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교회로 가는 길 - 우리에게 맡기신 하늘과 땅과 바다
장준식 지음 / 바람이불어오는곳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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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대멸종 가운데 일어날 하나님의 선교

장준식 저, '기후 교회로 가는 길'을 읽고

생각해 보면 인류 역사상 지구가 종말의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가 없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진부해질 정도로 친숙해진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이러한 서사를 이루는 조각들인 동시에 그 서사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열매이기도 하며, 어쩌면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반대급부의 강력한 메시지를 함축한 예언이기도 하다. 짧게는 26년 전, 그러니까 20세기말,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가 오면 컴퓨터가 1900년과 2000년을 구분하지 못하는 등 엄청난 버그를 발생시켜(이를 Y2K라고 불렀다) 대재앙과 대혼돈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지구의 종말을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회자되어 전 세계가 경악했던 적이 있었다. 여러 전문가들 덕분에 별 다른 문제 없이 지나갔고, 일반인들에겐 괴담 정도로 기억된 채 역사의 한 장면으로 묻혔지만 말이다. 이러한 종말의 서사는 세기말 현상과 겹쳐 종교, 특히 이단과 사이비들에 의해 더욱더 심화되기도 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 멸망 예언과 더불어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가 팽배했던 그 시기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이 민낯을 드러낸 순간이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속았고 또 죽었다. 그보다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핵무기로 인해 지구가 종말을 맞이할 거라는 예측이 전 세계인들을 두려움과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었다. 제1,2차 세계대전은 또 어떠했던가. 근대를 연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직시하며 지식인들을 필두로 모든 이들은 인간의 한계에 실망과 좌절을 경험했다. 뿐만 아니다. 더 이전으로  올라가면 역사적으로 기록된 여러 전쟁들과 판데믹 상황들이 있었고, 이들 모두는 인류가 겪어 온 종말 서사의 한 조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는 지금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맞이하고 있다. 인류세라고 특별히 구별하여 부르는 이 시기는 현재 우리 모두가 속한 시대를 지칭한다. 공룡이 멸종했던 다섯 번째 대멸종까지 모든 대멸종은 전지구적인 기후 변화 때문이었다. 도저히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출몰하기 전에 일어난 이 일들은 말하자면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 재앙이었고, 모든 생물체들은 불가항력적인 피해자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원인은 우리 인간이다. 지구 온난화, 아니 지구 가열화 현상은 인류가 산업혁명을 이뤄내며 급격하게 증가시킨 탄소배출로 인한 결과이다. 매년 가장 더운 여름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 현상의 직접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셈인데,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의 착취,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과 결탁한 이기적인 인간 중심의 시스템, 그리고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이 모든 생명체가 거주하고 있는 이 지구에 또 한 번의 대멸종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세는 여섯 번째 대멸종이 현재진행형인 인류 종말의 대서사다. 이 역시 표현형은 기후 위기이지만, 인간이 주범이라는 원인론은 이 종말의 대서사를 지구가 겪어 온 모든 종말 서사들 중에서도 가장 치욕적이게 만든다. 그러나 다행스럽기도 한 사실은, 이 원인론을 깨닫고 증명한 것도 인간이고, 그러므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사실, 원인이기도 하지만 해결책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실은 인류세의 유일한 희망이기도 한데,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기후 교회로 가는 길이 들어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말이 아닌 희망이다. 지구와 우주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후 교회가 되라고, 되자고 촉구하는 탄원서다.

인간이 가해자이자 주범이라는 점을 기독교 신학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죄 문제로 소급될 수 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지으신 신께 반역하고 떠난, 소위 원죄 사건으로 인해 인간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안 되고에 따라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나누었고, 반역죄인의 욕망을 쫓아 인간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과학도 의학도 인류 문명을 위해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인류만을, 그것도 피라미드 상층부에 속한, 소위 가진 자들(갑)만을 위한 수단 혹은 시녀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듯한 인상마저 느끼게 되는데, 이미 그들 무리 안에 속한 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러고 있는지조차 사유하지 않은 채 오로지 편리함과 안위와 힘과 자본을 위해 살아가는 기계가 되어 버린 탓이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터전인 이 지구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생명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때론, 아니 빈번하게 타 생명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21세기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가슴 아픈 현실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죄의 열매이자 타락으로 해석한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수많은 전쟁과 살상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지구적인 문제가 도래했다고 본다. 기후 위기, 즉 지구 가열화가 이대로 지속되면 인류는, 다른 대부분의 생물 종들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찬란한 멸종’의 저자 이정모 작가는 2150년이 되기 전 인류는 대멸종을 맞이할 거라고 예측한다. 물론 인류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이대로 계속 같은 패턴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면 말이다.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 진짜로 우린 다 죽는다. 이정모 작가의 예측이 거짓으로 판명날 수 있도록 인간은 변해야 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한다. 기후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인간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패턴을 반성하고 회개하길 촉구한다. 이 지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터전이다. 구원의 하나님만을 생각하게 되면 이 지구는 장망성과 같아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할 장소라고 여기게 될 위험이 높다. 하지만 창조의 하나님을 함께 생각할 때 우린 이 지구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장소이자 인간과 함께 구속받을 모든 피조물들이 공존하는 공간임을 알게 되며, 인간만이 구원의 동아줄을 잡고 어딘지 모를 하늘 위 천국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재창조의 역사를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복음의 공공성이 사라지고 개인구원만이 목표가 되어버린 기독교 문화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중심적, 자기중심적인 원죄의 발현이라는 점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탐욕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고통에 처하게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조차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기후 교회로 가는 것은 어쩌면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맞이하고 있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하나님의 선교일지도 모른다. 모든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저자가 촉구하는 기후 교회로 가는 길 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을 수 있도록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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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펭귄클래식 64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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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스토옙스키의 원형 혹은 쉬운 버전의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저, '외투'를 읽고


고골이라는 작가도, '외투'라는 작품도 모두 도스토옙스키와 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문장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문학 전공자도 아닌 내가 굳이 이 작품을 찾아 읽는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은 이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기에, 그가 지대한 영향을 받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을 못 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나는 고골이나 '외투'가 궁금했다기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눈에 비친 고골과 '외투'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쳤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작품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낯설다는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진부할 정도로 친숙함이 느껴졌고, 몇 단계 쉬운 버전의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듯한 기분마저 느꼈다. 문제는 다 읽고 나서도 도스토옙스키가 왜 그리도 극찬을 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문장을 명징하게 이해하고 동의하게 되길 내심 바랐는데 말이다. 물론 내가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경을 잘 몰라 놓친 게 있을 수도 있겠지만, 러시아 문학에서 고골이 가지는 의미를 이 작품 하나만으로 느낄 만한 능력이 내겐 없었다. 여러 모로 아쉬운 작품이었다.


찾아보니 고골은 1809년생이고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생이니 나이도 띠동갑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적어도 고골보다도 10년이나 이른 푸쉬킨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도스토옙스키와는 22년 차이이므로 한 세대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띠동갑이면 선후배라고 해도 될 만큼 거의 같은 세대이다. 그렇다면 '지대한 영향'이란 고골이라는 작가의 존재가 아닌 그의 작품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텐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외투'를 읽고도 도스토옙스키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성을 발견한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을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 혹은 탁월함으로 해석하는 게 맞겠다 싶다. 고골이 아닌 저 유명한 푸쉬킨보다도 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주관적인 평가이니 고골이나 푸쉬킨 팬들은 노여워하지 마시길. 


'외투'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중년의 9등 문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정서밖에 할 줄 모르는 오타쿠다. 극빈층에 속한 그의 외투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 더 이상 수선할 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수차례 수선을 해줬던 페트로비치에게 찾아가지만 그도 이번엔 단호하게 새 외투를 사라고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의 주인공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돈을 모아 페트로비치로부터 새 외투를 맞춘다. 늘 루저처럼 다니던 아카키가 새 외투를 입고 출근하자 직장에선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는데, 마침 명명일을 맞이한 직장 상사의 초대에 응하게 되어 저녁 식사에 참여한다. 그에겐 첫나들이, 첫 사교 활동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평소라면 잠잘 시간도 훌쩍 넘기게 된 그는 도저히 지루함을 참지 못한 채 다시 외투를 입고 먼저 자리를 뜨는데, 돌아오는 길에 그만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긴다. 아카키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에 흠뻑 취해있다가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봉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을 찾아 가지만 원하는 해결을 보지 못한 그는 그다음으로 '중요한 인사'를 찾아가는데, 거기에서 그만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분통이 터진 나머지 아카키는 병이 드는데, 어이없게도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여기에서 작품이 끝날 법도 한데, 고골은 이 장면 이후 유령을 등장시킨다.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고위 관료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실 고발성 작품에서 다분히 낭만성을 띤 환상소설로 넘어가는 것이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유령은, 독자들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행인들의 외투를 훔치게 되는데, 결국 그를 죽음으로 가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인사'가 걸려들고 그의 외투를 빼앗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설마 했는데, 그 '중요한 인사'는 유령을 만나 외투를 빼앗긴 이후 부하 직원들에게 질책을 하더라도 자초지종을 다 듣고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개과천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유령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고골은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다. "장군의 외투가 그 유령에게 꼭 맞는 게 틀림없었다." 아아, 이럴 수가! 이 클래식한 상상력이라니~!


이제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하고 싶다. '고골의 외투에서 나온 도스토옙스키'를 '고골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를 가뿐히 뛰어넘은 도스토옙스키'라고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기 전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순서가 아주 이상적이었을 것 같다. 이 책엔 '외투' 말고도 다른 단편들도 함께 실려 있다. '코', '광인일기', 그리고 '감찰관'이다. '외투'를 먼저 읽고 읽으려는 게 초기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수정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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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잘 팔리는 책들의 비밀
한승혜 지음 / 바틀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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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라는 허울


한승혜 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를 읽고


베스트셀러. 여전히 나는 이 권세 있는 이름 앞에서 온갖 상념에 잠긴다. 쿨한 척 이젠 상관없다고 믿다가도 책이 나오면 어느새 나는 다시 그 이름 앞에 조아리며 구걸하는, 빌어먹을 내 안의 나를 인지하게 된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경멸하다가도 출간 직후에는 그 이름을 내 마음대로 호령하고 제어해서 자본주의의 승자독식 피라미드 상층부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다시 느낀다. 한두 달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긴 하는데 그래봤자 정도만 다를 뿐 원하는 건 동일하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어떤 은밀한 뒷길이 없나 곁눈질하는 단계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즉 어떤 운명 같은 기적을 바라게 되는, 수동적인 모드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다가 좀 더 시간이 지나 이번에도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는 나는 다시 그 이름에 환멸을 느끼고 저주까지 퍼붓는 단계로 진입한다. 아, 구역질 나는 이 반복이라니.


작가라는 정체성을 띠고 저자라는 타이틀까지 갖게 된 이후 겪는 일상의 반복이다. 어쩌다가 해마다 책을 내게 되는 기회가 주어져 해마다 겪고 있는 반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한다. 브랜드가 되어버린 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작가들이 출간 직후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하는. 이율배반성은,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며 골수에 새겨질 정도로 깊이 숙지했던 점이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속성이라 믿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시녀로 태어난 우리들이 자본주의가 가진 양날의 검 앞에서 어떻게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사후 해석으로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지만 언제나 뒤끝이 남는 이 불유쾌한 감정은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다.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은 어쨌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이다. 그 이름을 거역하든 찬양하든 상관없이.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책이 일 년에 약 6만 종 이상이라는 보도자료에 기반하면 하루에 약 200 종에 가까운 신간이 발행된다고 한다. 그중 2천 부 안팎의 초판 1쇄를 팔고 2쇄로 진입하는 비율은,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으나, 20퍼센트 미만이라고 한다. 즉 중쇄만 찍어도 성공한 셈이라는 말이다. 이런 출판계의 분위기만 보더라도 대부분의 작가 및 저자들은 초판 1쇄조차 다 팔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슬픈 현실이다.)


위에 소개한 나의 사례가 와닿았다면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역시 베스트셀러라는 단어 앞에서 태연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작가나 저자가 될 기회가 없어 아직 독자로만 머물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느끼는 건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저자라는 타이틀을 갖기 전 내게도 베스트셀러 리스트는 독서라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처음 시작할 때 기대었던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홍수처럼 범람하는 책들에 압도되어 도대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막막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세상에 출간된 책은 무한을 떠올려도 될 만큼 많은 반면 내게 할당된 시간은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엉뚱한 책은 읽고 싶지 않다는, 소위 ‘효율’을 고려하는 차원으로 나는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기준으로 시대의 조류에 편승했었다. 그것이야말로 나도 독서인 대열에, 비록 끄트머리일지라도, 내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이라 여겼다. 소위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왠지 고상한 척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주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수십 권을 읽다 보니 이상하게도 내 안에서 뭔가 꺼림칙한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갖는 권세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따르던 존재가 실체가 없는 껍데기로 보일 때의 기분. 처음엔 내가 이상한가 싶어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끙끙대기만 했는데, 독서 반경이 넓어지면서부터는 암묵적인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베스트셀러는 소수의 책들을 제외하고는 허울이구나,라는. 그리고 한 가지 더.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베스트뤠드(best-read)가 아니라는 것. 즉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해서 많이 읽힌 책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책 읽지 않는 이 시대에도 베스트셀러가 계속 팔린다는 건 우리나라 특유의 속성, 즉 대세에 묻어가기의 일환(이것 역시 남들 시선에 맞춰 살아가는 풍토에서 기인한 것이리라)으로 해석해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남들이 사니까 나도 사는 것이었다. 이건 새것처럼 멀쩡한 수많은 책들이 중고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진실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언젠가부터 독자로서는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자가 되면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시적 노예가 되는 반복을 경험하고 있다. 책을 내면서 팔리지 않길 바라는 저자는 없을 것이기에 이건 브랜드가 되지 못한 이 시대의 모든 작가들이 어쩔 수 없이 겪는 굴레일 것이다. 역시 슬픈 일이다. 


내 얘기를 하다가 하마터면 이 책에 대한 얘기를 까먹을 뻔했다. 정희용 주간님의 강력한 추천과 책 제공으로 나는 이 책을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아 국수 말아먹듯 마셔버렸다. 그만큼 흡입력이 좋았다는 말이다. 한승혜 작가의 유려한 글솜씨는 읽는 내내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여성 특유의 문체도 잘 살아 있었고, 평론가 수준의 분석과 의의를 짚어나가는 부분도 정확해 보였다. 상당히 많은 부분 동의가 되었다 (백이십 퍼센트 동의된 책들: ‘자존감 수업’,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언어의 온도’, ‘모든 순간이 너였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법’,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82년생 김지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이런 책 읽는 시간에 차라리 잠이나 더 자겠다). 사실 조금 더 세게 썼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베스트셀러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을 가질 수 있는 데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책을 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용기를 내서 할 말을 해주어서 고마움도 느꼈다. 이런 책이 더 잘 팔려서,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서 편향되고 허세에 찌들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뭇 독자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베스트셀러 책들을 부끄럽게 만들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양서를 고를 줄 아는 문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자리 잡히길 잠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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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 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철학 에세이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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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잊고 있던 "행복"할 권리


강남순 저,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나를 알고 타자를 알고 세상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가꾸기 위해서 필요한 건 용기다. 그 용기가 발휘된 행복을 저자는, 자크 데리다의 방식을 따라, 인용부호 속에 넣은 "행복"이라 부른다. 행복과 "행복". 전자가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무감각해질 정도로 상투적이고 진부한 의미를 갖는다면, 후자는 그 상투성을 넘어 재개념화 되고 재해석된 진정성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삶에서 추구해야 할 건 행복이 아니라 "행복"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저자가 전작들을 통해 줄곧 이야기해 온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는 삶이다. 타자의 감옥에 갇혀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는 삶이 아닌 비판적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를 묻고, 낮꿈을 꾸며, 한편으로는 (on the one hand) 한계 상황 앞에서 좌절과 절망에 사로잡히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on the other hand) 바로 그 한계로 인한 좌절과 절망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삶의 의미를 재인식하고 '나로 살아있음'의 소중함과 '지금, 여기'의 소중함,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는 실존적 자각과 그에 따른 실천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들을 나와 타자와 세상과 함께 마침내 치열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내는 삶이다. 


오랜만에 저자의 글을 책으로 읽었다. 언제나 한결같지만 결코 똑같지 않고, 너무 당연하지만 결코 진부하지 않으며, 항상 도전이 되고 위로가 되며 희망이 생기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는 잠시 행복한 회상에 잠길 수 있었다. 저자의 철학과 글쓰기에 매료되어 그의 전작 읽기를 시도했던 시절이 떠올랐고, 페이스북으로 저자의 포스팅을 기다리며 읽고 또 읽고 가슴속에 담아두던 시절도 떠올랐으며, 엘에이에서 오프라인 만남으로까지 이어져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포옹까지 하던 순간들도 함께 떠올랐다. 내 얼굴엔 미소가 아닌 "미소"가 지어졌다. 인용부호 속의 미소, 곧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의 참 미소였다. 


코로나 팬데믹은 내 삶에서도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직장 일만이 아니라 가족 문제, 신분 문제 등이 겹치면서 나는 2022년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끊어진 수많은 소중한 것들 가운데 저자의 전작 읽기 중단도 있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이번 책을 시작으로 그동안 끊어졌던 길을 재건해 볼 생각이다. 그 길은 한편으로는 다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이전과 같은 길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달라진 나, 달라진 저자, 그리고 달라진 시대와 문화로 인해 분명 다른 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건 진정성을 지켜내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나, 진정한 너, 그리고 진정한 우리와 진정한 세상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성찰하며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것. 그것은 곧 나 자신과의 관계, 너와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의 정원을 늘 갱신된 마음으로 가꾸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나는 그 삶을 살아내고 싶고, 반드시 살아낼 것이다.


여전히 삶은 물음표이고, 정답은 없고, 있다 해도 절대 일반화시킬 수도 강요할 수도 없으며, 세상은 여전히 혼란 가운데 있다. 내일을 보장할 수 없고, 그래서 두려움도 가득하지만, 오히려 그 두려움 때문에 담대하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음을 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다시 깨닫게 된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사유하는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도 다시 깨닫게 된다. 어느새 게을러졌던 내 안의 나를 깨우게 된다. 불안 가운데 평화를, 의기소침함 가운데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가져도 되는 이유는 저자처럼 주체가 되어 사유하는 동지들이 비록 소수이지만 나와 같은 길 위에 있다는 사실, 그것을 믿는 믿음과 신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행복"도 이 길 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쓰고도 단 열매일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 "행복"을 추구하고 누릴 것이다. 용기를 다시 낼 것이다. 내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내게도 당당하게 "행복"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잠시 잊고 있던 이 권리를 상기시켜 준 저자에게 고마움의 미소를 보낸다. Smiling at you. 


#행성B

#김영웅의책과일상 


* 강남순 읽기

1. 용서에 대하여: https://rtmodel.tistory.com/223

2. 페미니즘과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585

3. 배움에 관하여: https://rtmodel.tistory.com/814

4. 정의를 위하여: https://rtmodel.tistory.com/819

5. 매니큐어 하는 남자: https://rtmodel.tistory.com/854

6. 젠더와 종교: https://rtmodel.tistory.com/924

7. 안녕, 내 이름은 페미니즘이야: https://rtmodel.tistory.com/931

8.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https://rtmodel.tistory.com/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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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늑대 헤르만 헤세 선집 4
헤르만 헤세 지음, 안장혁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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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아우르는 유머


헤르만 헤세 저, '황야의 늑대'를 다시 읽고 


언젠가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문장을 쓰면서 나는 튼튼한 나무와 부드러운 갈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거센 바람에 온몸으로 저항하던 나무는 툭 부러지고 말지만, 온몸을 낮추고 바람을 타는 갈대는 끝내 살아남는 장면이었다. 재미있게도 7년 만에 '황야의 늑대'를 다시 읽고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이 장면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재독 후 ‘유머’라는 단어가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머’는 ‘유연함’을 연상시켰고, ‘유연함’은 ‘갈대’의 이미지를 소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선 헤세가 ‘황야의 늑대’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내가 해석한 유머의 관점에서 조금 풀어볼까 한다.


헤세를 읽으면 자아의 발견과 성찰, 성장과 성숙, 그리고 실현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헤세를 읽는, 나아가 헤세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헤세의 작품에서는 자아의 분열과 대립마저도 점진적인 합일로 나아간다. 무언가 흩어져 있던 것들이 모이고 정리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절제되고 우아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나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모든 이들이 헤세를 사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 유독 ‘황야의 늑대’는 이런 우아함으로부터 조금은 동떨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읽는 이를 당황스럽게 한다. 헤세의 다른 작품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묵직한 한 방을 제대로 맞은 듯한 느낌을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황야의 늑대’는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 작품의 초독과 재독 사이의 7년이란 세월은 단순한 7년이 아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모든 작품을 두 번씩 읽고 감상문도 쓰고 독서모임까지 경험한 시간들은 물론, 신학과 철학과 인문학 서적까지 수십 권씩 읽고 사유한 시간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네 권의 책을 저술하고 한 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시간들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난해하기만 했던 ‘황야의 늑대’가 이번엔 술술 읽혔을 뿐만 아니라 조금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헤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유별나다고 여겼던 이 작품도 결국 헤세의 중심 사상, 즉 분열된 자아를 발견하고 성찰한 뒤 합일로 이끌며 성장과 성숙을 이뤄내는 구조적 패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유머'는 헤세가 지향하는 궁극의 종착지에 다다른 자의 모습을 상징한다. 인간은 여러 개의 자아로 이뤄진다. 그 자아들은 성격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며 수명도 다르다.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동일한 한 인간이 가지는 자아의 수도 다르다. 어떤 이는 이런 자아들의 존재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평생을 살다가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특정한 한 자아에 천착하여 다른 자아들을 모두 제거하며 살아가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늘 두 개 이상의 자아 사이를 오가며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이보다 더 많은 여러 유형이 존재하겠지만, 존재론적으로 인간은 늘 이러한 내적 변화를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내적 성장 혹은 성숙이라고 부르는 여정과도 일치하는데, 보통 혼란, 괴리, 무질서, 분열 등의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갈등의 연속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연륜이랄까 지혜랄까 하는 속성을 마침내 가지게 되는 인간들도 비록 적은 수이긴 하지만 늘 생겨나는데,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이, 헤세의 관점에서 볼 땐, 바로 '유머'라고 할 수 있다. 즉, 헤세에게 유머란 연륜과 지혜를 갖춘 자의 얼굴인 것이다. 


그렇다면 연륜과 지혜란 어떻게 갖출 수 있는 것일까? 나이 든다고 해서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즉 연륜과 지혜는 적어도 나이 듦의 수동적인 열매는 아니다. 여러 철학들이 다양한 답을 내놓을 테지만, 헤세가 '황야의 늑대'에서 말하고 있는 답은 '합일'이다. 하리 할러 안에 존재하는 시민 자아와 늑대 자아뿐만이 아닌 다양한 이름을 가진 여러 자아들이 모두 한데 모여 그 어느 자아도 소홀히 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서로의 고유한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결코 한 자아가 우세해지지 않도록 균형을 이루면서 조화롭고 건강한 한 인간을 이루는 것, 합일. 합일에 이르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끌어안음'이다. 못난 내 모습도 나를 구성하는 요소임을 인정하는 것, 나아가 그 요소가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재료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 그리고 잘난 내 모습도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교만에 이르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끌어안는 행위를 상징하는 표현이 바로 유머일 것이다. 하리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괴테와 모차르트도 꿈에 나타나 던져주었던 메시지, 유머. 하리가 인간 일반을 대변한다고 해석할 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도 바로 유머라는 것을 헤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시민도 늑대도 모두 나라는 것. 넉넉이 끌어안으라는 것. 분열과 합일은 성장과 성숙의 일환이라는 것. 이쯤에서 다시 내가 예전에 썼던 문장을 소환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톤을 조금 높여서 말이다. "우리가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는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너무 진지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지함이 아닌 유머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1991

7.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2014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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