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 이야기가 있는 답사 여행
김학천 지음, 황은관 그림 / 선율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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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이유.

김학천 글, 황은관 그림,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를 읽고.

감사하게도 나는 아직도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자못 숙연해진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그 공간. 이따금 들리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마저도 마치 그 안에 깃든 영령을 추모라도 하듯 목소리를 아끼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 간혹 붓으로 그린 듯 하얀 구름이 군데군데 떠있던 그 공간. 비록 그 시대를 살지 못했지만,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났던 부모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래서였을까. 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은 탑과 숱한 이름이 적힌 위패와 그들이 조각된 커다란 조형물에 둘러싸인 채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 시절, 여름방학 때 고향 부산에 내려가 버스비만 들고 혼자서 훌쩍 떠난 즉흥적인 일탈에서 나는 부산 중앙공원 (구 대청공원) 안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충혼탑을 찾곤 했다. 충혼탑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나라와 겨레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부산 출신의 국군 장병과 경찰관을 비롯한 애국 용사들의 영령을 기리는 위령탑이다. 

최근 선율 출판사에서 의미가 깊은 책을 하나 냈다. 수작이다. 제목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어서 부제를 확인했다. ‘이야기가 있는 답사 여행’. 금세 이해가 갔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보를 담은 딱딱한 책이 아니었다. 저자는 16명의 독립운동가를 선택하고 그들의 자취를 따라 직접 길을 나서 답사를 한 뒤, 그로부터 얻은 살아있는 감상을 절제된 글로 담아냈다. 역사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어 길 위로 나서길,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직접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답사에 동참하길 촉구한다. 책은 독립운동가 한 분 당 한 꼭지, 그러니까 총 16 꼭지로 되어 있다. 각 꼭지의 마무리는 저자가 답사 때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그의 답사 여정과 간단한 안내 및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각 독립운동가에 대해 그려진 포스터가 압권이다. 잘 그려진 그림은 언제나 글을 배가시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대학생 때 가끔 찾던 충혼탑에서의 그 숙연함이 자연스레 떠오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영혼은 독립운동이나 한국전쟁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넘어 대한민국을 지금까지 있게 한 든든한 바탕이 되어 21세기 현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 한 편이 묵직해진다. 감히 공감할 수도 없을 만큼 그들은 내가 살아낸 시대와 많게는 백 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이 슬프고도 허망한 말은 현실이 되었고, 그들의 피 위에 서 있는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반면, 독립운동과 정반대 편에서 앞장섰던 친일파들의 부와 권력의 흔적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논리는 나라와 상관없는 사적인 욕망과 합쳐졌고, 어려운 시기에 많은 이들은 그 조류에 순응하거나 편승하여 그른 것을 옳다고 했고 옳은 것을 그르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아 실세를 쥔 사람들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큰 소리를 떵떵 치며 살아가고 있는 반면, 조용히 정의를 위해 사욕을 포기하고 불의에 저항하여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은 가난과 헐벗음을 견뎌내야 했거나 비굴하게 살아가야만 했다. 이 책과 같은 글을 읽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거를 부인하거나 거짓 과거를 발판 삼는 나라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언젠간 와해되거나 붕괴될 것이다. 잘못된 게 있다면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덮어두지 말고 겸허히 인정하고 고쳐나가면 된다. 실수가 있었다면 바로 잡으면 된다. 현실의 무게와 그동안 지속해왔던 거짓 합리화의 압력, 그로 인한 거짓 평화의 힘을 이겨내야만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에 대해 떠올릴 때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지고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드는 이유도 어쩌면 그릇된 역사관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횡포와 그 횡포에 무력하게 무너졌던 독립운동가들의 피, 그리고 피의 흔적들이 여전히 산재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언론만 보고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시대다. 거짓 뉴스가 난무하고 아이들의 장래 희망란에는 과학자나 정치인이 아닌 빌딩 소유주가 적히는 시대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독립운동,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시대를 달리 하며 이어져온 정의에 기반한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우린 현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고 제대로 된 역사의 기술과 전달이 중요한 이유는 물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독립운동’, 혹은 '저항'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한국에 있다면 시간 내어 저자가 친절하게 알려주는 답사 여정을 따라 몇 군데라도 꼭 가보고 싶다. 책상 위보단 길 위에서 그 정신은 살아나 나에게 말을 걸 테니까 말이다. 

#선율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3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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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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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불꽃 앞에서.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읽고.

“현실은 소설 같기도 하고 개연성이 없어도 되지만, 소설은 그러면 안 된다. 소설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해 준 말이다. 어렸던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름대로 인생의 높은 점과 낮은 점을 모두 지나보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 15년 이상 살아도 보고, 한 아이의 아빠로서 10년 이상 아이의 성장과정을 옆에서 모두 지켜보기도 하며, 절망의 늪에 오래 빠져 있는 대신 소망의 가느다란 끈을 잡으려고 여전히 애쓰며 빠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제 나이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나는 그 말이 지니는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도 꺼져가는 즈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숙명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허구임이 분명하지만, 때론 너무 현실 같은 소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의 인생에 대하여, 아니 모든 사람(에브리맨)의 인생에 대하여 조용히 곱씹어볼 수 있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 인생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은밀하게 숨겨진 것들까지도 모두 발려져 공개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 느껴지는 수치심과 두려움이란 마치 고백성사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당혹스러운 심정까지도 들게 만들고, 실제 현실에선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무게를 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침묵 이외에는 모든 게 경박스러워 보일 정도의 그 무게. 가끔 아이의 어린 시절 사진을 훑어보며 애잔한 감정에 빠지곤 할 때 문득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 또한 함께 찾아와 나를 짓누른다. 시간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방향이 세로여서 이전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 인생과 시간이라는 깊은 우물로부터 물을 길어 마실 때면 언제나 나는 모든 개별적인 사람(에브리맨)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된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하룻밤이라는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녀온 기분이다. 그래서 아주 긴 여행을 하고 온 것만 같은 기분은 물론 여독을 풀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들 정도다 (한 인생을 하룻밤에 여행했으니 오죽하랴). 오후부터 시작해서 새벽이 되어서야 마지막 장에 다다를 수 있었고, 나는 너무 피로한 나머지 곤하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주인공과는 달리 나는 다시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영원한 잠들었지만, 나는 그저 매일 본능적으로 그것을 연습하는 것에 그치고는, 오히려 그 연습 때문에 재충전되어 오늘이라는 현재로 다시 돌아와 이렇게 글을 남긴다. 조금은 지혜로워진 것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이 책은 한 인생의 서사를 조각조각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포함한 보편적인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조용한 자리로 내몬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이라도 나이가 든 이후에 읽으면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책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은 새벽이나 아침에 읽기보다는 밤에 읽어야 하는 책이다. 치열했던 삶의 해가 저물어 가는 풍경을 놀랍도록 잘 절제된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잠에 들기 전의 이야기를 하루 정도 잠들기 전에 들어 보는 것도 해볼 만한 경험이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한 번 불이 붙었다면 점점 꺼져가는 불씨와 같아서, 두텁기만 하던 초의 높이가 갈수록 낮아져 가고, 등잔 아래를 가득 채우던 기름도 점점 사라져 가는, 한낱 유한한 육체에 갇힌 신세이니까 말이다. 하루쯤 궁극의 끝에 선 사람처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톺아보는 시간은 아마도 살면서 좀처럼 쉽게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성찰의 시간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책의 삼분의 일 쯤을 읽다가 섬광처럼 어떤 느낌이 내 기억의 저장고를 강타했다. 어딘가 흩어져있을 그 조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계속해서 그 조각을 찾으려는 시도와 함께 책을 읽어나갔다. 그 느낌. 그 애틋하면서도 쓰라린 느낌. 묵직하게 가슴 한복판을 치고 지나가, 휑한 심정으로 나를 덩그러니 외딴곳에 떨어뜨리는 그 느낌. 동시에, 지극히 평범해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 느낌. 그렇다. 바로 작년 여름,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을 한 달가량 힘들게 읽어내며 매일 같이 느끼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이 책 ‘에브리맨’으로 내게 다가온 필립 로스의 문체는 ‘가벼운 나날’로 만났던 제임스 설터의 문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조금 더 남성적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에브리맨’의 주인공이 한 남자에 맞춰져 있는 반면, ‘가벼운 나날’에서의 주인공은 한 부부, 그중에서도 아내 네드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문체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설터와 필립 로스의 목소리는 마치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목소리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모두 비슷한 톤을 가지고 있었다. 흥분하여 격양되지도, 절망하여 허무해지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때론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우물은 갈수록 깊어지지만, 인생의 우물은 언젠간 바닥이 난다. 깊어지다가 바닥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이 우리네 인생이지 않을까. 나는 언제쯤 성숙하고 눈이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그 끝을 예감한 지혜로운 사람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끝에 섰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4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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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5-16 0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립로스는 모든 책에서 굉장히 남성적인 문체를 보여주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향이 에브리맨에서는 더 강해서 저는 이 얇은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보다가 내려놓았어요. 다른 책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하지만 김영웅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내려놓았던 책을 슬그머니 다시 들어야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Youngwoong Kim 2021-05-16 08:1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이후 ‘울분‘을 읽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요. 남성적 시각은 더 도드라진 것 같았고요. 공감 댓글 감사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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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저,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를 읽고.


나는 철학도 신학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감히 소설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주로 이성에 의지하여 문자로 번역해내는 작업이 철학과 신학이라면, 그 문자들이 가지는 본질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이성뿐만이 아닌 오감이 살아 숨 쉬는 삶이라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콘텍스트에 그것들을 오롯이 녹여내어 우리가 보다 깊고 풍성하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유일한 통로가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이 어렵사리 번역해낸 텍스트가 더 이상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인 설명이나 물음의 목소리가 아닌 총천연색의 삶이라는 옷을 입음과 동시에 곧장 가려져버려, 텍스트에 의해 소외되었던 원래 ‘무’의 신비까지 되살려내는 작업이 나는 소설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본질이 텍스트로 환원되었다가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시 비환원화되는 것이다. 이는 개별적인 경험이 때론 보편적인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공명시켜, 어떻게 소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작가와 독자 사이에 신비로운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소설은 단지 ‘허구’라는 단어가 던져주는 경박함을 거뜬히 뛰어넘어 어느새 삶의 본질까지 침투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믿는 소설의 힘이자 내가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다.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글들이 필요 이상으로 근사한 옷을 입고 있는지 모른다. 텍스트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이 시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글은 점점 패스트푸드처럼 인스턴트한 짧고 쉽고 빠른 메시지로 급속도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아니, 읽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아무 생각 없이 휩쓸려 가버린다면 사람들의 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갈수록 퇴화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글들은 점점 휘발성이 강해져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고, 때론 안 읽는 게 더 유익할 때도 많다. 중언부언과 동어반복은 기본인 데다, 진부하고 뻔한 말들을 어찌 그리 현란한 수사로 치장해대는지, 아무리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다 해도, 마치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요즘은 넘쳐나는 글들 가운데 정작 읽을 만한 글이 별로 없어 나는 종종 읽기 자체가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한다. 나는 홍수를 원하지 않고 마실 물을 원하며, 공해를 원하지 않고 깨끗한 공기를 원한다. 글은 양보단 질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글을 쓰는 입장에 있다면 적어도 그 글을 혹시라도 읽을 사람들을 조금만 더 배려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문 같은 글이 어떤 면에선 가장 쉬울지도 모른다. 생각이 깊고 풍성한 토론이 오간 뒤라면 탄탄한 논리에 의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쓰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논문을 쓰는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논문 쓰는 일이 실제론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소설이라는 분야의 창의성에 비한다면 금세 할 말을 잃고야 만다. 과학적으로 밝혀낸 사실들을 논리 정연하게 쓰는 일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텍스트에 담되 주관성과 보편성의 옷을 입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사실 비교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의 영역보다 나는 문학의 영역에 더 깊고 풍성한 진리가 녹아있다고 믿으며, 에세이나 논문 스타일의 글보다 소설이야말로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워야 하는 글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소설을 한 편 써야지 하는 마음이 늘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그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은 물론 시공간까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적인 권한을 스스로 거머쥔 채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그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글쓰기인 소설. 나는 이 형식을 빌려 언젠간 나의 사상과 신앙을 비롯하여 모든 사유와 감상을 한데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을 쓰게 될 날을 꿈꾼다.


시 같은 소설, 읽고 나면 한 편의 그림 같은 소설, 내겐 여전히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달에 울다’를 쓴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 이 책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는 제목에서 쉽게 알 수 있듯 저자가 미래의 소설가에게 하는 당부가 오롯이 담겨 있으며,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치밀하면서도 꽤나 강한 어투로 풀어놓은 책이다. 


앞부분만 읽어도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마루야마 겐지의 철학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흡이 빠르진 않아도 다분히 꼿꼿한 그의 자세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소파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앉거나 누운 채 편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왠지 정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고, 왠지 가벼운 운동복이 아닌 정장을 차려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글쓰기의 무사 같은 이미지의 마루야마 겐지는 적어도 내겐 그런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미래의 소설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나에게 그는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나를 환기시켜줬고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소설과 소설가의 정체성에 대한 마음까지도 가다듬게 만들어 주었다. 


저자가 바라는 소설가의 가장 크고 중요한 자질은 ‘자립’이다. 그는 소설가는 금전적인 문제로부터, 성공과 인정으로부터, 권력으로부터, 그 이외에도 자립을 방해하는 것들이면 무엇이나 다, 심지어는 도시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소설가란 백사장 근처,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얕은 바닷가가 아닌 망망대해의 깊은 물 위에서 홀로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무사처럼 그 길을 담담히 걸어가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지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모습으로, 글쓰기로 인해 파생되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글쓰기의 본질과 문학의 정수를 향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끝까지 정진하라고 요구한다. 


조금은 강한 어조와 단정적인 말투 때문에 이 책을 읽다가 도중에 내려놓는 독자들도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끝까지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 가진 신비하고도 강력한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즉 진정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기 자신과 솔직하게 정면으로 맞서서 소설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어느 분야든 깊은 우물까지 파내려 가기 위해선 꼭 필요한 준비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 쓰는 일을 그저 돈벌이나 second job처럼 경히 여기면서 소설을 통해 문학이 아닌 결국 자신의 은밀한 사적 욕망이나 채우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저자가 한창이던 시대보다 이 시대는 훨씬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기도 했고, 우린 전문가라는 단어조차 무색해지는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적인 면을 감안해서 저자의 바람을 이해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통해 소설가와 무사의 이미지를 조용히 마음속에서 연결시켜본다. 조금 더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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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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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투쟁의 여정: 풍성한 조화로움을 향하여.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영혼의 자서전’을 읽고.


|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


책을 덮고 떨리는 숨결로 큰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크레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투명할 만큼 푸른 바다, 그리고 눈부신 태양과 빛나는 하얀 섬. 그러나 내겐 낯설기만 한 풍경. 크레타의 흙은 무슨 색을 띨까? 어떤 냄새를 낼까? 문득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부는 봄철에 에게 해를 항해하며 그가 느꼈을 충만한 기쁨을 나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 작품은 일흔이 넘은 카잔차키스가 죽기 직전에 남긴 영혼의 대서사다. 책을 여는 ‘작가노트’에서 그가 밝히듯, 이 작품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다. ‘영혼’의 자서전이다. 책의 큰 흐름은 비록 여느 자서전처럼 시간 순을 따르고 있지만, 그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물리적 시간이 아닌, 그의 영혼이 자유를 찾아 나선 여정 위에서 붉은 발자국을 남긴 장구한 투쟁의 역사다. 그의 여정은 평생 오름길이었다. 밑으로 내려가거나 앞으로 평탄하게 닦인 길이 아닌, 오직 오름길만이 그의 시간을 흐르게 만들었다. 그는 계속 위를 향했고 시간은 끊임없이 아래로만 흘렀기에 그 시간은 축적되어 깊이가 생겼다. 이 작품은 그 깊이로부터 길어 오른 지혜의 산물이다. 


카잔차키스는 오직 오름길만이 신 (여기서의 신은 기독교의 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오름길, 그 희망의 숭고한 정상에 있는 그 무언가다)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우리 모두의 길이기도 할 그 오름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여정이 비록 그의 인생을 방랑으로 인도했지만, 그는 주저 없이 그 길을 올랐고, 숨이 다하는 날에도 그 도상에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은 불안과 악몽과 회의뿐이었고, 성숙은 절름발이 해답에 지나지 않았다. 주위는 온통 혼돈뿐이었고, 고뇌하며 걸어간 길의 끝은 심연이었다. 옆으로 난 다른 오름길의 끝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의 모든 길은 그를 심연으로 이끌어갔다. 그의 젊음과 성숙은 허공에서 전율과 희망의 두 말뚝 주위를 맴돌았지만, 나이자 들자 그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조용히 심연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일종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신을 찾았거나 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서가 아니었다. 마침내 구원으로부터 구원되었다고 스스로도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여행의 끝은 도착이 아닌 또다시 떠나는 출발이었다. 자유롭게, 자유로부터 자유가 되어, 그 너머로. 아직 오르지 못한 오름길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올라간다는 행위 바로 그 자체가 행복이요 구원이요 천국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자신의 싸움이 끝나려고 하는 생의 마지막 기로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그건 그가 더 이상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그래도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서서 버텼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어딘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목적지에 도착하여 안락한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오름길 위의 서있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여정, 즉 자유를 갈망한 투쟁은 곧 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종교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그 여정은 그의 정신과 육체의 고향인 크레타에서 시작하여 크레타에서 끝이 난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이듬해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영혼은 한 번도 크레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카잔차키스도 훨씬 뒤에야 자신의 힘이 아니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강력한 힘이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수없이 포기하려고 했던 순간에도, 그 힘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그 힘은 신이 아닌 크레타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크레타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있어 모든 시작과 끝에는 크레타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잔차키스는 진정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크레타인이었다.


한번 태어난 육체는 성장과 성숙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영혼도 그렇다. 카잔차키스 영혼의 유년기는 크레타에서 이뤄졌다. 당시 크레타는 터키의 점령 하에 있었다. 터키인들은 크레타인과 기독교인을 박해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크레타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며 일생을 바쳤다. 크레타에서, 그리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잔차키스에게 크레타의 모습이 어떻게 각인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의 가정은 비록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많은 동포들은 터키인들에게 무참히 학살을 당했고, 어린 나이의 카잔차키스는 그 대학살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 때문에 그의 가정은 잠시 낙소스로 도피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을 회고하며 카잔차키스는 삶의 진짜 얼굴은 해골이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니 그가 성장하고 성숙하기 훨씬 전부터 몸속에서 끓어오른 주체할 수 없는 크레타의 피는 자유를 갈망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자연스레 저항과 투쟁의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가기 전 크레타에서 가톨릭 학교에 들어간 카잔차키스는 그의 삶에 있어서 첫 번째 지적인 도약을 경험한다. 오로지 공포, 공포를 정복하려는 투쟁, 자유에 대한 그리움 같은 원시적인 격정들의 지배만을 받아오다가 처음으로 아름다움과 학문에 대한 갈망이라는 새로운 정열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읽고 쓰기를, 머나먼 곳 보기를, 고통과 기쁨을 직접 경험하기를 원했다. 그에게 세상은 더 이상 그리스만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세상의 고통은 크레타인의 고통보다 훨씬 컸으며, 자유에 대한 갈망 또한 크레타인 만의 특질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영원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꿈틀대며 성장해가는 자신의 영혼에 익숙해지기 위해 방황을 시작했다. 창조주가 흙을 빚어 세상을 창조했듯, 그는 어휘를 빚기 시작했다. 


그리스 순례 후, 그는 그리스의 숭고한 업적이 단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닫고, 그리스의 비극적인 운명과 모든 그리스인이 무거운 의무를 지고 있음을 깊이 의식한 뒤 마침내 성숙할 수 있었다. 그를 성인의 세계로 안내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책임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무를 알지 못했다. 그 의무를 위해 몸과 영혼을 다 바쳐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은 깊이 깨달았지만,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자유를 찾아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분명한 것은 오직 인내와 명예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투쟁하는 것, 그래서 피의 의무를 다하는 것. 그것만이 그에겐 분명했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카잔차키스의 투쟁은 주로 기독교 신과의 싸움에 국한된다. 이는 이 책의 상하권 중 주로 상권을 이루고 있다. 그는 크레타와 그리스, 이탈리아와 아토스 산, 예루살렘과 시나이 산까지 두루 순례하며 수도원을 중심으로 진행된 그의 영혼의 여정을 기록한다. 거룩한 아토스 산을 친구와 함께 40일 동안 여행하고 돌아온 카잔차키스는 다시 혼자가 되고 나서 스스로에게 과연 자신이 무엇을 추구했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되묻는다. 인간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고뇌로 가득했던 거룩한 산에서 그에게 해답이 되었던 건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가 많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방향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그리스도는 방향만 제시했을 뿐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했다고 서술한다. 얼마 동안은 수도자의 삶이 지닌 신성한 목탁의 울림과 새벽기도와 성가 영창과 그림이 자신의 고뇌를 진정시켰고, 수도원 기행에서 그리스도의 투쟁을 직접 경험하며 자신의 투쟁이 용기와 부드러움과 희망을 얻었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매혹은 금세 사라졌고, 자신의 영혼은 다시금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다. 당시 카잔차키스에게 그리스도는 그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영원한 답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카잔차키스의 마지막 순례지는 사막이었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던 떨기나무 가운데 임했던 신과 모세가 처음 대면했던 그 거룩한 땅, 수천 년 전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바로 그곳, 시나이 산. 그곳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그는 요하임 신부를 만난다. 그로부터 평생 잊지 못할 중요한 말을 듣게 된다. 첫째, 오름길에 나섰다면 꼭대기에 이르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 것. 인간에겐 독수리처럼 날개가 달린 게 아니라 다리가 달렸음을 기억할 것. 즉, 투쟁자라면 스스로가 인간임을 잊지 말 것. 둘째, 신과의 싸움을 절대로 중단하지 말 것. 하지만 마음속의 검은 뿌리인 본능을 사탄이라 생각한 나머지 제거하려고 하지 말 것. 사탄의 유혹을 정복할 방법은 하나뿐이니 그것을 껴안고 맛보고 경멸할 줄 알게 되는 것. 셋째, 그리스도의 종교는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받아들여 신성화되고, 육체와 영혼은 적이 아니라 동지임을 깨닫게끔 가르쳐야 할 것. 악마는 영혼을 거부하라고 설득하며, 신은 육체를 거부하라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화해를 이루게 될 것. 넷째, 신은 우리들에게 투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 우리들이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건 신이 따질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님을 기억할 것.


결코 다른 수사들로부터 들을 수 없었던 지혜의 말을 시나이 수도원에서 들은 후 카잔차키스는 크레타로 돌아와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베르그송과 니체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한동안 니체에 푹 빠졌던 카잔차키스는 그의 초인 (위버멘쉬) 사상과 영원 회귀 사상에 큰 영향을 받는다. 니체를 만난 뒤 그에게 있어 불확실성과 확실성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불확실성은 확실성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꿈을 꾸게 된다. 하늘과 바다 사이의 두 어둠 사이로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쪽배가 숨 막히는 고요함을 뚫고 빠른 속도로 내리지르는 모습을 꿈속에서 목격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철저한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항해하고, 스스로 빛을 내며,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대담한 쪽배 (니체의 초인을 상징하리라). 카잔차키스에게 그 쪽배는 어려운 순간들에 직면할 때마다 희망이 되어 주었다. 니체를 만난 이후 카잔차키스는 형이상학적인 희망이란 참된 인간들이라면 섣불리 물지 않는 기만의 미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원했던 대상은 칭얼거리거나 애원하거나 구걸하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가장 인간다운 대상 (초인)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신을 죽여버린 니체를 위해 만세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영원 회귀가 니체에게는 끝없이 이어지는 순교로 생각되었으며, 두려움에서 위대한 희망을, 미래의 구세주를, 즉 초인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 초인도 결국은 또 하나의 천국, 가엾고 불행한 인간을 기만하고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견디게 만드는 또 하나의 신기루일 따름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고는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옷도 벗어버리고 만다.


니체 이후 카잔차키스를 사로잡은 신은 붓다였다.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하고 체류하면서 불교 사상을 탐닉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붓다는 인류를 구원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구원으로부터 구원을 행하는 구세주이자, 나그네 길에서 훌륭한 안내자인 ‘연민’을 몸소 체감하도록 도와준 신이었다. 연민을 통해 인간은 육체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고,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무와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모두 하나이니 고통받는 자를 구원해야만 한다는 사상이 카잔차키스에겐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빈에서 그는 환상인지 실제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병에 걸리게 된다. 이른바 ‘성자의 병’이라는 이름을 가진 희귀한 병이었다. 불교적 세계관에 빠진 영혼은 여자와 자는 걸 대죄라고 믿는 까닭에 그것은 육체가 죄를 범하지 못하게 막는데, 빈에서 만난 여자와 동침을 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망 앞에서 그가 경험한 일이었다. 정신적인 갈증을 많이 해갈시키긴 했어도, 붓다는 가능한 한 여러 나라와 여러 바다를 보려는 그의 갈증을 결코 풀어 주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 붓다는 인간의 육체가 가득한 세상을 불어 사라지게 하는 검은 마술사였다. 그가 어릴 적 경험했던 기독교처럼 (이 부분에서 카잔차키스는 기독교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육체나 세상을 악으로 규정했던 시대도 있었지만, 참된 기독교는 육체와 영혼은 하나이며, 세상은 장망성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시공간이다) 불교 역시 육체를 부인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잔차키스는 붓다를 만난 이후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감사해한다. 바로 만물을 처음 보듯 반가이 맞으며, 만사를 마지막으로 보듯 작별을 고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계속 움직였다. 빈을 거쳐 베를린으로, 베를린에서 러시아로 향한다. 베를린에서 만난 한 여자로부터 받은 초대를 계기로 러시아행을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카잔차키스는 역사적인 러시아 혁명의 현장에 있게 된다. 그리고 레닌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며, 비장한 각오를 다짐하게 된다. 그의 비장한 다짐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너무나 오랫동안 불의를 저질러 왔으며,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대지의 모든 아이들에게는 깨끗한 공기와 장난감과 교육을, 여자들에게는 자유와 따뜻한 정을, 남자들에게는 친절과 예우를, 그리고 꼬리를 치는 쇠약한 말과 같은 인간의 마음에게는 한 알의 밀알을 우리들이 마련해 줘야 한다. 이것이 러시아의 목소리라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으며, 나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맹세,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었고, 나는 내 인생을 포기할 각오를 했었다. 하나의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남들이 던지는 돌에 맞고,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 어떤 기쁨을 느꼈을지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동지애의 의미, ‘모든 사람은 하나다’라는 말의 의미를 내가 그토록 깊이 체험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삶보다도 숭고한 선물이 존재하며, 죽음을 정복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십자가를 지며,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죽을 때까지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어깨에 메고 한없이 가기만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부활할지니, 오직 그만이 행복하다. 러시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중이었다. 러시아는 한 알의 밀알처럼, 하나의 위대한 사상처럼, 비슷한 고통을 거치는 중이었다.”


카잔차키스는 레닌과 러시아를 만나기 전까지의 여정은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겼던 듯하다. 러시아 혁명 현장에서 그는 직접 두 눈과 두 귀와 두 콧구멍으로 당시 시대 정황을 보고 듣고 냄새 맡았다. 급기야 환상 중에 그는 붓다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는 에파포스 (촉감의 신, 환상보다는 육체를 더 좋아하며, 영혼까지도 육체로 바꾸고 싶어 하는 신)가 자신의 신이라는 고백까지 한다. 그만큼 영혼이 아닌 육체가 가진 중요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영혼의 오름길은 육체와 분리된 채 영혼에만 치우친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점점 그 이분법으로부터 괴리와 환멸을 느끼다가, 나중엔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묶는 길고 긴 여정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나 싶다. 적어도 카잔차키스에게 있어 영혼의 자서전은 영혼만이 허공을 걸어 다닌  투명한 흔적이 아니라, 육체를 만나 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었을까.


유럽 여행을 마치고 카잔차키스는 다시 크레타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후 평생의 스승이 되었던 조르바를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로 호메로스, 붓다, 니체, 베르그송, 그리고 조르바를 꼽는다. 호메로스는 카잔차키스에게 기운을 되찾게 하는 광채로 우주 전체를 비추고, 태양처럼 평화롭고 찬란하게 빛나는 눈이었다. 그리스의 민족 시인이었던 호메로스는 그에게 있어 크레타가 가진 의미와 동급, 아니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반면,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빠졌다가 구원을 받는 한없이 깊은 새까만 눈, 베르그송은 젊은 시절에 해답을 얻지 못했던 그를 괴롭혔던 철학의 온갖 문제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던 은인, 니체는 새로운 고뇌로 그를 살찌게 했고,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친 장본인으로 그는 이 책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스승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가 직접 쓴 표현은 다음과 같다. 


“조르바는 글 쓰는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갖추었으니,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 마치 만물을 항상 처음 보듯 대기와 바다와 불과 여인과 빵 따위의 영구한 일상적 요소에 처녀성을 부여하게끔 해주며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신성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라한 한 조각의 삶을 안전하게 더듬거리며 살아가기 위해 하찮은 겁쟁이 인간이 주변에 세워 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고향 따위의 모든 울타리를 때려 부수며,  마음에서 더 깊고 깊은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지녔다.”


그렇다. 어쩌면 카잔차키스의 모든 여정은 조르바를 만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오름길의 끝에 신이 아닌 인간 조르바가 위치해 있을 줄은 그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와 붓다, 니체와 베르그송을 모두 합쳐 놓은 살아있는 자유의 완성작이었다. 조르바를 만나고 카잔차키스의 모든 방황은 비로소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조르바를 만난 뒤 과거의 모든 발자국들은 그저 그의 잊힌 과거의 기억으로 머물지 않고, 비로소 하나하나 소중한 의미를 띠며 숨을 쉬기 시작했고, 그의 운명의 계획이 그대로 실천되도록 만들어 준 완벽한 조각이 되었다. 


영혼만 신성하지는 않다. 육체도 신이 창조했기에 신성하다. 그의 표현을 빌면, 육체는 영혼에게서 광채를 받고, 영혼은 육체에서 얻은 솜털이 나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룰 때에만 온전하고 진정한 가치를 지니며, 둘로 나뉜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인 것이다. 영혼의 오름길은 자유를 갈망한 긴 여정이었다. 그 끝에 육체를 가진 조르바가 서있었다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는 어릴 적부터 카잔차키스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던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육신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영혼이 육체에 갇혔기 때문에 제한과 구속을 받는다는 해석은 적어도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앞에선 힘을 잃는다. 영혼과 육체는 하나이며, 그래서 가장 자유하다. 아, 이 얼마나 심오하고 아름다운 역설인가!


이 글의 시작을 일부러 이 작품의 시작처럼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로 시작했었다. 작품 속에서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 있다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내 눈엔 이 ‘세 가지 기도’가 다르게 보인다. 세 가지 기도는 단순히 서로 다른 독립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첫째 기도에서 출발하여 셋째 기도로 이어지는 어떤 하나의 여정을 나타내지 않나 싶다. 그것은 마치 영혼의 오름길을 상징하는 듯하다. 


내 해석은 이렇다. 첫째 기도는 시작 단계다. 아직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 가치가 어떤 것인지 모른 채 막연하게, 그래서 대담하게 신께 구하는 기도다. 이는 마치 자신이 영혼만으로 이뤄진 것처럼 여기는 기도로 보인다. 반면, 둘째 기도는 이제 자신이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알게 된 상태에서 신께 구하는 기도다. 영혼과는 달리 육체는 자칫하다간 부러질 수 있다. 신께 의지하여 여전히 구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육체를 더 소중히 여기는 뉘앙스가 풍긴다. 마지막으로 셋째 기도는 첫째와 둘째 기도의 단계를 초월한 기도다. 첫째 기도를 할 때처럼 자신이 영혼만으로 이뤄진 것도, 둘째 기도를 할 때처럼 영혼보단 육체를 더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아닌, 영혼과 육체가 조화로운 하나가 되어 온전히 자유함을 얻은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책의 마지막에서 카잔차키스가 고백하는 문장에서도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된다. 그는 신이나 악마, 누구의 손에서 활이 당겨졌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위대하고 순수한 힘이 계속해서 겨누어 화살을 쏘았다고 느꼈으므로 자신은 기뻐했다고 쓴다. 그리고 그에 이어진 문장은 모든 육체는 활이 될 수 있기에 모든 육체가 거룩하다는 것, 그의 생애 전체는 비정하고 만족을 모르는 손에 들린 활이었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손들이 얼마나 자주 그 활을 부러질 지경으로 당기고, 또 힘껏 당겼느냐고 질문하면서 그는 스스로 소리치며 대답했다. “부러져라!” 그러므로 그는 그의 영혼의 오름길을 끝내면서 셋째 기도를 선택하여 신께 올린 사람이었던 것이다.  


많은 아포리즘, 비유와 상징이 넘실대는 이 작품을 오랜 시간 읽으면서, 그리고 내용을 결코 다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으면서 나는 이 작품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 여긴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공감되는 것들이 있고, 이해할 수 없어도 믿어지는 것들이 있다. 이 작품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고 적잖은 흔적을 남겼다. 덕분에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 매임과 자유함 등에 대해서 곰곰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작품과 함께 했던 지난 반년이란 시간도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5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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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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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조용한 침투력.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가난한 사람들’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것도 그런대로 먹고살만한, 이를테면 남들보다 적은 월급을 받고 투덜댄다거나,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지 못해 불평을 해댄다거나, 명품 옷이나 신발을 사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사는 정도의 가난이 아니라, 아주 찌들 대로 찌든 가난이 자주 묘사된다. 그 가난은, 가끔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보다 풍족하게 가지곤 하는 연민이랄까 사랑이랄까 따뜻함이랄까 하는 심리까지도 마침내 야금야금 갉아먹고야 마는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는 가난이다. 슬금슬금 육체가 정신을 장악하고 궁극적인 승리의 칼을 꽂아 확인 사살까지 하는 그런 조용하고 무서운 가난. 옳고 그름과 선악의 경계마저도 어느새 무너져 버리고 마는 그런 가난. 적나라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는 독자에게 혹시라도 남아있을 조금의 낭만까지도 바짝 말려 버리기 마련이고, 그제야 비로소 소설은 지독한 현실성을 갖게 된다. 이 마법, 소설인지 르포르타주인지 독자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이 마력. 이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아니 읽을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매력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작가로 등단시킨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들의 특별할 것 없는 비참한 일상이 읽기 힘들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을 단순히 부자에게 억눌린 동정의 대상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가진 자는 가해자, 가지지 못한 자는 피해자, 이런 식의 평면적인 구도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겐 그야말로 소설일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너무나 입체적이고, 너무나 날 것 그대로여서 너무나 깊숙이 폐부를 찌르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도 피라미드 승자독식 체제 위에서 군림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저지르고 음탕하며 탐욕적임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묘사하기도 한다. 특별히 이 작품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나중에 그가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보여줄, 어떤 커다란 사건을 포함하는 서사의 배경으로 그치고 마는 게 아니라 전면에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이 작품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과 그들의 심리가 아주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작품 속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한 중년의 남자와 고아 신세의 젊은 여자 사이에서 오가는 애틋한 편지로만 구성된 서간체 소설이기 때문에,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일인칭 관찰자 시점에서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훨씬 더 직접적이고 크게 울린다. 편지 형식은 확성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어찌 이렇게까지 비참할 수 있을까 하는, 연민과 동정을 훌쩍 뛰어넘어서 어느새 감히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처절함에 숨을 고르게 된다. 제발 해피 엔딩으로 끝나거나, 차라리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해서 구구절절한 편지 왕래가 끝나버리고 어서 빨리 마지막 페이지로 직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열린책들 판으로 이 작품은 약 200페이지 정도로 짧은 편이라 (참고로 5대 장편은 평균 천 페이지 정도 된다) 나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재 중에서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어쩌면 가난이라는 상황과는 조금 별개로도 느껴져서 어색하게 보이기도 하는 부분은 주인공인 두 가난한 남녀 사이에서 현저히 드러나는 문학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추운 겨울에도 얇은 외투만을 걸치고 다녀야 할 만큼, 심지어 신발이나 단추 하나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의 가난에 처한 마당에 무슨 문학 타령이냐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가난과 문학’이라는 어색한 조합을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서 녹여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석영중이 역자 후기에서도 썼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쓸 당시 자신의 처지와 문학을 향한 자신의 시선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구멍 난 신발을 신고 갈아입을 옷 하나 없을 정도로 극도의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남자, 마까르 제부쉬낀은 저 위대한 푸쉬킨의 작품을 폄하하는 반면, 오히려 같은 하숙집 다른 방에 거주하는 삼류 소설가, 라따자예프의 작품을 위대하다고 할 정도의 눈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런가 하면, 병약한 여주인공, 바르바라 도브로셀로바는 비록 어릴 적부터 기구한 운명에 처해져 본인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가난한 처지에 내몰린 고아이지만, 한때 마음을 주었던 한 남자와의 슬픈 인연 덕분에 책에 대한 흥미를 느끼고 어느 정도 교육도 받은 본 사람으로서 문학작품을 분별할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 두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도 이렇듯 문학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주려고 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을, 가진 자들과 정신적으로는 그리 다르지 않은 그들의 일상을 낭만과 과장 없이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결말에 이르기까지는 이 소설은 큰 반전은커녕 큰 사건 하나 터지지 않는다.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가난과 돈이 각 작품의 핵심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주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유독 그러한 서사가 고스란히 빠져있다. 그래서 더욱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피부에 더 와 닿도록 하는 효과를 내기도 하는 것 같다. 다만, 가난 때문에 바르바라는 원하지 않는, 심지어 과거에는 원망하기도 했었던 남자와의 결혼을 선뜻 선택해 버리고 말며, 가난 때문에 마까르는 친딸처럼 사랑해 마지않던 바르바라를 그저 보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마까르를 통해 그려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 이를테면 어쩌다 돈이 생겼을 땐 기뻐하고 감사하다가도, 돈이 탕진되고 익숙한 가난에 처해지면 다시 운명 같은 비굴함과 처참함의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자리 잡고 길들여지는 모습, 나아가 물리적인 궁핍이 정신적인 궁핍까지 자연스레 이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돈이라는 것의 힘과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그저 아무런 답도 없이 먹먹한 감정에 한동안 빠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런 가난의 권세는 너무나도 조용히 사람을 무너뜨리고 있기에 나는 두려움까지 느꼈다. 차라리 이 작품 속에서도 어떤 사건이라도 터졌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그러면 적어도 가난의 조용한 침투력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5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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