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 두 번째 아이는 사라진다 문학동네 청소년 13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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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속에 묻힌 자들은 영원한 것일까? 영원하지 못할 존재인가? 방미진 작가가 이번에 선보인 괴담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다정하고 좋은 이미지만 보이려다 속으로는 갖은 칼날을 넣어 서로를 향하여 던지려는 존재들 말이다. 이 책에서 평소 내가 느끼던 인간의 추악함 모습이 보인다. 이면에 가린 모습, 혹은 그 가면에 벗겨지는 이상 멈출 수 없는 추악하고 더러움!

 

그렇다. 나는 인간이 상당히 이성적이라고 여기고 있으나, 이성이란 감정 중의 하나이다. 인간에게 가진 냉소적 태도는 이루어 말할 수 없다. 친구가 옆에 있어도 과연 친했는가? 혹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가족관계까지도 말이다. 이 책은 상당히 현실적인 감각이 묻어 나온다. 말투를 보면 온갖 욕설과 비속어가 살짝 맛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학생일 때나, 혹은 지금 거리의 중고등학생을 보나 말이다.

 

단지 여학생의 입이 내가 다닐 적에는 그렇게까지 더럽지 않았다. 지금은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비슷하다. 아마 욕을 하는 것은 남녀평등이 되었는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아이였다. 아니 그 여자아이의 자매와 어머니일까? 딸은 어머니를 닮아간다고 하는데, 이 작품의 최고로 냉소적 소녀인 연두 역시 그렇다. 허황된 꿈과 사치에 빠진 어머니, 그러나 여기에 반해 우뚝하고 침착한 여동생 연지, 연두는 예쁘고 머리도 좋지만,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인물이다.

 

그래도 그런 그녀 곁에 보영이란 소녀는 엉뚱하고 귀여운 아이는 사차원이라 그녀 옆에 있어준다.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모두 떠날 것 같지만, 이 책을 보는 내내 친구 믿어도 돼? 혹은 괴담은 결국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견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서인주라는 소녀, 매우 마르고 볼품없는 외모나 목소리 하나는 천상이었다. 하지만 가난하고, 가난으로 기초도 없었다. 그런 그 소녀가 자살을 했다. 사람이 죽으면 보통 침울하고, 슬퍼하는 것이 맞으나, 그 소녀와 같은 합창부인 지연과 연두는 기뻐했다. 속으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연은 마음 속 한편에 슬픔이 있었고,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아니 인주 생전에 그녀가 부른 아름다운 소리에 자기 스스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주인공 같지 않은 인주, 그녀가 주연이 아닌 밤의 여왕을 부를 때 인주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누군가 주인공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는 계속 희생되고 사라져 가야 하는가?

 

그런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이 동경과 숭고라는 이름 아래 뒤틀리고 다시 또 뒤틀린다. 그리고 미남 학생 치한이의 형인 요한은 그런 뒤틀림에 굴복하여 거기에 맛을 들인 소녀들의 역겨움에 환호를 한다. 미술을 전공한 그가 초현실적인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다. 그 그림은 인간의 추함이고, 비극이고, 고통이다. 예술가인지 천재인지 인간의 삶에서 광학적으로 보았다. 추함이란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를 말이다.

 

이 책은 본문이 240페이지가 되지 않아 금방금방 읽으나, 조금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상황에 일상적인 대화에 환상적인 사건이 발생된다. reality를 추구하는 시간과 공간에 괴담은 분명 reality에 넘어서서 그것을 모순으로 변질시킨다. 사진에 찍혀버린 사람이 죽었고, 그 존재 역시 사람의 기억에 의해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괴담을 지나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 신화라는 제의공간에 누군가의 희생이 곧 과업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그 제의에 대한 대상은 언제나 누구를 가리지 않는다. 가장 그렇게 바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1순위란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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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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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쟁, 분쟁, 내전, 테러 등이 일어나는 절망의 세계와 혹은 작가인 조지 오웰, 도는 조지 오웰의 책을 읽는 나, 그리고 많은 사람들까지 이 문장은 한번 읽어보고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장은 조지 오웰이 스페인 카탈로니아에서 영국으로 귀국하여 자신의 저택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남부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산뜻한 풍경을 지닌 고장일 것이다. 그쪽을 지날 때, 특히 임항 열차의 편안한 쿠션 위에 앉아 평화롭게 배 멀미로부터 회복되고 있을 때는,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일본이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 혁명? 걱정 말라. 내일 아침이면 현관에 우유가 놓여 있을 것이고, 금요일에는 <뉴 스테이츠먼>이 나올 것이다. 산업도시는 멀었다.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 알던 영국 그대로였다. 철로 때문에 파헤친 곳은 야생화로 덮여 있다. 외진 풀밭에서는 윤택한 빛을 발하는 준마들이 풀을 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흐르는 냇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느릅나무의 녹색 감슴, 오두막 정원의 참제비고깔. 이윽고 런던 외곽의 드넓고 평화로운 광야, 진창, 같은 강물 위의 짐배, 낯잋은 거리, 크리켓 시합과 왕족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크리켓 투수모자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 제복의 경찰.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이 말을 보면서 영국이 아주 편안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그 속에는 엄청난 위기가 오고 있는데도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곳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에게 영국의 그런 모습조차 과거의 스페인의 일들을 잊을 수 없나 보다. 위 문장 뒤에 나는 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모든 위험과 위기가 없지만, 그런 것조차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지 오웰의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위기감을 느낀다. 카탈로니아의 전쟁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이며, 아픔이다. 아마 1937년은 여러 모로 위기였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극단적인 파시스트들이 창궐했으며, 스페인에도 프랑코라는 독보적인 독재자가 1975년까지 스페인을 좀 먹었다. 그런 주제에 자유라는 이름을 들먹였으나, 사실 그는 스페인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특히 무정부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을 억압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과 같은 또는 가라타니 고진(일본 문화평론가 및 사상가)<근대문학의 종언>처럼 이씨 조선의 연장이라고 불리는 그런 공산주의가 아니라 노동문제를 넘어 왕이 지배하는 봉건사회에 도전하는 자를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일단 프랑스 혁명이든 러시아 혁명이든 모두 폭력적이고, 피를 뿌리지만, 기본적으로 봉건사회라는 기존 사회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계기이다. 그들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과거 봉건사회, 우리나라 같으면 조선시대 사대부 집권사회를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정치체계로서 지금 하면 좋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물론 전부 일반적으로 몰아넣으면 안 되겠지만, 그렇게 여기는 이상 그런 모순에 빠진다는 의미다.

 

당시 1937년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러시아는 소비에트연방이 되어 스탈린이 모든 권력의 중심지고,,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처럼 1936~1938년 사이 스탈린의 폭력정치의 극단화를 보여준다. 파시스트에 대항하던 그들이 오히려 반파시스트에서 친파시스트로 돌아선 것이다. 인간의 모순은 그러하다. 조지 오웰 역시 초반에 스페인에 온 것은 독재자 프랑코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고 파시스트에 저항하기 위해 목숨을 걸면서 영국에서 카탈로니아로 왔다. 처음 올 때는 체계도 없고 혼란스러워 보이나, 그 어디보다 자유스럽고, 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대가는 결국 피의 산물이다. 그가 전장에 갈 때 무기는 무척이나 노후 되어 총이 제대로 발사되어 적을 죽이기보단 총이 폭발하여 병사의 손과 얼굴을 다치게 했다. 총이 저절로 발사되어 사람의 폐를 맞추며, 물자는 부족하여 제일 중요한 문제는 땔감이었다. 추위는 아무리 겹겹이 옷을 입어도 방도가 없다. 부족한 것은 식량, 담배 등이고 늘 위기에 봉착한다. 조지 오웰은 이런 악조건에서 전투를 벌이고, 나중에 목에 총을 맞아 성대가 다치고, 경추신경이 손상되어 오른쪽 손가락이 마비되기 시작하였고, 검지 손가락은 감각이 사라졌다. 물론 그는 목숨을 담보로 하여 파시즘에 대항하였으나, 전장에서 돌아온 카탈로니아는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조지 오웰의 명작인 <동물농장>을 보면 알겠지만, 그것은 분명 소비에트 연방을 우화화 시킨 풍자적 소설이다. 스탈린이란 인물은 나폴레옹이란 사나운 돼지로 묘사하여 착취를 벗어나려던 그들이 더욱 착취당하는 모순이 빠진 점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바로 그런 계기가 바로 카탈로니아를 찬가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점이다. 그는 무정부주의와 통일노동자당에서 활동했으나 이윽고 통일사회당과 경찰세력, 그리고 소비에트연방과 연줄이 보이던 공산당이라 곳은 오히려 파시스트에 대항하기보단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했다.

 

약소한 통일노동자당은 초반에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그 누구와 비교하여 가장 용감하고, 열의가 넘친 자들이었으나, 어느 순간 프랑코와 내연을 가지고 파시스트 5열이라는 오명과 특히 트로츠키주의라는 올가미도 씌워졌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참전했으나,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달리 일국사회주의가 아닌 연속혁명론을 주창했고, 식민지나 과다한 억압에 시달리던 민중을 해방하려 했으나, 도리어 그것이 스탈린에 의해 공격당한다. <동물농장> 소설에서처럼 스노볼이란 작은 돼지는 힘도 없고 죽을 위기에 처해지고, 대항할 능력도 없어도 지상최고의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문제는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최고의 정적,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독일주재 프랑스 대사관이 히틀러에게 찾아가서 트로츠키가 만약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가정을 듣자 히틀러는 큰 소리를 치며 두려워했다. 분명 그는 1927년 러시아에서 추방되기 전에 그것은 1924년 레닌이 죽기 전에 볼셰비키의 영웅이었다. 조지 오웰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트로츠키를 인정했지, 스탈린을 부정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언제나 목숨이 위기에 처해있고, 1938년 인터내셔널을 만들 때에는 스탈린에게 가장 큰 골치였다.

 

그러다보니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의 명령을 듣는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조직으로서 트로츠키는 사실과 무관한 파시스트로 낙인이 찍혔고, 그는 1940년에 죽음을 당한다. 그런 과정에서 스탈린과 그의 일파들에게 동조하지 않은 자들은 트로츠키주의자이고, 모두 파시스트 내부 간첩으로 몰았다. 그렇게 오명을 받은 조지 오웰의 동료들은 스페인 내전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감옥에서 병들고 혹독한 환경 아래 총살로서 생을 마감한다. 그래도 조지 오웰은 스페인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정이 넘치고, 열정이 가득하며, 아가씨들은 머리가 검고 아름다우며 생기가 가득했다.

 

세상의 모든 밝고 아름답고 멋진 미녀들이 모여 있을 것만 같은 카탈로니아는 때로는 최악의 이데올로기의 희생지로 되었다. 본래라면 많은 미녀들이 꽃밭에서 꽃으로 머리띠나 목걸이를 만들며, 올리브향이 가득한 기름으로 맛있는 요리들을 연인과 친구들과 나누는 것이 진정 목표일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자연 속에 너나 할 것이 모두 인간다움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닌 악몽으로 다가와 모든 것을 망쳤다. 생각해보면 1939년 독일의 히틀러와 소비에트연방의 스탈린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파시스트의 최강 나치가 존재하는 군대를 가장 타도해야할 볼셰비키 이였지만, 그들과 조약을 하고 권력을 삼키고, 파시스트의 살인과 폭력을 용인한 아이러니에 빠진다. 그래도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를 찬가를 부르며, 그곳의 스페인과 같이 참전한 외국인들, 심지어 파시스트군에 속해있는 병사까지 생각해준다. 그들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억지로 되었으니 말이다. 인상 깊은 조지 오웰이 목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여 담배가 없어서 누구에게 달라고 하자 옆에 있던 두 명의 남자가 자신의 담배를 모두 주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당시 담배는 매우 귀했고, 밀수품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그 두 명은 배급받은 일주일 분의 담배 전부를 조지 오웰에게 주었다. 정이 많은 그들에게 조지 오웰은 잊을 수 없는 아픔과 슬픔, 기쁨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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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물론 대우학술총서 구간 - 문학/인문(번역) 92
마빈 해리스 지음 / 민음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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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해리스의 서적을 보면서 어느 한 문화인류학자의 생각의 깊이를 보면서 세상에는 이런 일이 있고,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혀 다른 공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렇게나 자세히 또는 필요 이상으로 설명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읽은 도서는 마빈 해리스가 전문적인 학자에서 학술적 영역에 가깝기 보다는 일반교양서적 중에서 다소 난이도가 높지만 그래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도서들을 읽었다.

 

 

지금도 서평을 적고 있는 컴퓨터 책상 옆에 놓인 작은 서재에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작은인간> 이렇게 5권의 서적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마빈 해리스가 학자로서 제대로 고찰하거나 반박하거나 토론한 도서를 읽어본 적은 없었다. 분명 위의 5권의 도서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내용으로 봐서는 충분한 가치가 있고, 현재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 대한 깊은 사고와 통찰을 요구하게 되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여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진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작 그의 학문적 깊은 영역에 다가가지 못함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게 된 도서가 문화유물론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나는 그가 문화유물론적인 가치관으로 통해 인류학을 연구하므로 다소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를 지닌 학자로 알았다. 분명히 관념론이나 합리주의 내지 계몽주의로 무장한 서구사회의 사고에서 마르크스의 등장은 엄청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념으로 통해 물질을 만들어내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물질이 인간의 사회를 변화한다는 유물론적인 가치관을 인류학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솔직한 내 의견으로 전한다면 인류학의 주요 연구대상은 현대인보다는 차라리 원시민족 내지 문화의 발원지 및 소멸지에 대한 진상규명을 추구한다.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라는 현대사회의 인간보단 네안데르탈인부터 시작하여 원시인들의 문화에 더 가까운 연구를 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적이고, 그 과학에서 생물학과 진화학적인 관점을 보자면 문화인류학에서 유물론적인 가치관은 필수불가결한 영역일 것이다. 과거 원시인들이 고대그리스 철학자마냥 현학적인 말로 철학을 논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성보다는 오히려 감성과 무의식적인 본능에 가깝게 움직였을 것이다. 생존이란 조건 속에서 가혹한 자연환경과 주변 맹수 및 위협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을 내던졌을 것이다. 지금의 인간에게 불의 발견이란 위대한 문화적 도구로 인해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호우와 폭우를 피하고, 사자와 호랑이로부터 목숨을 지킬 수 있다. 문명을 가진 인간에게 자연이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착취해야할 대상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런 착취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 슬픈 비극이다.

 

 

왜냐고 물어보면 하루 몇 시간 노동으로 통해 며칠을 빈둥빈둥 거리며 즐길 수 있는 원시부족에 비해 우리가 과연 행복한 존재라고 되물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각종 미디어나 매체로 통해 자신의 시간을 즐기고 있으나, 오히려 그것에 의지하고 집착할수록 자신의 존재적인 확실성은 아주 조금씩 무뎌져 간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인간은 결국 자신의 속한 어느 특정 사회나 영역에 맞출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으나, 적어도 정치학적, 사회학적 동물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대다수 사람에게 지겨운 시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인간이 살아가는 역사란 공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학에서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을 모두 소유한 시간적, 공간적 영역일지라도 그것은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이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한 없이 생명이 짧고(어떻게 보면 매우 길수도), 약한 생명체다. 우리에겐 산 위의 거대한 소나무처럼 몇 백 년을 살 능력도 없고, 늙으면 병약해서 빨리 죽게 되고, 도구도 없으면 맹수나 자연재해(호우, 지진, 태풍 등)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인류라고 생각해보자. 인류는 문화를 어디서부터 정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몇 천 년, 몇 만 년, 혹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살던 몇 백만 년 전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살아가던 시기는 짧아도 인류는 영원할 것이다. 인류학을 연구한다는 점은 먼 과거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앞으로 열릴 미래까지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과연 그런 모습인지 문화유물론을 보면서 생각나는 점은 인류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인간들의 가진 여러 가지 모습들을 연구하고 검토하고 비판하여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 가는 점이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을 읽다보니, 이 책이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이란 새로운 대안을 논하는 도서이기도 하나, 그 이전에 이 도서는 마치 사상에 대한 논쟁과 가까웠다.

 

 

2부의 다른 연구전략들을 살펴보자. 마빈 해리스는 분명 활발히 학술활동을 할 시기에 많은 도전과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문화유물론을 추구하는 이유는 문화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보려는 문화과학(文化科學)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추구하는 목표에서는 결코 일방적이고, 비과학적인 사고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비판하는 다른 연구전략은 그런 점들을 명확히 밝혀두고 있었다. 5장부터 11장까지 각 해당되던 사상적인 분류체계를 보면 사회생물학과 생물학적 환원론, 변증법적 유물론, 구조주의, 구조론적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적 관념론과 인지적 관념론, 절충주의, 반계몽주의이다.

 

 

여기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역시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이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넘어오면서 마르크스의 학문, 정치, 사상은 모든 영역에 깊숙하게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석하자면 인류학에서 위대한 공로가 있는 사람 중에서 분명히 마르크스를 뽑아도 무방할 정도다. 왜냐하면 위에도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사회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에 의해 완벽하고 합리주의적인 이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구사회의 가려진 뒷모습에서 이성과 합리란 없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사고에 항상 그런 관념으로 무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메리카 대륙에 출발한 영국인들이 그렇게 인디언을 학살할 이유도 없고, 에스파냐와 같은 무적함대국가들이 중앙 내지 남아메리카 주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할 이유도 없다.

 

 

모두 눈에는 비서구화된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의 존재들은 미개하고 개선할 수 없는 존재이고, 때에 따라서는 노예로 부리고, 때에 따라서는 학살의 즐거움이 되는 도구로 되었다. 인간의 이성이란 그런 것인가? 어차피 이성은 감정 중의 하나라는 말이 있듯이 극단적 배타적인 사고는 매우 위험한 발상을 보여준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간악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왜곡시키며, 그런다고 너무 깊이 들어가서 그것에 대해 객관적, 과학적 사고를 유지하지 못하면 학문적 가치가 없다. 과학적인 사고로 통한 이성이 납득되지 않으면 누구에게 그런 사고의 결과물을 전달할 수 있냐는 말이다.

 

 

물론 다양한 구조와 전략과 대안에서 여러 가지 이론과 해결책들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마빈 해리스는 그런 부분들을 열렬히 비판하고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예전에 나는 이런 책을 본 기억이 있었다. 에드먼드 리치(미국 사회인류학자)의 <레비 스트로스>라는 것을 도서를 말이다. 이 책에서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라는 프랑스 구조주의-인류학을 창시한 학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었다. 분명 <문화유물론>과 <레비 스트로스>에서 위대하고 천재적인 학자의 능력과 업적은 인정했으나, 한편으로 매우 거센 비판도 있었다.

 

 

그의 논리적인 서적이라고 하는 인류학도서에는 치명적 실수가 있으니, 그것은 너무 구조주의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나에게 던졌다. 즉, 실증적인 부분이 너무나도 취약했다. 어떤 부족들에 특성들을 각각 모아 하나로 정리했는데, 사실 현지조사 결과 너무 다른 결과를 보인 것이다. 현지조사는 고증해야하고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밝힐 인류학에서 매우 치명적인 답을 내리기 때문이다. 진실을 그대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시점에서 편의를 위해 그렇게 속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여 이 책은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에 대한 도서이지만, 보는 내내 사상과 철학에 대한 토론에 가까웠다. 따라서 전반적인 부분으로 이해가능해도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하기란 무리였다. 모든 인류학적인 검토시점을 철학과 사상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여 비판 검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비 스트로스에 대한 구조주의 인류학 비판은 단순히 레비 스트로스에 적용될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상 영역까지 이어진 것이라 점이다. 게다가 구조주의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페르디난 드 소쉬르의 언어학과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다.

 

 

마르크스의 영역이 얼마나 위대한지, 구조주의 자체도 마르크스의 뿌리가 있고, 이 책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마르크스의 연구 분야, 구조론적 마르크스주의까지도 포함한다. 구조론적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보면 문화유물론과 비슷하고 어떻게 보면 구조주의와 비슷하다. 둘 다 프랑스가 주된 사상적 학문이란 점에서 보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 몰라도 모두 문화유물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마빈 해리스는 문화유물론에서 마르크스의 업적을 인정한다. 모든 사물을 관념보단 물질이라고 하던 유물론적인 영역이 있었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검토시점을 주었다.

 

 

특히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많이 준 인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담 스미스,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칸트, 스피노자와 같은 인물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뽑자면 헤겔이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논리로 통해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만들었고, 그의 젊은 시절에 청년 헤겔파였다. 그렇지만, 마빈 해리스는 이렇게 정리했다. “헤겔은 마르크스 등 뒤에 탄 원숭이다”라고 말이다. 헤겔이 분명 변증법적 논리로 통해 당시 독일의 쇼펜하우어와 더불어 유명한 철학자고, 당대 쇼펜하우어보다 더 많은 문하생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마빈 해리스는 헤겔의 영향은 그저 부수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르크스의 모든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판도 하였다. 마빈 해리스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인구론을 만든 맬서스의 학문도 받아들였다.

 

 

마르크스는 맬서스의 학문을 경시했지만, 마빈 해리스는 두 가지를 받아드린 것이다. 모든 것은 유물론을 받아들이되, 모든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점이다. 마빈 해리스는 문화인류학자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문화상대주의를 경계했다. 문화상대주의를 모두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에틱(etic)과 에믹(emic)이란 용어로 통해 정확하게 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에틱으로 시작하여 에믹으로 판단하려는 그의 강력한 제안 속에 문화인류학에 대한 과학적 사고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예를 들어보듯이 어느 살인사건에 4인의 시각에 통해 모든 것이 정답이다 혹은 어느 한 가지만 정답이라고 하는 에틱적 사고 즉, 그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보다는 각 입장을 통해 보고 객관적인 상황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에믹적 사고를 추구한다. 결국 모두 정답이거나 어느 것만 정답이라고 하는 것은 정답이라도 정답이 아니다. 그렇지만 에믹이라고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 모두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이고 어떻게 보자는 것일까? 적어도 그런 일방적인 주장에 빠져 논리를 잃지 말자는 부분에서 상당히 공감이 간다.

 

 

문화유물론에서 마빈 해리스가 추구하는 점은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게 마르크스의 존재는 소중해도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다른 부분이다. 아니 마르크스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것은 아니라고 부정하듯이 그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라는 철학자는 <철학에 관하여>란 도서에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정의하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으로서 존재하여도 철학으로 생산한 적은 없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관념론과 유물론이란 두 가지의 영역을 끊임없이 대립해야 한다고 했다.

 

 

오히려 마빈 해리스의 입장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입장이 나에게 강한 느낌이 온다. 과연 그렇구나 하는 느낌은 마빈 해리스는 단지 왜 그렇게 하였을까 라고 하는 과거형이 아니라 왜 그렇게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현재형에 치중하고 있다. 그는 원시민족이 소유한 문화의 파괴와 지구환경 파괴를 매우 염려하며, 비판하였다. <문화유물론>에 등장한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 노암 촘스키까지는 아니어도(이 책에선 그의 업적은 언어학적 영역이다), 내가 처음 접한 다른 도서를 봐도 그가 제시한 문화의 모순과 판독에서 분명히 소비와 착취로 일삼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단순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와 자료로서 보자는 것이다. 마빈 해리스의 서적에서 인도의 암소숭배는 매우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암소숭배는 내가 살아가는 21세기에도 존재한다. 그가 서거했던 2001년 이전인 20세기에 나온 이론인데도 유효하다. 단지 힌두교라기보다는 소가 없으면 농민들이 농업으로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고, 소가 없으면 우유와 버터 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트랙터가 도입될 경우 대자본을 지닌 자에게 모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도시로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현재를 알리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하는 사람들이 도시에 살던 자보단 자신과 그들의 부모들이 시골에서 이주해온 사람이란 점이다.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주거환경,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의 영구화에서 착취라는 것들을 의심과 비판의 대상보단 오히려 경배해야할 관념으로 변했다. 이 책의 6장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이런 문구가 인상 깊다.

 

 

“문화유물론자들은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어떻게, 또 무엇으로 변화할 것인지에 관한 정치적 방침을 공유하고 있지 않지만, 문화유물론은 전략을 추구함으로써 불가피하게 현상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기여한다. 역사시대, 선사시대를 통하여 지배계급은 항상 사회생활을 신비화시킴으로써 실제의 혹은 잠재적 적들에 대한 첫 번째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현대의 정치적 맥락에서는 관념론과 절충주의가 지배계급의 존재자체를 호도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빈곤, 착취, 환경악화의 책임을 착취자로부터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돌린다. 문화유물론은 문화관념론과 절충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 전략들은 왜곡된 비효율적인 분석을 통하여 전쟁, 빈곤, 착취의 원인을 이해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문화유물론은 이와 똑같은 정치적, 과학적 이유 때문에 변증법적 유물론에 반대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미래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는 확신을 조장함으로써 착취에 대항하는 투쟁을 촉진시키려 한다. 그렇지만 같은 의미에서의 확신이 새로운 지배계급의 착취를 영속화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즉 새로운 지배계급이 국가체계의 착취적 측면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끔 호도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정교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준다. 실증주의 인식론을 멸시한다면 변증법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은, 최고로 오도된 분석이다. 문화유물론은 정치적 편의 때문에 사회과학의 경험론적, 조작주의적 성실성을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결코 착취를 없앨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경험론적, 조작주의적 비판이 유지되지 않고는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것이 새로운 형태의 자유인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인가를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 문장은 마치 자크 랑시에르,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와 같은 석학들이 저술한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에서 문제제기한 부분을 이미 제기한 느낌이었다. 문화인류학이란 분야가 결국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과학적 검토까지 가능하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라는 영역에서 자유인가? 노예인가? 라는 담론은 지금 우리 한국이나 또는 세계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의 고민거리다. 문화인류학에서 그 중에서 문화유물론은 단순히 인류를 연구하는 것에 끝을 맺지 않는다. 마빈 해리스가 제기한 인간이 인류이고, 인류가 인간이란 점에서 과거의 모습과 현재에 이어지는 그 과정을 담론하여 우리가 어떤 삶을 찾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추구하는 문화인류학자이다. 본래 그도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처럼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관념으로 갇히기보단 차라리 그 관념을 벗어나 현실적인 문제를 보고 의문을 제기하여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철학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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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건강하다 - 가축사육, 공장과 농장 사이의 딜레마
박상표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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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해리스라는 미국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의 글들을 보면 인간의 문화에서 있어서 가장 생존에 중요한 사항은 바로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존재해야할 영양소 중의 하나이고, 게다가 탄수화물과 지방을 포함하는 에너지원이다. 문제는 단백질과 탄수화물의 에너지양이 약 4/g이고, 지방의 경우 약 9/g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단백질과 지방을 포함하고 있는 식량으로는 당연히 동물이다.

 

 

문제는 단백질과 지방을 동물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효하고, 또한 그것이 얼마나 적정한가라는 선택에서 많은 갈림길이 나누어진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 과거처럼 복날에 무조건 개를 때려잡아 보신탕이나 개소주로 해먹지 않는다. 그 정도로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가 많이 유통되고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먹고 있는 그 고기들에 대한 현실적 안목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인식하고 있는지 되돌아본다면 거의 무지에 가까울 것이다.

 

 

과연 그렇게 여기듯이 환경공학 전공자 입장에서 말하나, 동물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은 의학, 수의학, 보건학, 생물학, 위생학 등과 같은 특정 학문이 아니고서는 일반인들이 알기란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섭취하는 고기와 같은 음식은 일상생활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하나의 생계수단에 등장하는 요소이므로 그것 자체에 대한 의문을 하기란 어렵다. 그런 점은 우리 인간이 물을 마시는 경우 그 물의 수원과 수질처리과정과 이송과정 및 관리현황을 알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일반적인 상식으로서 전문적인 영역의 지식을 이해하거나 인식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특히 겉으로 음식이나 그 이면에 각종 학문과 영역은 안개 속에 가려진 존재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 수 없으며, 게다가 자신의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것마저도 알 수 없다. 그만큼 지식에 대한 한계성은 여실하게 드러나는 점이다. 먹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먹는 것도 그러하나 중간 중간 간식이나 보충으로서 음식을 섭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먹는 음식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현대 사람들에게 내가 아쉬운 점이란 바로 고대 그리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말하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적 필연적 요소를 너무 멀리하거나 혹은 필요 이상 집착하는 것이다.

 

 

일단 인간이 먹고 자고 살아가는 것은 보편타당한 생활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먹을거리가 문제가 있다? 라고 가정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 광우병 파동이 있었지만, 그런다고 하여 모든 사람에게 감염될 확률은 적고, 그것이 비록 뇌질환이란 심각한 질병이라 해도 잠복기를 지니고 있는 이상 우리는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동물은 세포의 구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기 내에는 항상 미생물이 감염될 수 있다.

 

 

문제는 고기의 제작과정과 유통과정에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상태에서 감염된 점이다. 우리 인간의 질병 중에 위장염, 비염, 감기, 근육통과 같은 생리적, 병리적인 질병 내지 근골계 질병이 있듯이 동물 역시 그것을 소유하고 있고, 게다가 인간이 정신적, 심리적 질환 내지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동물 역시 가지고 있다. 만약 그런 질병에 걸리거나 노출된 동물을 먹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실제로 이 책에서 미국에서 살아가던 어느 사람이 햄버거를 먹고 장독소로 인해 사망한 사례를 보여준다.

 

 

그 식품은 어느 특별한 상황에서 벌여진 사건이 아니라 일반 가게의 음식물이고, 그런 음식들은 일반 대중들이 쉽게 간단히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이란 점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들은 다양하나, 사육장에서 제한된 공간에 많은 동물들을 집어넣어 환기와 배수가 제대로 되지 위생적으로 보건적으로 엉망이란 사실과 도축과정에서 안전과 위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전염병이 쉽게 감염되는 점이다. 물론 그 전에 감염되어 다른 세포까지 이전되면 인간들은 무방비로 노출된다.

 

 

우선 노출 1위는 공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와 그 이후는 식품을 사서 먹는 소비자다. 문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정치권력에 대한 로비와 비합법적인 회사운영에서 소비자와 근로자의 권리가 박탈되기 때문이다. 대규모 생산라인에서 이루어지는 도축이기에 위험요소는 상당하다. 게다가 도축 전에 살찌우기 위해 단 몇 개월 만에 과잉소화를 시켜 가축들이 비만과 위장장애를 앓는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인간이 먹는다.

 

 

그런 동물들을 빨리 팔기 위해, 좋은 공간에 스트레스로 공격적으로 보이면 병아리의 뿌리를 자르고, 돼지의 어금니와 꼬리를 빼며, 형광등을 계속 주기적으로 on/off로 하여 암탉이 알을 계속 낳도록 한다. 동물에 대한 무차별적 착취로 인해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소비시장에서 고기가 유통되는 것이다. 마약 가축들에 대해 자연적으로 방목과 적당한 생활여건만 조성되면 큰 문제는 발생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음과 동시에 독점권을 소유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는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예전에 문제가 되던 광우병 쇠고기만 보고 들고 일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다방면적인 질병관리체계에 대해 홍보와 예방체계가 부실한 것도 문제다. 생각을 해보자. 어느 사육장에 닭들이 좁은 곳에서 눈에 눈곱이 끼여 위장병과 근육통에 스트레스로 히스테리 부리는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 돼지우리에 똥과 악취로 가득하여 환기조차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음식을 먹고 싶은가?

 

 

반드시 외국산 물품이든 설령 그것이 미국산이라 하여 먹지 마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과정과 체계, 이면에 가려진 문제점을 그대로 놓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축의 사육에는 많은 양의 식량이 들어가고, 또한 많은 양의 오염물질이 발생한다. 특히나 지구의 온난화에서 메탄가스와 이산화탄소는 온실가스의 주범 중에 하나다. 소는 반추동물이므로 사료를 흡수할 때 위에서 계속 소화를 유지하므로 입에서 트림을 할 때마다 메탄이 발생되므로 매우 유해하다. 지구온난화 피해는 우리도 직접적으로 본다.

 

 

여름철 열대화 현상, 겨울의 온도상승, 태풍과 호우 발생, 가뭄과 해일의 발생은 원래 지구환경시스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지구 대기 순환과정에서 열의 이동이 공기의 이동이기에 결국 자연재해가 닥치는 것이다. 소의 트림이 그렇게 높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소의 트림은 자동차에서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더불어 중요한 대기환경의 관심거리다. 일반인이 보기엔 그저 nonsence comedy와 같은 어이없는 이야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환경과학에서 인정하는 사실 중의 하나다. 물론 대기오염만으로 끝나면 좋을 지도 모른다.

 

 

가축들의 분뇨는 인간보다 더 많고 농도가 강한 것이다. 물론 닭과 같은 가금류는 모르지만, 소와 돼지와 같은 대형동물들은 엄청난 양을 배출한다. 이들의 분뇨에는 과량의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 화학적산소요구량(COD), 부유물질량(SS), 총인(T-P)과 총질소(T-N), 총대장균군과 분원성대장균군과 같은 수질오염물질을 발생시킨다. 최근 환경부와 각 유역환경청, 지방자치단체에서 설정하여 관리 중인 수질오염총량관리에서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과 총인(T-P)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의 하천이 유입되면 그대로 수질오염이 되고, 환경정책기본법과 수질 및 수생태계 보전에 관한 법률에 제시하고 있는 수질환경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상수도계획에서 하루 평균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물의 양은 300~400L. 그 물로 마시고, 세수하고, 빨래하고 요리한다. 물이 오염되는 것은 결국 우리 보건위생학적으로 치명적이란 사실이다. 가축사육장 자체의 환경적인 여건이 부실하면 당연히 후처리에 해당되는 오수 및 폐수처리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실내형이 아닌 반실외형 또는 실외형의 문제는 비가 오거나 다량의 물이 유입될 경우 가축의 분뇨가 그대로 하천으로 방류된다. 만약 대지에 식생군락이 형성될 경우 최소한으로 분뇨와 같은 비점오염원을 저감할 수 있으나, 필요이상으로 유출되면 하천에 유입되고, 그것은 결국 수질오염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약간 다행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조류독감이나 구제역과 같은 질병이 돌면 인간에게도 위협을 가한다.

 

 

예전에 탄저균이나 콜레라 같은 질병 역시 동물이나 인간에게 걸리는 질병이다. 그런 질병이 수 없이 존재하고 있고, 그런 질병에 걸린 동물을 폐사시키는 과정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최근 한국에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수많은 가축들이 땅속에 매몰되었는데, 본래 토양과 지하수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미국에서 하수처리장에 나온 분뇨슬러지를 조사하던 연구원들이 포도상구균에 감염되어 죽는 일이나, 일본 병원하수처리장에 콜레라균이 노출된 일에서도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질병에 걸려 그것도 모자라 땅에 매몰할 경우 더 많은 질병에 노출되는 것이다. 만약 위생매립으로 통해 차수막과 우수유입방지시설, 침출수관리대책이 완벽하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당시 상황에서 위급한 일이라 부실한 관리는 필연적인 일이다. 가축들의 사체에서 발생한 피가 지표면에 노출되거나, 지하수를 사용하는 집안에 피 냄새가 진동하거나, 혹은 하천에 피가 유입되면 감염위험과 수질관리에 큰 문제를 만든다.

 

 

기본적으로 토양 내에는 약 24~30%의 토양간극수 즉 물이 존재한다. 물은 언제나 토양 내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강우 시 상층수를 받아들이고, 기존에 물은 아래로 흘러서 지하수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지하수는 주변에 하천이 존재하면 일정 수위를 같이 유지하기에 하천수와 지하수 내의 이동된다. 그래서 구제역 파동 시 가축들의 매몰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그런 것이다. 실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문제점은 심각한 것이다.

 

 

가축이 건강해야 하고, 가축이 안정해야 하는 점은 우리 인간의 생존과 건강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국내산 고기가격이 급등했고, 일정 수준의 소득을 유지할 수 없으면, 일반가구에서는 소비할 수도 없고, 국내 가축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소득원을 잃어버리는 문제를 안게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소비자와 생산자의 식사와 이윤창출 만의 문제는 아닌 것만 같다. 인간에겐 단백질은 필수적인 영양소고, 안전하지 못한 음식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

 

 

왜 이 글의 첫머리에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의 이름을 거론했냐면, 그의 이론들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그의 이론에 중요사항으로 인간의 문화에서 식량은 피할 수 없는 생존요소이고, 단백질이 공급처인 동물의 서식과 가축화는 인간사회의 필수적인 생존전략이다. <식인과 제왕>이란 도서에선 아즈텍문명과 같은 고대사회국가에서 왜 식인풍습을 했는가에서 인간이 인간을 먹는 행위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식인과 제왕>처럼 그 도시의 문헌과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가축들이 없던 점과 거기는 대부분 옥수수 재배로 통해 식량을 해결했다.

 

 

하지만 고기를 먹기는 어렵고, 결국 최후의 수단은 가장 가까운 단백질 공급처인 인간이다. 물론 20세기의 문화인류학 도서에서도 원시부족이 상대부족과 전쟁을 벌여 포로를 체포하여 바로 죽여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 따지고 보면 잔혹한 일이나 다르게 보면 노예로 삼아 노동시킬 조건이 되지 못한 점이다. 우리 인간들이 식인행위를 좋아하지 않은 점에서 분명 보편적 사고이지만, 단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존이 불가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채식으로 대체하려고 하나 견과류와 같은 식물성단백질은 생산능력이나 수학이 가능한 시기나 양이 너무 적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동물로 통해 보충해야하는 현실적 구조에서 우리의 선택은 안전하고 좋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를 제대로 찾아야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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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위험한 천국 - 미국을 좀먹는 기독교 파시즘의 실체
크리스 헤지스 지음, 정연복 옮김 / 개마고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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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적으면서 필자는 기가 막힐 수가 없었다. 정말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이라면 정말 있어서도 안될 일이며, 게다가 공학도로 이 책에서 보인 문제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에 노암 촘스키, 하워드 진과 같은 미국 양심적 지식인의 책들과 많은 전쟁, 테러, 폭력과 억압의 역사에서 한 줄기 커다란 맥이 보였는데, 그것과 상당히 일치하는 모습이 보여주었다. 초반에 책을 읽었을 때 미국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서적인 <아무 것도 되는게 없어>라는 것이 생각났다.

 

 

 

왜 그런 생각이 날 수밖에 없을까? 작고한 문화인류학자가 1980~1990년 사이의 미국의 현실을 문화인류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내용인데, 먼저 그 학자는 철학을 전공하였고, 문화유물론을 연구한 점에서 기본적으로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학적인 영역을 소유한 학자이다. 그런데 그 책에서 보인 미국의 현실은 암담했다. 생산직종에 근무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서비스업종에 근무하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오히려 고객들의 항의들은 늘어만 가고, 생산직종의 종사자들이 줄어드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효율이 증가했기 때문에 많은 인력이 필요 없어서 해고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효율과 기계의 성능이 올라가면 그만큼 제품의 능력과 안정성을 탁월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더 저하되고 있다. 가면 갈수록 불만투성이와 항의들, 삭막해져가는 사회와 엉뚱한 미치광이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 특히 TV를 보면서 사이비종교에 집착하는 광기어린 사람들은 그야말로 쇼크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에 있던 일이고, 21세기인 지금에도 있는 일이다. 그것은 미국만 아니라 동양도 마찬가지다. 오움진리교라는 일본 안의 사이비종교단체가 저지른 테러행위는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알 수 없는 공포들이 엄습해온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해 줄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점들이 왜 있는가? 라고 자문해본다면 전부 글쎄? 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일본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미국처럼 세계적으로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이 막강한 나라가 왜 오히려 거꾸로 가는 기분인가라는 점이다. 21세기에 와서 문명을 소유한 나라는 미개한 문화를 가진 원시종족과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경제적 혜택을 받고 있으나, 그것은 이상하게도 정신적 안락에는 치중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 가장 황당한 사실이 바로 그런 엉뚱한 인간들이 인간들 머리에 올라가려는 점이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의 노여움을 샀다고 하면서 그 바벨탑을 뒤에서 은밀히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단어다. 이 책에서 왜 자유가 무섭고도 귀중한지 생각하게 되는 의미가 된다. 바벨탑의 올림은 결국 자국의 자유와 타국의 자유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선 밝히는 바처럼 서평을 적고 있는 본인은 공학도이다. 게다가 공학이란 것은 과학의 기초가 되어 응용하는 학문이므로, 구체적이고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자료와 증거가 없다면 절대 인정할 수 없는 무리들에 속한 것이다. 물론 귀납적인 증명에 의해 이루어진 공식과 자료라고 해도 연역적인 이론에 대한 사고와 논리 역시 필요하다. 문제는 그런 귀납적인 영역과 연역적인 영역이 모두 허물어지게 하는 것이 그 파시스트들의 논리다.

 

 

 

예전에 <논증의 탄생>이란 도서에서 논증의 제시에서는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 즉 윤리적인 입장이고, 아마 다음은 로고스 논리적 입장이며, 그 마지막이 파토스 즉 자신만의 입장일 것이다. 모든 인간과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인 대화와 소통은 에토스라는 윤리적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지고, 자신들의 논리 아닌 논리 파토스라는 입장만 내세우면 모든 사람들에게 상당한 혐오감으로 존재해야 하나, 역으로 그것이 하나의 교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왜 인간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보다 비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비이성에 빠지는 것일까?

 

 

 

이 책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나는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전체주의적 면모와 자신의 존재를 귀속하고, 그 귀속감으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배타주의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 여긴다. 과연 그런 것처럼 이 책에서 보이는 기독교의 파시즘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입장을 나누어 보면, 한국에서 보수자유주의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하나, 적어도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인정하며, 특히 자유주의자란 존재적 입장을 확고히 정립하려고 한다. 물론 그 자유라는 단어에 대해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자세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정하여 말이다. 문제는 미국의 기독교 파시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를 인문주의자, 공산주의자, 페미니즘, 문화상대주의 등과 같이 모두 부정한다.

 

 

 

그들에게 자유란 오직 자신의 하나님이란 존재 아래 있었다. 예수님을 내가 떠올려 본다면 결코 나쁜 분이 아니고, 세계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인데, 어느 순간 예수라는 이름은 사랑과 평화, 화합과 친목이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대신하여 살상과 파괴, 약탈과 억압이란 이름으로 뒤틀려버렸다. 오히려 후자의 행동으로 하여금 중세 유럽의 십자군 원장에 떠나는 용사처럼 자신들의 이름을 화려하게 색칠을 한다. 문제는 그 도배를 하는 인간들은 진실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부터 받아들이는 헌금과 정치세력과 결탁하는 권력에 대한 탐함이었다.

 

오죽했으면, 부시 대통령이 당선될 시기에 어느 주에서 부시대통령 지지율이 124%가 나왔다?

 

 

인구 100%에 다 투표해도 124%이고, 공화당 이외 민주당이나 다른 정치적 세력이 있어도 124%이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부시와 더불어 기독교 파시즘은 정치세력과 악덕 자본 세력과의 결탁을 했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물론 자본주의적인 구조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행운이다. 문제는 이들의 행운에는 윤리나 최소한의 논리가 없다는 점이다.

 

 

 

서구의 사상을 보면 문명사회와 자연세계에 대한 이분법적인 논리로 인하 세계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오염이 심해지고, 때에 따라서는 인간의 생존과 연결되는 철저한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에겐 자연 속의 자원은 고갈하지도 않고, 영원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이미 20세기 마지막에 인류의 종말을 고할 수 있는 환경파괴를 부정하고, 대신 휴거라는 말도 되지 않은 종말론적인 관념에 휘말린 것이다. 우리는 있지도 존재하지 않은 망상 속의 관념 안에서 지구문명의 종말이 빠를까? 아니면 전쟁과 테러 그리고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에 따른 지구문명의 종말이 빠를까?

 

 

 

아무리 내가 눈을 이래저래 돌려보아도 답은 보이지 않은 안개 아래 갇힌 듯하다. 문제는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그런 사실을 알아도 대중들에게 속이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신문과 뉴스를 접수한 그들은 오류로 가득한 미디어로서 대중을 현혹한다. 어째 보면 자원을 풍부하게 넘치고 자신들에게 돌아올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내쫓거나 죽인다면 말이다. 미국에서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 역사는 바로 인디언 부족과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추방이다. 인디언을 마치 폭력배 집단으로 간주하는 미국영화에서 그 대상은 이윽고 문화전쟁으로 번졌다.

 

 

 

BLACK-WATER라는 사설용역경비업체가 있다. 문제는 이 업체는 군사적인 장비와 더불어 군인 못지않은 무력을 소유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군법은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상종한다. 이들이 이라크를 침범할 시기에 테러리스트를 잠재우는 게 아니라 단지 이슬람이란 존재가 자신들과 양존에 있어서 안 되는 필요악적인 존재로 부각한 것이다. 대신 이들이 제압한 곳의 자원은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된다. 그렇게 하여 남미와 중동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먹으면 세계 안의 자원은 끝없는 자신들 소유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대신 그런 농담들이 몇 십 년이나 갈까하는 의구심은 버릴 수 없게 한다. 그들은 환경오염을 부정하며, 자신들이 자행하는 폭력과 억압을 신을 대신한 것이라 여긴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성경에 빠진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에 있는 폭력적 단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삼아 헤게모니적인 세상에서 군왕으로서 왕림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왕림하려는 신화적 욕망을 지닌 그들은 정말 자신의 머리로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란 점이다. 이런 그들이 왜 생겼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에게 무서운 단어는 아마 희망일 것이다. 희망에는 뭔가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나 약속을 전해준다. 단지 그 희망 이전에 맹신자들은 자신의 공포심에 눌러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생을 포기하는 비관,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의 표출, 이들의 대부분은 대단히 폭력적인 요소를 가진 것이다.

 

 

 

폭력으로 통해 모든 것을 억압하고 통제하여 결국 자신들의 이익에 합당될 경우 그 모든 것은 용납된다. 물론 자신들의 세계마저도 심각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21세기에 우리는 남녀평등은 기본적인 바탕을 가지고 시작한다. 신체적, 생리적, 구조적 특징에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모두 사회적 참여와 정치적 권리를 소유한 점은 분명하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남성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과 집안에서의 남편에 대한 헌신이다. 물론 그런 점도 중요하나 그 이상은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발언권이나 의사전달권한도 없다. 게다가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무조건적 배타적이다. 본인이라도 동성애가 좋을 리가 없으나, 적어도 그것을 두고 생명과 사회생활에 치명적 위협을 가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동성애자를 몰아넣고, 가부장적인 기독교사회를 구상하고 있다. 인류는 과연 남녀노소 평등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부적당한가? 그래도 그 곳에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것에 치중할 경우 모든 사랑과 진리를 얻는다. 1,000달러를 기부하면 그 이상을 얻을 것이란 이야기에 인간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현금으로 이루어진 헌금수표가 1등인지 아니면 세상에 고통 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인지 난해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런다고 하여 이 책을 적은 저자들이 반기독교적 성향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저자인 크리스 헤지스는 언론인으로서 기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고, 그도 크리스챤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역자인 정연복 편집위원의 경우, 더욱 그렇다. 그는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나오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에 근무하며, 기독교 관련 도서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기독교주의자면서 기독교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와 사상이 아니라 기독교 파시즘 그 자체라는 점이다. 물론 그런 점들은 기독교 이외에도 다른 종교에도 소유하고 있으나, 미국의 기독교 파시즘은 도가 지나쳐 살육과 파괴가 하나의 성전으로 묘사되었다는 웃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과거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란 서적을 봤는데, 이때 그 문장이 여기와 정확히 어울리는 것 같다.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거기에는 소인(小人)의 냄새가 베여 있는 것이다. 대중이 먹고 마시는 곳에서는, 심지어 그들이 숭배하는 곳에서조차 악취가 나곤 한다.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자 한다면 교회에 가서는 안 된다.” 분명 생각해보면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고, 교회를 운영하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런 광신도적인 인간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의 마녀사냥에 등장하는 추악하고 잔인하며, 파시즘에 열광적인 당시 기독교 문화를 생각하면 정말 두렵다는 말 한마디 외에는 없다. 물론 그들은 그런 잔혹한 일에 대해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리의 수호이니깐 말이다. 그러나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는 기분도 없지 않아 느낀다. 공룡은 분명 6,000~7,000 전후의 쥐라기와 백악기 전후로 등장했는데, 공룡의 등장이 7,000년 전에 있었고, 당시 인간과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룡들은 모두 초식동물인데, 이브가 아담과 같이 사과를 먹는 바람에 육식동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 육식동물 가령 티라노사우루스라는 거대하고 난폭한 공룡이 있다고 치자. 그 공룡의 발톱은 5㎝가 넘는데, 그것은 사냥이 아니라 과실을 잘 꺼내기 위한 신체도구라는 점이다.

 

 

 

지구과학과 생물학을 이수하여 진화론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환경공학 전공자의 눈에는 그저 사이비종교의 도그마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말을 믿고 따르는 작자들이 수백만 내지 수천만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창조론에 따르나, 정도라는 것이 있다. 방사능성상 분석으로 이미 밝혀진 마당에 그것을 하나의 진실한 기록이고 역사고 교과서로 삼으려고 한다. 일체의 과학적 비판과 자아모순에 대한 부분은 최고의 적으로 여긴다. 파시즘의 모든 형태는 자신에 대한 부정과 비판의 상실이 필수다. 철학 없는 종교는 그저 신앙심만 내세우는 사이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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