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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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앞에서 미적대는 인생


나쓰메 소세키 저, ‘태풍’을 읽고

태풍은 아무래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고,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그것이 한 장편소설의 제목으로 선정된 경우라면 독자는 그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쓰메 소세키는 왜 이 작품 제목을 태풍이라고 했을까.

거센 태풍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작품엔 충격적인 사건이나 상황이 전무하다. 소설이라는 특별한 세계에선 꽤 흔해 빠진 살인, 자살, 치정, 불치병, 혹은 출생의 비밀도 없다. 뚜렷한 위기, 절정, 해소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전체를 꿰뚫는 스토리텔링도 없다. 작품 평을 하자면 밋밋하다 못해 고요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는 소설이라는 말이다). 단, 이러한 결론은 소설 표면에 드러난 정황으로만 볼 때 그렇다.

그러므로 이 작품 속 태풍의 의미는 등장인물의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은 그들의 인생을 대변할 정도로 깊고 치열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눈도 바로 여기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은 세 명이다. 시라이 도야, 나카노 슌타이, 그리고 다카야나기 슈샤쿠. 모두 문과 출신이다. 시라이는 다카야나기가 학생일 때 이미 교사였던 적이 있을 만큼 연배가 많이 차이 난다. 나카노는 다카야나기와 동기다. 

굽힐 줄 모르는 지조를 문학이라는 학문에 온전히 적용하며 살아온 시라이 도야에게 문학은 곧 삶 그 자체다. 삶은 인간 세상이기에 인간 세상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자라고 그는 믿는다. 한적한 곳에 여유 있게 앉아 붓이나 놀리는 자를 그는 감히 문학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믿는 대로 생각, 말, 행동에 모순 없이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모순 없이 살아가는 그조차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탓일까. 가난은 그의 평생 동반자였다. 가난은 그의 모순 없는 문학에 대한 지조와 같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원적이라 할 수 있는 모순을 불러일으켰다. 먹고사는 문제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문학자는 가난해야만 하는 걸까. 둘 다 취할 순 없는 걸까.

자발적인 선택으로 흙수저의 길을 당당히 걷는 시라이 도야와는 달리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금수저의 길을 받아들이고 여유 있게 걸어가는 인물은 나카노 슌타이다. 그렇다고 나카노가 철저히 물질적이진 않다. 전형적인 재벌 2세의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작품 속에서 나카노는 셋 중 가장 세련되고 사리 분별을 잘하는 청년으로 그려진다. 그는 대학생 때 수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자발적인 비관주의자이자 스스로 외톨이가 된 다카야나기를 끝까지 챙기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비록 문학에 있어서는 별 열정이 없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열정 없음의 배경은 곧 그의 재력이라는 것을 독자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아마도 시라이 도야의 세계관으로 바라볼 때 나카노는 진정한 문학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돈에 의지하여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기득권 세력이자 문학을 그 하위에 두고 취미 정도로 삼는 사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론 시라이 도야와 같은 선상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카노 슌타이의 여유 있는 삶을 동경하며 둘 사이의 경계에 선 채 스스로를 세상에서 고립시켜 외톨이가 된 인물이 바로 다카야나기 슈사쿠다. 작품은 시라이 도야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다카야나기를 전체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작품을 이해하는 편이 이 작품을 그나마 잘 감상하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시라이 도야를 중심인물로 삼기에 그는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왼쪽 어깨엔 검은 악마가, 오른쪽 어깨엔 하얀 천사가 앉아 있는 인물의 갈등이 필수인 법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비록 나카노는 시라이 도야의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다카야나기의 눈에는 충분히 그랬을 법하다. 그의 눈에 시라이는 고고한 문학자, 나카노는 여유 있고 멋진 삶을 살아가는 재력가로 비쳤을 테니까. 비판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존재가 다카야나기에겐 나카노였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여전히 젊어서 시라이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회가 있었을 테니까.

이 작품은 문학을 넘어서 모든 학문에 적용 가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학자의 길과 재력가의 길은 결코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다. 물론 훌륭한 학자가 경제적으로 풍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풍족이 학자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아마 모든 학자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태풍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아마도 태풍은 순수한 학자의 자세를 견지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시대적 흐름, 그중에서도 자본주의 혹은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다시 말해 학문의 순수성을 오염시키고 마치 자본이 학문 위에 군림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는 시대의 조류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의 말미 시라이가 연설하는 장면에서 이는 도드라진다. 돈을 좇는 사람과 진정한 문학가를 대비시키며 그는 강조했다. 두 영역은 서로 다른 것이며, 절대 돈이 학문 위에 설 수 없다고. 태풍처럼 밀려드는 시대의 조류에 저항해야 한다고. 언젠가는 진정한 문학가의 존재가 돈보다 더 가치 있게 다루어질 날이 도래할 거라고. 

시라이는 과연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진정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고 나는 조용히 묻게 된다. 시라이의 진정한 문학자를 위한 극단적인 삶의 태도는 자신의 아내에게까지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게 만들었다는 점은 내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는다. 아내는 문학자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주부인데 말이다. 진정한 학문을 위해서는 아내와 가족이 모두 희생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 오늘날 현실을 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학자들의 등잔 밑은 상대적으로 밝지 않다. 가족들의 희생 없이 그들의 성공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늘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적대며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태풍을 감지했지만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3. 산시로: https://rtmodel.tistory.com/1547
4. 태풍: https://rtmodel.tistory.com/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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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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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성장인가


나쓰메 소세키 저, ‘산시로’를 읽고

나쓰메 소세키는 다면체의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인 것 같다. ‘마음’에서 만났던 그의 글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만나지 못했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실망감으로도 상실감으로도 다가왔다. 물론 그의 탁월한 필력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나는 ‘산시로’에서 또 다른 모습의 나쓰메 소세키를 만났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다는 '마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으나 결코 같지 않다. 만약 작가의 이름을 손으로 가려놓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읽었던 그의 세 작품이 서로 다른 세 작가로부터 쓰인 거라고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등장인물 이름이 제목으로 된 작품을 좋아한다. 이름은 강한 메시지를 표출하지 않는다. 덕분에 책을 읽기 전 선입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작가의 뜻에 영향받지 않은 채 비교적 객관적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다 읽고 나서는 작품의 내용을 제목으로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 ’산시로‘ 역시 제목이 주인공 이름이다.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읽어볼 작정을 한 이후 가장 먼저 이 책을 선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이 제목으로 된 작품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산시로라는 인물의 일상을 다룬다. 그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청년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산시로는 공부를 잘했는지 도쿄제국대학 문과생으로 입학한다. 작품은 산시로가 기차를 타고 도쿄로 오는 순간부터 기록된다. 기차에서 만난 한 여자와의 기이한 만남은 산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배짱도 없고 미성숙한 풋내기 청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산시로라는 한 미성숙한 촌놈이 상경하여 여러 사람과 사건을 만나며 성장해 가는 모습을 담고 있을까. 헤세의 작품에서 잘 드러나는, 한 마디로 성장소설에 속하는 작품일까. 작품을 다 읽고 나는 이 질문에 이렇다 할 답을 내리지 못한다. 무엇보다 소설 말미에 가서도 나는 산시로가 성숙해진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흔한 성장통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미네코라는 한 여자와의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관계의 여러 단면에서 단편적이고 상징적인 몸짓과 말로써 이게 성장통의 한 부분이구나, 하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시대와 문화의 차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읽어온 일본 문학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세 가지 요소를 나는 죽음 (이중 대부분은 자살), 성 (여성 입장에선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을 부분들이 상당수), 그리고 이념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젊은이들과 지식인들 사이의 갈등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 ‘산시로’에서는 묘하게도 첫 번째 요소인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다. 세 번째 요소인 ’이념‘도 강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두 번째 요소인 ’성‘이 전면에 드러나 있지도 않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쓰메 소세키가 주안점을 둔 산시로의 성장 과정에는 ’성‘이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나 싶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산시로가 기차를 타고 도쿄로 오는 중 생판 모르는 여자와 만나 어쩌다가 한 싸구려 모텔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 여자는 부끄러워하거나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산시로가 목욕하는 도중 슬며시 들어와 등을 밀어준다는 말도 자연스레 건넨다. 부끄러움과 어색함과 긴장은 모두 산시로의 몫이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벌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룻밤이 지나고 헤어지며 여자가 남기는 말이 가관이다. 아무래도 나쓰메 소세키가 이런 기이한 만남을 소설 앞부분에 등장시킨 이유도 바로 이 문장에 함축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

이 문장에 저자의 강한 메시지가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말을 듣은 산시로의 반응 때문이다. 여자는 히죽 웃었고, 산시로는 플랫폼 위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기차 안으로 들어서자 양쪽 귀가 더욱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는 지난 23년의 약점이 한꺼번에 드러난 듯한 심정이 된다. 부모라도 그렇게 정곡을 찌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저자의 논평과 함께. 

‘배짱이 없는 놈’.‘ 왜 저자는 산시로에게 이런 인상을 심어준 것일까. 미성숙하다는 점을 나타내기에는 이런 것들 말고도 여러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텐데 말이다. 여성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 자게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고 아무 일도 없이 잠만 잔 행동이 배짱이 없다는 말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쓰메 소세키는 산시로가 처음 만난 여자와 섹스라도 하길 기대했던 걸까. 섹스를 했다면 과연 그 여자는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라고 평을 했을까. 한국 정서에 물든 나로선 인과관계에 있어서나 정서에 있어서나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것 말고도 저자는 산시로의 성장을 또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상황을 전개해 나간다. 이번엔 미네코라는 여자다. 학교 안에 위치한 우물 옆에서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난다. 말하자면 한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산시로의 옆에서 미묘한 거리를 조절해 가며 그의 곁을 맴돈다. 어떻게 보면 미네코는 산시로에게 은연중 꼬리를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기차에서 만나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낯선 여자가 미네코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것 같은 인상도 풍긴다. 산시로는 이번에도 미네코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수줍고 어색한 모습으로만 응대하게 된다. 그러다가 책의 말미에 가서 미네코는 제3의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산시로는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마찬가지로 혼자 남게 된다.

산시로와 미네코와의 관계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과연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산시로가 배짱이 두둑하고 촌놈이 아니었다면 미네코에게 직접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산시로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일까. 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또 여전히 아닐 것이라 답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자가 나와는 상이한 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특히 청년의 성장에 있어서 성이 대표적인 도구로 쓰이는 것 같다는 사실이 나는 불편하기만 하다. 가부장적인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서도 그렇고, 여자의 인생을 남자가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져서도 그렇다. 어떻게 여자를 대하는지 여부가 한 남자의 성장을 평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성 말고도 저자는 두 지식인을 등장시켜 사상적으로 사회적으로 산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만든다. 그러나 아무래도 성의 역할보다는 미약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여줬던 나쓰메 소세키라면 철학적인 고민과 갈등에서도 충분히 산시로의 성장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 작품에서 그런 것들을 찾지 못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아무래도 나는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다는 어른이 되면서 겪는 생각의 변화에서 인간의 성장 징후를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이 책을 다 읽고도 마치 다 읽지 못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어쩌면 이런 기분이 저자가 원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나쓰메 소세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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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84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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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과 인간세계


나쓰메 소세키 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


“나는 고양이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의 화자는 놀랍게도 고양이다. 상식적으로는 현실세계 고양이가 말을 할 리 없다. 게다가 장르가 소설이니만큼 이 고양이는 작가의 생각과 말을 전달하는 의인화된 매개체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발적인 첫 문장 (알다시피 제목도 같다)으로 운을 떼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과연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우물 안에선 우물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객관성이 결여된 판단은 신뢰도가 떨어진다. 이와 같은 시선으로 이 작품을 해석하면 어떨까. 우물을 인간세계로 대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세계 안에선 인간세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이를 조금 더 풀자면 이렇게 쓸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인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말과 글을 사용하고, 생각하고 의심하고 묻고 따지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가 인간밖에 없으므로 이 말은 결국 실행 불가능한 말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누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에겐 이성도 주어졌지만 상상력도 주어졌다. 상상력을 이용하면 불가능한 많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인간의 뇌는 잘 속고, 또 마음만 먹으면 의지적으로 속일 수도 있기 때문에 상상력을 잘만 이용하면 우린 언제든지 가능성의 무한한 세계로 나아가서 탐험하고 또 여행할 수 있다 (이는 문학, 특히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화자가 고양이라는 점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이 아닌 존재의 눈과 귀와 입으로 인간과 인간세계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말없이 녹화된 일상 속 자기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게 될 때 느껴지는 상이함 혹은 야릇한 거리감의 다른 이름은 객관성일 것이다. 이 작품엔 고양이의 눈에 담긴 인간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화자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인간은 종종 나 자신으로 환원, 수렴되기도 하기 때문에 우린 이 작품을 읽으며 스스로를 관찰, 성찰할 수 있는 의외의 기회까지 얻게 된다. 나는 바로 이 점이 나쓰메 소세키가 이 작품을 통해 의도한 바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이 가진 또 한 가지 매력은 풍자와 해학이다. 화자인 고양이는 그냥 야옹야옹 대는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다. 인간처럼, 아니 평범한 인간을 넘어선 비범한 존재로 그려진다. 사실 이 부분이 작품 속에서 사뭇 진지하게 과장되곤 하는데, 이는 독자의 폭소를 자아내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천재적인 필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고양이는 등장인물들에겐 그저 여느 고양이로 보이지만, 실은 생각하고 의심할 줄 알뿐 아니라 해박한 지식까지 탑재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물론 고양이의 역사까지 꿰찬 듯한, 웃지 못할 부분도 군데군데 등장한다. 특히 이 고양이가 기거하는 집주인 진노 구샤미 선생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고양이 화자보다 못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듯해 보인다. 몸은 고양이이지만 정신만은 인간계를 넘어 신계에 속한다 할 수 있을 만큼 이 고양이 화자는 해박하고 노련한 베테랑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풍자와 해학은 그것이 겨냥하는 것들을 충분히 이해, 통찰한 이후에나 가능하다. 이해 없는 풍자는 빈정거림일 뿐이고, 통찰 없는 해학은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에 불과하다. 이름도 없는 이 고양이 화자는 마치 산속의 도인처럼 비치기도 하고, 모든 학문에 두루 능통한 이후 일선에서 물러난 은퇴 학자로 비치기도 하며, 인간의 숨겨진 욕망, 본능, 심리를 알아채고 모든 인간사를 경험한 듯한 신적 존재로 비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자기가 고양이라는 한계를 인지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선 마치 독자인 우리 인간들이 그동안 몰랐던 고양이 세계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듯한 묘한 인상마저 받게 된다. 묘하다는 말이 이상하게도 잘 어울리는 동물 중 하나가 고양이일 텐데, 이 작품은 그 말에 신비감을 더하는 효과도 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존재이지만, 이 고양이 화자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 모두를 거뜬히 넘어서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단, 열린책들 양장본으로 500 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다, 기승전결과 같은 소설의 기본적인 형식이 존재하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긴 호흡으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이 작품을 읽고 싶다면 당연히 처음부터 읽으라고 권하겠지만, 중간중간에 집중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은 나도 한 달이 넘도록 읽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비로소 어젯밤에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작품만이 가진 독특하고 고유한 시선과 나쓰메 소세키의 탁월한 필력을 맛보고 싶다면, 그리고 인간으로서 인간을 한 번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성찰을 경험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나는 이 작품을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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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 -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조지 오웰 자전소설
조지 오웰 지음, 자운영 옮김 / 세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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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 가지는 힘

조지 오웰 저,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을 읽고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의 자전소설이자 첫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제목에서 묘사하듯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의 빈민가, 그리고 그 안에서 전전긍긍하며 무의미한 하루를 겨우 연명하듯 살아가는 부랑자들의 실상을 낱낱이 보고한다. 르포르타주는 아니지만 이 책에 보고된 정보들은 모두 직접 체험하지 못하면 절대 알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지극히 사실적이다. 실제로 조지 오웰이 파리와 런던의 빈민가를 체험하고 그 체험담을 소설로 풀어쓴 글이기 때문이다. 30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작품은 시종일관 가난과 궁핍, 그 가운데서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의 삶에 대한 작가의 고찰을 담고 있다. 

세상엔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과 경험해도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극빈층의 일상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작가의 상상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방관자나 연구자의 눈으로 실행한 취재 혹은 보도자료로도 써낼 수 없는 이 작품은 함부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담고 있다. 비록 작가가 직접 경험했지만 다 알 수도 없고 또 다 설명할 수도 없는 현장이 가지는 힘이리라.

공교롭게도 조지 오웰의 작품은 여태껏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동물농장이나 1984도 모두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만 기억이 있다. 작가의 문체랄까 글이 담고 있는 뉘앙스랄까 하는 것들이 그 당시의 내 정서와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의 자전소설을 읽고 조지 오웰이라는 사람을 조금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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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 - 읽고 쓰기에 대한 다정한 귓속말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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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과 같은 첫 문장: 소설가는 따라갈 뿐


오가와 요코 저,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을 읽고

소설에서 첫 문장은 사람의 첫인상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첫인상이 좋아도 지나고 봐야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듯, 첫 문장이 아무리 좋아도 그다음 문장들이 형편없으면 그 소설은 요란한 빈 깡통, 혹은 서두에만 잔뜩 힘이 들어간, 허세에 부푼 초보 작가의 어설프고 허술한 글이 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둘 다 일리가 있다. 사실 둘은 상반되지도 않는다. 첫인상만 좋고 본모습은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그런 유형을 경계하라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강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은 결코 첫인상만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며, 첫인상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결코 첫인상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둘은 똑같은 말을 다른 각도에서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컨대 어쨌거나 첫인상은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첫 문장 역시 중요하다는 것. 그러나 그것만이 사람이나 글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진 않는다는 것. 

쌀로 밥 하는 말일지도 모르나 첫 문장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책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장은 첫 문장에 이어서 나오게 된다. 특히, 여러 소설가의 고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소설가는 저 앞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모든 걸 미리 계획하고 설계하면서 이끌어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특정한 시공간과 그 시공간에 내던져진 등장인물을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십, 수백 혹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글 한 편의 포문을 여는 첫 문장은 빛이 있으라 하는 신의 명령에 빛이 생겨나듯 작가에 의해 새겨진 백지 위의 첫 검은 활자로써 뒤이은 모든 이야기를 꿰는 첫 단추일지도 모른다. 이는 작가도 자신이 쓴 첫 문장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며, 그 문장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문장들을 놓치지 않고 주워 담은 결과가 하나의 완성된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한 여기서 우린 한 걸음 더 나아간 독법을 다음과 같이 구사할 수도 있다. 첫 문장은 소설의 주제문이라든지 상황이나 등장인물을 압축해서 표현한, 가장 나중에 쓰이는 문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처음 쓰인 문장으로써 그 문장 때문에 소설의 주제도 생성되고 상황이나 등장인물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즉, 소설의 전개와 결말까지 첫 문장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것.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니라 따라가며 포착한다는 소설가에게 첫 문장은 바로 그들이 따르는 이야기의 선두에 위치하는 그 무엇인 것이라고.

오가와 요코의 대표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쓰이게 된 사전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을 따르며 그녀가 세 차례 강연한 내용을 담은 이 책에서 그녀가 하는 말도 내가 아는 소설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가는 따라간다는 것. 주제를 먼저 설정하고 소설을 쓰긴 어렵다는 것. 작가는 스토리를 짓지 않고 포착할 뿐이라는 것. 작가는 그저 누군가가 떨어뜨린 기억의 조각을 주워 모아 그 사람이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어쩌다 가지게 된 언어라는 수단으로 소설로 쓸 뿐이라는 것. 그러나 한 가지 내게 묵직하게 와닿은 문장 하나도 남긴다. 소설은 언어로 쓰는데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것. 여기서 나는 모순을 느끼면서도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숙명이랄까 치명적인 매력이랄까 하는 것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된다.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묘한 위안을 얻게 된다. 소설이야말로 철학, 신학, 인문학 할 것 없이, 그리고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포착하여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티라미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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