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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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또 다른 세상을 맛보게 해 준 작품


마쓰이에 마사시 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평생 잊히지 않을 작품. 반드시 소장해야 할 책. 곁에 두고 자주 읽으며 필사하고 또 외우고 싶은 책. 그 어디로 이사를 가더라도, 혹은 무인도에 가게 되더라도 가장 먼저 챙길 열 편의 작품 리스트에 당당히 오른 책. 아, 이런 축복이 또 나에게 주어지다니!


기발한 발상도, 놀랄 만한 사건도, 특별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 작품. 그러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고 내 눈과 마음을 완벽히 사로잡아버린 글의 전개는 작품을 읽는 내내, 그것도 장장 400 페이지에 걸쳐 지속되었다. 나에게 이 작품은 어퍼컷처럼 체중을 실은 큰 한 방은 없지만, 무수히 많고 작은 잽들로 독자를 압도시키고, 나아가 중독까지 시켜버리는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말하자면 문체다. 탄탄한 문장력과 필력은 아름답고 고유한 문체로 인해 더욱 빛이 났다. 책을 덮고 내 마음은 보슬비에 흠뻑 젖은 옷처럼 마쓰이에 마사시의 문장들로 흥건하다. 그의 문체를 몽땅 흡수해버리고 싶은 강한 욕망이 부러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함께 지금도 내 안에서 들끓는다. 나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다.


이 작품이 지금으로부터 고작 10년 전인 2012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은 나를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고전 문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현대 소설이라니! 내가 지향하는 소설의 방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하나의 실례를 본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나는 전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마음속으로 그렇게나 바라던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공간에서 턱 하고 마주치게 되었을 때의 마음이랄까. 그 당황스럽고 황당한 기분, 그러나 한 편으론 놀랍고도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복에 겨운 이 감정을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뻔한 내용을 뻔하지 않게 풀어낼 줄 아는 것도 능력이지만, 뻔한 내용을 뻔하게 풀어내면서도 독자들이 빨려 들어가며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은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 마음을 충분히 읽고 공감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 표현하지 않고 충분히 절제한 뒤,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 그리고 화자의 독백을 이용하면서도 독자의 개입을 자유로이 허락하여 이야기를 함께 느끼고 즐기고 전개해나가는 방식. 이런 방식이야말로 이런 작품을 가능하게 만드는 주요 팁이지 않을까 싶다. 진심으로 모방하고 싶고 내 것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문장들이 실로 넘쳐나는 작품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모든 작품을 보관함에 담았다. 연구할 가치가 차고도 넘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 작품이 가지는 위상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이 책을 읽고 한국 번역본의 제목이 참 잘 지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니. 내가 작가로서 읽은 감상이 아니라 독자로서 읽은 감상은 정확히 그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마음 한 구석에 여름 별장에서 현대 도서관 건축을 위해 보내던 주인공을 비롯한 무라이 슌스케, 또한 그의 사무소 가족들의 일상이 아련하게 남는다. 그리고 제목처럼 이 아련함은 아무래도 나에게도 오래오래 지속될 듯하다.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6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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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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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햇살에 비친 일상의 긴 그림자

가즈오 이시구로 저, ‘녹턴’을 읽고
비록 나지막하지만, 다섯 편으로 구성된 이 작은 단편집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 하나다. 다섯 내러티브, 다섯 내레이터, 그리고 한 명의 작가. 이 엄연한 사실을 주지하기라도 하듯, 다섯 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음색과 같은 톤으로 채색되어 있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목소리다. 묻히기 쉬운, 마치 읊조리는 듯한 그의 작은 목소리를 알아챈다는 것은 곧 이 작품을 제대로 읽어낸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 생각한다. 그렇다.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는다는 건 평범한 일상에 녹아든,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우수가 깃든,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안다는 것이다.
나의 가즈오 이시구로 전집 읽기의 마지막 정거장인 이 작품은 부제에서도 밝히고 있듯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이다. 때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통해, 때론 노래하는 사람, 때론 음악 감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다섯 가지 이야기는 모두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비춘다.
특히 내레이터가 음악가인 경우, 이야기는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의 삶을 조명한다. 여기서 무대 아래의 삶이란 쉬는 시간이라든지 휴일의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대 위에 오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음악인들, 다시 말해 유명인의 대열에 끼지 못한, 성공하지 못했거나 이미 그 시기를 놓쳐버린 음악인들의 일상을 통칭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이름을 알린 음악인보다는 그렇지 않은 음악인들이 현실에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이 작품은 대부분의 음악인의 현실적인 일상을 조명한다고 볼 수 있다. 무명 음악인의 평범한 일상의 단면을 정오의 강한 햇빛이 아닌, 비스듬히 비치는 늦은 오후의 햇살로 조명한다고나 할까. 그로 인해 생기는 긴 그림자는 작품을 읽고 난 이후에 남는 여운이 된다.
각 단편은 이렇다 할 위기나 사건의 부재 위에서 잔잔하게 진행된다. 비루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훌륭하다거나 특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고는 있어 특별한 어려움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정적이라거나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 충만함이나 성취감보다는 결핍과 공허가 일상을 가득 메우는 삶. 차라리 형편없는 실력의 음악인이었더라면 그들의 빈자리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으리라. 차라리 그들에게 여전히 젊음이 허락되었더라면 그들의 여백엔 적어도 우수가 깃들진 않았으리라.
절반도 남지 않은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음악인들. 한때 꿈이었던 삶을 뒤로하고, 여전히 미련을 가슴 한 편에 간직한 채 그 삶 근처에서 맴돌며 살아가고 있는 음악인들. 왜 나는 그들의 삶에서 내 인생을 읽어내고 아파하며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되는 걸까. 왜 나는 어느덧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내 나이를 곱씹으며 텅 빈 공간을 응시하게 되는 걸까.
밋밋하지만 그게 바로 내 삶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나는 조금은 우수에 차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는 그들을 향해 마음 담아 응원하게 된다. 무대 아래야말로 일상을 이루는 베이스캠프이며, 내가 나와 동지와 세상과 연대하는 곳 또한 다름 아닌 바로 이곳, 나의 허름한 일상임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견딤의 미학 가운데 성실히 오늘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동지들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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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 - 사도신경에 담긴 그리스도교 신앙 해설
김진혁 지음 / 복있는사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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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에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김진혁 저,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를 읽고




저자 김진혁의 글을 처음 만난 건 그가 해제를 담당했고 칼 바르트의 절친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이 쓴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에서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이자 일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 책을 놓칠 수 없었다. 그 책을 통해 문학 속에 녹아든 신학을 맛볼 수 있었으며, 문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 아닐까 하는 현재의 내 지론에도 이르게 되었다. 특히 김진혁의 해제는 도스토옙스키를 해제한 투르나이젠에 대한 해제, 혹은 두 거인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해제라고 볼 수 있기에 제삼자의 관점에서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두 번째로 만난 책은 C. S. 루이스의 삶과 사상을 훑어보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상상력, 이성, 신앙의 조화를 촉구하는 ‘순전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물론 루이스의 작품도 대부분을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 김진혁의 글은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을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잘 정돈되고 겸손하며 잘 써진 글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나는 김진혁이 쓴 두 책에서 맛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는 그의 최신작인 이 책,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에서 정점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면 사도신경 주해인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은 부제에서도 밝히고 있듯 사도신경 그 자체에 대한 해설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기독교 신앙을 해설한다. 조직신학자이자 철학 박사 학위 소유자답게 저자 김진혁의 글은 사도신경의 각 조항에 담긴 교리를 신학의 언어만이 아닌 철학의 언어와 개념을 동원하여 설명한다. 신학에 철학까지 가세했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신학 책 한두 권이라도 읽어본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이 상당히 쉽게 써졌고 가독성이 높으며 저자의 철학적인 관점과 해석 덕분에 오히려 다른 신학 책보다 더 풍성하다는 느낌은 물론 그것이 만들어낸 깊이까지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2021년 우드베리 연구소에서 ‘선교 현장을 위한 기독교 교리 해설’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연속 강의를 보완하여 엮었다고 한다. 교리를 기본적으로 다루되 신앙의 실천적 지평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책 소개가 내 시선을 끌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사도신경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역사적, 교리적인 지식을 넘어서 전반적인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신비에 대해 다시금 묵상할 수 있었고,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어야 할 바를 핵심적으로 요약한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처럼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사도신경이 가지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통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전 생애를 걸겠다는 공동체적 고백이 역사와 전통과 함께 오롯이 담겨있다는 점은 여러 교단의 신학을 초월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 김진혁은 특정 교단 신학을 변증하듯 사도신경을 풀어내지도 않을뿐더러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개성 있는 생각과 주장을 조심하며 글을 써 나간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관심 있는 비기독교인이 읽어도 치우치지 않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처음으로 기독교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기독교인에게는 입문서로써 손색이 없을 것이다.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은 사도신경을 읽어 내려가는 순서를 따르며 기독교 교리와 전통적인 신앙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1부 하나님, 2부 예수 그리스도, 3부 사람, 4부 성령과 교회, 5부 죄 사함, 그리고 6부 종말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 등의 조직신학적 주제를 가볍게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유일신론, 삼위일체론에 대한 부분도 좋았지만, 성자의 자기 내어주심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읽어내는 전복적인 해석을 읽을 때 나는 묵직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창조와 새 창조의 대비가 아담과 그리스도로 표현되듯, 하와의 첫 불순종에 대비되는 마리아의 순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해석도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또한,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나 개척자가 아니라, 자신을 만드시고 자신에게 말을 건네며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반응함으로써 자아를 형성해 가는 존재”라는 문장을 읽을 땐 숨을 멈추고 책을 덮고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수동태적’ 존재”가 요구된다는 문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죄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궁극적인 기준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아니라 ‘성육신한’ 말씀이어야 한다는 문장 역시 나를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거룩함’이 요구하는 ‘구분됨’과 ‘보편성’이 빚어낸 ‘개방성’ 속에서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이를 현실화하는 선교적 공동체로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는 문장이나, “공동체에 현존하는 성령은 ‘다원성과 자율성’의 원천”이라는 문장을 접했을 땐 현재 한국 교회가 처한 암담함이 떠올라 가슴 한 편이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사건으로서의 구원과 과정으로서의 구원의 의미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수동적 위치에 처한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능동적인 태도가 요구된다는 부분에서 균형 잡힌 칭의의 논리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의 핵심 내용이 “죽음 이후 그리스도인이 경험할 진정한 피안은 단지 천국이 아닌 하나님 자체”라는 부분을 읽을 땐 전율이 돋았다. 부활과 영생 부분에 있어서도 삼위 하나님의 교제하는 삶에 영원히 초청되어 함께 누리는 것이 바로 그것의 의미라는 문장을 접하고 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이 책 덕분에 매주마다 참석하는 교회 예배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교리와 그 교리를 이루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점검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나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가 회복되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다. 아무리 문학 책이 좋지만, 신학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아닌가 싶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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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북로드 세계문학 컬렉션
나쓰메 소세키 지음, 북트랜스 옮김 / 북로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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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저, ‘마음’을 읽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품은 자를 확신으로 이끌었다가도 이내 무지의 바다에 빠뜨려 당황스럽게 하며, 알아챈 자 역시 동일한 미궁에 빠뜨리고 마는 것.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이며 정체를 알 수 없어 그 존재 자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 그러나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제목이기도 한 바로 그것. 마음. 


읽는 내내 복잡한 마음이었다. 작품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작품을 읽는 내 마음만 복잡했을 뿐이다. 마치 확신과 무지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심정이었다. 나는 또다시 내 안에서 깊은 모순을 느꼈고, 죄책감을 느꼈으며, 속죄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낯설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뇌했고 아파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시기에 손에 쥐게 된 책이 ‘마음’이라니. 어쨌거나 나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뒤늦게 또 하나의 거장의 작품 세계로 입문하게 된 것이다.


정의하기가 까다롭지만 (불가능할지도), ‘마음’은 ‘심리’ 혹은 ‘인간의 본성’과도 중첩되며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는 본질 중 하나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생각과 마음’의 이분법을 들며 생각은 머리에서 마음은 가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생각이 머리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동의가 되지만, 마음이 가슴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동의가 되지 않는다. 생각과 마음이 과연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면에서도 나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관념적이라거나 추상적이라서, 마치 영혼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부정신학적인 방법을 차용할 수 있다면,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은 적어도 가슴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고. 


인간의 본성을 다룬 여러 천재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읽어왔지만, 단 한 번도 지겹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는 작가마다 다른 각도, 시선, 문체로 다양한 상황, 사건들을 다루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마도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신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묘연함이 가지는 매력이랄까. 안다고 여겼으나 알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 같은 힘이랄까. 글의 영원한 소재와 주제가 될 마음. 작가 정보를 간략하게 훑어보니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의 마음 (혹은 심리 혹은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대표작이라 불리는 이 책에서도 그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주력한다. 서사보다는 묘사에 치중한 작품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고 마음에 남았다. 아마도 한동안은 그러리라 생각된다. 그 때문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도 들여다보고 싶어 오늘 나는 여러 작품들을 찾아 보관함에 넣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두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1, 2부의 화자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아니 어쩌면 운명적으로, 3부의 화자인 ‘나’를 만나게 된다. 첫 문장을 “나는 그분을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로 시작하는 것만 봐도 이 작품은 1, 2부의 화자가 3부의 화자를 만나고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 형태를 띠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게다가 3부는 분량이 전체의 절반 정도 되는 데다 편지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 나쓰메 소세키 시선의 무게중심은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의 마음 위에 머문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1, 2부의 화자는 3부의 화자를 전면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공교롭게도 죽음이었다. 그것도 타살이 아닌 자살. 이 작품에서도 죽음 (자살)의 냄새는 진하게 배어있다. 선생님이라 불렸던 3부의 화자도, 또 그를 자살하게 만든 동기를 제공했던 과거의 친구 K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1, 2부의 화자가 적어도 이 작품 속에서는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 여겼다. 일본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번엔 또 누가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된다. 


나쓰메 소세키는 선생님의 마음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다거나 파헤치지 않는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가능한 그대로 묘사하려 애썼던 것 같다. 시대가 지나도 인간의 마음은 마치 그대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레 시공간이 엄연히 다른 곳에 위치했던, 그것도 가상의 인물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장수 비결일 것이다. 어쩌면 스토리텔링 혹은 내러티브의 무게중심은 거대하거나 기발한 서사에 있지 않고 그 서사 가운데 서 있는 인간의 내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의 힘이다.


선생님의 마음을 한 단어로 집약시킬 수는 없겠지만, 부채감, 죄책감, 수치 등으로 해석한다면 모든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그가 이 작품의 3부를 이루는 생애 마지막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자살을 감행했던 이유 역시 이런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선생님은 막역했던 친구 K의 자살을 본인이 저지른 타살로 여기진 않았을까. K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하숙집 주인의 딸을 K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 발 앞서 결혼을 서둘렀던 선생님. 축복된 결혼식에서도 K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K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내에게 죽기 전까지 진실을 말하지도 못한 채 세상과 동떨어진 섬이 되어 평생을 살아갔던 선생님. 3부를 이루는 마지막 편지 안엔 모든 진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1, 2부의 화자는 이 세상에서 선생님의 진실을 알게 된 유일한 남자가 된 것이었다.


마지막 편지는 선생님의 독백이기에, 그리고 인생 전체가 담긴 막중한 무게 때문이라도, 독자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K의 자살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내가 발췌한 다음의 문장들만 읽어도 선생님의 마음을 살짝이라도 훑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네. 내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네.”


“나는 책략으로는 이겼지만 인간으로서는 패배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네.”


“내가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은 문구는, 편지 끝에 남은 먹물로 갈겨쓴 듯,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마지막 한 줄이었네.”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기만당했을 때 타인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만큼 나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은 완벽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 그런 믿음이 K의 일로 보기 좋게 무너지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을 때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네. 타인에게 등을 돌렸던 나는 곧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었고, 나 자신을 가둔 채 점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 변하고 말았네.”


“그럴 때마다 나는 웃기만 했지. 그러나 속으로는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슬펐네. 아니지, 이해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만들 용기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고 해야 옳을 것이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지. 나는 외로웠네. 나는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했네.”


“현실과 이상의 충돌, 그런 표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지만, K는 나처럼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네. 나 또한 K가 걸어간 길을 똑같이 걸어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거든. 나뭇잎을 소리 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욕망, 배신, 불신, 죄책감, 부채감, 고독, 그리고 자살. 이렇게 흘러가는 플롯에서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존재할까. 그럴 수 없기에 이런 문학 작품은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면서도 끊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읽히는 게 아닐까. 본질은 마음이다. 진정성 어린 마음. 모든 서사를 뛰어넘어 독자의 마음에 가 닿는 그 무엇. 밝음보단 어두움이 지배하는 작품이지만, 모든 인간의 마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가식적인 밝음을 만들어내어 보이는 것보단 어두움을 직시하게 만드는 방식이 주는 이 의외의 효과. 아, 인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다면.


#북로드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53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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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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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시로 번역하기


크리스티앙 보뱅 저, ‘환희의 인간’을 읽고

모든 단어와 문장이 반짝거리는 글. 크리스티앙 보뱅에겐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표현도 식상하다.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서 보뱅은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인다. 왜 여태까지 그를 몰랐을까. 이제서라도 그를 알고 그의 글을 읽게 된 걸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한편으론 두렵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작가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지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과연 내 삶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 것인가, 하고 묻게 된다. 괜한 죄책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나는 내가 모르는 작가들의 글을 찾아 나서는 글 사냥꾼이 되고 싶은가 보다.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며 문학을 가까이하게 되어 참 다행이다. 문학은 내 삶의 여백을 채운다.

시인의 입김이 녹아있는 에세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러나 결코 과하지 않은 단어의 선별은 글의 정확성은 물론 글의 아름다움까지 담아낸다. 그동안 꽤 많은 에세이를 읽어왔지만 대부분의 에세이는 감상적인 측면만이 강조된 채 정확성이 결여되어 아름다움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꽤 많은 경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내 마음에 남는 건 동정심이었다. 그런 글은 에세이라기보다는 호소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감정 팔이에 지나지 않는, 한두 페이지로 충분하지만 열 페이지로 늘여 쓴 글. 상투적인 비유와 자기 연민의 목소리가 진하게 묻어나 글 속에 타자나 삶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비추는 에세이는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독자에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보뱅의 글은 다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랄까. 그의 글은 독백으로 끝나고 마는, 그래서 저자의 목소리가 닿는 데까지만 영향력을 미치는 글에 속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오히려 소리 없이 멀리 퍼져나간다. 한낮에 외치는 고함소리가 아니라 어두운 밤 잔잔한 빛의 목소리로 독자에게 스며든다. 그렇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어둠을 마침내 극복한 빛의 은은한 목소리. 보뱅의 글이 삶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가 노래하는 삶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기쁨이 아닌, 죽음을 맛보고 그것을 극복한 눈이 깊은 지혜자의 순수한 기쁨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죽음 뒤에 맛보는 삶, 전쟁터에서 돌아온 자가 맞이하는 평범한 일상. 그렇다. 보뱅의 글은 부활을 담지한다. 삶을 다르게 보는 눈을 가지게 된 사람. 하필 그 사람이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보뱅인 것이다!

프랑스 저널 ‘렉스프레스’에 담긴, 이 작품에 대한 짧은 서평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 여기에 옮겨 본다. 다음과 같다.

| 크리스티앙 보뱅은 어떤 꼬리표로도 가둘 수 없는 작가이다.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첫머리부터 이런 문장을 제시하는 사람의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보뱅식 마법이 있다. 사소한 디테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선택된 단어, 어둠과 죽음 속에서도 이끌어낸 미소와 웃음으로 이루어지는 마법이.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의 작품은 그가 ‘멜랑콜리’라고 이름 붙인 천사와의 투쟁이다. 글쓰기 덕분에, 그는 그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우리 독자들은 그를 믿을 수 있다. |

일상을 시로 번역해내는 보뱅. 무광, 무채색의 평범한 일상에 빛과 색을 입히는, 환희의 인간, 보뱅. 그러나 그가 입히는 빛과 색은 어둠과 죽음을 통과한 깊은 물에서 길어낸 질료로 이루어졌다. 읽어 보라. 그리고 느껴 보라. 그 환희의 순간을. 그 깊은 기쁨과 깊은 순수함을. 그리고 그 가운데 숨어있는 지혜의 조각들을. 혹시 아는가. 당신의 일상이 함께 회복될 수 있을지도.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4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크리스티앙 보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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