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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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질감과 이질감


권여선 저, ‘각각의 계절‘을 읽고


수년 전에 출간되었고 이미 다른 지면에 실렸던 일곱 편의 단편소설의 모음집이지만, 내겐 권여선 작가의 첫 책이다. 대표작으로 보이는 첫 소설 '사슴벌레식 문답'은 단편만의 매력을 느끼기에 완벽한 작품이었다. 첫 권여선의 글이었음에도 나는 단번에 저자가 탁월한 스토리텔러이자 치밀한 설계자라는 사실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어디로 들어와?'라는 질문에 '어디로든 들어와'라는 답으로 이어지는 대화의 삽입은 화자와 저자의 의도를 넘어 인간 일반의 심리와 감정을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열쇠 혹은 저자의 영리함이 돋보이는 치트키로 보였다. 또한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장편에 비해 단편이 갖는 특유의 어정쩡한 미완성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완성도가 탁월한 소설이었다. 권여선 작가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첫 작품을 포함하여 나머지 여섯 단편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노년에 접어든 여성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서치를 해 보니 권여선 작가는 1965년생, 현재 예순을 갓 넘긴 나이다 (나랑 띠동갑 누님이시다ㅋ). 어떤 작품을 쓰더라도 작가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들, 이를테면 시대와 문화라는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는 정서, 사상, 유행 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일곱 단편 모두에서도 저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 주요한 목소리를 낸다. 이 점은 한 편으로 내게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게 해 주는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론 1977년생 남성인 내게 약간의 이질감도 선사해 주었다. 특히 586 세대 특유의 정서와 여성이라는 점은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인지적인 방법 이상으로 공감할 수 없었으므로 권여선의 작품들을 온전히 음미하기에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노년의 여성이 주로 상대하는 사람 역시 주로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여성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감정 혹은 정서들이 작품 전반에 진하게 배어 있어서 남성 독자인 나는 일종의 소외감이랄까 하는 벽을 느껴야만 했다.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숨에 다 읽고 이렇게 감상문까지 남기게 된 까닭은 저자가 충분히 깊고 세밀하게 보여준 인간과 인생의 보편성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 죽음 배후에 연루된 사람과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 분노와 체념, 여전히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들, 알다가도 모르겠는 인간관계의 신비, 그리고 나이 들면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여러 징후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여야만 하는 덤덤함까지, 저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맞닥뜨리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말이나 글로 쉽게 담아내기 어려운 인생의 조각들을 미세하고 예리한 관찰자의 눈으로 포착하여 텍스트로 변환시킨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가로서의 관찰력과 그것을 내면적으로 소화하는 성찰력, 그리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하여 이끌어낸 탁월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 바로 이 단편집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점에서 저자의 글은 후자에 무게를 둔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 특수성으로부터 충분히 보편성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할까, 보편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특수성의 사례를 조금 과하게 사용했다고나 할까, 책을 다 읽고도 내게 남은 이질감이 여전히 걸리적거린다. 그의 다른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도 읽어 봐야겠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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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책방은 커피를 팔지 않는다
이지민 지음 / 정은문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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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승부를 보는 책방이 많아지기를


이지민 저, ‘브루클린 책방은 커피를 팔지 않는다’를 읽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방에 대한 로망이 있을 것이고, 책방에 대한 좋은 기억들도 하나둘씩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온라인으로 책을 손쉽게 구매하고, 읽고, 팔기까지 하는 이 시대에 오프라인 책방이 갖는 존재감은 비단 소중한 향수를 넘어 지켜야 할 사회적 자산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미국에서 11년을 살았고, 한 아이를 키워본 한 명의 아빠로서 나는 책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조금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아이의 손을 잡고 꼬박꼬박 동네 도서관에 들려 여러 권의 책을 빌려서 매일 밤 베드타임 스토리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 한 편이 아련해진다. 내 아들은 킨더에 들어가기 일 년 전에 프리킨더에 다니며 단체생활을 시작했다. 만으로 네 살 무렵이었다. 태어난 직후부터 베드타임 스토리를 일종의 의식처럼 해왔기 때문인지 아들은 책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없었다. 


미국 학교 시스템의 기본은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다 (어려운 수학 문재 풀기가 아니다). 프리킨더부터 시작되는 이 일련의 활동들은 대학에 가서도 지속되고 강화된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아이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이 차이가 늘 아쉽다. 단답형, 정답만을 요구하는 교육, 토론과 대화가 부재한 자리에 떡 하니 들어앉은 암기식 교육 문화는 시대착오적이며 개선해야 할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은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저자가 일곱 살 딸과 함께 동네 책방들을 다니며 쓴 책방 소개서이자 책방에 대한 러브레터다 (저자의 일상과 책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소개된다). 위에서 내가 언급한 미국의 읽기 문화를 고려하면 미국 동네책방이 한국 동네책방보다 힘이 있고 생존에 유리할 거라는 점은 아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말하자면 브루클린 책방은 커피를 팔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미국 사람들의 오래된 읽기 문화와 책을 대하는 정서가 우리와는 현저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커피를 팔지 않았기 때문에 브루클린 책방이 살아남은 것처럼 이 책을 읽어서는 곤란하다. 인과관계를 반대로 생각해야 옳다. 


이 논리는 커피나 빙수, 과자나 캔디, 그리고 여러 굿즈를 판매하면서 책방을 운영하는 한국 책방의 생태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도 된다. 요컨대 한국 책방은 커피를 팔아도 생존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브루클린 책방은 커피 따윈 팔지 않아도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커피를 팔고 안 팔고에 대한 상업적 전략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과 미국 사람들의 읽기와 책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한국 책방에서도 커피 같은 부수적인 것들이 아닌 책만으로 승부를 보는 모습을 보길 원한다. 브루클린 책방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동시에 브루클린 책방들도 생존 여부를 늘 고려하고 있다는 현실을 언급하는데, 이는 미국 역시 동영상과 쇼츠, 스마트폰과 온라인 매체 등으로 소급되는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보다 느릴 뿐 미국도 서서히 오프라인 책방의 존재감이 이전과 달리 소멸 중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곧 커피를 팔고 굿즈를 팔며 손님을 유인하는 브루클린 책방도 속속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책과 독서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 다르다고 해도 그들 역시 시대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역시 저자와 동일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먼저는 오프라인 책방에 대한 향수와 좋은 기억들 때문이다. 그리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으며 가방 속에 들어가 어디든 나와 함께 하는 책이라는 실체의 존재감을,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고유한 가치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사랑하고, 지켜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브루클린 책방들이 앞으로도 커피를 팔지 않아도 유지될 수 있기를, 또한 한국 책방들도 기적처럼 부활하여 같은 길에 설 수 있기를. 


#정은문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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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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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자유: 자아를 찾고 지켜내기


슈테판 츠바이크 저, ‘위로하는 정신‘을 읽고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미완성 유작 중 하나이며, 머나먼 타국 브라질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그가 어떤 상념들에 잠겨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츠바이크는 유럽의 16세기를 자신이 처한 20세기와 데칼코마니로 보았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개신교는 중세 천 년을 지배해 온 가톨릭과 맞섰다.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서로 믿음과 관습이 다른 두 집단은 서로를 배척했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낭자한 전쟁을 오랜 기간 치렀다. 16세기 후반의 잉글랜드의 격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대립,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위그노 전쟁, 그리고 스페인 절대주의에 맞서 일어난 네덜란드의 전쟁과 독립 등이 모두 종교전쟁의 성격을 띤다. 종교전쟁은 신앙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지닌 집단적 광증의 표현이라는 이 책 번역가의 문장은 츠바이크가 바라본 16세기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사랑과 평화를 설파하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서로를 죽이고 전쟁까지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은 시대와 인간과 종교의 모순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츠바이크는 이러한 16세기와 20세기의 공통점을 관용의 부재, 그리고 나와 다른 신앙이나 신념을 가진 상대방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한다. 집단광증의 시대라고 볼 수 있는 그 시대에도 그러나 관용과 타협과 온건함을 옹호하고 끝까지 실천하려 노력했던 인문주의자가 있었다. 바로 에라스무스, 카스텔리오, 몽테뉴 같은 인물이다. 츠바이크는 16세기에 활동했던 이들로부터 자신이 처한 20세기의 문제 (인종이념에 바탕을 둔 제2차 세계대전)를 해결하는 실마리 혹은 희망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그는 이들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로 여겼다고 한다. 신념이 만들어낸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었던 츠바이크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진다.


이 책은 츠바이크가 쓴 몽테뉴의 미니 평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몽테뉴의 탄생 이전부터 그의 가문이 어떻게 평민에서 귀족으로 승격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책을 여는데, 츠바이크의 설명에 따르면 몽테뉴는 그야말로 모든 게 다 갖춰진 상황에서 시의적절하게 태어난 운을 거머쥔 인물 같았다. 즉 몽테뉴의 고유하고 탁월한 능력과 자질만이 아니라 시대를 잘 타고난 그의 운명을 그가 이룬 업적과 행보들을 평가하고 해석할 때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의 부제는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이다. 원제에는 없는 표현 같은데 아마도 한국 번역본에서 출판사가 붙인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부제의 적절성에 동의가 되었다. 그렇다면 신념이 만들어낸 전쟁이 종식되길 그토록 원했던 츠바이크가 몽테뉴로부터 얻은 힌트로써 그의 체념과 물러섬을 꼽았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말일까?


머리말을 제외한 총 일곱 꼭지로 이뤄진 이 책에서 츠바이크의 초점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꼭지에 있다고 보인다. 각각의 제목은 '자아를 찾아서', '자신만의 보루 지키기', '여행'이다. 이 세 꼭지를 '자아를 찾아 지켜내기'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는 츠바이크가 몽테뉴로부터 얻은 힌트인 체념과 물러섬의 자세와 직결되는 것으로써 집단광증의 시대에 맞서서 관용과 타협과 온건함과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방법이 바로 나를 찾아내고 제대로 알고 또 지켜내는 것과 같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도 츠바이크는 인간 본성에 깃든 선함이랄까 하는 인간다움은 시대의 조류에 생각 없이 휩쓸려가는 광기가 아닌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여 각 개인의 고유하고 고귀한 개성을 발현하는 동시에 그렇게 생겨난 풍성한 하모니 안에 내재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자아를 찾아 지켜내는 것을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자유로 보았던 것 같다. 다음 문장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 한 가지만이 잘못이고 범죄다. 이 다양한 세상을 학설이나 체계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 다른 사람을 자유로운 판단과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자기 안에 있지 않은 것을 강요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잘못이고 범죄다. 이런 사람들이 자유에 대한 경외심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정신적 독재에 미친 자들, 자기들이 얻은 새로운 것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옳은 진리라고 우기면서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들보다 몽테뉴가 더 미워한 것은 없었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 생각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된다. 지금 내가 사는 21세기는 몽테뉴의 16세기나 츠바이크의 20세기와는 사뭇 다른 시대이지만, 집단의 광기는 크기와 정도가 다를 뿐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타자의 개성을 묵살하고 파워 게임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며 자신의 세력을 부풀리는 인간들 역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그런 시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츠바이크가 몽테뉴로부터 찾아낸 체념과 물러섬, 즉 자아를 찾고 지켜내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지켜내야 할 자유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또한 내가 먼저 그 자유를 알고 누리지 못하면 타자의 자유 역시 똑같이 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유유 

#김영웅의책과일상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6.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https://rtmodel.tistory.com/1923

7. 위로하는 정신: https://rtmodel.tistory.com/2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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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질문이 있었다
송민원 지음 / 복있는사람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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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아닌 질문으로 깊고 풍성한 해석을


송민원 저,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를 읽고


이 책은 답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책이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의 패러디인 이 책의 제목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는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저자 송민원의 낯설게 읽기, 혹은 다르게 읽기, 혹은 풍성하게 읽기, 혹은 삐딱하게 읽기의 관점이 잘 드러난 것이다. 신학교에 발을 디딘 적도 없는 아마추어 평신도 신학도인 나는 지난 10년간 성경신학 관점에서 써진 수십 권의 신학책들을 읽었다. 또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정회원이자 한 명의 그리스도인 생물학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특별히 창세기 해석에 관한 책들은 더 많이 접했다. 과학과 신학 모두의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킨 창조과학자들의 주놀이터가 창세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는 창세기 해석 중 일부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성경을 정답기록지로 읽고 또 읽기를 원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신념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창세기 해석이 늘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이 이전보다 좀 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지 않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의외로 빈틈이 많을뿐더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이해는 성경 원문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주류 신학자들의 전통적인 (어쩌면 보수적인) 해석에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하고 흥미로웠으며, 더욱더 깊고 풍성한 창세기 읽기를 할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이 책에서는 창세기 여러 본문들에 질문을 던지면서 전통적인 수직적 읽기와 비교하여 많은 독자들이 접해보지 못했을 수평적 읽기를 소개한다. 수직적 읽기는 하나님과 땅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 하나님 명령을 잘 지켰는지 그러지 못했는지에 대한 주제들이 포함된다.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의 교만은 죄로 규정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의 겸손은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규정된다. 반면, 수평적 읽기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창조세계의 관계에 더 주목한다.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겐 어떤 책임과 역할이 있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두 가지 읽기 중 어느 것 하나가 옳고 틀린 건 아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둘 다 병행하여 성경을 읽어나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신앙인의 자세일 것이다. 


저자 송민원은 이러한 두 가지 읽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창세기 본문 6군데를 대표적으로 소개한다. 창세기 1-3장으로부터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창세기 3-5장으로부터 '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하고, 창세기 6-9장으로부터 '홍수는 왜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창세기 10-11장으로부터는 '바벨탑은 왜 무너졌는가'라는 질문을, 창세기 18-19장으로부터는 '소돔과 고모라는 왜 멸망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수평적 읽기의 필요성과 적법성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수직적 읽기의 사각지대를 비추며 그동안 모호하거나 모른 체 덮어두었던, 혹은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발굴하여 기존의 창세기 해석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본문을 대할 때 텍스트뿐 아니라 콘텍스트, 그리고 그것들을 읽는 능동적 주체인 나 자신까지 돌아보며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평면적이 아닌 입체적으로 읽도록 요구하며 또 그렇게 시전을 해 보인다. 우리는 모두 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빈틈 속으로 파고들어 상상력을 발휘하고 앞뒤 문맥과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의도 등을 파악하여 많은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저자가 알려준 세 가지 잣대, 즉 텍스트, 콘텍스트, 나 자신을 살펴보며 성경을 읽어나간다면 바르고 건강한 성경 읽기를 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복있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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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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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일상


켄트 하루프 저, '축복'을 다시 읽고


깊은 어두움을 통과한 자만이 가느다란 한 줄기 빛 앞에서도 감사함으로 무릎을 꿇을 수 있듯이, 일상의 소중함도 그것을 잃어본 자만이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 따르면 그런 것 같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일상을 '잃은 자'가 아닌 '잃어가고 있는 자'와 그 주위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일상의 소중함이 어떤 건지 덤덤히 보여준다. 나아가, '잃어가고 있는 자'는 자신이 '잃은 자'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발견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나날을 참회의 순간들로 보내게 된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깨닫게 되는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라는 것을 조용히 말해준다. 우리는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대드 루이스가 되기도 하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 메리가 되기도 하며, 그들의 여러 이웃이 되기도 하면서 고르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평범한 일상의 축복을 다각도에서 다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년 전에는 느끼지 못했으나 재독 하며 깊이 와닿았던 '축복'의 장면들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써볼까 한다. 


먼저 암에 걸려 한 달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은 남편을 보살피다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 메리가 자신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의사가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뚜벅뚜벅 먼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어떻게 병원에서 나왔냐고 걱정하는 남편에게 메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한테 제대로 된 저녁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나는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전혀 진부한 표현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위해 밥 한 끼를 차려주는 것. 이 사소한 행위가 내게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까닭은 단순한 밥 한 끼 식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죽어가고 있는 남편과 어떻게든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대드 루이스가 된 것처럼 아내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라일 목사가 심란한 마음으로 밤에 마을 산책하면서 어떤 집 안을 마치 염탐이라도 하는 듯 주시하다가 경찰에 신고되어 출동한 경찰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왜 그랬는지 말하는 장면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밤에 자기 집에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런 평범한 삶. 그들이 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는 삶이지요. 나는 거기에서 뭔가를 되살리기를 바랐습니다. 소중한 일상을요."  


라일 목사는 자신의 신념이랄까 믿음이랄까 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와의 화해도 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왔다.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기엔 적어도 현실세계에서는 적당하지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과의 화해를 하지 못한 자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원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내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의 관계에서조차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한밤중에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가족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머릿속에서 했을 생각들은 예상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다. 그는 소중한 일상을 이미 잃어버린 자였다. 경찰에 신고를 당하면서까지 이웃의 집안을 들여다보며 그는 그 이웃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보았을 것이다. 상실감과 죄책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신념 사이에서 그는 여느 때처럼 또다시 고통 속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라일 목사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걸까. 나 역시 나만이 추구했던 어떤 신념을 위해 가족과 같은 일상의 소중함을 잃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혹시 지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삶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진 않을까. 나는 무너져가는 라일 목사의 불안정한 모습들을 보며 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가장 감동이 되었던 장면인데, 초독 땐 이 부분을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냥 지나쳤던 장면이기도 하다. 노년의 윌라, 중년의 에일린과 로레인, 그리고 어린 소녀 앨리스, 이렇게 네 명이 무더운 여름날 오후 가축용 수조에서 수영도 하며 야외에서 소풍을 즐기는 장면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윌라는 네 명이 모여 각자가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정오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다채로운 명암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 모두 생각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감사 기도 비슷한 걸 해보고 싶네요. 이 여름날을 주신 것도, 이런 맛있는 음식을 주신 것도, 이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 우리가 함께 있도록 해주신 것도 모두 축복임을 알고 감사드립니다. (발췌 및 수정)" 


나는 윌라가 왜 저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치 윌라에 빙의가 된 것처럼 나도 저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졌다. 어떤 특별한 경사가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현재의 삶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면 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너무나도 평범해서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순간들을 우주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숨겨진 진실과도 같은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소망했다. 매 순간을 윌라의 마음으로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네 번째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네 여자의 소풍을 묘사하는 저자 켄트 하루프의 문장이다. 다음과 같다. 


"앨리스는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말하는 사람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로레인이 자신의 음식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앨리스도 똑같이 따라 했다. (중략) 앨리스의 귀에 윌라가 코를 고는 소리, 그보다 작은 에일린의 코 고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에 누워 있는 로레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스는 다시 한번 냅킨 아래에서 눈을 떠보았다. 냅킨 위로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깬 앨리스는 그동안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어른들은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아이가 깨기를 기다리며 말없이 헛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몹시 무더워졌고, 뜨거운 바람만 간간이 불어올 뿐이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소녀 앨리스는 부모가 없는 고아다.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이런 사실만 보면 앨리스는 축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저 문장들을 읽으며 저자의 바람이랄까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앨리스 역시 축복 속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부모가 없어도 이웃에 거주하는 마음 좋은 세 명의 여자들로부터 가족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어른들로부터 하나씩 배워나갔다. 자전거를 타는 것도, 물 위에 뜨는 것도 그들로부터 배웠다. 축복은 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이웃들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저자는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하면서 독자들에게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저 장면에서 평화를 느꼈고, 앞으로 더 무럭무럭 자랄 앨리스가 정서가 안정된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길 기도했다.


다섯 번째는 윌라가 라일 목사에게 하는 질문이다. 다음과 같다. 


"오랜 세월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고 나중에 그때를 떠올리고 비교하면서 상실감을 느끼는 편이 좋은 걸까요.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그런 사람을 만들지 않는 편이 더 좋은 걸까요. 그러면 예전이 어땠는지를 기억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라일은 저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편이 분명 더 나을 거라는 대답을 한다. 나 역시 같은 대답을 했다. 켄트 하루프는 아마도 독자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상실감 자체는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인간은 단순히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고통과 환란이 갖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고통과 환란을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지만 그것들을 통과해 내야 내면의 성장과 성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상실감을 느끼는 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상실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보다 나는 더 나을 거라고, 더 인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 중 하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을 얻어 보기도 하고 잃어 보기도 하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아는 것만큼 인간에게 주어진 큰 축복이 또 있을까.


여섯 번째는 자녀에게 가지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죄책감에 대해서다. 아들 프랭크와의 관계는 죽기 직전 경험하는 섬망 상태에서도 해소되지 않았다. 딸 로레인에게는 용서를 구하고 사랑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뒤늦게 한다. 대드 루이스가 로레인에게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용서하거라. 나는 많은 일들을 놓쳤어.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난 언제나 너를 사랑했단다."


많은 일들을 놓쳤다는 문장에서 나는 큰 심호흡을 해야 했다. 나도 일상에서 종종 느끼곤 하는 생각이기 때문인데, 바보처럼 아내와 아들에게 잘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자책이 언제나 가슴 한 편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용서를 구하는 대드의 모습에서, 그리고 딸에게 용서를 받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해소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했다. 대드처럼 죽기 전에 저러지 말고 지금 더 잘하겠다고, 반드시 그러고 말 거라고. 


마지막으로 마침내 대드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 닥쳤을 때 메리가 외쳤던 문장이다. 


"준비가 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아, 누군가의 죽음을 준비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설사 배우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메리의 저 문장이 가슴 깊이 이해가 되었다. 부부는 누구나 이별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부부 중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언젠간 먼저 떠난 자와 남겨진 자로 구분되는 날이 온다. 이 장면에서는 남겨진 자인 메리가 자신이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걸 고백하지만, 아마도 먼저 떠난 자인 대드 역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준비가 된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상을 이루는 대부분의 큰 일들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들에게 닥치는 것 같다. 우린 그렇게 닥친 일들을 처리해 나갈 뿐, 우리에겐 그것들을 피하거나 그것들의 시기를 달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준비 안 됨', 나는 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 역시 축복의 일환이라는,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인생 자체가 모름의 연속이고 우린 언제나 모든 순간에 연습 없이 무대에 서는 배우라는 운명에 속해 있기 때문인데, '축복'이란 일종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고 그것은 받는 사람이 '모름'의 상태에 있을 때 진정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바로 그럴 때 우린 '신비'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이런 '준비 안 됨'과 '모름'의 상태는 탄생과 죽음, 사건과 사고 같은 어떤 특별한 일들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들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신비함을 느끼지 못하거나 축복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모든 순간들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모름에도 불구하고 반복으로 인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즉 '축복'은 언제나 '준비 안 됨'과 '모름'의 상태에서, 신비의 상태에서, 그리고 익숙함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기 객관화를 통해 낯섦을 체험하며 나와 내 일상을 대상화할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일상이 축복이다. 비록 고르지 않을뿐더러 규칙적이지도 않고 늘 갑작스럽지만, 그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 부디 일상의 소중함을 가능한 많이 가능한 자주 알아챌 수 있기를! 그 숨겨진 축복을 늘 발견하고 누릴 수 있기를!



* 켄트 하루프 읽기

1. 밤에 우리 영혼은: https://rtmodel.tistory.com/1478

2. 축복: https://rtmodel.tistory.com/1671

3. 플레인송: https://rtmodel.tistory.com/1832


* 켄트 하루프 다시 읽기

1. 축복: https://rtmodel.tistory.com/2076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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