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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오타쿠, 게임, 라이트노벨
아즈마 히로키 지음, 장이지 옮김, 선정우 감수 / 현실문화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아즈마 히로키의 서적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란 서적을 예전에 읽어보았는데, 그는 분명히 일본의 떠오르는 인문학자인데도 불구하고 오타쿠 문화에 대해 글을 적었다. 차라리 그의 학문적 기조와 가까운 가라타니 고진의 문화비평에 치중했다면 더욱 좋고 유리한 길을 갈 수 있을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보나 나름 나처럼 하위문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서브컬쳐 특히 만화,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밀리터리 등과 같은 문화가 많이 발전하고 많이 보급되어 있다. 물론 발전하고 보급되어도 여전히 차가운 시선과 편견은 계속 따라 붙기 마련이나, 그래도 최소한의 그런 문화적 생산과 소비에 대한 공급과 지출이란 단계가 확실히 잡혀 있는 셈이다. 일본의 코미케 행사를 가면 그 커다란 행사장이 모두 인파로 막힐 정도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게 남들에게 유치해보이거나 저급해보이는 그 하위문화에도 하나의 새로운 바람은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순수문학 내지 일반문학의 영역에서 다른 방향으로 길을 돌리고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소설이나 일화들을 영화와 드라마로 많이 사용되는데, 시나리오 가치로서 그 유명한 소설 역시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로 전환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자면 소설 안의 글자 텍스트보다는 애니메이션 영상 안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움직임에 따른 대사와 연출음은 상당히 리얼리틱하게 보인다.
사실 애니메이션의 미학은 리얼리즘의 해체인데, 그것이 오히려 리얼리즘에 도전하게 한다. 다르게 관점을 두자면,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즉 팩션장르에서 깊은 심해에서의 전투나 높은 공중에서의 대규모 전투, 우주비행에 따른 우주선 이동이나 주변 환경 등을 고려하면 실사영상보단 오히려 애니메이션 영상이 훨씬 높은 전달력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이 모든 미학적, 예술적, 철학적 등의 담론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구시대적인 사고로 볼 수 없다.
구시대적 가치관으로 대할 수 없고, 그런다고 그것들이 구시대적인 요소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 아래에는 항상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가 있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는 정치적인 영역에서 다툼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가령 코페르니쿠스 지구관이라고 하여 당시 교황의 정치권력 아래에 있던 유럽에서 전혀 통하지 않은 주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시절은 불과 500년 전후다. 500년 전후의 그와 우리의 관계는 멀리 있겠으나, 적어도 인간이 과학을 사고하기 시작한 고대그리스 physics에서 보자면 과학의 역사에서 우리와의 시간적 거리가 그렇게까지 멀지 않다.
그런데 만약 지금에 와서 코페르니쿠스가 가진 지구와 코페르니쿠스 사후 100년 후에 나타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이 나와 지금에서 그것이 틀렸다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진보적 인식과 보수적 인식에서 보자면 말이다. 반드시 진보적 인식이나 주장만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인식 아래 우리는 많은 오류와 착각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며, 진보적인 가치 아래 시행착오를 계속 닥치기 된다.
물론 그런 시행착오가 겪고 또 겪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의 노하우를 습득한다. 그것이 언젠가는 보수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을 보는 것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 가치가 과연 얼마나 보편화, 상식화, 객관화란 단어를 남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최근에 다른 서적에서 본 구문 중에 <이성은 감정 중에 하나>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 가진 보편적, 상식적, 객관적인 이성도 역시 감정 중에 하나로 볼 수 있음을 망각해선 안되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읽어본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한국처럼 다양성과 자율성, 게다가 창조성과 개인성을 죽이는 전제주의적인 가치를 지닌 사회에서는 이른바 대중문화는 하나의 권력이고 폭력으로 등장한다. 폭력적인 행위 주체자인 대중들은 대다수의 인원이란 점에서 군중심리의 권력으로 문화의 척도로 본다. 즉 이 책을 보는 입장에 처해진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의 존재여부 자체도 큰 반발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원래부터 이 책의 존재도 알 수 없거니와 알아도 대중문화의 폭력성에 묻어질 수 있으며, 읽어본들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위에서 제기한 인식의 차이도 있겠으나 그 차이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고정관념,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재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라는 것은 본래 상실된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렇게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란 자신이 어떤 것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는 인식론적 오류로서 항상 진실을 새롭고 전혀 다른 사실로 변모시킨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그런 부분을 잘 감지해야 볼 수 있고, 그래야지 비로소 이 책이 읽혀질 것이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이 책에선 기존에 리얼리즘이 없다고 여기는 만화, 애니메이션에 하나의 자연주의적인 리얼리즘을 부여하고 있고, 게임이란 장르 역시 리얼리즘이 완전하지 않으나, 그것 자체로도 반(半)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 리얼리즘이란 전혀 부합하지 않은 반대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속하는 리얼리즘이다. 어떻게 현실부재의 애니메이션 미학이 현실부재만 존재하지 않음일까?
당장 뭐라고 설명하기란 어렵다. 단지 여기서 알아가는 사실은 여전히 인간은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점이고, 인간은 스토리텔링적인 존재라는 것이 내 확신이다. 인간이라 생각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위해 생각을 한다. 즉 오타쿠 세대에서 그들이 가지는 하나의 공감과 사고는 즉각적 스토리텔링으로 통한다. 가령 우리는 실존적인 인간을 같은 시간과 공간 아래서 연속적인 장면인 시퀀스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몽타주처럼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 모우는 것이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은 앞에 실존하지 않은 존재와 실시간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어제 밤에 남긴 메모를 오늘 낮에 답할 수 있다. 단지 특이점은 지구에 사는 모든 존재가 3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에 그 대화의 연속은 시간의 흐름를 가지게 되는 마련이다. 물론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에서 인터넷의 세계에선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단지 시간과 공간의 연속을 가진 것은 인간 그 개인의 영역이다.
인간에겐 제한된 세계이나 인터넷에는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유한하나 인류를 어리석지 않은 이상 영원하다. 그런데 그런 사고적 기능이 게임에 많이 들어가는 것이 특이점이 아닐까 싶다. 현실적 리얼리즘에서 인간의 유한성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현실의 영역을 떠나 하나의 가상과 괴리적인 존재에서는 유한성이란 존재할까? 오히려 존재의 확실성이 없기에 유한성을 탈피하는 것은 아닌가? 이 책에서 그런 부분을 다룬 게임을 소개할 때 솔직히 뭔가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인간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 안의 억압된 욕망과 사고로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다고 그것을 모두 부정할 수만은 없다. 그 부정은 채워야 하는 공간이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란 문학적인 요소로 변모된다. 단지 그 문학적 요소는 이른바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로 새롭게 진행된다. 라이트노벨은 일반적으로 문학소설과 달리 거대서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거대서사에 반대되는 이야기가 주요 흐름이다. 세계 안의 인간이 구조적으로 움직여서 하나의 존재적인 상황보다는 오히려 캐릭터가 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단지 그 외의 세계는 별도의 세계로서 기본적인 문학에 속해있는 현실의 반영과 더불어 그 현실과 다른 가상 내지 환상의 접촉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주인공이란 자들은 대부분 일상의 지루함이나 박탈감 내지 좌절감에서 새롭게 바라볼 환상이 필요한 것이다. 오히려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시작점은 오히려 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나 그런 라이트노벨을 게임으로 이식하거나 그 게임자체가 라이트노벨적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크나큰 전환점이 된다.
기존 우리가 아는 게임을 보자. 철권이나 버츄얼파이터와 같이 실시간으로 캐릭터가 일정한 공간과 시간이란 가상세계에서 대결을 펼친다. 이때의 대결의 주체는 이미지로는 캐릭터이나 그 이면에는 그들을 다루고 있는 플레이어 유저다. 또한 일련의 정해진 틀로 롤플레이를 하는 게임이든지 혹은 일대 다수의 적을 제압하는 슈팅게임이든지 여러 가지 게임들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이 게임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서사에서 큰 틀에 메이게 된 것이지 우리가 서사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냥 일종의 세계에 내던지고 거기서 본능적으로 승부를 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라이트노벨적인 게임 즉 리얼리즘이 온전치 못한 곳에서는 일방적인 영역이 아니라 비일방적인 영역으로 가는 것이다. 특히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라든지 또는 최근에 발매된 쓰르라미 울적에와 같은 게임들은 오히려 게임을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하고 있다 직접 그곳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가상이든 환상이든 그 세계가 허구든 가짜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자신이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돌아보면 좋겠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 평형세계에 대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반복되어가는 일상에서 우리는 안전한 일상이 좋은지? 아니라면 불확실한 미래가 좋은지 말이다. 물론 그런 사유가 배경에 자리 잡게 된 동기는 분명히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란 존재가 그다지 밝고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족의식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임은 분명하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는 오타쿠들의 가지고 있는 속성과 거기에 동화되는 작가와 제작진들의 부합성이 맺혀져 있으나, 기본적으론 우리 인간이 가지지 못한 욕망의 결여는 분명한 듯 하다.
인간이여 욕망하라 타인을 욕망하지 말고 자기를 욕망하라는 말도 있으나, 현실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더욱 사회적인 존재로 해당된다. 스토리텔링의 생산과 소비에서 이 책을 본다면 조금 느끼게 되는 게 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 욕망의 전이과정은 결국 스토리텔링이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소비하고 생산하고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