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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밑에 ㅣ 헤르만 헤세 선집 2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평점 :
순응의 그늘 밑에
헤르만 헤세 저, '수레바퀴 밑에'를 다시 읽고
재독의 힘은 초독 때 주변으로 밀려났던 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로 발현된다. 또한 독자의 눈을 넘어 작가의 눈으로 읽는 텍스트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멀리 떨어져 관조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풍경 속으로 성큼 들어가 그것과 동화되어 이전보다 공감각적이고 입체적인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 7년 만에 다시 읽은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는 특히 그랬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작품을 나는 재독이 아닌 삼독을 했다. 중학생 시절에 가장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헤세를 찾았던 것 같다.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 그리고 분열을 거치고 마침내 합일에 이르는 내면의 여정을 중심으로 한 숱한 이야기들이 내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길을 뚜벅뚜벅 걷게 하는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준 게 아닌가 싶다.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헤세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그렇게 나는 헤세를 다시 만난다.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알려진 ‘수레바퀴 밑에’를 가장 먼저 고른 이유는 선집 읽기에 앞서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의 운명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또한 재독의 고유한 맛이리라). 이 책을 다시 읽는 내가 이제 곧 쉰을 바라보는 나이라서 그랬을까? 이번엔 억압의 상징인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음을 맞이했던 한스를 이해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한스의 아버지, 마을 목사, 학교 교장, 그리고 마울브론 신학교를 담당하는 교장을 비롯한 여러 선생들이 이루는 수레바퀴의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말하자면 희생자의 입장을 공감하는 차원을 넘어 가해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레바퀴를 돌리고 유지하고 있는지, 그들이 만들어낸 (혹은 답습한) 그들의 무의식적인 삶의 패턴이 후대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과연 그들은 인지라도 하고 있는지, 혹시 그들 역시 더 큰 의미에서 보면 피해자가 아닌지, 그렇다면 가해자는 도대체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구두장이 플라이크 아저씨를 제외한 나머지 어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스를 자살로 몰아갔던 그 무거운 수레바퀴의 본질은 아마도 질서 유지를 위한 규율, 규범, 규칙 등으로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를 생각해 볼 때 나는 그 답으로 권위자, 혹은, 좀 더 넓게는, 생각 없이 순응적으로 사는, 인간답지 못하고 인간스럽기만 한, 기성세대라고 답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고 씁쓸해졌다. 7년 전 읽었을 땐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성세대인, 한스의 아버지, 마을 목사, 학교 교장 등의 어른들을 비난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들이 단순하게 비난할 대상이기보다 그들 역시 피해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수레바퀴의 중추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들의 주체성을 고려할 때 그들 중 그 누구도 주동자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어떤 능동적이고 악한 의도로 한스를 파멸시키려고 애쓴 사람이 없었다. 또한 한스가 주검으로 변한 이후에도 구두장이 플라이크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한스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주체를 상실한 채 무의식적으로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수레바퀴를 돌리는 자를 넘어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들로 보일 만큼.
순응. 나는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어 수레바퀴를 돌리는 장본인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순응'이라는 단어를 고른다. 그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이기도 하며, 아이들의 전인적인 성장을 위해 애쓰는 선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 타이틀 뒤에 숨어 개성을 거세당한 채 그저 그 타이틀에 걸맞은 일을 해댈 뿐이었다. 마치 큰 기계의 부속품처럼, 마치 그것이 자기가 후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 속에 빠져 있으면서 말이다.
수레바퀴는 개성이 거세된 획일성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억압의 중추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고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수레바퀴는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의식적인 의도가 아닌 무의식적인 본성이 발휘된 실체,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생성된 유기체인 것이다. 또한 여기서 나는 한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한스는 수레바퀴라는 유기체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사고사도 자살도 아닌 타살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는 것이다. 한스는 생각 없는 어른들의 순응이라는 수레바퀴가 낳은 범죄에 희생당한 셈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는 순간이다.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다. 한스도 어른들도 아닌 수레바퀴 밑에서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다. 이 아이들은 선택받은 모범생이라고도 불리고 엘리트라고도 불리게 된다. 그들은 그저 수레바퀴에 굴복하고 순응했을 뿐인데 주류라는 견고한 성역에 진입하게 되고 사회적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수레바퀴가 만드는 피의 피라미드 상층부로 올라가 더욱 거대한 수레바퀴를 이루는 주요 부속품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수레바퀴는 대를 거듭하며 점점 더 삶의 중추로 자리 잡게 된다. 수레바퀴가 생존하고 진화하는 기전이다. 생각 없는 어른들과,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라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을 대체하게 될 생각 없는 아이들이 이루는 완벽한 조화가 빚어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획일성에 저항한다. 질서라는 멋들어진 용어 이면에 숨은 인간의 탐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다양성과 개성이라는 단어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생명의 가장 큰 신비를 다양성이라고 보는 나는 순응에 길들여진 모든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의 옷을 입고 행하는 행동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당신에게 주어진 일과 삶을 아무 생각 없이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고. 그것이 남을 파괴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만 없을 뿐 남을 죽이는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다른 사람을 죽일 의지가 있든 없든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라고. 죽일 의지 없이 행한 살인은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될뿐더러 의도적인 살인보다 훨씬 쉽기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게 아니었냐고. 당신의 그 생각 없는 순응이 비겁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냐고. 그리고 그것들이 이룬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 수레바퀴가 영혼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그리고 나는 감히 순응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순응으로 말미암아 거세된 자신의 주체를 꼭 찾아 회복시켜 보라고 말이다. 그것도 가능한 이른 나이에. 자칫 교만의 구렁텅이로 빠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이 시도가 꼭 해볼 만한 과업이라고 믿는다. 교만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교만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거니와, 교만을 느껴보지도 않고서 겸손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동경하고 지향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응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를테면 개성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애써 보길 권한다. 그래야 생각 없이 순응하지 않고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발적인 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도 모르게 돌리고 있는 수레바퀴의 참혹한 본질을 의심하여 알아채고, 나아가 고발하고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는 영혼이 더 이상 없는 세상, 우리 모두의 세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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