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생이다 - 중국의 大문호 왕멍, 이 시대 젊은이들과 인생을 말한다
왕멍 지음, 임국웅 옮김 / 들녘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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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생이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학생(學生)이란 누군가에게 배우는 입장을 학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학생의 대부분은 어린 아동이나 청소년, 그리고 대학생들 같이 이제 막 어른의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학생이란 신분에 맞추어 있다. 그래서 나는 학생이다라는 이 책에서 저자는 학생이 아닌데도 학생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일단 학생은 배우고 연마하고 단련하는 사람이다. 즉 자기가 언제나 부족한 입장이고 계속 뭔가를 습득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작가인 왕멍은 중국 내에서 상당한 입지를 가진 대문호이다. 그런 대문호가 학생이라고 하는 것은 배움이란 평생의 업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그 배움은 단순히 고통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즐거움까지 안겨주는 하나의 삶이란 점이다.

 

그리고 배운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의 습득 내지 기술의 사용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인격이나 성품, 나아가 자신의 인생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그런 만큼 나는 학생이란 말은 우리 인간이 언제나 마음과 사고가 열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큰 사회적 틀 안에서 각자 어울릴 수 있는 하나의 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배움의 기회로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세계 제2차 대전 이래 왕멍이 살던 중국은 청나라가 붕괴되었고, 그 후에 일본에 의해 세우진 괴뢰정부 만주국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 만주국의 설립은 결국 일본제국주의가 한참 발을 뻗었고, 그 시기에 맞추어 장제스의 국민당의 부패, 새롭게 일어난 모택동의 혁명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볼 때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라고 해도 그가 이룬 중공은 마르크스주의와 관계가 멀어진 국가로 변모한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루는 왕멍의 이야기가 한편으로 신뢰보다는 다소 실망감으로 떨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어째든 모택동이 혁명을 주도하여 2차 대전의 폐해인 일제와 더불어 부패한 국민당을 몰아내었다. 그런 시기에 왕멍은 이제 11세에 혁명에 뛰어들어 1949년 10년 1월에 모택동이 중공의 주석이 된다.

 

이때 그가 중국 공산당에 활동하면서 많은 활약했으나, 1958년 우파로 낙인찍혀 위구르족이 사는 영토에 유배되었고, 거기서 노동이란 활동으로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배웠다고 한다. 외국어를 배우고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영감을 나눈다는 점이다. 그 후에 유배가 풀린 후에 영어를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사고는 확실히 열린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서전을 볼 것 같으면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과 좌절>이 훨씬 나은 것 같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는 미셀 푸코나 루이 알튀세르와 같은 사회학자나 철학자가 좋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 왕멍이 지은 도서는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좋은 책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갖춘 비판은 너무 자기현실을 낙관적으로 보기에 그렇다.

 

인간이 스스로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좋은 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싶다. 인간이란 스스로 낙관론적인 삶에 빠질 때 철학적인 영역이 단지 자기만족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왕멍이 적은 글에는 중국의 대혁명과 더불어 자기가 살아온 흔적이 녹아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없다. 중국인으로서 왕멍 개인은 비판해도 왕멍이 살아가는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 비판의 강도가 너무 무딘 것이다.

 

살아온 인생이 매우 거칠고 어려운 과정이기에 아름다운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나, 그가 살아온 중국에서 어느 모순이 발견될까? 위구르족과 더불어 살아간 그 농사꾼의 인생은 분명히 아름다울 수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중국에서 자행해온 이민족 차별과 학대, 게다가 티베트족들의 학살과 라마교 승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볼까? 유물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계속 유지했다는 전제 아래 라마교가 영적인 부분을 숭배해서 배제함이라고 하면 이해하나, 그는 중국의 전통적 문화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 책을 보는 내내 초반에는 그의 긍정성과 발전성 그리고 삶의 지혜가 좋은 것처럼 다가왔으나 뒤로 갈수록 그의 진정성에서 의심이 간다. 좋은 이야기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나, 인간이 추구해서 안되는 이야기에서 그의 비판은 4년이란 그 기간 속에 과연 자신이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에서 나로 하여금 의심을 갖게금 했다. 어느 책에서 이런 말이 생각났다. 헤겔의 사고는 독일의 사고고, 다시 그 사고는 세계의 사고다. 단어의 적정함에서 제대로 찾았는지 몰라도, 그의 철학은 마치 중국의 전반적인 가치인양 외친다.

 

중국이 행해온 공업화에서 심한 환경오염과 물가상승은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 분명 북경올림픽으로 해결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나, 그 원인에 대한 비판이 없다. 결국 자기 자신은 깨끗하나 중국은 깨끗하다는 의미일까? 아니라면 그런 부분을 외면하려 한 것일까? 스탈린의 경우도 그렇다. 스탈린의 경제성장계획에서 그는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스탈린의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여긴다.

 

그가 자행해온 살인, 감금, 추방, 강제노동은 혁명이란 단어조차 무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가 행한 굴라크(러시아의 부농)에 대한 살해와 재산몰수, 일국사회주의 이념 아래 권력을 다지기 위해 파시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모시켰다. 당시 독일의 히틀러가 있어서 히틀러가 나치즘이란 과격한 파시스트로 활동하여 반파시스트라는 전제 아래 스탈린의 파시즘은 합리화하려고 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 아래 이 책의 초반과 후반을 비교하면 실망하기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왕멍 그 자체는 좋은 사람이나, 그는 좋은 사람일 뿐이었지, 정말 지식인으로서 말하기가 거북스러웠다. 단지 내가 볼 때는 중국이란 자기국가와 민족 안에서 대문호일 뿐이지 그 문밖에 나오면 자기만족에 빠진 문장가에 불과하다. 그것이 나쁘다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한계점이란 사실이다.

 

“나는 학생이다” 이란 제목에서 나는 많은 공감을 받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이미 정규교육과정을 마친 지가 예전이고, 대학교 졸업도 제법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이라고 생각한다. 배울 것은 여전히 많고 생각할 것도 많다. 그러나 배움과 삶은 항상 변화하게 되는 마련이다. 왕멍은 변화에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그 변화에서 모순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의 모순은 현실이란 자기 안에서 자기 영역에서 아니라 타인의 영역도 관찰을 제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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