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보는 눈 -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을 위한 통일론 세상을 읽는 눈
이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읽어보았던 에티엔 발리바르(파리10대학 교수)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책을 보면서 세계 정치흐름을 조금 파악한 적이 있었다. 시장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소비에트연방의 추구한 전시공산주의)의 대결에서 결국 시장자본주의의 승리로 결착이 났다. 그 조짐이 보인 것은 독일 베를린 장벽의 허물어진 것에서 볼 수 있다. 스탈린이 동유럽을 점령하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은 자본주의의 경계선상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물론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이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에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에게 사상이념은 하나의 학문적 영역으로 변모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통일 이후 소비에트연방 해체는 상당한 큰 세계적인 여파로 몰려왔다. 이른바 탈(脫)이데올로기라는 명제가 생겼다는 점이다. 세계 흐름에서 국가 간의 대립구도는 냉전 시대의 좌우 이데올로기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탈(脫)이데올로기가 도리어 더 심각한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다.

 

즉 원시의 신화세계가 계몽이란 억압 속에서 새로운 신화로 태어나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듯이 스펙타클의 전복은 새로운 스펙타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런 스펙타클의 전복에서 등장한 것들은 기존 체계에 대한 정치적 이념을 고수하거나 혹은 변모되어도 인간사회에 펼쳐진 정치적 가치관은 오히려 저조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국제사회로 넘어오면서 정치적 극단적 수단인 전쟁이 예전에는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이제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전략으로 바뀌었다.

 

전쟁이란 한 마디로 과거 유럽에서 신세계를 탐험하듯이 큰 시장과 재원을 확보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무기와 병력은 적을 죽인다는 명제 아래 실재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 세계적인 흐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물어 본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우리는 남에게 침략을 수도 없이 받으면서 침략하러 가는 것은 별로 사례가 없다. 게다가 이제는 제일 가까운 적대국이 예전에는 같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최악의 존재로 변했다.

 

내가 어릴 적 그러니깐 초등학교에 다닐 시절에 이 노래를 정말 많이 부른 기억이 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가사에는 꿈에서도 찾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할 정도니 통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통일은 과연 제대로 될 가능성이나 보이는가? 솔직히 말하여 지금 나는 통일에 대해선 반대의 입장이다. 당장 통일이 되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해 오히려 혼란은 야기할 뿐이다. 그런다고 통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방법론적인 영역이 문제인 것이다. 통일을 보는 눈에서 과거 북한정치에 대한 전략적 외교업무를 담당하던 이종석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이사가 자신이 가진 정보력과 세계 흐름과 앞으로의 문제를 토대로 책을 내었다. 이 책을 보면서 대부분 내가 가진 생각을 이종석 상임이사가 많이 언급했고, 거기에 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영역으로 설명했다. 방금 위에서 세계가 탈(脫)이데올로기가 되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통용되지 않을 나라는 진짜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극소수다. 특히 북한과 같은 경우 전 세계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는 국가도 정해져 있으며, 고립된 공간 속에서 더욱 자신을 고립하는 독재정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독재적인 정치수단은 어느 국가라도 가지고 있으나, 북한의 경우 겉으로는 공산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으나, 일본 대표적 문학평론가 및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서적 <근대문학의 종언>을 참고하면 북한은 오히려 공산화라기보다는 그런 슬로건을 내세운 이씨 조선의 연장이라고 했다. 사실 겉으로 그러하나 주체사상에 따른 3대 부자 세습은 독재정치의 정형적 모습이다. 그런다고 하여 우리가 여기에 그저 넋만 잃고 바라볼 수만은 없다.

 

매년 국방군사 예산이 국가예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이산가족 문제와 북한과의 외교마찰이 국내 정치, 경제, 사회에 큰 여파를 미친다. 과거 김일성의 사망에는 라면과 생수 사재기라는 혼란사태를 빚었다. 결국 그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약 20년 전의 한국사회에서 그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인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김정일의 사망으로 국내 정치사회가 어지러운 것이 아니었나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일은 조용히 잘 넘어갔다. 그런다고 화약고 앞에 라이터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켤 수 있기에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다고 언제까지 이런 긴장사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군대생활을 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북한과의 외교문제가 발발하면 모두 두려움으로 가득해지고,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가족들은 심한 우울증 및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예전에 북한 잠수함이 강원도에 침투할 때 내가 알던 사람이 그 근방 부대에 근무했다고 한다. 이때 장병들은 모두 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봉투에 동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전쟁이란 극단적 행위는 결국 인간의 존엄한 생명과 동시에 재산을 망가뜨리고, 게다가 그 사망자 주변 사람들의 생활까지 파괴해 버린다. 과거 연평해전을 돌아보면 그들의 죽음은 너무 허무하고, 그들의 가족들은 오열에 분노했다. 그들에겐 북한군사정권은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나, 문제는 그런 일들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면 더욱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젊은 생명이 사라질 경우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매우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북한과 조율을 할 것인가? 통일과 한반도 평화란 말은 과거 정부부터 시작된 언어이다. 한반도 안정으로 통해 국민들의 안정된 생활과 외교적으로 안정된 정세로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에 투자할 수 있고, 주식이나 자본의 유통도 원활하게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은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은 매우 심각하고, 기아와 질병 역시 심각하다. 여기서 모순이 북한의 인권이 심각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주민들이 기아로 고통 받는 것도 안다. 그러면 그런 주민의 인권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사회의 시민단체로 할 수 없고, 적십자사 활동에도 제한이 있다. 언제까지나 중국이나 미국의 외교수단에 밀릴 수 없는 노릇이다. 주민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결국은 주민들의 정치적 통치권을 지닌 북한정부와의 소통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 매우 어렵다. 극단적인 양국의 대치와 그 대치로 인해 양국의 국민들마저 서로에 대하여 증오하기 때문이다. 통일을 추구하고 한반도평화를 추구하는데, 그런 슬로건은 대립에 의해서는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을 뿐이다.

 

통일이 제일 불가능한 것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도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문화적 영역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서로 간의 정보와 대화도 없이 그저 대립의 각을 세운다는 것만으로 통일이 오히려 독이 되는 셈이다. 그런다고 전쟁으로 무력통일을 할 경우 국내 영토가 피폐해져 심각한 국가위기를 맞이할 수 있고, 인권문제 역시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 있다. 아니라면 우리는 1등 국민, 너희들은 2등 국민으로 차별대우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무력적인 대치에서 무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제로섬 게임처럼 답은 없어지는 것이다.

 

현재 국제정세에서 미국과 중국이 최고의 강대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최고이고, 중국 역시 많은 인구로 통해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국이 우리와 외교와 무역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북한과의 외교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란 국가가 결국 중간에 북한과 한국을 조율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란 국가는 겉으로 정치체계가 공산당을 유지한 것처럼 보이나, 실리적으로는 시장경제주의를 충실하게 걷고 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동북공정이나 외교문제를 끊임없이 우리 정부와 국민을 도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반드시 전쟁이란 것은 무력수단이라는 극단적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도 충분히 많다는 점이다. 그런다고 하여 여기에 우리가 극단적으로 대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갈 수 있고, 그런다고 하여 못 보는 채 외면할 수 없다. 국내에서 자원이 부족하여 원자재 수입으로 통한 재가공 수출이 주된 국가경제구조로서 세계흐름을 충분히 이해하여 거기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걸림돌이 되면서 가장 전환점이 되는 것은 북한이다. 그런데 우리는 상황이 어떠한가? 단순히 좌우 이데올로기의 프레임에 넘어가서 거기 안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게르마늄의 밤을 우연히 내가 아는 분에게 선물로 받았다. 집안에 초등학교 자녀들이 있어서 혹시나 보면 정신적인 영향이 있을 것 같아 받은 것이다. 책 제목에서 게르마늄이라 하여도 금속성 원자이고, 인간의 몸에는 게르마늄이 좋은 것으로 안다. 건강에 좋으면 멸종위기 동물이라도 잡아먹는 한국사회에 게르마늄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표지를 보니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란 점에서 상당히 문학적으로 높은 작품을 느꼈다.

 

그리고 표지 우측 상단에 붉은 글씨로 18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표지는 엄청난 표정으로 일그러진 인간이 자신의 몸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듯 외치는 표정이었다. 한 마디로 고통과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기에 메인 자였다. 책 제목과 표지도 그렇고 목차에서 마광수 교수와의 대담 역시 잊을 수 없을 것이리라. 마광수 교수하면 한국사회에서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서 외설로 낙인찍힌 자로서 그의 성적 도착적인 유희는 많은 논란을 한국사회에 불러 일으켰다.

 

아직까지 유교적인 문화에 몸이 젖어버린 한국사회에 게다가 서구 기독교문화 유입으로 과다 망상적으로 심각한 결백증들은 이 사회의 병적인 존재로 되었는지 모른다. 전에 어느 책에 이런 문구를 보았다. 성심리학자인 빌헬름 라이히는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많이 친한 학자인데 그가 남긴 말로는 "성의 억압이 파시즘 낳는다."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과 가장 어울리지 않을 단어가 아닌가? 성적욕망을 무리하게 억압하고 부정하고 뭔가 죄를 부여하는 한국사회에서 변태적이고 관음적인 욕망이 꽃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오히려 억압을 하기에 그 억압적 충동이 역으로 변태적인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엔트로피라고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욕구불만이 쌓여만 간다. 문제는 그 불만사항은 아주 작게 조금씩 해소하기 보다는 더욱 더 압박을 가한다. 마치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죄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종교적인 가치관이 중요시 되는 세계에서 그것은 모든 것으로 부정된다. 하나의 성(聖)적인 체계가 잡힌 곳에는 그 모든 것이 부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기야 말로 더욱 더 부정과 부패 악이 처참하고 잔혹하고 때로는 승화되기도 한다. 이 책 게르마늄의 밤에서는 더욱 심각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작가인 하나무라 만게츠는 아주 독특하게도 짧은 학력과 제대로 된 세상살이를 보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왜곡된 세상과 어려운 삶에서 그의 필력은 매우 현실적인 것을 지나 추함과 더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런 부정적인 삶의 관조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을 알게 된다. 인간은 추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추함은 추하다고 인정해서 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한 주제에 추하지 않고 그것을 가면으로 씌운 채 성(聖)스러운 이데올로기에 매여 모든 것을 회피하는 것이 추한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로우는 그런 성(聖)스러운 것을 변태적 성(性)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차라리 거룩하고 아름답다고 외치는 성당 안의 이야기는 한낱 위선과 오만이었다. 이 책의 배경을 보니 일본이 태평양 전쟁 이후라는 점이고, 주인공 로우가 중학교 시절이 미군의 창고에서 나온 식량으로 목숨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1일 1인당 생활금액 120엔, 1945년 지나도 120엔 역시나 작은 돈인가? 미군이 주는 통조림, 전분으로 목숨을 부지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미군이 준 음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어떤 비스켓을 열어보니 구더기가 나왔다고 한다. 유통기간이 지난지 몇 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모든 미군들이 주는 음식은 음식이 아니라 음식폐기물이었다. 폐기물을 먹고 살아가는 로우에게 희망과 꿈은 없다. 현실의 일그러진 모습에 그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학대하고 때로는 그 날카로운 복수의 화신은 남에게 이어진다. 집단이지메, 동성애, 변태적인 성적 유희 등등 말이다.

 

남자가 남자에게 침과 가래를 요구하여 먹이고, 남자가 남자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입으로 애무하여 끈끈한 액체가 나와 변태적인 모습으로 등장할 때 그들은 처음에 거부했으나, 잠시 후에는 그것에 맛을 들어버렸다. 인간의 어두운 감정과 비극성을 기저까지 내려간 것이다. 그런 로우가 사회에 나가 살인을 했다. 하지만 그는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살인 동기가 여자와 남자 중에서 여자가 자신의 성적인 부분을 농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깊은 공간에 자기를 담구지 못한 채 남자의 동성애에 더렵혀져 있었다. 아니 이제는 오히려 거기에 쾌락과 불쾌함의 알 수 없는 모순에 빠졌다.

 

그래서 여자를 죽이고, 그 여자와 관계있던 남자도 죽였다. 그런 후에 다시 성당이 있는 고아원에 온 것이다. 그는 와서 농장 일을 도왔다. 그는 와서도 어두운 과거에 붙잡혔다. 원장 신부에게 변태적 성적 유희를 도와야 했고, 그 덕분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지만 여자에 대해 몰랐다. 어느날 아스피란트 1호(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여자)가 우연히 로우와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를 둘러도 유방의 관능적인 매력을 숨기지 못했고, 타이트 스커트와 잘룩한 허리는 매우 요염했다.

 

어느 부잣집의 딸로 수녀가 되기 위해 온 그녀는 마치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듯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매우 성적으로 도착적이고 강렬하고 격렬했다. 로우는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듣다가 그녀를 안았으나, 사실 그녀는 안아주기를 바란 것이다. 로우는 일반적 나체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몸매가 부각해주는 의상을 거친 여성에게 성적인 자위행위로 만족했다. 그것은 나체의 여성보다는 뭔가 페티시한 요소에 끌리는 남성의 성적 도착에 가깝다.

 

두 사람의 성교에서 그는 여자와 동정임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여성의 성적 쾌락에 따라 갔다. 입과 입에 서로 맞추고 혀를 주고받으며, 한손은 가슴에 한손은 은밀한 샘에 가져가고 있었고, 아스피란트 1호의 팬티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온갖 기교와 성적 도발로 로우를 본능적 인간으로 만든다. 그녀는 정녕 사랑을 원할까 아니면 여자이기를 바랄까? 책을 읽으면 그녀는 본래 수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원래 사랑하던 남자와 눈이 맞다가 임신했지만, 부모의 강압 아래 아사피란트 1호는 소파수술을 했다.

 

즉 자신의 자궁 내막들을 기구로 긁어내어 강제로 낙태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궁에 상처를 입었다. 결국 그녀는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여자로서 결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녀는 인생의 좌절과 더 이상 자신이 여성으로 살 수 없으며, 죄를 지었다는 원죄적 의식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싶었다. 죄를 지어보고 싶은 것은 결국 자기가 살아있음을 알고 싶은 것이다. 로우와 성교에서 과연 그녀는 음탕한가 아니면 불결한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냐는 말에 대답은 아니라는 점이다.

 

상황에 닿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나,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성을 확인하기 위해 변태적 섹스를 원했다. 로우는 그녀의 마수에 빠진 것인가? 아니면 풀린 것인가? 로우는 동성애적인 경험을 했고, 끝에는 프랑스계 미국인과 일본인 혼혈아 잔에게 성적인 변태적 행위를 부탁받는다. 잔은 남자이고, 그는 마음이 어리나 로우의 충동적이고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모습에 동경한다. 남자이면서 잔은 로우의 성기를 애무하고 로우는 부끄러워한다.

 

중학교시절 로우는 미우라라고 하는 상급생에게 강제로 동성애를 눈뜨게 되었다. 그때 강요받은 로우가 처음에 거부하다 끝내는 미우라에게 더 변태적인 요구를 했고, 그 제안의 좌절은 미우라의 음낭이 터지는 사건까지 연결된다. 그의 변태적인 성적행위는 아스피란트 1호에 의해 풀린 것일까? 아니면 다른 길로 들어간 것일까? 마지막 모습에서 더욱 더 심각한 변태로 되는 것일까? 하지만 끝을 보면 로우는 자신의 어둠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인다.

 

그것이 마치 일상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인간의 어둡고 부정한 모습을 인간들은 거부한다. 오히려 자기들이 그러면서 남에게 하나의 올가미를 덮어씌우고 한다. 로우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있는 그대로 분출했다. 로우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하던 모스카 신부가 죽기 전에 로우는 모스카 신부의 휠체어를 이끌고 고해성사를 한다. 그가 고백하는 것들은 모두 부정하고 더럽고 추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추하고 더럽고 동물보다 더 전투적인 존재임을 고백한다. 모스카 신부는 그를 오히려 더 세속적 인간보다 위에라고 한다. 게다가 그런 말을 다른 수도사로부터 나온 말이다. 더럽고 추하고 난폭하고 성적인 본능으로 뭉친 로우가 왜 고귀할까? 인간의 더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숨기기보단 오히려 돌발적으로 행동하는 그가 인정하고 그 사실조차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생각해보면 극단적이기는 하다.

 

아스피란트 1호와 성교 이후 테레시아 수녀가 그 일을 물어보자, 그는 대답으로서 테레시아 수녀에게 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바지 안의 강력한 욕망을 내보였다. 30대 수녀의 옷을 양파처럼 벗기고, 수녀 역시 벗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물처럼 숨을 나누며, 로우의 본능의 상징물에 붉은 피와 임파액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몇 일 전에 모스카 신부에게 테레시아 수녀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할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아스피란트 1호, 생명을 낳을 수 있는데도 낳을 수 없는 테레시아 수녀, 여기서 많은 모순이 오고간다. 그런데도 로우는 죽음과 불능, 그리고 부패하여 죽어버린 것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이레지, 소가 겨울철 여물과 같이 먹는 영양제를 만들면서 그것이 부패하고 발효되나 그것을 먹은 소는 큰다고 했다. 음식물폐기물이 있는 곳에 썩어가는 음식을 넣으며, 그것으로 농작물을 키우고, 돼지도 키운다고 했다. 그리고 쓰레기로 가득한 것으로 키운 것을 우리가 먹는다고 했다. 우리는 결국 쓰레기를 만들고 먹지 않는가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추한 것은 무엇인가? 성적인 변태적 욕망과 행위 그리고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행위, 그런데도 그것보다 더 추하고 더럽고 끔찍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종교를 비하할 생각은 없으나(물론 일본과 한국의 종교나 사회적 관념은 다르나),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고 그것을 성스러운 존재로서 마치 없는 것처럼 속이는 위선이 아닐까 싶다. 행동적 죄는 가벼울지라도 그 죄에 대한 외면과 회피에서 인간은 더 큰 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로우가 존경하고 사랑한 모스카 신부는 마르고 늙은 노인이다. 그는 다리를 사용하지 못한다. 2차 대전에 스파이에게 고행성사를 받고 난 뒤에 일본군에게 잡혀 고문 받다가 그래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고해성사를 알리지 않은 채 그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

 

로우의 눈에는 모든 것이 얼간이고, 병신이고, 변태고, 욕망덩어리고, 어리석은 존재로 여겼으나 오로지 모스카 신부만이 사랑스럽고, 모스카 신부의 죽음에서 난폭한 로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내린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과 진정한 성스러움은 타인의 악적인 부분까지 다 안고 갈 수 있는가이다. 차라리 안고 가지 않으면 자신이 표출할 수밖에 없다. 로우의 난폭한 폭력과 변태적 성적도착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개츠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송무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위대한 개츠비, 어디선가 많이들 들어본 소설 이름일 것이다. 그 말로만 들어본 위대한 개츠비를 나를 비로소 접해 보았다. 물론 이 책이 아닌 많고 많은 좋은 소설이 있겠으나, 이 책을 읽은 후에 나하고 친분이 있는 분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미국의 1920년을 알려면 위대한 개츠비를 보는 것이어야 하고, 미국의 1930년을 알려면 앵무새 죽이기를 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앵무새 죽이기를 물론 나는 읽어볼 예정이다. 그러나 적어도 1920년 미국시대를 보면서 개츠비란 인물을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말까는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닉이란 인물은 미국 동부에 위치한 명문대학 예일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게다가 경영학까지 전공하여 증권에 대해 잘 아는 엘리트적인 도시남이다. 그런 그가 개츠비를 통해 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닉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점이고, 그 곳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전사란 점이다. 그리고 닉에게 자신의 집에 초대한 개츠비는 1차 세계대전에 같은 사단에 있었던 장교였다. 닉은 개츠비에 대해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으나, 왠지 이상하게도 닉 주변에 있던 닉의 사촌인 데이지, 데이지 주변 인물 베이커, 데이지 남편인 톰 등은 끊임없이 개츠비에 대해 경계, 흥미, 애정, 분노 등의 감정을 두르고 있었다.

 

개츠비란 인물은 매일 밤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와서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도록 파티를 주선한다. 그는 엄청난 재산과 부드러운 매너, 그리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 그의 주변에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니 수많은 루머와 그를 다룬 신문기사까지 나오니 개츠비란 정말 유명인사라는 점을 여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개츠비가 아무리 예일대학 출신인 닉이라도 그토록 그에게 정중하고 특별하게 대우해주는 이유는 있었다. 닉은 난폭한 부자인 톰의 아내인 데이지와 친척 관계였다. 초반에 그가 찾아간 곳은 톰과 데이지가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 데이지도 만나고 톰도 만나고, 덤으로 베이커를 만났다. 이들에게서는 미묘한 냄새가 났다.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였고, 한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었으며, 게다가 금주령이 내리진 시기였다.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변화가 있었고, 여러 가지로 세계적으로 정신이 사나운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인 느낌이 이래저래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기회의 제국인 미국에 대해서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 개츠비란 인물은 자기 자신에게 매우 철저하게 관리하였고, 수 많은 노력과 인내를 감수했다. 그는 처음에 가난한 청년이었다. 그가 장교로 있을 때 데이지를 만났으나, 데이지는 미국 중상류계층의 아가씨로 사교무대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그런 데이지를 좋아하던 개츠비는 군인이었으나 가난하여 그녀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개츠비가 놓치게 되자 데이지는 톰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며, 하녀를 고용하여 딸의 보모로 사용할 정도이니 그녀의 남편인 톰은 정말 부자였다. 하지만 그는 난폭하고 거만하고 한편으로 이기적이었다. 개츠비가 예전에 자신의 아내가 좋아한 사람이라 알자 그의 과거를 알아보고 폭로하고, 아내 몰래 정비소의 부인을 정부로 만들었으니 이중적인 인간성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그런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과연 그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뛰어다니고 살아왔냐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의 인생은 불행이다. 그는 가난으로 사랑하는 데이지와 멀어지고, 게다가 전쟁터에 가서 소령까지 달고 제대했으나, 너무 가난하여 군복에 훈장을 단 채로 다녔다. 전쟁은 끝나고 모두 전쟁이란 위험은 생각에서 사라지고, 유흥과 사교에 빠진 미국이었다. 브로드웨이의 거리에서 재즈와 뮤지컬 공연은 흥청망청한 사회상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발버둥 치려는 데이지, 그 속에서 유명세를 누리려고 부정한 경기와 온갖 이기심으로 뭉친 미녀 베이커양, 그런 여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제왕적 권위를 내세우는 톰에서 미국의 1920년은 그야말로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물론 90년 전후의 이야기를 도출한 것이라고 하나,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그다지 차이 없어 보인다.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꿈을 접는 청년 개츠비, 그런 꿈을 찾기 위해 금주령 시기에 술을 팔아 거부가 되었으나, 그에게 과거의 절망은 이별을 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뒤에 비극적인 톰의 정부의 죽음, 그 죽음에 대한 복수로 개츠비는 아무런 꿈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간다.

 

닉은 개츠비를 처음 만나 그가 죽고, 죽고 난 뒤의 일들을 정리해간다. 개츠비의 아버지가 닉에게 찾아오자, 개츠비의 아버지는 가난한 아들이었으나, 자신의 매사에 열심이었고, 그런 개츠비가 아버지의 잘못된 습관을 말하자 폭력을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는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고 개츠비가 얼마나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아꼈는지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몇 년 전에는 가난한 자신에게 집을 사주었다고 한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집을 나간 아들이 말이다. 개츠비란 인물이 금주령 시대에 밀주를 하여 부를 불린 것은 결코 용서받을 일이 아니나, 개츠비란 인물 자체를 보자면 그는 인간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부를 찾아 헤매어도 결국 데이지를 찾을 수 없었고, 이 세상에서 뼈만 남기가 사라졌다. 성공의 미국이란 1920년이란 사회상이었으나 막상 그 사회란 차갑고 냉정하고 겉과 속이 다른 사회였다.

 

허무와 위선은 과대하게 포장했으나, 원조 상류인 톰은 개츠비를 인정치 않았으며, 여자 역시 상류층만 보고 따라갔다. 그래도 개츠비는 몸부림을 치었지만, 닉이 보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들은 그저 멍하니 떠나가고 있었다. 이 책에서 조금 재미있는 부분은 왜 미국의 기회의 땅이라고 해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을 보면 가정부로 필란드 사람인 점이었고, 그녀가 평소에는 일은 열심히 하고 있으나 미국이란 사회문화에 그다지 적응하지 못한 점과 즐겁지 않음을 나타난다.

 

미국이란 기회의 나라라고 했으나, 당시 사회상은 이미 그렇지 못했다. 개츠비와 예전에 같이 밀주를 했던 사람을 찾아갈 때 어느 고급승용차에 흑인 3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닉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일상적인 시선으로 보기보단 왠지 경계하고 못마땅하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초반에 원조흰둥이가 아니면 안된다는 편견을 가진 인종주의 발언을 톰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겉으로 사교사회의 화려함을 쫓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많은 상실된 꿈과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개츠비가 위대한 것은 그런 사회에서 낙오된 채로 살아야 할 그가 그것을 뛰어넘으려 안간힘을 펼친 것이다. 물론 사다리에 오르려다 결국 떨어지었으나, 그가 떨어졌다고 해도 우리라고 그 길을 올라가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그 길은 닉이 보는 사회와 일상처럼 모순으로 얽혀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학생이다 - 중국의 大문호 왕멍, 이 시대 젊은이들과 인생을 말한다
왕멍 지음, 임국웅 옮김 / 들녘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학생이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학생(學生)이란 누군가에게 배우는 입장을 학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학생의 대부분은 어린 아동이나 청소년, 그리고 대학생들 같이 이제 막 어른의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학생이란 신분에 맞추어 있다. 그래서 나는 학생이다라는 이 책에서 저자는 학생이 아닌데도 학생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일단 학생은 배우고 연마하고 단련하는 사람이다. 즉 자기가 언제나 부족한 입장이고 계속 뭔가를 습득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작가인 왕멍은 중국 내에서 상당한 입지를 가진 대문호이다. 그런 대문호가 학생이라고 하는 것은 배움이란 평생의 업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그 배움은 단순히 고통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즐거움까지 안겨주는 하나의 삶이란 점이다.

 

그리고 배운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의 습득 내지 기술의 사용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인격이나 성품, 나아가 자신의 인생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그런 만큼 나는 학생이란 말은 우리 인간이 언제나 마음과 사고가 열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큰 사회적 틀 안에서 각자 어울릴 수 있는 하나의 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배움의 기회로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세계 제2차 대전 이래 왕멍이 살던 중국은 청나라가 붕괴되었고, 그 후에 일본에 의해 세우진 괴뢰정부 만주국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 만주국의 설립은 결국 일본제국주의가 한참 발을 뻗었고, 그 시기에 맞추어 장제스의 국민당의 부패, 새롭게 일어난 모택동의 혁명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볼 때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라고 해도 그가 이룬 중공은 마르크스주의와 관계가 멀어진 국가로 변모한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루는 왕멍의 이야기가 한편으로 신뢰보다는 다소 실망감으로 떨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어째든 모택동이 혁명을 주도하여 2차 대전의 폐해인 일제와 더불어 부패한 국민당을 몰아내었다. 그런 시기에 왕멍은 이제 11세에 혁명에 뛰어들어 1949년 10년 1월에 모택동이 중공의 주석이 된다.

 

이때 그가 중국 공산당에 활동하면서 많은 활약했으나, 1958년 우파로 낙인찍혀 위구르족이 사는 영토에 유배되었고, 거기서 노동이란 활동으로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배웠다고 한다. 외국어를 배우고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영감을 나눈다는 점이다. 그 후에 유배가 풀린 후에 영어를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사고는 확실히 열린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서전을 볼 것 같으면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과 좌절>이 훨씬 나은 것 같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는 미셀 푸코나 루이 알튀세르와 같은 사회학자나 철학자가 좋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 왕멍이 지은 도서는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좋은 책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갖춘 비판은 너무 자기현실을 낙관적으로 보기에 그렇다.

 

인간이 스스로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좋은 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싶다. 인간이란 스스로 낙관론적인 삶에 빠질 때 철학적인 영역이 단지 자기만족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왕멍이 적은 글에는 중국의 대혁명과 더불어 자기가 살아온 흔적이 녹아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없다. 중국인으로서 왕멍 개인은 비판해도 왕멍이 살아가는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 비판의 강도가 너무 무딘 것이다.

 

살아온 인생이 매우 거칠고 어려운 과정이기에 아름다운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나, 그가 살아온 중국에서 어느 모순이 발견될까? 위구르족과 더불어 살아간 그 농사꾼의 인생은 분명히 아름다울 수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중국에서 자행해온 이민족 차별과 학대, 게다가 티베트족들의 학살과 라마교 승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볼까? 유물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계속 유지했다는 전제 아래 라마교가 영적인 부분을 숭배해서 배제함이라고 하면 이해하나, 그는 중국의 전통적 문화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 책을 보는 내내 초반에는 그의 긍정성과 발전성 그리고 삶의 지혜가 좋은 것처럼 다가왔으나 뒤로 갈수록 그의 진정성에서 의심이 간다. 좋은 이야기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나, 인간이 추구해서 안되는 이야기에서 그의 비판은 4년이란 그 기간 속에 과연 자신이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에서 나로 하여금 의심을 갖게금 했다. 어느 책에서 이런 말이 생각났다. 헤겔의 사고는 독일의 사고고, 다시 그 사고는 세계의 사고다. 단어의 적정함에서 제대로 찾았는지 몰라도, 그의 철학은 마치 중국의 전반적인 가치인양 외친다.

 

중국이 행해온 공업화에서 심한 환경오염과 물가상승은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 분명 북경올림픽으로 해결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나, 그 원인에 대한 비판이 없다. 결국 자기 자신은 깨끗하나 중국은 깨끗하다는 의미일까? 아니라면 그런 부분을 외면하려 한 것일까? 스탈린의 경우도 그렇다. 스탈린의 경제성장계획에서 그는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스탈린의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여긴다.

 

그가 자행해온 살인, 감금, 추방, 강제노동은 혁명이란 단어조차 무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가 행한 굴라크(러시아의 부농)에 대한 살해와 재산몰수, 일국사회주의 이념 아래 권력을 다지기 위해 파시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모시켰다. 당시 독일의 히틀러가 있어서 히틀러가 나치즘이란 과격한 파시스트로 활동하여 반파시스트라는 전제 아래 스탈린의 파시즘은 합리화하려고 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 아래 이 책의 초반과 후반을 비교하면 실망하기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왕멍 그 자체는 좋은 사람이나, 그는 좋은 사람일 뿐이었지, 정말 지식인으로서 말하기가 거북스러웠다. 단지 내가 볼 때는 중국이란 자기국가와 민족 안에서 대문호일 뿐이지 그 문밖에 나오면 자기만족에 빠진 문장가에 불과하다. 그것이 나쁘다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한계점이란 사실이다.

 

“나는 학생이다” 이란 제목에서 나는 많은 공감을 받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이미 정규교육과정을 마친 지가 예전이고, 대학교 졸업도 제법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이라고 생각한다. 배울 것은 여전히 많고 생각할 것도 많다. 그러나 배움과 삶은 항상 변화하게 되는 마련이다. 왕멍은 변화에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그 변화에서 모순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의 모순은 현실이란 자기 안에서 자기 영역에서 아니라 타인의 영역도 관찰을 제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
노대환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세상에는 아웃사이더란 존재하는 법이다. 아웃사이더가 있기에 우리는 정녕 새롭고 다른 영역에 손을 넓히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아웃사이더란 존재가 그토록 아름답지 못하고 오히려 천대받아야 하는 것일까? 아웃사이더는 현실세계에 발을 맞추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혹은 더 앞으로 가는 셈이다.

 

가령 유럽사회에서 전위예술이란 아방가르드처럼 전위적으로 앞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렇지 못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아방가르드는 전위적이고 진취적이기도 하나 진보의 극치와 극좌적인 요소를 보인다. 가령 우리가 아는 예술가 중에서 파블로 피카소란 인물을 보자. 그는 매우 예술적인 인물이다. 너무 예술적이라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존재다.

 

그는 예술이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존재고, 그 광학은 너무나도 굴절이 심하여 우리가 볼 수 없는 초현실적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초현실적인 영역을 추구했기에 그의 예술은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다. 가령 게로니카라는 전쟁의 비극성을 다룬 작품이나 우는 여자를 보자. 그것이 현실을 그대로 있는 모습만 담기보다는 그 이상적으로 담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니 오히려 인간에게 사유를 전달하는 셈이다. 예술이란 그런 사유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피카소가 20세기 거장미술가라고 해도 일단 그도 아웃사이더였다. 그도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스페인 내전의 아픔도 보고, 내가 살아가는 한국전의 비극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원한 것은 인간의 해방이요 인간의 자유다.

 

감옥에서 갇혀 있을 때 간수와 대화를 나눌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그냥 감옥에 갇혀 있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역시 아웃사이더였다. 단지 아웃사이더가 어느덧 아웃사이더가 아닌 것처럼 당시 사회에서 매우 소외당한 자들이 혹은 멸시되거나 또는 화근의 대상이 되던 이들이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인상을 건네준다.

 

그들이 하고자한 행동과 그들이 주창한 말들이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상식을 뛰어넘은 하나의 신념을 보이기 때문이다. 신념이란 아름답다고 생각하나, 그 신념을 지키는 것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책 제목처럼 조선의 아웃사이더인 만큼 당시 조선시대라는 특성에서 아웃사이더는 매우 위험하다. 대부분 인물을 보자면 조선시대에 글을 기본적으로 보고 적을 수 있는 양반신분들이다. 혹은 서자 정도로 나온다.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왜 그리도 비참한가?

 

오늘날 한국에서 본다면 매우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보수는 정치적 영역의 보수가 아니라 전통적인 문화의 보수이다. 착각을 배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가부장제를 중시하는 그런 조선시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보수로 본다면 지금의 보수적인 정치영역과는 무관한 영역이다. 차라리 전통주의적인 인물이라면 납득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의 시대상을 보자.

 

봉건적 군주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조선은 사농공상이다. 선비, 농민, 장인, 장사꾼들이 4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다. 조선의 사대부 즉 선비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그들은 유학 그중에 주자학이란 성리학으로 통해 너무 형이상학적인 영역에서 정치를 실현했다. 가령 여기 주인공 중에서 윤휴라는 인물을 보자. 개인적으로 조선왕조 내에서 탁월한 임금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광해군과 정조로 뽑겠다.

 

태종과 세종에서 태종의 피바람으로 세종을 변하게 왕권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란 달랐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조선영토가 전쟁터로 변한 것을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복구시켰고, 게다가 명이 지고 청이 떠오르고 있음을 파악하여 중립적인 실리외교로 통해 전쟁을 피하려고 했다. 전쟁이 닥치면 제일 먼저 피해가는 자들은 당연히 백성이다. 그 백성의 고통을 짊어지게 하는 것은 군자로서 도리가 아니며, 공자의 정치철학에서 가장 피해야 할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당시 양반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해 집착하는 바람에 광해군을 억지로 폐위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청과의 전쟁으로 임금이 외국장수에게 수치를 받도록 했다. 그 후에 그렇게 만들었던 강경론자들이 결국 청에 머리 숙여 조선이 망하는 그 순간까지 감투에 의지했다. 정치란 권력에 향한 의지인가? 조선이란 국가는 그렇다. 힘도 없으면서 명분과 체면만 살리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도 나 몰라라 한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히면 그야말로 출세와 생명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웃사이더들은 그런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만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었다. 때로는 변화하는 세상에 유동하여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변화해야 했는데, 변화하지 않아 도태했고, 때로는 최전방 저격수로 천주학을 비판했던 김치진이란 인물이 도리어 역적 같은 존재로 변모되었다. 그들은 그 당시 묻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한 권에서는 매우 매력 있는 인물로 변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여성들은 없고 오로지 남성만 있다. 조선시대가 사대부사회도 있지만, 남성우월주의가 뿌리 깊은 세상이기에 매우 보수적인 것이다. 그래도 남자들은 바보 같은 남자들을 좋아한다. 바보들은 이기심이 없고, 배신을 하지 않는 점이다.

 

그러나 늘 그들의 마지막은 비참하다. 바보 같이 사는 것은 곧 자신의 앞날을 한치 앞을 볼 수 없음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보가 낭만적이고 끌리는 이유는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없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별 것 없는 존재일 수 있으나 평생 찾을 수 없는 그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기만의 신념이요 철학이다. 단지 남의 눈치나 보고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보는 위대하고도 어리석은 도전자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