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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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은 언제나 참을 수 없는 유혹과 광기 또는 낯이 어려운 상황에 부딪힌다. 나는 과연 여기에 휘말려야 하는지 아니라면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 혹이라면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해 “그래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란 항상 어느 키치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왜 사비나는 그녀의 행동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말을 나오게 할 것인가? 육감적인 몸매, 아름다운 얼굴, 예술적인 손 흔적, 그녀 사비나는 끊임없는 남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했지만 전혀 아니기도 했다. 그녀는 체코 프라하에 있었기도 했고, 취리히도 있었고, 나중에 미국에 있다가 캄보디아 전쟁터에도 있기도 했다.


 

그녀가 느낀 참을 수 없는 그 어떤 존재의 가벼움이란 자신의 위치와 입장 그리고 살아가는 현재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지겨움이다. 그녀는 그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려는 것을 싫어했다. 왜 그런가? 그녀는 소련이 공산진영 국가에 했던 기계적인 행위를 거부했다. 아무런 의미도 모른 채 5월 1일 메이데이, 미치지도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가사도 외우지도 못하고 마음에 와 닿지 않은데도 계속 행진하면서 노래를 하는 게 싫었다. 그뿐만 아니다. 사비나는 어느 세계의 키치를 싫어했다. 미국에서 자신의 예술품을 사랑하던 노부부와 같이 살면서 그들이 죽자, 노부부의 아들에게 맡기는 순간, 사비나는 자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 여겼다.


 

우리의 인생이란 항상 부유하는 존재다. 왜 그런 가벼움에 대한 허전한 마음을 담고 있는가? 니체의 이야기가 시작하고, 니체의 일화가 후반부에서 나온 것처럼 인간은 뭔가 자신의 현재에 얽매여 있다. 니체가 1889년 길을 걷다가 마부에 의해 마차를 끌고 있는 말에게 다가가 안아주는 모습, 니체는 분명 매독에 걸려 정신착란을 보였다. 그러나 니체의 광기는 세상의 광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광기다. 그 광기는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지만, 인간들은 그 광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니체의 광기처럼 동물조차도 연민을 느끼는 자연적인 요소, 르네 데카르트가 주장한 기계론적 철학관에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을 희생시켰다.


 

그것은 인간에게 이성과 지성, 그리고 영혼이 있기에 동물이 내지르는 비명은 고통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고장이 난 것이라 본다. 하지만 동물도 아프면 고통을 외치고, 감정이 있었다. 니체가 말의 목을 잡고 안아주듯이 사비나의 애인이었던 토마스, 그리고 그 토마스의 옆에 있는 2번째 부인이던 테레사, 그녀는 말의 목을 니체가 안아주듯이 그녀의 개인 카레닌의 목을 안아준다. 카레닌은 시계 같은 존재였다. 왜 시계인가? 동물은 정해진 자신의 패턴에 의해 살아가고 있었고, 항상 일정한 간격이 있었다. 토마스가 강박적으로 베토벤의 악곡에서 “그래야만 한다!”라는 게 아니라 “그러는 게 당연하다!” 하듯이 말이다.


 

카레닌의 존재성이란 바로 당연하게 옆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을 대비할 수 있는 존재다. 카레닌이 이상한 패턴을 보인 것은 암에 걸려 수술하고 나서 마취에 풀려나서부터다. 카레닌은 병에 의해 잠시 반응이 변했지, 그는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변화는 카레닌의 주인 토마스와 테레사였다. 이 두 사람은 뭔가 자신의 세계에 벗어나길 원했다. 토마스는 자신을 얽매이는 것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사비나의 애인으로서 매우 적당했지만, 테레사의 만남은 그걸 벗어버리게 했다. 1번재 부인에게 아들이 있고, 가족이 있으면서도 왜 토마스는 그런 삶을 살았을까?


 

토마스의 삶에서 그가 신문사에 투고한 기사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 기사는 오이디푸스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가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성행위를 한 것이 아니다. 그를 전혀 몰랐고, 원하지도 않았으며, 그 죄에 모든 것을 버렸다. 토마스의 강박적인 삶, 테레사는 토마스의 몸에서 항상 성행위를 하던 여자의 성기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토마스와 테레사와 성행위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2명의 남녀가 뒤섞인 자리에서 토마스는 특이한 행동을 한다.

 

 

다른 여자보다 다소 크기가 작지만, 테레사의 가슴을 토마스의 입술이 계속 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남녀의 성행위보단 차라리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토마스는 왜 아내와 이혼하고 부모와 절교하며, 다른 여자들과 가벼운 관계의 애인이 되어야만 했을까? 인간이 가진 심리적 상황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어제까지 그 전까지 같이 거리를 거닐며 데이트하던 그 혹은 그녀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예고도 없이 말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되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그래야만 한다!”라는 것이 있다.


 

그게 무의식적인 자신의 이기심 내지 정체성에서 발휘된 행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무엇인가? 그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없었다. 아니 생물학적으로 존재해도 심리적으로 없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왜 다른 여자의 성기냄새가 나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머리부터 나온다. 태아의 머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여자의 성기냄새는 인간 누구에게나 가진 공통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여 어머니에게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에 이끌리기도 한다. 토마스의 성행위는 아마 그런 것이랴.

 

야생적인 여자 사비나, 그녀는 그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은 존재다. 토마스에게 그녀가 하나의 자연적 존재일 수 있지만 사비나 그 자체는 자연적이지 못해 스스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허무함을 느낀다. 사비나의 허무, 토마스의 허무 그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런 가벼운 자신의 삶의 감정에서 토마스에게 테레사의 만남이란 정말 가볍다. 6회의 우연, 과장의 좌골신경통 그 모든 게 우연의 일치, 가벼운 삶의 흔적이 무거운 인생으로 이어진다. 테레사라는 여자, 이때까지 모든 여자와 성행위를 하더라도 같이 침대에 누워 수면을 취하지 않은 토마스에게 새로운 만남이다.


 

토마스에 의해 취리히에 가고, 테레사에 의해 다시 체코 프라하로 오고, 그런 직후 어느 시골로 가고, 그들은 자신의 알 수 없는 마음에 의해 사는 곳을 바꾼다. 테레사의 인생은 자신의 어머니가 보여준 비참하고 한심한 모습에서 거기서 바꾸려한다. 사실 테레사에게 토마스란 남자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토마스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지 그녀 하나만 지겨운 삶, 그녀를 무겁게 누르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녀가 사진기자가 되어 체코에 침공한 소련군의 탱크를 찍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소련탱크의 커다란 포대, 그것은 남성의 성기다. 어떤 남성이 먼저 테레사에게 접근했다면 그녀는 따라갈 것이다. 단지 조건은 그녀는 무지한 어머니가 싫었기에 책 한 권이 남자에게 들려있어야 했다. 단지 우연히 토마스였고, 토마스는 아무 생각 없이 테레사와 만난 것이다. 우연이란 가벼운 삶의 흔적, 그 흔적이 토마스에게 계속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테레사가 된 것이다. 가벼운 토마스의 우연, 그곳에 무거운 테레사의 만남에서 우리 인생은 어느 것이 가볍고 무거운지 모를 모호한 관계로 빠져든다.


 

그리고 존재적 무거움을 향하여 우리는 억지로 꾸민 키치에 빠진다. 사비나의 매력에 이끌린 프란츠는 자신이 있을 곳을 계속 찾기 위해 여행을 한다. 소멸의 미학에서 인간이 계속 이동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성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프란츠의 이동성은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신의 행동이며, 그곳에서 만난 여자들과의 성행위는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사비나와 여행을 떠나는 것에 행복감이 젖은 프란츠카 취리히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은 그녀를 보고 자신의 꿈이 깨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낯선 나라에서 사고를 당한다.


 

사비나라는 여인을 사랑한 프란츠와 사비나를 사랑하기보단 그저 몸으로 즐기려한 토마스에게 자신의 행복은 바로 자신의 품어줄 공간을 찾는 것이다. 왜 체코 프라하라는 도시에서 시골농촌으로 토마스와 테레사는 갔을까? 도시에 온 토마스의 머리에서 더 이상 여자들의 성기냄새가 나지 않았다. 시골이 비록 소련군에 의해 변해있다고 해도 그 시골에서 삶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 쉬고, 조용한 일상, 마치 카레닌과 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 일상은 무거운지 가벼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단조로운 인생은 가벼울지 모르나, 토마스에겐 더 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의사로서 삶을 강요받은 토마스, 혹은 억지로 주변의 흐름에 따르기보단 그 흐름에 거부하려는 자신의 강박적 삶을 선택받지 않은 것은 분명히 말하여 토마스에게 행복이다. “그래야만 한다!”가 “그러든 말든가!”로 변한 것이다. 시골농부가 되어 트럭을 수리하고 농사일을 거두는 것이란 그 누구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의사를 그만둔 토마스는 도시에서 창문닦이 하면서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나누었지만, 그것이 삶의 쾌락이 되어도 행복은 되지 못했다. 과거의 외과의사 그리고 지식인이란 신분은 그에게 하나의 특권을 부여하는 만큼 또 다른 모순적인 고뇌를 주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토마스에겐 가벼운 일상적 삶에서 행복의 무거움을 느낀 것이다.

 

 

사비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는 것은 그 모든 것에 얽매이려는 것과 그 자체를 거부하자는 얽매이는 것들이 결국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관념이란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뭔가 가지기 위하거나 해야 한다는 무거운 신념이 우리를 가볍게 만든다.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가 갈 때 어느 신문기자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기자가 지뢰를 밟아 지뢰가 폭발하여 그의 몸이 산산조각 나고, 그의 피가 주변을 뿌릴 때 국경 없는 의사회와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곳에 온 미국 미녀 여배우 모습처럼 억지로 매스컴에 결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토마스와 사비나의 마지막 모습처럼 살아가는 것도 좋은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수 없는 세상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한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마음도 모른 채 충동에 의해 사로잡히고, 다시 그 충동이 육감적인 심리에서 원해도 정신적인 심리에서 거부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비나가 느낀 것처럼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가벼움을 느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참기 힘들 정도의 공허감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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