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1. 어떤 동음이의어  

 대부분의 필자 세대(20대)가 그렇듯이, 우리는 대부분 '그들'을 잊고 지낸다. 책을 읽으며 그들의 이름을 듣고서는, 새삼 끓어오르는 피를 느끼고,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신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사실 '그들' 이라는 대명사에는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의미만을 가진 단어의 껍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필자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고, 새삼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신해 비난과 조소, 그리고 무엇보다 '증오'를 표출하고 싶게끔 만드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한 '그들'에 대한 감상은, 필자로 하여금 다시금 '지금-여기'에 대한 반추, 그리고 현-존재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현시적 물음을 다시금 담지하게 만든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그들'은, '독립' 혹은 '투쟁' 그리고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위해 스러져 간 모든 이들을 뜻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이 파란만장한 역사의 순간에서 단순한 '욕동' 만을 좆은 비루한 인간군상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러한 동음이의적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어떤 모종의 '기시감'이 존재한다. '그들'에 대한 사유는, 동시에 우리들에 대한 사유이며, 따라서 그것은 현실 정치에 대한 '재해석'과 관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것은 끝없이 '반복-재생'되는 우리들의 지난한 정치적 혹은 존재적 '무력감'을 다시금 깊숙한 역사의 현장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리영희라는 하나의 '기표'를 읽어내려가는, 혹은 사유해나가는 작업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기표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 우리들이 단순히 리영희라는 '사상의 은사'를 박제시킨 사상적 '유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유물이란, 사실 결코 '평전'이라는 바이오그래피 안에 박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기 이곳, 한국의 정치적 현실이라는 하나의 구체적 '투쟁'의 장소 속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사상-현실적 '표본'들은, 결국 우리들의 정치적 투쟁, 혹은 갈등의 첨예화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해야만 한다. 물론 그것은 그의 업적에 대한 수단화나 찬양 따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2. 리영희의 재구성 

그의 평전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오고, 사라(스러)진다. 그것은 그의 생애가 다름 아닌 한국의 생애와 함께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의 투쟁이, 그 속에서 하나의 진정성을 만들어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의 투쟁은, '지식인'이라는 탈을 쓴 사회적 동물의 '책임'을 도외시하지 않은 데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해서 그들이 다 지식인이 되고 교수가 되어 지적/사상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나가는 것으로 사회가 변화하는 양과 속도에 비해서 신문에 논평하나 쓰면 훨씬 더 효과가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p.264 

그리고 바로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의 태도 혹은 위치(stance)가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물론, 바리케이트 옆에 서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언론'이라는 '비상구'를 통한 그의 활동이, 다름 아닌 '지식인'이라는 사회적, 도의적 책임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고, 동시에 현실의 기만적 통치(이승만 ~ 박정희 ~ 로 이어지는)에 대해 그가 가진 유일한 '정치적 무기'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정치적 투사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고 소회하고 있고,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이른바 '현실참여' 혹은 '영향력'에 있어서 그가 이룬 작업들에 대해서는 그 '정치성'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만 그가 언론사와 대학 교수를 넘나들며(그리고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글쓰기'라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현실를 재구성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 즉 한 명의 '저자'로서의 우리들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정초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교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만, 그의 말 속에서 지식인의 '생산'과 글쓰기의 '생산', 그 영향력 사이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이며 시차적인 간극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2011년의 정치적 현실 - 민주주의는 개나 줘버려, 하고 살아가는 - 에 '끼여있는' 세대론의 '주인공'이자, 실존적 '엑스트라'인 우리들 자신의 글쓰기를, 사회적 영향력의 도구, 그리고 무엇보다 '생산력'을 통한 '저자'로서의 글쓰기로 바꾸어 나가자는 고민으로 치환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리영희 자신에 대한 '음미', 혹은 미학적인 '감상'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칼날 서린' 비평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논조'는 지나치게 찬양에 가깝다.) 그러한 비평을 통해서만이, 그에 대한 현재적 '재구성'의 작업이란 가능하게 작용할 것이다.

더불어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주체적 의미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요컨대 리영희라는 기표에게 있어, 혹은 그것을 사유함에 있어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현재적 필요성은, 들뢰즈가 말한 '탈영토화', 그리고 '재영토화'와 관련된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리영희라는 비판적 글쓰기의 노동-기계를, 그의 역사적 스탠스 혹은 점유 상태로부터 '탈영토화' 하여, 우리의 '기만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유토피아적 '지식인상'으로 '재영토화'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우스갯소리지만, 동시에 단순히 그것으로만 끝나지는 않는 음험함을 지니지 않을까, 싶다. 

3.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나? 

글쎄. 필자는 잘 모르겠다. 새는 물론 생물학적으로 날개가 두 개(그러니까 좌우에) 있어야 날 수 있다. 하지만, 새들은 동시에 날기에 적합한 '물리학적, 생물학적 환경'이 존재해야 날 수 있다. 새를 달나라에 순간이동 시켜보자. 날 수 있나? 아마 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부유'할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요지는, 좌우파를 나누는 어떤 경계,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수많은 헛소리와 궤변, 그리고 정당정치와 대의제를 위한 일종의 '기만'을 위한 좌우의 '양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러운 숨을 내뱉는 바로 그 공간의 '공기'와 '중력', 그러니까 바로 정치적 현실을 위한 '환경'의 필요성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새에게 좌/우의 날개는 조물주에게 맡겨진 하나의 (정당정치적) 숙명이다. 진정한 우파도, 진정한 좌파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에서야, 우리는 그것의 '존재적 필연성'에 대해 재차 반복, 숙달할 필요가 없는 게다. 그것 보다는, 바로 그러한 정치현실적 환경의 개선, - 그 환경이란, 바로 '민주주의'가 가능케 되는 하나의 '물적 토대'를 일컬을 수도 있겠지만 - 그리고 그것을 위한 '중력' 혹은 '산소'가 필요한 시점이라 할 만하다. 

결국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실현 불가능한' 선택의 기로와 관련된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선택'이란 가능한가? 그것은 오히려 '정치적 선택에 대한 선택 불가능성'이라는 우리들의 주체적 아니러니와 관련되지 않는가? 예컨대, 우리들은 현실주의자로서의 우리를 상정하지 않고는 일종의 '탈주' 혹은 '유토피아'의 구상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냐는 (체게바라의 '명언'에 대한) 지젝의 사르카즘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안에는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야.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네. 이때 자네가 큰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세. 그러면 불행한 이 몇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지 않은가?" p. 265

리영희가 많은 감응을 받았다는 루쉰의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이 평전에서 가장 의미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어쨋든 이 일화에서 '자네'는 선험적으로 어떤 '지식인'을 상정하고 있다. 이미 깨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필자는 이 일화에 지나친 엘리트주의가 숨어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네'가 해야만 하는 어떤 '선택의 강요'에 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이란 가능한가? 오히려 그것은 리영희에게는 '선택 불가능한' 문제였다.

리영희는 루쉰의 이 일화를 통해 그의 '목표'를, 즉 '소리지르는 사람'으로서의 미래를 지속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고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네'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에는, 리영희와 같은 '저자'의 목소리와, 그를 대변할 '언론'의 존재가 선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새가 날기 위한 환경적 조건'이리라. 다만, 우리는 리영희의 현실과는 별개로 '반공주의'와 '독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현상황에 대한 '인식'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러한 인식 속에서, '자네'가 소리지르는 행동은 그저 하나의 '소음'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소리지른 자네는 우리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강철'로 된 방 안에 갖혀 있으며, 살아가고자 하는 '욕동'을 진정한 '희망'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는 하나의 '메세지'가 선험되어야만 한다. 즉, 우리에게는 '반공주의'와 '독재'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인식과, 진정한 (유토피아적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반동적 '제스쳐'가 필요한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선택 불가능한' 문제이다. 요컨대, 우리는 다만 '내부의 확장'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외부'로 이행하는 과정, 그리고 그 정치현실적 '외부'로부터 다시금 '내부'로 향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으로서 진정한 혁명적 사고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겐 2.0 버전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필요한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 주세요.

 

다소, 샌델의 저서 제목의(정의란 무엇인가) 여운이 짙게 느껴지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래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해보자면, 눈에 보이는 '주먹'보다 '보이지 않는 주먹(손?)'이 더 무섭다는 걸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서평들에 의하면 지젝의 주저에 비해서 비교적 쉽게 쓰여졌다고들 하니, 지젝에게 거부감을 느꼈던 많은 분들도 한번 쯤 도전해봄직 하다는 생각이다.(물론 이것도 상대적 감상이며, 지젝읽기는 사실 라캉-헤겔을 경유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더불어 단순히 제목에서의 '폭력'에 대한 사유를 넘어서서, 이 책은 '리버럴'한 사유에 대한 굉장히 '쿨한' (비판적)제스쳐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추천! 

 

인문학 신간을 찾다, 인도에 대한 저서를 오랜만에 발견했다. 개인적 상황과 관련된 것이기도 한데,(인도행 여정(..)의 기회가 두 번이나 날아갔으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인도에 대한 우리들의 '환상'을 걷어내기 위해서라도 필독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해 인도라는 나라가 가진 사회,정치,경제적 상황과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라 할 만한데, "화장을 지운다"는 비유가  비슷하게 들어맞을 듯 하다. 간디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던가, 달리트 운동과 마오이즘적 좌파의 움직임에 대한 대안적 고찰도 담겨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을 순순히 선택하신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추천사가 '후덜덜'한 책도 오랜만이다. "우주는 어떤 계획아래 세워졌으며, 그 계획의 심오한 대칭은 어떻게든 우리 지성의 내적 구조에서 나타난다"는 폴 발레리의 문구로부터 시작되는 이 오묘한 저서는, 한 여름의 시나이 사막을 헤매는 수학자의 사유에서부터 출발한다. 수학이라면 치를 떠는 필자임에도, '수학자'들의 수학놀이에는 흥미가 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으니, 과연 이것은 한국교육의 현실을 탓해야 할 것인가, 필자의 무지함을 탓해야 할 것인가. 여하건, 이 책이 가져다주는 수학에 대한 '호기심'과 기하학적 충격에 대비해야만 하지 않을까.

 

사랑해 마지않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이 재출간되었다. 지은이가 E.H.Carr 라는 사실은 약간 새삼스러울지도 모르는데, 그는 확실히 단순한 역사가의 위치를 점유하지많은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이나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를 남긴 그의 '러시아'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역사가의 그것을 뛰어넘는지도. 저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성장기로부터, 상뜨 빼쩨르부르그에서의 젊은 시절, 유형과 결혼, 외국에서의 거주생활, 그리고 다시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잘 그려내며, 그 사이에서 작품들에 관한 의미 또한 찾아내고 있다.  

 

그의 평전을 추천했으므로 다른 책을 추천할까 했으나, 이왕 도스또예프스끼를 고른 김에 그의 책을 하나 더 추천해본다. '마르끄 슬로님'의 저서인 <도스또예프스끼와 여성> 또한 로쟈의 글을 보고 흥미가 갔으나,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비평'을 신선하게 보았던 일본의 비평가 '시미즈 마사시'의 글에 더욱 흥미가 간다. 목차를 보니, 주로 <죄와 벌>에 대한 비평적 독해가 주를 이루는 듯 보인다. 어쨋든 그의 작품은 확실히 '다각적'이며, '다층적'으로 독해되어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추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1-02-13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대칭>을 추천하신 분들이 꽤 있네요. 이참에 과학도서 한 권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도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을 추천했는데,, 내심 선정되기를 바랄뿐입니다. ^^;;

yjk7228 2011-02-14 15:4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네 이번엔 저도 과학분야 도서가 한 권쯤 선정되었으면 하네요 ㅎㅎ
저도 위에 다섯 권중 한권이라도 선택되면 좋겠지만, 제가 여태 추천한 책들 중 한 권도 선택되지 않은 불우한 이력을 지니고 있어서.. ㅋㅋㅋ
 
<진보집권플랜>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국, 이라는 사람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이 정도면 필자의 '무지'가 얼마나 충분한지 알 수 있을게다.) 오늘의 기사였던 동아일보 홍찬식 논설위원의 칼럼을 통해 그의 '위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것도 포함시켜야겠다.(http://news.donga.com/3/all/20110126/34385678/1)   

그다지 '반박할' 가치도 없는 글이긴 하지만, 조국 교수의 반박(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126184640)은 꽤 통쾌한 편이다, 아니 뭐 특별할 것 없는 글에 대한 반박치고는 좀 너무 '열심히' 인 편이다. 어쨋든 '폴리페서'라는 무식한 주장은, '범주'를 벗어난 논의라는 생각이 든다.(근데, 폴리페서이자 '강남좌파'이면 또 어떤가? 필자는 그런 '척'을 하는 교수도 흔히 보지 못한다. '정치적 중립성'은, 소수의 공간을 제외하면, 그다지 '필요없는' 개념이 아닐까. 차라리 수구/보수와 개혁/진보의 양 쪽의 사상을 모두 적극적으로 '표현해주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울지도.) '정치교수-비판적 지식인' 중의 택일이라니?! 그렇다면 관악구에 거주하는 비판적 지식인은 정치적/당파적 자율성을 표현할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을 '선택'을 강요당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이것은 '교수'라는 그의 직업적 특성 때문이기는 하지만, 교수 또한 시민권을 가지고,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 오히려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는 - 위치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무슨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을 법학수업시간에나 퍼뜨리는 '빨갱이'인 마냥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정치'로부터 대체 어떤 분야가,직업이,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 같이 읽은 '촘스키와 푸코' 대담집에서의 푸코의 말처럼, "대체 왜 '정치'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단 말인가?!" 

서두가 길었지만, 여하건 이 책, <진보집권플랜>과 오늘 몇 줄의 기사를 통해 내가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건, 꽤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가 필자의 마음에 '쏙 드는' 인간형이라기보다는 - 분명 그의 정치성과 필자의 그것은 다르며, 추구하는 가치 또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 그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인 우리 사회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몇 가지 부분에서 그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플랜의 순서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겠으며, 필자의 무지 덕택에 오독한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책은 '대중'을 위한 두 사람의 노력이 충분히 고려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촘스키와 푸코~>도 그러한 것 같고.) 

1. 교육, 그리고 20대와의 '연대'

'김예슬' '사건'과 관련하여, 그들이 풀어내는 한국 교육에 대한 대화는 비교적 그 맥락을 잘 짚어내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한국 교육의 맹점들 - 조기교육을 비롯, 사교육 문제(공교육의 약화), 서울대 폐지-분할론, 20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에 대한 내용까지 - 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젯거리'가 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봉착하는 지점들이, 바로 우리, '20대'의 주체성, 그 짓눌린 주체의 자국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특히 김예슬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은, 필자를 비롯하여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진지하게(사실 굳이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을 듯도 하다. 오히려 이것은 약간의 '진지하지 않음'이 필요한 작업같기도.) 고민해보았으면 하는 부분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가, 아니 왜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가' 하는 것들. 

더불어 서울대 폐지론에 대한 조교수의 '분할론'은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첨가된 듯 보인다. 서울대가 가지는 모종의 '권위'를 해체하자는 듯이 보이는데, 과연 얼마나 '효과성'이 담보될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와 같은 현상적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무조건 "서울대를 없애자!"는 일종의 강박적 히스테리보다는 좀 나아 보인다.) 

하지만 사교육 문제에 대한 그들의 대화는 좀 밀도가 떨어진다. 단순히 '공교육의 강화'를 위해 조교수가 대안으로 내놓고자 하는 것들은, 물론 충분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는 있겠지만,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과연 'EBS와 강남구청 수능강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그게 최선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물론 필자는 생각이 좀 다르며, 더불어 단순히 그의 논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식이 아니지만, 그 구체적 '형상'에 대한 의문점이 든다. 

또한 20대와의 연대,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정치활동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자기규정' 속에 빠져있는 세대론적 갈등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생각들도 비교적 구체적이지 않은 듯 보인다. '청년유니온'이나 '백수연대'같은 집단적 움직임들이 '어떻게' 그들과 '손잡을 수' 있을까.(아니, 20대는 그들과 '손잡아야만' 어떤 움직임에 대한 '정치적 의미'혹은 효과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인가.) 단순히 20대의 움직임을, 그 미세한 흔들림을 감지하고 손뻗을 만한 '진보'의 모습을 만들수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물론 그것은 그의 화두가 아니라 20대 그 자신들의 화두이자, '범주'이기는 하지만, 20대가 펼쳐나가야만 하는 현실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조금 더 고민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석훈류의 '침묵'으로 남고 말 가능성이 커 보인다.

 2. 매력적인 진보, 밥 먹여주는 진보 

'개혁/진보'라는 말이 계급론적인 '좌파'보다 쓰기 알맞은 말이라고 하니, 그렇게 해보자. 서두에서 그들은, 단호하게, 그리고 절대적인 '진보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인사들에 대한 충분한 쓴소리가 첨가된, 비교적 '통쾌한' 발언들이다.  

사실 '정치'와 '현실' 그 사이에는 필자같은 사람들에겐 충분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혹여 정치라는 학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에는 그만큼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수많은 이들(필자를 포함한)의 외상적인 정치적 스탠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의 말처럼, 진보라는 이름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의 말처럼 '밥벌이'와 '생계'에 매몰된 학계에서는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루는 건, 결국 이 밥벌이와 진보라는 어울리지 않는, 무엇인가를 '통합'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아니다. 무상급식 논쟁까지의 진보는 과연 우리에게 진보라는 이름에 대한 '이미지', 혹은 좌표를 올바르게 인식시킬 수 있었을까? 

물론, 진보는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진보가 아무리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심지어 진보가 공짜로 급식까지 먹여준다 하더라도, 탈정치화된 대중과 20대라는 세대론적 공간에는 미개척된 '영토'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대중의 현실에서 괴리된 '정치적 현실'이 단순히 '밥벌이'와만 관계되어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의 말처럼, 대의제에서의 '대표자'란 결코 대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장치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입장'(결국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당'의 입장)을 선언하는 장치로서 존재한다. 그들의 논의에서처럼, 이러한 대의정치의 한계를 고려할 때, 과연 매력적인 '정당'이란, '우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정당정치'에 대한 막연한 '희망'에서부터 진보의 변화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보라는 것이 단순히 '진보정당'으로 병치되는 것은 다만 그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진보진영을 향한 변화,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적어도 한국식 정당정치에 대한 그다지 긍정적인 희망을 가지지 않는 필자로서는) 가장 근본적인 '민주주의', 그 자체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과연 민주주의는 '살아' 있는가?  

-- 

그들은 비교적 '까놓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MB정권의 무지함과, 수구/보수,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개혁/진보 진영의 인사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거대자본과 삼성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으며, 검찰개혁에 대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만약 우리세대 중, 정치와 자신의 현실, 미래 그 무엇때문에라도 이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된 이라면,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만 한 책인것 같다. 물론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가끔은 조금 편향적이며, 어쨋든 '진보'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재집권', 권력의지를 어떻게 향유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가 이 책의 '이름'이니까. 다만, 이 책의 가장 주요한 '필요성'은, 탈정치화된 현실을 살아가는, 그래서 무의식적 정치편향을 농축시키고 있는 우리들 자신, 그 '슬픈 현실'에 대한 자신만의 '사유'를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초석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초석이다. '잔치'를 시작하려면, 세대론을 넘어선 '주체적 사유', 단순히 지식자본과 소유된 가치들을 넘어선 주체성의 사유가 우리에겐 필요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정상에 이르는 길이 여러개라는 뜻도 되고, 산을 오르는 방법이 여러가지라는 뜻도 된다. 혹은, 그것은 산을 오르는 '이유'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대개는 건강과 행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산을 오를테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복'을 위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사색을 위해서 산을 오르기도 한다. 거칠게 보자면, 등산은 대개 무언가를 잔뜩 '채우는' 활동이 되거나, 혹은 무언가를 모두 '비우기' 위한 활동이 된다.

촘스키와 푸코라는 유명한 두 사상가의 대담은, 언뜻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로 판명되기도 하나, - 물론 공통점도 있다. 동시대의 두 인물에게는 푸코의 말마따나 어떤 정의된 '정의'가 있는 것이다 - 단순히 그 이분법이라는 것이 어떤 활동 그 자체의 즉물적인 목적을 위한 것은 아니다. 즉 다시 말해 두 사상가의 이분법적 구도는, 오히려 그 자신들의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회용' 대담에서는, 그러한 사상적 내밀함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히려 이 이분법적 구도에서 펼쳐지는 두 사상가의 '입심대결'에서 알아보아야만 할 것은, 그들의 내부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내부 - 그 사이의 분절된 간극과 그 간극만큼이나 즉자적으로 '분열된' 우리의 사유-체계이다. 

둘의 대담에서의 디페랑스적 요소 - 촘스키에 의해 정의되는 푸코적 텍스트와, 푸코에 의해 조명되는 촘스키적 텍스트에 관해, 그리고 필연적으로 지연되는 그 '해석'에 관해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인간성을 구성하고 있는 스키마를 기본 요소로 판명하는 촘스키의 언어관에 대하여, 푸코에게는 그 '인간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지표, 그러니까 기타 담론에 대한 하나의 '인식론적 지표'의 역할만을 할 뿐이며, 과학적인 개념으로서 작용하지도 않는다.  데카르트가 촘스키적 '창조성'에 하나의 기준이 된다면, 푸코는 그러한 일반적 '기준'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스피노자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촘스키가 주장하고 있는 '아나코 생디칼리즘'에 대해 푸코가 이렇다 할 반문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인데, "사회-정치적 권력과 신체들을 통제, 억압하는 감춰진 관계들의 폭로"를 위하여 과연 자유론적 사회주의가 올바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좀 더 끌고나갔으면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만 뒤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에 관해 사유하는 모습에서는, 역시 필자 자신이 푸코의 생각에 가깝다는(혹은 가깝고자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촘스키의 '보편문법'이 틀렸다거나, 비본질적인 내용이라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러한 '내면적' 사상에 잠식한 '내면'을 까발리고자 했던 것이 푸코의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경제 권력의 지배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입니다" 

이러한 푸코의 발언은, 일종의 '유토피아적' 구상에 대한 사변적 논쟁과도 일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의 말마따나, 과연 "계급 없는 사회에서의 '정의 논쟁'혹은 '정의의 정초'는 가능한가?"하는 것. 이것은 다만 인간성을 어떤 '보편-절대적 기반'으로 간주하는 촘스키의 '권위'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과연 계급과 계층과 억압과 공포가 사라진, 진정한 '민주주의'의 재건 속에서, - 그러니까 그러한 유토피아적 건설 속에서 - 우리가 느끼는 '정의'라는 개념과 '인간성' 내부의, 혹은 '주체'라는 '충분히' 분열된 개념은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 더불어 그것은 촘스키와 같은 비교-중도적 탈중심화에서는 결코 발견되어질 수 없는어떤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조를 중시하여 사건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처럼, 반대로 사건을 중시하여 구조를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유형의 사건들이 다양한 층위를 형성한다는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탈구조주의자적'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한 만하다. 구조에 편입될 수 없는 '사건'들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론적 경로들을 가지며, 그러한 의미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투쟁과 전략 - 상징주의적 분석이나 기호론적 분석, 그러니까 헤겔적 회피와 기호론적 안일함을 배재한 -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투쟁' 자체의 '현실'적 면면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면서' 사건의 탈구조화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이후에 나오는 권력과 '억압'에 대한 그의 의견은 꽤 유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억압이라는 개념은 권력의 효과를 규정하는 데 권력의 사법적 측면에 너무 치중하는 것입니다. 권력이 순전히 억압적인 것, '안 돼'라고 말하는 것뿐이라면 사람들이 그것에 순순히 복종하리라고 보십니까?" 

이러한 그의 의견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대안은, 권력 관계에 대한 분석이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부 구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진정한 분석과 대안도출이 어렵다는 것.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 그래서 그의 이러한 사상이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 국가의 범위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현실적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그것이 어떤 '국지적' 혁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대의'는 언제나 국가라는 틀이 아니라, 구조적 관계를 넘어선 탈구조적 '공동체'와 연대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 

"누구도 임명하지 않은", 그래서 "그 누군가로부터도 임명되지 않은" 보편적 '개인'으로서의 우리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본질적' 분석에 대하여 그는 하나의 '관계망'을 남겨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관계망에 대한 분석틀, 상징계적 현실에 관한 비판적 분석틀을 위한 '보편적 개인'의 '투쟁'은 지금-여기에도 충분히 유효하다. 푸코를 읽는 것이 개인에게 언제나 '현실'을 읽어나가는 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투쟁의 굴레, 그러한 '전체적이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우리의 사유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는 개인적 '주체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 주세요.

 

 

'장 뤽 낭시'라는 프랑스 '공산주의-철학자(!)'의 책. 바디우의 '찬사' 만큼이나, 그의 '공동체'에 관한 사유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듯하다. '무위의 공간'에 대한 그의 사유는 왠지 아감벤을 떠올릴 만도 하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는 지난 달 선정된 저자인 샌델의 사상과도 비교해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고진과 연결될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최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의 '영향력 있는' 주제(정치철학?) 이니, 한번 쯤 살펴보면 좋을듯. 

  

12월에는, 요상하게도 인문/철학 저서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온것 같다. 그래서 사실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반대로 한꺼번에 이해하기 버거운 내용들이 많아져서 당황스럽기도 한 것이 사실. 낭시가 나왔으니, '데리다'의 명저 또한 결코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이 저서에 대한 필자의 조악한 설명은 그닥 필요없을 듯 하고, 책 소개를 간단히 덧붙인다. 

" ...실제로 <그라마톨로지>는 책 제목이 독자에게 암시할 수 있는 주제 내용과 달리, 결코 하나의 문자학 이론이나 문자 철학 또는 언어철학 등의 단일 주제로 표상될 수 없으며, 생명과 죽음, 자연과 문화, 여성과 남성, 문명과 야만, 기억과 망각, 외면과 내면, 선과 악, 목소리와 그래피즘, 의식과 무의식, 현존과 부재, 충만과 소외, 고유와 은유, 욕망과 쾌락, 성욕과 자기 관능성, 역사의 기원과 과학의 성립 조건, 관음과 자위, 언어와 정치, 음악과 정치, 화성과 선율 등 인문학의 거의 모든 주제를 아우르고 있는 서양 인문학의 대서사라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책 소개> 

 

그린비에서 출간중인 '모리스 블랑쇼' 선집의 세 번째이다. 이 저서에서는 특히 카프카, 릴케, 횔덜린 등의 작품에 대한 그의 본질적인 분석이 행해지고 있다. <무한한 대화> 편도 보고싶지만, <문학의 공간> 또한 그의 중심 저작으로서 그의 사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니, 한 번쯤 탐독해보면 좋을듯! 

 

지난 달에도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을 추천한 바 있는데, 사실 '유아(년)기의 역사' 같은 그의 대표작이야 말로, 그에 대한 이해를 위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는 점에서 정말 반가운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저자들, ㅡ 벤야민과 마르크스, 하이데거를 '재사유'하고 있는 이 책의 근본적인 '논점'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이나, 현재 일시 품절상태다.(14일 경 재입고되므로, '혹여' 선택된다면 문제는 없으리라 보지만.) 어쨋든 재미있는 일인데, 물론 초판을 너무 적게 찍었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최근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 중의 한명인 '알랭 바디우'의 손꼽아 기다리던(국내에 제대로 번역-소개되지 못했으므로) 명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놀라운 사실인 듯.  수학의 '집합론'을 존재론과 결합함으로서, '철학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거대 서사'와의 대립을 보여주는 반-포스트모더니즘적 도전이며, 따라서 그것은 '플라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하겠다.

정말 12월에는 읽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도록' 나온 것 같다. 바디우의 '사랑 예찬'과 같은 책들도 추천하고 싶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도 재도전해보고 싶었다. 아무쪼록 좋은 책이 선택되었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