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 - 시리아 내전에서 총 대신 책을 들었던 젊은 저항자들의 감동 실화
델핀 미누이 지음, 임영신 옮김 / 더숲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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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서 저항하기 위하여.


델핀 미누이 저,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읽고.


이 책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시리아 내전에서 총 대신 책을 들었던 젊은 저항자들의 감동 실화”


그랬다. 이 함축적인 하나의 문장이 책의 거의 전부를 담고 있었다. 나는 딱히 덧붙일 말이 없다. 현실에서 있을법하지 않은 일이 공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뒤늦게 깨닫게 될 때 느낄 수 있는 묵직한 한 방의 울림. 제삼자의 입장에서 고작 인터넷 뉴스 기사 몇 편으로 시리아 내전의 참혹함을 대충 주워들은 나는 이 책이 주는 무게를 감당할 재간이 없었던 것 같다. 더 깊은 공감을 하지 못함이 송구스럽기만 하다.


기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델핀 미누이는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만들고 운영하며 책을 손에 놓지 않았던 시리아 젊은이들의 몸짓을 향해 감히 ‘매력적인 저항’이라고 표현했다. 총과 폭탄을 앞세운 폭력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라져 가는 시공간. 그 시공간의 지하에는 보이지 않는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책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의 좌표를 바로 알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내고 있는 그들의 조용한 몸짓. 그들의 삶은 조용하지만 묵직했다. 제한되었지만 갇히지 않았고 오히려 무한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폭력에 피하고 숨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두려움과 현실과 무지에 저항했다. 


그들의 이러한 몸부림을 보면서 누군가는 그들이 마침내 현실감각을 잃고 몽상을 갈구한다고 함부로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두꺼운 역사책과 시와 소설이 담긴 문학책 등을 그 참혹한 폐허 가운데 읽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어제는 앞집 아저씨가 총에 맞아 죽었고, 오늘은 옆집이 폭탄에 맞아 가족 모두가 죽어나가는 현실에서 당신은 과연 숨어서 뉴스를 읽을 것인지, 아니면 역사와 문학을 읽을 것인지. 죽음이 바로 코 앞에 다가와있는 상황에서 현실감각을 키운다고 뉴스를 한 자라도 더 보는 게 과연 무슨 도움이 될까. 오히려 과거에 그 지옥과도 같은 비슷한 현실을 살아내고 이겨낸 사람들의 실화가 담긴 역사나 인간의 본성이나 심리가 깊이 투영된 문학작품, 소망의 메시지를 담은 시와 소설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시사에 능통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쩌면 살 만하니까,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가거나 무미건조한 삶 위에서 부유할까 염려가 되니까 가능한 게 아닐까. 현실에 눈을 제대로 뜨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다라야 지하에서 연명하던 사람들의 상황처럼 이미 현실에 눈을 뜨고 말고 할 정도를 훌쩍 넘어선 상황에서도 과연 그 논리가 유용할까. 오히려 저 너머를 꿈꾸거나 삶의 끝까지 간 사람처럼 회한에 잠긴 채로 머물지 않고 아이처럼 새롭게 꿈을 꾸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처절한 현실에서 평화와 자유를 소망하는 방법에는 신문이 아니라 책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현실감각보다는 우선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다라야를 무사히 벗어나서 새로운 삶의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그들이 침몰하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들이 만들고 누렸던 지하 비밀 도서관의 힘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폭력이 가져오는 공포와 두려움에 침몰되지 않기 위하여, 참혹한 현실에서 소망을 잃지 않기 위하여, 잠들지 않고 깨어서 저항하기 위하여. 바로 이것이 우리가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시리아 내전 상황에서 고통당했던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도 유효한 메시지일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3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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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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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시작.

요시모토 바나나 저, ‘키친’을 읽고.

미카게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녀는 부엌을 보고 그 집이 어떤지 파악한다. 낯선 곳에서도 부엌과 친해지면 어려울 게 없다. 부엌은 그녀에게 있어 집이자 안식처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도, 숱한 삶의 냄새도 부엌은 항상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흡수하고 소리 없이 들려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갔다. 일찌감치 고아가 된 이후 미카게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할머니마저도 죽자 미카게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살아남은 건 미카게와 할머니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부엌이었다.

이사하기 전 반년 정도 머물렀던 유이치의 집에서도 그녀를 가장 반겼던 건 부엌이었다. 그녀는 낯섦 가운데서도 그 집의 부엌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부모도 조부모도 모두 사라진 상황, 죽음이 다소곳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상황. 그녀는 일어나 부엌을 청소하고 요리를 시작했다. 부엌은 다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자의 흔적이 아닌 현재 살아있는 자의 생기로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마음껏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이치와 그의 엄마 에리코가 있었다. 그들의 조용한 신뢰와 지지는 그녀에게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에리코가 살해를 당하자 유이치도 혼자가 되었다. 이번엔 미카게 차례였다. 미카게는 유이치의 허망한 마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작품의 끝, 혼자가 된 둘은 함께 보냈던 지난 반년의 기억의 연장선으로 돌입하게 된다. 해피엔딩의 전야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 이미 가족과도 같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탐색하는 과정에는 음식이 있었다. 미카게가 요리하여 함께 먹던 음식. 문득 나도 아내와 매일 같이 하던 식탁이 그리워진다. 부엌은 일상이고 가족이며 사랑이며 치유다.

한 페친 덕분에 감사하게도 잔잔한 일상을 그림처럼 시처럼 풀어내는, 그러면서도 때론 절제된 송곳처럼 가슴 깊은 곳을 푹 찔러 공감을 유도하는 멋진 에세이 같은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여러 작가의 필체를 경험한다는 건 벅차도록 즐거운 일이다. 아무래도 나는 남성 작가보다 여성 작가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두 작품 ‘키친’과 ‘만월’에서도 느꼈다. 남성이라면 이런 글을 도저히 쓸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여자도 아닌데 이런 게 느껴져서 지금도 놀라고 있다. 상처를 받고 난 이후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안고서 일상을 꿋꿋이 살아내는 사람들. 왜 나는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남자보단 여자가 먼저 떠오르는 걸까. 아마도 내가 여성의 글에 더 끌리는 이유와 연결되어있진 않을까.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3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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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 - 신약학자가 복원해 낸 메시아 예수 죽음의 비밀 북오븐 히스토리컬 픽션 1
애덤 윈 지음, 오현미 옮김 / 북오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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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평화.

애덤 윈 저,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를 읽고.
(책의 부제: ‘신약학자가 복원해 낸 메시아 예수 죽음의 비밀’)

모든 게 완벽했다. 언제나처럼 흠 없는 희생제물들은 죽임을 당했고, 성전과 제사장들은 맡은 바 일에 충실했으며, 백성들은 모처럼 만난 가족, 친지들과 회포를 풀며 함께 먹고 마셨다. 전날 밤부터 그날 아침까지 속전속결로 치러졌던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만 제외하면, 로마인에게도 유대인에게도 그해 유월절 행사는 순조롭기만 했다. 모든 게 정상이었고, 모든 게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건 흔히들 ‘거짓 평화’라고 부르는 ‘팍스 로마나’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유대인은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한국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박멸하려고 애썼던 것과는 달리, 로마는 유대교를 비롯한 유대인 고유의 문화를 그대로 살려두었고 필요에 따라 존중까지 해주었다. 자칫 일어날 수도 있는 반란을 최소화하여 지배의 효율을 증대시키기 위해서였다. 피지배인들에게 적절한 자유와 권력 부여하기, 우두머리 격인 대제사장 측근들을 돈과 명예로 구워삶아 앞잡이로 활용하기. 바로 로마가 유대인을 다스리기 위해 선택한 교활한 방법이었다. 덕분에 지배국인 로마의 실제 모습은 서민 유대인들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다. 로마는 유혈 폭력이 기반된 압제적인 지배 방식의 허와 실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슬프게도 그들의 방법은 아주 유효했다.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부인할 수 없는 참혹한 관계마저도 충분히 평화롭게 보이게 할 만큼 그들의 방법은 성공적이었다. 실제 현실에서도 무력 충돌이 줄었고, 치안이 확립되었으며, 상업이 융성하기까지 했다. 지배인과 피지배인 사이의 암묵적인 충돌이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0년 이상 지속된 ‘팍스 로마나’의 겉모습은 가히 ‘평화’라고 말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평화’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평화의 참 의미에 대해서 나는 계속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평화였던 것일까. 지배국과 피지배국 간의 평화를 과연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 지배자들에 의해 가공된 평화, 그 이면에는 로마와 대제사장 간의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 밀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부분적 배신은 물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양심과의 타협도 필연적이었다. 모두가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라는 단어가 이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연결고리였다. 팍스 로마나는 철저히 계획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 체계와 깊숙이 감춰둔 잔인한 폭력에 기반하여 조작된, 거짓 평화였다. 월터 윙크가 간파했던 '구원하는 (구속적) 폭력', 즉 남을 희생양 삼아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형태의 대표적 예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전 주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예수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팔아넘겼다고 알려진 제자 유다도 주인공이 아니다. 예수를 실제로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들, 그러니까 대제사장 가야바를 포함한 제사장 무리와 로마 총독 빌라도, 그리고 배신자 유다의 존재를 비밀리에 제사장들에게 알려주고 실제로 연결시켜준 갈렙이라는 밀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책의 원제 ‘Killing a Messiah’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메시아’는 주어가 아닌 목적어다. 문장에서 사라진 주어, 즉 예수를 죽인 자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다시금 문제 삼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대신, 허구에 기반한 작가의 상상력은 성경으로부터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혹은 경히 다뤄졌던 부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생각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면에 있었던 콘텍스트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무엇보다 저자는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고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있었을법한 그 시대 정치판을 조명한다. 이 소설에 따르면 예수를 죽인 자는 ‘유대인’이라는 집합 명사도, ‘유다’라는 배신자도, ‘로마’라는 제국도 아니다. 예수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팍스 로마나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잠재적 위험요소라고 판단되었던 예수는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들이 세운 거짓 평화는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복음서를 기반으로 했을 때 실제 역사성을 가지는 몇몇 인물들의 이름과 직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만들어냈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도 예수의 십자가 처형 전을 주로 다루는데,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인물들은 오히려 예수의 인성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책도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빌라도, 가야바와 안나스와 엘르아살, 갈렙은 어떻게 예수의 죽음이 공모되고 계획되고 실행되는지 그 정치적 맥락을 현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팍스 로마나와 자신의 입지 유지를 목적으로 가졌던 빌라도, 자기 진영의 제사장이 다시 대제사장이 되도록 호시탐탐 현 대제사장 가야바와 로마 총독 빌라도 사이에서 기회를 노리는 전 대제사장 안나스, 유대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을 가지고 있으나 정치적 목적으로 희석하고 합리화하여 팍스 로마나에 가장 큰 공을 기울이고 있는 가야바, 차기 대제사장을 노리며 예수의 체포와 처형에 적극적으로 나선 가야바의 아들 엘르아살, 평범한 유대인 장사치이지만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 밀정이 되기로 작정하고 예수의 체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 갈렙. 이들을 각각 로마, 유대인 집권세력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유대인 서민을 대표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면, 예수의 죽음은 결코 어떤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의 잘못으로 비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두가 연루되었던 것이다.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이 작품을 읽는 현재 우리에게까지 유효할지도 모른다. 

참 평화는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 나라의 큰 두 기둥인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세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적 악이 사라진 세상. 이리와 양이 함께 먹고 뛰노는 세상. 혐오와 차별과 배제가 증발된 세상. 사탄의 체제에 대항하는 유일한 길은 비폭력이 기반된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이다.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이 겉으로는 거짓 평화인 팍스 로마나에 의해 묻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린 그 이후의 일을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과 그 외 문서들, 그리고 여러 증인들의 삶과 증언에 의해서 알고 있다. 예수는 부활하셨고, 로마는 멸망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책을 덮고 다시 한번 평화를 갈망한다.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를.

#북오븐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3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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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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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서사에 깃든 지독한 인간의 심리.

정유정 저, ‘7년의 밤’을 읽고.

간결한 단문으로 휘몰아치는 정유정의 필력은 치밀한 서사와 정제된 묘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살아난 텍스트의 모든 여백이 긴장과 스릴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단숨에 빨려 들어갔고, 금세 압도되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작품을 함께 하던 약 다섯 시간 동안 나는 마치 오랜 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다섯 시간이 아니라 닷새가 지난 것 같다. 너무 깊게 몰입한 나머지 일으킨 착각일 것이다.

작가가 창조해낸 가상의 공간, 세령호. 나는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작품 속에 빠져든 나는 잠시 동안 작가의 창조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세령호의 안개가 나를 감싸는 것 같고,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세령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크고 검은 눈, 허리까지 닿을 만큼 길게 풀어헤친 머리, 엄마 화장품으로 아무렇게나 칠한 조그맣고 하얀 얼굴, 구석구석 멍든 몸, 흰 팬티 차림의 작고 여린 아이, 이제는 스스로 눈을 감을 수 없는 아이, 오세령. 세령은 공포에 질린 채 도망치고 있었다. 강도나 괴한이 아닌 아빠로부터. 제기랄. 이것이 캄캄한 밤, 인적이 드문 어두운 안개 길을 그 조그만 발로 거침없이 달려야만 했던 이유다.

부와 명예를 등에 업은 사이코패스, 아빠 오영제로부터 폭력과 수치와 모멸을 견뎌내며 간신히 살아오던 열두 살의 초등학생. 엄마 하영은 남편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미리 도망쳤다. 으리으리하지만 텅 빈 그 집에 세령은 늘 교정을 해준답시고 손찌검을 해대는 아빠 오영제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세령이 죽던 날은 마침 세령의 생일이었다. 생일날, 그러니까 세령의 마지막 날이었던 그날에도 세령은 오영제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오영제에게 있어서는 교정, 세령에게는 공포이자 폭력이었다. 세령은 활활 타는 초가 꽂힌 병을 오영제에게 던지고 기회를 틈타 창을 넘어 도망쳤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살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도망은 죽음으로 끝나버린 세령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아아, 아빠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그 길이 이렇게 끔찍한 사건의 전야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오영제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런 게 인간이란 탈을 쓰고 있다니! 내 심장은 쉬지 않고 벌컥댔다. 대동맥으로부터 피가 용솟음치는 게 느껴질 만큼. 그런데 작가 정유정은 여기에 오영제 가족뿐만이 아닌 최현수 가족을 연결시킨다. 세령의 허망한 죽음이 연결고리였다. 세령을 죽인 건 오영제가 아닌 최현수이기 때문이다. 세령은 오영제로부터 도망치던 중, 마침 그곳을 처음 방문한 최현수의 차에 들이 받힌다. 아, 이런 기막히고 비극적인 운명! 물론 최현수가 세령을 차로 친 건 사고였다. 악의가 전혀 없는 순수한 사고였다. 문제는 세령의 사인이 교통사고에 의한 다발성 장기 부전이나 과다출혈이 아닌 질식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 차에 부딪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여자 아이가 살아있었다. 놀란 나머지 최현수는 운전석에서 나와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정신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아빠”라고 읊조렸다. 마음이 무너졌다. 그때 최현수는 아이를 들고 곧장 병원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대신, 솥뚜껑 같은 왼손으로 입을 막아 생사를 오가는 아이의 마저 남은 숨통을 끊었고,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세령호에 던져버렸다.

최현수는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를 당한 상태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면허가 갱신될 참이었다. 불법으로 운전을 해서 곧 살게 될 사택을 확인하러 밤늦게 세령호에 다다른 것이었다. 오는 도중에 술 한 잔 걸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최현수는 잘 나가던 야구 선수였다. 한때 팀의 전성기를 이끌던 포수였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고 왼팔이 마비되는 증세가 잦아지면서 주전에서 밀려나야 했다. 2군에서 뛰다가 결국엔 야구를 그만둬야 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191센티미터, 110킬로그램의 거구를 장점으로 활용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보안업체 경비직이었다. 그렇게 최현수는 자존감을 잃어갔고 술에 절어 살게 되었다. 어쩌다가 만난 아내 은주와의 결혼은 그를 더 깊은 나락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지키고 싶은 존재는 아들 서원이었다. 서원이만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이 작품은 서원의 일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써졌다. 7년 전 사건, 그러니까 세령의 사고, 최현수의 살인, 오영제의 복수극이 빚어낸 재앙이었던 세령 댐 수문 방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그날로부터 7년이 지난 이후, 승환과 함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다니다시피 살다가 그나마 정착한 등대마을에서 서원은 자기에게 배달된 운동화, 승환이 썼음이 분명한 세령호 사건에 대한 소설, 그리고 하영과 승환 사이에 오갔던 편지 다발과 승환이 남긴 컴퓨터 파일들을 훑어본다. 그날은 승환이 갑자기 사라진 날이었고, 서원이 전보 한 통을 받은 날이었다. 전보는 아버지인 최현수의 사형 집행이 치러졌으니 시신을 수습하라고 알리고 있었다. 서원은 이러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사실일 수밖에 없는 추리를 해내고 전율과 함께 깨닫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영제가 실제로 살아있고, 여태껏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7년 전 못다 한 복수를 최현수의 사형 집행일에 맞춰서 완성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동안 전학에 전학을 마다하며 도망치다시피 살아온 나날들도 모두 오영제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형 전 오영제의 행동을 노련한 포수의 육감으로 정확하게 예측한 최현수와 승환, 그리고 두 형사의 도움으로 승환과 서원은 죽을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오영제의 복수극, 아니 미친 살인극을 가까스로 저지하게 된다. 7년의 밤이 비로소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결말에 이른다.

작품 읽으면서 독자가 아닌 소설 지망생으로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 작가는 각 인물의 내면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작가는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각 등장인물이 되어 그 고유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얻은 생동감 넘치는 입체감은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했고 독자의 몰입을 유도했다. 등장인물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오해하게 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러운 부분을 어떻게 추리해나가는지, 그리고 그렇게 감추거나 드러낸, 혹은 감춰지거나 드러나게 된 심리를 어떻게 분석하고 대처해나가는지, 정말이지 정유정 작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등장인물들에게 투영하고 그들만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놀랍도록 입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앞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은 하영 (오영제의 아내), 은주 (최현수의 아내)를 비롯하여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고유한 서사도 소설 전체의 흐름과 완벽하게 맞물린다. 각 인물들이 가진 상처에는 한국인으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정서가 깊이 녹아있다. 허투루 버릴 게 하나 없는 치밀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환상과 사실을 오가는 서술 기법.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단문의 화려한 연타. 탄탄한 서사와 인간 본성의 심연을 깊숙이 파고들지만 결코 직접적이지 않은 묘사들. 나는 독자로서 그리고 소설 지망생으로서 연신 침을 삼키며 이 작품을 읽어냈다. 프로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처음 읽는 정유정 작가. 여태껏 왜 몰랐을까! 그동안 고전소설을 읽는답시고 현대소설을 게을리했던 것, 서양 고전을 탐독한답시고 한국소설을 등한시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한국 현대소설일 텐데 한국 현대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유정 작가를 비롯한 한국 현대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마침 스무 권이 넘는 소설이 중고로 구입이 가능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이번 기회로 인해 한글로 써지고 한국 정서가 녹아있는 한국 현대소설의 세계로 본격적인 진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나에겐 큰 흐름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3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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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 이야기가 있는 답사 여행
김학천 지음, 황은관 그림 / 선율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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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이유.

김학천 글, 황은관 그림,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를 읽고.

감사하게도 나는 아직도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자못 숙연해진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그 공간. 이따금 들리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마저도 마치 그 안에 깃든 영령을 추모라도 하듯 목소리를 아끼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 간혹 붓으로 그린 듯 하얀 구름이 군데군데 떠있던 그 공간. 비록 그 시대를 살지 못했지만,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났던 부모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래서였을까. 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은 탑과 숱한 이름이 적힌 위패와 그들이 조각된 커다란 조형물에 둘러싸인 채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 시절, 여름방학 때 고향 부산에 내려가 버스비만 들고 혼자서 훌쩍 떠난 즉흥적인 일탈에서 나는 부산 중앙공원 (구 대청공원) 안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충혼탑을 찾곤 했다. 충혼탑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나라와 겨레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부산 출신의 국군 장병과 경찰관을 비롯한 애국 용사들의 영령을 기리는 위령탑이다. 

최근 선율 출판사에서 의미가 깊은 책을 하나 냈다. 수작이다. 제목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어서 부제를 확인했다. ‘이야기가 있는 답사 여행’. 금세 이해가 갔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보를 담은 딱딱한 책이 아니었다. 저자는 16명의 독립운동가를 선택하고 그들의 자취를 따라 직접 길을 나서 답사를 한 뒤, 그로부터 얻은 살아있는 감상을 절제된 글로 담아냈다. 역사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어 길 위로 나서길,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직접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답사에 동참하길 촉구한다. 책은 독립운동가 한 분 당 한 꼭지, 그러니까 총 16 꼭지로 되어 있다. 각 꼭지의 마무리는 저자가 답사 때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그의 답사 여정과 간단한 안내 및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각 독립운동가에 대해 그려진 포스터가 압권이다. 잘 그려진 그림은 언제나 글을 배가시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대학생 때 가끔 찾던 충혼탑에서의 그 숙연함이 자연스레 떠오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영혼은 독립운동이나 한국전쟁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넘어 대한민국을 지금까지 있게 한 든든한 바탕이 되어 21세기 현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 한 편이 묵직해진다. 감히 공감할 수도 없을 만큼 그들은 내가 살아낸 시대와 많게는 백 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이 슬프고도 허망한 말은 현실이 되었고, 그들의 피 위에 서 있는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반면, 독립운동과 정반대 편에서 앞장섰던 친일파들의 부와 권력의 흔적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논리는 나라와 상관없는 사적인 욕망과 합쳐졌고, 어려운 시기에 많은 이들은 그 조류에 순응하거나 편승하여 그른 것을 옳다고 했고 옳은 것을 그르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아 실세를 쥔 사람들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큰 소리를 떵떵 치며 살아가고 있는 반면, 조용히 정의를 위해 사욕을 포기하고 불의에 저항하여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은 가난과 헐벗음을 견뎌내야 했거나 비굴하게 살아가야만 했다. 이 책과 같은 글을 읽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거를 부인하거나 거짓 과거를 발판 삼는 나라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언젠간 와해되거나 붕괴될 것이다. 잘못된 게 있다면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덮어두지 말고 겸허히 인정하고 고쳐나가면 된다. 실수가 있었다면 바로 잡으면 된다. 현실의 무게와 그동안 지속해왔던 거짓 합리화의 압력, 그로 인한 거짓 평화의 힘을 이겨내야만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에 대해 떠올릴 때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지고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드는 이유도 어쩌면 그릇된 역사관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횡포와 그 횡포에 무력하게 무너졌던 독립운동가들의 피, 그리고 피의 흔적들이 여전히 산재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언론만 보고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시대다. 거짓 뉴스가 난무하고 아이들의 장래 희망란에는 과학자나 정치인이 아닌 빌딩 소유주가 적히는 시대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독립운동,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시대를 달리 하며 이어져온 정의에 기반한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우린 현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고 제대로 된 역사의 기술과 전달이 중요한 이유는 물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독립운동’, 혹은 '저항'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한국에 있다면 시간 내어 저자가 친절하게 알려주는 답사 여정을 따라 몇 군데라도 꼭 가보고 싶다. 책상 위보단 길 위에서 그 정신은 살아나 나에게 말을 걸 테니까 말이다. 

#선율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3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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