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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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단어는 어떻게 우리는 봐야 하는 것일까? 전쟁은 항상 여러 가지 부분들을 떠오르겠으나, 적어도 2가지로 나눌 것이다. 전쟁에 대한 잔혹함과 광기에 젖어버린 공포, 그리고 전쟁으로 통한 영광이라는 화려한 신성화를 말이다. 전쟁은 항상 이런 2가지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으나, 어느 순간 한쪽의 영역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에 대한 잔혹함과 광기에 젖어버린 공포이다. 인간은 공포라는 것을 매우 무서워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공포의 맛을 보아도 금방 잊어버린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이 바로 그런 공포를 잊지 못할 경우 정신적 외상으로 평생 불구자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공포라는 것을 잊으려고 잊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전쟁이란 점이다. 전쟁이 그렇게 공포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통 중세국가까지의 전형을 보면 전쟁이 일어날 경우 보통 군인과 군인들까지의 정치적인 무력 충돌에 가까웠다. 특히나 고대를 보면 전쟁이 발발해도 민간인에게 피해가는 것을 특별히 금지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행군하는 도중 주변 농민들의 논이나 밭을 망치는 자가 있으면 상하를 막론하고 참수형에 처한다고 했다. 그런데 조조 자신의 말이 놀라는 바람에 논을 망치자, 조조는 비록 연기는 했으나,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고, 주변의 만류로 그동안 자신이 길러온 머리카락 한줌을 베어 효시한다.

 

 

우리가 과학적인 수준이 낮고,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들이 많았던 그 고대사회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실행하는 전쟁에 비해 낭만적이고, 인간적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들은 민간인이나 농민, 여자, 어린이, 노인들에게 칼날을 들이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칼을 들고 싸우기에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그 칼의 무거움이 상대방의 몸을 가르고 찌르고 있을 때 그 순간적인 느낌이 자신의 몸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을 쏘고, 대포를 발사하게 되면 그 행위자 자신이 직접 타인들을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본인이 그렇게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의문점을 놓치기 마련이다.

 

 

게다가 체계적이고 관료적이며, 획일화 구성이 된 군사조직에서 명령을 실행하는 자는 자신의 명령을 내려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았으니, 그 살인에 대한 죄의식이 없고, 살인을 저지르는 당사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명령에 의해 실행했기에 그 죄의식이 없어진다. 물론 처음에 살인할 때의 긴장과 공포는 엄숙해도 어느 순간 인간들은 타성에 젖어버리고,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도 분간하지 못해 광기에 빠져버리는 일들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었다면, 그 과정과 절차 그리고 그 전쟁에 일어난 동기부여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런 전쟁에 대한 참혹함과 무절제적인 인간의 타락은 항상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회의감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죄의식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영광스럽게 보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대사회가 이성의 세계고, 과학의 세계라고 해도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로 씌우진 허상에 불과하다. 진짜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왜 나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가라고 누군지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떠한 이유라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살인에 대한 동기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우리는 눈가림에 의해 살인자의 살인행위를 비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찬양하는 것에서 분노한다고 말이다”

 

 

전쟁의 동기를 보면 정말인지 어설프게 짝이 없다. 왜 없냐고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말 자신의 국민과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인가? 라는 질문에서 모두들 진실보다는 진실 아래 감추어진 타락과 욕망을 하나의 합리적 이데올로기로 교체하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전쟁에 반대한다>를 읽어보면, 이때까지 우리가 전쟁이란 큰 세계적 흐름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얼마나 많은 살육과 은폐 그리고 조작까지 계속 유지되고, 아직도 진행 중이란 사실이다. 다시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그것도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자. 우리가 전쟁을 하는 이유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자.

 

 

그리고 그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 어떤 동기로 무엇이 진정한 시작점인지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때까지 품어온 생각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것은 힘의 논리로서 정치적, 국제적 상황을 좌우되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 제2차 대전이란 사건을 보자. 이때 죽은 자들은 수천만 명에 이른다. 게다가 유태인들이 독일 가스실에서 수백만 명이 허무하게 죽었다. 당시 그들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잔인하게 죽어간다는 사실을 이미 기존 전쟁참전국 중에 연합군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알았지만, 도와주지 않았다. 또한 스페인이나 남미에서 독재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독재정치라는 행위를 했다.

 

 

그런데도 눈감고 모른척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고, 심지어 그런 독재자를 물리치려고 한 인권운동가까지 몰래 테러하여 죽였다. 자기 국가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어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 나라 국민이든 지도자든 여자든 아이든 노약자든 말이다. 그저 총으로 사격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모두 폭탄투하로 무참히 살해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인이라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를 무참히 밟아 무고한 한국인을 죽이고,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으며, 경제수탈과 각종 죄악을 저지른 일본 군국주의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 분노가 결코 모든 일본인들의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어낸 극단적인 파시스트가 싫었다. 그런데 일본이 1945년 8월 전쟁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패배선언을 하려고 했는데, 미국에서 원자탄을 폭격했다. 이때까지 일본이 패배를 시인한 것은 미군의 핵 투하가 아니라 이전부터 준비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핵 투하로 피해본 것은 진실로 군사기지가 주둔한 곳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들이 모여 살던 주택지역이란 점이다. 이 책에서는 투하된 지점에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럼 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그렇게 허무히 사라진다는 말인가?

 

 

폭탄 투하 후에 그 기억이 생생한 자들의 증언 잊을 수 없다. 어느 여자가 턱이 사라져서 혀가 아래 치우친 채 핵폭발 후에 생긴 검은 비를 맞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어느 소녀는 너무 괴로워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잘라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과연 전쟁에서 누가 더 많은 피해를 보고 아픔을 겪었는가? 일본은 자신의 전범에 대한 기억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신들이어야 말로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들은 핵탄두의 위력 앞에 피해자로 착각한 것 같다. 물론 피해자는 맞다. 그런다고 가해자 속성이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어느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국민들의 위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유도하여 자신들로 하여금 전쟁참여를 합당화시키는 공작도 펼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누가 자원하여 목숨을 버리려고 할 것인가? 하지만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라는 숭고함 앞에서는 누구나 위대한 전사로 거듭 태어난다. 하지만 전사의 애국심과 자유를 위한 수호심을 갈구함에서 그들의 진실성은 의심하지 않은 바이나, 그 마음 자체가 향하는 화살을 의심보다는 절망으로 비추어진다.

 

 

전쟁에 나가면 모두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우리를 지킬 것이며, 만약 타국에 출격하면 우리는 세계평화와 더불어 그 나라의 인권과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말이다. 실제로 한국전쟁에서 숨진 많은 연합군 병사들은 고귀하게 죽어갔다. 하지만 진실로 아픈 사실은 그들이 정말 죽어야 할 존재라는 점이다. 전쟁은 결국 외부의 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부의 적을 같이 처단하기 좋은 실험도구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순간 반국가세력을 낙인찍히며, 그들은 마녀로 만들어 국민들을 선동하고, 국민들은 순간 모두 하나가 되고, 그 마녀를 그 마녀동조세력까지 제압해야 모두 만족하는 신화가 발생한다.

 

 

내가 몇 번이나 강조하나 나는 인간들이 정의롭거나 진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이미 정의롭고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다른 희생거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응징할 뿐이다. 패권주의적인 특성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라는 거대한 울타리에 넘어오는 적이 있다면 무슨 수단이 되었든 죽이고 밟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강력한 힘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 실행하기란 무리다. 그 대단한 무리들이 직접 자국을 밟아오지 않은 이상 미친 사람처럼 무모한 행위는 불가라는 점이다.

 

 

결국 우리는 진실을 어디다 두고 말할 수 있는가? 가령 베트남전쟁에서 많은 국가들이 공산주의와 상대로 전쟁을 수행했다. 문제는 그 공산주의라는 존재가 처음에는 민족해방운동에서 자기주권 확립과 민주주의적 체계를 위해 호치민이란 인물이 지도자로 나섰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이나, 혹은 북한의 김일성처럼 관료적이고 독재적인 철권통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서방국가에서는 그들을 적으로 여기고, 자유주의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참전한다. 웃기는 사실은 베트남 국민들을 해방이란 하나, 그들이 가장 많이 살해한 적은 베트콩이 아니라 그냥 주민이었다. 베트콩 기지를 가서 섬멸한 게 아니라 베트남 주민들이 몰린 민간에 총을 발사하고, 폭격을 날렸다.

 

 

그리고 많은 어린아이가 죽었다. 네이팜탄이란 폭탄은 워낙 작은 알갱이로 구성되어 조심성 없는 아이들이 만지면 폭발하여 어린아이들의 손발이 절단되어 죽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느 아이가 폭격으로 다리를 잃어 참전군이 구출하여 그 아이에게 의족을 달아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들을 해방하고, 의족이란 과학적 진보로 통해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폭격을 하지 말고, 하더라도 정확히 하면 될 것을 말이다. 전쟁에서 민간인들의 학살은 그야말로 체계적이지 못해 그것만 노리는 것 같다. 민간인들은 어차피 타국에서 온 군인들에게 영원한 적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이념의 꼭두각시로 참전하나, 그 상대들은 이념이 아닌 국가적 민족적 자주에 의해 싸우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가족과 국가일 경우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뿐이다. 결국 베트남전쟁은 참전국의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패배는 패배만 적용된 게 아니다. 군사적인 패배까지는 군인들의 영역이나, 그들의 패배까지 동원된 국민들의 고통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거리로 내쫓겨 나고, 겨울에 배포할 담요들이 모두 전쟁물자 예산으로 변모되었다. 그렇다면 진정 전쟁을 원하고, 거기에 동조한 어리석은 국민들에게 과연 진실한 패배자는 누구인가? 참전국인가? 아니라면 누구?

 

 

참고로 군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의 백인 내지 흑인이었다. 물론 여기까지 좋다. 전쟁에 동원되면 군인들은 월급을 받기 때문에 자기의 경제적 목적 달성이라고 하자.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목숨은 하나이고, 거기서 나갈 군인들은 자신들이 참전국이란 사실이지 흰둥이와 검둥이가 나눈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종차별에 딸려오는 불만은 결국 전쟁 내에서 타국과의 전쟁이 아닌 자국과의 전쟁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피해자였다. 죽게 될 경우 자신의 인생은 모조리 끝이고, 돌아오더라도 팔과 다리를 잃게 되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물론 이념적 진리 앞에 희생은 피할 수 없는 딜레마나, 그 딜레마 자체가 필요 없을 수 있는데, 있게 한 점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의 나라들은 이런 행위를 만들고 전쟁에서 가난한 국민을 내몰며, 그 덕분으로 특정기업들에게 큰 달러가 들어간다.

 

 

인권을 위해서라는 슬로건, 파시즘을 끝낸다는 슬로건에서 그들은 인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인권으로 위장한 자신들의 권력과 경제적 독점을 차지하고, 파시즘을 처벌한다는 명제 아래 자신들 역시 파시즘이었다. 단지 상대방의 파시즘이 너무나도 강하여 자신들의 파시즘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선전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주의적인 인간상을 말하는데, 차라리 마키아벨리가 아쉬울 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유럽사회가 워낙 전쟁이 많아 군주의 폭력적이나 다소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정치적 공작을 펼쳤으나,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마키아벨리 이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군주론은 다시 적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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