품을 실례로 들며 모방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흥미진진하게 풀어준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대리만족 같은 현상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 현상이 실제로 거울 뉴런이 활성화되는 현상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직접 어떤 일을 행하지 않아도 문학 작품 속 등장인물의 행위를 보고 마치 자기가 한 것과 똑같은 양상으로 뇌가 활성화된다는 점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감정이입은 생물학적인 현상인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방의 순기능이 아닌 역기능, 예컨대 베르테르가 권총으로 자살한 장면을 많은 젊은 남성들이 현실에서 재현한 사건들을 목도할 때면 문학 작품과 인간의 뇌의 상호작용을 마냥 신기해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된다. 저자는 이런 부작용을 톨스토이가 언급했던 ‘감염’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문제까지 확장해서 언급하고 있다.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다소 진지한 이야기까지, 한 번쯤은 생각해봄직한 논의들을 일목요연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세 챕터 역시 비슷한 형식으로 쓰였다. ‘몰입’ 챕터에서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등을, ‘기억과 망각’ 챕터에서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을, ‘변화’ 챕터에서는 톨스토이, 고골, 체호프 등의 작가들의 여러 작품들을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뇌과학에 문외한인 문학 교수가 쓴 책이기 때문인지 생물학적인 사실을 언급할 때보단 문학적인 장면들을 언급할 때 저자의 내공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나처럼 생물학을 전공하여 대충의 과학적인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독자보다는 생물학에 문외한인 독자들이 읽으면 훨씬 더 흥미롭게 읽을 것 같다. 

#예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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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비아 제안들 시리즈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 / 비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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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지경의 신앙

마커스 J. 보그 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를 읽고
(책의 부제: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민족 삼아 열방에 복을 전하는 게 하나님 선교의 목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열방에 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지 못했다. 참 이스라엘로, 그리고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모든 약속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다. 예수는 왕이시며 주님이시다. 구원자이자 해방자이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점점 오해되고 있다.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보라. 예수의 복음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개인 영혼 구원 정도로 축소되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이야기는 물론 예수가 공생애 기간에 가장 강조하셨던 하나님 나라 사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믿음은 사영리 같은 교리에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 정도로 축소, 변질되었다. 그 결과 구원은 개인적 죄 사함 정도로 좁혀졌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상관없이 바코드가 찍힌 천국행 티켓이 구원의 전부로 전락해버렸다. 천국은 죽어서나 갈 수 있는 막연한 곳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믿음과 신앙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믿은 채 다른 것들은 모두 이단시하고 악마화하여, 열방을 위해 본이 되어야 하고 열방을 향해 뻗어나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갈수록 게토화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나 이단들 가리기에 열을 올리고, 형님 교단, 정통 교단을 자처하며 소위 순수한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데 열을 올린 한국 기독교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연 가지를 쳐내며 남은 순수 정통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아마 이젠 스스로도 그렇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울 것이다. 결국 어렵게 수호한 고요한 우물은 고인 물일 뿐이었다. 고인 물은 썩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결과가 현재 우리가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안타까운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다. 

성공회 소속 신약학자인 저자 마커스 J. 보그의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는 이러한 맥락에서 써진 책이다. 물론 미국 상황에 한정된 이야기이지만, 미국 기독교 우파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한국 기독교의 현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은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았다면 써지지 않았을 책이다. 즉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목소리에는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 잡고자 하는 소망이 진득하게 묻어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왜곡하고 잘못 이해하게 된 데에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인, 비그리스도교인을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 둘째는 이른바 ‘천국과 지옥’이라고 부르는 틀로 그리스도교 언어를 해석하는 것. 요컨대 ‘문자 주의’와 ‘천국과 지옥 해석 틀’에서 그리스도교 언어가 오해된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중심으로 해서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에 담긴 풍성한 의미와 지혜를 되살리고자 노력한다. 이 책은 일종의 ‘그리스도교 언어 입문서’로써 오해되고 왜곡된 언어들의 원래 의미를 되찾아주며 우리의 바른 이해를 돕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다. 구원, 성서, 하나님, 예수, 부활, 믿음, 신앙, 자비, 의로움, 죄, 용서, 회개, 거듭남, 승천, 재림, 천국, 삼위일체, 주기도문 등. 난이도는 전혀 높지 않다.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를 사용하여 술술 읽히도록 쓴 저자의 배려가 돋보인다. 읽어 나가다 보면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던 개념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깊고 풍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단초가 되어줄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그리스도교 신앙을 잘못 이해하고 곡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자 주의’와 ‘천국과 지옥 해석 틀’은 바로 그렇게 유창하게 그리스도교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서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묻는 대신 “저 언어가 ‘그때 거기’에서 그들에게 의미했던 바를 생각하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자 주의’를 넘어서자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문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적인 성경 해석은 반지성적이고 콘텍스트를 철저히 무시한 것이며 개인주의적인 욕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성경은 미지의 독자가 대상이 아니었다. 현재 우리에게 써진 게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상 독자였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써진 책이지만, 하나님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쓴 것도 아니며, 기본적으로 그들을 위해 그들이 쓴 책인 것이다. 즉 시공간의 한계를 가진 인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써진 콘텍스트를 이해하면서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적용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우리가 처한 콘텍스트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 플롯에 천착한 성경 해석은 여러 가지 많은 오해를 불러왔다. 그중 구원이라는 개념은 특히나 많이 왜곡되었다. 저자는 구원은 죽음 저편이 아닌 이편의 삶에서 맞이하는 변환을 뜻한다고 알려준다. 즉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과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모두 아우른다는 말이다.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성서에서 구원은 내세와 거의 관련이 없다. 구약성서가 다루는 거의 모든 세기를 통틀어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구원에 대한 이해는 ‘천국과 지옥’ 플롯으로는 백 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저자가 우스갯소리로 지적하듯이, 만약 기독교가 “언젠가 천국에 가려면 지금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고작 조건과 보상의 종교가 되어버릴 뿐이고, 전도와 선교는 협박이 되어버릴 뿐이다.

대신 저자는 구원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귀양살이에서의 귀환’, ‘위험에서 구출됨’을 뜻한다고 정리해준다. 즉 구원은 새로운 삶,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핵심 주제인 하느님과 언약 맺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은 해방과 변환을 이야기한다. 또한 넓은 차원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개인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다. 성서에 나타난 구원의 정치적인 의미는 두 부분, 정의와 평화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에서 가장 중시하는 정의는 경제 정의다. 가난한 자과 헐벗고 굶주린 자가 구약과 신약에서 끊이지 않고 언급되고 하나님 백성들이 도와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레위기 19장의 거룩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희년의 의미까지도 경제 정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들 말고도 위에서 언급한 리스트에 나온 단어들의 개념 바로잡기가 책의 끝까지 지속된다.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기독교라는 우물에서 평생 자라오면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 우물이 전 우주라고 철저히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도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예수와 예수의 죽음, 부활에 대한 꼭지를 읽을 때면 아마도 거부 반응이 심할 분들도 왕왕 있으리라 예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해석에 대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달고 있으며, 그것을 유일한 해석이라고 강조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경을 넓힌다는 차원에서라도 이 책은 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기독교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해온 분들에겐 필독을 권한다. 기독교라는 큰 우산에서 한국 기독교가 속한 교파나 교단이 얼마나 지엽적인지 알게 되는 기회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2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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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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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폭력을 부르는 보이지 않는 폭력


하인리히 뵐 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책의 부제: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처음 읽는 하인리히 뵐의 작품. 언뜻 주제 사라마구를 떠올리게 하는 촘촘한 필체를 구사하며 언론의 보이지 않는 폭력과 그 파괴력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제목에서 내용을 눈치챌 수도 있지만, 부제는 전체 내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은 카타리나 블룸이다. 꾸준한 자기 관리와 성실한 밑바닥 생활로 고용주로부터 탄탄한 신뢰를 얻으며 수입도 덩달아 늘어났고 현장에서 뼈가 굵어 베테랑으로 인정받게 된 인물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사랑이 찾아든다. 운명과도 같았다. 경솔한 만남과는 거리가 가장 멀 것 같은 성격이었음에도 그녀는 그 운명 같은 날 한 남자를 만나 춤을 몇 시간이나 추고 자기 집으로 데려와 밤을 보낸 뒤 도주로와 은신처까지 챙겨준다. 그렇다. 그 남자는 경찰에서 집중 감시를 당하고 있던 범죄자였다. 범죄자인 걸 알고 사랑에 빠진 건 아니다.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범죄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답게 범죄자라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운명적인 만남은 단지 남녀 간의 관계에서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도 초지일관 떳떳할 수 있도록 만든 사건의 발단이 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차이퉁’이라는 신문은 거짓 뉴스를 나르는 데 선두를 달리는 언론사였다. 이 신문이 카타리나 블룸이 범죄자의 도주를 도왔다는 사실을 보도한답시고 과하게 부풀리고 왜곡시켜서 마치 그녀가 원래 범죄자의 기질이라도 타고났던 것처럼 여론을 조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음표는 마침표가 찍힌 참인 명제가 되었고, 가정문은 기정 사실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졸지에 화냥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근면 성실했던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부정되기 시작했고 모든 게 마치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전초작업과 그녀가 감당해야만 할 업보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는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것도 단 닷새 만에 말이다.

뿐만 아니다. 카타리나를 아끼고 돕던 지인들의 명예마저 모두 실추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지병을 앓고 있던 카타리나의 어머니는 그 충격 때문에 생을 마감한다. 카타리나는 참을 수 없었다. ‘차이퉁’ 기자와의 인터뷰를 덥석 승낙한 뒤 그자를 죽이기로 작정하기에 이른다. 기자가 조금만 친절하거나 조금만 정의로웠어도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자는 카타리나 집에 오자마자 그녀를 희롱했다. 음란한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총까지 몰래 준비했으나 끝까지 망설이던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쐈는지 모른다. 아마 그녀는 빌어먹을 개새끼를 죽이는 심정으로 총을 쏴댔을 것이다. 

그녀는 살인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 게 어디 보통 일인가. 그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현실인가 싶어 살인 후 몇 시간 동안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끝내 자수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맨 정신이었다. 그녀에게서 죄책감은 찾을 수 없었다.

언론의 악질적인 왜곡은 도미노 현상처럼 한 사람을 시작으로 해서 그 주위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한다. 눈에 드러난 폭력,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폭력 중 폭력, 카타리나가 저지른 살인을 유도한 진짜 폭력은 바로 언론의 거짓 뉴스였던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후 그녀에게서 죄책감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장면에서 묘한 공감이 되었던 건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그 살인에서 정당성을 찾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의 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자기를 아끼던 사람들에게까지 어려움을 가져오게 하고 모든 관계를 망가뜨린 주범이 집에 찾아와 성적으로 추근대는 상황을 눈앞에서 맞닥뜨린다면 꼭지가 돌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기자가 죽어야만 했다고, 카타리나가 저지른 살인을 칭찬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야. 개새끼를, 악마를 죽인 거지.’

아마도, 그 기자는 왜곡되고 거짓된 뉴스를 양산하는 언론을 상징하는 인물이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아마도 그 기자를 카타리나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모든 독자들을 대신하여 악질 언론을 죽여버린 게 아닌가 한다. 

거짓 뉴스가 난리를 치는 현상도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신뢰가 관건인 언론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언론사를 떠받치는 자본과 권력의 검은 힘은 줄어들 줄 모른다. 이런 현상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 세상의 끝을 보는 것만 같다. 이런 소설로 대리 만족을 얻어야 하는 우리들의 신세가 처량하기 짝이 없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2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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