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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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이르는 ‘완전한’ 행복

정유정 저, ‘완전한 행복’을 읽고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그렇잖아도 어젯밤부터 가랑비 젖듯 불안이 시나브로 스며들어 몸과 마음이 무거웠는데, 급기야 잠든 동안 그것이 꿈의 한 장면으로 발현한 것이었다. 새벽에 큰 소리를 지르며 잠을 깼다. 쿵쾅대며 요동치는 내 심장 소리는 밤의 적막을 갈랐다. 꿈이구나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잠든 뒤 아침에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났더니 머리가 지끈댔다. 아뿔싸. 편두통이었다. 잊힐만하면 간간이 찾아오는 불청객.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하루 병가를 내고 약을 먹고 다시 잠을 청했다. 오후 1시. 그나마 머리가 개운하다. 날씨는 캘리포니아 답지 않게 비라도 내릴 것처럼 우중충하다. 회색 하늘, 서늘한 대기. 음산함마저 느껴진다. 텅 빈 집. 이 시간에 집에서 혼자 잠에서 깬 적이 있었던가. 다시 꿈에서 본 그 도둑이 떠오른다. 어젯밤 읽은 책에서 본 ‘도둑년’이라는 단어 때문일까. 그 단어 이면에 놓인 신유나의 섬뜩한 본성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일까. 심장이 귀에 달린 듯 다시 요동하기 시작한다. 지유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되강오리의 울음소리도 혹시 이와 같지 않았을까.

정유정의 작품은 음산한 매력이 있다. 독자를 여유 있게 휘어잡는다. 점점 코너에 몰린 채 어지간한 독자는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압도적인 서사, 치밀하게 인간의 악한 본성을 하나씩 하나씩, 마치 뼈를 발라내듯 끄집어내는 탁월한 필체.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에 이은 그 정유정이 이 작품 ‘완전한 행복’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진화한 모습으로. 진화한 건 그녀만이 아니다. ‘작가의 말’에서 정유정이 직접 밝히듯 이 작품엔 지독하게 악한 인간은 존재해도 주인공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 인물 저 인물에 맞춘 초점이 빈번이 이동하면서 현장의 입체감과 객관성을 살려낸다. 한 대의 카메라가 아닌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같은 현장을 찍는 것처럼. 역사과 기억은 주관적인 해석의 산물이기 마련인데, 아마도 정유정은 이에 대한 저항이자 반격으로 이런 소설적 장치를 고안해낸 게 아닌가 싶다. 덕분에, 비록 허구이지만, 현장감은 갑절이 되어 살아 숨 쉬게 되었다. 지금도 벌렁대는 내 심장은 바로 그 증거다.

미성숙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 그 미성숙함은 나르시시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중엔 자기중심적인 사람, 자기애에 빠진 사람, 이기적인 사람, 등등의 표현을 들을 때 부정적인 감정은 물론 분노까지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남의 일처럼 여길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런 것들이 우리 자신 안에도 고스란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의 신유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선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내면은 고요한 살인자의 광기로 충만하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타자의 인격을, 아니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내면을 가진 사람은 이미 살인을 행한 것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신유나는 이에 한 걸음, 아니 몇 걸음 더 나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에 걸리적거리면 제거한다. 그것도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더욱 무서운 건 그녀는 사람을 죽일 때도 떨지 않는다는 점이다. 숨이 가빠지지도 않는다. 내가 그녀의 광기를 고요하다고 표현한 이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꼴리니꼬프조차 도끼로 살인을 저지르기 전의 인간적인 망설임, 저지른 뒤의 갈등과 후회를 경험했다. 그러나 신유나는 달랐다. 신유나는 ‘종의 기원’에 등장한 악의 화신 한유진과 같은 선천적인 장애가 있는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대신, 그녀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후천적으로 겪게 된 일반인이다. 정유정은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어서 그대로 아래에 옮겨본다.

“이 소설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완전한 행복에 이르고자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려 노력한 어느 나르시시스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흔히 자아도취형 인간을 나르시시스트라 부르지만, 병리적인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의미가 좀 다르다. 통념적인 자기애나 자존감과도 거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모든 나르시시스트가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모든 사이코패스들은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다. 그들은 사이코패스보다 흔하다는 점에서 두렵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지만 정작 자아는 텅 비어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며, 매우 매혹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한 존재다. 그들에게 매혹된 이는 가스라이팅에 의해 길들여지고, 조종되고, 황폐화된다. 때로는 삶이 통째로 흔들린다.”

위의 언급은 모두 작품 속 신유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라고도 할 수 있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환자. 그녀의 외모는 매혹적일 만큼 훌륭하다. 남성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매력은 그녀의 장점이 아니라 그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자기를 공주 혹은 여왕의 자리에 앉혀놓고 자기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자기를 떠받들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즉 가스라이팅으로 타자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여 그 사람의 개성과 인격과 자존감을 무참히 짓밟게 하는 수단이 된다. 신유나와 잠자리를 같이 했던 세 명의 남자 (전 남자친구, 전 남편, 남편)는 모두 이 수단의 희생자가 되었다. 비록 현재 남편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그의 삶은 무너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다. 신유나는 자신의 아버지와 재혼한 남편의 아들마저도 망설임 없이 죽인다. 어릴 적부터 그녀가 ‘도둑년’이라고 부른 자신의 친언니마저도 거의 죽여놓는다. 완전한 자신의 소유라고 믿는 자신의 딸, 지유마저도 그녀는 쌍욕을 해가며 죽이려고 했다. 한 마디로 그녀와 가까이 있던 사람은 모두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상황에 일방적으로 놓여야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유나가 진심으로 원한 건 행복이었다. 완전한 행복. 그녀는 행복은 뺄셈이라고 말한다.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하나씩 빼나가는 것. 그래야 닿을 수 있는 곳이 행복이라 믿었다. 바로 여기에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기지 않았을까 싶다. 완전함이라는 단어의 정의부터 시작해야 옳겠지만, 아마도 신유나의 완전함이란 그녀가 중심에 있는 우주를 말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녀가 신이 되어 보기에 좋은, 그 완전한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의 선은 그녀가 중심이 된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반면, 악은 그녀가 중심에서 빠진 그 무엇일 것이다. 선과 악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게 된 인간. 마치 원죄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신유나는 인간의 본성의 원시적인 상태를 떠올리게 만든다. 죄와 악의 기원까지도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그럴까. 아닐 것이다. 행복이란 무결점을 지칭하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부족한 것들이 산재해 있어도 그것들을 인정하고 안고 품는 것에 행복이 있지 않을까. 내가 아닌 타자의 동등함을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함께 나누는 세상에 행복이 머물지 않을까. 그러므로 행복이란 뺄셈이 결코 될 수 없다. 다양성과 풍성함을 다 쳐내고 마지막에 남을 그 무엇은 행복이 아닌 오로지 나로 가득한 죄가 아닐까. 아무래도 신유나는 틀렸다. 행복은 뺄셈이 아닌 덧셈일 것이다. 나 혼자선 결코 이를 수 없는 영역으로의 타자와 함께 함. 존중과 배려와 사랑이 더하여질 때 비로소 인간은 행복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정유정 역시 인간이 행복엔 타자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나 혼자만 남은 세상은 천국이 아닌 지옥일 테니까.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4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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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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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의미


코맥 매카시 저, ‘로드’를 읽고

종말의 잔상이라고 해야 할까, 종말 이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여전히 종말이 진행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종말은 무한한 시간으로 확장된다고 말해야 할까.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작품 속 지구는 대재앙을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거의 모든 것은 불에 탔거나 불탄 흔적인 재로 덮였다. 동물이나 식물은, 즉 살아있는 생명체는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으며, 사람마저도 오직 소수만이 남았다. 그들은 모두 방랑자 (‘방랑자’라 쓰고 ‘부랑자’라 읽는다)가 되어 간신히 생명만을 부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이 표현은 잘못된 듯하다. 살아남은 자들이 마치 선택받은 것처럼, 혹은 무언가 축복이라도 받은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살아남은 자’라는 표현보다는 ‘뒤늦게 죽어가고 있는 자’ 혹은 ‘미처 죽지 못한 자’라고 표현해야 더 적당해 보인다. 저자가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까지 어쨌거나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조차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식물이 멸종한 듯한 지구. 과연 인간은 무엇을 먹으며 연명할 수 있을까. 작품 속 생존자들은 대재앙과 약탈자들이 미처 건드리지 못한 통조림이나 바닥에 더럽게 떨어진 곡식의 낱알 따위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그런데 그건 약과다. 아이를 잡아먹는 어른들도 있다. 힘없는 타자를 가두고 죽여서 잡아먹는 인간들도 있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본능에 충실한 삶. 아니, 짐승보다 못한 추악한 존재자의 삶. 어쩌면 유일한 현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삶. 과연 이를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힘없는 생존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한다. 죽임을 당하여 얼마 없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빼앗기게 되거나 잡혀 먹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 곳에 정착하여 지낼 수도 없다. 버려진 집 안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없다. 아무리 추워도 함부로 불을 피울 수도 없다. 무기를 가지거나 힘센 자들에게 ‘나 여기 있어’, 하는 표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계속 이동하는 것뿐이다. 목적지는 없다. 대재앙은 모든 곳을 덮쳤다. 서로가 서로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춥고 배고프고 아파도 계속 움직여야 한다. 하루 종일 그들이 하는 것이라곤 먹을 것을 찾아내는 일과 들키지 않고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다. 즉 생존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누군가로부터의 공격에도 늘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 살아남은 누군가는 아군이 아니다. 일단 적군으로 간주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확정해버린 상황. 마지막에 남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일까. 야만인이 되어버린 인간들. 짐승이 되어버린 인간들. 조금만 버티면 된다는 암시조차 없는 완전한 절망의 세상. 먹고 입고 숨 쉬는 생존이란 행위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살아남았다는 건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종말은 자연재해로 닥쳐온 대재앙이 아니라 어쩌면 이러한 인간들의 인간성 상실에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곱씹어보게 된다. 의미 중독자인 인간들의 살아남은 상실감.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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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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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적 허구가 담고 있는 진실


마거릿 애트우드 저, ‘시녀 이야기’를 읽고

페미니즘과 디스토피아가 절묘하게 만난 수작, ‘시녀 이야기’.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를 처음으로 만난다. 거장의 필체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간결한 문장은 기본인 데다 풍성한 상상력, 깊은 통찰에서 우러나와 이성과 감성을 모두 깨우는 묵직한 음성, 그리고 티 나지 않고 날카로운 뼈를 감춘 채 정확히 급소를 찌르는 절제미까지. 압도적인 서사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그리 특별하지 않는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서 고수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단 한 권만 읽었을 뿐인데, 저자 이름이 가려진 숱한 글 속에서 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실로 놀라운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성과 별개로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한두 차례 그만둘까 생각도 했었다. 저자 특유의 절제된 문장으로 표현되는 여성들의 비참함 때문에 그랬고, 비록 허구이지만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 그리고 전체주의 사회의 뿌리 깊은 폭력과 거짓 영성 때문에도 그랬다. 남성이자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이 작품을 읽고 나처럼 불편해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싶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 이 작품은 ‘길리어드’라는, 쿠데타로 세워진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시녀’로 살아가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한 여성의 기록으로 읽히게 되어 있다 (시녀는 씨받이로 생각하면 된다). 작가의 탁월한 설계다. 작품 끝에 놓인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에 의하면 작품의 현재는 21세기 말이다. 본문에 해당하는 한 여성의 기록은 한낱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실제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는 과거 문헌인 셈이다. 물론 이 ‘역사적 주해’ 역시 소설의 일부이기에 모든 게 허구이지만, 저자는 일부러 이런 액자식 구성을 십분 활용하여 본문에 허구적 역사성을 부여하는 등 작품의 비중을 한층 높이는 효과를 톡톡히 해내고 있다. ‘시녀 이야기’ 본문만 읽고 작품을 다 읽었다고 생각한 독자들은 아마도 책 뒤에 부록처럼 붙은 ‘역사적 주해’를 접하고는 ‘의외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이 작품은 그저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 정도에 머물지 않고, ‘안네의 일기’처럼 한 역사적 인물의 실제 수기인 것 같다는 인상까지 받게 될 것이다. 허구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부록 같은 내용이 500 페이지의 긴 본문이 가진 뉘앙스와 가치를 배가시키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거장의 재간이랄까 솜씨를 충분히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 중반 무렵, 시대는 잦은 전쟁과 극에 다른 환경파괴 등으로 종말에 이른다. 이런 혼돈으로 생겨난 균열을 이용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체주의 국가가 바로 ‘길리어드’이다. 길리어드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묘사된다. 하나는 가부장제, 다른 하나는 근본주의 기독교. 조금 더 작품 속 상황을 잘 표현하려면 두 단어 앞에 ‘극단적인’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한다.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두 단어만으로도 길리어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길리어드는 여성에게서 거의 모든 권리를 빼앗았다. 여성은 소나 말, 혹은 노예, 혹은 쓰다 가차 없이 버릴 소모품처럼 남성들이 세운 체제에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살아가거나, 사람에게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이성과 감성을 거세한 채 한낱 아이나 낳는 기계 따위로 취급된다. 저항하거나 거역하면 곧바로 처벌이나 처형이 가해지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면 체제에 순응해야만 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과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것의,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차이를 철학, 신학적으로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 체제를 만든 구조적인 악의 존재와 그 타개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겠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의 극을 실현한 국가답게 길리어드는 다른 종교는 물론 다른 교단이나 교파까지 모두 교화해야 할 대상이나 적으로 간주하고 관리한다. 폭력과 압제로 기독교 정신을 지킨다니, 허구가 지나쳐도 너무 치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단순히 이런 생각을 내칠 수만도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처한 기독교의 현실이 길리어드의 그것과 비교해서 정도만 다를 뿐 본질은 비슷하다는 슬픈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폭력을 가장 잘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가 종교다. 이때 종교는 곧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되고 만다. 궁극적으로 개인이나 어떤 특정한 집단의 사익을 위해 이용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종교라는 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폭력이 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안녕과 평안만을 고려할 게 아니라 그 개인과 집단이 속한 더 큰 사회구조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소외된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와 같은 사회 약자층에 언제나 눈을 돌려야 한다. 내가 사탄이라도 개인을 일일이 건드리기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물인 국가나 사회를, 그리고 그 국가나 사회를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그들에게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어떤 정신 (이를테면 자본주의 정신)을 건드릴 것이고, 여성으로 대표되는 약자층은 언제나 짓밟아도 되는 것처럼 사회 분위기를 조장할 것이다. 그게 모든 자를 타락시키고 망하게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비록 시녀로 살다가 탈출한 한 여성의 수기로 읽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독자들은 비단 여성의 인권 정도에 머물지 말고 사회 모든 약자층까지 확장하여 이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군데군데 드러나는 간접적인 증거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길리어드는 미국을 지칭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작품이 쓰인 해가 1985년이니 당시 미국은 공화당 소속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을 시작했던 시기다. 예상컨대 마거릿 애트우드는 레이건 대통령의 초임 정권 하에서 길리어드를 본 것 같다.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가 판을 치며 파국을 맞이할 미국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예언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에 그녀의 예상의 정확도를 따질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이지만, 미국의 지성인 중 하나였던 마거릿 애트우드의 눈에는 미국이 길리어드로 발전할 조짐이 분명히 있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그런 일이 아직까진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았지만, 트럼프 정권의 끔찍했던 지난 5년을 떠올려볼 때 여전히 미국은 그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인문학자들이나 철학자들, 혹은 신학자들이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고찰하는 서적들이 출판계에서는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이 분석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안하는 책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의 단점은 주로 난해하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인내력이나 집중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혹은 그런 분야를 읽어온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라면 책 한 권조차 끝까지 읽어내기 어렵다. 이에 반하여 ‘시녀 이야기’와 같은 소설은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어렵지 않게 읽힐 수 있으며 자연스레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철학자와 신학자의 자아를 깨우는 역할을 해낸다. 문학이 가진 고유의 힘인 것이다.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의 조합이 어떤 일을 해내는지 궁금하다면 나는 이 작품을 망설임 없이 권한다. 

참고로,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인 ‘증언들’이라는 작품이 2019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34년이란 긴 시간이 두 작품 사이에 끼어 있으니 후속작이 나온 시기 치고는 조금 생뚱맞은 감도 없진 않다. 그러나 2019년이 공화당 소속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시절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증언들’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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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3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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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3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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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작은 시작

레프 톨스토이 저, ‘부활’을 읽고

톨스토이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종류의 자아가 있다. 하나는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적 자아,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고 그 행복을 위해서라면 전 세계 모든 행복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는 동물적 자아. 두 자아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한다. 어떤 자아가 우위를 점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내면은 물론 삶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동물적 자아가 정신적 자아를 압도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러나 아주 가끔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사건에 의해 잠자고 있던 정신적 자아가 깨어날 때가 있는데, 이는 새로운 삶으로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단, 그 깨어남이 머리 혹은 가슴만 적시고 마는 게 아니라 손과 발까지 내려와 실천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 순간을 부활의 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어엿한 군인이 된 네흘류도프가 모처럼 고모 집에 들른 건 3월 말 부활절을 코 앞에 둔 수난 주간의 금요일이었다. 마침 진격 중인 연대에 합류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고, 고모들이 그의 방문을 원하기도 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어릴 적 그에게 즐거운 추억을 남겨 주었던 까쮸샤를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은 양녀 반은 하녀로 자란 까쮸샤는 훨씬 매력적인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의 하얀 앞치마를 보면 옛날처럼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녀의 발소리나 목소리나 웃음소리만 들어도 기뻤으며, 특히 미소 지을 때 드러나는, 약간의 사시가 섞인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룻밤만 묵을 작정이었던 계획을 바꿔 이틀 후 부활절까지 고모 집에서 지내기로 한다. 

뻬쩨르부르그에서의 생활과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생긴 그의 광적인 이기주의는 그의 동물적 자아에게 힘을 불어넣었고 그 무렵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까쮸샤를 만나고 예전의 감정을 되찾게 되면서 네흘류도프 안에 조용히 잠자고 있던 정신적 자아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운명은 그의 부활을 반기지 않았다. 성스러운 부활절 밤이 지난 직후 무서운 사건이 그에게 벌어졌다. 그 사건은 모처럼 네흘류도프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던 정신적 자아를 마구 짓밟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랑을 가장한 순간적인 정욕을 참지 못한 채 네흘류도프는 그만 까쮸샤의 몸을 농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날 그녀의 품에 백 루블이라는 돈을 떠안기면서 그녀의 감정까지 모욕한 채 떠나버렸다. 세상일이란 다 그런 거라며,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는 거라며, 귀족 특유의 무책임한 합리화에 몸을 맡기면서.

명백한 성폭력이었던 그 사건 때문에 까쮸샤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네흘류도프의 고모들은 까쮸샤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를 가차 없이 내쫓아버렸다. 시간은 동일하게 흘렀다. 간신히 이웃의 도움으로 까쮸샤는 출산을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정신적인 변화를 겪은 그녀는 더 이상 선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만난 모든 여자들은 그녀를 돈벌이 수단으로 보았고, 그녀가 만난 모든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보았다. 버림받은 몸으로 의식주가 어려워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셨다. 사내들과 더불어 점점 쾌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 잠시 괴로움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까쮸샤는 몸을 파는 여자가 되었다. 

이 작품은 부활절 밤 네흘류도프와 까쮸샤 사이에서 발생했던 돌이킬 수 없는 그 사건 이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을 현재로 하고 있다. 배심원으로 참석한 재판에서 네흘류도프는 우연히 까쮸샤를 만나게 된다. 작품의 시작이다. 그녀는 놀랍게도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피고인 중 하나였다. 설상가상으로 까쮸샤는 그날 벌어졌던 배심원과 재판관의 성의 없는 실수 때문에 억울하게도 유형 판결을 받고 말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네흘류도프는 전율과 함께 죄책감을 느끼며 과거의 모든 기억을 되살려낸다. 그 기억은 그의 양심을 짓누르고 있었던,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무거운 죄를 일깨웠고 그 죄를 마음속에 지닌 채 안일하게 살아왔던 지난 10 년간의 삶을 이루던 자신의 매정함과 잔인함과 비열함을 인정하도록 압박했다. 그의 마음속에선 아주 오랜만에 또다시 두 자아가 대립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네흘류도프는 그 예기치 못한 순간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결혼을 해서라도 죄를 속죄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채 시베리아 유형수로 판결이 난 까쮸샤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엔 자신이 그녀에게 저지른 추악하고 비열하고 무자비한 짓이 자리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신비한 ‘영혼의 정화’ 현상을 경험하자 순간적으로 기분이 매우 상쾌해지고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뿌리 깊고 역겨운 비열함을 인정하면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동시에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유와 해방과 용기와 삶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선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믿게 되었다. 그의 내면에선 부활이 실제로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후 네흘류도프는 비록 내면에선 지속적인 두 자아의 갈등을 경험하게 되지만 매번 정신적 자아의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 세계로의 이동은 기존 세계에서 잘 작동하던 시스템을 버리거나 파괴해야만 하는 용기와 결단, 그리고 실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법이다. 네흘류도프는 그것들을 하나씩 해내기 시작한다. 역시 귀족 자제인 미시와의 결혼을 포기했고, 까쮸샤와의 과거를 남들에게 숨기지 않게 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받는 뭇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화려한 집은 물론이며 지주로서 가지고 있던 땅도 농민들에게 헐값에 나눠주는 등 갈수록 정의로운 일이라 믿는 일에 확신을 가진 실천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정신적 자아의 승리는 비단 까쮸샤라는 한 여자에게 범했던 과거를 속죄하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영혼의 정화 작용은 점차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일에서 한 귀족과 한 평민의 일로, 그리고 그 당시 러시아 귀족 신분과 평민 신분 간의 대립으로, 나아가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으로 확장, 인식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작은 하나의 둑이 무너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너져야 할 견고한 시스템을 가진 모든 불의한 댐들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까쮸샤 덕분에 감옥 안에 갇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고 그들을 실제로 도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단 한 번도 인지하지 못하는 세상이었고, 설사 인지한다고 해도 그들과는 전혀 무관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네흘류도프에게 그 세상은 변혁되어야만 하는 세상이었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엔 그것을 하는 데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각오까지 하게 된다. 그는 그 자신의 신분은 물론 자신이 그동안 해온 태만과 기만과 교만의 죄를 낱낱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는 네흘류도프 혼자만의 죄가 아니라 모든 가진 자들의 죄였다. 네흘류도프의 눈은 바뀌었다.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 비로소 개인의 죄가 아닌 구조적인 악의 실체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구조적인 악 중에서도 네흘류도프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까쮸샤 덕분인지 형벌에 관계된 시스템이었다. 그의 질문은 매우 단순했다. 즉 자신들이 괴롭히고 매질하고 살해하는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일련의 사람들이 왜, 그리고 무슨 권리로 그들을 투옥하고 괴롭히고 유형을 보내고 매질하고 살해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였다. 그는 여러 논문과 책을 탐독하며 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문헌들 속에는 지혜롭고 이론적이며 흥미로운 점이 많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형벌을 가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었다. 네흘류도프의 생각은 보다 깊어져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르기도 한다. 만일 그들도 공직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런 비열한 행동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그들 대부분은 본래 온순하고 착한 사람들이지만 공무를 처리한다는 이유로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된 것이라고. 그들은 직무와 의무를 인간애보다 더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인간을 대할 땐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 사랑은 인간 생활의 기본 법칙이다’라는 결론에까지 봉착하게 된다. 

까쮸샤의 억울한 판결을 돌이키려 네흘류도프는 원로원에 상소를 했지만 기각되고 말았다. 절망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가망 없을 것 같았지만 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로 한다. 시간이 흘러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탄원서가 받아들여졌고, 까쮸샤는 시베리아 유형수가 아닌 이주형으로 변경되어 석방되기에 이르렀다. 기적이 일어난 듯했다. 그러나 까쮸샤는 그 사실을 온 맘으로 기뻐하지 않았다. 

네흘류도프는 수차례 감옥을 방문하기도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시베리아 유형수들의 대열과 함께 이동하는 길고 긴 여정에서 까쮸샤에게 모든 진심을 털어놓고 결혼하자는 제안까지 했었다.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까쮸샤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만나고 그녀를 돕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와 참회 사실을 알게 되면 몹시 기뻐하고 감동하여 옛날의 까쮸샤로 돌아갈 거라고 기대했었다. 지난 10년이란 세월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네흘류도프의 부활이 까쮸샤의 부활로 이어지기 위해선 까쮸샤 역시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고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을 결단해야만 했던 것이다. 까쮸샤는 네흘류도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지기도 했다. 날카로운 창이 되어 네흘류도프의 가슴을 깊이 찌르는 말이었다.

“내게서 물러서. 난 유형수고 당신은 공작이야. 당신은 이곳에 아무런 용건도 없어. 당신은 날 통해서 구원을 받고 싶은 거로군. 이 세상에서 나를 희롱하더니, 저세상에서는 나를 통해 구원을 받겠다는 심보야! 난 당신이나 그 안경, 그 반질반질하고 추한 낯짝까지 모두 증오해. 돌아가. 돌아가란 말이야!”

물론 감정이 폭발한 상태에서 했던 말이었고, 실제로 까쮸샤는 네흘류도프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다. 네흘류도프가 시베리아 유형수인 자기와 결혼한다면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에게 그런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서 황제 탄원서가 받아들여져 석방될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네흘류도프의 진심을 알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부활이 꿈틀대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작품은 네흘류도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까쮸샤 문제가 끝이 났지만, 그에겐 다른 일들이 산재해 있었다. 귀족 신분으로서 상류 사회에 뿌리 깊게 각인된 불의를, 그 죄악을 척결하기 위한 일들이 그의 활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해답을 얻는다. 죄악으로 죄악을 바로 잡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논리라는 것을. 인류가 고통받는 그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죄인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처벌한다든지 교화할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임을 이제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죄짓지 않은 사람이 없고 따라서 남에게 벌을 주거나 남을 교화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몇 번이고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게 되었고,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적인 죄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부활’이라는 제목에서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듯이 기독교 정신이 깊게 녹아든 소설이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장편소설이기도 한데, 첫 번째 장편 ‘전쟁과 평화’는 그가 36-41세에, 두 번째 장편 ‘안나 카레니나’는 46-49세에 쓰였다는 사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인 ‘부활’은 거의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그가 67세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71세에 마쳤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 20년이란 세월이 톨스토이에게 있어선 부활과도 같은 삶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작품 ‘부활’은 그가 그 20년간 깨닫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농축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문학 작품이 그렇듯, 작품 속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톨스토이의 분신으로 역할했던 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하여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한 구조적인 악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그 원인이 가진 자들의 착취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이 모든 사회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네흘류도프와 같은 가진 자들의 부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봐도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우리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지만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가진 자들은 합법적인 차별과 처벌을 일삼아 가지지 않은 자들을 혐오,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은 더욱 견고해져서 그것이 사회 전체의 동물적 자아로 둔갑하여 모든 사람들 내면에 있는 정신적 자아를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작품은 초중반은 물론이며 후반부와 결말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인 메시지를 듬뿍 담고 있는데, 이는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가 19세기 말이었고, 그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가 폐지되었지만 근본적인 차별은 그대로 남아 어쩌면 더 큰 구조적인 악을 양산하고 있었던 무렵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이 작품의 메시지는 상당히 급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3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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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3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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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작은 시작

레프 톨스토이 저, ‘부활’을 읽고

톨스토이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종류의 자아가 있다. 하나는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적 자아,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고 그 행복을 위해서라면 전 세계 모든 행복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는 동물적 자아. 두 자아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한다. 어떤 자아가 우위를 점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내면은 물론 삶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동물적 자아가 정신적 자아를 압도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러나 아주 가끔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사건에 의해 잠자고 있던 정신적 자아가 깨어날 때가 있는데, 이는 새로운 삶으로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단, 그 깨어남이 머리 혹은 가슴만 적시고 마는 게 아니라 손과 발까지 내려와 실천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 순간을 부활의 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어엿한 군인이 된 네흘류도프가 모처럼 고모 집에 들른 건 3월 말 부활절을 코 앞에 둔 수난 주간의 금요일이었다. 마침 진격 중인 연대에 합류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고, 고모들이 그의 방문을 원하기도 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어릴 적 그에게 즐거운 추억을 남겨 주었던 까쮸샤를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은 양녀 반은 하녀로 자란 까쮸샤는 훨씬 매력적인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의 하얀 앞치마를 보면 옛날처럼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녀의 발소리나 목소리나 웃음소리만 들어도 기뻤으며, 특히 미소 지을 때 드러나는, 약간의 사시가 섞인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룻밤만 묵을 작정이었던 계획을 바꿔 이틀 후 부활절까지 고모 집에서 지내기로 한다. 

뻬쩨르부르그에서의 생활과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생긴 그의 광적인 이기주의는 그의 동물적 자아에게 힘을 불어넣었고 그 무렵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까쮸샤를 만나고 예전의 감정을 되찾게 되면서 네흘류도프 안에 조용히 잠자고 있던 정신적 자아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운명은 그의 부활을 반기지 않았다. 성스러운 부활절 밤이 지난 직후 무서운 사건이 그에게 벌어졌다. 그 사건은 모처럼 네흘류도프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던 정신적 자아를 마구 짓밟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랑을 가장한 순간적인 정욕을 참지 못한 채 네흘류도프는 그만 까쮸샤의 몸을 농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날 그녀의 품에 백 루블이라는 돈을 떠안기면서 그녀의 감정까지 모욕한 채 떠나버렸다. 세상일이란 다 그런 거라며,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는 거라며, 귀족 특유의 무책임한 합리화에 몸을 맡기면서.

명백한 성폭력이었던 그 사건 때문에 까쮸샤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네흘류도프의 고모들은 까쮸샤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를 가차 없이 내쫓아버렸다. 시간은 동일하게 흘렀다. 간신히 이웃의 도움으로 까쮸샤는 출산을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정신적인 변화를 겪은 그녀는 더 이상 선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만난 모든 여자들은 그녀를 돈벌이 수단으로 보았고, 그녀가 만난 모든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보았다. 버림받은 몸으로 의식주가 어려워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셨다. 사내들과 더불어 점점 쾌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 잠시 괴로움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까쮸샤는 몸을 파는 여자가 되었다. 

이 작품은 부활절 밤 네흘류도프와 까쮸샤 사이에서 발생했던 돌이킬 수 없는 그 사건 이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을 현재로 하고 있다. 배심원으로 참석한 재판에서 네흘류도프는 우연히 까쮸샤를 만나게 된다. 작품의 시작이다. 그녀는 놀랍게도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피고인 중 하나였다. 설상가상으로 까쮸샤는 그날 벌어졌던 배심원과 재판관의 성의 없는 실수 때문에 억울하게도 유형 판결을 받고 말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네흘류도프는 전율과 함께 죄책감을 느끼며 과거의 모든 기억을 되살려낸다. 그 기억은 그의 양심을 짓누르고 있었던,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무거운 죄를 일깨웠고 그 죄를 마음속에 지닌 채 안일하게 살아왔던 지난 10 년간의 삶을 이루던 자신의 매정함과 잔인함과 비열함을 인정하도록 압박했다. 그의 마음속에선 아주 오랜만에 또다시 두 자아가 대립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네흘류도프는 그 예기치 못한 순간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결혼을 해서라도 죄를 속죄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채 시베리아 유형수로 판결이 난 까쮸샤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엔 자신이 그녀에게 저지른 추악하고 비열하고 무자비한 짓이 자리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신비한 ‘영혼의 정화’ 현상을 경험하자 순간적으로 기분이 매우 상쾌해지고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뿌리 깊고 역겨운 비열함을 인정하면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동시에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유와 해방과 용기와 삶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선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믿게 되었다. 그의 내면에선 부활이 실제로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후 네흘류도프는 비록 내면에선 지속적인 두 자아의 갈등을 경험하게 되지만 매번 정신적 자아의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 세계로의 이동은 기존 세계에서 잘 작동하던 시스템을 버리거나 파괴해야만 하는 용기와 결단, 그리고 실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법이다. 네흘류도프는 그것들을 하나씩 해내기 시작한다. 역시 귀족 자제인 미시와의 결혼을 포기했고, 까쮸샤와의 과거를 남들에게 숨기지 않게 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받는 뭇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화려한 집은 물론이며 지주로서 가지고 있던 땅도 농민들에게 헐값에 나눠주는 등 갈수록 정의로운 일이라 믿는 일에 확신을 가진 실천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정신적 자아의 승리는 비단 까쮸샤라는 한 여자에게 범했던 과거를 속죄하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영혼의 정화 작용은 점차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일에서 한 귀족과 한 평민의 일로, 그리고 그 당시 러시아 귀족 신분과 평민 신분 간의 대립으로, 나아가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으로 확장, 인식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작은 하나의 둑이 무너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너져야 할 견고한 시스템을 가진 모든 불의한 댐들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까쮸샤 덕분에 감옥 안에 갇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고 그들을 실제로 도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단 한 번도 인지하지 못하는 세상이었고, 설사 인지한다고 해도 그들과는 전혀 무관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네흘류도프에게 그 세상은 변혁되어야만 하는 세상이었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엔 그것을 하는 데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각오까지 하게 된다. 그는 그 자신의 신분은 물론 자신이 그동안 해온 태만과 기만과 교만의 죄를 낱낱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는 네흘류도프 혼자만의 죄가 아니라 모든 가진 자들의 죄였다. 네흘류도프의 눈은 바뀌었다.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 비로소 개인의 죄가 아닌 구조적인 악의 실체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구조적인 악 중에서도 네흘류도프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까쮸샤 덕분인지 형벌에 관계된 시스템이었다. 그의 질문은 매우 단순했다. 즉 자신들이 괴롭히고 매질하고 살해하는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일련의 사람들이 왜, 그리고 무슨 권리로 그들을 투옥하고 괴롭히고 유형을 보내고 매질하고 살해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였다. 그는 여러 논문과 책을 탐독하며 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문헌들 속에는 지혜롭고 이론적이며 흥미로운 점이 많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형벌을 가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었다. 네흘류도프의 생각은 보다 깊어져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르기도 한다. 만일 그들도 공직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런 비열한 행동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그들 대부분은 본래 온순하고 착한 사람들이지만 공무를 처리한다는 이유로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된 것이라고. 그들은 직무와 의무를 인간애보다 더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인간을 대할 땐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 사랑은 인간 생활의 기본 법칙이다’라는 결론에까지 봉착하게 된다. 

까쮸샤의 억울한 판결을 돌이키려 네흘류도프는 원로원에 상소를 했지만 기각되고 말았다. 절망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가망 없을 것 같았지만 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로 한다. 시간이 흘러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탄원서가 받아들여졌고, 까쮸샤는 시베리아 유형수가 아닌 이주형으로 변경되어 석방되기에 이르렀다. 기적이 일어난 듯했다. 그러나 까쮸샤는 그 사실을 온 맘으로 기뻐하지 않았다. 

네흘류도프는 수차례 감옥을 방문하기도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시베리아 유형수들의 대열과 함께 이동하는 길고 긴 여정에서 까쮸샤에게 모든 진심을 털어놓고 결혼하자는 제안까지 했었다.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까쮸샤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만나고 그녀를 돕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와 참회 사실을 알게 되면 몹시 기뻐하고 감동하여 옛날의 까쮸샤로 돌아갈 거라고 기대했었다. 지난 10년이란 세월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네흘류도프의 부활이 까쮸샤의 부활로 이어지기 위해선 까쮸샤 역시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고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을 결단해야만 했던 것이다. 까쮸샤는 네흘류도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지기도 했다. 날카로운 창이 되어 네흘류도프의 가슴을 깊이 찌르는 말이었다.

“내게서 물러서. 난 유형수고 당신은 공작이야. 당신은 이곳에 아무런 용건도 없어. 당신은 날 통해서 구원을 받고 싶은 거로군. 이 세상에서 나를 희롱하더니, 저세상에서는 나를 통해 구원을 받겠다는 심보야! 난 당신이나 그 안경, 그 반질반질하고 추한 낯짝까지 모두 증오해. 돌아가. 돌아가란 말이야!”

물론 감정이 폭발한 상태에서 했던 말이었고, 실제로 까쮸샤는 네흘류도프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다. 네흘류도프가 시베리아 유형수인 자기와 결혼한다면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에게 그런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서 황제 탄원서가 받아들여져 석방될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네흘류도프의 진심을 알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부활이 꿈틀대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작품은 네흘류도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까쮸샤 문제가 끝이 났지만, 그에겐 다른 일들이 산재해 있었다. 귀족 신분으로서 상류 사회에 뿌리 깊게 각인된 불의를, 그 죄악을 척결하기 위한 일들이 그의 활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해답을 얻는다. 죄악으로 죄악을 바로 잡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논리라는 것을. 인류가 고통받는 그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죄인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처벌한다든지 교화할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임을 이제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죄짓지 않은 사람이 없고 따라서 남에게 벌을 주거나 남을 교화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몇 번이고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게 되었고,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적인 죄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부활’이라는 제목에서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듯이 기독교 정신이 깊게 녹아든 소설이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장편소설이기도 한데, 첫 번째 장편 ‘전쟁과 평화’는 그가 36-41세에, 두 번째 장편 ‘안나 카레니나’는 46-49세에 쓰였다는 사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인 ‘부활’은 거의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그가 67세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71세에 마쳤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 20년이란 세월이 톨스토이에게 있어선 부활과도 같은 삶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작품 ‘부활’은 그가 그 20년간 깨닫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농축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문학 작품이 그렇듯, 작품 속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톨스토이의 분신으로 역할했던 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하여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한 구조적인 악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그 원인이 가진 자들의 착취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이 모든 사회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네흘류도프와 같은 가진 자들의 부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봐도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우리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지만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가진 자들은 합법적인 차별과 처벌을 일삼아 가지지 않은 자들을 혐오,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은 더욱 견고해져서 그것이 사회 전체의 동물적 자아로 둔갑하여 모든 사람들 내면에 있는 정신적 자아를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작품은 초중반은 물론이며 후반부와 결말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인 메시지를 듬뿍 담고 있는데, 이는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가 19세기 말이었고, 그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가 폐지되었지만 근본적인 차별은 그대로 남아 어쩌면 더 큰 구조적인 악을 양산하고 있었던 무렵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이 작품의 메시지는 상당히 급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3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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