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사회비판총서 1
연구모임 사회 비판과 대안 엮음 / 사월의책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철학과 사상에 대해 조금씩 배우려고 했던 시기이다. 철학과 사상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담론과 흐름 그리고 비판과 고찰이란 시점을 내놓은 것으로 필두로 거기에 대해 어떤 학파가 있는지 그리고 어느 학자들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초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기존 관료화, 제도화, 규격화, 획일화이라는 모더니즘에 거부하는 사상적 풍조로서 베트남전쟁 이후 막 태동하던 사상운동이었다.

 

그 근원에서 학문적인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담론과 사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대하여 담론을 만들고, 대중을 넘어 시민사회를 이끌어갈 지식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만든 사상과 철학이 (후기)구조주의였다. 주로 프랑스 파리를 기반으로 하여 현대철학과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응되던 부류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였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사회문화연구소의 개설과 더불어 당시 1930년 전후로 독일에서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시에는 미국이나 국외로 옮겨, 다시 전쟁이 끝나자 독일로 돌아와 세계지성의 큰 중추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글을 적는 스타일과 문화 내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문과 많은 연관성을 가졌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성의 대한 비판과 억압에 대한 해방, 인간의 인권으로 당시 나치와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류의 큰 위기 속에서 그것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시행한 것이다. 그런 점을 미루어볼 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라는 서적은 당시 독일 지식인들이 바라보는 국제사회와 그리고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변하고 또한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지 고찰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서 느꼈으나, 대부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식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영향을 주던 사상가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헤겔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적인 역사적인 논리로 통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란 말처럼 당시 사회는 이상적이지 못했다. 이성적이란 것은 무엇일까? 차라리 이성이라고 말하나, 실제로는 비이성이 하나의 교조주의로 변하여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결국 인간을 하나의 수동적인 존재로 낙하시켰다. 그러한 것이 당시 독일의 나치가 공산당과 사회당 대립이었고, 또한 소비에트와 나치의 대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학문바탕이 되던 마르크스는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좀 더 현실적인 인식아래 지켜봐서 유물론적인 변증법을 전파했다. 당시 계몽이란 명제가 진실로 계몽이었는지 보다는 계몽으로 위장한 하나의 억압이요 신화였다. 이런 전반적인 역사적 근거로 하여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식인들은 2차 대전부터 시작하여 베트남전, 심지어는 악셀 호네트 프랑크푸트르대학 3대 소장까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을 살펴본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독일만 아니라 유럽 및 전 세계는 광기로 미쳐있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고, 그 전쟁의 산물은 폭력을 해결하는 폭력이라고 했으나, 오히려 그 폭력들을 합리화시킨 도구로 되었다. 그 와중에 인종차별, 남녀차별, 노동자 및 소수약자 인권 침해는 여전히 등한시 되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으로 우리나라 역시 그런 문제를 지적했다. 산업화라는 모더니즘 경제사회로 돌입하면서 공사장과 공장의 근로자들을 산업화 사회를 위한 일꾼이란 칭호를 사용했지만, 막상 각종 인권침해와 노동착취, 산업재해로 약자들은 피멍을 입었다.

 

국가라는 조직이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나 그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 슬로건이 결국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헤게모니적인 부분으로 이런 문제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아도르노 의견처럼 문화산업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단지 발터 벤야민이 주장한 19세기의 파시주라는 파리의 건축양식처럼 그 양식에서는 꿈, 환상, 현실이 공존하는 몽상의 세계였으나, 20세기에 다가오면서 높은 빌딩이나 백화점은 파놉티콘이란 일망감시체계처럼 상업적 기능을 변화했고, 예전처럼 소비의 대상은 소수 부르주아가 아닌 대다수의 대중으로 바뀌었다.

 

문화의 향유가 결국 소비라는 자본의 사용으로 변모된 것이다. 대중문화라는 것은 결국 문화의 소비로 이어지는 것이고, 문화의 소비에서 대중들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기보다는 일정한 틀에 갇히는 꼴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영화, 드라마, 잡지 등은 우리의 취향들을 모우기 보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따라가는 셈이 된다. 우리는 과연 현실 속에 살아가는 존재지만, 우리가 담론지어 보는 것은 현실일까? 주변에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대화하면서 자신의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본 환상과 가상이 현실의 이야기를 대체한다.

 

문화산업에서 대중들을 집단적으로 획일화된 관료적인 미디어로 통해 그들은 비판의식을 상실한다. 더구나 미디어의 의해 정치적 참여나 의지 역시 박약해지는 것을 지적한다. 가령 인간들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대안으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이성을 맹신한 무조건적인 부분이냐는 것이다. 바로 인간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다수결의 이름 아래 존재적 정체성으로 뭉친다.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학력차별로 구분되는 엘리트주의와 저학력자들, 성으로 구별되는 남성과 여성, 지역으로 분리되는 지역주의까지 만연하다.

 

그런 부분은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제기한 문제이고, 오늘날 그 문제의 제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고 해도 그곳은 자유주의국가라고 하나, 단지 자본주의로 이루어진 전제국가였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유색민족에 대한 인종차별, 여성에 대한 인종차별 역시 현실적 문제였다. 아메리카 드림이란 것은 결국 백인남성 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신화에 불과했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옳지 않아도 그 속에서는 당연한 논리로 결부 짓는다. 이성의 한계가 와도 이성의 계몽은 결국 자신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칸트의 말처럼 인간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억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난다. 드골의 강압정치와 노동자의 불만, 그리고 여성들과 학생(이들 속에는 중학생도 많았다)들이 정부에 대해 반발감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 책 서문에 나와 있듯이 그들의 시작은 좋았으나 시작의 철로는 언제나 일직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탈선하기 마련이다.

 

파시즘이란 단어는 보통 지극한 우파들에게 붙어지는 칭호다. 그러나 파시즘이란 단어는 좌파 역시 피해가지 못할 단어이다. 단지 그 잔혹성과 원인성이 기존 권력과 무력을 소유한 자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좌파파시즘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변증적 논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의 전복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을 보듯이 기존 정치체를 전복되어도 인간의 세계에는 평화가 오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프랑스 국민들은 모두 굶어죽었고, 러시아 국민은 전쟁으로 더 많이 죽었을 것이다.

 

극단과 극단의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없앰으로서 사회의 장애를 외면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곧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일까라는 의문을 주게 된다. 인간은 자신 혼자서 살 수 없는 정치적 동물이나, 오히려 정치적으로 되었기에 억압과 갈등이 시작된 점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이성적 계몽과 비판적인 안목으로 타인에 대한 인식과 인정으로 가야하는 점이다. 하버마스나 프롬, 호네트 편을 읽으면 전형적으로 대화단절이란 것을 실감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외면이 결국 타인을 인정하지 않게 되어 언제나 자신의 소유만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의 감성과 무의식까지 억압하는 것도 옳지 않다. 예술이란 것은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도 안 되지만, 현실에 대한 모방성 역시 중요하다. 예술이 자본의 가치로 환원된 이상 그것은 예술의 가치를 상실하고, 그런다고 예술이 대중들을 탈피한 존재로 있을 수도 없다. 루이 알튀세르의 말처럼 유몰론과 관념론은 끊임없이 대립하여 나가는 것처럼 예술 역시 현실 그 자체와 분리된 현실을 격리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대립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단락은 아도르노편인데, 그의 사고는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아주 유사한 상황을 지적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정치권력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나 정치적 무정부주의, 극단적 채식주의나 원시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우호적 관심을 갖는다. 아무리 극단적인 체제 비판세력이라고 하더라도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그에 대해 자기 확신의 논리를 가진 사람은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편이 아니라 저편에 봉사하는 논리도 결국은 실천 가능성이나 현실적 유용성을 입증해야 한다면, 결국 같은 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제시된 액자택일은 이미 타율의 일부다.” 이런 방식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양자택일을 거부하는 사람은 노이로제 환자 취급을 받기 쉽다. 그러나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유란 흑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선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과거의 야만이란 신화가 과학이 들어서면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야만이 과학이란 기술로 통해 새롭게 억압을 시작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야만은 통제력이 강하고,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의식구조를 지배할 수 있는 전방위적인 신화이다. 그 신화는 결국 아도르노 말처럼 인간의 극단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더 가속화시킨다. 어떤 나쁜 존재가 있어서 그 나쁜 존재를 없애도 그 존재가 나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오산이듯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수호 2023-12-08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보고 이책 삽니다
 
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이란 단어는 어떻게 우리는 봐야 하는 것일까? 전쟁은 항상 여러 가지 부분들을 떠오르겠으나, 적어도 2가지로 나눌 것이다. 전쟁에 대한 잔혹함과 광기에 젖어버린 공포, 그리고 전쟁으로 통한 영광이라는 화려한 신성화를 말이다. 전쟁은 항상 이런 2가지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으나, 어느 순간 한쪽의 영역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에 대한 잔혹함과 광기에 젖어버린 공포이다. 인간은 공포라는 것을 매우 무서워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공포의 맛을 보아도 금방 잊어버린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이 바로 그런 공포를 잊지 못할 경우 정신적 외상으로 평생 불구자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공포라는 것을 잊으려고 잊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전쟁이란 점이다. 전쟁이 그렇게 공포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통 중세국가까지의 전형을 보면 전쟁이 일어날 경우 보통 군인과 군인들까지의 정치적인 무력 충돌에 가까웠다. 특히나 고대를 보면 전쟁이 발발해도 민간인에게 피해가는 것을 특별히 금지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행군하는 도중 주변 농민들의 논이나 밭을 망치는 자가 있으면 상하를 막론하고 참수형에 처한다고 했다. 그런데 조조 자신의 말이 놀라는 바람에 논을 망치자, 조조는 비록 연기는 했으나,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고, 주변의 만류로 그동안 자신이 길러온 머리카락 한줌을 베어 효시한다.

 

 

우리가 과학적인 수준이 낮고,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들이 많았던 그 고대사회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실행하는 전쟁에 비해 낭만적이고, 인간적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들은 민간인이나 농민, 여자, 어린이, 노인들에게 칼날을 들이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칼을 들고 싸우기에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그 칼의 무거움이 상대방의 몸을 가르고 찌르고 있을 때 그 순간적인 느낌이 자신의 몸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을 쏘고, 대포를 발사하게 되면 그 행위자 자신이 직접 타인들을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본인이 그렇게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의문점을 놓치기 마련이다.

 

 

게다가 체계적이고 관료적이며, 획일화 구성이 된 군사조직에서 명령을 실행하는 자는 자신의 명령을 내려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았으니, 그 살인에 대한 죄의식이 없고, 살인을 저지르는 당사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명령에 의해 실행했기에 그 죄의식이 없어진다. 물론 처음에 살인할 때의 긴장과 공포는 엄숙해도 어느 순간 인간들은 타성에 젖어버리고,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도 분간하지 못해 광기에 빠져버리는 일들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었다면, 그 과정과 절차 그리고 그 전쟁에 일어난 동기부여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런 전쟁에 대한 참혹함과 무절제적인 인간의 타락은 항상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회의감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죄의식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영광스럽게 보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대사회가 이성의 세계고, 과학의 세계라고 해도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로 씌우진 허상에 불과하다. 진짜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왜 나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가라고 누군지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떠한 이유라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살인에 대한 동기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우리는 눈가림에 의해 살인자의 살인행위를 비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찬양하는 것에서 분노한다고 말이다”

 

 

전쟁의 동기를 보면 정말인지 어설프게 짝이 없다. 왜 없냐고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말 자신의 국민과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인가? 라는 질문에서 모두들 진실보다는 진실 아래 감추어진 타락과 욕망을 하나의 합리적 이데올로기로 교체하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전쟁에 반대한다>를 읽어보면, 이때까지 우리가 전쟁이란 큰 세계적 흐름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얼마나 많은 살육과 은폐 그리고 조작까지 계속 유지되고, 아직도 진행 중이란 사실이다. 다시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그것도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자. 우리가 전쟁을 하는 이유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자.

 

 

그리고 그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 어떤 동기로 무엇이 진정한 시작점인지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때까지 품어온 생각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것은 힘의 논리로서 정치적, 국제적 상황을 좌우되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 제2차 대전이란 사건을 보자. 이때 죽은 자들은 수천만 명에 이른다. 게다가 유태인들이 독일 가스실에서 수백만 명이 허무하게 죽었다. 당시 그들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잔인하게 죽어간다는 사실을 이미 기존 전쟁참전국 중에 연합군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알았지만, 도와주지 않았다. 또한 스페인이나 남미에서 독재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독재정치라는 행위를 했다.

 

 

그런데도 눈감고 모른척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고, 심지어 그런 독재자를 물리치려고 한 인권운동가까지 몰래 테러하여 죽였다. 자기 국가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어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 나라 국민이든 지도자든 여자든 아이든 노약자든 말이다. 그저 총으로 사격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모두 폭탄투하로 무참히 살해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인이라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를 무참히 밟아 무고한 한국인을 죽이고,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으며, 경제수탈과 각종 죄악을 저지른 일본 군국주의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 분노가 결코 모든 일본인들의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어낸 극단적인 파시스트가 싫었다. 그런데 일본이 1945년 8월 전쟁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패배선언을 하려고 했는데, 미국에서 원자탄을 폭격했다. 이때까지 일본이 패배를 시인한 것은 미군의 핵 투하가 아니라 이전부터 준비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핵 투하로 피해본 것은 진실로 군사기지가 주둔한 곳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들이 모여 살던 주택지역이란 점이다. 이 책에서는 투하된 지점에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럼 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그렇게 허무히 사라진다는 말인가?

 

 

폭탄 투하 후에 그 기억이 생생한 자들의 증언 잊을 수 없다. 어느 여자가 턱이 사라져서 혀가 아래 치우친 채 핵폭발 후에 생긴 검은 비를 맞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어느 소녀는 너무 괴로워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잘라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과연 전쟁에서 누가 더 많은 피해를 보고 아픔을 겪었는가? 일본은 자신의 전범에 대한 기억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신들이어야 말로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들은 핵탄두의 위력 앞에 피해자로 착각한 것 같다. 물론 피해자는 맞다. 그런다고 가해자 속성이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어느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국민들의 위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유도하여 자신들로 하여금 전쟁참여를 합당화시키는 공작도 펼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누가 자원하여 목숨을 버리려고 할 것인가? 하지만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라는 숭고함 앞에서는 누구나 위대한 전사로 거듭 태어난다. 하지만 전사의 애국심과 자유를 위한 수호심을 갈구함에서 그들의 진실성은 의심하지 않은 바이나, 그 마음 자체가 향하는 화살을 의심보다는 절망으로 비추어진다.

 

 

전쟁에 나가면 모두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우리를 지킬 것이며, 만약 타국에 출격하면 우리는 세계평화와 더불어 그 나라의 인권과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말이다. 실제로 한국전쟁에서 숨진 많은 연합군 병사들은 고귀하게 죽어갔다. 하지만 진실로 아픈 사실은 그들이 정말 죽어야 할 존재라는 점이다. 전쟁은 결국 외부의 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부의 적을 같이 처단하기 좋은 실험도구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순간 반국가세력을 낙인찍히며, 그들은 마녀로 만들어 국민들을 선동하고, 국민들은 순간 모두 하나가 되고, 그 마녀를 그 마녀동조세력까지 제압해야 모두 만족하는 신화가 발생한다.

 

 

내가 몇 번이나 강조하나 나는 인간들이 정의롭거나 진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이미 정의롭고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다른 희생거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응징할 뿐이다. 패권주의적인 특성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라는 거대한 울타리에 넘어오는 적이 있다면 무슨 수단이 되었든 죽이고 밟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강력한 힘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 실행하기란 무리다. 그 대단한 무리들이 직접 자국을 밟아오지 않은 이상 미친 사람처럼 무모한 행위는 불가라는 점이다.

 

 

결국 우리는 진실을 어디다 두고 말할 수 있는가? 가령 베트남전쟁에서 많은 국가들이 공산주의와 상대로 전쟁을 수행했다. 문제는 그 공산주의라는 존재가 처음에는 민족해방운동에서 자기주권 확립과 민주주의적 체계를 위해 호치민이란 인물이 지도자로 나섰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이나, 혹은 북한의 김일성처럼 관료적이고 독재적인 철권통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서방국가에서는 그들을 적으로 여기고, 자유주의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참전한다. 웃기는 사실은 베트남 국민들을 해방이란 하나, 그들이 가장 많이 살해한 적은 베트콩이 아니라 그냥 주민이었다. 베트콩 기지를 가서 섬멸한 게 아니라 베트남 주민들이 몰린 민간에 총을 발사하고, 폭격을 날렸다.

 

 

그리고 많은 어린아이가 죽었다. 네이팜탄이란 폭탄은 워낙 작은 알갱이로 구성되어 조심성 없는 아이들이 만지면 폭발하여 어린아이들의 손발이 절단되어 죽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느 아이가 폭격으로 다리를 잃어 참전군이 구출하여 그 아이에게 의족을 달아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들을 해방하고, 의족이란 과학적 진보로 통해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폭격을 하지 말고, 하더라도 정확히 하면 될 것을 말이다. 전쟁에서 민간인들의 학살은 그야말로 체계적이지 못해 그것만 노리는 것 같다. 민간인들은 어차피 타국에서 온 군인들에게 영원한 적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이념의 꼭두각시로 참전하나, 그 상대들은 이념이 아닌 국가적 민족적 자주에 의해 싸우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가족과 국가일 경우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뿐이다. 결국 베트남전쟁은 참전국의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패배는 패배만 적용된 게 아니다. 군사적인 패배까지는 군인들의 영역이나, 그들의 패배까지 동원된 국민들의 고통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거리로 내쫓겨 나고, 겨울에 배포할 담요들이 모두 전쟁물자 예산으로 변모되었다. 그렇다면 진정 전쟁을 원하고, 거기에 동조한 어리석은 국민들에게 과연 진실한 패배자는 누구인가? 참전국인가? 아니라면 누구?

 

 

참고로 군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의 백인 내지 흑인이었다. 물론 여기까지 좋다. 전쟁에 동원되면 군인들은 월급을 받기 때문에 자기의 경제적 목적 달성이라고 하자.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목숨은 하나이고, 거기서 나갈 군인들은 자신들이 참전국이란 사실이지 흰둥이와 검둥이가 나눈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종차별에 딸려오는 불만은 결국 전쟁 내에서 타국과의 전쟁이 아닌 자국과의 전쟁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피해자였다. 죽게 될 경우 자신의 인생은 모조리 끝이고, 돌아오더라도 팔과 다리를 잃게 되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물론 이념적 진리 앞에 희생은 피할 수 없는 딜레마나, 그 딜레마 자체가 필요 없을 수 있는데, 있게 한 점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의 나라들은 이런 행위를 만들고 전쟁에서 가난한 국민을 내몰며, 그 덕분으로 특정기업들에게 큰 달러가 들어간다.

 

 

인권을 위해서라는 슬로건, 파시즘을 끝낸다는 슬로건에서 그들은 인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인권으로 위장한 자신들의 권력과 경제적 독점을 차지하고, 파시즘을 처벌한다는 명제 아래 자신들 역시 파시즘이었다. 단지 상대방의 파시즘이 너무나도 강하여 자신들의 파시즘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선전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주의적인 인간상을 말하는데, 차라리 마키아벨리가 아쉬울 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유럽사회가 워낙 전쟁이 많아 군주의 폭력적이나 다소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정치적 공작을 펼쳤으나,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마키아벨리 이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군주론은 다시 적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유냐 삶이냐 홍신사상신서 24
에리히 프롬 지음, 정성환 옮김 / 홍신문화사 / 1991년 11월
평점 :
절판


인상 깊은 문구 : 그들에게는 자신의 철학은 상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개념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좌표계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란 이름은 예전에 기다 겐이라는 일본 철학자가 저술한 <현대사상지도>에서 처음 보았다. 그의 학문적인 사상에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독일의 지식인 집단이었다. 당시 1920~1930년대에 활성화하였으나,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핍박을 받자 외국으로 망명가거나 혹은 전쟁이 끝난 직후 다시 독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20세기 중반 전후로 세계의 학문과 사상, 철학의 중심이던 프랑스의 구조주의와 더불어 활발한 연구를 한 집단이다.

 

때마침 세계 2차 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인권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오로지 자본의 자유만을 추구한 자유주의와 스탈린이 추구하던 파시스트적인 공산주의, 기존 유럽사회 만행하던 파시스트이나 겉으로는 사회주의로 둔갑한 사회파시스트들, 이 모든 것이 어지러운 유럽과 전 세계적으로 퍼진 현상이었다. 지식인이란 그저 독재자와 탐욕의 얼룩에 물들인 자들에겐 방해꾼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 중에 발터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도망치려고 했으나, 그것이 좌절되어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한 지식인이다.

 

그런 세계 속에서 전쟁도 끝이 나고, 냉전사회가 왔고, 인간은 다시 평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막상 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은 그런 복잡하고 난해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서적 <소유냐 삶이냐>는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를 고찰하고 비판하고 생각해보려 하는 철학도서인 것이다.

 

예전에 내가 알던 블로그 이웃이 자신의 블로그 화면에 에리히 프롬의 사진을 올려놓고, 그의 글귀를 적은 놓은 것을 보았다. 당시에 <소유냐 존재냐>이란 것이었는데, 원문이 <To Have or To Be>라는 제목이었다. 이렇게 보아나 저렇게 보아도 가질 것이냐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위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난 뒤에 그가 낸 서적 중의 당연히 명작이 되어버린 이 도서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흔히 우리들은 쉽게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만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므로 함께 살아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은 매우 깨끗하고 아름답고 누가 보더라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문구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더 반대로 가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여기려 하는 사람일수록 더 심한 존재의 위험성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을 만큼의 이상을 원하고 노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특히나 우리의 일상을 능동적인 동사형으로 언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명사적인 언어로 채우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사랑하는 생겼다고 가장하자. 그러면 보통 우리는 “나는 애인을 가지게 되었다.” 내지 “나는 애인을 가졌다.”라고 한다. 즉 목적의 대상이 하나의 존재인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소유물인 객체로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말을 어떠한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물론 의미적으로 애인이 생긴 점은 같으나 이것은 소유와 존재로서 분리되어 보인다. 전자는 사랑하는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의 소유물이고, 후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소유물이란 점이다. 즉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인지 아니면 그 사람과 유대감인지에서 판가름이 나는 셈이다. 솔직히 이런 사소한 단어와 언어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소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이런 일상적인 흐름에서 우리 인간들은 쉽게 놓치고 만다.

 

왜 그럴까? 너무 당연한 것에 대하여 의문과 비판, 그리고 자아고찰이 부족하거나 필요 없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것은 자기가 항상 가지면 가질수록 계속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물이 빠진 항아리이다. 물론 항아리 안에 물이 차있지 않으면 그것은 항아리의 활용가치가 상실하게 되어 그것은 물리적으로 항아리독이라도 실질적으로 아무 필요 없는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항아리가 가진 기능을 사용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항아리에 필요 이상으로 물을 붇게 되면 물은 항아리는 넘칠 것이고, 그 수압이 강할수록 항아리의 어딘가에는 물이 새게 될 것이다.

 

그 물은 새더라도 결국 그 물을 부은 인간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고,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 넘칠 물 이상으로 물을 더 집어넣으려고 한다. 오늘날 이런 모습을 우리 주변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볼 수 있다. 자신에게 충분한 재산이나 금전적 능력이 있어도 타인의 재산을 가로채거나 약자들을 갈취하거나 착취하는 이들, 충분히 세계적으로 안정화할 수 있는데도, 무기와 병력을 늘려 전쟁의 위협을 야기하는 존재들, 이 모든 존재들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서 지적하는 인간의 모순적인 현상일 것이다.

 

자기가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것을 남에게 빼앗아하고, 그 빼앗기 위해 준비하고 소모한 자신의 소유물을 대체하기 위해 또 자신의 욕망에 이끌린다. 자기의 소유만이 오로지 정의이고, 그 외의 존재들은 의미가 없다. 인간에게 과연 삶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많은 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목표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적인 요소는 인간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인간이란 통계적으로 나누어 일부 10% 내외의 존재들은 수치적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존재가 언제부터 수치로서 대하여 그렇게 실행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확률의 숫자로서 그들의 삶을 결정하고, 그들에게 삶의 기회를 박탈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줄 수 있는 인간으로서 가치는 소실된다면 점점 세상은 각박해 보일 수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의 그런 비판은 자본주의와 관료주의로 통해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서 결정되고, 관료주의로 통해 인간의 양심은 맹인처럼 변했다. 과거 독일 나치에서 가스실을 보낸 어떤 사람이 자신은 단순히 상부의 지시를 따르기만 바빴다.

 

그는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이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양심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직행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양심에 가책도 없었고, 그저 시키는데로 하는 기계적인 삶을 살았다. 결국 그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함에 따라 전범재판소에서 유죄를 확정 받았다. 에리히 프롬은 그렇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남을 괴롭히는 것보다, 차라리 사디스트처럼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자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여겼다. 그는 고통을 주더라도 그 고통에 대해 타인과 공유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인과의 공유에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가 이 책의 궁극적 목표다. 또한 위대한 성인인 붓다, 그리스도 같은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소유하지 않으려 했고, 그 소유를 남과 공유하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존경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성인을 존경하고 떠받들어도 결코 그 성인들처럼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성인들의 행위를 한 것을 보고 그들을 동조하는 것으로 모든 성스러운 행위를 했다고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모이고 모여 그 성스러운 존재를 이름삼아 자신들만의 소유를 기획하고, 그들은 거기에 매달리는 삶을 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삶을 창조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인간의 윤리관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사회로 갈수록 인간들은 니체가 비판하는 “자신만의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그 이상으로는 배타적이다. 자신의 주변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결국 인간은 자신의 주변사람이 결국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계속 상승 중이고, 그 대상은 한계가 있다. 어느덧 그것이 범접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그 무엇이라도 소유할 기회라도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맹신자들은 언제나 이 세계가 태어나면서 아니 이 세계가 계속 유지되어 그 멸망의 순간을 맞이하는 날까지 맹신(盲信)이란 단어는 유효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자신이란 존재를 단체에 존립할 수밖에 없다.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을까? 따지고 보자면 인간은 혼자일 수 없기에 그리고 언제나 무리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기에 그렇지 않은가 싶다.

 

하지만 인간이란 완벽하지 못할 존재뿐만 아니라 유한한 존재다. 자신의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유한적인 것이 아닌 영속적인 가치로서 매기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국가, 종교, 민족이라는 커다란 존재이다. 이들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으나 눈앞의 존재감이라고 하기에 그렇다. 국가의 조직에서 인간의 존재는 매우 미약하고, 종교 앞에서는 인간은 무력하고, 민족 앞에서 인간은 하나의 톱니바퀴와 같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원하고 바라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자신의 존재적인 가치를 뒤로 한 채 개인의 영역을 무시하여 그저 조직적인 단체에 몸담기를 바라는 인간의 심리란 역설적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옳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이성적인 존재가 되기보다는 그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삼아 수단화 시킨다. 칸트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고 하나, 그 목적의 대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칸트는 비판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기본적인 요건은 인간의 교조주의적인 요소다.

 

칸트가 주변 오솔길을 따라 항상 산책을 하는데, 하지 못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17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프랑스혁명이었다. 칸트는 그 혁명을 두고 잘 되었다는 판단보다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프랑스혁명의 빚이 루소에게 있고, 그 루소의 철학을 받아들인 칸트가 왜 프랑스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었는가를 상기해보면 바로 저런 교조주의적 요소다. 인간의 행위가 이성과 논리로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항상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순간적인 파도로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기존 부당함과 문제점을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심의하여 개혁으로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으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는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라는 이런 문구가 있어서 아닐까 싶다. 사실 그렇지 아니한가? 언제나 그 시대의 부조리와 부당함이 극단적으로 이어질 때 항상 폭력현상이 일어난다. 문제는 그 폭력현상은 국가나 사회가 너무 강압적인 상황이 아니라 너무나 무력하고 통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이란 하나의 극단적 수단이 평화를 위해 안정을 위해라는 말로서 오용된다.

 

독재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평화와 안정이란 말이 있는데, 독재자가 통치하는 동안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내국을 잘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독재자가 통치하면 항상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독재자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앞세우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항상 상징물들을 만든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에게 쏟아야할 예산이 왕권상징에 사용되고, 내부의 불만을 제거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군대를 동원하고, 그 이상 무리가 되면 전쟁으로서 해결한다. 문제는 전쟁이란 것은 이겨도 본전이고, 지게 되면 완전 손해라는 것이다. 전쟁 후의 어지러운 정국과 정치적 영향이 줄어들 경우 항상 사변이 일어나게 될 마련이다.

 

맹신자들의 활동은 비로소 큰 빛을 발휘하게 되는 점이다. 그런다고 맹신자라고 일컫는 자들은 무식하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대중들만을 지칭하는 말도 아니다. 맹신자는 엘리트적이고 인텔리하며, 상당한 지식을 소유한 지식인 역시 피하지 못할 존재다. 그들의 맹신과 대중의 맹신을 비교하면 대중은 자기 존재를 단체나 조직에 속하려고 하는 것이고, 지식인과 엘리트, 인텔리들은 그런 대중들을 자신들의 이상 내지 이념 그리고 이익과 사욕으로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다.

 

가령 여기서는 20세기의 폭풍과 같은 현실을 비교하여 분석한다. 예를 들어 20세기 위대하면서 실패한 혁명은 러시아의 10월 혁명 즉 볼셰비키혁명이다. 이때 혁명가로 명성을 날린 레닌과 트로츠키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맹신자였기는 하나 대중과 달랐다. 대중들은 오로지 빵과 안정을 원했고, 레닌과 트로츠키의 경우 차르의 전복과 1차 세계대전이 팽창되어 가는 자본주의의 욕망에서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그때의 혁명은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폭력이었다.

 

이에 반해 레닌 사후 트로츠키가 후계자로 지명되나, 아쉽게도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정치적 암수에서 추방된 후에 암살까지 당했다. 그의 죽음에서 트로츠키의 실수는 대중을 하나의 무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인영역으로 보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기반세력인 지지자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맹신하기보단 자신의 이상으로 통해 하나의 개인으로 되기를 바란 것이다. 주체적이고 개인의 사고와 판단력을 중시하였기에 그는 혁명 이후 스탈린에게 물려나게 되었다. 스탈린이 취한 방법은 간단한다.

 

집단화한 무리로서 그들을 하나의 무기로 만든 것이다. 겉으로는 프롤레타리아와 쿨라크의 세상을 위해라는 슬로건이나 알고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러시아민족이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것이다. 스탈린이 펼친 공포정치에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의 비밀경찰에 의해 겁먹은 강아지가 되었고, 스탈린 밑의 조직원들은 그저 분산된 하나의 겁쟁이였다. 그런데, 독일 나치와 전쟁을 펼치며 그들은 용감한 전사가 되었다. 그들은 스탈린의 부하로서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란 큰 민족적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뭉치고자 하는 저 심리는 어쩔 수 없다. 대중운동이 반드시 혁명과 전쟁이 아니라 폭동과 시민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여기서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여성들이 왜 시민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는가에서 기존에 그들은 개인의 영역이었으나, 결혼하면서 기존 가족단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로 맺고, 거기에 안주하지 못함에 따라 사회현상에 적극적인 활동을 한다는 점이다. 가령 지금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는 높다. 그런다고 그들 전체가 나는 모두 긍정적인 영향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심각한 광적인 요소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원인을 찾아가면 기본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요소 역시 비판의 대상에서 피할 수 없다. 맹신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큰 난쟁인 수구세력과 급진세력에서 이들은 서로를 욕하고 할퀴고 있으나, 막상 그들의 본질은 같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단 자신의 존재를 투영하기를 바란 것이다. 극좌에서 극우로 가고 극우에서 극좌로 가는 원인과 유럽에서 어느 청년이 당신은 지금 공산주의자로 될 것인가? 아니면 나치로 갈 것인가? 라는 선택권이 있었다고 한다.

 

하다못해 공산당으로 가서 초반에 파시즘에 대항해도 결국 그는 몇 달 내로 다시 나치로 돌아오게 된다는 나치의 지도부의 말처럼 무엇이 옳은가 아닌가라는 철학적인 질문 대신 그냥 무엇이 자신에게 당장 마음에 드는 것이다. 흔히 정치에서 선거를 할 경우 정치인들과 사회적인 쟁점에 대해 논리적으로 윤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기보단 그저 자신이 속한 정체성에 확인한다고 한다. 보수적인 공간에서 최상의 계급과 최하의 계급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를 바꾸는 것은 최상의 계급과 최하의 계급이다.

 

최상은 자신이 가졌던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권력에 집착하고, 최하의 조직은 범죄자 내지 사회 부적응자, 그리고 정신적 공황을 가지는 이방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그 중간에 있는 사람 역시 맹신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맹신하지 않은 종류는 아주 철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사유의 깊이가 매우 깊은 지식인 내지 철학자일 것이다. 그나마 이들에게는 양심이나 있지만, 양심을 권력과 결탁할 경우 그 사회는 피지배계급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력에 맹신한 자들이 그 권력에 대해 맹신한 지식인들까지 섭외할 경우 지식인들은 그 세계가 왜 존립되어야 하는지를 일반 대중들에게 아니 군중들에게 설파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소유하지 않으면 왜 그 사회가 잘못되었는지 조차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중세의 유럽에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오로지 교회와 귀족에게만 공개된 내용이었다. 만약 거기에 그 외의 존재들인 자국어로 볼 경우 마녀사냥이 되어야할 운명이었다. 지식이어야말로 권력을 생산하는 하나의 재생산 체계였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적인 흐름에서 지금 한국이나 세계나 맹신자들의 우위싸움이 바쁘다.

 

나 역시 맹신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같이 휩쓸려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존재로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의지로 다가갈 수 있는 맹신이 되었으면 한다. 이 책에서는 간디와 링컨을 탁월한 맹신자로 지정한다. 모든 사람이 맹신자라도 그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따지고 본다면 이 책은 인간의 실존주의적인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 강렬하게 느낀다. 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외치고 있을까? 신은 정말 형이상학적 인식과 관념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군중심리에서 태어난 신이다. 결국 무지와 무의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판단력비판 대우고전총서 24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마누엘 칸트라고 하면 우리 지구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하나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칸트가 무엇을 적고, 무엇을 논했는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칸트라는 사람이 엄청난 철학자란 사실만 알지 그 이상으로 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칸트에 대해 작년부터 본인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칸트의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이번에 <판단력비판>까지 읽게 되었다.

 

칸트의 3대 비판으로 널리 알려진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이 세 가지의 비판을 읽으며, 솔직히 이해하는 것은 후자로 두더라도 책 자체를 읽는 것 자체가 지독한 악몽이었다. 문구가 매우 난해하고, 낱말의 전개나 단어의 해석, 그리고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내용들이 이때까지 내가 본 서적 중에 가장 난해한 도서 베스트로 올라갈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전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솔직히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정식으로 칸트를 배우지 않고서는 힘든 작업이란 것을 이번 <판단력비판>을 읽으면서 더욱 느꼈다.

 

그런다고 해도 배움의 길에는 끝이 없고, 모른다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나갈 수만은 없다. 언제 다시 한 번 3대 비판을 다시 읽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때까지 3가지의 비판을 보면서 난이도가 <순수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실천이성비판>이었다. 책의 두께가 굵거나 혹은 서적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난이도가 높았다. 그런데 이 3가지의 서적을 보면서 느낀 점은 칸트의 3대 비판을 읽으면 같이 서로 비교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판단력비판의 경우에는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책 자체 내용만으로 어려우나 순수이성비판의 사전지식의 누락은 이 책에서 다루는 진실한 의미를 놓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문구는 판단력비판에 제시된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마음의 능력 상위 인식능력 선험적 원리 산물
인식능력 지성 합법칙성 자연
쾌·불쾌의 감정 판단력 합목적성  기예
욕구능력 이성

동시에 법칙인 합목적성

(책무성)

윤리 

 

1부터 4까지의 능력과 원리, 대상별로 어떤 점들이 인간의 내부의 의식을 작용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판단력비판은 단순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판단능력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력이란 자체가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을 토대로 그것을 보고 있는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것 자체에 대한 정신활동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판단력비판은 판단과 비판이 같은 의미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하는 능력 자체를 비판하고 있기에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순수이성비판이 중요한가에서 그 판단해야할 대상에 대해 인식하거나 사고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원리들이 숨어있는지 말이다. 어떻게 보자면 물리학적인 요소가 많이 통용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칸트의 철학은 순수철학인 형이상학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미적으로나 감성적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취미능력 판단에서 우선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바로 지성이 필요한 이유가 그러하다. 만약 지식이 없다고 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지질학을 배워 암석에 대한 구조와 더불어 건축학을 알지 못하면 건축미학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조경학을 모르고서는 공원미학을 알 수 없다.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미학(美學)이란 미를 공부하는 학문이기는 하나, 미학 자체에 대한 학문적 배움은 없다. 단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잡다한 것들을 습득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학이란 것은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찌르거나 잘라보는 학문이니, 기본적으로 철학이란 토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만으로는 그것을 다 정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철학적인 영역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런 인간의 사고로서 취미에 대한 감성적 판별을 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것에서 과연 단순히 자연에 대한 미만 존재하는 것일까? 칸트의 미는 단순히 자연의 숭고함이나 위대한 신앙심을 담은 건축물만도 아닌 것 같았다.

 

본문과 주석을 잠시 찾아보면 <나는 인민의 땀을 그처럼 불필요한 것들에 소비하는 권력자들의 허영을 꼭 루소와 같은 투로 꾸짖을 수 있다 - 아마도 “굶주린 다수에게는 필수품도 없는데 한 줌의 사람에게는 사치품이 넘친다.”의 끝 대목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인간학 강의⌋>처럼 칸트가 직접적으로 루소가 언급한 문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글을 전개하지 않으나, 적어도 앞의 문장들을 보고 있자면 칸트의 미적인 감각에서 아름다움을 눈에 당장 보이거나 귀에 들리거나 냄새를 맡거나 피부에 닿거나 입 안에서 맛을 느끼는 것처럼 개인이 직접적으로 신체의 오감을 통해 대상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가령 칸트의 <판단력비판>이라고 해도 결국 인간의 미의 가치를 논하므로 그 미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이 가지는 감각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수이성비판>을 읽어야 이 책이 어느 정도 연결되듯이 한편으로 <실천이성비판>까지 파악하는 편이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야할 사항이다. 루소의 문구처럼 루소의 주장은 결국 가난한 자들은 당장 생계에 곤란하여 큰 위기와 고뇌로 슬퍼하고 있는데, 어느 소수의 인간들은 사치품으로 장식하여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점이다.

 

따라서 저 문구를 보자면 칸트가 루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프랑스나 혹은 가난한 유럽의 가난한 사람이 어려워하는 것을 공감하는 셈이고, 그것은 정치가나 혹은 권력자들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함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라는 것은 <순수이성비판>처럼 선험적인 이성 안에서 지성을 통해 판단하여 그것에 대한 원리와 논리를 찾는 것도 좋으나, <실천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선(Goods)을 베푸는 것 역시 중요한 미라는 점이다.

 

결국 미라는 것은 진과 선의 영역에서 접점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그것이 예술이란 하나의 체계에서 다루고 있으나, 예술 역시 인간의 삶과 밀접하고, 인간의 정신과 상당히 밀접하다. 인간이 가진 사고가 그대로 예술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을 광학으로서 삶을 보고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만큼 판단력비판에서 인간의 지성을 쌓고 판단하여 그것에 대한 윤리적 이성으로 그 대상을 판단하는 것 자체까지 재비판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칸트는 인간의 교조주의적인 관념과 논리라는 것은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논리를 위한 논리가 아니라 윤리가 아닌 논리라는 점이다. 칸트의 인간에 대한 가치란 인간은 수단이 되는 대상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대상이란 점이다. 즉 인간의 존재는 고귀하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실천이성비판>에서 자기의 이성적인 가치 아래 자신의 선을 남에게 건네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목적의 대상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남에게 선을 주거나 혹은 남의 선을 빼앗아 간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전자의 경우 쾌감을 남에게 주는 것이고, 후자는 남에게 불쾌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 위에서 보이는 4개의 세로와 4개의 가로로 이루어진 도식에서 1번 라인은 명제를 구분되는 셈이고, 2번은 <순수이성비판>으로 연결되고, 4번은 <실천이성비판>으로 연결된다. 결국 판단력의 비판은 자신이 사물을 보는 것도 그러하나 자신이 하는 판단하고 실천하는 행위 자체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학에 대하여 적은 <판단력비판>에서 정말 아름다움 것들이 무엇으로 봐야 할 것인가? 일단 우리가 예술가 중에 유명한 인물을 상기시켜보라고 하면 보통 파블로 피카소가 생각날 것이다. 미적 감각을 다루는 점에서 보편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것에서 천재화가 피카소의 거명은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피카소는 우리가 다 알고, 그가 무슨 그림이 있는지 대략 몇 가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가 무슨 삶과 사고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일단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좋은 예술은 천재만이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천재만이 남이 만들지 않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의 예술에 대한 담론에서는 진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천재의 창조성이었다. 그 뒤에 그 누구든지 완벽하게 따라 해도 그것은 원래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할 모조품이고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리 인간이 아름다운 새의 울음소리를 잘 내어도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 자체 역시 자연적이고 이루어지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피카소를 예로 들었을까? 어느 책에서 재미있는 피카소의 일화가 등장한다. 피카소가 아주 어릴 때 그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너는 정치를 하면 대통령이 되고, 신부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피카소가 말 한 마디를 더 붙이어 문구를 완성했다. “나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리고 나는 피카소가 되었다.” 천재화가 피카소의 탄생이란 이렇게 되었다. 피카소가 어떻게 하여 큐비즘으로 혹은 초현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을 만들었을까?

 

그는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보았고, 제2차 세계대전 시의 나치의 포로로 잡혔으며, 그 외에도 프랑스 자체의 정부로부터 억압도 받았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위로하고 싶었고, 그들의 슬픔을 일그러진 이미지로서 그림판으로 내세웠다. 웃기게도 그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부르주아적인 가치관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던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엄청난 거액이 붙여질 정도로 높은 가격이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신의 예술로서 저항했으나, 결국 자신의 예술품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엄청난 상품이 되는 반전을 겪었다.

 

문제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는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인간의 가치관이 상실하는 것을 매우 걱정했다. 그리고 보니 피카소의 그림들은 결국 전쟁과 기아, 분쟁이 원인이었다.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독재자의 최후의 목표는 대부자라는 점에서 물질만능주의자들의 탐욕에 희생되어간 자들을 그렸는데 말이다. 어째든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예술이 왜 천재로부터인가에서 피카소의 예로 보면 된다. 일단 천재가 기존에 없던 것을 보고 만들고 했으니, 천재만이 예술을 크게 기여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에서 창조하는 것은 모방이란 말이 있다. 비록 제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이 없으면 불가한 것이다. 피카소가 그림을 아주 훌륭히 그려도 그가 처음에 미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그가 만든 위대한 작품은 없었다. 단지 다른 방면으로 예술이 나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예술에서 칸트가 최고로 보는 것은 미술이었다. 미술에 인간의 감성과 의식이 가득하며,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 하여금 왜 저렇게 되었을까? 라는 사고와 그 사고에 대한 판단을 주게 되면, 그 판단으로 통해 삶에 대한 윤리적인 사고로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