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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진정한 연민이란
슈테판 츠바이크 저, ‘초조한 마음‘을 읽고
"병신 같은 새끼!"
책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몰입해서 읽은 장편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며칠간 나는 이 소설 속 세계에 한 발을 담근 채 일상을 보냈다. 사유하지 않는 독서는 쇼츠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내게 이 소설은 적시에 내린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한국어 제목 ‘초조한 마음’은 독일어 원제 ‘Ungeduld des Herzens (마음의 초조함 혹은 조급함)’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어떤 작품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츠바이크가 사용한 ‘초조한 마음’이란 진정한 연민과 대조되는 감정으로써 가식적인 혹은 이기적인 연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 말을 뒤집으면, 가짜 연민은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진정한 연민이 타자를 향한다면, 초조한 마음, 즉 가식적이거나 이기적인 연민은 나를 향한다. 겉으론 비슷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연민의 진정성은 그 감정이 얼마나 이타적인지에 달려 있는 것일까.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감정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연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 걸까. 이 소설은 내게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나름대로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외형은 안톤 호프밀러라는 소위 직급의 장교가 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접경 부근에 위치한 부대와 그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케케스팔바 저택을 배경으로 벌이는 비극적인 로맨스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는다면 그건 이 소설의 작가가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츠바이크의 메시지는 언제나 외형에 있지 않다. 그 어떤 작가보다도 인간 내면의 심리를 해부하고 폭로한다. 이 소설 역시 단순히 한 건장한 남자와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한 소녀와의 개별적인 관계가 아닌 그 이면에 놓인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에 주목한다. 나 역시 며칠간 호프밀러 소위가 되어 초조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미쳐버릴 정도로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체감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병신 같은 새끼!"라고 했겠는가.
밑줄 긋고 별표까지 친 문장이 있다. 246페이지에 나온다. 이 소설의 본질을 꿰뚫는 동시에 츠바이크의 메시지가 잘 드러난 부분이라 생각한다. 다음과 같다.
|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사악함이나 잔인함이 아닌 나약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
나약함이 악의 뿌리라도 되는 것 같은 뉘앙스다. 소설을 읽지 않고는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나약함에 대한 인간의 선입견은 우유부단이나 어리석음 정도는 모를까, 좀처럼 악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저 문장이 얼마나 깊이 박힌 못처럼 중심을 관통하는 문장인지 알게 될 것이다.
책 뒤표지에도 소개되어 있고 작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따로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추출한 문장도 가져와본다. 236페이지에 나온다.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 대한 정의와 나약함의 의미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
두 연민, 그러니까 진정한 연민에 대비되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앞에서 내가 말한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연민이다. 작품 속에서 츠바이크는 진정한 연민을 실제 삶으로 보여준 콘도어 박사의 목소리를 빌려 가짜 연민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호프밀러의 귀에 박히도록 또렷이 말하고 있다. 가짜 연민을 수식하는 단어는 나약한, 감상적인, 도피적, 이기적, 가식적, 자기중심적 등인데 이것들이 츠바이크가 말하는 초조한 마음의 실체다.
나약함 (인간의 약한 마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들었던 작품이 떠올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 중 하나인 '약한 마음'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약한 마음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과 비교하면서 인간의 약한 마음이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 어떤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지, 누구를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재미 삼아 따져보면 좋을 것 같아서 아래에 시도해 본다.
먼저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서 말하는 나약함의 본질은 타자의 시선과 책임으로부터 회피하고 도피하려는 감상적이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연민이다. 걷지 못하는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에게서 뜻밖의 사랑 고백을 받은 뒤 호프밀러는 단순히 장애인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을 평판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밖에 없다고 고백한 에디트의 간절한 마음을 의도적으로 뿌리치고 계속해서 도망을 선택한다. 그 결과로, 호프밀러 스스로도 예측했듯이, 에디트는 높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딸 밖에 없던 케케스팔바 노인 역시 에디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는다. 반면 호프밀러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자 마침 터진 전쟁(1차 세계대전)으로 도피하여 위험한 임무도 가리지 않고 수행한다. 신의 뜻인지 호프밀러는 죽지도 않고 전쟁 영웅이 되어 훈장까지 받으며 제대한다. 호프밀러의 나약한 마음은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 처음에 에디트에게 다가갔던 이유는 전적으로 값싼 동정심과 남들로부터의 평판 때문이었다. 그 이후 전개되는 모든 일들에서도 호프밀러는 한결같이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사수했다. 비록 그때마다 치열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언제나 최종선택은 에디트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에디트를 죽음으로 이끌었고 케케스팔바 가정의 파멸을 가져왔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약한 마음'에서 말하는 나약함의 본질은 자신에게 쏟아진 행복과 호의에 대한 과도한 중압감과 죄책감이다. 리자와의 약혼에 성공한 가난한 하급 관리 바샤 슘코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행복에 짓눌린 인물로 나온다. 상사의 총애 속에서 단순한 서류를 필사하여 마감하면 될 일을 끝까지 하지 못한 채 결국 미쳐버리고 마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등등의 언뜻 겸손해 보이는 생각들이 점점 망상이 되고 집착이 되어 스스로를 갉아먹는 파괴력까지 갖게 되는 과정을 우린 이 짧은 소설을 통해 관찰할 수 있다.
츠바이크가 말하는 나약함은 가짜 연민의 실체다. 호프밀러는 장애를 가진 에디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선의를 베풀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의 연민은 타자의 고통을 보고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과 부끄러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나약한 마음으로 무책임하게 에디트와 약혼까지 해버린 호프밀러는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사회적 평판을 견디지 못한 채 결국 약혼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고 도망쳐 버린다. 호프밀러의 연민이 가짜이자 나약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책임감과 희생의 결여일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진심으로 연대할 용기도 없으면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위선, 자기는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으면서 뭔가를 크게 기여한 주인공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는 이기적이고 뒤틀린 마음이 결국 타자의 파멸을 불러온다는 것을 츠바이크는 이 작품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나약함은 자학적일 정도로 과도한 양심의 실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지나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주인공 바샤는 너무나 착하고 순수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닥쳐온 갑작스러운 행복 앞에서 얼음이 되어버린다. 최고로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그에겐 치명적인 공포의 순간으로 둔갑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상사의 숙제를 끝내려 하는데, 그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과도한 책임감과 자격지심이 그를 마비 상태로 내몬 것이다. 바샤의 나약함은 비대해진 도덕감과 자기 부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타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망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과 잘못된 죄책감이 그를 불안으로 몰았고 광기 어린 파멸로 이끌었던 것이다.
츠바이크의 나약함과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의 외형은 비슷해 보인다. 둘 다 선의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츠바이크의 나약함은 타자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도망치려는 자기중심적 나약함인 반면,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은 타자으로부터 주어진 사랑과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자신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타자중심적 나약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나약함은 결국 타자의 파멸을 이끌었고,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은 자기 파멸을 가져왔다.
앞에서 진정한 연민의 방향성은 타자를 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을 살펴본 결과 단순한 방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방향뿐 아니라 세기도 중요한 것 같다. 한 마디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너무 자기중심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타자중심적이어도 안 된다. 양 극단은 인간의 나약함이 자리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건을 하나 달면 어떨까 싶다. 진정한 연민은 자기가 아닌 타자를 향하되 자기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진정한 연민은 정말 애매모호한 경계선 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칫하다 연민은 타자를 해칠 수도 있고 나를 해칠 수도 있다. 연민은 양날을 가진 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연민이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연민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짐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축복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다움의 중심에도 연민이 자리할 거라 나는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항상 책임과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 책임과 희생이 부재한 연민은 타자를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값싼 동정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임과 희생이야말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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