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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의 회고록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지음, 최호정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8년 7월
평점 :
인간 도스토옙스키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을 읽고
러시아의 대문호, 19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광기어린 천재 등 도스토옙스키를 수식하는 문구들은 한결같이 최정상의 탁월함 혹은 비범함을 나타낸다. 명실상부 인류를 대표하는 작가 혹은 인류의 유산 리스트에 올려도 반대할 사람 없을 작가 도스토옙스키. 그를 작가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숭배하고 사랑하고 보살폈던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15년간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했던 나날들에 대한 안나의 기억들을 담고 있다. 기술적으론 안나의 회고록이지만 이 책에서 독자들은 안나만이 아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안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이렇게 불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성이니까)를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가깝고 친근하게 만날 수 있다. 안나가 일인칭 관찰자로 등장하여 도스토옙스키 바로 곁에서 그의 작품 밖 일상을 서술한 책이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작가 도스토옙스키만이 아닌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대면할 수 있다. 이 고유한 특징만으로도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매핑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등으로 이미 오래전에 석영중 선생님으로부터 친절한 소개와 안내를 받아서인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가득 채우며 안나가 묘사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모습들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전작을 거의 다 읽은 (일부러 몇 작품은 아껴두고 있는 중) 나의 눈에 비친 그 모습들은 저 위에서 홀로 빛나는 천재 작가의 이미지보다는 한 여자를 아끼고 헌신하고 사랑했던 남편, 아이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아버지, 그리고 가능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사려 깊고 친절했던 한 명의 어른으로 다가왔다. 안나의 눈과 마음을 통해 나는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아닌 인간 도스토옙스키, 즉 한 여자의 남편이자 , 네 자녀 (두 자녀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의 아버지이자, 간질 (뇌전증)이라는 지병에 평생을 시달렸고, 폐질환이라는 질병에 생의 무릎을 꿇은, 유한한 육체를 가진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몇 주에 걸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점 세 가지만 추려볼까 한다. 이 세 가지는 내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책을 통해 다시 숙지하며 감동한 도스토옙스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도스토옙스키, 나아가 나의 보편적인 인간과 인생에 대한 관점을 모두 아우르는 사항들일 것이다.
첫째, 도스토옙스키의 인품에 대해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 불리는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은 독자들에게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사람일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각 작품에서 받은 인상에 기반해서 심오하다거나 무겁다거나 어둡고 냉철하다거나 심지어 괴팍하다는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절반은 그랬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안나의 눈에 비치고 마음에 담기고 입으로 고백된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생각한 나머지 절반, 그러니까 사려 깊고 선하고 고결하며 어린아이 같은 순박함을 머금은 어른이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자체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로지비 (Holly Fool, 바보성자)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베리아 유형 전후 그의 모습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을 거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안나를 만난 이후 그의 모습은 정말 인간다웠던 것 같다. 아내를 대하는 모습에서나,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한결같이 그는 따스하고 자상했으며, 심지어 그를 모함하고 이용해 먹는 파렴치한 친지들에게조차 그는 선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늘 지니고 있었고 고통받았던 간질병 (뇌전증) 때문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느라 그랬던 게 아니냐고 누군가는 따질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안나에게 비친 도스토옙스키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지병 때문에 그는 자신을 더 낮추었던 것 같고, 그것 때문에 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 같으며, 또 그것 때문에 육체와 같은 가시적인 물질이 아닌 마음이나 정신, 영혼 혹은 본성 같은 비가시적인 것들을 더욱 깨끗하고 세심한 눈으로 관찰하고 성찰하여 깊은 통찰을 이끌어냈던 것 같다. 자신의 약점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들이 그에게는 오히려 인간의 중심을 꿰뚫는 길의 역할을 해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둘째, 돈 문제에 대해서다. 도스토옙스키가 궁금해서 인터넷 등을 통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본 독자라면 그가 얼마나 경제적인 궁핍에서 평생을 살았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내만큼 이 문제에 대한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안나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불과 몇 년 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빚을 진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나 역시 절반은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도박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편집자를 잘못 만나 이용당했기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빚은 친형의 죽음 이후 그 가족들 모두를 부양했기 때문이고, 첫 번째 아내가 죽고 남긴 의붓아들 파벨을 책임졌기 때문이며, 도스토옙스키가 따지지도 않고 잘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그 선함을 되려 이용해 먹는 친지들이 요구하는 돈을 거절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두 충족시켜주려 했던 도스토옙스키의 태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선한 인품이 그와 그의 가족 (아내와 친자식들)을 평생 궁핍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그나마 안나가 지혜로운 대처를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스토옙스키는 죽는 그날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 자식에게까지 빚을 물려주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방면에서 안나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주었지만, 적어도 돈 문제에서만큼은 안나가 그의 구원자였던 것 같다.
셋째, 그의 작가 천성에 대해서다. 그의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가장 곁에서 지켜본 아내의 고백으로도 도스토옙스키는 타고난 작가였다. 그의 삶은 읽고, 쓰고, 산책하는 일상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도스토옙스키는 규칙적이고 치열하게 다방면의 글, 이를테면 분야나 언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을 읽었고, 늘 밤 11시경부터 새벽 3시경까지 치열하게 썼으며, 저녁 먹기 전과 후에 늘 장거리 산책을 즐겼다. 지병에 시달렸고 말년에 가서는 폐질환까지 겹쳐서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책하는 시간만큼은 사수했다. 그의 산책은 단순한 걷기를 넘어 작품 구상은 물론 새로운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그것을 흡수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과 통합하는 성찰,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종합하여 끌어내는 통찰을 지속하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글은 책상 위에서 탄생한 게 아니라 산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삶을 시간과 공간이 상이한 곳에서 먼저 살아낸 도스토옙스키가 작가로서 더욱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안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선한 인품과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돈 문제와 타고난 작가 천성 때문에 우리가 아는 도스토옙스키, 즉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5대 장편을 썼던 시절의 도스토옙스키는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를 향한 나의 존경이 가능했던 근거가 안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나는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에게 무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정말 아내를 잘 만난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도 모두 위에서 내가 지적한 세 가지 항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을 이유가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는 존재로 만든 동일한 이유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 이런 면에선 그의 존재만이 아니라 아내와의 만남도, 아내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그의 후기 작품들도 모두 기적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한번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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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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