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벌루션 No.0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좀비들이 탄생한 시기를 알리는 것이 <Revolution NO.0>이다. 1학년 때부터 친구들이 뭉치게 된 동기 그리고 그들이 언제부터 도전이란 단어를 찾았는지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 항상 중요한 것은 선택의 기로다. 누군가 우리보고 "너희들은 할 수 있다 내지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잘 알고 있다. 말하지 못한 이유는 알고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이다. 바꾸기 위해선 우리는 단순히 하면 되? 라는 말만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하게 될 수 있는 계기나 상황이나 길라잡이는 되어주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서도 나 자신도 어른이란 범주를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런 연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들의 이익과 사리사욕을 위해 어떻게든 희생시킨다. 희생되는 자들은 안타깝게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른바 문제아들, 사회가 포기하고 학교가 포기한 사람이다. 문제아란 이정표가 붙는 순간 세견이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길가에 죄 없는 사람을 건들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코질 하는 사람이라면 비난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 누구에게 해를 주지 않는데도 단지 아웃사이더(out-sider)란 신분에 의해 몰리는 경우가 많다. <Revolution NO.3>에서 좀비들은 자신들이 아웃사이더에서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것보다 아웃사이더이기에 새로운 바람으로 만들었다. 세이와여고라는 아가씨 학교에 난입하여 그녀들과 사랑을 꿈꾸는 좀비들, 우리 사회는 계층의 구분화가 사회의 고립화를 몰고 왔다.


그렇다면 이 고립을 부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제3의 계급인 좀비들이야말로 그 바람의 중심점이다. 단 조건은 무관계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신들과 같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난자질을 당한 열등이웃이라면 누구나 환영한다. 열등해질 수밖에 없는 나의 의지가 아니지만, 그 열등한 위치란 이유로 무시당하는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Revolution NO.0>는 바로 그 혁명 이전의 이야기다. 미완으로 이어진 혁명, 그러나 미완의 실패가 있었기에 좀비들은 성공했다.


<Revolution NO.0> 역시 좀비스 시리즈로 매우 유쾌하고 재미난 소설이다. 순수문학보다 장르문학에 가깝고, 가네시로 가즈키 작품은 만화책으로 나올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은 사회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이 학교에 등교하면서 친구 순신과 만난다. 순신은 항상 손에는 책을 잡고 있는데, 그 책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Fly daddy fly>와 <Revolution NO.3>에서 항상 책을 잡고 있던 순신이다. 그런데 이번에 순신이 잡고 있던 책은 단 1권이었다.


순신은 주인공에게 책 제목을 이야기해준다. <감옥의 탄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 책제목은 프랑스 사회철학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다. 고등학생이 읽는 것은 물론이거나 대학교 인문사회대학 학부생조차 어려운 서적이 푸코의 서적이다. 이 소설에서 푸코의 서적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학교란 곳이 감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공장, 병원, 회사, 군대, 학교, 고아원 등과 같은 집단수용시설은 인간을 감시하고 그들에게 처벌을 내린다.


감시체계는 판옵티콘 시스템, 즉 일망감시시설로 작용한다. 넓은 산 안의 수용소(학교)는 학생 전체를 감시할 수 없지만, 그 감시를 대신하는 게 사루지마와 선생들이다. 그들은 손에 죽도나 방망이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이 자신들의 시각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한다. 소설후기에 이 모든 폭력적 행위가 있었냐는 말에 작가는 실제 겪은 일이라고 한다. 이런 폭력교사가 우리에겐 생소할지 모르나, 우리 한국사회 역시 익숙한 인물이다. 좀비들만큼은 아니나 비인간적으로 학교교사로부터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폭력을 나 역시 당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누군가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모르나, 그들이 진짜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부터 나는 의심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말 잘 들으라고 하지만, 막상 그들의 행동을 보면 모순이 많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고, 때에 따라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도, 나이가 많은 어른도 실수를 한다. 실수를 하는 것에 대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합리적인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Revolution NO.0>에서 좀비들이 당하는 것을 말이다. 억지로 입학생을 느려 입학금을 받고 교묘한 술수로 학생들을 퇴학 및 정학시키는 모습에서 교육의 가치는 인간의 완성이 아니었다. 학교의 이익, 자신들의 편익 이것이 바로 판옵티콘의 시작점이다. 교장을 비롯한 학교선생들은 감시체제에서 처벌을 담당하던 존재지, 진정으로 감시하는 존재는 사회라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말이나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를 생각하면 순신이 들고 다니는 책 제목 <감시와 처벌>처럼 감시의 수단으로 비인간적 폭력을 합법적 처벌로 이어진다.


그래서 좀비들은 <Revolution NO.0>에서 판옵티콘의 학교를 도망치기로 한다. 감옥을 탈옥하여 다시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감옥 안의 죄수처럼 살아가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말이다. 판옵티콘이 이미 작용된 사회는 자기검열이란 무서운 의지가 살아있다. 남의 감시가 결국 하나의 생활적 양식이 되어 그 감시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주변에 자기와 같은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만든다. 인간 사이의 감시와 고발은 사회 대다수 약자에게 속박을 쇠사슬만 안겨준다.


문제가 있는 사회, 불만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하다면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만의 법칙을 구축해야 한다. 법칙이란 힘이 있는 자들이 자기들 편리를 위해 만든 허울 좋은 명분이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자신만의 법칙이 존재해야 한다. 좀비들이 선택은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면 용기다. 그리고 계층이 다른 자들과의 공감과 공유다. 그래서 <Revolution NO.0> 마지막과 <Revolution NO.3> 초반에 똑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생물학 선생이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서 말이다. 좀비들은 우리보다 더 못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다. 우리가 더 추락한다면 어디와 겹쳐 보일까? 좀비는 진화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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