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 - 인생의 바닥에서 하늘을 만난 사람들
구미정 지음 / 비아토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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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 거듭나는 곳, 하나님과 동기화되는 곳


구미정 저, ‘낮은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을 읽고


제목에 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인생의 낮은 점을 통과한 후 가치관과 신앙관의 변화를 겪었고, 그렇게 만난 죽음과 부활의 기로에서 감사하게도 부활로 인도받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낮은 자리에 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비록 나 같은 경우, 일방적으로, 또 수동적으로 코너에 몰리듯 낮은 점으로 가게 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낮은 점으로 가게 되는 경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곳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그렇게 통과한 이후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향한 삶을 추구하는지 남을 향한 삶을 추구하는지가 관건이지 않을까 싶다. 큰 환란은 악한 사람을 더 악하게 만들 수도 있고 선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환란과 그것을 견뎌낸 것 자체보다 그것을 견뎌내는 과정과 그 과정으로 인해 변화된 현재 삶의 열매가 구원과 부활의 가시적인 증거일 것이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살아있으며 이론이 아닌 실재다.


사적인 경험을 통해 일반화에 이르는 길은 자칫 오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 속에도 보편적인 진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 진리의 눈으로 특수성을 해석할 때의 일반화는 더 이상 오류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개인의 작은 내러티브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더 알게 되며 그분을 더욱더 신뢰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특히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은 그 인물만이 아닌 그 인물을 지으시고 배후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설교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엘리야, 다니엘, 베드로, 바울 등 성경을 이루는 각 책이나 잘 알려진 내러티브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모두 인생의 낮은 점을 통과한 전적을 가진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설교에서 주로 다뤄지는 부분은 이들이 낮은 점에 위치할 때가 아닌, 소위 ‘올려짐‘을 받아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시적인 부나 권력을 갖게 된 모습에 국한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 혹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나와 내 가족이 잘된다는 번영신앙을 대변하는 행태의 연장선상에 아직도 많은 한국교회는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이 아니다. 교회 밖 세상에서 대접받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이유로 버젓이 대접받는 문화,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이 강화되어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이 지배적인 사상과 이념으로 자리 잡은 문화가 견고하게 정착하여 예수가 늘 함께했고 강조했던 소외된 자, 억눌린 자, 약한 자, 우는 자들은 배제되고 차별되며 급기야 희생양으로 이용되고 마는 존재로 치부되곤 한다. 말로는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부르짖지만, 실제 일상에서는 전도와 선교의 효율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모습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정말이지 씁쓸한 교회의 모습이지 않을 수 없다. 예수가 있어야만 하는 곳에 예수가 증발되었으며, 이미 온 하나님 나라는 마치 저 멀리 영원히 가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실 예수님과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마음을 지키기란 한국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복음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사적인 복음에 더욱더 갇혀 버린 그리스도인들. 게다가 반지성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 오늘날에도 부끄러움도 없이 여전히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부추기는 많은 목회자들과 중직자들까지 합세한 모양새는 지극히 비상식적이라 세상을 살려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더 타락시키는 것처럼 보이며 세상의 욕을 다 들어먹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그리스도인이지만 현실의 시선을 고려하면 낯뜨거움을 면할 수 없다. 교회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걸까?


나는 한 가지 답을 이 책에서 찾는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낮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만 보이는 것들을 직접 보고 느끼고 다시 가치관과 신앙관을 돌아보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의 복음이 아닌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는 가변적인 사상과 이념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회심하는 것이다. 기름진 배를 안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낮은 자리는 편리함과 게으름과 말초적 유희에 길들여진 자들에게는 보이지도 열리지도 않는다.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에 함몰되어 있어도 마찬가지다. 책 속에서 저자가 사용한 표현대로 예수의 시선에 동기화를 함으로써 더 이상 기존 세상의 눈이 아닌 예수의 눈으로 복음의 눈으로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강자가 아닌 약자의 눈으로, 울리는 자가 아닌 우는 자의 눈으로, 억누르는 자가 아닌 억눌린 자의 눈으로, 즉 낮은 자리에 처한 사람의 눈으로 나와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교용으로만 들렸던 혹은 설교용으로만 전했던 전복적인 예수의 말씀들이 그제야 실체를 가지고 귓가에 울려 퍼지고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으로 여겨지기 시작할 것이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적인 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진리가 진리로 들리게 되고, 마침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창세 전에 계셨던 말씀, 하나님 본체라는 영적인 깨달음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전적인 인정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압도되어 비로소 눈이 열리게 되며 새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 속 낮은 자리에 처해진 여러 인물들을 소환하여 과거와 현재 인류가 벌인 악의 역사와 연결하고 성찰을 거쳐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소중한 통찰을 선보인다. 기독교윤리 전공자답게 시간과 공간이 상이한 성경 속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지금 여기’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들여다본다. 한강 작가의 말을 빌려 과거(성경 속 이야기)가 현재(오늘날 세상)를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낮은 자리에 처한 사람들이었다고. 그렇다. 낮은 자리는 실패한 자리가 아니다. 그곳은 다시 시작하는 자리다.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처럼 부활하는 자리다. 죄와 악에 물든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관찰하고 성찰한 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로 동기화되어 다시 세상 속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출발하는 자리다. 그곳엔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기를 낮추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고 유독 마음속에 깊이 담긴 단어가 있다. ‘섬김’과 ‘공공성’이다. 이 두 단어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오다가 한계를 만났고 무너졌었다. 그러나 그 낮은 곳엔, 다른 성경 속 인물들처럼, 하나님이 계셨다. 그로 인해 나는 회복할 수 있었으며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며 남은 생을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으로 살아가길 서원했다. 낮은 자리에서 붙잡은 이 두 단어는 조금씩 내 일상에 스며들고 있으며 아주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다. 실패로만 보였던, 어둡게만 보였던 낮은 자리는 은혜의 자리였고 새 출발의 자리였으며 나의 정체성과 사명을 가다듬는 소중한 자리였다. 힘들 때마다 불안할 때마다 나는 이 시절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동기화되는 시간이다. 부디 남은 삶도 이 연장선상에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게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통찰을 함께 건네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두 주인을 놓고 여전히 분주한 마음속에서 갈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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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
박순주 지음 / 정은문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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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낸다는 것


박순주 저, '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를 읽고


처음 들어보는 '진보초'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이었을까? '거대한 서점'이라는 수식어구 때문이었을까? 나의 궁금증은 결국 이 책을 구하게 만들었다. 밀린 것들을 처리하고 마침내 여유가 생긴 날,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장에 꽂힌 이 책을 손에 들고 읽어나갔다. 다 읽고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흥미로웠다는 것. 다른 하나는 부러웠다는 것. 어부지리로 진보초라는 곳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동경도 생겨버렸다. 


먼저 이 책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백여 군데가 넘는 고서점들이 밀집된 지역이 21세기 오늘날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책을 사랑하는 나는 어떤 형태로든 오프라인 서점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외국 여행을 할 때에도 근처에 서점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구경하려 애쓴다. 생소한 언어라도 상관없다. 그 어떤 언어로 쓰였다 하더라도 책은 책이기 때문이다. 책은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는 고유한 그 무엇이며, 단순한 텍스트가 적힌 종이 묶음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 책이 특히 놀라웠던 점은 우리가 흔히 (아니, 이제는 가끔이라고 해야겠지…) 보는 동네서점처럼 신간 위주로 판매하는 서점도 아니고,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에 종종 방문하여 책에 대한 환상과 책 냄새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던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처럼 중고책을 주로 판매하는 서점도 아닌, 오래된 책, 즉 고서를 위주로 판매하는 서점이 백 군데도 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골동품, 엔틱, 진귀품이라 불러도 좋을, 오래전에 출간된 책들이, 다시 말해 절판된 지도 이미 오래된 책들이 버려지지 않고 그것들만의 역사를 머금은 채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팔릴까, 이 고서점 주인장들은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을까, 등의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확인하고 감동한 건 그들의 사명의식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그 책들을, 그 책들이 모인 고서점들을, 그 고서점들이 밀집된 진보초를 지켜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인터넷 발달로 인해 온라인 판매와 전자책의 보급으로 고서점만이 아닌 세계 모든 서점들이 예전보다 경기가 나빠졌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일 텐데도 그들은 지금도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면서도 빈틈을 찾아내는 전략으로 이 아름다운 유산들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문화 및 사명의식이기에 나는 흥미롭다는 인상을 넘어 고결하다는 느낌과 더불어 부럽다는 생각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셰어형 서점'이라는 컨셉이 인상적이었다. 서점에 들어가면 수많은 책장들이 손님들을 반긴다. 보통 모든 책장들은 그 서점의 소유다. 그러나 '셰어형 서점' 안에 위치한 책장들은 각기 다른 주인을 가진다. 일정 기간 대여하여 원하는 책들을 진열하고 판매할 수 있는 형식인 것이다. 일인 출판사나 뜻이 있는 작가 등 누구나 자기만의 서점을 가질 수 있는 셈이다. 책의 유통구조가 한국에선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이 독특한 컨셉이 한국에서도 적용된다면 적어도 독자 입장에서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공간 안에서 여러 출판사와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만남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북콘서트나 소규모 강연들이 병행된다면 사라져 가는 독서 문화를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이라는 것이 어느새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간다는 사실이 슬프다. 물론 진보초의 경우 고서 위주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확장해서 고려해 볼 때 지켜내야 할 것은 고서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면 더욱 서글프다. 인터넷과 동영상과 스마트폰의 발달과 보급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책을 읽지 않는다. 나는 책이 단지 정보라는 명제는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정보를 넘어선다. 동영상이 주지 못하는 많은 소중한 것들이 책에 있다 (이 감상문에서 그것들을 나열하기에는 부적절하니 기회가 되면 정리해서 포스팅할 예정이다). 유산이라 할 그 무엇이,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한 가시적인 실체가 바로 책이 아닐까 한다. 책을 지켜내는 사람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이고, 이들을 응원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진보초의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 지켜낸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은문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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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일더 지음, 정해영 옮김, 신형철 해제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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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영원성과 현재성


손턴 와일더 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읽고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무너지면서 다섯 명이 추락사를 당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우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신이 개입한 걸까? 단순한 우연일까? 그들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일까? 혹시 남이 모르는 어떤 흉악한 일을 저질러 천벌을 받은 건 아닐까? 인간의 삶과 죽음은 인간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다.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쉽게 죽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여기엔 우리가 모를 뿐 이미 정해진 어떤 시간표가 있는 건 아닐까? 혹시 누군가가 설계한 건 아닐까? 신과 우연, 무엇이 사건의 주체일까? 도대체 무엇이 이 다섯 명을 죽였단 말인가. 


그들을 위해 살아남은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냥 잊으면 되는 걸까? 아니면 어떤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다리가 무너진 원인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만든 뒤 그 사람을 악마화하여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그들을 위할 수 있을까?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도 신적 개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대형재난사고로 인한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억울한 죽음이라는 생각에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가시적인 사람이 아닌 비가시적인 신을 원망하기로 선택하는 것도 이런 면에선 훨씬 합리적이고 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어진 적당한 합리화와 적당한 정신승리의 도움만 받으면 어지간한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믿음까지 갖추게 되면 완벽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머지않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역시 그런 사고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라는 우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린 매번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똑같은 생각에 잠기고 똑같은 한숨을 쉬며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군더더기 없는 작품은 시작부터 산 루이스 레이 다리 붕괴로 인해 추락사를 당한 다섯 명의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 직진한다. 선교 활동을 위해 페루로 왔다가 공교롭게도 그 사고를 목격했던 프란치스코회 소속 주니퍼 수사의 머릿속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그는 이 다섯 명의 숨겨진 삶을 조사하여 그들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밝혀내리라 마음먹었다. 다섯 명 모두의 삶이 온전했으며 그들의 죽음은 그러므로 어떤 벌이 아님을 증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이단으로 몰리게 된다. 그가 수많은 연구 끝에 쓴 방대한 책은 비밀 필사본 하나만을 남겨둔 채 그와 함께 불태워진다. 주니퍼 수사는 처음 던졌던 질문에 끝내 답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 심오한 질문을 툭 던져놓고 9페이지 분량으로 이뤄진 1부를 짧게 마무리한다. 1부의 제목은 ‘어쩌면 우연’이다. 우연이길 바라는 걸까? 아니길 바라는 걸까?


곧장 이어지는 2-4부는 과거로 돌아가 산 루이스 레이 다리 붕괴로 추락사를 당하기 이전의 다섯 명의 삶을 담담히 조명한다. 포목상의 딸로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몰락한 귀족과 결혼하여 딸 클라라를 낳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하는 건지 딸을 사랑하는 건지 구분을 하지 못할 정도로 딸을 향한 집착 아닌 집착, 이타적인 듯하지만 지극히 이기적으로 자기 안에 갇힌 사랑을 딸에게 평생 퍼부었던 도냐 마리아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이 부인이 인생에서든 사랑에서든 처음으로 용기를 내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부여했던 소녀 페피타. 페피타 역시 은인이었던 수녀원장을 다시 만날 기대로 벅차 있는 상태였다. 함께 살던 후작 부인의 심적 변화를 바로 옆에서 보고 그녀에게도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는 기대 또한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틀 뒤 후작 부인은 페피타 덕분에 새롭게 인생을 살기 위해 페피타를 데리고 리마를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건너다가 추락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2부의 이야기다.


3부는 수녀원 문 앞에 버려진 바구니 안에 누워 있던 쌍둥이 형제 이야기다. 쌍둥이 마누엘과 에스테반은 수녀원장의 손에 길러졌고 자연스레 수녀원과 그 주변에서 자랐다. 가족도 없는 데다 쌍둥이였기에 둘은 자기들만의 비밀 언어까지 고안하여 서로 소통하곤 했는데 그 때문에 둘은 깊은 일체감을 느꼈다. 어느 날 여배우 페리촐레가 마누엘을 찾아와 편지 대필을 부탁한다. 마누엘은 그녀를 몰래 숭배하고 있었다. 재방문한 페리촐레가 마누엘과 함께 있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에스테반은 묘한 감정을 느낀다. 시기, 질투 비슷한 것이었다. 둘 사이에 처음 겪는 관계의 위기였다. 에스테반은 마누엘에게 페리촐레와 사랑에 빠지라고, 자기는 마누엘에게 방해만 된다는 말을 하게 되고, 마누엘은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며 페리촐레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응답한다. 그러다가 마누엘은 쇳조각에 부딪혀 무릎이 찢어지는 사고를 겪고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홀로 남은 에스테반은 충격에 사로잡혀 방랑을 하게 되고 수녀원장이 보낸 알바라도 선장 말을 듣고 페루를 떠나 외국으로 향하기로 한다. 에스테반이 선장과 함께 가기로 결정한 건 선장의 회유에 넘어갔다기보다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떠나는 날, 선장은 물건의 운반을 감독하기 위해 다리 아래 강으로 내려갔고, 에스테반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건너다가 다리와 함께 추락한다. 


4부는 여배우 페리촐레의 노래 선생이자, 미용사이자, 안마사이자, 대본을 읽어주는 사람이자, 심부름꾼이자, 물주이자, 아버지 역할까지 도맡았던 피오 아저씨의 이야기다. 피오 아저씨는 페리촐레를 유명한 여배우로 성장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페리촐레를 향한 그의 입장은 도우미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연기에 천재성을 가졌던 페리촐레는 그의 가르침과 양육 스타일을 다행히 받아들이고 성장을 이뤄냈지만, 결과가 좋다고 해서 피오 아저씨의 방법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페리촐레의 성공 덕을 톡톡히 보았지만 그녀에게 진실된 사랑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성공 이후 아이까지 낳은 후 페리촐레는 천연두에 걸리게 되면서 그것을 계기로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은둔 생활을 자처하게 된다. 피오 아저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촐레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스페인으로 데려가 다시 연기를 시킬 생각이었다. 페리촐레는 생각이 달랐다. 다시 연기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끈질긴 피오 아저씨는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다. 그녀 대신 그녀의 아들 하이메를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제2의 페리촐레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리라. 페리촐레는 아들에게 결정권을 넘기게 되고, 아들 하이메는 다음날 피오 아저씨와 함께 떠나게 된다. 피오 아저씨는 신이 났던 모양이다. 하이메를 목말 태운 채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건너다가 하이메와 함께 그리고 다리와 함께 추락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다섯 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도냐 마리아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페피타, 에스테반, 피오 아저씨, 그리고 하이메. 다시 주니퍼 수사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왜 하필 이 다섯 사람이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붕괴로 인한 추락사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다섯 사람의 삶에서 공통점을 찾으면 혹시 답에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2-4부를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다섯 사람 모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기가 공교롭게도 1714년 7월 20일 정오였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다른 삶, 생각만으로 멈추지 않고 신중히 결단하여 그 도약을 위해 옮긴 실천의 첫걸음이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위였다는 것. 새로운 시작이 곧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은 나를 섬뜩하게 만든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막힌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장난인 걸까? 신의 계획은 아닐까? 도대체 이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 왜 하필 이들이었을까? 왜 하필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고 행동에 옮긴 첫날 죽어야만 했을까? 답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저자의 의도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5부의 제목은 '어쩌면 신의 의도'이다. 붕괴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대신하여 새로운 다리가 세워졌다. 화자는 주니퍼 수사가 화형에 처하기 전 완성한 책을 언급한다. 그러나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면서 그가 이끌어 낸 귀납적 결론들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이라는 모호한 말을 남긴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문장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그는 그 사고에서 악한 사람에게 파멸이 닥친 것과 선한 사람이 일찍 천국의 부름을 받은 것을 모두 보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향한 객관적인 교훈으로, 오만함과 부유함이 저주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리마의 교화를 위해, 겸손함이 최고로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니퍼 수사는 자신의 추론에 만족할 수 없었다.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이 탐욕의 괴물이 아니고, 피오 아저씨가 방종의 괴물이 아닐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주니퍼 수사의 추론에 대한 화자의 추론 뒤에 숨은 저자의 메시지는 아마도 "모른다"일 것이다. 이 책을 여는 1부의 제목이 '어쩌면 우연', 이 책을 닫는 5부의 제목이 '어쩌면 신의 의도'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저자의 숨은 의도는 5부 뒷부분에서도 등장한다. 추락사를 당한 다섯 사람을 측근에서 그들을 가장 잘 기억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도냐 마리아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의 딸 도냐 클라라. 페피타를 어릴 때부터 점찍어두고 자기 뒤를 잇게 할 야심을 품었고, 에스테반을 바구니에 담긴 아기 때부터 길렀던 수녀원장. 피오 아저씨 덕분에 성공한 여배우가 되었고, 하이메라는 이름의 아들을 두었던 페리촐레. 저자는 왜 살아남은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들었을까? 답은 책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수녀원장의 생각에 담겨 있다. 키워드는 '기억'이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의 의미가 이토록 무거웠던 걸까? 저자는 수녀원장의 생각을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 역시 곧 죽을 것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짚은 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라는 자명한 진실을 다시 적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라고.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고.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자 추락사를 당한 다섯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더 생각이 났다. 그건 모두 진정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거나 주지 못했다는 것. 어머니인 도냐 마리아가 딸인 도냐 클라라를 향해 시종일관 쏟아부었던 자기 안에 갇힌 이기적인 사랑, 무릎이 다쳐서 죽은 마누엘과 살아남아 방랑을 했던 에스테반 사이의 미성숙한 사랑, 그리고 피오 아저씨의 여배우 페리촐레를 향한 야심 깃든 일방적이고 어쩌면 폭력적이었던 사랑.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결단은 곧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열망의 결정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랑을 위해, 아니 사랑만을 남기기 위해 야속하게도 저자는 그들을 죽여야만 했던 걸까?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사람은 가도,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만은 남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죽음만이 유일했을까? 석연찮은 결론으로 치달아 답답한 마음이지만, 나는 그렇다고 마지못해 대답하려 한다. 그러면 적어도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신의 심판대도 기막힌 우연의 장소도 아닌 그저 하나의 다리로, 모든 형태의 사랑을 다 품는,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어떤 상징으로 채색될 수 있을 테니까. 다리가 붕괴되고 사람이 죽은 후에도 새 다리가 세워지고 그 위로 또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사람의 기억도 기록도 한동안은 살아 있겠지만 끝내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다리는 남고 사람도 남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또 다른 사랑의 이야기가, 여러 형태를 가진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게 될 것이다. 이런 해석을 하게 될 때, 저자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사랑만은 남을 것이라고 하는 말은 명제적 진술이 아닌 믿음이 된다. 나도 그 믿음에 동참한다. 사랑의 영원성을 믿는다. 그리고 내게도 죽음이 이르기 전에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로 다짐하며 사랑의 영원성을 사랑의 현재성으로 가져오기로 한다.


#클레이하우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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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 - 바로 지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하여 클래식 클라우드 22
정여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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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세


정여울 저, '헤세'를 읽고


우리나라에서 정여울만큼 헤세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작가가 또 있을까. 헤세 선집을 두 번째 읽어 나가고 있는 나로서는 정여울 작가를 지나칠 수 없었다. 한국 들어오자마자 '헤세로 가는 길'을 구해서 읽었다. 그 책에서 정여울 작가는 헤세가 거주했던 독일과 스위스를 여행하며 자신만의 단편적인 감상과 해석을 남겼고,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싯다르타‘, 이렇게 네 작품에 대해서는 융의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빌려 전문가다운 서평을 남겼다. 2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그 책을 떠올리면, 헤세의 흔적을 쫓으며 치열하게, 그러나 정갈하게 글을 써낸 정여울 작가의 설렘 가득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헤세를 읽으며 내면의 치유를 경험했고, 헤세를 좇으며 헤세를 파고들었으며, 이젠 헤세를 쓰면서 헤세를 널리 알리는 정여울 작가를 헤세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꼭 한 번은 읽어보길 권한다. 


'헤세로 가는 길’은 2015년 출간, '헤세'는 2020년 출간되었다. 5년 만에 정여울은 헤세를 다시 쓰게 된 셈이다. '헤세로 가는 길'이 '여행 중'인 정여울의 글쓰기라면, '헤세'는 '여행을 마친' 정여울의 정리된 글을 읽는 듯했다. arte 출판사에서 기획한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 하나로 헤세가 선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정여울이 가장 적격이었기에 이 책이 만들어지기도 했겠지만, 두 책은 성격이 사뭇 다르기 때문에 두 권 모두 읽어보는 건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대만족이었는데, 특히 '헤세'에는 헤세가 아닌 작가 정여울의 읽고 쓰는 솔직한 생각과 실제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매력 때문에 올해가 마침 다시 5년이 지난 2025년이니 또 다른 컨셉으로 정여울 작가가 헤세를 써주면 좋겠다는 소소한 바람도 가지게 된다.


빛의 스펙트럼에 의한 한국적인 무지개 색 수를 따른 것인지 이 책에서 독자는 헤세의 일곱 분신을 만날 수 있다. 같은 헤세이나 저자에 의해 일곱 가지 다른 성격과 역할이 부과된 헤세의 모습과 그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1부 ‘여행자’에서 정여울은 헤세의 발자취를 쫓았던 여행 기록을 바탕으로 헤세와의 내적 교감을 글로 써낸다. 헤세가 태어난 칼프, 헤세가 가정을 이루고 세 아이를 낳았던 가이엔호펜, 그리고 전쟁 때문에 옮겨가야 했던 스위스 몬타뇰라를 직접 방문하면서 느낀 정여울의 살아있는 감상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페이지 두 문장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토록 애써본 적이 있었던가. 헤세의 흔적을 따라 걸어간 그 머나먼 길은 결국 ‘데미안’의 한 대목이 말하듯 ‘나 자신을 향한 길’이었다.” 사랑하는 한 작가의 삶의 여정을 밟다 보니 그것이 가리키는 목적지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 많은 공감이 되었다. 헤세로 가는 길은 나에게 가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헤세가 삶이라는 여행을 글로 남겼듯 작가 정여울도 그 뒤를 쫓아 고유한 삶의 여행을 글로 수놓고 있는 것 같았다. 


2부 ‘방랑자’는 헤세의 초기 작품, 그러니까 ‘데미안’ 이전 작품들에서 도드라진 정착과 방랑의 대립구조를 조명한다. ‘수레바퀴 아래서’와 ‘크눌프’를 깊게 파고들며 에고와 셀프, 의식과 무의식을 대비를 말하고 자유를 드러낸다. 역시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음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만약 당신이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이상하리만치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온다면, 머릿속에서 곡조를 들어본 적 없는 낯설지만 달콤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면, 그 산들바람을, 그 휘파람을 무시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때가 바로 당신 안의 크눌프가 당신에게 잠시 ‘쉬어 가라’고 속삭이는 순간이니. 재산을 축적하고, 명성을 관리하고, 인간관계를 조종하는 정착민의 욕심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가 지닌 것을 돌아보고, 사랑한 흔적들에 만족하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축복하는 삶을 살라는 크눌프의 작은 소원이 당신의 심장에 가닿는 순간이니.”


3부 ‘안내자’에서 저자는 ‘데미안’ 이전과 이후로 헤세를 구분한다. ‘데미안’ 이전의 헤세의 작품세계가 다분히 서정적이고 자연친화적이며 시적이면서 방랑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이었다면, ‘데미안’ 이후의 작품들은 뚜렷한 세계관에 기반하여 쓰였다. ‘데미안’은 하나의 기준점으로써 ‘개성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융의 정신분석학과 깊은 연계를 이룬다. 세상이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새로운 싸움을 개성화라고 정의하면서 정여울은 융의 정신분석학적인 통찰을 빌려 ‘안내자’에 대한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문장을 써낸다. “안내자의 공통점은 친절함이 아니라, 뼈아픈 깨달음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점이다. 그 고통 때문에 우리는 가야 할 길을 거부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길을 거부하면 개성화의 길이 그만큼 멀어진다. 우리가 진정한 나 자신으로 거듭날 기회를 잃을 때마다 또 다른 안내자가 나타나 길을 재촉한다. 헤세에게 융도 바로 그런 안내자였다.” 그리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페터 카멘친트’를 깊게 파고들며 ‘사회화’와 대비되는 ‘개성화’를 더 풍성하게 설명한다. 


4부 ‘탐구자’에서 정여울은 ‘데미안’을 주로 다루면서 헤세를 읽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개성화’를 더 깊게 조명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는 여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싱클레어라면 데미안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셀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억눌린 셀프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과정이 바로 개성화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149페이지 마지막 단락에서 내가 밑줄을 그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두 번째는 자신의 무의식이라는 내면의 자궁 안에서. 두 번째 탄생은 오직 ‘의식’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다.”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끌어안고 개성화를 이루는 것은 종교적으로 보면 일종의 구원과도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건 새로운 삶, 부활을 경험한 삶일지도 모른다. 


5부 ‘예술가’에서 다뤄지는 작품은 ‘게르트루트’와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바로 예술가가 주인공이라는 점인데, ‘게르트루트’에서는 음악가가,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에서는 화가가 주인공이다. 예술가라는 의미에 대해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와 일맥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예술가의 열정과 혼을 셀프에 빗대고, 타인의 시선을 에고에 빗대어 읽는다면 헤세의 작품세계에서 예술의 의미는 곧 나다운 나를 이루는 DNA 같은 그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헤세는 예술가가 등장하는 작품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동일한 메시지를 내고 있는 것이다. 


6부 ‘아웃사이더’가 다루는 작품은 ‘황야의 늑대’다. 내가 몰랐던 사실이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황야의 늑대’ 때문에 헤세는 197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히피들의 우상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에 치를 떨던 사람들은 ‘시민으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한 ‘황야의 늑대’ 주인공 하리 할러에게 열광했다고 한다. ‘황야의 늑대’를 시민이라는 굴레에 억눌린 자유로운 영혼을 끌어내는 작품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환상적인 부분들이 자극적인 도구로 등장하기도 해서 히피들을 더욱 자극시켰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문학작품을 읽는 히피들이라니. 2025년 현재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비하면 그 당시 히피들의 수준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정여울 작가가 쓴 문장이 내가 볼 땐 ‘황야의 늑대’의 의의를 정확히 잡아낸 것 같다. “‘황야의 늑대’에서는 주인공이 죽지는 않지만 주인공으로 하여금 거의 죽음에 가까운 고통과 환각을 겪게 함으로써, 헤세는 ‘주인공의 문학적 죽음’과 ‘작가의 현실적 부활’을 동시에 쟁취해 낸다.” 헤세는 하리 할러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방출했던 것이다. 


마지막 7부 ‘구도자’에서는 ‘싯다르타’가 다뤄진다. 저자는 이 작품이 다른 모든 헤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색다른 작품이라고 꼽는다. 나 역시 ‘싯다르타’를 진정한 나를 찾아 나선 여행이라기보다는 사랑을 찾아 나선 여행이라고 읽었다. 주인공 싯다르타가 궁극적으로 다다른 길의 끝에는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깨달음이나 감정이나 욕망의 초월 그 너머에 있는 가장 숭고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싯다르타’의 핵심 메시지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불교적인 사상도 도가적인 사상도 결국 사랑이라는 한 단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싯다르타를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되면 이게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사랑을 통해 인간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이 강력한 메시지가 ‘싯다르타’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곱 챕터를 살짝 훑어봤다. 순서와 상관없이 읽어도 무방하다. 각 챕터가 다루는 헤세의 작품들을 읽지 않고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작품을 다 섭렵한다면 다시 이 책을 손에 들고 읽어 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 헤세를 먼저 알고 경험한 정여울 작가의 글이 더욱 깊고 풍성하게 와닿을 것이다. 


#arte

#김영웅의책과일상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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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함께 춤을 - 시기, 질투, 분노는 어떻게 삶의 거름이 되는가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한재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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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e: 내면의 야생을 사랑하기


크리스타 K. 토마슨 저, '악마와 함께 춤을'을 읽고


분노, 시기, 질투, 앙심, 경멸.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사람도 있을 테다. 흔히 우리가 부정적인 혹은 나쁜 감정이라고 하는, 그래서 없애야만 하고, 없앨 수 없으면 피해야 하고, 피할 수 없으면 인내심을 발휘하여 적절히(?) 억눌러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감정들이 정말 나쁜 것일까? 정말 우리와 우리 삶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는 것일까? 혹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그 누명을 벗기고 본래의 의미를 회복시키며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 균형 잡힌 삶, 깊고 풍성한 삶을 위해 이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건강한 정원에는 지렁이가 산다. 지렁이는 비 온 다음날 눈에 잘 띄며, 작은 뱀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길고 미끌거리는 징그러운 생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지렁이는 흙 속의 유기물을 먹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질감도 좋게 만든다. 지렁이가 배설한 흙을 분변토라고 하는데, 이 분변토는 인류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비료라고 여겨진다. 생태계 최하위에 놓인 지렁이가 최고 포식자인 인간의 눈에 하찮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지렁이는 묵묵히 땅을 일구며 지구의 토양을 풍성히 해준 동물이다. 그러므로 지렁이가 많이 사는 땅은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땅이며, 지렁이는 지구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생명체인 것이다.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자 현재진행형인 여섯 번째 대멸종을 주도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한다면, 적어도 우리 인간은 지렁이를 홀대해선 안 된다. 고마워해야 한다. 


철학과 고전학을 전공한 교수인 저자는 나쁜 감정을 정원의 지렁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원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의미한다. 건강한 인간과 건강한 삶은 건강한 정원이며, 건강한 정원은 지렁이 덕을 톡톡히 본 것이므로, 지렁이인 나쁜 감정은 건강한 인간과 건강한 삶에 필수라는 것이다. 저자는 부정적인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하려면 너그러운 솔직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감정을 짓밟거나 부풀리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정원의 지렁이를 제거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 지렁이가 계속 머물며 정원을 더 풍요롭게 해 주길 원하는 마음을 갖길 바라면서 말이다. 


상식처럼 널리 알려진 관념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조곤조곤 할 말을 다 하는 이 책이 독자의 이목을 끌고 강한 설득력까지 갖는 이유는 저자의 전공인 철학과 고전학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열매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나쁜 감정을 대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 대부분을 향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가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 중엔 두 가지의 부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감정을 통제하려는 사람들(감정 통제형 성인)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을 길들이려는 사람들(감정 수양형 성인)이다. 이 두 부류를 감정 성인이라고 부르는데, 저자는 조지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성인의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웰은 좋은 인간이 되는 게 성인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했고, 성인의 삶에는 결함이 있으며, 성인이 되려면 평범한 인간의 삶에 관심을 끊거나 대폭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즉 감정 성인이 되려고 애쓰는 건 인간성을 덜어 내려는 행위인 것이다. 


저자는 감정 통제형 성인을 지향한 인물로 스토아 학파와 간디를 꼽는다. 감정 통제형 성인에게 감정은 비합리적이다. 그들에게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착시 현상이나 잘못된 믿음과 같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삶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잘못됐기 대문이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으면 감정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간디에게 부정적인 감정은 망상과 같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주변의 살아 숨 쉬는 인간 세계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인간계에 덜 신경을 써야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감정 수양형 성인은 감정 통제형 성인보다는 감정을 덜 의심하는데, 이 성인들이 보기에 나쁜 감정은 뿌리 뽑거나 억누를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수양하거나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감정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비이성적인 힘이라는 사고를 거부한다. 그들은 적절히 개입하면 감정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잘 단련만 하면 감정을 없애지 않으면서 주체성을 빼앗기지 않고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 대표적으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면서 의문을 제시한다. 과연 감정을 길들일 수 있을까,라고. 그리고 설령 길들일 수 있다고 해도 꼭 그래야만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성으로 감정을 길들일 수 있는가? 느껴야 한다고 결정한 어떤 특정한 감정만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가?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우리를 장악하는 힘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다른 감정이 우리를 삼킬 때도 많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감정이 잘못될 수도 있지 않은가?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오르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정이 우리의 말을 듣도록 훈련시키기보다는 우리가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나쁜 감정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 이유는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감정은 마음의 벽장에서 치워야 할 잡동사니가 아니라고. 지렁이가 정원의 일부인 것처럼 감정은 내 삶의 일부라고. 지렁이다움을 모두 벗어던져야만 녀석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지렁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면서 당당하게 제안한다. 나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그냥 내버려 두고 느끼라고. 그러면 된다고. 


다음으로 저자는 악마를 위한 공간을 만들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나쁜 감정도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의 일부인 동시에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애착의 일부라고 말한다. 나쁜 감정이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걸 방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서 나쁜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자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내놓는다. 자아를 사랑한다는 건 항상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런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알긴 어려우므로 우리가 직면한 진정한 도전은 그런 존재를 솔직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저자는 몽테뉴와 니체를 들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몽테뉴 작품의 큰 주제 중 하나는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이라고 한다. 니체 역시 우리 영혼이 심각하게 병든 원인을 성자라고 하는데, 이 성자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경멸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사랑과 수용으로 포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감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해롭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나쁜 감정이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 것이 싫기 때문이며, 우리가 감정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나쁜 감정을 느끼도록 내버려 두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쁜 감정 자체가 악한 게 아니라 그 감정을 탓하며 나쁜 짓을 하기로 판단하고 행한 생각과 의지가 악하다는 말이다.


2부에서 저자는 분노, 시기와 질투, 앙심과 쌤통, 경멸 같은 나쁜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하나씩 기존의 관념들을 반박해 나간다. 먼저 분노를 언급하는데 내가 가장 공감하면서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은 내 분노를 교정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데 누군가의 책임이 있다고 가정하지 말고, 그저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스스로 솔직히 살펴야 된다고 한다. 또한 분노는 종류를 갖지 않는다. 단지 분노와 그 분노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올바른 종류의 분노만 느끼려고 노력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대신 모든 분노를 솔직하게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로지 정의로운 분노만 느끼려고 하면 지저분하고 복잡한 인간적인 부분이 줄어든다. 


아래 발췌한 부분에서 나는 최근 우리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몇몇 개인을 떠올렸다. 


| 자신을 성찰하며 수반되는 고통과 수고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할 권리는 없다. 우리는 판타지 세계를 구축해서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없으며,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그 판타지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이 분노로 괴물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우리는 실패, 방황 또는 외로움을 맞닥뜨리기보다는 차라리 적을 만들기를 원한다. 적이 있으면 자기 의심으로부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분노하는 이유를 생각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분노를 성급하게 정당화하고 악당을 탓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이런 모습들이 반지성적인 행태의 이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책은 분노 외에 시기와 질투, 앙심과 쌤통, 경멸을 파헤치며 저자의 예리한 통찰을 다루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지렁이를 사랑하라." 이 문장의 방점은 '사랑하라'이다. 단순히 용납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 역시 네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뜻에 그치지 않고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같은 논리다. 우리 인간을 이루는 당당한 구성 요소인 나쁜 감정을 우린 제거하려 하지도 말고 피하지도 무시하지도 말고 사랑해야 한다. 이 감정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요소이며, 이것들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가 감정 성인이 되려는 열망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추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반쪽짜리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여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사실 우리가 나쁜 감정을 나쁘다고 여기는 이유는 나쁜 감정이 의미하지 않는 뭔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예컨대 앙심이나 질투를 느끼는 건 내가 악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쁜 감정은 다루기 어려울 순 있어도 괴물이 아니라고, 그저 야생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삶의 의미가 부분적일지라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나쁜 감정들을 악마화시켜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이성의 힘과 상관없이 느끼는 것이지만 그것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만 바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영역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나쁜 감정들이 우리 삶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그 감정들과 연관되어 작동하는 우리의 이성과 신념과 잘못된 판단과 행동이 우리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생각의 전환이다. 덕분에 조금 더 객관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악마화시켰던 대상을 제거하니 보다 내밀한 내 모습을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소망한다.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내 모습도 넉넉히 끌어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내면의 야생을 사랑할 수 있기를. 그래서 나뿐 아니라 타자를 더욱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기를.


#흐름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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