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의 회고록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지음, 최호정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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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도스토옙스키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을 읽고


러시아의 대문호, 19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광기어린 천재 등 도스토옙스키를 수식하는 문구들은 한결같이 최정상의 탁월함 혹은 비범함을 나타낸다. 명실상부 인류를 대표하는 작가 혹은 인류의 유산 리스트에 올려도 반대할 사람 없을 작가 도스토옙스키. 그를 작가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숭배하고 사랑하고 보살폈던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15년간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했던 나날들에 대한 안나의 기억들을 담고 있다. 기술적으론 안나의 회고록이지만 이 책에서 독자들은 안나만이 아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안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이렇게 불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성이니까)를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가깝고 친근하게 만날 수 있다. 안나가 일인칭 관찰자로 등장하여 도스토옙스키 바로 곁에서 그의 작품 밖 일상을 서술한 책이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작가 도스토옙스키만이 아닌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대면할 수 있다. 이 고유한 특징만으로도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매핑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등으로 이미 오래전에 석영중 선생님으로부터 친절한 소개와 안내를 받아서인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가득 채우며 안나가 묘사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모습들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전작을 거의 다 읽은 (일부러 몇 작품은 아껴두고 있는 중) 나의 눈에 비친 그 모습들은 저 위에서 홀로 빛나는 천재 작가의 이미지보다는 한 여자를 아끼고 헌신하고 사랑했던 남편, 아이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아버지, 그리고 가능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사려 깊고 친절했던 한 명의 어른으로 다가왔다. 안나의 눈과 마음을 통해 나는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아닌 인간 도스토옙스키, 즉 한 여자의 남편이자 , 네 자녀 (두 자녀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의 아버지이자, 간질 (뇌전증)이라는 지병에 평생을 시달렸고, 폐질환이라는 질병에 생의 무릎을 꿇은, 유한한 육체를 가진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몇 주에 걸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점 세 가지만 추려볼까 한다. 이 세 가지는 내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책을 통해 다시 숙지하며 감동한 도스토옙스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도스토옙스키, 나아가 나의 보편적인 인간과 인생에 대한 관점을 모두 아우르는 사항들일 것이다. 


첫째, 도스토옙스키의 인품에 대해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 불리는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은 독자들에게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사람일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각 작품에서 받은 인상에 기반해서 심오하다거나 무겁다거나 어둡고 냉철하다거나 심지어 괴팍하다는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절반은 그랬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안나의 눈에 비치고 마음에 담기고 입으로 고백된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생각한 나머지 절반, 그러니까 사려 깊고 선하고 고결하며 어린아이 같은 순박함을 머금은 어른이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자체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로지비 (Holly Fool, 바보성자)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베리아 유형 전후 그의 모습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을 거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안나를 만난 이후 그의 모습은 정말 인간다웠던 것 같다. 아내를 대하는 모습에서나,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한결같이 그는 따스하고 자상했으며, 심지어 그를 모함하고 이용해 먹는 파렴치한 친지들에게조차 그는 선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늘 지니고 있었고 고통받았던 간질병 (뇌전증) 때문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느라 그랬던 게 아니냐고 누군가는 따질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안나에게 비친 도스토옙스키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지병 때문에 그는 자신을 더 낮추었던 것 같고, 그것 때문에 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 같으며, 또 그것 때문에 육체와 같은 가시적인 물질이 아닌 마음이나 정신, 영혼 혹은 본성 같은 비가시적인 것들을 더욱 깨끗하고 세심한 눈으로 관찰하고 성찰하여 깊은 통찰을 이끌어냈던 것 같다. 자신의 약점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들이 그에게는 오히려 인간의 중심을 꿰뚫는 길의 역할을 해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둘째, 돈 문제에 대해서다. 도스토옙스키가 궁금해서 인터넷 등을 통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본 독자라면 그가 얼마나 경제적인 궁핍에서 평생을 살았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내만큼 이 문제에 대한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안나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불과 몇 년 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빚을 진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나 역시 절반은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도박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편집자를 잘못 만나 이용당했기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빚은 친형의 죽음 이후 그 가족들 모두를 부양했기 때문이고, 첫 번째 아내가 죽고 남긴 의붓아들 파벨을 책임졌기 때문이며, 도스토옙스키가 따지지도 않고 잘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그 선함을 되려 이용해 먹는 친지들이 요구하는 돈을 거절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두 충족시켜주려 했던 도스토옙스키의 태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선한 인품이 그와 그의 가족 (아내와 친자식들)을 평생 궁핍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그나마 안나가 지혜로운 대처를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스토옙스키는 죽는 그날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 자식에게까지 빚을 물려주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방면에서 안나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주었지만, 적어도 돈 문제에서만큼은 안나가 그의 구원자였던 것 같다. 


셋째, 그의 작가 천성에 대해서다. 그의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가장 곁에서 지켜본 아내의 고백으로도 도스토옙스키는 타고난 작가였다. 그의 삶은 읽고, 쓰고, 산책하는 일상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도스토옙스키는 규칙적이고 치열하게 다방면의 글, 이를테면 분야나 언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을 읽었고, 늘 밤 11시경부터 새벽 3시경까지 치열하게 썼으며, 저녁 먹기 전과 후에 늘 장거리 산책을 즐겼다. 지병에 시달렸고 말년에 가서는 폐질환까지 겹쳐서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책하는 시간만큼은 사수했다. 그의 산책은 단순한 걷기를 넘어 작품 구상은 물론 새로운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그것을 흡수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과 통합하는 성찰,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종합하여 끌어내는 통찰을 지속하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글은 책상 위에서 탄생한 게 아니라 산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삶을 시간과 공간이 상이한 곳에서 먼저 살아낸 도스토옙스키가 작가로서 더욱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안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선한 인품과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돈 문제와 타고난 작가 천성 때문에 우리가 아는 도스토옙스키, 즉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5대 장편을 썼던 시절의 도스토옙스키는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를 향한 나의 존경이 가능했던 근거가 안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나는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에게 무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정말 아내를 잘 만난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도 모두 위에서 내가 지적한 세 가지 항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을 이유가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는 존재로 만든 동일한 이유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 이런 면에선 그의 존재만이 아니라 아내와의 만남도, 아내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그의 후기 작품들도 모두 기적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한번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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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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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여주인: https://rtmodel.tistory.com/1917

42.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https://rtmodel.tistory.com/1930

43.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by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https://rtmodel.tistory.com/1995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9.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1849

10.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1882

11.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1921

1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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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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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의 순간들이 글이 될 때


안규철 저, '사물의 뒷모습'을 읽고


'뒷모습'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미리 보기로 '책머리에'를 읽었다.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제목이었다. 읽고 나서 생각했다. 아, 이런 단락으로 책을 열다니. 수집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아래에 옮긴다.


|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끊기고 낯선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독일어나 불어에서는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의 글들은 내 안에서 천사가 지나간 시간들의 기록이다. | (4페이지 첫 단락 발췌)


이어지는 단락에서 나는 그가 미술을 전공한 예술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작업실에서 혼자 침묵 가운데 보내는 시간,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단순한 침묵이 아닌 정적의 시간이 찾아올 때 그는 모든 사물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고 적는다. 그 시간이 곧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고, 그는 그 시간 속에서 세밀한 예술가의 눈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성찰하여 그만의 고유한 통찰을 내놓았다. 어떤 분야 전문가의 눈으로 나와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통찰을 이끌어내는 글을 나는 사랑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동일한 사물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재해석되며 때론 새로운 의미까지 부여받게 된다. 미처 몰랐던 그 사물의 존재 의미를 고요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조용히 드러내는 것. 나는 이것이 작가가 해야 할 사명이라 느낀다. 이 책의 저자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이런 면에선 명백한 작가였다. 이렇게 다른 관점에서 우러나온 통찰을 발견한 이상 어찌 읽지 않고 지나칠 수 있으랴.


한 꼭지를 이루는 분량이 A4 한 페이지 채 되지 않는 짧은 단상들의 모음이지만, 나는 여백이 풍부한 이 책을 일부러 천천히 일주일에 걸쳐 읽었다. 짧은 글은 보통 농밀하고 내밀한 경우가 많고 나는 그 농축된 진액을 음미하길 좋아한다. 그러려면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적인 여유가 필수인데 그 준비가 되어 있다면 비로소 저자와 말 없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뒷모습이라는 표현은 그 사물에 대한 고유한 재해석을 의미할 것이다. 기존의 알고 있던 사물의 해석이 아닌 낯설고도 새로운, 그리고 살아온 인생의 굴곡과 흘러간 시간을 관조하며 거치게 되는 재해석은 그 사물의 뒷모습으로 침투하여 본질을 꿰뚫는 힘이 있다. 그 시선에 따른 재해석을 통찰로 우려내어 글로 담아내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나도 나만의 고유한 통찰을 글로 담아 보편성을 깊숙이 터치하는 에세이를 쓰고 싶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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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선집 1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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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의 세계, 내 안의 데미안


헤르만 헤세 저, '데미안'을 다시 읽고 


한때 낙원이었던 세계가 실낙원이 되어 버리는 경험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우리는 변화된다. 누군가에겐 성장이고, 또 누군가에겐 타락이 되고 마는 이 변화를 통해 우린 인생의 여러 변곡점들을 통과한다. 예기치 못한 사건의 발생, 통제 불가능한 상황의 전개, 의지와 상관없이 만나게 되는 소수의 사람들. 우연인지 필연인지, 구원인지 저주인지 확신할 수 없는 일들의 연쇄 속에서 우리가 겪는 이 변화들의 총합은 곧 우리 인생의 방향과 색을 정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과정을 견인하는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우리 자신과 인생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우린 같은 일을 겪어도 다른 인생을 살아낼 수 있고, 다른 일을 겪어도 같은 인생을 살게 될 수 있다. 삶에 순응하며 편하고 수동적으로 살 것인지,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저항하며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낼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 인생의 미분계수는 지금, 여기 나의 생각과 행동에 있다는 이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거울 앞에서 오늘도 나는 나를 비추어 본다. 그리고 나의 현재 삶이 어떠한지 자세히 눈을 감고 관찰해 본다. 나는 진정한 나인가, 남이 기대하는 모습을 흉내 내는 가짜 나인가. 나는 내 삶의 주체인가 객체인가 점검해 본다. 지금은 실낙원이 되어 버린 내 과거의 낙원들을 떠올려보고, 지나온 여러 변곡점들로 돌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시 상념에도 잠겨본다. 참 다행이란 생각, 감사하다는 생각, 그리고 조금은 더 성장한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눈을 뜨고 현재로 돌아온다. 


'데미안'을 세 번째 정독하면서 독자이기보다는 작가 혹은 저자의 입장에서 읽게 되었다. 열 살이었던 싱클레어가 크로머를 만나며 낙원 밖 세계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장면, 그 낯설고 두려운 순간들을 통과하며 싱클레어 내면으로부터 발현되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의 단면들, 그리고 데미안을 통해 홀연히 주어진 구원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 자체보다는 그것의 구조, 저자의 의도, 사건의 상징성, 그리고 그 상징 이면에 놓인 사상 혹은 철학까지 고찰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 결말까지 겉으로 드러난 모든 걸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정독하며 조금은 더 깊이 작품을 읽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두 세계를 생각했다. 부모님이 주축이 된 세계, 그리고 크로머로 상징되는 또 다른 세계. 이름만 다르게 불릴 뿐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두 세계. 이 두 세계는 밝음과 어두움으로, 선과 악으로, 옳고 그름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분법적인 대조이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세계를 접했고 이동하며 성장과 타락을 모두 경험했으며 그 경험으로 인한 깊은 성찰을 통해 나름대로의 통찰도 이끌어내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두 세계가 아닌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새롭게 보였다. 바로 데미안이 속한 세계였다. 


데미안이라는 낯선 존재가 속한 세계는 부모님으로 이뤄진 밝은 세계도, 크로머로 상징되는 어두운 세계도 아니었다. 그 세계는 제3의 외부세계였다. 두 세계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초월하는 세계였다. 그러므로 낙원에서만 살던 싱클레어에겐 크로머만 유혹자가 아니었다. 데미안도 유혹자였다. 그러나 크로머와 데미안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고, 싱클레어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구원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고, 언제나 주체가 낙원을 떠나는 실천을 전제한다. 불행하게도 이 구원이 주어지지 않으면 주체의 성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에겐 오직 타락만이 기다린다. 크로머의 충실한 노예가 되면서 제2의 크로머로 살게 되든지, 아니면 크로머의 세계와 부모님의 세계에 한 발씩 담근 채 적당한 타협을 이루며 살게 되든지. 


싱클레어에게 크로머는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어둡고 강력한 힘의 요체다. 싱클레어의 힘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고 타자의 도움 없인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과 같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어둡고 강력한 존재들을 크로머라고 해석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크로머의 손아귀에 계속 잡혀 있든지, 아니면 부모님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힘에 의지하여 크로머를 제압하고 다시 부모님의 세계로 피신한 뒤 그 자그마한 세계의 평화에 만족하며 평생을 보내든지, 이 두 방법 밖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싱클레어에게는 제3의 세계로 통하는 데미안이라는 이름의 문이 열렸다. 싱클레어에겐 구원의 빛이었다. 나는 이를 축복이라 부른다.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주어진 전적인 은혜라 부른다. 


'데미안'을 진지하게 읽은 독자라면 '모든 인간의 진정한 사명은 자기 자신에 이르는 것뿐'이라는 명제에 수긍하며 각자가 가진 고유한 개성을 발견하고 발현하여 에고가 아닌 셀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기로 다짐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거치며 깨달음과 인식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깊게 성찰할 수 있었고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본성에 이르는 통찰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한 가지가 전제되어야 했다. 두 세계가 아닌 제3의 세계와의 만남 말이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이 전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인 상태로 괴리와 좌절에 함몰될 수 있다. 그 자체가 지옥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헤세는 왜 싱클레어에게 자기 의를 내려놓고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크로머의 개입 사건과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크로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터주지 않았을까? 자녀가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어찌 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을 왜 허락하지 않았을까? 왜 제3의 외부세계에 속한 데미안이라는 존재를 등장시켜 구원으로 시작되는 성장의 서사를 이루어냈을까? 이 길만이 유일한 성장의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야만 정과 반으로만 이뤄진 두 세계가 아닌 정반합으로 구성되는 변증법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데미안이라는 문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에 이르는 구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저마다 다른 고유한 개성을 찾아 진정한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걷는 모든 구도자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소중한 메시지를 붙잡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려는 모든 애씀은 전적인 타자로부터 주어진 낯선 은혜로부터 시작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주체'라는 단어가 주는 자칫 부정적일 수도 있을 뉘앙스도 '타자'와 '은혜'라는 두 단어로 상쇄시킬 수 있다. 우리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에 빠지는 나르시시즘도, 타자를 짓밟고 살아남으려는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미개한 동물적 원리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갖도록 한 창조자의 계획을 성취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편, 크로머 이후 겪는 여러 유혹과 난관들을 통해 싱클레어는 홀로 카인의 표지를 가진 자, 즉 깨어 있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발견하고 발현하려고 애쓰는 소수의 사람으로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물리적으로 데미안은 싱클레어 곁에 없던 적이 더 많았지만, 데미안처럼 싱클레어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한 번 나타난 데미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궁극적으로 싱클레어와 일체가 되기까지 싱클레어의 삶에 똬리를 틀고 그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진정한 구원의 순간은 일회성이 아닌 영원성을 가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주체로 거듭나도록 계속해서 돕는 것이다. 


이번에 '데미안'을 다시 읽으며 새롭게 보인 두 번째 사실은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을 거치는 동안 혼자였다는 것이다. 라틴어 학교에 다닐 땐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학교를 옮긴 이후부터는 줄곧 혼자 살게 된다. 그는 혼자 살며 모든 여정을 겪어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헤세의 의도 한 가지를 추측해 본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도와줄 수도 없으며 철저히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것. 말하자면 방황이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긴 여정은 방황이라는 과정과 정확히 겹치는 것이다. 그것도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철저한 방황 말이다. 


그 과정 중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도 만나게 되고, 크나우어도 만나게 되며, 피스토리우스도 만나게 된다. 각각 어떤 상징을 나타내는 인물들이다. 이번에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는 피스토리우스의 고백에 들어있었다. 싱클레어와 헤어지기 전에 피스토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가 되는 것은 나의 소명이자 목표이지요. 다만 아브라삭스를 알기도 전에, 너무 일찍 만족해 버리고 여호와에게 나를 맡겨 버린 거지요." 아브라삭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양극성을 모두 가진 가상의 존재다. 아브라삭스를 알기 전에 여호와에게 자신을 맡겨 버렸다는 피스토리우스의 고백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자기 삶에서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붙잡게 된다. 악이 무엇인지 모른 채 택한 선, 어두움이 무엇인지 모른 채 거하는 밝음은 허상일지 모른다. 실재이나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모르는 상태가 된다. 방황 없이 더럭 주어진 안정된 삶, 가난 없이 자동적으로 주어진 부, 아픔을 모르고 주어진 탁월한 건강 등으로 해석을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작 힘이 없는 허황된 사상에 갇힌 채 살아가는 피스토리우스를 보며 나의 과거와 현재의 방황을 감사하게 된다. 나아가 미래에 겪을 방황까지도 감사하며 받아들일 자세가 준비된다. 한 세계에 머물던 자에게 어느 날 문득 다가온 또 다른 세계. 그 세계는 위협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계의 개입 때문에 나의 작은 세계는 변화를 겪게 되고 한층 깊고 풍성한 세계로 상승진입하게 된다. 기억해야 할 건 데미안이다. 우리 안에 각인된 구원의 은혜다. 한 곳에 머물며 타자 위에 군림하여 그곳의 왕이 되고자 하는 지극히 동물적이고 인간스러운 욕망을 내려놓고, 내 안의 데미안의 인도를 받고 데미안을 좇으며 나를 알고 나에게 이르는 여정을 당당하게 걷는, 인간다움을 추구하며 언제나 깨어 있는 구도자로서 내 삶을 살고 싶다.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1991

7. 황야의 늑대: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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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 - 인생의 바닥에서 하늘을 만난 사람들
구미정 지음 / 비아토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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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 거듭나는 곳, 하나님과 동기화되는 곳


구미정 저, ‘낮은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을 읽고


제목에 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인생의 낮은 점을 통과한 후 가치관과 신앙관의 변화를 겪었고, 그렇게 만난 죽음과 부활의 기로에서 감사하게도 부활로 인도받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낮은 자리에 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비록 나 같은 경우, 일방적으로, 또 수동적으로 코너에 몰리듯 낮은 점으로 가게 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낮은 점으로 가게 되는 경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곳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그렇게 통과한 이후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향한 삶을 추구하는지 남을 향한 삶을 추구하는지가 관건이지 않을까 싶다. 큰 환란은 악한 사람을 더 악하게 만들 수도 있고 선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환란과 그것을 견뎌낸 것 자체보다 그것을 견뎌내는 과정과 그 과정으로 인해 변화된 현재 삶의 열매가 구원과 부활의 가시적인 증거일 것이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살아있으며 이론이 아닌 실재다.


사적인 경험을 통해 일반화에 이르는 길은 자칫 오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 속에도 보편적인 진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 진리의 눈으로 특수성을 해석할 때의 일반화는 더 이상 오류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개인의 작은 내러티브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더 알게 되며 그분을 더욱더 신뢰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특히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은 그 인물만이 아닌 그 인물을 지으시고 배후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설교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엘리야, 다니엘, 베드로, 바울 등 성경을 이루는 각 책이나 잘 알려진 내러티브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모두 인생의 낮은 점을 통과한 전적을 가진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설교에서 주로 다뤄지는 부분은 이들이 낮은 점에 위치할 때가 아닌, 소위 ‘올려짐‘을 받아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시적인 부나 권력을 갖게 된 모습에 국한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 혹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나와 내 가족이 잘된다는 번영신앙을 대변하는 행태의 연장선상에 아직도 많은 한국교회는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이 아니다. 교회 밖 세상에서 대접받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이유로 버젓이 대접받는 문화,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이 강화되어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이 지배적인 사상과 이념으로 자리 잡은 문화가 견고하게 정착하여 예수가 늘 함께했고 강조했던 소외된 자, 억눌린 자, 약한 자, 우는 자들은 배제되고 차별되며 급기야 희생양으로 이용되고 마는 존재로 치부되곤 한다. 말로는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부르짖지만, 실제 일상에서는 전도와 선교의 효율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모습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정말이지 씁쓸한 교회의 모습이지 않을 수 없다. 예수가 있어야만 하는 곳에 예수가 증발되었으며, 이미 온 하나님 나라는 마치 저 멀리 영원히 가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실 예수님과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마음을 지키기란 한국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복음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사적인 복음에 더욱더 갇혀 버린 그리스도인들. 게다가 반지성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 오늘날에도 부끄러움도 없이 여전히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부추기는 많은 목회자들과 중직자들까지 합세한 모양새는 지극히 비상식적이라 세상을 살려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더 타락시키는 것처럼 보이며 세상의 욕을 다 들어먹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그리스도인이지만 현실의 시선을 고려하면 낯뜨거움을 면할 수 없다. 교회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걸까?


나는 한 가지 답을 이 책에서 찾는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낮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만 보이는 것들을 직접 보고 느끼고 다시 가치관과 신앙관을 돌아보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의 복음이 아닌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는 가변적인 사상과 이념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회심하는 것이다. 기름진 배를 안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낮은 자리는 편리함과 게으름과 말초적 유희에 길들여진 자들에게는 보이지도 열리지도 않는다.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에 함몰되어 있어도 마찬가지다. 책 속에서 저자가 사용한 표현대로 예수의 시선에 동기화를 함으로써 더 이상 기존 세상의 눈이 아닌 예수의 눈으로 복음의 눈으로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강자가 아닌 약자의 눈으로, 울리는 자가 아닌 우는 자의 눈으로, 억누르는 자가 아닌 억눌린 자의 눈으로, 즉 낮은 자리에 처한 사람의 눈으로 나와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교용으로만 들렸던 혹은 설교용으로만 전했던 전복적인 예수의 말씀들이 그제야 실체를 가지고 귓가에 울려 퍼지고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으로 여겨지기 시작할 것이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적인 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진리가 진리로 들리게 되고, 마침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창세 전에 계셨던 말씀, 하나님 본체라는 영적인 깨달음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전적인 인정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압도되어 비로소 눈이 열리게 되며 새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 속 낮은 자리에 처해진 여러 인물들을 소환하여 과거와 현재 인류가 벌인 악의 역사와 연결하고 성찰을 거쳐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소중한 통찰을 선보인다. 기독교윤리 전공자답게 시간과 공간이 상이한 성경 속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지금 여기’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들여다본다. 한강 작가의 말을 빌려 과거(성경 속 이야기)가 현재(오늘날 세상)를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낮은 자리에 처한 사람들이었다고. 그렇다. 낮은 자리는 실패한 자리가 아니다. 그곳은 다시 시작하는 자리다.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처럼 부활하는 자리다. 죄와 악에 물든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관찰하고 성찰한 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로 동기화되어 다시 세상 속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출발하는 자리다. 그곳엔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기를 낮추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고 유독 마음속에 깊이 담긴 단어가 있다. ‘섬김’과 ‘공공성’이다. 이 두 단어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오다가 한계를 만났고 무너졌었다. 그러나 그 낮은 곳엔, 다른 성경 속 인물들처럼, 하나님이 계셨다. 그로 인해 나는 회복할 수 있었으며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며 남은 생을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으로 살아가길 서원했다. 낮은 자리에서 붙잡은 이 두 단어는 조금씩 내 일상에 스며들고 있으며 아주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다. 실패로만 보였던, 어둡게만 보였던 낮은 자리는 은혜의 자리였고 새 출발의 자리였으며 나의 정체성과 사명을 가다듬는 소중한 자리였다. 힘들 때마다 불안할 때마다 나는 이 시절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동기화되는 시간이다. 부디 남은 삶도 이 연장선상에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게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통찰을 함께 건네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두 주인을 놓고 여전히 분주한 마음속에서 갈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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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
박순주 지음 / 정은문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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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낸다는 것


박순주 저, '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를 읽고


처음 들어보는 '진보초'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이었을까? '거대한 서점'이라는 수식어구 때문이었을까? 나의 궁금증은 결국 이 책을 구하게 만들었다. 밀린 것들을 처리하고 마침내 여유가 생긴 날,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장에 꽂힌 이 책을 손에 들고 읽어나갔다. 다 읽고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흥미로웠다는 것. 다른 하나는 부러웠다는 것. 어부지리로 진보초라는 곳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동경도 생겨버렸다. 


먼저 이 책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백여 군데가 넘는 고서점들이 밀집된 지역이 21세기 오늘날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책을 사랑하는 나는 어떤 형태로든 오프라인 서점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외국 여행을 할 때에도 근처에 서점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구경하려 애쓴다. 생소한 언어라도 상관없다. 그 어떤 언어로 쓰였다 하더라도 책은 책이기 때문이다. 책은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는 고유한 그 무엇이며, 단순한 텍스트가 적힌 종이 묶음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 책이 특히 놀라웠던 점은 우리가 흔히 (아니, 이제는 가끔이라고 해야겠지…) 보는 동네서점처럼 신간 위주로 판매하는 서점도 아니고,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에 종종 방문하여 책에 대한 환상과 책 냄새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던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처럼 중고책을 주로 판매하는 서점도 아닌, 오래된 책, 즉 고서를 위주로 판매하는 서점이 백 군데도 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골동품, 엔틱, 진귀품이라 불러도 좋을, 오래전에 출간된 책들이, 다시 말해 절판된 지도 이미 오래된 책들이 버려지지 않고 그것들만의 역사를 머금은 채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팔릴까, 이 고서점 주인장들은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을까, 등의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확인하고 감동한 건 그들의 사명의식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그 책들을, 그 책들이 모인 고서점들을, 그 고서점들이 밀집된 진보초를 지켜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인터넷 발달로 인해 온라인 판매와 전자책의 보급으로 고서점만이 아닌 세계 모든 서점들이 예전보다 경기가 나빠졌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일 텐데도 그들은 지금도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면서도 빈틈을 찾아내는 전략으로 이 아름다운 유산들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문화 및 사명의식이기에 나는 흥미롭다는 인상을 넘어 고결하다는 느낌과 더불어 부럽다는 생각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셰어형 서점'이라는 컨셉이 인상적이었다. 서점에 들어가면 수많은 책장들이 손님들을 반긴다. 보통 모든 책장들은 그 서점의 소유다. 그러나 '셰어형 서점' 안에 위치한 책장들은 각기 다른 주인을 가진다. 일정 기간 대여하여 원하는 책들을 진열하고 판매할 수 있는 형식인 것이다. 일인 출판사나 뜻이 있는 작가 등 누구나 자기만의 서점을 가질 수 있는 셈이다. 책의 유통구조가 한국에선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이 독특한 컨셉이 한국에서도 적용된다면 적어도 독자 입장에서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공간 안에서 여러 출판사와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만남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북콘서트나 소규모 강연들이 병행된다면 사라져 가는 독서 문화를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이라는 것이 어느새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간다는 사실이 슬프다. 물론 진보초의 경우 고서 위주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확장해서 고려해 볼 때 지켜내야 할 것은 고서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면 더욱 서글프다. 인터넷과 동영상과 스마트폰의 발달과 보급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책을 읽지 않는다. 나는 책이 단지 정보라는 명제는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정보를 넘어선다. 동영상이 주지 못하는 많은 소중한 것들이 책에 있다 (이 감상문에서 그것들을 나열하기에는 부적절하니 기회가 되면 정리해서 포스팅할 예정이다). 유산이라 할 그 무엇이,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한 가시적인 실체가 바로 책이 아닐까 한다. 책을 지켜내는 사람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이고, 이들을 응원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진보초의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 지켜낸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은문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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