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 - 테마미술강의 004
에릭 홉스봄 지음, 양승희 옮김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나, 적어도 아방가르드는 이른바 전위예술(前衛藝術)라고 하여 평범하기를 거부하고 색다른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프랑스 예술가 중에 예술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큐비즘 즉 입체주의(立體主義) 회화는 근현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이다. 하지만 미술은 어떻게 보면 그런 입체주의 내지 초현실주의의 등장 자체가 위기와 몰락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과거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을 참고하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논한다. 거기서 발터 벤야민은 과거에 미술을 보면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과거 회화들은 주로 추상화보다는 초상화가 많았다. 대부분 인물이나 사물들의 직접적인 색채, 광도, 채도, 구도 등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미술계의 마술가처럼 불리는 램브란트 야경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램브란트의 야경에서 중앙에 마치 밤 아래 등불이 비추어지는 것처럼 보여 옆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조명이 멀어짐에 따라 광도가 떨어진다. 빛의 세기가 감소하니 주변 인물들은 어두운 화면에 놓여있다. 그 정도로 실사와 흡사한 이미지를 화가들이 그려온 것이다. 초상화를 보면 가끔 그의 잔주름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상기하듯이 강렬한 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매체에 의해 전도된다.

 

본문에서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문학작품들이 책으로 복사되어 여러 사람들이 소유하고 열람하듯이, 사람들의 특징을 살려주는 이른바 사진기가 등장하고, 1번의 촬영으로 여러 번의 현상이 가능하기에 더 이상 화가처럼 계속 그릴 필요는 없다. 아무리 초상화를 여러 번을 그린다고 해도 그 초상화는 화가에 따라 다르고, 같은 화가가 똑같은 그림을 여러 번을 그릴지라도 그 미술 하나의 가치는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기 속의 인물을 보면 모두 같은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화가의 재능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더 진실한 이미지를 채워주는 사진이기에 화가의 임무의 사실주의적으로 그리는 화폭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물론 모두 망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재능은 어느 사회에 대한 일반화적인 문화가 아니라 특수성을 뛰었다고 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19세기 후반 사진은 그나마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적이지 못하고, 단지 일부 특권층에게 한정되어 있으나, 21세기에 넘어온 현대사회에 카메라는 일반 대중들에게 보급되고, 지금은 핸드폰 자체 카메라로도 화질이 좋은 영상을 취득한다. 더 이상의 화가의 임무는 개인의 인물을 그리는 저장의 기능으로서 무효화한 것이다. 그러면 예술적으로 미술은 그냥 있는 그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찾아갈 것이다.

 

재미나는 부분이나 이 책을 읽다보니 과거의 화가였던 히틀러가 화가를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히틀러와 맞먹을 정도로 난폭한 스탈린 역시 화가를 싫어했다. 이들의 폭력과 억압은 결국 화가로 하여금 추상주의 내지 초현실주의로 변모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을 탄생시킨 셈이다. 특히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것은 스페인 프랑코로 인한 내전의 비극을 다루었고, 아비뇽의 여인들 역시 그러하다.

 

예술은 어떻게 보면 그 사회의 이면을 비추어지는 역할을 해야 하나, 다른 점에서는 영상의 실사화로 통해 미술 역시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제일 인상 깊은 장면은 사진기 자체의 편집인 프로몽타주로 통해 사진 위에 다른 사진 이미지를 붙여 큐비즘의 영상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표현력을 심어준다. 사진의 기술이 미술의 입장을 바꾼 것이다.

 

있는 그 모습보다는 그 모습 뒤에 가려진 모습에서 아방가르드는 표현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대중과 거리는 멀어지기 시작한다. 아방가르드는 그렇게 독자적 노선보단 오히려 상품로고나 이미지로서 뛰어난 효과를 보기도 한다.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예술의 신성화보다는 예술에 가진 신격화의 배제가 가까울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았으나, 과거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처럼 현대사회의 spectacle이란 문화적 소비에 따른 대중문화현상들은 우리가 문화라는 것은 정치, 사회, 경제 이변에 깔린 것들을 보여주며, 인간이 문화를 만들기보단 오히려 인간이 문화에 종속함에서 아방가르드는 그런 문화에 종속된 인간을 고발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품 중에 기계문명 사회를 보여주는 전위적인 시도를 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계문명에 젖은 사회에서 아방가르드는 결국 기계문명과 자본주의사회에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앤디 워홀과 같은 팝아트나 또는 레디메이드로서 샘을 보여준 마르셀 뒤샹과 같은 다다이스트가 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는 예술이 죽었다보다는 예술이 너무 많이 퍼져있어서 어느 것이 예술인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의 노력은 매우 효과적이다. 이때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 이때까지 보고 들을 수 없는 모두 표현을 아방가르드에서 보여주고 들려준다.

 

프랑스 최후의 아방가르드라고 불리는 상황주의자 같은 경우, 그들은 전위예술로 통해 일상에 침투되어 있는 정치적인 헤게모니들을 오히려 역으로 돌리려고 했다. 가령 영화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도구나 장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를 도구나 장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는데, 만약 관객들이 표를 반화하면서 항의하는 모습을 일반 사람들은 매우 당혹할 처지나, 상황주의자들은 오히려 기뻐하며 우리가 의도한 것처럼 되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가 추구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보다 아니라 지금과 미래에 초점이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단 과거에 집착하는 점이 크다. 그들의 패배는 아마도 인간의 심리일 수밖에 없다. 물론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을 늘 창조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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