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상 - 완역본
투키디데스 지음, 박광순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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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전쟁이다. 전쟁으로 인해 어떤 민족과 국가가 역사로부터 사라지고,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자들이 역사의 큰 물결을 일으킨다. 역사란 그런 물결을 기록하고 바라본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역사에서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 당연한 일들로 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록물로서 정리하여 다시 재조립하여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살아온 인간에 대한 마음을 우리가 알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의 시대와 당시의 시대는 분명히 큰 차이점이 존재하고, 우리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난 시대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란, 전쟁이 새겨진 역사란 바로 지금의 시대에도 큰 유산이 된다는 점이다. 인류의 문명은 당시에는 그 시대 삶의 양식이라면, 지금의 문화재고 기록의 결정체다. 우리가 그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존재한 기록과 유물들로서 우리의 현재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다. 

그 중에서 전쟁은 우리 인간에게 큰 가치를 가지는데, 전쟁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물거품으로 변하게 된다. 전쟁을 연구한다는 것은 지금의 시대와 다른 양태라 해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을 가장 연구하기 좋을 시기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이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고 빼앗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고, 게다가 자신에게만 그 피해가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주변사람마저 비참하게 만든다. 전쟁에 패배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까지 사라진다. 그리고 전쟁에 닥치는 위기란 평소 알 수 없었던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게 해준다. 이런 전쟁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 시대의 상황을 정리한 서적이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다. 펠로폰네소스는 그리스 아테네가 번창하던 시기, 전쟁의 중심지역이 되던 도시이름이다.


아테네가 헬라스 지역의 지배권을 잡고, 주변 폴리스로부터 공물을 받아 그 국가적 위엄을 세울 때, 다른 동맹국이 다른 나라에 대한 갈등이 시작하면서 전쟁의 소용돌이로 이어진다. 헬라스 폴리스들을 알아보면 절대적 강국 아테네, 그리고 아테네의 라이벌인 라케다이몬인이 살던 스파르타가 있었다. 우연히 동맹국들의 갈등이 공물을 받고 헬라스 중심국가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작은 전투와 시가전이 결국 큰 전쟁으로 이어지고, 대규모 해상전과 육상전이 생기면서 헬라스 일원은 전쟁의 도가니로 빠진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히 보자면, 강한 국가의 동맹국에 대한 침입이다. 그런데 왜 동맹국이 그렇게 나서서 전쟁을 나서는가? 사실 펠로폰네소스전쟁에 대한 근본을 보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한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인으로 전쟁에 참가한 장수이나, 전투 중의 희비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전쟁에서 물러난 그는 모든 정보를 사서 전쟁을 기록한다.


그의 기록을 보자면 전쟁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각각의 상황에 대해 매우 객관적으로 차가운 시선으로 적는다. 다소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문제는 그 인물은 안타깝게 역사의 이슬로 사라진다. 아테네인으로서 느낀 아테네란 국가의 문제점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순간 확실히 느낀다. 그가 자신의 국가인 아테네에 대해 매우 객관적인 역사적 전후관계를 서술하면서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순간 아테네의 문제를 알아갈 수 있다.

 

그가 전쟁사를 기록한 이유는 바로 이 전쟁에 대한 문제를 후세에 남겨 앞으로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역사를 우리가 배우고 생각해야할 점은 역사에 등장하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적 상황과 사건이 다르게 발생해도, 그 근본에는 같은 문제점이 숨어있다. 바로 인간이 가진 딜레마란 점이다. 왜 인간은 이런 실수를 하는가? 반드시 실수란 어느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적인 사회적 분위기란 점이다. 전쟁의 시작은 반드시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을 만들게 하는 원인이 숨어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보면 그 시작은 명분이었다. 동맹국의 침입과 보복, 동맹국에 대한 의리와 맹약 등에서 말이다. 그러나 전쟁은 명분과 실리하고 다르게 언제나 다른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 전혀 파악하지 못할 기습, 생각하지도 못한 지진과 폭풍, 그러면서도 전쟁에 임하는 헬라스의 전사들까지, 그리고 폴리스에 남겨진 주민까지도 말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왜 전쟁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이 가진 우월감과 욕망 그리고 공포다. 남들보다 다른 국가보다 자신과 자신들을 위에 있고자 하는 우월심리는 타인과 타국을 의심과 근심거리로 변한다. 이런 심리들은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 여기는 교만심과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적들의 반격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가지려고 하는 순간 더 큰 비극을 도래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게 되면 전쟁의 구조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일단 기본적으로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투쟁도 존재하지만, 그 시작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의 입장과 시점 그리고 판단력이 작용하나, 나는 문화인류학적인 견해로 보고자 했다. 당시 헬라스 사회는 농업과 상업을 동시에 진행되던 사회이며, 여기서 스파르타는 특이하게 자신의 국가 외의 모든 사람은 모두 죽이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을 본다면 스파르타는 국가 자체가 내부적으로 계급이 엄연히 존재했고, 왕은 위대한 전사들의 장수였다. 그리고 그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강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도록 키운다. 이에 반해 아테네는 부유하고 무장할 수 있는 부류는 오로지 시민들만 가능하고, 자신의 무장장비는 스스로가 구매한다. 결국 이런 구조는 그 국가만의 독특한 환경에서 기인된다고 본다. 아테네는 해상무역과 조공으로 통해 국력을 강조했고, 그에 대한 공물론 금이나 은 이외에도 나무나 자원도 있다. 전쟁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략과 전술, 그리고 전투력이겠지만, 전쟁하기 위해서는 전쟁물자와 인원이다.


전쟁을 위해 아테네는 해군력을 증가한 게 아니라 해상무역의 이권을 가지기 위해 해군력을 증가했다. 이에 따라 다른 비동맹국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불안요소고, 아테네의 독주는 여러 헬라스 국가들의 안위에 큰 문제가 되었다. 아테네는 수많은 인구와 물자가 있었고, 넘쳐나는 에너지는 결국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전쟁으로 이어진다. 아테네는 겉으로 동맹국의 우호를 위해 전쟁을 참전하나, 그 이면에 사회 내부적으로 그들은 과대한 사회구조를 이룬 셈이었다. 전체 인구 10% 정도만 시민이었고, 그들에게 정치적 발언권과 참전전권이 부여되었다. 나머지는 노예, 어린이, 여자, 외국인 등 피지배계층이었고, 지배계층 10%의 시민권자들만 자신들의 이권을 만들 수 있었다.


이들의 이권을 늘어가는 과정은 단순히 전쟁만이 아니라 전쟁 이전의 정치적 행위다. 이들은 어느 폴리스에 이주가거나 혹은 과거 빼앗은 폴리스에 많은 아테네인들을 이주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해갔다. 그렇지 않으면 동맹국을 삼아 그들에게 공물을 요구했고, 이들의 행위는 주변 헬라스국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세력을 넓히는 이유는 새로운 생산양식을 확장하기 위한 방도이며, 그 확장을 위해 군수물품의 소비가 일어난다. 전쟁에 소비된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새로운 약탈이 이루어지고, 다시 또 세력을 확장해간다. 아테네가 일으킨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시작은 바로 그들이 확장하고자 하는 내부적 욕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점으로 극단적인 감정과 행동이다. 아테네인들은 민주주의국가로서 시민들의 입장과 표결로서 운명을 결정했다. 그런데 그 시민들이란 사람들은 작은 사건에 크게 동요하고, 어느 작전과 임무에 임명되는 자들을 꾸준히 활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만약 전투나 임무에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해임하는 것도 모자라 아테네에서 추방하는 방식에서 그들의 민주주의 정치제의 한계성이 드러난 점이었다. 정치적 안건에 공익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 내지 명예욕으로 물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시작하게 되고, 헬라스는 전쟁으로 비극의 시대, 그리고 영웅의 시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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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에서 방영되면서 본 작품은 기존의 가이낙스 작품과 비교하여 큰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이낙스에서 이때까지 마법소녀 장르를 제작하지 않았다.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의 경우 변신한다고 하나 그녀는 인간이 아닌 천사라는 점이고, 마법소녀 장르는 인간인 소녀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이다. 변신이란 속성에 맞추어 보자면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는 일반적인 마법소녀 장르에 큰 차이점이 없다. 주인공들은 미지의 외계인을 위해 우주선의 엔진 조각을 찾아가고, 그것으로 통해 서로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성장물이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을 일본애니메이션 장르에서 보자면 일반적인 마법소녀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조금 다른 특이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감독이 사에키 쇼지라는 애니메이터다. 사에키 쇼지는 1995년 가이낙스에서 에반게리온 동화를 시작하여, 2004<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의 감독으로 활동한다.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에서 각본을 맡은 야마가 히로유키가 제작한 <마호로 매틱>에 참여하고, 2009<마호로 매틱> 특별편을 맡는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2005<이 사람이 나의 주인님>이고, 2012년 니시오 이신의 원작 <메다카 박스>를 제작한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초기에는 가이낙스에서 남성 중심의 오타쿠(열혈, 모에, 세카이계) 속성(<<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사람의 나의 주인님>, <마호로 매틱>,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 <메다카 박스> ) 작품을 제작하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를 제작하게 되었다. 가이낙스 창립 당시 Daicon 3 오프닝을 보면 나이 어린 소녀가 등장하여 비행을 하고 미사일을 날리는 모습이 나온다. 전투미소녀라는 특징과 더불어 롤리타 콤플렉스적인 요소도 등장한다. 전형적인 미소녀 모에 속성에 전투장면을 끼워 넣은 것이다.

 

이런 속성들이 가이낙스의 작품 토대가 되어 <톱을 노려라>,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가이낙스는 2017년 기점으로 변화가 생긴다. 안노 히데아키를 비롯한 많은 초기 가이낙스 인원들이 카라 스튜디오를 설립해서 가이낙스의 많은 초기 멤버들이 퇴사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은 초반에 가이낙스와 어느 정도 같이 제작하다 뒤이어서는 카라 중심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이낙스 작품들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2010<하나마루 유치원> 같이 전혀 액션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등장했다. 유치원생 3명을 중심이 되는 일상 장르로 기존 가이낙스 작품과 큰 차이가 생겼다.

 

주인공들도 예전에 거의 남자 중심으로 여자로 변하기 시작했고, 2011<단탈리안의 서가>는 애니메이션 안에서도 현실적인 리얼리티적인 작화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에서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 감독인 사에키 쇼지는 <마호로 매틱> 특별편 이후 2012<메다카 박스>를 제작하고, 2011web애니메이션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2015년 정식으로 TV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다. 가이낙스의 흐름과 더불어 사에키 쇼지 감독이 맡은 작품에서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는 상당한 변화를 부여한 작품이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는 최근 일본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인물에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된 것, 여성 캐릭터는 남성들의 모에요소를 만족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된 점에서 현재 애니메이션에 흐름에 상당히 맞추어가고 있다. 그러나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가 기존 가이낙스 작품세계를 배신한 것이라 볼 수가 없었다. 그 대치되는 작품은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의 주인공 스바루는 평범한 중학교 여학생으로 우주의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매사 자신의 소심한 성격, 자신감 없는 자신에 대해 고민을 하고 산다. 우연히 플레아데스 성인을 만나게 되고, 그때부터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어릴 적 친한 친구인 아오이를 만나게 되면서 과거에 아는 아오이와 지금의 아오이는 서로 다른 것처럼 느낀다. 단절된 시간의 교류 속에 변화라는 큰 물결에 스바루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마법소녀 장르로 볼 수 있고, 그 특징 중에 마법소녀로 변신한 주인공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활약하는 점이다.

 

그들의 활약은 역시 별의 조각을 모우는 것이나, 그것은 표층에 존재하는 이야기로 보여주고 내면의 이야기는 스바루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스바루의 고민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다. 단지 신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은 언제나 자신에게 냉대하여 항상 외로움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을 받는다. 대신 스바루는 부모님 모두 계시고, 스바루에게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준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이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제작된 가이낙스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제작 20년 후 대치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언제나 신지에게 완벽한 임무수행을 요구했고, 신지는 그것에 고통스러워해도 주변 네르프 요원들은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신지에게 그 무리한 요구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에바에 타지 않으면 신지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자신은 쓸모없는 아이가 되는 것에 상처받는다. 그러나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에서 스바루의 아버지는 어떤 물건을 만드는 과정에서 분명히 불량품은 나오고, 그것이 못쓰게 될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필요 없다고 하지 않는다. 분명 거기에도 의미가 있다고 한다.

 

스바루는 자신에 대해 아직 어른도 아니면서 어린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고, 불안정한 자신의 모습에 두려워한다. 스바루의 고민은 아오이가 바뀐 것처럼 점차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스바루는 자신만이 아니라 아오이 역시 스바루가 변화한 것에 무서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만 불안한 게 아니고 자기만 어중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량한 엔진부품이 지금 당장 쓸모없어서 버림받는 게 당연하다 여기지만, 스바루의 아버지는 그 엔진부품이 지금은 쓸모없다고 하여 결코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 한다.

 

결국 어중간하고, 불량한 부품처럼 필요 없어 보이나, 그 모든 것이 존재의 이유가 있었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을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청소년들은 언제나 자신의 현실에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그런 요소를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에서 스바루로 통해 보여주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부모 같은 어른들의 따듯한 시선, 그리고 친구들과의 유대감이다. 자신은 언제나 혼자라고 생각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신지와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의 스바루, 물론 인간은 처음에 혼자나,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가 밤하늘의 별자리인 플레이아데스를 지칭한 것처럼, 밤하늘의 별은 서로 빛을 내며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준다. 물론 플레이아데스 전설을 찾아보면 슬픈 그리스신화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밤하늘의 별자리란 우리 인간에게 많은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주었다. 방과 후에 학생들은 자기에게 시간이 개인적으로 주어질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방과 후란 거의 학원에 가거나 PC에 앞에만 매달려 있을 뿐이다. 꼭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아 관찰하는 필요는 없으나, 자기만의 별자리를 찾아떠나는 여정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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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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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은 언제나 참을 수 없는 유혹과 광기 또는 낯이 어려운 상황에 부딪힌다. 나는 과연 여기에 휘말려야 하는지 아니라면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 혹이라면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해 “그래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란 항상 어느 키치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왜 사비나는 그녀의 행동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말을 나오게 할 것인가? 육감적인 몸매, 아름다운 얼굴, 예술적인 손 흔적, 그녀 사비나는 끊임없는 남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했지만 전혀 아니기도 했다. 그녀는 체코 프라하에 있었기도 했고, 취리히도 있었고, 나중에 미국에 있다가 캄보디아 전쟁터에도 있기도 했다.


 

그녀가 느낀 참을 수 없는 그 어떤 존재의 가벼움이란 자신의 위치와 입장 그리고 살아가는 현재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지겨움이다. 그녀는 그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려는 것을 싫어했다. 왜 그런가? 그녀는 소련이 공산진영 국가에 했던 기계적인 행위를 거부했다. 아무런 의미도 모른 채 5월 1일 메이데이, 미치지도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가사도 외우지도 못하고 마음에 와 닿지 않은데도 계속 행진하면서 노래를 하는 게 싫었다. 그뿐만 아니다. 사비나는 어느 세계의 키치를 싫어했다. 미국에서 자신의 예술품을 사랑하던 노부부와 같이 살면서 그들이 죽자, 노부부의 아들에게 맡기는 순간, 사비나는 자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 여겼다.


 

우리의 인생이란 항상 부유하는 존재다. 왜 그런 가벼움에 대한 허전한 마음을 담고 있는가? 니체의 이야기가 시작하고, 니체의 일화가 후반부에서 나온 것처럼 인간은 뭔가 자신의 현재에 얽매여 있다. 니체가 1889년 길을 걷다가 마부에 의해 마차를 끌고 있는 말에게 다가가 안아주는 모습, 니체는 분명 매독에 걸려 정신착란을 보였다. 그러나 니체의 광기는 세상의 광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광기다. 그 광기는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지만, 인간들은 그 광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니체의 광기처럼 동물조차도 연민을 느끼는 자연적인 요소, 르네 데카르트가 주장한 기계론적 철학관에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을 희생시켰다.


 

그것은 인간에게 이성과 지성, 그리고 영혼이 있기에 동물이 내지르는 비명은 고통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고장이 난 것이라 본다. 하지만 동물도 아프면 고통을 외치고, 감정이 있었다. 니체가 말의 목을 잡고 안아주듯이 사비나의 애인이었던 토마스, 그리고 그 토마스의 옆에 있는 2번째 부인이던 테레사, 그녀는 말의 목을 니체가 안아주듯이 그녀의 개인 카레닌의 목을 안아준다. 카레닌은 시계 같은 존재였다. 왜 시계인가? 동물은 정해진 자신의 패턴에 의해 살아가고 있었고, 항상 일정한 간격이 있었다. 토마스가 강박적으로 베토벤의 악곡에서 “그래야만 한다!”라는 게 아니라 “그러는 게 당연하다!” 하듯이 말이다.


 

카레닌의 존재성이란 바로 당연하게 옆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을 대비할 수 있는 존재다. 카레닌이 이상한 패턴을 보인 것은 암에 걸려 수술하고 나서 마취에 풀려나서부터다. 카레닌은 병에 의해 잠시 반응이 변했지, 그는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변화는 카레닌의 주인 토마스와 테레사였다. 이 두 사람은 뭔가 자신의 세계에 벗어나길 원했다. 토마스는 자신을 얽매이는 것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사비나의 애인으로서 매우 적당했지만, 테레사의 만남은 그걸 벗어버리게 했다. 1번재 부인에게 아들이 있고, 가족이 있으면서도 왜 토마스는 그런 삶을 살았을까?


 

토마스의 삶에서 그가 신문사에 투고한 기사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 기사는 오이디푸스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가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성행위를 한 것이 아니다. 그를 전혀 몰랐고, 원하지도 않았으며, 그 죄에 모든 것을 버렸다. 토마스의 강박적인 삶, 테레사는 토마스의 몸에서 항상 성행위를 하던 여자의 성기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토마스와 테레사와 성행위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2명의 남녀가 뒤섞인 자리에서 토마스는 특이한 행동을 한다.

 

 

다른 여자보다 다소 크기가 작지만, 테레사의 가슴을 토마스의 입술이 계속 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남녀의 성행위보단 차라리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토마스는 왜 아내와 이혼하고 부모와 절교하며, 다른 여자들과 가벼운 관계의 애인이 되어야만 했을까? 인간이 가진 심리적 상황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어제까지 그 전까지 같이 거리를 거닐며 데이트하던 그 혹은 그녀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예고도 없이 말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되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그래야만 한다!”라는 것이 있다.


 

그게 무의식적인 자신의 이기심 내지 정체성에서 발휘된 행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무엇인가? 그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없었다. 아니 생물학적으로 존재해도 심리적으로 없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왜 다른 여자의 성기냄새가 나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머리부터 나온다. 태아의 머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여자의 성기냄새는 인간 누구에게나 가진 공통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여 어머니에게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에 이끌리기도 한다. 토마스의 성행위는 아마 그런 것이랴.

 

야생적인 여자 사비나, 그녀는 그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은 존재다. 토마스에게 그녀가 하나의 자연적 존재일 수 있지만 사비나 그 자체는 자연적이지 못해 스스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허무함을 느낀다. 사비나의 허무, 토마스의 허무 그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런 가벼운 자신의 삶의 감정에서 토마스에게 테레사의 만남이란 정말 가볍다. 6회의 우연, 과장의 좌골신경통 그 모든 게 우연의 일치, 가벼운 삶의 흔적이 무거운 인생으로 이어진다. 테레사라는 여자, 이때까지 모든 여자와 성행위를 하더라도 같이 침대에 누워 수면을 취하지 않은 토마스에게 새로운 만남이다.


 

토마스에 의해 취리히에 가고, 테레사에 의해 다시 체코 프라하로 오고, 그런 직후 어느 시골로 가고, 그들은 자신의 알 수 없는 마음에 의해 사는 곳을 바꾼다. 테레사의 인생은 자신의 어머니가 보여준 비참하고 한심한 모습에서 거기서 바꾸려한다. 사실 테레사에게 토마스란 남자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토마스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지 그녀 하나만 지겨운 삶, 그녀를 무겁게 누르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녀가 사진기자가 되어 체코에 침공한 소련군의 탱크를 찍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소련탱크의 커다란 포대, 그것은 남성의 성기다. 어떤 남성이 먼저 테레사에게 접근했다면 그녀는 따라갈 것이다. 단지 조건은 그녀는 무지한 어머니가 싫었기에 책 한 권이 남자에게 들려있어야 했다. 단지 우연히 토마스였고, 토마스는 아무 생각 없이 테레사와 만난 것이다. 우연이란 가벼운 삶의 흔적, 그 흔적이 토마스에게 계속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테레사가 된 것이다. 가벼운 토마스의 우연, 그곳에 무거운 테레사의 만남에서 우리 인생은 어느 것이 가볍고 무거운지 모를 모호한 관계로 빠져든다.


 

그리고 존재적 무거움을 향하여 우리는 억지로 꾸민 키치에 빠진다. 사비나의 매력에 이끌린 프란츠는 자신이 있을 곳을 계속 찾기 위해 여행을 한다. 소멸의 미학에서 인간이 계속 이동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성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프란츠의 이동성은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신의 행동이며, 그곳에서 만난 여자들과의 성행위는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사비나와 여행을 떠나는 것에 행복감이 젖은 프란츠카 취리히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은 그녀를 보고 자신의 꿈이 깨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낯선 나라에서 사고를 당한다.


 

사비나라는 여인을 사랑한 프란츠와 사비나를 사랑하기보단 그저 몸으로 즐기려한 토마스에게 자신의 행복은 바로 자신의 품어줄 공간을 찾는 것이다. 왜 체코 프라하라는 도시에서 시골농촌으로 토마스와 테레사는 갔을까? 도시에 온 토마스의 머리에서 더 이상 여자들의 성기냄새가 나지 않았다. 시골이 비록 소련군에 의해 변해있다고 해도 그 시골에서 삶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 쉬고, 조용한 일상, 마치 카레닌과 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 일상은 무거운지 가벼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단조로운 인생은 가벼울지 모르나, 토마스에겐 더 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의사로서 삶을 강요받은 토마스, 혹은 억지로 주변의 흐름에 따르기보단 그 흐름에 거부하려는 자신의 강박적 삶을 선택받지 않은 것은 분명히 말하여 토마스에게 행복이다. “그래야만 한다!”가 “그러든 말든가!”로 변한 것이다. 시골농부가 되어 트럭을 수리하고 농사일을 거두는 것이란 그 누구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의사를 그만둔 토마스는 도시에서 창문닦이 하면서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나누었지만, 그것이 삶의 쾌락이 되어도 행복은 되지 못했다. 과거의 외과의사 그리고 지식인이란 신분은 그에게 하나의 특권을 부여하는 만큼 또 다른 모순적인 고뇌를 주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토마스에겐 가벼운 일상적 삶에서 행복의 무거움을 느낀 것이다.

 

 

사비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는 것은 그 모든 것에 얽매이려는 것과 그 자체를 거부하자는 얽매이는 것들이 결국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관념이란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뭔가 가지기 위하거나 해야 한다는 무거운 신념이 우리를 가볍게 만든다.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가 갈 때 어느 신문기자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기자가 지뢰를 밟아 지뢰가 폭발하여 그의 몸이 산산조각 나고, 그의 피가 주변을 뿌릴 때 국경 없는 의사회와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곳에 온 미국 미녀 여배우 모습처럼 억지로 매스컴에 결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토마스와 사비나의 마지막 모습처럼 살아가는 것도 좋은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수 없는 세상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한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마음도 모른 채 충동에 의해 사로잡히고, 다시 그 충동이 육감적인 심리에서 원해도 정신적인 심리에서 거부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비나가 느낀 것처럼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가벼움을 느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참기 힘들 정도의 공허감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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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ED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Revolution No.3>는 좀비들 시리즈로 유쾌한 재미와 쾌감을 날려준다. 다소 카타르시스가 뒤따르는 이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 세계관과 공유하고 있다. <Revolution No.3>가 <Revolution No.0>, <Fly daddy fly>가 연계되고 다시 <speed>와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연애소설>은 좀비들 시리즈와 전혀 다른 소재와 느낌을 다루고 있어서 별개의 소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다시 수정하였다. 이 작품 역시 좀비들과 이어지고 있었다. <연애소설>에서 주인공은 아니나, 주요인물로 다니무라 교수가 있다. 다니무라 교수와 불륜을 맺은 미모의 여대생 아야코는 사랑의 불의와 허무한 자신에 절망하여 자살한다.


<연애소설> "영원의 환"에서 아야코를 사랑하던 아야코 남자후배는 자신이 죽기 전에 친구로 위장한 살인청부업자에게 다니무라 교수 암살을 의뢰한다. <speed>에선 아야코의 제자 가나코는 아야코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밝히려 한다. 단지 중간 매개에 <Revolution No.3>가 보이지 않았을 뿐, 좀비들의 무리와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연애소설> "영원의 환"에서 단순히 남자후배는 사랑하는 아야코 선배를 위한 복수를 원했다면, <speed>는 그 복수가 일어나기 반년 전의 이야기다. 작품에서 아야코를 좋아하는 남자이야기도 있었고, 아야코와 다니무라의 불륜관계도 있었다.


한 미모의 여대생이 선택한 죽음, 석연치 않은 자살 장소는 여러 가지로 의문을 만들게 했다. 가나코는 처음 아야코의 죽음이 타살이라 여겼다. 물론 아야코는 자살이었으나, 타살과 마찬가지이었다. 자살은 사회적 자살이란 말이 있다. 그녀의 죽음은 자신의 의지를 위한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 죽음이었다. 아마 남자후배가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용기를 내었다면 아야코는 자살을 조금 고민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 남자후배에겐 인생의 절망을 가나코에겐 친구를 잃게 만들었다.


가나코는 아야코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 죽음이 숨은 진실에 대한 의문, 그리고 이상한 에세이대학교의 분위기, 이 모든 것이 별개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여대생의 죽음, 에세이대학교의 축제는 뭔가 이어지는 고리가 있었다. 그 고리의 시작은 가나코가 가진 어느 증거고, 그 증거를 노리는 세력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우연히 좀비들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여기서부터 가나코와 좀비들은 운명의 공동체가 된다. 이미 <Fly daay fly>에선 순신은 40대 아저씨를 인생의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바꾸는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이젠 40대 아저씨가 아니라 10대 여고생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3년 동안 계속 침입하려한 세이와여고의 우등생이었다. 좀비들의 활약과 주인공의 노력은 물론 모든 문제를 해결하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고를 치는 문제아로 등장한다. 가나코 역시 그런 역할 중에 하나다. 공부에 충실한 여고생이 우연히 불량학교 문제아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하는 시간은 달콤한 꿈만 같은 시간인지 아니면 악몽보다 더 심한 운명의 장난인지 모른다. 단지 가나코를 만난 좀비들은 이태까지 삶에 지친 약자들과 연대했다면, 이번에 얼마든지 위로 갈 수 있는 존재와 만났다.


늘 악운만 따르는 야마시타가 가나코에게 자신은 산하(山下)라는 의미의 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산 아래에 사는 야마시타는 산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영원한 발바닥 인생이다. 좀비들은 그런 야마시타가 멸망하지 않을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라 한다. 볼품없지만, 언제나 맑은 눈으로 친구를 걱정해주는 착한 친구들, 바보 같은 그 꿈을 언제나 비웃고 조롱하는 사회에 대해 좀비들은 대항한다. 단지 이번 대상은 조금 다르다. 권력의 중심은 언제나 대학교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돈과 인맥으로 연결된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이벤트를 놓치지 않으려한 엘리트들의 사고방식은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시대정신이 돋보인다.


이 사건들의 원흉에게 잡힌 가네코는 그와 대화하면서 엘리트인 원흉이 되고 싶은 것은 묻는다.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을 움직이고, 헌법을 개정하여 군대를 밖으로 보낸다. 전형적인 일본극우의 사고방식이다. 뇌물수수 뿐만 아니라 미성년 매춘행위로 낙인찍힌 전 장관과 결탁한 점에서 지식인의 사회인 대학은 이미 권력을 위한 도구로 변질된 것이다. 과거 1960년대 일본은 학생운동이 활발했고, 그들은 동아리로 자금을 충당했으나,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자본의 공급처로 활용된다.


일본사회는 그렇게 섞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가나코는 그런 현실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좀비와 혁명을 일으킨 것인가? 보통 <Revolution No.3> 좀비들 이야기에선 다소 마초적인 감성을 가진 남학생 중심이야기라면 이번 <speed>는 조금 다르다. 연약한 여고생이 직접 몸을 날려 싸우고, 운전을 배워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장식한다. 가나코의 가족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집안은 가족이 3명이 아니라 4명이어야 했다. 가나코의 어머니는 꼰대적인 가부장인 남편에 대해 실망해서 낙태를 선택한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나코의 어머니가 느낀 소외감, 게다가 아야코와 다니무라의 불륜에서 아야코의 죽음, 원흉이 모든 운동부들을 조직할 수 있던 것은 강간사건을 어떻게 잘 덮어준 것이다. 일본사회가 가진 문제인 성적인 억압이 이 작품에 녹아 있었다. 그 상황에서 가나코는 투쟁을 하였고, 특히 어릴 때 배운 발레를 다시 해보려는 것이다. <Revolution No.3>에서 어느 나그네가 춤을 추자 왕이 질투하여 그의 다리와 팔, 나중에 목까지 베어버렸다. 그는 죽어가면서 눈으로 리듬을 맞추어 마음의 춤을 추었다.


춤을 추지 못한 나그네, 하지만 그 나그네를 본 다른 누군가가 춤을 추어주었다. 아마 가나코는 억압받는 이상한 세계에 새로운 발화점이 될 인간이란 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에 힘이 필요하나, 정말 필요한 것은 그 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의지다. 신호등이 적색과 녹색이 있는데, 만약 그 신호등이 조작된 적색이라면 우린 그 선을 넘어야 하는지 마는지 고민하게 된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달릴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자동차에 차키를 꽂아 넣으면 우린 엑셀 페달을 힘껏 밟아 막혀있는 문을 향해 돌진한다.


안에서 열리지 않고, 밖에서 밀어내는 형식이라면, 그 간극의 틈을 찾아 마주쳐 나가는 게 좀비들의 인생이다. 물론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고, 탐욕에 물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 계속 희생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거부하기보단 그 이익에 붙으려 한다. 우리에겐 정말 그런 사회를 비웃으며 돌파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바로 <speed>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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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벌루션 No.0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좀비들이 탄생한 시기를 알리는 것이 <Revolution NO.0>이다. 1학년 때부터 친구들이 뭉치게 된 동기 그리고 그들이 언제부터 도전이란 단어를 찾았는지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 항상 중요한 것은 선택의 기로다. 누군가 우리보고 "너희들은 할 수 있다 내지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잘 알고 있다. 말하지 못한 이유는 알고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이다. 바꾸기 위해선 우리는 단순히 하면 되? 라는 말만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하게 될 수 있는 계기나 상황이나 길라잡이는 되어주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서도 나 자신도 어른이란 범주를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런 연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들의 이익과 사리사욕을 위해 어떻게든 희생시킨다. 희생되는 자들은 안타깝게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른바 문제아들, 사회가 포기하고 학교가 포기한 사람이다. 문제아란 이정표가 붙는 순간 세견이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길가에 죄 없는 사람을 건들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코질 하는 사람이라면 비난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 누구에게 해를 주지 않는데도 단지 아웃사이더(out-sider)란 신분에 의해 몰리는 경우가 많다. <Revolution NO.3>에서 좀비들은 자신들이 아웃사이더에서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것보다 아웃사이더이기에 새로운 바람으로 만들었다. 세이와여고라는 아가씨 학교에 난입하여 그녀들과 사랑을 꿈꾸는 좀비들, 우리 사회는 계층의 구분화가 사회의 고립화를 몰고 왔다.


그렇다면 이 고립을 부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제3의 계급인 좀비들이야말로 그 바람의 중심점이다. 단 조건은 무관계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신들과 같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난자질을 당한 열등이웃이라면 누구나 환영한다. 열등해질 수밖에 없는 나의 의지가 아니지만, 그 열등한 위치란 이유로 무시당하는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Revolution NO.0>는 바로 그 혁명 이전의 이야기다. 미완으로 이어진 혁명, 그러나 미완의 실패가 있었기에 좀비들은 성공했다.


<Revolution NO.0> 역시 좀비스 시리즈로 매우 유쾌하고 재미난 소설이다. 순수문학보다 장르문학에 가깝고, 가네시로 가즈키 작품은 만화책으로 나올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은 사회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이 학교에 등교하면서 친구 순신과 만난다. 순신은 항상 손에는 책을 잡고 있는데, 그 책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Fly daddy fly>와 <Revolution NO.3>에서 항상 책을 잡고 있던 순신이다. 그런데 이번에 순신이 잡고 있던 책은 단 1권이었다.


순신은 주인공에게 책 제목을 이야기해준다. <감옥의 탄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 책제목은 프랑스 사회철학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다. 고등학생이 읽는 것은 물론이거나 대학교 인문사회대학 학부생조차 어려운 서적이 푸코의 서적이다. 이 소설에서 푸코의 서적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학교란 곳이 감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공장, 병원, 회사, 군대, 학교, 고아원 등과 같은 집단수용시설은 인간을 감시하고 그들에게 처벌을 내린다.


감시체계는 판옵티콘 시스템, 즉 일망감시시설로 작용한다. 넓은 산 안의 수용소(학교)는 학생 전체를 감시할 수 없지만, 그 감시를 대신하는 게 사루지마와 선생들이다. 그들은 손에 죽도나 방망이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이 자신들의 시각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한다. 소설후기에 이 모든 폭력적 행위가 있었냐는 말에 작가는 실제 겪은 일이라고 한다. 이런 폭력교사가 우리에겐 생소할지 모르나, 우리 한국사회 역시 익숙한 인물이다. 좀비들만큼은 아니나 비인간적으로 학교교사로부터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폭력을 나 역시 당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누군가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모르나, 그들이 진짜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부터 나는 의심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말 잘 들으라고 하지만, 막상 그들의 행동을 보면 모순이 많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고, 때에 따라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도, 나이가 많은 어른도 실수를 한다. 실수를 하는 것에 대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합리적인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Revolution NO.0>에서 좀비들이 당하는 것을 말이다. 억지로 입학생을 느려 입학금을 받고 교묘한 술수로 학생들을 퇴학 및 정학시키는 모습에서 교육의 가치는 인간의 완성이 아니었다. 학교의 이익, 자신들의 편익 이것이 바로 판옵티콘의 시작점이다. 교장을 비롯한 학교선생들은 감시체제에서 처벌을 담당하던 존재지, 진정으로 감시하는 존재는 사회라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말이나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를 생각하면 순신이 들고 다니는 책 제목 <감시와 처벌>처럼 감시의 수단으로 비인간적 폭력을 합법적 처벌로 이어진다.


그래서 좀비들은 <Revolution NO.0>에서 판옵티콘의 학교를 도망치기로 한다. 감옥을 탈옥하여 다시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감옥 안의 죄수처럼 살아가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말이다. 판옵티콘이 이미 작용된 사회는 자기검열이란 무서운 의지가 살아있다. 남의 감시가 결국 하나의 생활적 양식이 되어 그 감시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주변에 자기와 같은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만든다. 인간 사이의 감시와 고발은 사회 대다수 약자에게 속박을 쇠사슬만 안겨준다.


문제가 있는 사회, 불만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하다면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만의 법칙을 구축해야 한다. 법칙이란 힘이 있는 자들이 자기들 편리를 위해 만든 허울 좋은 명분이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자신만의 법칙이 존재해야 한다. 좀비들이 선택은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면 용기다. 그리고 계층이 다른 자들과의 공감과 공유다. 그래서 <Revolution NO.0> 마지막과 <Revolution NO.3> 초반에 똑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생물학 선생이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서 말이다. 좀비들은 우리보다 더 못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다. 우리가 더 추락한다면 어디와 겹쳐 보일까? 좀비는 진화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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