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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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연민이란


슈테판 츠바이크 저, ‘초조한 마음‘을 읽고


"병신 같은 새끼!" 


책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몰입해서 읽은 장편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며칠간 나는 이 소설 속 세계에 한 발을 담근 채 일상을 보냈다. 사유하지 않는 독서는 쇼츠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내게 이 소설은 적시에 내린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한국어 제목 ‘초조한 마음’은 독일어 원제 ‘Ungeduld des Herzens (마음의 초조함 혹은 조급함)’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어떤 작품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츠바이크가 사용한 ‘초조한 마음’이란 진정한 연민과 대조되는 감정으로써 가식적인 혹은 이기적인 연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 말을 뒤집으면, 가짜 연민은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진정한 연민이 타자를 향한다면, 초조한 마음, 즉 가식적이거나 이기적인 연민은 나를 향한다. 겉으론 비슷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연민의 진정성은 그 감정이 얼마나 이타적인지에 달려 있는 것일까.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감정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연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 걸까. 이 소설은 내게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나름대로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외형은 안톤 호프밀러라는 소위 직급의 장교가 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접경 부근에 위치한 부대와 그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케케스팔바 저택을 배경으로 벌이는 비극적인 로맨스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는다면 그건 이 소설의 작가가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츠바이크의 메시지는 언제나 외형에 있지 않다. 그 어떤 작가보다도 인간 내면의 심리를 해부하고 폭로한다. 이 소설 역시 단순히 한 건장한 남자와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한 소녀와의 개별적인 관계가 아닌 그 이면에 놓인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에 주목한다. 나 역시 며칠간 호프밀러 소위가 되어 초조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미쳐버릴 정도로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체감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병신 같은 새끼!"라고 했겠는가. 


밑줄 긋고 별표까지 친 문장이 있다. 246페이지에 나온다. 이 소설의 본질을 꿰뚫는 동시에 츠바이크의 메시지가 잘 드러난 부분이라 생각한다. 다음과 같다. 


|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사악함이나 잔인함이 아닌 나약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


나약함이 악의 뿌리라도 되는 것 같은 뉘앙스다. 소설을 읽지 않고는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나약함에 대한 인간의 선입견은 우유부단이나 어리석음 정도는 모를까, 좀처럼 악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저 문장이 얼마나 깊이 박힌 못처럼 중심을 관통하는 문장인지 알게 될 것이다. 


책 뒤표지에도 소개되어 있고 작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따로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추출한 문장도 가져와본다. 236페이지에 나온다.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 대한 정의와 나약함의 의미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


두 연민, 그러니까 진정한 연민에 대비되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앞에서 내가 말한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연민이다. 작품 속에서 츠바이크는 진정한 연민을 실제 삶으로 보여준 콘도어 박사의 목소리를 빌려 가짜 연민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호프밀러의 귀에 박히도록 또렷이 말하고 있다. 가짜 연민을 수식하는 단어는 나약한, 감상적인, 도피적, 이기적, 가식적, 자기중심적 등인데 이것들이 츠바이크가 말하는 초조한 마음의 실체다.


나약함 (인간의 약한 마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들었던 작품이 떠올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 중 하나인 '약한 마음'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약한 마음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과 비교하면서 인간의 약한 마음이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 어떤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지, 누구를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재미 삼아 따져보면 좋을 것 같아서 아래에 시도해 본다.


먼저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서 말하는 나약함의 본질은 타자의 시선과 책임으로부터 회피하고 도피하려는 감상적이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연민이다. 걷지 못하는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에게서 뜻밖의 사랑 고백을 받은 뒤 호프밀러는 단순히 장애인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을 평판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밖에 없다고 고백한 에디트의 간절한 마음을 의도적으로 뿌리치고 계속해서 도망을 선택한다. 그 결과로, 호프밀러 스스로도 예측했듯이, 에디트는 높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딸 밖에 없던 케케스팔바 노인 역시 에디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는다. 반면 호프밀러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자 마침 터진 전쟁(1차 세계대전)으로 도피하여 위험한 임무도 가리지 않고 수행한다. 신의 뜻인지 호프밀러는 죽지도 않고 전쟁 영웅이 되어 훈장까지 받으며 제대한다. 호프밀러의 나약한 마음은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 처음에 에디트에게 다가갔던 이유는 전적으로 값싼 동정심과 남들로부터의 평판 때문이었다. 그 이후 전개되는 모든 일들에서도 호프밀러는 한결같이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사수했다. 비록 그때마다 치열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언제나 최종선택은 에디트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에디트를 죽음으로 이끌었고 케케스팔바 가정의 파멸을 가져왔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약한 마음'에서 말하는 나약함의 본질은 자신에게 쏟아진 행복과 호의에 대한 과도한 중압감과 죄책감이다. 리자와의 약혼에 성공한 가난한 하급 관리 바샤 슘코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행복에 짓눌린 인물로 나온다. 상사의 총애 속에서 단순한 서류를 필사하여 마감하면 될 일을 끝까지 하지 못한 채 결국 미쳐버리고 마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등등의 언뜻 겸손해 보이는 생각들이 점점 망상이 되고 집착이 되어 스스로를 갉아먹는 파괴력까지 갖게 되는 과정을 우린 이 짧은 소설을 통해 관찰할 수 있다. 


츠바이크가 말하는 나약함은 가짜 연민의 실체다. 호프밀러는 장애를 가진 에디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선의를 베풀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의 연민은 타자의 고통을 보고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과 부끄러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나약한 마음으로 무책임하게 에디트와 약혼까지 해버린 호프밀러는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사회적 평판을 견디지 못한 채 결국 약혼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고 도망쳐 버린다. 호프밀러의 연민이 가짜이자 나약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책임감과 희생의 결여일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진심으로 연대할 용기도 없으면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위선, 자기는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으면서 뭔가를 크게 기여한 주인공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는 이기적이고 뒤틀린 마음이 결국 타자의 파멸을 불러온다는 것을 츠바이크는 이 작품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나약함은 자학적일 정도로 과도한 양심의 실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지나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주인공 바샤는 너무나 착하고 순수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닥쳐온 갑작스러운 행복 앞에서 얼음이 되어버린다. 최고로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그에겐 치명적인 공포의 순간으로 둔갑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상사의 숙제를 끝내려 하는데, 그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과도한 책임감과 자격지심이 그를 마비 상태로 내몬 것이다. 바샤의 나약함은 비대해진 도덕감과 자기 부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타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망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과 잘못된 죄책감이 그를 불안으로 몰았고 광기 어린 파멸로 이끌었던 것이다. 


츠바이크의 나약함과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의 외형은 비슷해 보인다. 둘 다 선의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츠바이크의 나약함은 타자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도망치려는 자기중심적 나약함인 반면,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은 타자으로부터 주어진 사랑과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자신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타자중심적 나약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나약함은 결국 타자의 파멸을 이끌었고,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은 자기 파멸을 가져왔다. 


앞에서 진정한 연민의 방향성은 타자를 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을 살펴본 결과 단순한 방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방향뿐 아니라 세기도 중요한 것 같다. 한 마디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너무 자기중심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타자중심적이어도 안 된다. 양 극단은 인간의 나약함이 자리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건을 하나 달면 어떨까 싶다. 진정한 연민은 자기가 아닌 타자를 향하되 자기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진정한 연민은 정말 애매모호한 경계선 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칫하다 연민은 타자를 해칠 수도 있고 나를 해칠 수도 있다. 연민은 양날을 가진 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연민이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연민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짐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축복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다움의 중심에도 연민이 자리할 거라 나는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항상 책임과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 책임과 희생이 부재한 연민은 타자를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값싼 동정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임과 희생이야말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6.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https://rtmodel.tistory.com/1923

7. 위로하는 정신: https://rtmodel.tistory.com/2088

8. 초조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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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희망사전 다시 읽는, 복 있는 사람 3
프레드릭 뷰크너 지음, 이문원 옮김 / 복있는사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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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용어에 생기를


프레드릭 비크너 저, '통쾌한 희망사전'을 읽고


박제된 교회 용어들에 신물이 날 때마다 더럭 겁이 났던 이유는 내 신앙이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라 공중에 붕 뜬 채 냄새도 맛도 나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유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안전지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신앙은 변화시켜야 할 세상을 어떻게든 도피할 장소로 여기게 만든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다. 진공 속에서 위로와 치유만 선사해 주는 게으른 마법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단순한 지적 동의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삶의 기준이자 렌즈로써 그것을 실제 몸으로 살아내는 모든 실천을 포괄한다. 반면, 종교적인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삶을 변화시킬 힘이 전혀 없는 신앙은 살아있는 생명력과 실천을 잃어버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신앙, 즉 박제된 신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있는 이들은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자신의 신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박제화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으면 결국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는 신앙으로 전락되고 말지도 모르니까.


익숙하던 모든 것들은 의심할 가치가 있다. 그것이 설사 나를 살려주었던 믿음과 신앙이라도 마찬가지다. 의심은 믿음의 적이 아니다. 의심은 믿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게 한다. 의심의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지 못한 믿음은 확신의 죄에 빠진 채 미풍에도 쉽게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교회 용어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익숙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늘 같은 단어, 같은 문장, 같은 맥락의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똑같은 예배를 하고 똑같은 주일을 보내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가 주신 평안은 단순히 기계적인 익숙함이 아닐 것이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풍지대는 평화가 아닌 죽음의 장소일 뿐이다. 


비크너의 '통쾌한 희망사전'을 두 달에 걸쳐 천천히 읽으며 무미건조하고 무채색이었던 내 신앙의 단면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익숙함에 젖어 그것이 마치 안전한 평화이자 건강한 신앙인 것처럼 나 자신을 별 문제없는 신앙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비크너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 폐부를 찔러 쪼깨는 힘이 있다. 평범하게만 보이는 그의 문장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어느새 나는 그 안에서 의도된 하나님의 신비를 경이와 함께 보게 된다. 평범 속의 비범, 비크너의 매력 포인트이지 않을까. 


다양한 교회 용어들에 대한 비크너 나름대로의 정의를 사전식으로 부여한 책이다. 그렇다고 주관적이지만은 않다. 객관을 전제로 한 주관이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사전 편찬자인 비크너 개인의 신앙이 더욱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사전적 정의들은 허를 찌르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며,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다가, 깔깔대며 웃게도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반응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깨어 있게 한다. 가나다 순으로 이뤄져 있다.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궁금한 단어가 위치한 곳을 찾아 발췌독을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단어들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크너는 그런 작가이다. 그의 매력은 이런 사전식의 책에서도 여전히 통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 프레드릭 비크너 읽기

1. 주목할 만한 일상: https://rtmodel.tistory.com/762

2.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https://rtmodel.tistory.com/1059

3. 진리를 말하다: https://rtmodel.tistory.com/1783

4. 통쾌한 희망사전: https://rtmodel.tistory.com/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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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작법 수업
이기원 지음 / 오늘산책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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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팔리는 이야기, 그리고 좋은 이야기


이기원 저,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를 읽고


책을 펼치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영업 비밀을 누설하는 책이구나! 비밀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은 조심스럽게 흥분이 되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는 사람처럼 각성된 상태로 나는 이 책을 새벽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라는 화려한 제목에 낚인 건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책을 펼치고 단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그건 착각 혹은 괜한 의심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정말 제목처럼 나도 더 잘 쓸 수 있겠는걸'하는 생각이 곧 실현될 믿음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뭔가 아주 중요한 무기를 장착하여 업그레이드된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이 책은 부제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작법 수업'에 아주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작법서를 탐독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나조차도 이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공식화된 메시지는 아주 적확하고 유용했으며 시원하기까지 했다. 물론 주요 타깃은 순수문학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를 향하지만, 이 모두가 스토리텔링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기에 소설을 쓰고자 애쓰는 모든 작가에게도 이 책의 내용은 지극히 유효하다. 특히 어떤 인사이트 한두 개에 의지하여 그동안 글을 써오거나 작중 인물이 하는 말에 이끌려 어느 정도 쓰다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 한치도 진전이 없어 글 전체가 흐지부지해진 경험을 해본 작가들에게는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다. 


로그라인, 주제, 하이 콘셉트로 서사의 나침반을 삼고, 주인공, 매력, 감정 이입, 딜레마, 적대자, 조력자, 멘토로 서사의 엔진을 삼으며, 영웅 서사와 패러다임 이론 등으로 서사의 구조를 잡고, 핫 버튼을 잘 찾아 눌러서 서사를 완성하여 성공시킨다는 저자의 가르침을 읽고 지지부진하던 내 소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빈틈이 보이는 것 같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었는지, 무엇이 빠져있었는지 알 것 같다. 이 책은 빛이 되어 내게 드리워진 어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드러나게 해 준 것이다. 고마운 책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메시지들이 성공할 수 있는 스토리, 즉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이 될 수 있고, 책은커녕 긴 동영상도 집중해서 보지 못하는 요즘 시대 사람들(대중)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서 뭔가 서운하고 아쉬운 감도 있다. 잘 팔리는 이야기, 요즘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이야기가 어떤 건지는 충분히 알겠고 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도 알겠는데,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렇게 쓰면 시대를 초월하여 남는 이야기일 수는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은 여전히 답이 없는 채로 내 안에 남아 있다. 결국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에서 말하는 '잘'은 '돈이 되고 요즘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이라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니, 나의 반가운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오늘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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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우는 시간 -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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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저,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읽고


죽음은 언제나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특히 주위에 죽어가는 사람이나 최근에 죽은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고, 나도 언젠간 죽는다는 걸 알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대부분 우리들의 현실이다. 이 책은 코로나19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짧은 기간에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어가고 있는 시점에 쓰였다. 저자 역시 의사이고 일반인과 달리 상대적으로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가 가져온 '비일상' 앞에서야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2026년 여름이다. 코로나19가 지구를 휩쓸고 간 지 불과 4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다시 인간들은 망각이 일상인 듯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일상 아닌 일상으로, 그 익숙한 거짓된 세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아, 우린 언제쯤 철이 드는 걸까. 죽음을 멀게 느끼지 않고 겸허하고 낮은 마음으로 죽음을 진지하게 배울 수 있기나 한 걸까. 또다시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을 겪어야 가능해질까. 


누구나 죽음을 겪게 되지만, 아무나 죽음을 공부하진 않는다.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관심을 가져왔지만, 정작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 순서상 죽음 이후보다 죽어가는 과정이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죽음에 대한 무지.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이다. 공부 못하는 걸 그렇게나 부끄러워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죽음에 대해 모른다는 건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죽음이 한 발자국 현실로 침투한다.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준비해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준비하는 과정이 어떠해야 바람직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비로소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저자는 이 시대가 죽음을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점점 더 부자연스러운 사건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의료의 실패로, 의료의 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쓴소리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삶을 마치는 것도 모자라 적어도 서울대학병원을 포함한 소위 빅4 병원(서울대학교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정도는 되는 곳에서 삶을 마쳐야 제대로 보냈다는(혹은 보내졌다는) 인식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도 죽음은 찾아온다는 것을 이 책의 가장 첫 메시지로 던지는 저자는 이러한 뒤틀린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준비 과정을 현실적으로 차근차근 알려준다. 덧붙여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부할 수 없는 묵직한 말을 하면서 병원의 '죽음 비즈니스' 실태를 보여준다. 이어서 "자,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평소에 죽음을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숨을 죽이고 자리에 앉아 진지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웰다잉은 낭만적이지 않다. 이 책 덕분에 죽음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33만여 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지만 그 뜻에 따라 생을 마감한 경우는 725명에 불과했다고 저자는 쓴다. 지금은 나아졌을지는 몰라도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은 10퍼센트대로 올라왔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4년 전(혹은 더 과거)에는 겨우 0.2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알다시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나중에 아파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문서로 남겨두는 법적 효력이 있는 공식 문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정부가 지정한 공식 등록기관을 방문하여 작성해야만 하고, 건강한 사람을 포함한 만 19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문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그대로 실천 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는 병원 측에서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법적인 책임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 환자의 가족들과의 반대나 소통의 부재, 임종기와 말기에 대한 모호한 기준으로 인한 판정의 연기 등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병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죽음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되고 말며, 생사결정권을 병원에 넘겨주게 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쓴다. 참고로 나는 인공호흡기를 단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연명치료와 완화의료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꼭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연명치료는 죽음의 각 단계에 나타나는 증상들을 모두 치료해야 하는 질환으로 보는 반면, 완화의료는 이 모든 증상을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그 과정에서 환자가 통증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것을 최소화하는 치료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흔히 완화의료라고 하면 환자를 포기하는 치료 정도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큰 오해라고 한다. 존엄한 죽음, 사람다운 죽음, 아름다운 죽음 등 웰다잉은 연명치료에 있지 않고 완화의료 쪽에 기울어져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의 개혁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당사자나 그 가족들만이 아닌 병원 관계자들까지 모두 죽음을 질병이 아닌 삶의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자연스러운 관점을 견지했으면 한다. 존엄한 죽음은 결코 방치한 죽음이 될 수 없다.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행위는 결코 죄를 짓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와 맞물려 이제는 어느덧 죽어가는 부모를 향한 효도의 정석이 되어가는 듯한 빅4 병원 중환자실행은 결코 바람직한 마무리가 될 수 없다. 이런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문화가 자리 잡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참고로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의 엔딩노트가 에필로그로 달려 있다. 지금은 건강한 저자가 자녀에게 쓴 유언 같은 글이다. 연명치료 여부, 장례 절차,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 등이 특정한 양식 없이 기술되어 있다. 나는 아직 유언장을 써본 적이 없다. 올해엔 이 엔딩노트를 참고로 하여 나도 이런 글을 한 번 써볼 생각이다.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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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달리아 1 밀리언셀러 클럽 53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종인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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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광기와 집착


제임스 엘로이 저, ‘블랙 달리아’를 읽고


AI나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을 뭔가 대단한 지식인 것처럼 잘도 꾸며 지껄이는 (쉽게 돈 벌려고 하는 수작 그 이상도 이하도 절대 아닌) 수많은 바람 같은 유튜버들보다 나는 책을 가까이하고 많이 읽고 깊은 통찰도 이끌어내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의 조언을 나는 늘 귀담아듣는다. 그동안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여러 북튜버 채널도 많이 접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들의 가벼움에 질려 대부분은 한두 번 보다가 구독을 다 끊어버렸다 (뭐가 목적인지 모호했다. 책 많이 읽었다는 걸 자랑하려는 건지, 읽고도 저 정도밖에 소화해내지 못하는 건지, 등등이 항상 의아했다. 결국 돈 때문에 저러는 건가 하는 결론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팟캐스트 ‘책걸상’은 지금도 즐겨 듣는다. 다른 북튜버 채널들과는 질이 다르다. 3년이 넘게 펀딩에도 참여하고 있다. 책걸상은 진짜 책을 제대로 읽고 저자의 의도는 물론 자신의 해석을 찐으로 나누는 (오프라인 독서모임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잘 형성되어 있다. 조금 꼰대스러운 진행자 한 분 때문에 가끔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어쨌거나 책 읽고 나누는 문화를 어떻게든 지키고 확산하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의 결과 내가 이끄는 오프라인 독서모임의 결은 책걸상의 분위기와 가장 많이 닮아 있다. 


진행자 중 YG님이 수차례 추천하신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를 이번 주말에 드디어 읽었다. 아니, 흡수해 버렸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마침 하루 전까지만 해도 천병희 역의 ‘오뒷세이아’ 원전을 읽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영화를 두 번 보고, 나름대로 그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스스로를 위해 긴 글을 썼던 탓인지 머리를 좀 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차였다. 그리고 내 생각은 한때 내가 사랑했던 추리소설(범죄소설)을 읽어볼까 하는 데까지 옮겨갔다 (내가 안경을 쓰게 된 이유가 추리소설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블랙 달리아’라는 말이 나왔던 데다 그 대사를 듣자마자 ‘아차 내가 사놓고 아직 그 책을 안 읽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책장에 파묻힌 이 책을 손에 들었었다. 


두 권으로 나뉜 이 책의 분량은 약 600페이지 정도다. 그러고 보니 ‘오뒷세이아’와 비슷한 분량이다. 그러나 읽는데 소요된 시간은 훨씬 짧았다. 당연한 말일까. 나는 빨려 들어갔다. 한국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이 아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가장 흡입력이 뛰어났던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보다도 더 훌륭했다고 말해야겠다. 어지간한 책들과 마찬가지로 초반에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느라 조금 더딘 속도였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페이지가 날아가듯 넘어갔다. 


끔찍한 살인사건. 공포와 광기와 집착, 그러나 그것들을 다 합친 무게에 전혀 걸맞지 않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이없는 살인 동기와 살인자의 정체. 나는 허를 찔린 듯했고 작가 제임스 엘로이의 천재성과 필력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의 신체(시체 아님 주의)를 훼손하고, 내장을 다 꺼내어 포름알데히드 병에 넣어 보관하고, 피를 다 뽑고, 그것도 모자라 허리 부근에서 시체를 두 동강 내어 길거리에 버린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공포에 휩싸였고 동시에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소설 끝까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살인자의 정체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것이 인간이지, 이것이 인생이지,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하는 생각을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던 것 같다. 잔인함과 이해할 수 없음, 모순과 이율배반성 때문도 있지만, 그것들보다는 진실이 가진 그 가벼움에 경악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의 끔찍한 사건이라면 뭔가 거대하고 함부로 이해하기 힘든 음모라도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내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추론은 유리잔 깨지듯 박살 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인간과 인생의 진미를 맛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 제임스 엘로이의 천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읽은 스티븐 킹의 ‘빌리 서머스‘보다도 강렬했던 느와르풍의 이 소설은 솔직히 아무에게나 권하고 싶진 않다. 충분히 기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풍성한 독서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성에 대한 광기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고 작품의 중심 결을 따라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미국의 1940년대 상황도 체감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다채롭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음미하며 뜻밖의 성찰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블랙 달리아’는 실제로 1947년 미국 엘에이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써 가장 끔찍한 미제 살인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지어진 것이다. 작품으로부터 전해지는 공포의 무게감도 아마 실제 살인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니 시간 나면 한 번 봐야겠다.


#황금가지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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