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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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은 언제나 이 세계가 태어나면서 아니 이 세계가 계속 유지되어 그 멸망의 순간을 맞이하는 날까지 맹신(盲信)이란 단어는 유효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자신이란 존재를 단체에 존립할 수밖에 없다.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을까? 따지고 보자면 인간은 혼자일 수 없기에 그리고 언제나 무리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기에 그렇지 않은가 싶다.

 

하지만 인간이란 완벽하지 못할 존재뿐만 아니라 유한한 존재다. 자신의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유한적인 것이 아닌 영속적인 가치로서 매기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국가, 종교, 민족이라는 커다란 존재이다. 이들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으나 눈앞의 존재감이라고 하기에 그렇다. 국가의 조직에서 인간의 존재는 매우 미약하고, 종교 앞에서는 인간은 무력하고, 민족 앞에서 인간은 하나의 톱니바퀴와 같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원하고 바라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자신의 존재적인 가치를 뒤로 한 채 개인의 영역을 무시하여 그저 조직적인 단체에 몸담기를 바라는 인간의 심리란 역설적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옳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이성적인 존재가 되기보다는 그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삼아 수단화 시킨다. 칸트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고 하나, 그 목적의 대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칸트는 비판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기본적인 요건은 인간의 교조주의적인 요소다.

 

칸트가 주변 오솔길을 따라 항상 산책을 하는데, 하지 못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17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프랑스혁명이었다. 칸트는 그 혁명을 두고 잘 되었다는 판단보다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프랑스혁명의 빚이 루소에게 있고, 그 루소의 철학을 받아들인 칸트가 왜 프랑스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었는가를 상기해보면 바로 저런 교조주의적 요소다. 인간의 행위가 이성과 논리로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항상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순간적인 파도로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기존 부당함과 문제점을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심의하여 개혁으로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으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는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라는 이런 문구가 있어서 아닐까 싶다. 사실 그렇지 아니한가? 언제나 그 시대의 부조리와 부당함이 극단적으로 이어질 때 항상 폭력현상이 일어난다. 문제는 그 폭력현상은 국가나 사회가 너무 강압적인 상황이 아니라 너무나 무력하고 통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이란 하나의 극단적 수단이 평화를 위해 안정을 위해라는 말로서 오용된다.

 

독재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평화와 안정이란 말이 있는데, 독재자가 통치하는 동안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내국을 잘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독재자가 통치하면 항상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독재자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앞세우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항상 상징물들을 만든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에게 쏟아야할 예산이 왕권상징에 사용되고, 내부의 불만을 제거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군대를 동원하고, 그 이상 무리가 되면 전쟁으로서 해결한다. 문제는 전쟁이란 것은 이겨도 본전이고, 지게 되면 완전 손해라는 것이다. 전쟁 후의 어지러운 정국과 정치적 영향이 줄어들 경우 항상 사변이 일어나게 될 마련이다.

 

맹신자들의 활동은 비로소 큰 빛을 발휘하게 되는 점이다. 그런다고 맹신자라고 일컫는 자들은 무식하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대중들만을 지칭하는 말도 아니다. 맹신자는 엘리트적이고 인텔리하며, 상당한 지식을 소유한 지식인 역시 피하지 못할 존재다. 그들의 맹신과 대중의 맹신을 비교하면 대중은 자기 존재를 단체나 조직에 속하려고 하는 것이고, 지식인과 엘리트, 인텔리들은 그런 대중들을 자신들의 이상 내지 이념 그리고 이익과 사욕으로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다.

 

가령 여기서는 20세기의 폭풍과 같은 현실을 비교하여 분석한다. 예를 들어 20세기 위대하면서 실패한 혁명은 러시아의 10월 혁명 즉 볼셰비키혁명이다. 이때 혁명가로 명성을 날린 레닌과 트로츠키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맹신자였기는 하나 대중과 달랐다. 대중들은 오로지 빵과 안정을 원했고, 레닌과 트로츠키의 경우 차르의 전복과 1차 세계대전이 팽창되어 가는 자본주의의 욕망에서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그때의 혁명은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폭력이었다.

 

이에 반해 레닌 사후 트로츠키가 후계자로 지명되나, 아쉽게도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정치적 암수에서 추방된 후에 암살까지 당했다. 그의 죽음에서 트로츠키의 실수는 대중을 하나의 무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인영역으로 보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기반세력인 지지자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맹신하기보단 자신의 이상으로 통해 하나의 개인으로 되기를 바란 것이다. 주체적이고 개인의 사고와 판단력을 중시하였기에 그는 혁명 이후 스탈린에게 물려나게 되었다. 스탈린이 취한 방법은 간단한다.

 

집단화한 무리로서 그들을 하나의 무기로 만든 것이다. 겉으로는 프롤레타리아와 쿨라크의 세상을 위해라는 슬로건이나 알고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러시아민족이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것이다. 스탈린이 펼친 공포정치에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의 비밀경찰에 의해 겁먹은 강아지가 되었고, 스탈린 밑의 조직원들은 그저 분산된 하나의 겁쟁이였다. 그런데, 독일 나치와 전쟁을 펼치며 그들은 용감한 전사가 되었다. 그들은 스탈린의 부하로서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란 큰 민족적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뭉치고자 하는 저 심리는 어쩔 수 없다. 대중운동이 반드시 혁명과 전쟁이 아니라 폭동과 시민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여기서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여성들이 왜 시민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는가에서 기존에 그들은 개인의 영역이었으나, 결혼하면서 기존 가족단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로 맺고, 거기에 안주하지 못함에 따라 사회현상에 적극적인 활동을 한다는 점이다. 가령 지금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는 높다. 그런다고 그들 전체가 나는 모두 긍정적인 영향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심각한 광적인 요소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원인을 찾아가면 기본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요소 역시 비판의 대상에서 피할 수 없다. 맹신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큰 난쟁인 수구세력과 급진세력에서 이들은 서로를 욕하고 할퀴고 있으나, 막상 그들의 본질은 같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단 자신의 존재를 투영하기를 바란 것이다. 극좌에서 극우로 가고 극우에서 극좌로 가는 원인과 유럽에서 어느 청년이 당신은 지금 공산주의자로 될 것인가? 아니면 나치로 갈 것인가? 라는 선택권이 있었다고 한다.

 

하다못해 공산당으로 가서 초반에 파시즘에 대항해도 결국 그는 몇 달 내로 다시 나치로 돌아오게 된다는 나치의 지도부의 말처럼 무엇이 옳은가 아닌가라는 철학적인 질문 대신 그냥 무엇이 자신에게 당장 마음에 드는 것이다. 흔히 정치에서 선거를 할 경우 정치인들과 사회적인 쟁점에 대해 논리적으로 윤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기보단 그저 자신이 속한 정체성에 확인한다고 한다. 보수적인 공간에서 최상의 계급과 최하의 계급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를 바꾸는 것은 최상의 계급과 최하의 계급이다.

 

최상은 자신이 가졌던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권력에 집착하고, 최하의 조직은 범죄자 내지 사회 부적응자, 그리고 정신적 공황을 가지는 이방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그 중간에 있는 사람 역시 맹신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맹신하지 않은 종류는 아주 철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사유의 깊이가 매우 깊은 지식인 내지 철학자일 것이다. 그나마 이들에게는 양심이나 있지만, 양심을 권력과 결탁할 경우 그 사회는 피지배계급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력에 맹신한 자들이 그 권력에 대해 맹신한 지식인들까지 섭외할 경우 지식인들은 그 세계가 왜 존립되어야 하는지를 일반 대중들에게 아니 군중들에게 설파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소유하지 않으면 왜 그 사회가 잘못되었는지 조차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중세의 유럽에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오로지 교회와 귀족에게만 공개된 내용이었다. 만약 거기에 그 외의 존재들인 자국어로 볼 경우 마녀사냥이 되어야할 운명이었다. 지식이어야말로 권력을 생산하는 하나의 재생산 체계였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적인 흐름에서 지금 한국이나 세계나 맹신자들의 우위싸움이 바쁘다.

 

나 역시 맹신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같이 휩쓸려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존재로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의지로 다가갈 수 있는 맹신이 되었으면 한다. 이 책에서는 간디와 링컨을 탁월한 맹신자로 지정한다. 모든 사람이 맹신자라도 그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따지고 본다면 이 책은 인간의 실존주의적인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 강렬하게 느낀다. 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외치고 있을까? 신은 정말 형이상학적 인식과 관념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군중심리에서 태어난 신이다. 결국 무지와 무의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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