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원한 건 없다

도리스 레싱 저, ‘다섯째 아이‘를 읽고

당혹스러움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남편 데이비드와 함께 아이 여덟을 낳고 큰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가졌던 헤리엇이 다섯째 아이 벤을 가졌을 때부터 다소 목가적이고 낭만적일 것 같았던 이 소설의 장르는 호러가 된다. 다섯째 아이는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꿈꿨던 삶에 단절을 가져왔고, 급기야 그들의 오랜 꿈이 과연 실현 가능했는지, 그저 몽상에 불과했는지를 재고하게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기고, 부모님과의 관계도 서먹해지며, 첫째부터 넷째 아이들과의 관계도 깨지거나 소원해지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면 다섯째 아이 벤의 존재는 모두의 불행과 저주의 씨앗이었던 걸까?

저자 도리스 레싱이 벤을 태어나기 전부터 폭력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리엇은 이미 아이를 네 번 낳은 경험이 있는 터라 벤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다. 임신 기간이 고통스러웠고, 급기야 아이는 평균적인 아이들에 비해 약 두 배 정도 큰 상태로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에도 성장이 두 배 정도 빨랐다. 벤에게서는 아이의 순수하고 귀여운 눈빛과 얼굴 표정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벤은 마치 조그만 악마가 들어가 있는 존재처럼 비열하고 이기적인 어른의 차가운 시선으로 주위 모든 사람을 바라보았으며, 그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를 피하게 만들었다. 또한 벤은 아주 어린 나이에 친척의 애완동물을 목 졸라 죽이는 행동도 서슴없이 하게 된다. 과연 벤은 아이의 몸에 들어온 악마였을까? 

소설은 그리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벤이 악마가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처럼 좀 더 원시적인 종족인 것처럼 묘사한다. 벤의 폭력성과 이기성을 악마와 같은 영적인 이유나 환경의 영향이라는 학습적인 이유도 아닌, 선천성이라는 생물학적인 이유로 설명하려는 듯하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어쨌거나 데이비드와 해리엇 사이에서 벤과 같은 야만인 같은 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말한다. 어쩌다가 이런 아이가 태어나게 된 걸까?

한 가지 가능성으로 저자는 해리엇 부부의 부주의함과 비현실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이었던 꿈을 원인으로 드는 것 같다. 넷째 아이까지 낳고 나서 그들 역시 다섯째를 가지기 전에 시간을 가지자고 생각했었으나 피임도 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하룻밤의 정욕으로 결정해 버린 이 부부를 부주의하다고 말하는 건 결코 과한 판단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미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그들은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육아에 도움을 받고 있었다. 계속해서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일에 열중하는 부부가 이미 낳은 아이들을 잘 키우는 일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아이는 그냥 낳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부모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해리엇 부부는 이 당연하고도 신성한 진리를 함부로 여겼던 게 아닌가 싶다. 단순히 그들의 무모할 정도로 부주의한 꿈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행복의 열매만을 바랐을 뿐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짧았던 듯하다. 그러니 그 긴 과정 자체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가 있었겠는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 눈에 그들은 거짓 행복을 위해 참 행복을 잃어버린 자들과 같았다.

이런 점에서 다섯째 아이 벤의 탄생은 여덟 아이를 낳겠다는 해리엇 부부의 계획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벤 때문에 그들은 이미 그들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그들의 이기적인 부주의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벤을 요양원에 보내는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하는데, 모두가 반대했으나 모성애에 충만했던 해리엇은 홀로 요양원을 찾아가 벤을 다시 데리고 온다. 벤의 복귀는, 아니 벤을 복귀시킨 해리엇의 독단적인 행동은 데이비드와 네 아이들, 그리고 부모와 친척들과의 모든 관계를 포기하고 벤을 선택한 행동으로 해석되고, 그 이후 해리엇은 벤을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키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쓰게 된다. 과연 이러한 해리엇의 행동을 모성애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할 수 있을지, 혹시 자신의 죄책감 아닌 죄책감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은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부분일 것이다.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리엇 가정은 벤의 탄생과 복귀 이후 와해되었고 회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벤을 평범한 아이들처럼 키우려고 했던 해리엇의 시도도 실패로 귀결되는데, 벤 안에 각인된 야만과 폭력의 디엔에이는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벤을 선택했던 해리엇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벤은 갱들과 어울리며 집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존재로 그려지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이 작품의 메시지를 나는 벤이 아닌 해리엇에서 찾는다. 저자 도리스 레싱은 전통적으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해리엇의 꿈과 모성애, 그리고 행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조롱이라도 하는 듯한 뉘앙스를 텍스트에 숨기지 않으면서 독자들에게 그것들의 의미와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 작품을 읽고 어떤 윤리 도덕적인 결론을 내리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벤과 같은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해리엇 같은 인물도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의 눈을 빌려 자명한 개념, 통념들에 대해 다시 묻고 의심하며 내가 사는 이 시대와 문화라는 콘텍스트에서 해석해 보는 기회를 갖는 건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영원한 건 없기 때문이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 무라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중성이 아닌 예술성의 이면


레프 톨스토이 저, '하지 무라트'를 읽고


아바르인 산민 하지 무라트는 캅카스의 이름난 전사이자 나이브였다. 나이브는 이슬람사회 부족장 또는 장수를 뜻한다. 하지 무라트는 실존 인물이었다. 톨스토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꺾어 던져버린 '타타르 풀'이라고도 불리는 엉겅퀴의 굴하지 않는 생명력에 경탄하며 오래전에 들은 하지 무라트에 관한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과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하지 무라트가 꺾인 엉겅퀴처럼 잘린 머리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짧은 기간을 재구성했으며, 1828년생인 톨스토이가 많은 시간 깊은 애정을 들여 1904년 완성했지만 그의 의지에 따라 1912년, 그러니까 그의 사후 2년 뒤에 출간되었다.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러시아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남하정책을 펼치던 시기를 조준한다. 러시아는 캅카스까지 내려왔지만 캅카스에 거주하던 이슬람교도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영토 확장이 난항에 빠지게 된다. 1834년 체첸, 다게스탄 일대의 통치자 이맘이 된 샤밀은 러시아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 무라트는 샤밀 휘하 아래 용맹을 떨치던 장수였다. 


이후 샤밀의 독재적인 통치에 반발한 하지 무라트는 러시아에 투항하여 샤밀에게 복수를 꾀한다. 샤밀은 하지 무라트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었기에 하지 무라트는 러시아군과 동맹한다고 해도 마음껏 샤밀을 공격할 수 없었다. 하지 무라트는 러시아 측에 자신의 가족과 사로잡은 포로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구출해 달라고 요구한다. 가족 문제만 해결되면 목숨을 바쳐 러시아군과 함께 샤밀과 그 일당의 항복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하지 무라트의 말과 행동에는 아무런 흠이 없었다. 어떤 거짓과 불의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탁월한 전사였으나 얼굴엔 늘 앳된 선량함이 묻어났다. 잘린 머리에서도 유지되었을 만큼. 그러나 러시아 측에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투항한 하지 무라트를 도와주지 않았다. 시간만 지체할 뿐이라 여겼던 하지 무라트는 차라리 러시아를 다시 탈출하여 샤밀을 직접 공격하고 가족을 구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자기와 함께 하는 정예대원이 소수 있었지만 그 계획은 성취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죽음을 각오한, 어쩌면 무모한, 결단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샤밀과의 전투를 시작도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다. 탈출하는 도중에 러시아군으로부터의 공격으로 그는 그와 함께 한 사람들과 함께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소설은 꿈을 꾼 듯 끝을 맺는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대문호로 자리매김했던 톨스토이는 인생 중반에 순수문학에서 벗어나 종교와 윤리에 천착한 작가로 거듭난다. '하지 무라트'는 그의 말년에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에 나는 종교와 윤리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 작품 안에 듬뿍 담겨있으리라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내가 '하지 무라트'에서 만난 톨스토이는 설교자가 아닌 순수문학가였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대중성은 온데간데없고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의 내용만이 가득했다. 역사책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왜 톨스토이는 대중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이 작품을 그렇게나 공을 들여 완성하고 사후에 출간되도록 계획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하지 무라트가 아무리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또 그가 아무리 불의에 저항하며 끝까지 명예롭고 정의롭게 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이 작품에 대한, 혹은 하지 무라트에 대한 톨스토이의 각별한 애정을 이해하기엔 부족했다. 특히나 기독교적인 색채를 진하게 띠게 된 그의 인생 말년에 이슬람교도였던 한 사람에 대한 짧은 생을 다룬 이유가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찾아보면 기독교 측에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설사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허구를 더 동원하여 기독교 버전의 '하지 무라트'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실존 인물의 프로필을 그대로 사용했는지 톨스토이의 생각이 궁금했다. 


톨스토이는 1910년 사망했다. 이 작품은 6년 전인 1904년 완성되었다. 왜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자신의 사후에 출간하길 원했을까? 그 이유가 혹시 위에서 말한 궁금증에 대한 답과 연결되진 않을까? 혹시 기독교적 윤리와 도덕 선생으로 말년을 살았던 톨스토이의 내면에 다른 생각이 꿈틀대고 있진 않았을까? 기독교도가 아닌 이슬람교도의 순박함, 용기, 정의로움, 선량함 등을 책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이런 가치들은 한 종교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진 않았을까? 생전에 출간했다면 생겼을지도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후 출간을 원한 게 아니었을까? 


톨스토이는 동방정교회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한다. 톨스토이는 기독교가 민중을 등한시한다고 여겼고 예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기독교관이 우리가 아는 그것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건 신학적인 내용이므로 여기선 언급을 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가 이 작품 '하지 무라트'를 쓰고 사후 출간을 기획한 이유가 그의 기독교관과 동방정교회의 관점 사이에 생긴 마찰과 충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 무라트'가 1896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톨스토이가 파문당한 사건이 8년간 이 작품을 집필하는 중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을 다 읽고, 감상문을 이렇게 쓰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대중성을 과감히 저버리고 문학적 예술성의 옷을 입혀 이 작품을 쓴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정말 궁금하다. 이 작품이 가진 예술성의 이면이.


도스토옙스키도 그렇지만 톨스토이 역시 내적인 변화를 크게 거친 작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책장엔 몇 년째 '전쟁과 평화'가 꽂혀 있다. 그리고 최근에 '인생이란 무엇인가'도 책장에서 나를 노려본다. 언제 읽을진 알 수 없지만 '하지 무라트' 덕분에 시기가 앞당겨질 것 같은 예감이다. 그리고 톨스토이도 모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 톨스토이 읽기

1. 고백록: https://rtmodel.tistory.com/824

2. 이반 일리치의 죽음: https://rtmodel.tistory.com/853

3. 안나 카레니나: https://rtmodel.tistory.com/1173

4.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250

5. 부활: https://rtmodel.tistory.com/1336

6. 하지 무라트: https://rtmodel.tistory.com/1902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생을 주는 소녀 2~3 세트 - 전2권 영생을 주는 소녀
김민석 지음, 안정혜 그림 / IVP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원하는 공감


김민석 글, 안정혜 그림, ‘영생을 주는 소녀’를 읽고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책. 텍스트가 미처 전달하지 못하는 여백을 그림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책. 세 권으로 구성된 ‘영생을 주는 소녀’는 만화책이다. 두 시간 만에 세 권을 내리읽었다. 나도 모르게 몰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화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폭력과 기독교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성폭력이다. 에붐의 대표 이도연은 스스로가 성폭력의 피해자다. 가해자는 윤민후 목사, 윤다라의 아버지다. 주인공 윤다라는 아버지가 강단 앞에서는 훌륭한 목사이지만 강단 뒤에서는 어머니를 때리고 여러 여성 교인들을 성추행 및 성폭력 대상자로 삼는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간접 피해자이자, 아버지의 철저한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낸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직접 피해자다. 이도연과 대립 각을 세웠으나 결말에 가서 무너진 윤다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되는 장지오 목사 역시 장환의 딸로서 처음엔 몰랐으나 나중에 아버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폭력자에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윤다라와 장지오는 모두 아버지의 그늘 아래 눌려 순응적인 삶을 강요받았던 피해자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많은 여성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윤민후와 장환, 이 두 사람은 모두 1세대 아버지, 목사, 회장 자리에 앉아 부와 권력을 거머쥔 가부장적 폭력자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소설의 구도만 봐도 이 작품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특히 성폭력으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오점을 기록한 한국 교회의 단면을 얼마나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다행히 ‘영생을 주는 소녀’는 이런 타락한 한국 교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또한 가증스러울 정도로 파렴치한 폭력자들을 효과적으로 처벌하는, 말하자면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갚고 다스리는 방식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월터 윙크가 말한, 이른바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에 매몰될 뿐이다. 대신 이 작품 속에서는 직간접적인 폭력의 피해자로 등장한 윤다라, 이도연, 장지오, 이 여성 트리오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데,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을 해결하기 위해 타자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는 기독교에서 황금률로 알려진 예수의 말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의 가시적인 성취로도 보인다. 폭력의 희생자가 가해자를 향해 복수가 아닌 용서를 택하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잠재적 폭력의 가해자가 잠재적 희생자의 마음을 공감하여 잠재적 폭력을 예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공상과학적 장치 '토브'의 메커니즘이 바로 '공감'이기 때문이다. '토브'는 히브리어로 '좋았더라'의 의미를 가지며 성경의 창조기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도연이 개발한 프로토 타입을 윤다라가 개량하여 작품 속에서 폭력에 저항하고 해결하는 키로 작동한다. 즉, 이 작품의 시작은 폭력이었으나 끝은 공감을 통한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나아간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작품의 시작이 폭력이고 끝이 공감이라면 중간과정은 어떠한가? 세 권으로 구성된 이 장편 만화는 기본적으로 공상과학을 기반으로 하지만 폭력, 살인, 강간, 배신, 복수가 넘실대기 때문에 스릴러 소설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겠다 싶다. 가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스릴러 혹은 범죄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페이지 터너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비단 흥미를 유발하는 목적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윤민후나 장환이라는 개별적인 악에 머무르지 않고 이 책은 인간의 보편적인 어두운 구석을 비추고 드러낸다. 특히 폭력성이 원래 인간에게 내재된 것인가, 아니면 어느 특정한 시기에 후천적으로 얻게 된 것인가, 하는 폭력의 탄생에 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탱하는 두 개의 거대한 축은 정의와 공의다. 느헤미야의 김근주 교수는 여호와의 공의를 공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한 손길 혹은 흔적이라고 믿는 나는 바로 이 능력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유전자나 환경 혹은 본능에 충실하게 살 때 비롯되는 ‘인간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인간다운‘ 모습을 추구하고 구현하기 위한 정석이자 좁은 길이라 믿는다. 또한 이 공감이라는 소중한 힘은 이 책에서도 소개되듯,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보상 심리처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선한 행위의 한계를 초월하여 마침내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길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토브'라는 공상과학적인 도구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읽고 해석해 낼 때 나는 그 힘이 충분히 발현되고도 남으리라 믿는다. 


#IVP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레바퀴 밑에 헤르만 헤세 선집 2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순응의 그늘 밑에


헤르만 헤세 저, '수레바퀴 밑에'를 다시 읽고


재독의 힘은 초독 때 주변으로 밀려났던 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로 발현된다. 또한 독자의 눈을 넘어 작가의 눈으로 읽는 텍스트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멀리 떨어져 관조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풍경 속으로 성큼 들어가 그것과 동화되어 이전보다 공감각적이고 입체적인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 7년 만에 다시 읽은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는 특히 그랬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작품을 나는 재독이 아닌 삼독을 했다. 중학생 시절에 가장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헤세를 찾았던 것 같다.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 그리고 분열을 거치고 마침내 합일에 이르는 내면의 여정을 중심으로 한 숱한 이야기들이 내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길을 뚜벅뚜벅 걷게 하는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준 게 아닌가 싶다.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헤세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그렇게 나는 헤세를 다시 만난다.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알려진 ‘수레바퀴 밑에’를 가장 먼저 고른 이유는 선집 읽기에 앞서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의 운명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또한 재독의 고유한 맛이리라). 이 책을 다시 읽는 내가 이제 곧 쉰을 바라보는 나이라서 그랬을까? 이번엔 억압의 상징인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음을 맞이했던 한스를 이해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한스의 아버지, 마을 목사, 학교 교장, 그리고 마울브론 신학교를 담당하는 교장을 비롯한 여러 선생들이 이루는 수레바퀴의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말하자면 희생자의 입장을 공감하는 차원을 넘어 가해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레바퀴를 돌리고 유지하고 있는지, 그들이 만들어낸 (혹은 답습한) 그들의 무의식적인 삶의 패턴이 후대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과연 그들은 인지라도 하고 있는지, 혹시 그들 역시 더 큰 의미에서 보면 피해자가 아닌지, 그렇다면 가해자는 도대체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구두장이 플라이크 아저씨를 제외한 나머지 어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스를 자살로 몰아갔던 그 무거운 수레바퀴의 본질은 아마도 질서 유지를 위한 규율, 규범, 규칙 등으로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를 생각해 볼 때 나는 그 답으로 권위자, 혹은, 좀 더 넓게는, 생각 없이 순응적으로 사는, 인간답지 못하고 인간스럽기만 한, 기성세대라고 답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고 씁쓸해졌다. 7년 전 읽었을 땐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성세대인, 한스의 아버지, 마을 목사, 학교 교장 등의 어른들을 비난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들이 단순하게 비난할 대상이기보다 그들 역시 피해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수레바퀴의 중추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들의 주체성을 고려할 때 그들 중 그 누구도 주동자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어떤 능동적이고 악한 의도로 한스를 파멸시키려고 애쓴 사람이 없었다. 또한 한스가 주검으로 변한 이후에도 구두장이 플라이크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한스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주체를 상실한 채 무의식적으로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수레바퀴를 돌리는 자를 넘어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들로 보일 만큼.


순응. 나는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어 수레바퀴를 돌리는 장본인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순응'이라는 단어를 고른다. 그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이기도 하며, 아이들의 전인적인 성장을 위해 애쓰는 선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 타이틀 뒤에 숨어 개성을 거세당한 채 그저 그 타이틀에 걸맞은 일을 해댈 뿐이었다. 마치 큰 기계의 부속품처럼, 마치 그것이 자기가 후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 속에 빠져 있으면서 말이다. 


수레바퀴는 개성이 거세된 획일성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억압의 중추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고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수레바퀴는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의식적인 의도가 아닌 무의식적인 본성이 발휘된 실체,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생성된 유기체인 것이다. 또한 여기서 나는 한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한스는 수레바퀴라는 유기체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사고사도 자살도 아닌 타살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는 것이다. 한스는 생각 없는 어른들의 순응이라는 수레바퀴가 낳은 범죄에 희생당한 셈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는 순간이다.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다. 한스도 어른들도 아닌 수레바퀴 밑에서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다. 이 아이들은 선택받은 모범생이라고도 불리고 엘리트라고도 불리게 된다. 그들은 그저 수레바퀴에 굴복하고 순응했을 뿐인데 주류라는 견고한 성역에 진입하게 되고 사회적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수레바퀴가 만드는 피의 피라미드 상층부로 올라가 더욱 거대한 수레바퀴를 이루는 주요 부속품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수레바퀴는 대를 거듭하며 점점 더 삶의 중추로 자리 잡게 된다. 수레바퀴가 생존하고 진화하는 기전이다. 생각 없는 어른들과,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라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을 대체하게 될 생각 없는 아이들이 이루는 완벽한 조화가 빚어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획일성에 저항한다. 질서라는 멋들어진 용어 이면에 숨은 인간의 탐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다양성과 개성이라는 단어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생명의 가장 큰 신비를 다양성이라고 보는 나는 순응에 길들여진 모든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의 옷을 입고 행하는 행동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당신에게 주어진 일과 삶을 아무 생각 없이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고. 그것이 남을 파괴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만 없을 뿐 남을 죽이는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다른 사람을 죽일 의지가 있든 없든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라고. 죽일 의지 없이 행한 살인은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될뿐더러 의도적인 살인보다 훨씬 쉽기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게 아니었냐고. 당신의 그 생각 없는 순응이 비겁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냐고. 그리고 그것들이 이룬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 수레바퀴가 영혼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그리고 나는 감히 순응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순응으로 말미암아 거세된 자신의 주체를 꼭 찾아 회복시켜 보라고 말이다. 그것도 가능한 이른 나이에. 자칫 교만의 구렁텅이로 빠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이 시도가 꼭 해볼 만한 과업이라고 믿는다. 교만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교만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거니와, 교만을 느껴보지도 않고서 겸손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동경하고 지향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응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를테면 개성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애써 보길 권한다. 그래야 생각 없이 순응하지 않고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발적인 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도 모르게 돌리고 있는 수레바퀴의 참혹한 본질을 의심하여 알아채고, 나아가 고발하고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는 영혼이 더 이상 없는 세상, 우리 모두의 세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찬란한 멸종 -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이정모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만 변하면 된다


이정모 저, '찬란한 멸종'을 읽고


다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읽어볼 수도 없겠지만) 이 책의 저자 이정모처럼 과학 책을 맛깔나게 쓰는 작가가 한국에 또 있을까. 적어도 내가 알기론 없다. 독보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그의 저서를 여러 권 읽었지만 돈이 아깝거나 도움이 되지 않다거나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그의 글은 첫째, 재밌다. 유쾌하다. 둘째, 유익하다, 공부가 된다. 셋째, 쏙쏙 들어온다. 이러니 남녀노소 누구나 교양 수준의 과학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서 이정모의 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름 생물학 박사학위 소유자인 나조차도 이 세 가지 장점을 누리며 몰입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타깃 독자가 청소년에 국한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한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찬란한 멸종'은 제목부터 호기심이 인다. 그러나 책을 열고 프롤로그를 조금만 읽다 보면 금방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부분을 발췌해 본다. 다음과 같다. 


| 새로운 생명이 등장하려면 누군가 그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멸종이라고 합니다. 흔히 멸종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새로운 생명 탄생의 찬란한 시작이기도 합니다. 책 제목을 '찬란한 멸종'이라고 지은 이유입니다. |


그렇다. 멸종은 그것이 가진 어감만큼 그렇게 무섭거나 대단한 것도 아닌 셈이다. 생명의 탄생은 경이로워하면서 멸종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모순일 수 있다는 말이다. 멸종이 없으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이뤄지지 않을 테니까. 


이 책의 매력은 멸종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부제에서도 밝히듯 이 책은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이다. 말 그대로 지구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아가면서 점점 더 과거를 기술하며 우리에게 여러 생명의 탄생과 그것이 가능했던 여러 차례의 멸종을 설명해 주는 책이다. 이 책만이 가진 독특한 장점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역사를 거꾸로 훑으며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가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미래 인간이 멸종한 이후 시점부터 시작하는데, 첫 화자는 인공지능이다. 그것으로 시작으로 여러 생명체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당시 역사를 조명한다. 먼 과거에는 사람이라는 종이 탄생하지도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사람이 화자가 될 수 있냐고 따지는 분은 설마 없겠지? 아무튼 이 부분에서도 이정모는 정말 영리하다. 방금 전 바보 같은 질문조차도 나오지 없도록 그 당시 현존했던 생명체의 입을 빌려 지구의 역사를 들려주도록 이 책을 구성했으니 말이다. 나는 감탄하면서 즐겁게 읽었다.


기후 위기로 인간은 멸종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문제는 지구 역사상 있었던 여러 멸종의 원인도 기후변화였지만, 지금 인간이 맞이하고 있는 기후변화는 천재지변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는 모두 인간 활동의 결과이다. 즉 인간만 변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말이다. 이 책 역시 다른 생명체의 목소리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명징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희망도 놓지 않는다. 적어도 지구 기온의 상승이라도 막을 수는 있다고, 그것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 역시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인간은 다시 대멸종을 초래하는 주범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능력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내게 남은 메시지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인간만 변하면 된다."를 꼽겠다. 그렇다. 인간만 변하면 된다.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조차 알고 있다. 알고도 변하지 않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이라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바란다. 편리함이 아닌 불편함을 재고하고 기꺼이 선택할 수 있기를, 자본주의와 과학시대라는 멈추지 않는 기차의 동력에 브레이크를 인간 스스로 걸 수 있기를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도 언젠간 멸종을 면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자멸은 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자멸만이 아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타 생명체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테니까 살인자라는 타이틀까지 거머 줘야 할 테니까.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