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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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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소망: 글을 쓴다는 것.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어제'를 읽고.

주인공 토비아스 호르바츠는 시계 공장에서 일하는 단순 노동자다. 그는 오래 전 다른 나라에서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 성인도 되기 전,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엄마와 내연 관계에 있었던 학교 교사,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의 유일한 사랑 린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남자 상도르의 등에 칼을 꽂았었다.

창녀이자 거지였던 엄마 에스테르가 그를 버리지 않고 키웠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크면 일을 시켜 돈을 벌어내기 위해서였다. 상도르는 토비아스를 그런 식으로 키워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에스테르를 토비아스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다. 언제나처럼 잠자리였던 부엌에서 이 이야기를 엿듣던 중 토비아스는 엄마와 자기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상도르를 불쑥 죽이고 싶어졌다. 그래서 엄마와 포개져 있을 때 상도르의 등에 칼을 깊숙이 찌르면 아래에 있는 엄마까지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아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둘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토비아스는 그렇게 조국을 황급히 떠났었다. 그리고 이 떠남은 자연스럽게 린과의 작별을 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토비아스는 언제나 린을 기다린다. 그가 기다리는 린은 조국을 떠나기 전 학교를 같이 다니던 배 다른 여동생 린이 아니다. 그가 기다리는 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여인이다. 그 누구도 될 수 없고, 또 되어선 안 되는 린. 그런 그녀를 그는 항상 기다린다. 그리고 그는 매일 같이 글을 쓴다.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죄책감으로 가득 찬 상태로, 아무런 연고도 없고 언어도 다른 타국에서 일개 노동자로 외로이 살아가는 이민자와 소수자의 애환은 린과의 불가능한 만남을 소망으로 소환하며 기다리는 토비아스의 마음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시계 공장에서 일하지만 그 공장의 누구도 완성된 시계를 만들 수 없는 비극처럼, 불완전한 토막으로 살아가는 삶. 저자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단문의 향연으로 거침없이 드러내는 메시지의 핵심이 아닐까.

그런데 어느 날, 그 린이 왔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아니 어쩌면 불가능해야만 했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어린 아이를 낳은 채로 의사인 남편을 따라 타국에 1년 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그 기간 동안 토비아스와 같은 공장에서 일과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토비아스는 꿈만 같았다. 꿈이 벌컥 실현되어버린 것이었다.

토비아스의 삶은 그 이후로 완전히 바뀐다.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던 소망이 어느덧 현실 가운데 스며들어와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매일 그녀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이 점심을 먹는다. 일이 너무나도 단조롭고 외로워 자살까지 시도했던 토비아스. 그는 이제 차라리 쉬는 주말보다 일하는 주중이 기다려질 만큼 공장 가는 날이 더 좋아졌다. 그 동안 주말에 아무런 사랑도 없이 만나 잠자리를 같이 하거나 별 말도 없이 시간을 함께 보내던 욜란드에게 찾아가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린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집을 비우고 일을 해야 할 시간에 그를 우연히 마주친 토비아스. 그의 주위에는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 토비아스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칼을 하나 들고 린의 집으로 찾아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푹!" 토비아스의 두 번째 살인미수였다. 이번에도 칼이었다. 누군가를 죽이지도 못하는 칼을 이번에도 휘둘러버렸다.

집으로 가 누군가 자기를 잡으러 올 때를 기다렸지만, 정작 찾아온 사람은 린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칼에 맞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으며, 토비아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경찰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고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이혼하기로 합의를 봤으며, 아이 또한 남편이 데리고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고 전했다. 마침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가 유산까지 하게 된 린. 그녀는 이 모든 상실이 토비아스 때문이라 여겼다. 토비아스에게는 소망의 실현이었던 린과의 만남이 이렇게 끝나버린 것이었다.

린은 그렇게 떠났고, 토비아스는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자살을 하거나 상실감에 젖은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그는 욜란드와 결혼해서 두 아이를 가진다. 첫째는 딸, 이름은 린. 둘째는 아들, 이름은 토비아스. 그는 여전히 시계공장에서 일한다. 그러나 공장으로 가는 버스에는 이제 아무도 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글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그러나 왜 이런 마지막 상황이 내겐 행복으로 비쳐지지 않았던 걸까.

토비아스에게 찾아온 린은 과연 소망의 실현이었을지 생각해본다. 그에게 소망이란 차라리 실현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소망할 땐 마음껏 기다리고 가슴 부풀기도 하며 언제나 상상하고 글도 쓰면서 일상의 따분함과 이민자의 비애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소망이 실현되고 또 떠나버린 자리에는 자유가 사라진 채 현실 안주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에의 의지가 꺾였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소설적 장치가 아니었을까. 그가 이루지 못한 자살은 글을 쓰지 않는다는 행위에서 비로소 실현된 게 아니었을까.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다시 조용히 내게 묻는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4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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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의 눈으로 읽는 성경 1 - 쉽게 시작해 깊게 이해하는
박민근 지음, 신현욱 그림 / 선율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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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하나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박민근 글, 신현욱 그림, ‘조직신학의 눈으로 읽는 성경’을 읽고.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에 이어 출판사 선율이 또 일을 저질렀다. 성경 읽는 또 하나의 렌즈를 대중에게 획기적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을 더 깊고 풍성하게 알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고 그 안에 흐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거대서사나 그 서사가 내포하는 핵심 메시지를 간과한 채 아무런 체계 없이 그저 개인적인 위로나 교훈을 얻는 목적 따위로 전락해버린 오늘날 성경 읽기 풍토에 이 책은 작지만 의미있는 폭탄이 되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는 하나의 돌파구를 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전작의 렌즈가 ‘중근동’이었다면, 이번에는 ‘조직신학’이다. 통상 조직신학이라 하면, 신학자나 목회자들만의 고유한 영역이라 여겨진다. 소위 평신도는 범접할 수도 없는 어렵고 난해한 학문으로 알려져있다 (조직신학이라는 단어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이 책은 담대하게도 그 경계를 허문다. 하나님을 더 알길 원하고 성경 읽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조직신학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촌철살인처럼 쉽고 재미난 그림은 그저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조직신학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익과 그것을 이루는 핵심 메시지를 하나도 놓치지 않을 뿐더러, 글이 잘 전달하지 못하는 뉘앙스까지도 효과적으로 처리해낸다. 그래서 책에 빠져들어 킬킬대다가 진지해졌다가 또 가슴 아파하며 공감도 하다보면 어느새 책이 끝나게 되는데, 머리와 가슴에 남는 건 쓰나미처럼 한바탕 휩쓸고 간 허망한 유머가 아닌, 기독교를 이루고 있는 전통적 교리들에 대한 이해와 이를 통해 조금 더 깊이 깨닫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읽다보면 쉽게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성경 본문끼리 상충되는 부분도 의외로 많고, 읽다보면 (특히 설교에 잘 인용되지 않는 본문들) 자신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모습과 다르거나 정반대의 모습을 만나기도 하면서 해석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무한하고 변치 않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상황에 따라 모순되고 변덕스런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알면 다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무관심한 채 종교생활에 천착해있는 게 현실이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희망이다. 이제 바로 알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단지 읽는 행위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해석하고 전체의 흐름에 어긋나지 않게 이해해야 하는 작업이 필수다. 그저 개인적인 위로나 교훈 따위로 은혜 받았다고 지껄일 목적이라면,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것이기에, 굳히 성경 해석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은 어쩌면 올바른 성경 해석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성경 해석의 중요성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우물에 갇혀 있지 않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깊고 풍성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성경 해석에 있어서 치우치지 않고 건강한 렌즈가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은 성경의 원독자나 원청자들의 세계관과 그들의 한계까지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도와주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그릇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이 책, ‘조직신학의 눈으로 읽는 성경’은 중구난방으로 이해하고 있거나 자신이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성경을 통해 쉽게 풀어주는 동시에, 성경 해석에 있어서 하나의 체계적인 기반을 마련해준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신론 부분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부분을 읽고나면, 아마도 여태껏 오해하고 있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모습을 제대로 밝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속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온전한 형체가 되어지는 경험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조직신학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성경을 완전히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직신학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신학의 우물에서 길은 물을 마신다면, 적어도 우리의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고 조각조각난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더 온전한 형체로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편도 기다려진다. 두꺼운 조직신학 책 읽기가 두렵다면, 나는 여기 이 책을 통해 조직신학의 숲을 구경해보길 서슴없이 추천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3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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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sunhye 2022-11-19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편 찾고 있었는데 아직이군요~ 감사합니다
 
첫사랑 펭귄클래식 19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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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함과 알싸함의 공존.

이반 투르게네프 저, '첫사랑'을 읽고.

손님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난 어느 늦은 밤, 방 안에는 세 명만이 남았다. 적적함을 달래보고 싶었는지 느닷없이 집주인이 돌아가며 첫사랑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자기 순서가 다가오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먼저 자신은 말솜씨가 전혀 없다고 운을 뗀 뒤, 첫사랑 이야기를 말로 하는 대신 기억나는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다음 번 만날 때 읽어주겠노라고 말한다. 썩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두 주 뒤 보란 듯 그 약속을 지킨다. 이 책은 블라디미르가 쓴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회고록인 셈이다. 또한 실화에 입각한 저자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수기이기도 하다.

열여섯 살. 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선 나이. 블라디미르는 첫사랑을 경험했다. 그 낯설지만 압도적인 이미지. 순간이 영원이 되는 것만 같았고, 기꺼이 한 여자의 노예가 되리라 다짐까지 하며,  멈춰진 시간 속에서 폭풍처럼 뛰는 심장을 움켜잡던, 그러나 어느새 덧없는 바람처럼 흘러가버린 나날들. 그에게 첫사랑은 열정의 시작이었고, 동시에 고통의 시작이었다. 풋풋한 감성으로 덧입혀진 것만 같은 기억 속에는 너무나도 아프고 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억들까지도 공존하고 있었다. 

세밀한 감정까지 기억해내며 노트에 옮기기까지의 두 주 동안 과연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처음에는 아마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떤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으로 폭풍 같은 기억 속으로 돌아가 다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가슴 아파 울기도 하며 분노하기도 하고 자책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흘러가버린 세월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추억의 잔상이 전해주는 애잔함에 흠뻑 젖고는 다시 겨우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아, 그 기억을 일일이 들춰내어 글로 옮기기까지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나이다. 블라디미르의 첫사랑.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갓 성인이 된 나이. 그와는 다섯 살 차이. 블라디미르의 마음을 단번에 앗아간 그녀는 그녀를 추종하는 여러 명의 성인 남자들의 마음을 주무르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숭배하게 할 만큼 영악하고 조숙한 여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년이었던 블라디미르에게 지나이다는 성인들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문이기도 했다. 그에게 첫사랑의 이미지는 이성을 향한 호기심이나 동경과도 같은 낭만으로만 채색되지 않았다. 그의 첫사랑은 소년에서 어른으로의 변화를 겪는 시기와도 겹쳐졌다. 이러한 면에서 블라디미르는 아마도 통 종잡을 수 없는,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혼란스러움과 불안과 초조를 동반한 감정으로 그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첫사랑 기억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충격적인 실체와 대면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지나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지나이다를 한창 숭배하던 그 불꽃 같던 시절, 블라디미르는 불현듯 그녀의 마음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닐까 내심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내 자신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도 했으나,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은 아직 소년이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블라디미르는 다행히 적어도 돈키호테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여신과도 같았던 지나이다의 마음을 훔쳐간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가히 충격이었다. 어느 깜깜한 밤, 그녀의 창이 보이는 정원에 몰래 숨어있던 블라디미르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출현을 목격하게 되고, 당황하여 잠시 넋을 놓았다가 그녀의 방을 쳐다봤을 때 침실 안 불빛이 잠시 비쳤다가 커튼이 조심스럽게 창틀까지 내려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사랑이란 거구나, 했다. 마침 누군가의 폭로로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은밀한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자, 블라디미르는 왠지 모를 분노와 기사도 정신과 흥분이 마구잡이로 혼합되어 온전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충분히 버거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사를 감행하고 난 이후 다행히 블라디미르는 곁길로 새지 않고 원래대로 공부하여 대학까지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만난 지인 덕분에 몇 년 만에 지나이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결국 그는 그 기회를 일부러 놓쳐버리고 만다. 두려웠던 것이다. 용기가 안 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며칠 뒤 들은 소식은 그녀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후회했다. 쉽게 잊혀질 후회가 아닌 영원한 후회가 되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첫사랑의 풋풋함과 아픔의 공존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정도와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어수룩하고 부끄럽기만한 첫사랑의 기억. 할 수만 있다면 얼른 수정하고 싶은 마음이 돌연 들다가도,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게 아름다움이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건, 나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탓일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4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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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A. J. 크로닌 지음, 구혜영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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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HE CITADEL: 거대하고 견고한 구조적 악의 실체.

A. J. 크로닌 저, '성채'를 읽고.

이미 고전이 된 이 책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세한 줄거리를 파악하거나 상투적인 교훈 따위를 끄집어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대신, 제목이 가진 의미를 곰곰이 따져 물으며 책 전체에 깔려 있는 저자의 메시지와 이 책이 쓰인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일 것이다.

작은 글씨로 빼곡히 400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이 책에서 '성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본문은 단 세 군데다. 다음과 같다.

1. "...자네는 바빌론의 성채를 때려부수려는 거지. 나에게도 젊은 시절은 있었다네."
2.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인생이란 미지의 것에 대한 공격이며 격렬한 돌격전이라고 곧잘 말씀하시던 것 말이에요. 정상에 있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성채를 한사코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당신은 그런 기백을 가지셨어요."
3. "이윽고 그가 발길을 돌려 시간에 늦지 않도록 급히 나가려 할 때 보니, 눈 앞의 하늘에서 성채의 흉벽 모양의 구름이 뭉글뭉글 밝게 떠올라 있었다."

성채. 영어로는 Citadel. Wikipedia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A citadel is the core fortified area of a town or city. It may be a castle, fortress, or fortified center." 즉, 우리가 디즈니 영화 앞부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공주나 멋진 왕자가 살고, 하늘 위로 불꽃놀이가 펼쳐지며, 뾰족하고 높은 첨탑을 가진 '성 (castle)'과는 사뭇 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낭만적인 상상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측면, 즉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을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도 'The Castle'이 아닌 'THE CITADEL'이다. '성채'보다는 '요새'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비록 문학적 뉘앙스는 조금 떨어질지 모르나, 제목을 이해하기에는 좀 더 적절한 것 같다. 이를 조금 더 풀어서, '어떤 거대하고 견고한 벽 같은 존재', 혹은 '도저히 한 사람이나 소수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실체' 정도로 이해한다면, 적어도 이 책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앤드루 맨슨은 의사다. 저자인 A. J. 크로닌도 이 책을 쓰기 전 의사였다. 앤드루는 크로닌의 분신인 셈이다. 이는 이 책이 크로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리고 이를 제목과 연결시켜 이해해본다면, '성채'는 아무래도 일반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의사의 눈에 비쳐진 '의사 사회의 구조적 악' 정도의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엔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저자가 앤드루를 의사 자격을 갓 취득한 신참내기 의사로 등장시킨 이유 역시 '성채'의 거대함과 견고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당시 영국 의사 사회 내부의 보이지 않은 폐단을 고발하는 메시지를 과감하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앤드루는 성인이 되기 전 부모를 잃었다. 하지만 운 좋게, 빈곤하고 유망한 장학생에게만 지급되는 장학금을 (비록 의사 자격 취득 후 성실히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는 장학금이었지만) 받으며 의대까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다혈질의 스코틀랜드 남성인 그에게는 여전히 의사로서 순수하고 선한 동기가 살아있었으며,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정의감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한 번도 때를 묻혀보지 않은 백지와도 같이 나이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백지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장학금을 갚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그는 남 웨일스의 벽촌, 블레넬리까지 일부러 찾아왔다. 의사 자격증을 딴 지 얼마 안 되는 조수로서는 최고의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의사로서 일을 시작하게 된 첫 도시, 블레넬리에서부터 앤드루는 '성채'의 그림자랄까, 꼬리랄까, 아무튼 혼자의 힘으로, 혹은 순수한 의사의 동기만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폐단을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블레넬리는 탄광 도시이자 벽촌 중 벽촌이었기에, 그가 느낀 성채는 시골 마을이면 의례히 가지는 보수성과 빈약한 시스템 정도로 충분히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저자는 앤드루의 첫 직장을 블레넬리에 위치하게 했고, 마지막 직장을 런던 중심에 부유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 위치하게 했는데, 이러한 순서는 앤드루가 블레넬리에서 인지한 '성채'가 시골만의 문제가 아닌 가장 번화하고 발달된 도시 한복판에서의 문제와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성채'의 규모는 문명의 발달이나 사람들의 경제와 지식 수준에 따라 차이가 날지는 모르나, 그 속성과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이 작가 크로닌이 말하고 싶었던 중요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고로 악의 본질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앤드루의 두 번째 직장은 애버라로라는 고장이었다. 여전히 시골 마을이었지만, 블레넬리보다는 규모가 크고 거주 인구도 많고 좀 더 번화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앤드루는 또 다른 규모와 색깔의 '성채'와 맞닥뜨린다. 블레넬리와 애버라로에서 그가 공통적으로 대면한 '성채'의 속성은 돈과 권력이었다. 블레넬리에서 애버라로로 옮기게 된 이유도 앤드루의 금전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편, 애버라로에서는 돈 뿐만이 아닌 학위, 즉 명예의 힘을 인지하게 된다. 덕분에 그는 산골에 처박힌 시골 의사 직으로부터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영국 의학회 회원증을 따낼 수 있었고, 블레넬리에서부터 순수한 동기로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 온 진애흡입에 관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까지 따낼 수 있었다. '성채'의 진화는 그가 가졌던 백지의 진화도 유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자고로 한 사람이 타락하기 직전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높은 곳인데, 그 높은 곳에 아직은 기름칠이 덜 되어 있어서 미끄러지기 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미끄러워지기 위해선 불의와 위선과의 타협이라는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저자 크로닌은 단계적으로 앤드루를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유인하고, 그 높은 곳을 스스로 기름칠하게 만들어 미끄러져 넘어지도록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일터는 런던에 위치했다. 그의 박사 논문 덕에 정부의 전담 의무관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인맥까지 갖추기 시작했고, 지위는 물론 어느 정도 경제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성채'는 존재하고 있었다. 앤드루는 그곳에서 정부 관료 사회에 고여있던 폐단을 마주한다. 그리하여 표면상으로는 지극히 안정적으로 보이는 자리를 마다하고, 용기 내어 런던의 허름한 변두리 지역에서 개업을 한다.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 햄프턴과의 만남이 재기된다. 햄프턴은 이미 닳고 닳은 불의한 의사 사회에 우뚝 서 있는 성채에서 대활약을 하며 배를 불리고 있는 인간이었다. 소설 속에서 끝까지 선과 정의의 편에 서서 앤드루를 사랑하고 응원해 마지 않던 천사 같은 아내 크리스틴이 가장 못마땅해 하고 경계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축복 뿐만이 아닌 재앙도 언제나 어떤 만남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앤드루는 자신이 증오하고 기피했던 관료사회의 부패함, 즉 돈과 명예로 권력을 사들이고 불의한 일에 연루된 비슷한 사람들끼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안전지대를 만들어 은밀히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부류 속으로 점점 물들어갔고, 그 열매로 그는 점점 성공가도를 달린다. 반면, 아내 크리스틴과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에 아내는 적잖은 실망을 하면서도 끝까지 그를 사랑하고 믿어주었다. 아마도 아내마저 없었다면 앤드루는 파멸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아내의 기도가 이뤄진 것이었을까. 어느 날, 앤드루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불의의 현장에서 무고한 지인의 죽음을 방관하게 된다. 충분히 살 수 있는 환자였는데, 어처구니 없는 돌팔이 친구 외과의사의 짓으로 단 10분 만에 죽어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은 드디어 앤드루에게 양심에 가책을 가해왔다. 아니, 그건 벌써부터 왔었지만, 자신이 살인에 버금가는 짓을 저질렀다고 여겨지자 그는 그제서야 '제자리'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회심'은 곧장 아내 크리스틴에게로 돌아가는 길과도 같았다. 크리스틴은 기뻐했다. 그리고 그를 두 팔 벌려 맞아주었다. 둘은 물질적인 행복이 가져다 주는 족쇄로부터 비로소 해방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이 이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소설 같은 법. 저자는 아내 크리스틴을 죽음으로 내몬다. 아마도 앤드루에게 죄값을 치르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넣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엔 가톨릭 신앙이 녹아있다). 남편이 회심하여 집으로 돌아온 날, 기쁨에 못 이겨 허기진 남편을 위해 일부러 남편이 좋아하는 치즈를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비극이었다. 들것에 실려온 아내 크리스틴의 왼쪽 손가락에는 여전히 그가 좋아하는 치즈가 담긴 조그만 보퉁이의 끈이 휘감겨 있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길이 이렇게도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었을까. 앤드루는 완전히 얻어 맞은 것처럼 한동안 실성한 듯한 상태가 된다.

소설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메시지는 '성채'에 대한 고발이다. 작게는 그 당시 영국 의료 사회의 부패함을 적발하고 고발하는 것이겠고, 크게는 일반적인 구조적 악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적 악의 핵심은 돈으로 산 권력이다. 이는 이 책이 첫 출판된 1937년 당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채'는 시간이 갈수록 고도로 진화를 거듭했다. 82년이 지난 2019년에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는 오히려 거의 백 년 전에도 그렇게나 거대하고 견고한 구조적 악이 존재했음에 입을 쩍 벌릴 뿐이다.

한 인간의 백지와도 같은 순수함이 타락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회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여정이 이 책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상투적인 교훈 따위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내 눈에는 작가 크로닌의 서사와 묘사의 전개 방식과 어떻게 핵심 메시지를 이야기 안으로 자연스레 스며들게 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책을 소개해준 니콜 님에게 감사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6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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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황숙진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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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소수 이민자의 애환을 담아내다.

황숙진 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읽고.

비록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이 책은 미국 엘에이 한인들의 (나아가 모든 소수자의) 현실적인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때로는 소설이 신문보다 현실을 더 잘 반영하는 법이다. 무작위적이고 변화무쌍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이 기록되는 신문은 기사 거리가 될만한 것들을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기록한다. 그래서 그 사건/사고들에 관련된 사람들만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 시대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의 거대한 수레를 돌리고 있는 실제 주인공들은 대통령도, 정치가도, 사장들도, 혹은 범죄자들도 아닌, 바로 서민들이다. 이름도 빛도 없이 그늘에서 살아가는 서민들. 그 중에서도 머나먼 타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이 짙게 녹아 든 이 책과 같은 소설은 사람들의 주목에서 벗어나 있지만 우리네 삶의 현주소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소설이지만, 그래서 허구이지만, 자본이 만든 무대 밖에 있던, 현실세계의 주인공을 실제 삶의 주인공 자리로 불러내어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그래서 더욱 현실 아닌 현실인 것이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지명과 가게나 길 이름은 자칫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이 소설이 아닌 저자의 회고록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만큼 작가 황숙진의 실제 경험이 보이지 않게 묻어 각 작품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소설의 뼈대가 되었다. 허구도 너무 허구적이면 허구의 기능을 상실한다. 독자가 잠시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삶의 현실감이 긴장감과 함께 부여될 때 그제서야 허구는 허구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LA 타임즈와 같은 신문에서보다 LA의 삶을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홉 편의 작품에 (다는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소수자, 이혼, 돈,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그리움 등이다. 피라미드 시스템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이 곧 정의이고 이기는 것이 정의일 때가 부지기수다. 언제나 피해는 피라미드 저변을 받치고 있는 서민들, 그 중에서도 신분과 인종, 경제적 차별을 받는 소수자들의 몫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미국이란 나라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엘에이 다운타운에는 홈리스들이 넘쳐나며 미국 내 범죄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다. 한인타운은 바로 그 다운타운 옆에 위치한다. 이민 1세대와 2세대들의 삶의 터전이 된 그곳은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공감할 수 없는 애환이 있다. 말로 하기도 어렵고 기사로 쓰기도 어려운 그들의 애환이 궁금하다면, 난 이 책을 주저 없이 권하고 싶다. 

다음은 아홉 편의 각 작품을 간단히 요약하며 감상을 조금씩 덧붙인 글이다. 책을 선물해 주신 저자 황숙진 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미국인 거지
첫 작품으로 수록된 '미국인 거지'는 엘에이 한인타운에 거주하는 한 중년남성의 애환을 그려내고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은 2008년 재외동포문학상 소설 부문에서 입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주인공 '나'는 십 년이 넘도록 가게를 운영하며 악착같이 살아왔다. 그러나 아내는 유방암으로 죽었다. 딸도 집을 떠났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젊었을 적 한국에 있을 때엔 해병대에 자원하여 월남 전에도 참전했었다. 돈 때문이었다. 운이 좋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전쟁 후유증에 시달린다. 삶이 힘들어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냉장고에 붙어 있던 알코올 중독 재활센터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운명인가 싶었다. 손목을 그으려던 식칼을 내려놓고 전화를 걸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일자리도 구했다.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갱단들끼리의 총격전도 자주 벌어지는 우범지대에 위치한 리커스토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그리고 가게 앞에 늘 서있는 흑인 거지 '잭'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는 다른 거지들과는 달리 구걸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한때 부자였으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마약에 손을 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역시 월남전 참전 후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나'는 잭에게서 묘한 공감대를 느낀다. 어느 날 갱단의 총격전 때문에 잭이 머리에 총을 맞아 구급차에 실려간다. 그 때문일까. '나'는 일 년 만에 다시 술을 마신다. 그리고 잭의 발작은 '나'의 발작으로 전가되었다. 술에 취한 '나'는 다시 월남 전의 '나'로 돌아간다. 함께 일하는 씨씨를 위협하다가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에 맞은 건 씨씨였을까, '나'였을까. 싸이렌 소리가 나고 경찰이 구급침대를 들고 와 결박하여 구급차에 싣는 건 '나'였다. 

산타모니카의 기러기
이 작품에서 저자는 김숙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결혼 후 잘 나가는 남편의 조용한 외도로 반강제적이면서도 반자발적인 미국행을 택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딸아이의 교육이었다. 한국적인 삶의 습관을 벗어나는 게 어려워 선택한 곳이 엘에이 한인타운이었다. 직업도 없이 남편이 한국에서 보내주는 적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비자 문제와 운전면허증 때문에 영어학원에 등록해놓고 간신히 불법체류를 면하고 있었다. 남아도는 시간이 무료하여 한국의 시조를 배우는 시조토방에 취미로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만난 강사 강석진은 그녀에게 남자로서 접근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록 어린 딸아이도 금새 파악할 정도로, 그리고 외도하는 남편에게 직접 따지거나 화도 못 낼 정도로 바보 같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신까지도 그럴 수는 없었나 보다. 그러나 어느 날, 딸아이의 학교폭력사건이 터졌던 날, 그녀는 미칠 것 같은 감정에 홀로 산타모니카 피어를 찾는다. 자살 생각까지도 할 때 즈음, 그녀는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본다. 언젠가 시조토방에서 배운 이옥봉 시인의 시조에 등장했던 그 기러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강석진에게 편지를 쓴다. 인생이 슬프고 힘겹지만 마음을 굳게 먹겠다는 다짐을,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나 한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내가 달리기 시작한 이유
이번에 작가는 초등학생인 둘째 딸이 된다. 사람이 좋아 사업에서 망한 뒤 집에만 틀어박혀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아빠, 덕분에 생계가 어려워져 직접 일자리를 찾아나선 엄마, 그리고 철이 덜 든 사춘기 고등학생 언니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다. 이름은 체리, 그녀에게는 단짝인 알리사라는 두 살 어린 친구가 있다. 약물과다로 생을 마감한 엄마를 뒤로 하고 할머니와 꿋꿋하게 살아가는 작은 아이다. 알리사 엄마의 죽음은 체리가 처음 목격한 죽음의 실체였다. 이 작품의 저변엔 죽음이 잔잔히 흐른다. 하지만 생각이 깊은 초등학생 체리의 눈으로 본 삶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비록 작품의 끝부분에서 아빠가 한국으로 홀로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상황을 맞이했지만 말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슬픔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저자의 애환이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정제되고 절제되어 잘 그려져 있다. 체리가 달리기 시작한 이유는 울지 않기 위해서다. 멀리 떨어져있거나 설사 죽은 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뛰고 있는 자신을 뒤에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눈물도 흘리지 않아야 했고 씩씩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네타
주인공 영진은 어느 날 밤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오래 전 연락을 끊었던 친구 선우였다. 둘은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함께 예일대에 입학했다. 서로 주류사회에 들어가자고 화이팅을 했었다. 예일대 입학은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특히 아버지가 동네방네 자랑을 하실 만큼. 그러나 김치 냄새가 나는 영어실력으로는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영진은 졸업 후 꿈을 갖고 해오던 카피라이터 일에서 실패함으로써 선우보다 먼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에게 말하지 않고 엘에이로 돌아왔다. 가족까지 데리고 돌아온 그를 아버지는 수치스럽게 생각하셨고, 할아버지 건강 문제로 한국에 가신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선우는 월스트리트에서도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마치 자살 직전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것 같은 뉘앙스로 전화가 문득 걸려온 것이었다. 영진은 위급함을 느끼고 곧장 뉴욕으로 날아갔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우가 다니던 회사 부사장이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선우는 마이애미애서 실종되었다고. 그리고 그 이전에 돈을 횡령하여 도망쳤다고. 영진은 허탈했다. 선우가 자살했다는 정황이 그랬고, 자신이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이 그랬으며, 선우가 범죄까지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랬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영진은 선우를 우연히 본다. 선우는 카멜레온처럼 위장하여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고 영진은 이용 당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모네타, 즉 돈 때문이었다.

어느 장거리 운전자의 외로움
운 좋게 명문대를 졸업한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한 후 시애틀에서 조그만 마켓을 운영하며 아내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아내로부터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는다. 그녀는 주인공이 그녀의 명의로 돌렸던 집마저 팔아 버리고 그 돈을 다 챙겨서 얼굴 한 번 비추지도 않고 달랑 쪽지만을 남겨둔 채 떠나버린 것이었다.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여 뉴욕에 산다는 그녀를 찾아가 죽이려고도 시도했었지만, 이미 그는 그녀에게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져 있었기에 경찰에 체포되어 두 달이 넘게 감옥을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허망한 마음에 가게를 누나에게 넘기고 엘에이로 내려와 십 년이 넘도록 노가다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가고 있는 그였다. 어느 날 신문광고에서 "장거리 운전하실 분. 시민권자 환영"이라는 기사에 눈이 간다. 그는 엘에이도 벗어나고 싶었고 노가다도 때려 치우고 싶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전화를 걸어 구인광고를 낸 자를 직접 만나보니 그가 맡을 임무는 한국에서 건너온 밀입국자들을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 미국까지 불법으로 실어다 주는 일이었다. 한 사람 당 천 달러, 7인승 밴에 사람이 꽉 차면 한 달에 두 번만 해도 노가다 몇 달치를 한 번에 벌 수 있는 큰 돈이었다. 범죄에 가담하는 사실이 꺼림칙했으나 그에겐 돈의 유혹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는 마치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걸 도와주는 '코요테'처럼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몰래 사람들을 날라주는 코요테가 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의 첫 임무는 마지막 임무가 되어버린다. 밀입국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창녀라고 불리는 한국여성들이었다. 인신매매와도 같은 범죄였다. 그들은 돈이 필요해 그런 극단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모두 미국으로 입국시켜 룸살롱이나 마사지샵에 일하도록 계획되어 결국은 성매매에 이용되는 운명들이었던 것이다. 첫 임무가 시작되기도 전, 함께 일하게 된 이 부장의 지나친 변태 행위를 목격하곤 도저히 그를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에 취한 그를 때리고 결박한 후 여자들만을 데리고 미국으로 밀입국 한다. 여자들에게 자유의 몸을 허락해주는 동시에 그는 그 일에서 손을 떼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 가운데 수지라는 여자만은 자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래 계획된 라스베가스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빚진 돈이 있고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등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못해 그는 수지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라스베가스로 향하고, 거기서 돈을 도박으로 다 잃고, 수지와 작별을 한 후 쓸쓸히 엘에이로 돌아온다. 

죽음에 이르는 경기
이 작품의 시대는 미래다. 자본주의의 몰락을 코 앞에 둔 시점이다. 화자인 '나'는 기자다. 최근 사회부에서 경제부로 전속되었다. '나'는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밝은 미래를 자부하는 대부분의 학자들보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것의 몰락을 예견한 학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어느 날, 숙직하고 있는 새벽,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어떤 여자였다. 콜로세움이라는 레저와 주거 복합의 새로운 콘도미니엄에 있는 K2 선수들의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그녀는 대뜸 그곳에서 은밀하게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마침 '나'는 아담 스미스 300주년을 맞이하여 특집 기사를 쓸 계획을 하고 있던 차였다. 콜로세움 건립 등으로 갑부가 된 Lifjoy44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자본주의가 본인이 생각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기도 한다. 이어서 그는 자본주의를 낙관하는 프랭클린 교수와의 인터뷰, 그 반대를 예견하고 있으며 지금은 은퇴 후 엘에이 근교 시골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쩌라이 교수와의 인터뷰도 끝냈다. Lifjoy44와의 인터뷰 때 선물로 받은 콜로세움 평생 회원권을 사용하러 간 날 밤, 전화 속 그 여자가 찾아와 자신이 일하는 선수 식당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K2 경기에서 패배한 스모크 킹의 시체를 직원들이 들고 와 토막을 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숨을 죽이고 있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무음처리를 깜빡 했던 것이다. 스마트폰을 여자에게 넘기고 '나'는 달려나가다가 붙잡힌다. 정신을 차려보니 Lifjoy44가 눈 앞에 있고 권총을 들고 있다. 바로 그때 TV에서는 '나'가 찍은 동영상이 그 여자에 의해 배포된 탓인지 무장경찰들이 콜로세움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이 보인다. Lifjoy44의 총구는 결국 '나'가 아닌 자신의 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2038년 여름, 금리 0%를 기록하며 사실상의 자본주의, 즉 죽음에 이르는 경기는 종식된다. 

호세 산체스의 운수 좋은 날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국인이 아닌 멕시코인이다. 그는 불법으로 미국에 건너왔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엘에이에는 한국인만이 소수자가 아니다. 히스패닉이 수로는 한국인보다 많을지 몰라도 그들 대부분의 경제사정은 한국인들의 그것보다 못하다. 실제로 가게에서 단순노동을 맡고 있는 층은 그들이다. 한국인은 백인들에게는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은연 중에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에게는 우월감을 느낀다. 이 작품에서도 한인타운은 주인공 호세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으로 느껴진다. 미국에 온 지 이틀 만에 몇 십 달러 (멕시코에서는 적어도 한 달은 일해야 벌 수 있는 돈)를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틀 만에 그는 기습 단속을 나온 마약 단속반에게 마리오 일당과 함께 억울하게 체포되었고, 그의 밀입국 사실이 조사과정에서 밝혀져 멕시코로 추방되었다. 마치 실제 기록을 쓴 것처럼 구성된 이 작품 역시 소수자의 애환을 절절히 담아내고 있다. 소수자란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는 개념인 것이다. 주인공 호세의 미국에서의 이틀은 운수 좋은 날이자 경찰에게 체포된 날이다.

거칠어진 손
주인공 '나'는 하얀 손을 가진 대학생이다. 집안 사정이 힘들어 스스로 대학을 휴학하고 아버지가 몇 십 년간 했던 노가다를 시작했다. 몇 달 만에 그의 손은 여느 노가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손으로 변해갔다. 그는 익숙해지는 일에서 만족감도 느꼈지만, 동시에 공부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양의 고된 일을 맡게 된 '나'는 늘 함께 일을 하던 최 선생님도 불평하며 돌아가버린 후 혼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처리해버린다. 그 하루 동안 '나'는 생각이 정리되면서 내면의 전투를 드디어 끝낸다.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전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게 먹게 된 것이었다. 하얀 손은 자신에게 더 이상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다.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주위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날이 '나'에게는 노가다의 마지막이자 유학 생활도 마지막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노가다라도 하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살 계획을 마친다. 거칠어진 손의 자아를 마침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오래된 기억
마지막 작품인 '오래된 기억'은 저자의 삶의 흔적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허구이지만 허구만은 아닌, 그 어느 경계에 서있는 저자의 모습이 잔잔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한강의 '소년이 온다', 마치 이 두 작품이 심층에 녹아 있으면서도 저자만의 독특한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탄생한 작품인 것만 같다. 참고로, 이 단편소설은 2013년 재회동포문학상 소설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광주대학살이 벌어졌던 1980년, 주인공 환길은 대학생이었다. 지금은 오십 중반에 이른 중년의 남성이다. 아내와는 이혼을 했고, 큰 딸은 시집을 갔으며, 작은 딸은 대학에 가느라 집을 떠났다. 그래서 환길은 외톨이다. 이혼 후 정리가 어느 정도 되자, 환길은 늘 해오던, 한국에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남은 인생을 한국에서 보낼 가능성도 열어둔 상태라 그것도 점검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삼십 년 만에 찾은 한국은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미국 엘에이 한인타운에 거주하면서 늘 한국 뉴스를 놓치지 않던 그였지만, 실제로 그가 다니던 대학과 고향을 방문했을 때 직접 피부로 느꼈던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미국에서의 삶이 늘 겉돌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낼 만큼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래서 반대급부로 오래된 기억 속에 더욱 아름답고 아련하게 자리하고 있던 한국을 방문했었지만, 정작 그가 느낀 건 또 다른 맛의 이질감이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모두 고향을 느끼지 못하는 경계인이자 주변인,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의 슬픈 정체성을 가진 이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 환길이다. 이 작품 속에는 두 시공간이 동시에 흐른다. 젊었을 때의 환길과 현재 중년의 환길이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환길은 고등학생 때부터 서울 생활을 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도 가담했으나 과외 학생이었던 영선과의 육체적 접촉으로 인해 생긴 아이로 말미암아 미국행이 결정되었었다. 영선과의 결혼은 결국 파혼을 맞이했고, 현재의 환길은 흰 머리가 생긴 중년남성이 되어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이었다. 예정보다 일찍 엘에이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환길은 자신의 과거로의 여행이 끝났음을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 서서 아름다운 인생의 의미를 물을 것이다. 이민자의 애환은 경계에 서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4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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