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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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명성을 듣고 있었다. 서구사회의 철학과 사상이 동양으로 유입되면서 현대사상과 철학은 거의 서구사회의 기준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가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동양에서 서구철학에 대한 명백한 판단력과 더불어 세심한 고찰과 정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가라타니 고진일 것이다. 그 정도로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세계는 매우 심오하고 깊다는 점이다.

 

 

단지 문제는 그의 책을 읽으면 보통 고전처럼 읽고 거기에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고전을 가라타니 고진이 해석하여 그것을 새로운 관점과 대안으로 돌려놓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타라니 고진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여지까지 갇혀버린 셈이다. 혹은 가라타니 고진의 책 자체가 어렵고 난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체 자체는 어렵지는 아니하나, 그가 가진 철학과 사유의 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넓고 넓다.

 

 

그가 트랜스크리틱에서 왜 비평의 전환이라는 것을 전하려 했는가? 다소 같은 단어의 사용이 반복적으로 나와 약간의 지루함이 오기도 했으나, 그가 보는 사실은 칸트와 마르크스를 어떻게 다시 해석하는가이다. 칸트가 평생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같은 도시에 80년 동안 눈 감는 그 날까지 머물렀다. 심지어 그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초빙 받아도 가지 않았다. 칸트는 자신이 학문적으로 자유롭기 바란 것이지,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베를린에 갔다면 그의 3대 비판서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류의 고전 중의 고전인 3대 비판서는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칸트의 성과는 인간의 인식과 그 인식으로 통한 실체적 행위이다. 그는 인간을 대함에 있어서 수단이 아닌 항상 목적으로서 대하라고 한다. 그의 사상은 타인이란 제3의 존재를 인정하는 셈이다. 본래 책은 개인적 관점으로 서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객관적인 정보와 과학적인 자료로서 꾸미는 것은 분명하나, 그 모든 것은 개인으로부터 시작이다. 하지만 칸트는 개인의 영역보다는 제3자인 타자로서 보려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칸트의 시도는 항상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방식이다.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신이란 절대적 존재로 인해 유럽은 지동설이란 천체운동을 신봉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동설이어야말로 그의 발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 중요성은 단순히 지구가 돌고 있다와 하늘이 돌고 있다 로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돌고 있음은 과학적인 법칙에서 다루는 1부분이나, 그 부분은 모든 사회와 인간들의 사고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지동설이 아닌 천동설이 옳다고 하는 것은 지구는 절대적이고, 그 절대적인 지구는 결국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뒤받쳐주는 하나의 절대적인 권위라는 점이다. 중세 유럽의 과학적 사고는 그야말로 위험한 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절대적 존재가 만들어 놓은 지구야 말로 절대적이지 않은 변방의 별이라는 사실은 모든 종교의 부정이다.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사회는 대중을 신앙심을 부여함으로 만들어내는 정치적 도구와 같았다.

 

 

근대문학의 종언에서도 가라타니 고진은 현대 사회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을 걸고 있는데, 그것은 종교가 종교적인 부분을 탈피해야 더 종교적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국가와 결탁하고, 자본주의사회구조 이전부터 종교는 자본과 결탁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부분에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를 이은 마르크스가 등장할 때 국가정치 이데올로기에 종교란 그저 착취를 합리적으로 보이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주장한다. 종교는 과거 신화를 단절시키고, 그 신화를 미개한 것으로 보아 파괴했으나, 사실 계몽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계시는 결국 억압이란 새로운 신화로 탈바꿈 한 것처럼, 계몽은 처음부터 없을지도 모른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계몽이란 주변의 영향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깨우치고 나오는 것이야 말로 시작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의 계몽은 분명히 마르크스로 이전된 것은 분명하다. 마르크스는 다소 칸트와 다른 노선을 걸어가나, 그의 행동을 보면 계몽의 현실화를 노력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도서보다는 자본(資本) 즉 das kapital에 대해 고찰해야 하다고 했다.

 

 

그의 과학적이고 사회구조를 밝혀두는 하나의 체계도서야 말로 마르크스의 정신과 사상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현실의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한다. 고전경제학들이 공황을 부정했다고 하나,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는 분명 공황이 존재했었다. 따라서 자본은 그런 공황과 불황, 호황까지 모두 겪은 후에 저술한 것이고, 자본주의 이전인 중상주의 내지 절대왕정의 사회에 대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본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이나 지침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문제를 계속 되돌아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를 알기 위해서는 자본을 읽어야 하는 점이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이길 거부하고 코뮤니스트로 보기를 바랐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하나의 사상적 뿌리로 맺게 된 것은 그의 친구 엥겔스였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장본인이고, 엥겔스는 마르크스 자신부터 체계화하려 하지 않은 마르크스의 학문을 세분화한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지금도 마르크스의 도서들은 많은 학문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은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이었다. 당시 마르크스가 자본을 저술할 때 공업화와 자본주의가 활성화하던 영국이었다. 영국의 경우 세계적인 식민지를 건설하고, 많은 무역이 존재했다. 마르크스가 살던 영국에 이미 고전경제학의 대부인 아담 스미스와 진보적인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리카도의 서적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국의 자본주의는 다른 자본주의와 달랐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국내경제만 보고 있을지 모르나, 사실 진정한 자본주의는 세계자본주의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그런 상황을 잘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다룬 부분에서 빵의 원료인 밀의 유통과정과 더불어 화폐가 중요한 자본주의의 도구로 상승한 원인 역시 무역에 의해서이다. 가령 화폐 G에서 상품 W로 이전되다가 다시 이윤인 G'가 돌아오는 과정에 W의 이동이나 생산에 따라 이윤이 증가된다.

 

 

대신 기존 무역에선 G-W-G' 과정은 무역의 차이로 빚어졌지만, 공업화와 대규모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G-W-G'는 상인인 자본가가 모든 과정을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임노동으로 통해 잉여가치를 낳음으로서 이익을 발생시키는 점이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면할수록 이윤이 돌아오거나 삶의 질이 향상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수준은 낮아지고 피폐해져 가고 있던 것이다. 결국 비밀은 W의 과정에서 12시간 노동시간 중 6시간은 자신의 노동임금으로 대체될 시간이나 나머지 6시간은 착취로 통해 자본가들에게 돌아가는 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런 착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는 일한 만큼 받아가나, 공산주의는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것이다. 잉여가치가 발생할 경우 그만큼 누군가 착취당하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적으로 물자와 에너지, 토지와 인구는 골고루 분포되지 않은 점이다. 게다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쇼비니즘으로 변모되어 그 민족주의가 국가체계의 존립을 안정화한다.

 

 

가령 일본이 관동군을 일으켜서 대동아전쟁을 일으킬 때도, 그 민족주의적 근성은 천황을 위시한 군국주의라는 강력한 파시즘을 탄생했듯이 말이다. 그래서 네이션-스테이트-자본이란 3가지 구조가 단단히 얽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민족주의에 국가적인 통제력 거기에 자본력의 구조적 결합은 인간들을 거기에 갇히게 하기 좋은 함정일 수도 있다. 가령 나폴레옹의 조카로서 프랑스 왕으로 올라간 나폴레옹 3세는 투표로 인해 뽑힌 군주이나, 그 절대적 지지자는 농민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 차르의 경우, 그가 아무리 정치에 대한 점수가 0점이라 거기에 대한 불만으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서 혁명이 성공해도, 결국 러시아 농민의 쇼비니즘적인 요소로 레닌과 트로츠키는 10월 혁명만 성공했을 뿐, 그 이후에는 스탈린에 의해 농락당한다. 물론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가 추방된 후에 트로츠키를 궁지로 넣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외면한 쿨라크를 비롯한 농민 대부분은 모두 재산과 터전을 잃고, 강제노역에 시달린 채 인생을 마감한다.

 

 

생각해보면 국가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참여가 과연 민주적이고,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공화주의냐는 의문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갈림길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 예전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란 책에서 밀은 자신의 철학적 자세에서 국민들의 정치보단 시민들의 의한 정치를 원했는데, 시민이란 단순히 시(市)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일정한 기준 이상이 되는 지식인 내지 엘리트들이다. 물론 그들은 적정한 도덕심과 윤리성을 시험받아야 마땅하나, 사실 그 동안의 역사적인 현실로부터 고찰해보면 대중들의 정치적 권리는 정당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도리어 그들은 자유를 위해 자유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낸 주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재자들은 이것을 잘 이용한다.

 

 

그래서 칸트와 마르크스를 뛰어넘고 싶은 가라타니 고진의 욕망은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임은 분명하다. 그래도 그는 계속 이 책으로서 혹은 계속 그의 사유를 적어감은 어떻게 보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란 현실이 아닌 이상이듯이 이상을 위해 가는 것이 철학자가 아닌가 하는 심정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플라톤에 반대되는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칸트와 마르크스로 통해 현실을 돌아보려는 것은 현재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구조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아가는 것에서 중요하다. 인간 수명이 80살이란 요즘처럼 인간의 생명은 다른 생물에 비해 길기도 하나, 자신의 죽음을 관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죽음과 삶은 언제나 손바닥 위와 아래와 같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고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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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 - 테마미술강의 004
에릭 홉스봄 지음, 양승희 옮김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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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나, 적어도 아방가르드는 이른바 전위예술(前衛藝術)라고 하여 평범하기를 거부하고 색다른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프랑스 예술가 중에 예술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큐비즘 즉 입체주의(立體主義) 회화는 근현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이다. 하지만 미술은 어떻게 보면 그런 입체주의 내지 초현실주의의 등장 자체가 위기와 몰락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과거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을 참고하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논한다. 거기서 발터 벤야민은 과거에 미술을 보면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과거 회화들은 주로 추상화보다는 초상화가 많았다. 대부분 인물이나 사물들의 직접적인 색채, 광도, 채도, 구도 등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미술계의 마술가처럼 불리는 램브란트 야경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램브란트의 야경에서 중앙에 마치 밤 아래 등불이 비추어지는 것처럼 보여 옆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조명이 멀어짐에 따라 광도가 떨어진다. 빛의 세기가 감소하니 주변 인물들은 어두운 화면에 놓여있다. 그 정도로 실사와 흡사한 이미지를 화가들이 그려온 것이다. 초상화를 보면 가끔 그의 잔주름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상기하듯이 강렬한 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매체에 의해 전도된다.

 

본문에서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문학작품들이 책으로 복사되어 여러 사람들이 소유하고 열람하듯이, 사람들의 특징을 살려주는 이른바 사진기가 등장하고, 1번의 촬영으로 여러 번의 현상이 가능하기에 더 이상 화가처럼 계속 그릴 필요는 없다. 아무리 초상화를 여러 번을 그린다고 해도 그 초상화는 화가에 따라 다르고, 같은 화가가 똑같은 그림을 여러 번을 그릴지라도 그 미술 하나의 가치는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기 속의 인물을 보면 모두 같은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화가의 재능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더 진실한 이미지를 채워주는 사진이기에 화가의 임무의 사실주의적으로 그리는 화폭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물론 모두 망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재능은 어느 사회에 대한 일반화적인 문화가 아니라 특수성을 뛰었다고 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19세기 후반 사진은 그나마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적이지 못하고, 단지 일부 특권층에게 한정되어 있으나, 21세기에 넘어온 현대사회에 카메라는 일반 대중들에게 보급되고, 지금은 핸드폰 자체 카메라로도 화질이 좋은 영상을 취득한다. 더 이상의 화가의 임무는 개인의 인물을 그리는 저장의 기능으로서 무효화한 것이다. 그러면 예술적으로 미술은 그냥 있는 그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찾아갈 것이다.

 

재미나는 부분이나 이 책을 읽다보니 과거의 화가였던 히틀러가 화가를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히틀러와 맞먹을 정도로 난폭한 스탈린 역시 화가를 싫어했다. 이들의 폭력과 억압은 결국 화가로 하여금 추상주의 내지 초현실주의로 변모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을 탄생시킨 셈이다. 특히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것은 스페인 프랑코로 인한 내전의 비극을 다루었고, 아비뇽의 여인들 역시 그러하다.

 

예술은 어떻게 보면 그 사회의 이면을 비추어지는 역할을 해야 하나, 다른 점에서는 영상의 실사화로 통해 미술 역시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제일 인상 깊은 장면은 사진기 자체의 편집인 프로몽타주로 통해 사진 위에 다른 사진 이미지를 붙여 큐비즘의 영상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표현력을 심어준다. 사진의 기술이 미술의 입장을 바꾼 것이다.

 

있는 그 모습보다는 그 모습 뒤에 가려진 모습에서 아방가르드는 표현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대중과 거리는 멀어지기 시작한다. 아방가르드는 그렇게 독자적 노선보단 오히려 상품로고나 이미지로서 뛰어난 효과를 보기도 한다.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예술의 신성화보다는 예술에 가진 신격화의 배제가 가까울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았으나, 과거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처럼 현대사회의 spectacle이란 문화적 소비에 따른 대중문화현상들은 우리가 문화라는 것은 정치, 사회, 경제 이변에 깔린 것들을 보여주며, 인간이 문화를 만들기보단 오히려 인간이 문화에 종속함에서 아방가르드는 그런 문화에 종속된 인간을 고발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품 중에 기계문명 사회를 보여주는 전위적인 시도를 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계문명에 젖은 사회에서 아방가르드는 결국 기계문명과 자본주의사회에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앤디 워홀과 같은 팝아트나 또는 레디메이드로서 샘을 보여준 마르셀 뒤샹과 같은 다다이스트가 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는 예술이 죽었다보다는 예술이 너무 많이 퍼져있어서 어느 것이 예술인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의 노력은 매우 효과적이다. 이때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 이때까지 보고 들을 수 없는 모두 표현을 아방가르드에서 보여주고 들려준다.

 

프랑스 최후의 아방가르드라고 불리는 상황주의자 같은 경우, 그들은 전위예술로 통해 일상에 침투되어 있는 정치적인 헤게모니들을 오히려 역으로 돌리려고 했다. 가령 영화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도구나 장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를 도구나 장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는데, 만약 관객들이 표를 반화하면서 항의하는 모습을 일반 사람들은 매우 당혹할 처지나, 상황주의자들은 오히려 기뻐하며 우리가 의도한 것처럼 되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가 추구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보다 아니라 지금과 미래에 초점이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단 과거에 집착하는 점이 크다. 그들의 패배는 아마도 인간의 심리일 수밖에 없다. 물론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을 늘 창조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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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니체
질 들뢰즈 지음, 박찬국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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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철학자는 나에게 정말 알 수 없는 철학자다. 그는 죽기 전에 나의 철학을 알아주려면 100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결국 100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는지 30년 만에 그의 존재를 알아주었다. 니체의 책을 몇 권정도 읽어봐도 딱히 니체가 무엇일까라고 나는 이야기하기가 참 곤란하다. 그의 문체를 보자면 흐르는 유수와 같이 아름답지만, 때로는 이해 불가한 대립의 날이 가득하다. 그런 니체이기에 많은 철학자들이 이끌렸는지 아니라면 그는 형이상학의 배반자로서 플라톤을 거침없이 야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혹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로서 너무나도 높은 이상과 기개를 가진 19세기 독일 철학자 겸 문학자로서 니체가 보는 세상은 너무 협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세상이 협소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이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싶다. 니체는 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비판했다. 특히 선악의 저편에서 보인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혐오감은 지나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주어진 것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 의지와 자기 사랑이다.

 

하지만 정말 자기 사랑에 대한 의지가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진 하나의 선택점인지, 아니라면 그것이 억지로 가면으로 씌워진 거짓으로 꾸민 의지인지는 깊이 생각해볼 이유는 있다. 아마도 니체는 그런 거짓 속에 가두어진 우리의 모습을 독설로서 벗겨버리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뒤편에 역자인 박찬국 교수님의 해설을 보면 상당히 이 책에 대해 그나마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지 모른다. 니체의 주요한 사상은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도전이다. 이분법이란 선과 악이란 큰 틀에서 한 쪽은 선이란 절대적 가치라는 것과 다른 쪽 악은 무조건적 배제라는 점이다.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로 통해 인간은 자신의 양심과 의지에 상관없이 그저 단순히 편을 나누기 식으로 적을 만들어내기 원한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그런 집착적인 모습에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들을 니체가 살기 전이나 죽고 난 뒤의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기나 비슷할 것이다. 이분법의 논리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인간을 좀을 파먹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자에게 의지를 하여 그것에 빠져 나올 수 없는 노예가 된다는 사실이다.

 

자유로운 상상과 이야기가 펼쳐진 그리스 시대의 신화의 신비로움을 찬양하여 만든 니체의 비극의 탄생인 만큼이냐 그것을 부정하고 또는 하나의 원시적인 존재로 만드는 기독교적인 요소에서 누가 더 부정한가라는 의문은 결국 인간 본연의 존재에 대한 의문점을 던져준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포도주의 신이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는 수확의 신, 하지만 그는 인간을 미치게 만들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왜 디오니소스에 매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디오니소스와 반대되는 아폴론적인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예술문화 양식은 조각이나 서사시와 같은 일련의 정해진 틀이 제공된다. 그것에 얽매이고 그것에 정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생명력으로서 가지기 보다는 그저 멈추어진 그 자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체가 바라는 디오니소스는 눈에 영원히 보이지 않고, 귀에 영원히 들리지 않은 음악과 무용을 중시했다. 눈과 귀라는 인간의 정보수용매개체로 통해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영구히 변화하는 존재로서 되기를 바란 것이다. 회귀본능 역시 그런 쪽이다.

 

니체가 바라는 회귀본능은 어느 A라는 지점에서 B로 왔을 때 다시 A로 돌아가는 연어라는 생물이 가진 본능이 아니라 다른 지점 C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회귀본능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끊임없는 회귀를 꿈꿀 수 있는 영원불멸일 것이다. 아니라면 인간은 모든 것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인간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되어 계속 변해야한다는 사실이 영구적인 진리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니체의 철학을 조금씩 보면 불교적인 요소와 조금 일치하는 것이 느껴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여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있음이라는 불교의 경전처럼 니체가 말하는 것은 절대적인 1가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이분법적인 기독교 관념보단 디오니소스의 무형의 존재가 변화무쌍한 것을 추구하기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모든 것은 불변하지 않음에 따른 절대적이지 않음에 따른 각각의 긍정이 따를지도 모른다. 니체가 살던 시절에 프러시아와 프랑스와 전쟁이 있었다. 그는 간호병으로 복무했고, 그 전쟁은 이겼지만, 니체는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승리에 감축에 빠진 독일 사람들을 비판했다.

 

대중이란 모든 존재에 대해 니체는 자신의 의지보단 타인과 사회의 틀에 틀어박힌 것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이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니체는 보면 그가 광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광기에 빠지지 않으면 정상이 될 수 없는 현실적 모순에 그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세상은 이분법적인 기독교 관념이 통하고, 서로를 관용하기보단 적을 몰아 죽이기를 바란다. 물론 모든 기독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폭력마저 미화시키는 현실 속에서 니체가 폭로하는 그 언어는 유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 <들뢰즈의 니체>의 저자인 질 들뢰즈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다. 아마 그는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다른 서적을 보니 그는 죽기 전에 마르크스의 연구도 해보려고 했다고 한다. 니체와 마르크스를 두고 보면 상당히 상이한데 말이다. 들뢰즈가 니체를 파고 들어간 이유는 니체가 주는 삶의 긍정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들뢰즈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가족인 형을 잃었다고 한다. 무서운 전쟁과 가족의 상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가 다른 쪽을 삶의 의지를 주었는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자신으로 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긍정의 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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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역사 - 최초의 아내 이브부터 <인형의 집> 노라까지, 역사 속 아내들의 은밀한 내면 읽기
매릴린 옐롬 지음, 이호영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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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라는 책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저자는 스탠포드 대학 연구소의 부소장으로 연구했다는 점과 그 이전에 불어와 비교문학교수로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데, 슬하에 네 명의 자녀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이후에 이번 재 발간된 <아내의 역사>는 아내라는 존재에 통해 여자와 남자의 관계이다.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한 점은 매릴린 옐롬이란 학자가 탁월한 페미니스트 인문학자라는 확실하나, 여전히 그녀는 서구사회의 발에만 물들여 있다는 점이 한계였다.

 

이 모든 역사적인 관점에서 차례대로 흐름을 간파한 책 내용에서 성경에서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신화부터 그리스로마시대, 중세유럽과 아메리카 대장정기, 격변의 19~20세기를 다룬 점에서 모든 것이 서구중심이란 점이다. 아내의 역사라는 말처럼 아내의 역사는 서구사회의 아내를 다룬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의 아내를 다룬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편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오리엔탈리즘으로 입각한 서구중심문명이라고 해도, 그것에 우리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파생된 문화나 가치나 삶의 양식이 현재 많은 나라에서 통용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그런 문화를 지닌 국가에 대해 적용해보는 것이 좋으며, 그 문명을 따르지 않거나 혹은 일부 들인 나라는 이 책을 보고 왜 그럴까? 라고 판단해 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왜냐하면 문화인류학 관련 도서를 보면 인류의 역사가 남성 중심이 아니라 오히려 모계중심사회도 존재하고, 매릴린 옐롬의 시선과 많이 다른 점도 있다. 일부다처제가 아니라 일처다부제도 확실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마빈 해리스의 서적들을 보자면 그런 문제들을 잘 나타내어 주었고, <아내의 역사> 마지막 끝 부분이 20세기(1950~1999)와 2000년을 담론하기 때문에 마빈 해리스의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와 같이 봐주는 것도 좋다. 과거의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우리 인간은 오늘날의 현실과 미래를 생각해보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이서이다. 그런 관점에서 매릴린 옐롬의 입장에서 여성의 경제적 활동참여는 여성의 인권상승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 및 각종 전쟁으로 남자들이 군에 차출되면서 남은 여성들이 사회 전반의 노동인구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와 다르게 마빈 해리스는 그런 점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19~20세기의 미국 노동자들이 근로하면서 받은 임금이 매우 부족한 것을 주목한다. 결국 남자 1명에서 벌어들인 월급으로 집안 가계운영을 충분히 지원할 수 없기에 여성들이 근로했다는 점이다. 입장과 관점에서 다르나, 여성학자와 문화인류학자가 추구하는 미국경제와 남녀평등문제의 요지는 상당히 다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여성이 사회적인 참여권이 올라가고, 남자와 더불어 그 노동시장과 지식시장에서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이 편협한 사고로만 여성들을 대해 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글을 적는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이란 존재는 언제가 배우자로 삼아야할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나 이 책을 적은 미국에서 남녀 간의 문제나 부부간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숙제이다. 적어도 여자가 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가에서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인간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이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고물가의 행진에서 치열한 현실을 살아야 하는 보통 사람의 모습도 그러하다. <아내의 역사>에서도 고학력을 소유한 여성이 남편이 고학력과 고임금을 소유하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능력 있는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미국 총리 토니 블레어의 아내인 체리 블레어는 노동법률 전문가로 유명한 여성이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아내 힐러리 여사 또한 상당한 능력을 갖춘 정치인이다. 어떻게 하여 여성이 남성과 같이 조우하여 자신의 인생과 동반자의 인생, 그리고 그들이 만든 생명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가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권은 남녀 간의 사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 우정, 대의, 의견 등의 공감대라는 점이다. 물론 성적행위도 중요하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치관은 무시하지 못할 점이다.

 

성적행위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면 어느 아내는 성적행위를 1주일에 5일 해도 행복하다고 하나, 어느 아내는 1번 이하도 행복하다고 한다. 물론 성적행위는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아내의 역사>라는 타이틀만큼 성적행위는 결국 고대부터는 자식을 남기는 여성의 도구화부터 현대에는 포르노적인 libido의 추구이다. 그렇지만, 1명의 여성이 살아가면서 10명의 자식을 남기는 것을 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2년에 1번 임신해서 낳는 그녀들에게 영양실조로 인한 산모사망, 유아들의 사망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임신문제를 아내에게 떠넘기는 남편의 모습에서 과거에 임신한 채로 논밭에 나가 일을 해야만 했던 우리 할머니 세대들의 사연도 은근히 밀려온다.

 

임신을 피할 수 없어 강제로 피임하거나 유산한 경우를 보면서 아직도 오늘 우리의 모습도 본다. 피임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중절수술을 못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낙태는 어떻게 보면 살인에 가까우나, 순간의 실수로 미혼모로 되어버린 어린 소녀나 원하지 않은 강간으로 아이를 만들어야 할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요소다. 가령 미국의 범죄의 하락이 산하제한과 낙태의 효과라는 <괴짜경제학>에서 나온 것처럼, 육아능력의 문제와 태어난 아이에 대한 애정도 결핍은 심각한 범죄양산 재목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은 낙태는 어느 정도 통용화하나, <아내의 역사>에서 보는 낙태의 과정은 참으로 절망스럽기도 하다. 20세기 초반 낙태수술을 받고 난 후에 사망한 여성들이 엄청난 점과 억지로 낳아서 힘든 과정을 보낸 사연도 있다. 확실하게 이때까지의 역사에서 성적인 착취를 여성들에게 주어진 것은 분명하고 여성들에겐 성적인 권리를 없다고 한 것은 분명했다. 이 책에서 그런 점을 조금 다르게 만들려고 했다. 여성에게 성적인 쾌감을 느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만큼 있다는 점이고, 그들에게 성적행위로 통해 남편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간의 신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

 

지금 한국에서 성적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조심스럽다. 과하게 보인다면 바로 변태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높고, 또는 너무 저조하면 호모로 보일 수도 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여성은 성적피해자이며 그렇게 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책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점은 서양에서 추구해온 <아내의 역사>는 투쟁과 노력이 있는 반면 한국의 여성에게 투쟁과 노력이 부족한 점은 분명해 보인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국에서 여자가 일을 하고 남자가 일을 하지 못하는 것과 한국에서 여자가 일을 하고 남자가 일을 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한국에서 남편들이 일자리 없이 집에 있는 것만큼 비참하고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남편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용서와 인정이란 미덕은 없다. 과거에 짊어진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폐단을 없애가는 것은 맞으나, 그 모든 것들이 남편의 권리를 빼앗아 가는 것만 아니다. 여성들은 남성의 권위를 가져가도 책임의 무게는 가져가지 않은 부류가 많다. 그런다고 해서 전혀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 내 지인들의 가정을 보면 부부들 대부분이 맞벌이를 한다. 맞벌이를 하는 이유는 남편의 급료가 부족해서 아내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구조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릴린 옐롬보단 마빈 해리스의 입장에 동조하는 입장이다.

 

그런다고 하여 <아내의 역사>에 공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매릴린 옐롬이란 학자를 보면 그의 이상적인 남성철학자는 19세기 영국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인 모양이다. 나 역시 예전에 <자유론>을 읽으면서 자유와 인권에 대해 생각했지만, 매릴린 옐롬이 존 스튜어트 밀을 페미니스트 철학자를 인정한 점에서 보자면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존 스튜어트 밀은 페미니스트로 보기보단 진정한 자유주의자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남녀평등 이외에 흑인을 노예로 삼아 불법적으로나 혹은 비윤리적으로 대해 주는 것을 매우 부당하게 여겼고, 게다가 사회적 범죄자에게 모든 죗값을 보기보단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못하게 강제적 수단보단 사회적 보장을 주자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면 단순히 남녀 간의 문제만 아니라 노인, 어린이, 청소년, 장애인, 외국인, 범죄자, 동성애자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까지 거론되는 점이다. 물론 이런 문제점에 대해 한국의 인식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의 어머니에게 태어나고, 그 어머니는 아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내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아내로서 살아갈 것인지는 여성의 입장이나, 적어도 내가 말하고픈 것은 남편 역시 남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남편으로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선택지에서 단순히 이 책을 보면 전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개개인의 관계가 더욱 중요한 것을 느낀다.

 

인간이 혼자 독신으로 살아가지 않은 이상 어떻게든 인간은 가족이 필요할 것이다. 그 가족이 인간에서 동물이 되든지, 혹은 입양자 내지 동성애자로 오던지 모르나, 적어도 결혼이란 과정으로 통해 가정은 탄생할 것이다. 딱히 이 책의 삶의 가치로 내세우기란 무리라도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지 좋은 책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과거의 풍습이 지금껏 유지되기 때문이다. 결혼식장에 가면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형식이 중세유럽 기독교문화가 우위를 점할 때부터 있었고, 신부는 처음에 혼자 걷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손을 잡은 후에 남편의 손에 주어진다는 점이다. 곧 여자는 아버지의 재산에서 남편의 재산으로 전달되는 하나의 제의적 과정이 아직도 유효한 점이다. 대신 아버지 입장에서 자기 목숨만큼 귀한 딸이 다른 남자의 손에 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위장이 모두 뒤집힐 정도로 쓰리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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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 최협 교수의 인류학 산책
최협 지음 / 풀빛 / 199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학에 지속적으로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인류학을 알아가는 것만큼 다양한 학문과 연계되지 않은 영역이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인류학자들의 글을 보면서 이들이 단순히 1가지 측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공감을 느낀다. 가령 마빈 해리스란 문화인류학자가 문화유물론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인류학을 거세게 비판하고 있지만, 적어도 레비 스트로스의 업적은 인정하고, 그가 천재적인 학자라는 것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인류학의 영역에서 어떤 학자가 뛰어나고, 어떤 학파가 뛰어나도, 계속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발견을 시도되는 것은 마찬가지고, 그것을 위해서는 과거의 영역과 학문가지 이어가야 한다. 인류학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라고 하여 철학과 사회과학에서 분명히 다루고 있는 학문이다. 하지만 내가 인류학에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사회과학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면서도 여타 사회과학적인 부분보다 광범위하고 순수과학인 자연과학의 영역도 필요한 점이다.

 

 

레비 스토로스가 자신이 인류학자가 되는 점에서 3가지를 거론했다. 19세기 철학자인 카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을 열어간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지질학이었다. 대부분 인문학자들과 책이나 대화를 보면 많은 정신적 성숙과 담론이 오고가나 자연과학적인 영역에서는 항상 괴리감을 느낀다. 현실속의 있는 그대로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통해 볼 수 있겠지만, 공학의 영역에선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나, 그것은 모두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디어라는 가공의 매체뿐만 아니라 실제 우리가 물리·화학·생물학적으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점이다.

 

 

인류학은 바로 그런 부분들에서 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과 차이를 둔다. 물론 철학의 역사에서 순수철학인 즉 형이상학에서 물리학은 하나의 대상이었으나, 그 당시의 과학적 사고가 계속 역사가 흐르면서 틀렸음을 증명하고,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은 당시 물리학의 영역을 불용의 경지로 만들었다. 아무튼 인류학은 그런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학문을 결집한 학문이었다. 보통 인류학 하면 사람들은 미개인들을 연구하거나 오래된 유물들을 발굴하는 사람으로 여기나, 실상은 인류학 내의 부분적인 영역이었다.

 

 

인류학은 고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앞으로 미래까지 넘나본다. 이 책의 저자인 최협이란 인류학자의 눈에 비추어진 현실과 한국의 현실에서 미래를 위한 담론으로 이어진다. 내가 인류학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과거의 일들이 지난 일보단 오늘날에도 유효한 인자이고 처해진 하나의 상황이란 점이다. 바로 그로써 우리가 어떤 현실에 직면한지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하나의 의문점을 던진다. 인류학자들의 서적들을 보면 느끼지만, 그들에겐 항상 철학과 사회과학이 바탕이 되어 있다. 자연과학에서 그중 생물학에서 인간은 특수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구리해부도나 인체해부도 그림과 사진을 보면서 인간 역시 동물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단지 이성 활동을 하기에 뇌가 유달리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고, 화학을 본다면 개구리나 인간에게 강산을 투여하면 모두 단백질이 녹아 사망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하는 점까지 그렇다. 그런다고 하여 개구리가 인간보다 우월하고 동등하다고 볼 수 없지만, 적어도 동물이라는 같은 성질은 내재하고 있다. 게다가 환경공학적으로 보면 공학적인 경제성도 따지겠지만, 환경적인 영역의 눈으로 관찰하면 인간이 자연에 비해 위대하다고 여기고, 무질서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것만큼 한심하고 멍청한 짓들은 없을 것이다.

 

 

결국 오늘날 일어나는 자연재해와 인간 사이의 분쟁은 인간이 지혜롭다고 자부함이 오히려 더 멍청하고 한심한 자들이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지금 책을 읽은 후 서평을 적는 와중에 한여름의 무더위가 나를 무척이나 괴롭힌다. 왜 이렇게도 나를 괴롭게 만들까? 분명 내가 어린 시절에는 이 정도까지 아니었다. 선풍기 미풍으로 설정해도 시원하고 쾌적했다. 잠 잘 때도 선풍기 회전으로 타이머 설정해도 더운 여름의 밤은 새벽의 문을 걸터앉으면 편안한 잠자리였다.

 

 

당연히 이 원인은 지구환경의 파괴이고, 생태계의 부작용이다. 해마다 지구의 온도는 상승하고, 북극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 지구의 온도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실제 북극의 눈들이 녹아도 우리가 직접 볼 수 없음에 별세상으로 보인다(그러나 망할 인간들은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무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가 땀이 등줄기를 가로 지를 정도로 더운 것과 밤에 열대야로 잠 못 든 밤과 도시의 열섬, 해수욕장에 비키니를 입고 즐기려는 여성들에게 아쉽게도 해파리의 위험까지도 다 환경오염이 문제다.

 

 

인류학에서 특히 내가 좋아하는 문화인류학에서는 이런 점들을 잘 다루어준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착취, 억압, 폭력이란 인간의 더러운 행위 3가지를 밝혀주는 것에서 이기적인 인간들은 그 대상을 초반에 자연을 목표로 했다. 결국 자연의 재원이란 바닥이 있고, 그 화살은 다른 인간으로 향한다. 레비 스트로스가 자신이 2차 대전의 악몽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류학자로서 남미탐방을 한 내용을 정리한 <슬픈 열대>에서 서구사회의 이기적인 문화우월의식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 문화마저 파괴시킨 것과 자연에 순응하며 지구에 피해를 주지 않은 그들이 오히려 문명인이라고 떠들면서 지구를 병에 앓게 하는 자보단 훨씬 더 낳을지도 모른다.

 

 

이 서평의 제목이 <부시맨과 레비 스트로스>인 것처럼 저자 역시 원시사회를 야만적 내지 미개적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현대인의 편견이고, “레비 스트로스는 역사의 발전이 인간사회를 더 좋은 상태로 인도할 것이라는 환상을 거부함과 동시에, 실존주의자 같이 가정하는 인간의 자율성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역사적 진보라는 환상 속에서 노예적인 구속을 감수하는 현실로부터 해방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읽으면서 레비 스트로스가 프랑스 지성 중의 하나이며,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와 논쟁을 하여 승리했다는 글을 보았다.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좋으나, 그 이성은 절대적이지 못했다. 그동안 서구사회가 이성이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과 문화의 파괴는 실상 심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학의 영역은 새로운 사상과 철학에 조우하는 점에서 특이하게 보였다.

 

 

구조주의-인류학이라고 해도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주의의 선구자였다. 그런데, 후기구조주의에 포함된 자크 데리다나 리오타르의 이름이 여기서 거론됨도 신기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인류학의 도래도 있다는 점이다. 가령 우리가 보는 서적들은 대부분 전문가가 적고, 그 대상자는 전문가가 아닌 단순히 관찰자다. 그들의 관찰로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동시에 관찰자의 입장을 명확히 들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점이다. 물론 어떻게 보면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관찰자의 입장을 듣고 서술하여 그들의 생각과 입장을 정확히 표명하는 것은 etic이라 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인류학 이전에 정해진 매뉴얼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emic이라 할 것이다.

 

 

인류학 서적에서 보며 생각한 점은 문화적인 상대주의가 되어야 하지 문화상대주의 그 자체는 무리가 있다는 점에서 마빈 해리스의 의견을 동의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문화인류학자의 추가의견처럼 etic의 영역에서 emic으로 발전시키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들의 입장과 의견을 충분히 듣고, 다시 관찰자의 입장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내 생각은 각 인류나 문화의 특징이나 조건이 있는 것을 모두 인정하되,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특별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특별하다는 사실 자체를 보편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학문적 영역이지 현실에서 많이 어려운 모양이다. 문화라는 것은 그 사회의 기후, 지리, 인종, 식생, 수리 등에 따라 달라진다. 예전에 한국에 1988년 올림픽으로 많은 서구사회의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이때 우리가 개고기를 먹는 것을 상당히 혐오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맥도날드와 같은 대형음식점의 경우 쇠고기의 대량사육과 도살이 가능하기에 가격이 저렴한 햄버거를 제공했고, 그것은 곧 값이 저렴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나, 한국은 고기가 당시 귀했던 시기였다. 개고기의 식용은 여름철 무더위를 견딜 단백질의 섭취에서 시작했다.

 

 

한국의 주식이 쌀이란 점이고, 감자나 고구마를 곁들인데도, 이것을 동물들에게 주어 식용 가축을 많이 키울 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상대국가의 문화적 차이나 환경적 차이를 이해하지 않아 그런 국제적 비난이 일어난 점이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달팽이를 요리하거나 혹은 원숭이 머리를 그 자리에 프놈펜으로 갈라 원숭이 뇌를 파먹지 않는다. 말고기를 만들어 개의 먹이로 준다던지 하는 것도 우리로서 생각하지 못할 부분이다. 결국 문화는 상대적인 부분이 있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인 배타주의는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점이다.

 

 

문화라는 것은 인간이 그 사회를 살아가는 하나의 양식이라는 점으로 정치, 경제, 사회, 하다못해 의식주 영역까지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문화를 비교하여 분석하는 문화인류학의 눈으로 보면 한국의 현주소는 지나친 서구화와 동시에 그 서구화로 통한 많은 문제점을 도출하기도 한다. 그런다고 세계화로 통해 교류와 연계는 필수적이다. 그런다고 하여 거기에 모든 것을 맞추기보단 우리가 스스로 존재성을 인지하는 것이 맞다. 한국에서 세계문화교류대회에서 내놓는 것은 서양화 내지 조각이라면 일본에서 자국의 다도문화를 내놓았다.

 

 

국가라는 내이션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내이션이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자국의 트렌드는 존재해야 하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여 보통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무비판적 수용과 적대적인 문화이질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와 나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한 서로간의 문화를 보여줌으로 같이 이해하자는 의미다. 20세기 말에 저술한 이 저자의 글에서 21세기 지금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런 화두를 전해준다. 사라져 가는 한국사회 문화 속에서 우리 문화도 지키는 것이고, 그것 역시 여러 가지 부분들을 보존하게 하는 것임을 알린다. 아마도 너무 획일화된 서구가치의 무분별한 수용이 그렇지 않나 싶으나, 미래의 한국이 한국으로 존재하기 위해 다시금 생각해볼 같이 있음은 분명하다. 문화강국이 되는 점에서 한국의 경제화는 이루었다고 볼 수 있어도 민주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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