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유동의 철학 - 한 철학자의 지적 초상화 리좀 총서 6
우노 구니이치 지음, 김동선.이정우 옮김 / 그린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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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들어본 질 들뢰즈, 그에 대한 이야기는 가끔 현대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양권 국가에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중에 하나란 사실을 인지하게 한다. 전에 인터넷 사이트 철학관련 게시판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질 들뢰즈가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나, 적어도 한국인지 세계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3가지 학문사상이 주류로 차지하고 있다고 말이다. 1번째는 마르크스주의, 2번째는 구조주의, 3번째는 라캉주의라는 것이다.

 

적어도 주류에서 마르크스야 말로 비주류에서 탄생한 주류학파이고 20세기 초반부터 21세기가 도래된 시점에서 마르크스의 유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마르크스 유령이 오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계속 오게 만드는 사회적 현상일 것이다. 마르크스 이외에도 다른 사상가의 사상을 흡수하여 탄생한 구조주의, 그 구조주의 안에서 4인방 중 하나인 자크 라캉, 일단 그래도 자크 라캉은 정신분석학자로서 마르크스보다는 프로이트의 사조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일단 요 3가지 사상이 주름잡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프랑스에서 구조주의가 쇠퇴하고 있다고 하나, 한국에서 쇠퇴하기 어려운 것 같다. 한국이란 워낙 사상적인 자유나 담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뢰즈와 무슨 관계가 하냐면, 지금 막 읽어본 <들뢰즈, 유동의 철학>에서 들뢰즈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흄,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프루스트와 같은 사람들인데, 그가 말년 죽기 전에 마르크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저술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의 철학적인 자세는 언제나 활성화라는 것을 추구하려 했던 것 같다. 단지 예전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를 직접 만나고 친분이 있던 우노 구니이치라는 일본인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 속에서 내가 들뢰즈를 알기란 어렵다. 이 책은 우노 구니이치라는 사람이 들뢰즈란 인물을 알고 그의 서적을 읽고 연구하였기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천의 고원에서 보이는 리좀이란 단어였다.

 

어디든 심오하게 영상비평이 들어간 자리에 리좀이란 단어가 그물망처럼 단단히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나라는 존재 역시 들뢰즈의 이름을 알았던 계기는 철학을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미학과 비평에 관련된 책들을 보면서 알았다. 그는 철학자이기도 하나 오히려 영화평론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가 서구철학의 반항아인 니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가 실존주의적인 면에서 삶의 부정보다는 긍정을 추구하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는 폐가 너무 좋지 않아 자살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에 관하여 죽음은 인간에게 좋지 못한 행위이며, 신의 가호 아래서는 죄악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자면 죽음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극단의 상황이다. 하지만 죽음이라고 하여 그 죽음을 택하는 것에서 긍정의 철학자 들뢰즈를 두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해온 인들이 아닌 것 같다.

 

어느 구문에 적혀있는 것처럼 죽음은 자연적인 현상이고, 그 자연적 현상에서 개인이 그 죽음은 선택하므로 죽음이어야말로 최고의 자연적인 행위가 아닌가라는 점에서 죽음을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그저 언제나 같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망각의 세계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저술한 서적 중에서 주인공이 대부분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많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죽음이란 존재가 힘들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철학자라고 한다. 죽음과 삶이라는 것은 반대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같이 함께 하는 존재이므로 삶이란 죽음과 같이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아니라면 죽음이 당장의 생물학적 생명에는 멈추어서 정지하더라도 인간의 이성과 영혼은 끊임없이 부활한다면 그것은 죽음일까? 아니면 또 다른 삶이란 것일까? 하지만 인간의 인식과 존재에서 어느 특정한 영역에서 업적을 남기지 못하면 존재의 상실은 영원히 이어진다. 그러면 존재라는 객체가 있더라도 그 존재가 있었다로서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20세기의 슬픔은 하이데거가 차지하고 20세기 기쁨은 들뢰즈가 차지한다고 했다.

 

그것이 왜 그런지 몰라도 하이데거와 같은 경우 니체의 실존주의를 따라가고, 그의 초인사상을 이끌렸다. 문제는 하이데거가 살아가던 시절은 유럽에서 가장 시끄럽고 잔인하고 무서운 시기였다. 현대사회는 참으로 변증법적인 역사가 눈에 보인다. 왕정사회의 붕괴와 착취와 투기의 시대 그리고 민주주의로 위장한 파시즘의 세계 그 모든 것이 유럽의 20세기 중반까지의 모습이다. 그 파시즘의 극치는 결국 전쟁이다. 전쟁은 어느 순간 전쟁이란 그 자체에 목적이 아니라 국가란 장치아래 하나의 도구로 되었다.

 

당시 하이데거가 문제된 이유가 독일 나치스의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현대에 사는 사람치고 히틀러하면 떠오르는 것은 독재자에 전쟁광이다. 물론 당시 독일의 상황과 주변관계를 보면 그가 하는 전략은 독재자로선 합리적 판단일 것이다.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묶어내어 외부의 상대를 적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제국이어야 말로 최고고 선이라는 가치로 무장하면 그것만큼 쉬운 선동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2차 대전의 그늘은 들뢰즈에게 존재했다.

 

이 책에서 안 사실은 그의 가족 중에 형이 2차 대전 중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전쟁이란 광기 아래 가족을 잃은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이 있으면 항상 철학의 사유란 새로운 동이 트이는 것 같다. 플라톤 역시 청년시절에 고대그리스 아테네에서 살던 시절에 전쟁이 있었다. 28세 때는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이성 아닌 이성에 죽임을 당했다. 이 책에 언급된 “이성은 감정 중의 하나”이듯이 소크라테스가 신을 모멸하지 않음에도 모멸됨이 성립되는 것은 이성이 정말 감정 중의 하나로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질투라는 감정이 이성화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으로 하여금 한 인간의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비극이어야 말로 오히려 인간을 다시 성찰하고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라고 여긴다. 물로 그런 점들은 들뢰즈가 오래 전부터 눈여겨본 스피노자에서 시작된다. 스피노자에 대해 자세히 모르나 단지 “내일 당장 지구가 망한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를 주장한 사람이다. 그의 철학은 당시로서 무척이나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사이에서 배척당하고, 유대인을 배척한 기독교인들에게 역시 배척당하고, 그의 사상과 생애는 배척의 역사이다. 괴로움과 좌절감으로 맛보면서 눈감던 그에게 이제 그의 철학은 현대 기라성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된다.

 

당시의 패배, 오늘의 패배가 내일과 미래의 승리라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이 그의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들뢰즈에게 그의 사상은 많은 변화를 준 모양이다. 스피노자가 당시에 아주 거친 인생을 살았으나, 스피노자의 지구멸망에서는 그의 인생관은 정말 철학적이라고 볼 수 있다. 죽음이어야 말로 오히려 차분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다르게 보자면 사과나무 한 그루의 의미에서 세계가 망해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또한 사과나무를 심는 그 행위로서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이 들뢰즈가 희망으로서의 철학을 두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내가 아는 블로거 중에서 분명히 이 이름을 사용한 분이 있었다. “천의 고원”이라고 말이다. 천의 고원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저술한 명저이다. 물론 앙티 오이디푸스도 있겠지만, 천의 고원에 녹아들어있는 사상의 깊이와 사유의 세계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그저 그런 아이디에서 그런 책제목이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고가는지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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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오타쿠, 게임, 라이트노벨
아즈마 히로키 지음, 장이지 옮김, 선정우 감수 / 현실문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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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히로키의 서적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란 서적을 예전에 읽어보았는데, 그는 분명히 일본의 떠오르는 인문학자인데도 불구하고 오타쿠 문화에 대해 글을 적었다. 차라리 그의 학문적 기조와 가까운 가라타니 고진의 문화비평에 치중했다면 더욱 좋고 유리한 길을 갈 수 있을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보나 나름 나처럼 하위문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서브컬쳐 특히 만화,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밀리터리 등과 같은 문화가 많이 발전하고 많이 보급되어 있다. 물론 발전하고 보급되어도 여전히 차가운 시선과 편견은 계속 따라 붙기 마련이나, 그래도 최소한의 그런 문화적 생산과 소비에 대한 공급과 지출이란 단계가 확실히 잡혀 있는 셈이다. 일본의 코미케 행사를 가면 그 커다란 행사장이 모두 인파로 막힐 정도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게 남들에게 유치해보이거나 저급해보이는 그 하위문화에도 하나의 새로운 바람은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순수문학 내지 일반문학의 영역에서 다른 방향으로 길을 돌리고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소설이나 일화들을 영화와 드라마로 많이 사용되는데, 시나리오 가치로서 그 유명한 소설 역시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로 전환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자면 소설 안의 글자 텍스트보다는 애니메이션 영상 안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움직임에 따른 대사와 연출음은 상당히 리얼리틱하게 보인다.

 

사실 애니메이션의 미학은 리얼리즘의 해체인데, 그것이 오히려 리얼리즘에 도전하게 한다. 다르게 관점을 두자면,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즉 팩션장르에서 깊은 심해에서의 전투나 높은 공중에서의 대규모 전투, 우주비행에 따른 우주선 이동이나 주변 환경 등을 고려하면 실사영상보단 오히려 애니메이션 영상이 훨씬 높은 전달력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이 모든 미학적, 예술적, 철학적 등의 담론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구시대적인 사고로 볼 수 없다.

 

구시대적 가치관으로 대할 수 없고, 그런다고 그것들이 구시대적인 요소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 아래에는 항상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가 있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는 정치적인 영역에서 다툼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가령 코페르니쿠스 지구관이라고 하여 당시 교황의 정치권력 아래에 있던 유럽에서 전혀 통하지 않은 주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시절은 불과 500년 전후다. 500년 전후의 그와 우리의 관계는 멀리 있겠으나, 적어도 인간이 과학을 사고하기 시작한 고대그리스 physics에서 보자면 과학의 역사에서 우리와의 시간적 거리가 그렇게까지 멀지 않다.

 

그런데 만약 지금에 와서 코페르니쿠스가 가진 지구와 코페르니쿠스 사후 100년 후에 나타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이 나와 지금에서 그것이 틀렸다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진보적 인식과 보수적 인식에서 보자면 말이다. 반드시 진보적 인식이나 주장만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인식 아래 우리는 많은 오류와 착각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며, 진보적인 가치 아래 시행착오를 계속 닥치기 된다.

 

물론 그런 시행착오가 겪고 또 겪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의 노하우를 습득한다. 그것이 언젠가는 보수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을 보는 것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 가치가 과연 얼마나 보편화, 상식화, 객관화란 단어를 남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최근에 다른 서적에서 본 구문 중에 <이성은 감정 중에 하나>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 가진 보편적, 상식적, 객관적인 이성도 역시 감정 중에 하나로 볼 수 있음을 망각해선 안되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읽어본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한국처럼 다양성과 자율성, 게다가 창조성과 개인성을 죽이는 전제주의적인 가치를 지닌 사회에서는 이른바 대중문화는 하나의 권력이고 폭력으로 등장한다. 폭력적인 행위 주체자인 대중들은 대다수의 인원이란 점에서 군중심리의 권력으로 문화의 척도로 본다. 즉 이 책을 보는 입장에 처해진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의 존재여부 자체도 큰 반발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원래부터 이 책의 존재도 알 수 없거니와 알아도 대중문화의 폭력성에 묻어질 수 있으며, 읽어본들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위에서 제기한 인식의 차이도 있겠으나 그 차이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고정관념,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재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라는 것은 본래 상실된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렇게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란 자신이 어떤 것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는 인식론적 오류로서 항상 진실을 새롭고 전혀 다른 사실로 변모시킨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그런 부분을 잘 감지해야 볼 수 있고, 그래야지 비로소 이 책이 읽혀질 것이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이 책에선 기존에 리얼리즘이 없다고 여기는 만화, 애니메이션에 하나의 자연주의적인 리얼리즘을 부여하고 있고, 게임이란 장르 역시 리얼리즘이 완전하지 않으나, 그것 자체로도 반(半)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 리얼리즘이란 전혀 부합하지 않은 반대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속하는 리얼리즘이다. 어떻게 현실부재의 애니메이션 미학이 현실부재만 존재하지 않음일까?

 

당장 뭐라고 설명하기란 어렵다. 단지 여기서 알아가는 사실은 여전히 인간은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점이고, 인간은 스토리텔링적인 존재라는 것이 내 확신이다. 인간이라 생각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위해 생각을 한다. 즉 오타쿠 세대에서 그들이 가지는 하나의 공감과 사고는 즉각적 스토리텔링으로 통한다. 가령 우리는 실존적인 인간을 같은 시간과 공간 아래서 연속적인 장면인 시퀀스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몽타주처럼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 모우는 것이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은 앞에 실존하지 않은 존재와 실시간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어제 밤에 남긴 메모를 오늘 낮에 답할 수 있다. 단지 특이점은 지구에 사는 모든 존재가 3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에 그 대화의 연속은 시간의 흐름를 가지게 되는 마련이다. 물론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에서 인터넷의 세계에선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단지 시간과 공간의 연속을 가진 것은 인간 그 개인의 영역이다.

 

인간에겐 제한된 세계이나 인터넷에는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유한하나 인류를 어리석지 않은 이상 영원하다. 그런데 그런 사고적 기능이 게임에 많이 들어가는 것이 특이점이 아닐까 싶다. 현실적 리얼리즘에서 인간의 유한성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현실의 영역을 떠나 하나의 가상과 괴리적인 존재에서는 유한성이란 존재할까? 오히려 존재의 확실성이 없기에 유한성을 탈피하는 것은 아닌가? 이 책에서 그런 부분을 다룬 게임을 소개할 때 솔직히 뭔가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인간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 안의 억압된 욕망과 사고로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다고 그것을 모두 부정할 수만은 없다. 그 부정은 채워야 하는 공간이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란 문학적인 요소로 변모된다. 단지 그 문학적 요소는 이른바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로 새롭게 진행된다. 라이트노벨은 일반적으로 문학소설과 달리 거대서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거대서사에 반대되는 이야기가 주요 흐름이다. 세계 안의 인간이 구조적으로 움직여서 하나의 존재적인 상황보다는 오히려 캐릭터가 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단지 그 외의 세계는 별도의 세계로서 기본적인 문학에 속해있는 현실의 반영과 더불어 그 현실과 다른 가상 내지 환상의 접촉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주인공이란 자들은 대부분 일상의 지루함이나 박탈감 내지 좌절감에서 새롭게 바라볼 환상이 필요한 것이다. 오히려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시작점은 오히려 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나 그런 라이트노벨을 게임으로 이식하거나 그 게임자체가 라이트노벨적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크나큰 전환점이 된다.

 

기존 우리가 아는 게임을 보자. 철권이나 버츄얼파이터와 같이 실시간으로 캐릭터가 일정한 공간과 시간이란 가상세계에서 대결을 펼친다. 이때의 대결의 주체는 이미지로는 캐릭터이나 그 이면에는 그들을 다루고 있는 플레이어 유저다. 또한 일련의 정해진 틀로 롤플레이를 하는 게임이든지 혹은 일대 다수의 적을 제압하는 슈팅게임이든지 여러 가지 게임들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이 게임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서사에서 큰 틀에 메이게 된 것이지 우리가 서사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냥 일종의 세계에 내던지고 거기서 본능적으로 승부를 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라이트노벨적인 게임 즉 리얼리즘이 온전치 못한 곳에서는 일방적인 영역이 아니라 비일방적인 영역으로 가는 것이다. 특히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라든지 또는 최근에 발매된 쓰르라미 울적에와 같은 게임들은 오히려 게임을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하고 있다 직접 그곳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가상이든 환상이든 그 세계가 허구든 가짜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자신이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돌아보면 좋겠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 평형세계에 대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반복되어가는 일상에서 우리는 안전한 일상이 좋은지? 아니라면 불확실한 미래가 좋은지 말이다. 물론 그런 사유가 배경에 자리 잡게 된 동기는 분명히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란 존재가 그다지 밝고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족의식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임은 분명하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는 오타쿠들의 가지고 있는 속성과 거기에 동화되는 작가와 제작진들의 부합성이 맺혀져 있으나, 기본적으론 우리 인간이 가지지 못한 욕망의 결여는 분명한 듯 하다.

 

인간이여 욕망하라 타인을 욕망하지 말고 자기를 욕망하라는 말도 있으나, 현실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더욱 사회적인 존재로 해당된다. 스토리텔링의 생산과 소비에서 이 책을 본다면 조금 느끼게 되는 게 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 욕망의 전이과정은 결국 스토리텔링이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소비하고 생산하고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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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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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공학과 출신으로서 환경문제에 대한 기사나 이야기가 나오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사전에 일어나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그전부터 종종 했던 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굵직한 문제나 예전부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일들은 계속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주변 사람과 토론해보아도 결국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려한 일들로 연결되어 버린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환경을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회의적 내지 절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 회의적이란 것은 그 문제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저 그대로 보는 것에서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고, 절망적이란 말은 그 일이 발생하여 절망이기보다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자 하는 환경이란 미래에서 희망이란 단어가 과연 존재하는가?

 

항상 그것을 고민할 수밖에 없으나 현실에서 원점에서 맴돌 수 없기에 자기모순이란 덫에 빠지고 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개인적 환경인으로서는 판단할 수 있으나 개인적인 환경인으로서는 그것을 조절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진실로 그것을 막아낼 수 없는 개인적 능력이 아닌 정치적인 역량에서 말이다. 환경문제를 왜 그렇게 중요할까?

 

우리들은 항상 환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환경 중요하지!” 혹은 “환경 그게 뭐가 중요해”라고 말이다. 웃기게도 그런 말투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아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전반적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다.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있나 하지만, 사실이다. 왜냐면 자기 이익 앞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환경이고, 자기 이익과 무관하면 환경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만약 오늘 당신의 집에 갔는데, 집 앞에 도로공사 중이다. 도로공사를 하면 대개 굴삭기나 덤프트럭과 같은 중장비들이 오고간다. 중장비가 오고가면 소음진동이 기본이고, 디젤연료를 다량으로 소비하므로 고온고열의 매연이 나온다. 만약 날씨가 더운 여름이라면 상당한 불쾌지수로 환산된다. 왜냐하면 대부분 여름철에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은 이상 창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창문 너머로 매연의 악취와 더위의 가스를 느낀다면 기분이 좋을까? 본인은 그렇게 느끼겠지만, 주변 사람들과는 무관하다. 기껏 해보았자 차량이동 시에 도로가 협소함에 따른 짜증나는 기분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금방에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 누구는 환경 중요하지! 누구는 환경 그게 무슨 대수이냐고 말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닐까?

 

이런 사소한 건들도 그러한데, 만약 환경적인 요소가 단순히 도시화된 요소가 아닌 자연적인 대상이라면 어떨까? 인간은 90일 앞에만 본다는 이 책의 본문처럼 그건 사실인 것 같다. 특히 환경공학과를 나와 환경영향평가 업무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나도 어리석으나 왜 인간들은 이토록 어리석은가라는 한탄을 내뱉게 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를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학부시절에 각각 여러 교수님에게 강의 받던 대기환경, 수질환경, 토양지하수, 환경위생학, 생태학, 폐기물처리 등등을 말이다. 그것은 각기 다른 과목으로 배우나 결론은 한 지점에서 맞춘다. 그리고 그 지점은 인간의 위기이다. 왜냐고? 당신이라면 탈황장치도 없이 뿜어 오르는 공장매연을 즐겁게 마실 수 있는가? 당신은 분뇨와 공장폐수가 충분히 섞인 강물을 식수로 삼을 수 있는가? 당신이라면 기름으로 노출된 곳에 소풍이나 갈 수 있는가? 당신은 새조차도 울지 않은 쓰레기가 넘쳐대는 공원에 산책이라도 갈 용기라도 있는가?

 

전혀 없다. 그런데 그 범인들은 누군지 아는가? 바로 나와 당신들이다. 내 자신만 아닌 다른 타인도 조금씩 그렇게 한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결점은 가린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인 듯하다. 단체 속에서 언제나 정의나 진리를 군중심리로 먹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환경문제에서 당연히 원칙적으로 장기적인 안목을 두고 말해도 군중에겐 통하지 않을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집단적 이기주의는 합리적 이성도 마비시킨다. 물론 합리 역시 좋지 않다.

 

합리(合理)는 때로는 합리(合利)라는 이름으로 위장되기 때문이다. 물론 한자어나 영어철자에선 다르나 한국어에서는 발음을 대조하면 딱 어울린다. 말장난처럼 보이나 사실이다. 이때까지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리 인생과 미래의 인생을 갉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붕괴를 읽다보면 다소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게 당연하지 그런데 왜 사람들은 바보처럼 당하고 마느냐?

 

그것은 인간들이 욕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물론 욕심이면 다행이다. 욕심은 채우면 그만이나 욕망은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 때문에 숲의 나무를 베고, 물가의 고기를 모두 잡고, 기름과 광산을 모조리 뽑고 사라지는 술수로 결국 그 지역의 주민뿐만 아니라 그 국가와 사회마저 좀을 먹는다. 문제는 그곳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라 범세계적인 문제로 향한다. 가령 독극물질은 중금속과 PCB와 같은 물질들이 발생하는 장소가 아니라 북극의 생물과 거기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높게 나온다면 당신은 이해 가겠는가?

 

이해가지 않을 것이나 우리나라의 봄철을 상기해보자? 봄이면 항상 황사가 불어 눈과 코를 괴롭히고, 그것도 모자라 건물과 차량을 더럽힌다. 이전에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입자가 굵어지고, 심지어 입자 안에 중금속과 독성물질까지 보너스로 달려온다. 왜 그런가? 황하라는 대하천은 우리 영토와 엄청나게 멀리 이격되었는데도 그렇다. 결국 세계의 특급 독극물이 북극으로 간다는 것이 이상치 않다. 예전에 일본의 쓰나미로 인해 밀려나간 콘크리트 구조물이 미국 해안가에 등장했다.

 

수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것들인데도 가고 있다. 환경오염이 그렇게 단순하게 보이는가? 문제는 그런 환경오염이 국제사회의 문제와 분쟁을 넘어 우리의 앞날을 흐리게 한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이 책에 나온 이스터섬이나 그린란드, 그리고 바이킹들의 운명을 보라. 당시는 우리가 살던 때보다 자연환경 자원이 풍부하고 오염이 덜 되었다. 그런데도 망해서 모두 사라졌다. 그 당시 역시 환경오염이 있었다. 나무를 보이는 데로 베어 쓰고, 풀은 모두 양이나 염소가 뜯어먹었다.

 

토양이 가벼운 곳에는 바람과 강우로 토양이 씻겨 내려가고, 토지는 황폐화되고 양분도 없어 식물이 자라지 못해 양과 염소 모두 죽었다. 나무도 없어서 강우 시 저장한 공간도 없고 나무열매도 없다. 결국 남은 것은 굶어죽기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서로 카니발리즘이란 죽음의 축제에 향연의 기회를 누릴 것인가? 먼 바다로 가서 도중에 죽을 건가? 자살할 것인지에서 다소 여러 가지 선택권은 있으나 모두 죽는다는 답 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그들의 죽음이 그러하다. 굶어서 추워서 병들어서 그 밖의 비참한 죽임들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우리랑 관계없냐는 이야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조심해야할 일이다. 앞으로 자원은 고갈되고, 자연환경은 파괴가 진행되어 사막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먹을 물은 줄어들고 지하수마저 오염되고, 지구온난화로 얼음의 물이 사라진다. 오늘 당장 한시적으로 관계없어서 그저 그러니 하나, 처해지면 어떤 위기가 올까?

 

우리나라도 그런 비슷한 일들이 없지 않아 발생했다. 수목을 베어 토양침식이 일어나고, 억지로 외래종이 와서 생태계 파괴가 도래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해일피해가 해안 쪽에서 조금 심해지고, 어획구역이 조금 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 아니면 90일만 생각하는 동물인지 계속 누락되고 있다. 문명의 붕괴를 읽다보면 지금 우리가 처해진 상황이 좋지 않다.

 

물론 그 외의 환경오염에 대한 책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위기는 위기라고 여기지 못할 때 다가올 경우 더 큰 타격이 된다. 문명의 붕괴에서 사라져간 문명들이 위기라는 것을 처음부터 각오했을까? 그 각오를 했고 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에 순응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나 죽음의 문명을 다루니 이미 결과는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문명의 붕괴는 그런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도 말한다.

 

붕괴라는 것이 내일 당장 오지 않는다고 하나, 문명의 이기로 통해 피해본 소수약자들은 상당히 있었다. 당장 내일아침의 이익만 쫓다가는 그런 것 자체도 못할 멀지 않은 미래가 올 것이다. 이미 미국에선 그런 문제가 있었다. 광산이나 벌목으로 돈 좀 잡아보려다 오히려 복구비용으로 애를 먹고, 심지어 그 문제를 주민에게 돌려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누가 문제란 말인가? 당장의 문명의 붕괴는 일어나지 않으나 소소한 곳에서 일어나고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씩 붕괴되어 모를 뿐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인지 어제와 같은 오늘인지는 누구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은지는 각자의 문제지만 말이다.

 

ps 참고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라는 책을 먼저 읽었으나 이 책을 알게 된 동기는 故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에서 찾았는데, 진보라는 것은 언제나 현실을 제대로 확인하고 그것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조건 전복만 생각하는 것이 진보도 아니고, 그런다고 하여 고칠 생각도 없이 멈추는 보수들은 보수도 아닌 것 같다. 전통이란 단순히 그대로 머물러서 전통이 아니라 조금씩 같이 세상을 보면서 변해가는 것도 전통이다. 인간들이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눈앞의 이익만 보거나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도 모아이석상이 있는 이스터섬처럼 그대로 사라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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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서재
이채윤 지음 / 푸른영토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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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책 한권을 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보통 책 한권을 읽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느냐 마느냐 차이가 있겠으나 단순히 인기소설이나 유행하는 자서전은 제외하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보통 인문학 도서나 혹은 고전소설을 읽게 되면 분명히 그 책을 읽음으로서 다른 책들을 계속 이어가야 흐름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령 닥터 지바고란 소설과 영화가 있다고 치자, 그 작품은 지금이야 명작이 되어버린 고전 소설과 영화다. 하지만 그 작품을 알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사와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과 러시아내전, 스탈린의 독재정치를 생각하지 않으면 내용의 깊이를 향유하지 힘들 것이란 점이다. 그저 소설 책 한권을 읽었을 뿐인데, 그 책에서 보이는 작가의 정신세계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혹은 그 시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들어가 있다. 그 시대적 배경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지도 알 수 있고, 거기에 대한 작가는 어떻게 여겼는지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역시 인간이므로 자기의 이성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지와 사랑과 데미안을 저술한 헤르만 헤세의 경우 그의 책을 처음 읽는 순간 프리드리히 니체가 생각났다.

 

 

나중에 그 책을 다 읽은 후에 후기를 보니 그는 실제로 니체를 열심히 보고 심취했다고 한다.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가 의도한 그 세계와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그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책의 매력이면서도 큰 짐이기도 하다. 1권이 책이 세상을 살아가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람들 중에서 책을 통해 책을 알아가는 것은 또 어떤 이야기와 방향이 있을까? 어떻게 보면 최근에 본인이 계속 어느 특정인물을 추모하는 것일지도 모르나, 그는 분명히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었으며, 정치가였다.

 

 

이번에 내가 읽은 서적은 <노무현의 서재>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상당한 정치적인 안목이 넓었으나 그가 처한 정치적 약세와 언론과 여론의 견제에 많은 타격을 입었다. <노무현의 서재>에서도 언급하다시피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5년 동안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극복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발한 참여정부는 보수 세력이 득세하는 우리나라 정치 현실 속에서 비주류에 속한 정부였다. 노무현 역시 우리 사회의 주류와 다투는 비주류, 마이너리그의 삶은 산 사람이었다. 반면 대한민국의 보수는 거대 기업, 거대 언론사, 거대 연구소, 법원, 검찰, 강남, 서울대, 학술원을 비롯한 각종 학회, 라이온스클럽, 로터리클럽, JC(청년회의소), 등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형성하고 있었다.”

 

 

라는 내용처럼 그의 대통령 생활은 단순히 옆에서 보면 한심할 지경이었으나, 막상 그 실상을 알고 보면 한심한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목을 물고 늘어지는 한국의 고질병들이었다. 겉으로 뭔가 단순하고 무식한 말투를 내뱉는 그이지만, 막상 그가 가진 사고와 판단력을 생각해서는 그런 사고를 가지는 것은 한심하다는 말만 내뱉을 수밖에 없다. <노무현의 서재>를 읽기 전에 이미 <진보의 미래>를 읽어보았는데, 그 책에서 그가 인용한 도서나 철학자 그리고 내용은 보통 사람으로서 기대하기도 어려운 책이었다. 그의 독서량은 기본적으로 철학에서 시작되는 고전부터 시작하여 현대 사회과학, 경제학 도서까지 파고들었다.

 

 

특히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공학도가 아닌 법대나 정치학 전공자란 한계로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경우 과학과 기술에 대해 중시했고, 특히 공학적 기술력을 중시했다. 과학기술력의 발전은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기술관료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에너지가 고갈되고, 자원이 모자라며, 물과 공기와 같은 자연환경 역시 위기에 처해지는 것을 알았다. 그런 점들을 정치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나, 그런 행동적 주체는 과학과 기술이란 점이다.

 

 

물론 이 책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그런 인력을 위한 인프라 조성만 다루는 것만은 아니다. 시민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 안목을 매우 중시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어느 누구를 지지하거나 따르는 것으로나, 또는 어느 특정인물은 반대하고 무조건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으로 지식인 내지 양심적인 인간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물론 정말 그렇게 반대하고 거부해야 하는 인물은 있다. 독재정치나 폭력정치를 하는 정치가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일어나서 투쟁하는 것도 좋으나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 의식을 깨우치는 방법밖에 없다. 국민과 시민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국민은 어떻게 보자면 대중인 mass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는 시민 즉 people은 무엇인가? 시민이란 정치적인 안목과 판단력이 가지고 있어서 그 사회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올바른 안목으로 훌륭한 정치지도자를 선별하고, 그들이 바른 정치를 하는지도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시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이다. 그 정답은 좋은 독서라는 점이다. 참고로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계기는 여러 가지이나 최고의 계기는 그의 정치적 팬클럽인 노사모와 더불어 인터넷 매체였다. 그가 2000년 부산 북·강서(을)에서 패배 직후 그의 안타까운 소식과 더불어 인터넷에서 이미 그는 많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정치적인 인맥이 없다. 비주류 속에 비주류였던 그는 처음 자기 당내 대선경선에서 후보로 결정되었는데, 멀쩡한 사무실도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제대로 그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것은 일반 사람들의 관심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그여도 인터넷은 정보로서 가치가 높아도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책이라고 했다. 인터넷이란 공간은 너무 유동적이고 정보가 너무 넘쳐 흘러내리기 때문에 도리어 올바른 정보나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고 와류되는 것이 더 쉽게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으로서 그가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일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바르고 틀리고를 외부의 영향이 아니라 자신의 관찰에서 볼 수 있는 점이다.

 

 

현재의 시점과 과거의 흐름, 앞으로 다가올 문제들은 끊임없이 보고 연구해야할 사항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이 들어간 좋은 책들이다. 노무현의 서재에서는 노무현이 추천하던 책을 위주로 정리한 도서이다. 나는 반드시 노무현이 좋아서든 혹은 싫어서든 이 책을 권하라고 싶지는 않다. 단지 정말 자신이 시민으로서 올바른 지식과 판단력이 있다고 자부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고 판단하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노무현이 아낀 도서에 대한 소개와 노무현의 입장을 대비하는데, 노무현의 입장은 안 보더라도 그 책들에 읽어 보고 판단함은 좋다.

 

 

왜냐하면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과 서적들은 세계적인 석학들이고, 상당히 수준 높은 서적들이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과 같은 세계적 사회학자 및 경제학자를 비롯해 앤서니 기든스와 같은 사람들은 세계 정치흐름과 사회, 경제흐름을 아주 잘 관찰해내고 있으며, 이들의 책에서 오늘 날의 우리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 것인지를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도서가 아니라도 21세기는 환경과 에너지 문제를 토대로 자연환경도시인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매우 놀라운 내용이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환경공학을 전공했기에 환경 관련 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내용은 언제나 접촉하는 내용이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지구 에너지 고갈과 수질오염과 수자원고갈로 인한 사막화 현상과 식수문제, 에너지 극단화로 통한 빈곤의 문제는 계속 우리가 풀어갈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가 대통령재임 시절에 환경문제를 생각하여 하이브리드 자동차 내지 친환경자동차를 추진하려고 한 것을 알았는데, 대기업의 압력에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는 그 반대였지만, 지금은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석유값은 계속 오르고, 석유에너지의 사용은 대기오염을 증감하고 있고, 대기오염으로 인해 비가 내리면 수질오염과 토양오염,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먹는물과 식량이 손실을 준다. 환경이란 것들은 계속 돌고 도는 하나의 생태계시스템이므로 전체적인 안목과 더불어 그 시스템에 대한 상세한 안목이 없다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쿠바의 식량문제와 의약품 문제, 경제문제에 대한 해결을 오로지 자연에 순응하여 얻은 성과품인 것이다.

 

 

오로지 파괴만을 일삼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계속 낭비하는 현대사회의 이기적인 합리주의는 양극화와 더불어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인 문제에 대해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에 대한 하나의 구조나 체계, 그리고 거기에 대한 원인과 문제, 앞으로 대처해야할 과제나 방법에 대해서는 상당히 취약하다. 시민들이 갖추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가이다. 뭐든지 정치인들이 위임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 그런 문제를 공감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야 하며,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경우 서로 그 문제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는지 서로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물론 이런 판단에서 그의 생각을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제는 동조조차 할 수 없는 세계에 가있지만, 그에 대한 반대와 비판에서 그런 반대와 비판 역시 올바른 판단력과 객관적인 논리로서 대하자는 것이다. 때로는 그런 비판 역시 새로운 대안과 길을 창출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 길조차도 역시 올바른 지식과 양심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여 노무현의 서재에 들어있는 책의 양은 새 발의 피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참고하여 정책적 영역에 도움을 준 서적을 읽기 위해서는 그 책을 읽을 능력과 수준까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그 책들을 읽으면 그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한 책들이 또한 제시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1. 정치사회

가.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 울리히 백 지음 / 정일준 옮김 / 새물결

나. 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 조셉  S. 나이 엮음 / 임걸진 외 옮김 / 굿인포메이션

다. 제3의 길 / 엔서니 기든스 지음 / 한상진 외 옮김 / 생각의 나무

라. 노동의 미래 / 엔서니 기든스 지음 / 신광영 옮김

마. 시장인가? 정부인가? / 김승옥 지음 / 부키

바. 유러피언 드림 /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원기 옮김 / 민음사

사. 주식회사 장선군 / 양병무 지음 / 21세기북스

아.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 배기찬 지음 / 워즈담하우스

자. 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 외 지음 / 이종태 엮음 / 부키

차. 국가의 역할 / 장하준 지음 /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타. 대한민국 개조론 / 유시민 지음 / 돌베개

파. 대통령 보고서 / 노무현대통령 비서실 보고서 품질향상 연구팀 엮음 / 워즈덤하우스

하. 이제는 단신 차례요. Mr. 브라운 / 엔서니 기든스 지음 / 김연각 옮김 / 인간사랑

거. 디케의 눈 / 금태섭 지음 / 궁리

너. 유엔미래보고서 / 박영숙 외 지음 / 교보문고

더.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 지음 / 돌베개

 

 

2. 경제, 경영

가. 변화관리 / 존 코티 외 지음 / 현대경제연구원 옮기 / 21세기북스

나. 소유의 종말 /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다. 체인지 몬스터 / 지나 다이엘 덕 지음 / 보스턴컨설팅그룹 옮김 / 더난츨판사

라. 수소 혁명 /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진수 옮김 / 민음사

마.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 / 오영교 지음 / 더난출판사

바. 생태도서 아바나의 탄생 / 요시다 타로 지음 / 안철환 옮김 / 들녘(코기토)  

사. 블루오션 전략 / 김위찬 외 지음 / 강헤구 옮김 / 교보문고

아.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 / 국민 경제자문회의 엮음 / 교보문고

자.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 제임스 맥그리그 빈스 지음 / 조중빈 옮김 / 지식의 날개

차.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 / 댄 코헨 지음 / 존 코터 감수 / 유영만 옮김 / 김영사

타.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엮음 / 한스미디어

파.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 / 존 코터, 댄 코헨 지음 / 김기웅, 김성수 옮김 / 김영사

하. 슈퍼 자본주의 / 로버트 라이시 지음 / 형선호 옮김 / 김영사

거. 사회정책의 제3의 길 / 양세진 외 지음 / 백산서당

 

 

3. 역사, 문화

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이덕일 지음 / 김영사

나.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 송기도 지음 / 개마고원

다. 칼의 노래 / 김훈 지음 / 생각의 나무

라. 거의 모든 것의 역사 / 빌 브라이슨 지음 / 이덕환 옮김 / 까치

마. 일본제국흥망사 / 이창위 지음 / 궁리

 

 

4. 그 외

가. 괭이부리말 아이들 / 김중미 지음 / 송진헌 그림 / 창작과 비평사

나. 까치집 사람들 / 정시아 지음 / 토우

다. 그늘이 더 따뜻하다 / 정시아 지음 / 토우

라. 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 / 조기숙 지음 / 지식공장소

마. 대한민국 교육 40년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엮음 / 한스미디어

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로펜 슬레이터 지음 / 조중영 옮김 / 에코의 서재

사. 생각의 오류 / 토머스 카다 지음 / 박윤정 옮김/ 열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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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김영명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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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정말 무엇을 하자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다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자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요 그런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종교적인 부분에서 어디가 가장 강한 종교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불교라고 대답할 것이다. 불교라는 것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유입되어 지금까지 계속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향유되던 종교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국인과 같이해온 종교로서 분명히 한국사회와 많은 친숙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계속 깊이 들어가면 이해하기란 어렵다. 지금 글을 적는 본인도 사실 가정 내에서 어머니는 절에 다니시고, 이글을 적는 석가탄신일 당일 역시 절에 가셨다. 또한 평소에 좋은 명산에 있는 사찰에 친구 되시는 분들과 같이 다니시니 우리 집안 역시 불교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 게다가 나는 중학교 시절 불교재단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다고 하여 나는 절실한 불교신자도 아니고, 그런다고 다른 종교를 믿는 것도 아니다.

 

 

나에겐 종교라는 것은 신앙심과 이념을 강조하는 부분만 보이는 것만 같아 종교라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다. 그래도 나는 부처님과 예수님은 좋아한다. 단지 부처님과 예수님 옆에 두고 근본이 아닌 교조적인 이념으로 몰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멀리 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인간은 이성을 가지면서 동물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동물은 지금의 현재시점에 본능적으로 살아가므로 죽음이란 단어를 심각히 고민하지 않는다.

 

 

아니 죽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슬픈 이야기나 가시고기 부모들은 알을 놓을 때 어미는 배란 후에 어디 멀리 가서 죽고, 아비는 새끼들이 부화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다가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의 밥이 되어준다고 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무엇일까? 그 죽음이란 것 역시 본능에 의한 하나의 삶의 과정이 아니런가? 그래도 그런 본능을 보자니 인간보다 동물이 더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희생으로 후예를 이끌어가는 그 생존본능에서 말이다.

 

 

그래서 죽음을 알 수 있는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언제나 다른 것이기도 하나같은 것이기도 하다. 철학을 하는 이유에서도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점과 그 죽음이란 무의 경지조차도 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런다고 현실적 존재가 아니기에 무라고 할 수 있는 오묘한 이야기가 들린다. 인간에게 죽음은 정말 두렵고 무섭고도 상상 이상의 억눌림이다. 과거 프랑스혁명에서 루이16세의 목이 단두대 아래 잘려나간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죽게 되었는데, 그녀는 죽기 전날에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 인해 머리색이 하얗게 되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란 그 누구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인과인 것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으로 모셔지는 석가모니와 경우 그런 인간의 고통을 일찍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점과 그런 고통이 생로병사라는 길에서 헤매는 것을 알고선 출가를 했다. 당시 왕의 아들이요, 앞으로 왕이 될 권력자가 그 모든 것을 접고 출가를 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불교설화집에서 많이 나오는 부분이다. 그런다고 하여 우리 일반적인 인간들이 부처님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같이 찾는 것은 어렵다. 그 분은 오랜 수행과 깊은 마음 그리고 넓고 아름다운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지 못할망정 그런 분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좋아한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반드시 생각해 볼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면서도 복잡하고 또한 실행하기가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보자면 그런 일들은 매우 많다. 설령 행동을 하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을 위한 하나의 가치관 정립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을 저술한 김영명 교수는 분명 정치학을 전공한 인물이다. 그는 본래 불교에 깊은 뜻을 두던 사람도 아니고, 우연히 불교강좌를 듣고 나서 불교에 흥미를 가졌다.

 

 

불교에 깊게 관여하지 않은 사람이 불교에 대해 적는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이지 못하면서 어울리지 않을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있기에 볼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불교의 경전을 생각하면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고, 한자어라고 하여도 말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불교라는 것이 부처님이 많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내세우지만 그것이 도로 아미타불이라면 부처님의 말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서 불교에 흥미를 가지고 불교에 조금 다가가려는 사람에게 불교라는 것이 친숙해야할 존재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권위와 낯설음의 존재라면 그것은 종교적인 종교가 아니라 권위로서의 종교로 자리 잡음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 하여 색이 있는 것이 색이 없고, 색이 없는 것이 비어있다는 말처럼 뜻을 생각하기 어렵고 난해하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쉽게 가느냐 말이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쉬운 말일 것이다. 단순히 불교를 종교적 영역이 아닌 철학적 영역으로 본다면 말이다.

 

 

불교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실존주의적인 영역이다. 부처님도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좋으나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자신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스스로를 발견하라는 점이다. 자기의 말이란 그것을 위한 도움이란 점이다. 또한 비어있는 것과 채워진 것에서 불교에서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내세우는 것을 중시한다. 인간에게 언제나 가지지 못하는 것이 마음의 평온이고, 또한 존재적인 현상이다.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진리가 가장 진리적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유동적으로 대처하고,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일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 살아가면서 행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른다고 하여 지나칠 수는 뭔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으나, 시중에 나온 불교도서들이 너무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 역시 문제 중에 하나이다. 따라서 이제 접하는데, 이게 뭔지 몰라서 조금이라도 알고 싶은 사람이 만든 책이니 불교에 이미 오래 머문 분이나 혹은 이제 접근한 분이 이 책을 본다면 조금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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