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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행성 밖에서 ㅣ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 1
C. S. 루이스 지음, 공경희 옮김 / 홍성사 / 2021년 6월
평점 :
기독교 알레고리가 가득한 루이스의 SF 소설
C. S. 루이스 저, ‘침묵의 행성 밖에서’를 읽고
읽고 나니 한동안 잊었던 루이스의 매력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소설을 좋아해서인지 나는 루이스의 변증서보다 소설에 더 끌린다. ‘나니아 연대기’의 경우는 잘 만들어진 3부작 영화로 봤지만 (다섯 번은 족히 봤으리라), 나머지 소설들, 그러니까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천국과 지옥의 이혼’, ‘순례자의 귀향’은 모두 책으로 읽었다. 한결같이 내겐 저 유명한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와 같은 변증서보다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논리 정연한 변증은 강하고 빠른 지적 쾌감을 선사하는 반면, 문학소설은 이성과 감정을 넘나들며 공감각적인 향연을 선보인다. 변증은 빠른 직구처럼 타깃에 꽂히고 나면 효과가 금세 사라진다. 소설은 느린 변화구처럼 해석이 까다로운 대신 효과는 오래간다. 변증은 밝은 빛과 같아서 직선으로 날아와 어두운 곳을 드러내고 밝히는 역할을 한다. 소설은 자욱한 안개와 같은 힘이 있어서 어느새 조용히 온몸을 감싸고 흠뻑 적시는 효과를 낸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나 다른 두 스타일의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각각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작가가 바로 C. S. 루이스라는 사실이다. 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이 작품도 소설이다.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SF. 기독교 변증가가 쓴 SF 소설이라니! 루이스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뜻밖의 궁합이라고, 혹시 동명이인 아니냐고 충분히 의문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나니아 연대기’, ‘천국과 지옥의 이혼’, ‘순례자의 귀향’ 모두 판타지 소설이고,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도 신화를 각색한 소설이니만큼 판타지에 넣어도 무방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루이스가 SF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SF와 판타지의 차이는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지에 따른 기준을 제외하면 구별하기가 모호하니까 말이다. 둘 다 작가의 상상력이 최대치로 발휘되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루이스의 저서를 열 권 정도 읽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루이스를 잘 안다고 여겼다. 오산이었다. 이 작품은 2주 전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무려 ‘우주 3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 말고도 두 작품이 더 있다는 말이다. 각각 화성, 금성,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고 한다. 참고로, 3부작을 다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데, 이 작품이 그중 가장 짧다.
이 작품을 펼치면 가장 먼저 차례가 나오고, 그다음 페이지에는 ‘태양계 언어’라는 제목으로 이 책에서 사용되는 여러 외계어들의 뜻을 풀이해 놓았다. ‘아르볼’은 태양이다. ’글룬단드라’는 목성이다. ‘말라칸드라’는 화성이다. 이 책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다. ‘페렐란드라’는 금성이다.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툴칸드라’는 지구다. 이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침묵의 행성’도 지구를 의미한다. ‘툴칸드라’라는 단어에서 접두사 ‘툴크’는 침묵을 뜻하고, ‘한드라’는 행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툴크’와 ‘한드라’를 합치면 복합명사 ‘툴칸드라’가 된다.
이 태양계 언어를 사용해서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이 책의 공간적 배경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자면, ’툴칸드라-말라칸드라-툴칸드라‘가 되겠다. 즉, 지구-화성-지구 순으로 공간이 이동한다. 루이스는 우주여행이 가능한 과학 기술을 가진 지구인을 통해 지구 바로 옆에 있는 행성인 화성과 금성으로 공간 이동을 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우주 3부작에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생명체는 지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루이스의 상상력에 따르면, 지구에 사는 우리 인간은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저 수많은 다양한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가시적 생명체만 해도 세 종류나 된다. ‘소른’, ‘흐로스’, ‘피플트리그’가 그것이다. 비가시적 존재까지 포함하면 다섯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천사로 여겨지는 ’엘딜’과 창조주이자 신인 ‘말렐딜’을 더하면 그렇다. 아마도 곧 읽게 될 ‘페렐란드라’에서도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3부작 모두 지구 사람이자 언어학자인 랜섬이 주인공인 듯한데, 1부인 이 작품에서 랜섬은 혼자 한적한 시골길을 여행하다가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외딴집에 거주하고 있는 오랜 친구 드바인을 만나게 되고, 그가 물리학자 웨스턴의 비밀 연구를 후원하고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연구는, 비록 랜섬은 둘에게 납치된 채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에 강제로 태워지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지만, 다른 행성을 개척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웨스턴과 드바인은 전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타 생명체를 배제하거나 제거하여 자신들의 사적인 유익을 도모하는 ‘악한’ 인간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랜섬은 어쩌다 선한 영웅이 되는 인물로서 웨스턴과 드바인 무리의 계획과 시도를 방해하거나 막아서 타 생명체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언어학자로 설정된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적인 외계 생명체들의 언어를 금세 배우고 익혀 그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다) 공생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 것 같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랜섬 덕분에 평화로운 마무리로 끝을 맺는다.
그럼 외계 생명체가 있다는 말이냐, 어떻게 기독교 변증가라는 작자가 지구 아닌 다른 행성에도 생명체가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을 포함한 천지창조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등등의 질문도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의 의도는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인간이 전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과 지구를 타자화시키면서 객관적으로, 또 낯설게, 바라보고 그 의미를 되묻고 고찰하는 데에 있다고 해석하는 게 맞을 듯하다. 말하는 동물들이 주인공이 되고 멀티버스가 하나의 대중화된 개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인간과 지구가 상대화되고 객관화되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동물이 말하면 괜찮고 외계인은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루이스의 매력을 충분히 누리면서 그를 안내자로 삼아 창조주의 섭리와 인간에게 요구되는 윤리,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까지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기독교 알레고리가 가득한 루이스의 SF 소설을 통해서 말이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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