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와사랑.데미안 - 한권의명작 7
문화광장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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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와 사랑을 읽으면서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를 주시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나기 보다는 골드문트의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모든 것은 골드문트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모든 갈등과 환희, 슬픔, 기쁨, 그리고 초월 역시 골드문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르치스는 그저 골드문트와 상반되는 개념의 인간이었다. 그는 매우 똑똑하고 냉정하였으며, 게다가 현명하였다. 그는 완벽한 이성주의자였고 그런 완벽함에 따라 수도원에서 아직 20살 정도의 나이였으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 완벽한 이상의 세계를 닮아가던 나르치스에게 골드문트가 수도원으로 온 것이다.

골드문트는 매우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하얀 얼굴에 금발의 머릿결 그리고 그런 인상을 가져서인지 골드문트의 감수성과 깊은 심연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오히려 그와 친분을 나누려 하면 할수록 골드문트는 주변 학생들과 멀어지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 학생들에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완벽한 이성과 이성의 세계를 원하는 수도원의 원장, 신부님, 그리고 위대한 학자 나르치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골드문트는 사실 완벽할 정도로 감성적인 인간이었다. 왜? 수도원의 높은 이상을 가진 그들은 골드문트를 아끼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르치스라는 고고한 인품을 소유한 수도자는 이 골드문트에게 사랑을 베풀었을까? 그것은 아마 진리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골드문트는 어느 여인과의 격렬한 육체적 사랑에 따라 수도원에 나가고 많고 많은 여행과 모험 속에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다. 수도원에 귀향하면서 골드문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인생경험을 살려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킨다.

그 예술은 매우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가치관을 지닌 나르치스를 감동시킨다. 아니 나르치스만이 아닌 다른 수도원 사람들에게 크나큰 마음의 파동을 전달한다. 그러나 분명 나르치스는 오로지 수도원이란 세계에 머물던 인간이었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와 달리 그 사회에서 모든 공간을 누빈 외로운 나그네와 같았다. 그런데도 왜 이들의 관계에서 진리의 길을 같이 볼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남성적인 이성세계가 중시되던 그 공간에서도 이성에 의해 배제되던 감성과 자연, 그리고 자연과 동일하게 보이는 그 어머니라는 이름에서도 진리라는 거대한 장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골드문트가 왜 그토록 이성의 세계에 들어서지 못했을까? 나르치스와 달리 골드문트는 매우 섬세한 성격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는 언제나 작은 것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미친 광기가 속한 세계를 보면서 분노하고 울기도 하고 심지어 거기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골드문트를 잡아두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을망정 머물지 못하였다. 그의 매력은 너무 거대하여 많은 여성들의 육체적 사랑과 감성적 사랑을 만족시켜줄 뿐이지 그의 안정된 공간에 다가가지 않았다. 그런 외로움을 깊이 슬퍼하던 골드문트이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외로움을 알고 그것을 털어버린다. 페스트로 인해 죽음이 가득한 마을에서 어느 아름다운 처녀를 구해 옆에 있던 겁쟁이 방랑자와 자연의 세계로 간다. 거기서 골드문트는 그 처녀에게 자신의 옆에 머물기보다는 페스트가 가라앉으면 다시 원래의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녀는 싫다고 했지만, 골드문트는 설득시킨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아름다운 처녀는 매우 수척한 모습으로 죽어간다. 어느 부랑자가 그녀를 능욕하다가 그 부랑자의 음산한 치아가 그녀의 젖가슴 주변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골드문트는 부랑자의 목을 비틀어 버려 이 세상과 하직하게 하였으며, 그 시체 역시 그냥 자연으로 보냈다. 그렇게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버리게 한 것이다. 그런 노력에도 골드문트는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부랑자의 이빨자국에 페스트가 감염된 것이다. 골드문트는 부랑자의 능욕에서 구출해주었으나 결국 페스트로 죽어간 그녀를 위해 그녀가 숨결을 듣지 못할 그 마지막까지 지켜주었다,

최후의 숨소리마저 멈추자 골드문트는 매우 슬퍼하며 그녀가 누운 오두막에 붉은 불씨를 던져 붉은 장미와 같은 불꽃이 춤추도록 하였다. 골드문트는 정말 많은 여행을 했다. 여자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 죽음의 위기에 빠지고,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또한 불쌍한 유태인 여성을 만나 그녀에게 미움도 받았다. 사랑만을 원한 것은 아니다. 길가면서 페스트로 죽은 가족과 페스트로 인해 땅에 매장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들을 위해 삽으로 그들의 얼굴에 한줌의 흙을 계속 뿌려 주었다.

골드문트는 생명이 살아가는 대지위에 누비고 또한 생명이 꺼져 사라지는 순간 그들을 대지로 보내주었다. 그런 골드문트이었기에 어느 산부의 해산에서 위대한 생명의 탄생을 보았고 한편으로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아름다운 처녀의 순정을 노린 두 명의 사나이를 죽임으로 생명의 허무함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골드문트 이 모든 감정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 그가 위대한 예술가로 변모하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계속된 여행에서 어느 수도원에 세워진 마리아상을 보며 예술가의 길에 접어든 골드문트는 그 예술의 경지에 올라가면서 자신의 감정을 채우고 있던 그 모든 기억, 숨결, 눈물, 기쁨, 우울을 폭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많은 경험과 인생의 모험 속에 골드문트는 자신이 그토록 동경의 대상이었던 나르치스를 만난다. 사실 예술가로 들어서면서 그가 만든 예술작품은 요한의 상인데, 요한은 사실 나르치스를 생각하면서 만든 것이다.

그의 완벽한 감성이 최고의 이성을 지닌 나르치스 신부를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만남을 아주 극적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마을의 무서운 권력가의 집에 들어가 그의 애첩과 사랑을 나눈 골드문트, 그는 권력가의 감시에 걸려 결국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갈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때 나르치스가 때마침 머물러 있어 그의 목숨을 자유와 예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둘은 예전의 스승과 제자보다는 친구로서 대등한 사이로 머문다. 그리고 오랫동안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있는 수도원에서 예술가의 혼을 불태운다. 그의 예술혼은 어머니의 그리움과 나르치스에 대한 동경심이 어우러져 위대한 예술작품이 나온다. 이런 예술가의 혼으로 이루어진 감성의 예술품이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이성을 지닌 나르치스를 감동시킨다. 아니 이제는 나르치스가 골드문트가 없으면 못 견딜 외로움과 허무함에 빠진 것이다. 골드문트는 오랫동안 수도원에 머물었지만, 그가 혼을 담은 작품을 만들면 다시 수도원을 나와 여행을 하려했다. 그의 작품은 그의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부상을 당하고 병에 걸렸으며, 오래 연명할 수 없었다. 그 마지막 여행은 결국 그에겐 죽음이라는 어머니라는 자연의 품으로 갈 수 있게 한 여행이었다. 골드문트의 여행을 기다리던 나르치스에겐 아마 그때만큼 괴롭고 외로운 시간이 없을 것이다.

결국 나르치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골드문트이나, 그의 가슴에 새겨진 것은 기쁨보다는 슬픔이었다. 골드문트의 귀향은 결국 골드문트의 유언을 들은 셈이었다. 평생 신을 위해 이성을 위해 학자적으로 살아온 나르치스가 어떻게 감성과 경험에 살아온 골드문트와 이토록 깊은 교감과 유대감을 나눌 수 있을까? 진리라는 세계에서 이성과 감성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어도 본질은 진리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세계가 만나는 접점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오랜 여정처럼 기나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 소설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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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
김윤아 지음 / 일지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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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고 있던 어느 도서 한 부분에 이런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언캐니 밸리 이펙트(uncanny valley effect)"이다. 예전에 내가 은근히 생각해보고 영상관련 학문 도서 및 애니메이션 관련자료에서 조금 연계된 내용이 있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플라 익스프레스>를 보고 어린이 관객들이 공포를 느낀다거나 <파이널 판타지>의 너무나 인간 같은 캐릭터들이 무섭고 징그럽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감정이입이 안되는 상황 등이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픽사의 <인크레더블>이나 <슈렉>같은 애니메이션들은 오히려 2차원의 평면적 캐릭터를 만들거나 완전히 인간과 다른 초록 괴물을 창조한다. 애니메이션에 있어 인간 형상 언캐니 효과에 대한 논의는 서울시립박물관 연국논문집 <현대미술과 미술관>의 수록 논문, 김윤아, 「그것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인간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미술관, 2009년 참조] 

평소에 애니메이션 관련 글을 적는 입장에서는 이 말은 상당히 인상이 깊다. 이른바 애니메이션 캐릭터라는 존재들은 현실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현실에 없는 허구의 존재이다. 문제는 실제 존재들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담고 있으므로 그들이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문제로 인해 삶의 에로스와 죽음의 타나토스가 교차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라는 것은 실사영상으로 통해 삶의 모습과 더불어 죽어있을 그들을 불려오는 하나의 환영소환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실사 안에 찍혀 있는 피사체에서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들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허무의 공간이란 것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죽어있는 자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자들을 만드는 것으로 이른바 죽음의 각인을 새겨주는 영화와 달리 영원성을 부여한다. 

원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원래 없어질 수가 있다는 소멸의 현상을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영상에서는 빈 공간조차도 하나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존재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런가?
 

죽음이 원래 없던 이들을 탄생하는 것에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할 수 있는가? 그냥 TV나 영화관에서 보이는 유치하고 저속한 수준의 미디어로 비추어 볼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편견과 오류와 자만에 불과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말하려면 우리가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오락과 재미로 부여하기 보다는 그 이상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살펴본 도서에서 애니메이션에 얼마나 높은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지 기술한 도서가 있었다. 
 

그 책은 바로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란 도서이다. 이 도서의 큰 특징은 이른바 장인-작가주의적인 작품을 다룬다는 점과 상업적인 요소를 지닌 대규모 자본집약적인 제작방식보다는 1인 내지 소주정예로 이루어진 개인 중심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제작방식이 대규모 노동보다는 감독이 직접 모든 것을 구상하고 그리고 제작하므로 애니메이션이 모두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작품에서 보이는 가치관과 예술성은 매우 뛰어나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편의 미학강의를 받는 것과 같다. 미학은 미(美)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그 미라는 것이 단순히 예쁘고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는 모습보다는 그 내적인 가치와 담론을 어떻게 보여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예술이라는 인간 내부에 있는 하나의 억압 내지 표현욕구가 타인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 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게 하는가에서 미학의 가치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미학은 예술에 대해 철학이란 칼로서 광학적으로 본다는 말처럼 애니메이션 내에서도 예술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안다는 것은 애니메이션 미적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단순히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고정된 관념보다는 그 이상의 이상과 사유로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특히나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런 고정된 관념과 인식에 대해 확실하게 해체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이 있어야 한다. 책의 본문에서 이런 문구가 나온다.  

<아도르노는 “타락한 세계를 고발하기 위해서, 능욕당한 미의 명예를 위해서 예술은 추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잔혹해야 하고 혼돈을 가져다 주어야 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 공범자가 되어 화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기만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은 삶에 대한 부정성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하며 그 방식은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일 때만, 자신의 타자성을 내세우고 모순과 불협화음, 비동일성,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킨다고 역설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및 영화 각종 이야기를 가진 서사구조에서는 평화로운 세계 내지 혹은 원만한 공간에서 하나의 침입자 및 원인제공자가 그 세계와 공간을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그 세계와 공간이 위태롭게 됨에 따라 불안정한 구조로 빠지고, 이에 대해 영웅이나 대항조직이 생기며 이들은 다시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이것이 보통 narrative의 정해진 간단한 패턴공식이다.
 

보통 이런 공식들은 자기반성보다는 외부의 인자를 찾아오기 때문에 그 갈등의 시발점이 정말 외부의 존재들이 의도적으로 했는지 아니라면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게 했는지가 알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자주 보는 영화 중에서 베트남전쟁 영화가 있다. 거기서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갖은 음모와 위협을 제공하고, 미국군은 여기에 대해 매우 어렵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오고가면서 관객의 긴장감을 도모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에 맞이함에서 영화는 안정된 공간을 찾고 세상은 평화가 다시 찾아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세상 베트남전쟁은 통킹만 사건으로 통한 첩보자작극이란 폭로로 통해 베트남전쟁은 정말 세계 평화의 - 악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 위협을 저지함에서 모든 것이 마친다. 이것이 보통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 혹은 영화관에 보러 가면서 미리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관객의 틀이다. 그렇지만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은 이런 고정된 인식이나 일반 대중들의 사고를 가진 관객의 생각들을 오히려 전복시킨다.
 

영화로 통한 장치가 아니라 영화로 통한 정치적인 강조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들이 기용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보기가 참 좋다는 것보다는 보기가 그다지 좋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준다. 정해진 방식과 모습 그리고 연출로는 기존 사고의식에 빠져 있는 인간의 한계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무조건적으로 이런 과격하고 전도적인 방식으로만 관객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리데릭 벡이란 감독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제작기간이 5년이란 시간을 소요되었는데, 막상 상영시간은 단 30분 내외이다. 그는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혼자 작화작업을 하였으며, 작품 내의 마치 몽상의 세계를 꾸미기 위해 화학약품으로 펜이 묶은 셀을 닦음으로서 한쪽 눈을 잃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은 만큼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관객들을 사로잡게 되었고,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나무를 심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감독이 주지하고자 하는 의도나 가치가 그대로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들에 우리는 과연 예술적 가치를 배제하고 그대로 넘기야 하는 것일까?
 

때로는 이런 작품적 가치를 이해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예술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여 다른 애니메이션에도 예술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애니메이션인지 혹은 애니메이션을 위한 예술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을 위한다고 하여도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그것이 미학적으로 풀어가서 철학적인 사유로 논한다면 애니메이션 과연 그저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ps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이 책을 저술한 김윤아 교수님에게 직접 서명을 받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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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의 탄생 - 글쓰기의 새로운 전략
조셉 윌리엄스.그레고리 콜럼 지음, 윤영삼 옮김, 라성일 감수 / 홍문관(크레피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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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이 탄생은 논리적인 증명만을 원하는 도서가 아닌 듯하다. 오히려 논증으로 탄생하는 것은 언어로 통하여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그 말로 통해 활자라는 매체로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단순한 자기가 하고 싶은 주장만 제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주장과 거기에 동반되는 의견, 그리고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해 서로 토의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이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논리만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 논리로 통해 어떻게 상대방과 관계와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것이냐는 것이다. 진정한 논증은 자신과 우리만이 아니라 상대편과 타인의 발전을 같이 고민해야할 숙제인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 이외의 모든 상황을 지혜롭게 넘길 수 있는 하나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 무기는 총과 칼처럼 남을 다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자신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핸디캡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는지 혹은 그 뜻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지는 대화로 풀어가는 현대인들의 큰 과제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정연하게 글을 적어서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유도해야 하며, 거기에 대해 상대방에 대한 입장 역시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런 글의 대화로서 풀어가는 그 과정을 3가지 단어로서 전제를 세운다. 그것은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이다. 즉 논리, 입장, 감정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에토스다. 분명 책 제목이 논증의 탄생이나 논증이 탄생하는 것에서 로고스보다는 에토스를 중시한 점에서 나는 조금 놀랬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말하고픈 내용을 글로 적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를 남에게 전달한다는 전제 아래서 시작일 것이다.

내 생각을 전달함에서 상대방이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의 글을 적는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잘못된 것보다 글을 적은 본인들의 잘못이 크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글을 잘 적을 것인가? 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하지만 단순히 어떻게 글을 잘 적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만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고민이 될 것이다.

문건을 작성할 때 어떤 명확한 주장과 전제를 정했는지, 그 주장과 전제를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이유와 근거를 찾아내는지? 정확한 이유와 근거도 있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문장을 꾸며서 간단명료하면서 상대방이 납득하기 쉽게 적을 수 있을까 등 다양한 언어기술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는 겉으로 읽기만 해서는 분명히 어려운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더라도 이 책에 적혀 있는 안내들을 따라 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는 글을 적어가는 방법과 기술 그리고 많은 사례를 통해 추후 글을 적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 글을 적는 것은 기술과 방법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논리적인 사고로 통해 상대방과 대화로서 풀어갈 수 있지만, 그 논리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리를 이끌 수 있는 감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글의 요소라는 점이다.

어떻게 보자면 지나치게 논리적인 글을 상대방에게 차가운 칼날을 들이대는 것과 같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글은 너무 뜨꺼워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글을 적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과 자신이 내세우고 싶은 전제가 자신에게 모두 합당할지 모르나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납득시키어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할까? 단어 위치나 문장구조나 어휘구사 하나하나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하는 언어라는 마술에서 이 책에서는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이 책에 적혀있는 부분만 매달리면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에토스는 이 책을 읽어서 얻어지는 보물이 아니라 평소 글을 적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 그 자체에서 생기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의 탄생이란 이 책에서는 그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충분히 그런 부분을 숙지하고 있다면 언제가 글을 제대로 적고 싶어 하는 미숙한 나에게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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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7-01-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또 놀람 ㅋ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인 강원국 샘이 이 책이 추천을 하셨어요 그래서 리뷰를 보니 만화애니비평님의 리뷰가 퐉!감탄하고 있어요 법학 답안지를 쓰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젤 중요한 점이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부분을 논증하는 법이에요 ㅎ 이 책이 도움이 될까 고민은 하지만ㅋ 함 읽어볼라구요 ㅋ 제가 질문을 좀 못 알아듣고 글을 잘 못 쓰는 경향이 있어서요 ㅠ 눈이 많이 옵니다 길 조심해서 다니세요!!!

만화애니비평 2017-01-23 13:41   좋아요 0 | URL
추운데 잘 지내고 있나요?
이 책을 국문학도에게 소개받아 읽어보았습니다.
아직 비문이나 문맥오류가 많으나, 그래도 이 책 덕분에 많은 교정과 실력을 늘리게 되었지요. 전 남부권이라 눈발을 봐도 눈쌓인 것은 보기 힘드네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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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예전에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이택광 교수님 덕분이었다. 이택광 교수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이다. 이른바 좌파라고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2원화적인 대립구도이기 보다는 인문좌파로 통해 보수나 진보나 모두 비판해야 할 하나의 과제를 알려준 도서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좌우이데올로기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상대방의 가치와 논리를 따지기 보다는 무조건 매도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점이다. 그런 도서에서 나는 알랭 바디우라는 이름을 본 것이다. 알랭 바디우를 소개한 그 책에서는 좌파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부터 시작하여 장 폴 사르트르, 루이 알튀세르, 발터 벤야민,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자크 데리다 등 수많은 학자가 소개되나 그들이 순수하게 마르크스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롭게 해석하거나 혹은 반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인문좌파라는 것은 다양한 학자를 소개하고 그들의 주요 사상을 소개하여 기존의 체계를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체계를 비판하고 있는 것도 비판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하지 않은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온 근대현사를 거치어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그 역사적인 흐름에서 많은 담론이 오고 가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담론 중에서 윤리학을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인문학적인 요소에서 윤리학은 제1의 철학이라고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윤리학이라는 것은 혼자만의 학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리고 생각해 봄으로써 자신만을 위한 에고이스트가 아닌 진정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인격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윤리는 다른 철학 내지 혹은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부분과 다르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에 크게 관여하고 있다. 그런 부분인 만큼 윤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세계 자체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윤리라는 것은 어느 시대이나 중요하고 어느 사회나 문화에서도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다루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각종 잔혹한 테러들은 왜 멈추지 않은 것인가? 분명히 그런 잔혹한 행동을 하는 무리나 단체 그 존재들도 자신에게 윤리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의 윤리가치가 옳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옳다고 여기는 윤리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지 못할 뿐이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언어로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지능화한 동물이다. 그런 인간이 언어로 통해 논리로서 상대방과 접하면서 그런 이성에서 나오는 논리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구심이다. 오히려 자신들만의 논리가 옳다는 이성 관념이 오히려 논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그런 일들은 분명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에 마녀사냥, 지금도 일어나는 중동 분쟁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강렬하게 인상 깊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와 차이나는 자가 정확하게 나처럼 차이들을 존중하는 한에서만 차이를 존중한다. “자유의 적에게 자유란 없다”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차이가 바로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있는 그러한 자들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처럼 차이나는 자들은, “근본주의적” 이슬람교도와 유사한 모든 자들에 대해 윤리 신봉자들이 지니고 있는 강박한 불쾌감의 대상이 될 뿐이다>

세상에 분명 이런 모순이 있다. 전에 미국 9/11 테러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탄생하고 이것으로 미국은 자신들의 국가의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사마 빈라덴 조직과 거기에 관련된 적들을 공격한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미국에게 비극적인 플롯을 선사하여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보이는 narrative처럼 집단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집단을 공격한다.

문제는 이런 사건으로 통해 정말 그 테러조직과 범죄 집단만을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닌 자들도 응징한다. 미국 내에서 살아가는 중동지역 계열 민족이나 혹은 이슬람 문화권에 접한 사람들까지 차별하고 때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보복했다는 점이다. 진실의 적은 지구 저편 너머에 있다. 분명히 그들이 응징의 대상들은 거기 내지 혹은 거기가 아닌 곳에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응징해야할 정의적 가치가 어느 순간 잘못된 가치로 나가고 있다. 자유를 지킨다는 그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내세운 슬로건인 자유를 뭉개고 있다. 진짜 적을 대신하여 가상의 세계 즉 자기 관념 속에서 보이는 적들을 만들어 버린다. 이 서적에서는 그런 현상에 대해 simulacre라 한다. 그것은 인종, 피, 흙, 관습, 공동체로 인해 분리하게 하여 있지도 않은 혹은 본래 없는 것들이 현실화하여 비극을 만들어낸다.

윤리라는 것이 과연 이런 사항으로 인해 하나의 정의를 성립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은 니체가 제기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마라”라는 것과 같다.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윤리라는 것이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편을 나누어 상대방을 집어 삼키는 거대한 무기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이런 문제는 기존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1792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 분명 기존 봉건사회에 대한 체계를 전도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노예 없는 주인” 즉 인권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1933년 나치의 탄생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만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우수하고 탁월하며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웃기게도 결과는 가장 비열하고 치사하고 가장 비이성적인 형국으로 변질되었다. 나치즘도 그렇고 파시즘이란 극단적인 자기우월화가 왜 틀렸는가?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도 자신들에게 윤리나 정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자신에게 윤리나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을까라고 생각했으면 어떠한가?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모든 의견과 사고가 옳다고 판단한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라고 했듯이 그런 인간이 다수가 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되어버리면 하나의 거대한 dogmatism이 된다는 점이다. 이런 거대한 dogmatism에 대해 칸트가 인간의 이성 그 자체를 비판하였는데, 사실 그런 문제점이 발생한다면 분명히 그런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혹은 다수) 본인에게 인격 성숙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물리적, 정신적, 심리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윤리학이라는 것을 보면 솔직히 말하여 윤리라는 자체에 대해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그 작은  순간에도 혹은 거대한 사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윤리라는 것을 인간이 바라보는 것은 정말 이것이 옳은가? 혹은 옳지 않은가? 하기 보다는 사회적 통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것이 정의로운 윤리가치라는 내세운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슬로건을 내밀고 하나의 교조로 보는 경우가 가장 윤리에서 멀어지는 지름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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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입문 - 철학사상총서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 문예출판사 / 1994년 9월
평점 :
절판


이번에 아주 지옥같이 느끼던 도서 한권이 있었다. 나에게 많은 도서가 지옥 같은 맛을 보여주나 이번 책 역시 정말 무한의 고뇌에 빠져들게 하는 책 한권이 있었다. 그것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形而上學 入聞)”이다. 형이상학이란 단어는 지금 나에게도 몇 권의 관련 도서를 보아도 쉽게 이해가기가 어렵다.

meta-physics 즉 physics이란 물리학(物理學)에서 meta라는 이른바 그 너머의 세계라는 의미인데, 물리학 너머의 세계라는 것에 대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물리적인 존재에 그 이상의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이상학에서 주요 연구대상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재적인 탐구이다. 즉 형이상학은 철학(哲學)과 긴밀한 관계 아니 거의 그 자체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사유함으로 탐구하는 즉 인간과 자연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본다면 형이상학은 아주 쉬우면서도 어려운 학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언제나 살아가면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형이상학에 대해 깊이 통찰하기 보다는 그저 옆에 있어도 모르는 것뿐이다.

책을 읽다가 약간 떠오른 부분은 옆에 있음에도 있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옆에 있는데도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감지할 수 없음이라는 인간의 사고가 조금 인상 깊다. 형이상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의 존재자체와 그 주변을 마주한 모든 세계적인 부분이어도 말이다.

그런 인간이 현실 속에 살아감의 알리는 존재(存在, sein)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문제다. 그런 인간 자체의 삶의 근본 존재라는 것을 다루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물리적인 존재가 있어야 하고, 그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다루는 형이상학 분야는 물리학(物理學)과 논리학(論理學)에 대해서이다.

또 하나의 형이상학의 근본인 윤리학(倫理學)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이 다루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인 정치적인 존재를 다루기보다는 인간 그 자신의 존재를 다루는 실존주의(實存主義)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보며 늘 궁금한 것은 과연 이 서적은 형이상학이란 그 거대한 학문에 입문용으로 괜찮은가? 라는 것이다.

차라리 입문용이라기보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한번 보고 오는 것이 더 이 책을 유용하게 읽지 않을까? 생각만 앞섰다. 읽는 도중 하나하나 지켜보면 계속 “존재와 시간”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형이상학 입문은 결국 하이데거가 대학교 강의시간에 학생을 상대로 가르치기 위해 생긴 책이라고 하나, 이 책을 보면서 과연 그런가 싶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하이데거라는 인물을 형이상학, 철학, 사상 등에서 찾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막상 떠올랐다.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끼리 대화하다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반복적인 역사적 흐름에 고뇌하는데, 이때 주인공끼리 이런 대사가 나에게 인상 깊었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다” 그 말을 한 사람은 하이데거라는 사실 아래서이다. 물론 이런 대사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이데거에 대한 관심이나 대사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염두를 두지 않은 듯했다.

사실 이 작품은 주요점은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서 그 자신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자신이 어떤 세계나 다른 접점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과관계를 발생하나 선택지가 정해진 것처럼 흘러가기 보다는 작은 선택이 큰 목적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비효과까지 나타나 그것을 시간의 흐름을 제어함으로 작품 내의 과업을 달성하는 점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에서 존재하는 인간, 반대로 시간을 존재하게 하는 인간이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조금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하기 보다는 오히려 만족감을 얻지 못하게 해버렸다. 단지 인상 깊은 문구는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왜 있는 것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왜 아무 것도 아니야 할 이유가 없는가이다. 따라서 존재의 그 자체가 왜 있으며, 그것이 왜 그렇게 아니면 안되는가이다. 따라서 현실의 있음에 따른 물리적인 세계와 그 인간이 있다는 증거가 있는 언어가 불러지는 순간 논리학으로 이어진다.

어차피 우리 인간의 눈에 앞에 나무가 보인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은 나무이라도 그것이 설사 나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가 나무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그것은 나무가 아니다. 결국 나무라 나무로서 존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사고에서 태어난 결국 언어의 존재이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나무는 존재하나 우리가 나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의문가는 점은 언어가 있기 전에 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언어로서 나무를 말해주지 않아 나무라는 것이 관념적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분명 탄생의 시점은 나무를 나무라고 말하기 전에 있었지만, 그것이 도대체 왜 있는 것이고 차라리 왜 아무 것도 되지 않아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사소한 문제일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의 구심점으로 하여 넓게 펼쳐가게 된다면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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