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김영명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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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정말 무엇을 하자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다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자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요 그런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종교적인 부분에서 어디가 가장 강한 종교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불교라고 대답할 것이다. 불교라는 것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유입되어 지금까지 계속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향유되던 종교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국인과 같이해온 종교로서 분명히 한국사회와 많은 친숙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계속 깊이 들어가면 이해하기란 어렵다. 지금 글을 적는 본인도 사실 가정 내에서 어머니는 절에 다니시고, 이글을 적는 석가탄신일 당일 역시 절에 가셨다. 또한 평소에 좋은 명산에 있는 사찰에 친구 되시는 분들과 같이 다니시니 우리 집안 역시 불교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 게다가 나는 중학교 시절 불교재단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다고 하여 나는 절실한 불교신자도 아니고, 그런다고 다른 종교를 믿는 것도 아니다.

 

 

나에겐 종교라는 것은 신앙심과 이념을 강조하는 부분만 보이는 것만 같아 종교라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다. 그래도 나는 부처님과 예수님은 좋아한다. 단지 부처님과 예수님 옆에 두고 근본이 아닌 교조적인 이념으로 몰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멀리 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인간은 이성을 가지면서 동물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동물은 지금의 현재시점에 본능적으로 살아가므로 죽음이란 단어를 심각히 고민하지 않는다.

 

 

아니 죽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슬픈 이야기나 가시고기 부모들은 알을 놓을 때 어미는 배란 후에 어디 멀리 가서 죽고, 아비는 새끼들이 부화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다가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의 밥이 되어준다고 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무엇일까? 그 죽음이란 것 역시 본능에 의한 하나의 삶의 과정이 아니런가? 그래도 그런 본능을 보자니 인간보다 동물이 더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희생으로 후예를 이끌어가는 그 생존본능에서 말이다.

 

 

그래서 죽음을 알 수 있는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언제나 다른 것이기도 하나같은 것이기도 하다. 철학을 하는 이유에서도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점과 그 죽음이란 무의 경지조차도 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런다고 현실적 존재가 아니기에 무라고 할 수 있는 오묘한 이야기가 들린다. 인간에게 죽음은 정말 두렵고 무섭고도 상상 이상의 억눌림이다. 과거 프랑스혁명에서 루이16세의 목이 단두대 아래 잘려나간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죽게 되었는데, 그녀는 죽기 전날에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 인해 머리색이 하얗게 되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란 그 누구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인과인 것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으로 모셔지는 석가모니와 경우 그런 인간의 고통을 일찍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점과 그런 고통이 생로병사라는 길에서 헤매는 것을 알고선 출가를 했다. 당시 왕의 아들이요, 앞으로 왕이 될 권력자가 그 모든 것을 접고 출가를 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불교설화집에서 많이 나오는 부분이다. 그런다고 하여 우리 일반적인 인간들이 부처님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같이 찾는 것은 어렵다. 그 분은 오랜 수행과 깊은 마음 그리고 넓고 아름다운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지 못할망정 그런 분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좋아한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반드시 생각해 볼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면서도 복잡하고 또한 실행하기가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보자면 그런 일들은 매우 많다. 설령 행동을 하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을 위한 하나의 가치관 정립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을 저술한 김영명 교수는 분명 정치학을 전공한 인물이다. 그는 본래 불교에 깊은 뜻을 두던 사람도 아니고, 우연히 불교강좌를 듣고 나서 불교에 흥미를 가졌다.

 

 

불교에 깊게 관여하지 않은 사람이 불교에 대해 적는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이지 못하면서 어울리지 않을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있기에 볼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불교의 경전을 생각하면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고, 한자어라고 하여도 말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불교라는 것이 부처님이 많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내세우지만 그것이 도로 아미타불이라면 부처님의 말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서 불교에 흥미를 가지고 불교에 조금 다가가려는 사람에게 불교라는 것이 친숙해야할 존재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권위와 낯설음의 존재라면 그것은 종교적인 종교가 아니라 권위로서의 종교로 자리 잡음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 하여 색이 있는 것이 색이 없고, 색이 없는 것이 비어있다는 말처럼 뜻을 생각하기 어렵고 난해하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쉽게 가느냐 말이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쉬운 말일 것이다. 단순히 불교를 종교적 영역이 아닌 철학적 영역으로 본다면 말이다.

 

 

불교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실존주의적인 영역이다. 부처님도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좋으나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자신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스스로를 발견하라는 점이다. 자기의 말이란 그것을 위한 도움이란 점이다. 또한 비어있는 것과 채워진 것에서 불교에서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내세우는 것을 중시한다. 인간에게 언제나 가지지 못하는 것이 마음의 평온이고, 또한 존재적인 현상이다.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진리가 가장 진리적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유동적으로 대처하고,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일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 살아가면서 행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른다고 하여 지나칠 수는 뭔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으나, 시중에 나온 불교도서들이 너무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 역시 문제 중에 하나이다. 따라서 이제 접하는데, 이게 뭔지 몰라서 조금이라도 알고 싶은 사람이 만든 책이니 불교에 이미 오래 머문 분이나 혹은 이제 접근한 분이 이 책을 본다면 조금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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