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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평전 - 지울 수 없는 얼굴, 꿈을 남기고 간 대통령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유시민 전 장관이 집필한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은 것과 관련하여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하여 수많은 서적들이 2009년 5월부터 지금까지 계속 편찬되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막상 다른 도서를 다 읽어보아도 노무현에 대한 서적에서는 유시민의 도서보다 좋은 도서가 없었다. 특히 그의 일대기의 기록에서 수많은 자료와 증언, 그가 남긴 유언까지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막상 생각해보면 노무현에 대한 도서 중에는 주로 일대기와 추모에 대한 글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추모에 대한 글에서는 자기가 직접 옆에 두던 인물부터 주변에 있던 국민들까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점과 죽음을 받아들일망정 정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노제에서 한명숙 전 총리가 故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마지막 이별사로 죽어도 죽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다해 노무현의 육체는 수원의 작은 소각장에서 그 한 맺힌 연기 사이로 올라가고, 남은 분골들은 그가 사랑하던 봉하마을 산자락에 위치한 정토원에 모셔지게 되었다. 아무리 고향으로 내려가고, 고향에서 모든 것을 살아보려고 했다고 하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무덤이었다.
그의 묘자락에는 어느덧 작은 비석이 쌓이고, 해마다 매일매일 많은 조문객들이 그의 비석 아래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한탄하며 돌아간다. 그가 국정을 정말 잘 했던지 혹은 잘 하지 못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허망한 죽음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의 개인적 역사와 우리 한국의 역사,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항상 움직이는 톱니바퀴처럼 쉴 새 없이 맞물려갔다.
인과관계가 마치 어긋나더라도 그 어긋남이 다시 그 자체로서 질서가 되는 비합리적인 시공간 속에서 인과관계라는 것은 정말 인간의 합리적 이성의 존재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인지? 아니라면 비이성의 광기가 마치 하나의 정당화되어버린 광기의 신화가 되어 신성화되었는지는 조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계몽주의라는 이름 아래 정말 우리는 이성적으로 계몽을 했는가? 아니면 한 번 변화를 주었다고 거기서 모든 변화는 처음과 끝도 없이 정해야 하는가?
늘 우리 사회는 그런 시대적인 흐름과 인식의 전환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나아가야 했지만,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것을 논하려고 하는 자에게 동의의 박수보다는 폭력의 주먹만 들어올 뿐이다. 노무현이라는 인간은 바로 그 세계에서 온 몸으로 세상을 맞이한 사나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두고 “바보”라고 한다. 바보, 바보, 바보, 정말 그는 바보 중에 바보였다. 바보는 정말 아무 것도 몰라서 바보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러는 것을 바보라고 한다.
뻔히 알면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잘 알고,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합리적인 이익이 오는지 알면서 그걸 버려두고, 아무런 이익도 명예도 없는 허허벌판에 뛰어든 것이다. 그의 주요 무대는 전국구보다는 부산, 울산과 같은 경상남도 권역이었다. 경남지역이란 점에서 수도권에 비해 더 열악하고, 교육적, 문화적, 사회적 여건도 열악했다. 많은 공장들이 즐비한 시절 그의 활동들은 솔직히 보는 내내 괴로웠다.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하나, 여전히 그렇지 못하고 있다. 부산의 경우 어선이나 무역선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많다. 그 속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업무시간 과대와 노동착취를 항시 부당하게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조선소 안에 제대로 된 시설도 없이 힘들게 노동하는 자들을 보노라면 아직 내가 어린 시절이나 지금 어른이 되어도 별반 차이점은 모르겠다.
물론 임금 정도는 좋아졌을지도 모르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과 아웃소싱은 결국 임금감축과 상위회사에서 헐값이 덤핑으로 후려 깎을 수도 있다. 그나마 지금 4대보험이 어느 정도 기반이 되어있고, 산업재해 역시 예전보다 나은 보장도 들어섰다. 그런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당시는 더욱 치열했다. 노무현이 처음 국회의원이 되어 5공 청문회 스타가 된 것도 있지만, 원진 레이온 사건을 잊을 수 없다.
바보 노무현이란 도서에서 어느 소녀가 자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로서 호소할 때 그의 가슴은 막막했다. 그 소녀의 아버지는 이산화황산에 중독되어 신경계가 파괴된 것이다. 알 수 없는 표정에 눈물을 흘리며 말도 제대로 못한 그 가장의 모습에서 지금까지 희생된 자와 그 희생자들의 가족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과 고뇌로서 버터야 했는가? 이제 15세 소년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중금속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으니,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그저 눈먼 환상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배생활 하던 시절, 강진군 어느 갈밭 농부의 아내가 피 붙은 남근을 들고 관아에 찾아갔다. 이른바 백골난포, 황구첨정이라고 불리는 죽은 시아버지와 아직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아이까지 군포세를 거두는 것으로 그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은 자신이 애를 놓은 것이 죄라며, 칼로 자신의 남근을 베었다. 그런 사연을 안 다산 정약용 선생은 애절양이란 시를 지으며, 그 농민을 애도하고 자신의 무력함에 슬퍼했는데, 이때 이 글귀가 생각났다. “너나 할 것 없이 한 백성인데 어찌하여 후하고 박한 거냐.”
정말 박하고 후한 그 모습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던 조선이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무현은 바로 그런 세상을 조금 바꾸고 싶었다. 자신부터 먼저 못 먹고 못 살고 가난한 점에서 고등학교 판사출신으로 입성하려 했지만, 변호사 전업 이후 부림사건으로 시대에 대한 모순에 자신의 운명을 달리한다. 그의 법조인으로서 우선 상대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열악한 기반은 상대주의적인 요소이고, 그리고 철학이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은 에티카 즉 윤리학이다. 윤리 그것은 무엇인가? 남의 입장을 생각하고 남의 어려움을 알아주고 그것을 개선해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타인에 대한 관용과 대화와 소통으로 풀어가야 하며, 게다가 국민들은 자신의 의지로서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 하지만 국가는 국민의 정부가 아니라 국민의 통치기구로 전락한 점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는 의미를 상실했다. 그는 그런 현실이 싫었고, 자신에게 가장 엄하고, 주변에게도 당부했다. 그러나 피칠 못할 사정으로 누가 생기면, 그 누구라도 먼저 대신하여 앞에 나서서 국민 머리 앞에 머리를 숙이며, 사과를 했고, 누구보다 더 자신의 과오를 밝히고 인정했다.
그것이 자신이 하지 않았던 것마저도 말이다. 그는 평생 그렇게 혼자 세상을 싸워갔다. 독재정권과 군사정권부터 시작하여 같은 민주세력 안에서도 지방사람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으며, 심지어 대통령이 되어도 각 여론과 정치인들에게 외면당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해갔다. 경포대라고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란 말을 마구 상대당과 족벌언론에서 떠들어댔지만, 오히려 그의 집권 시기에 2만 달러 GNI의 돌파와 경상수지 흑자는 지금에 와서도 조작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그를 진실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꼬리를 잡기, 아니면 말고, 한번 흔들기, 조작하기로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은퇴 후에도 시골에서 농사짓던 어느 노인을 가만 두지 못한 채 끊임없이 흔들어 대었다. 아직 사실도 아닌 의혹을 부풀리고, 그 의혹이 마치 사실처럼 족벌신문에 나가고, 망신주기를 재미로 보던 그 간사함으로 그는 몸을 던졌다. 자살을 한 것이다. 자살이란 그냥 단순히 자신이 선택한 죽음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그는 정치적인 활동으로 인한 죽음이기에 정치적 타살이었다.
노무현의 이상은 시민사회 국가의 설립이었다. 市民 어떻게 보면 부산광역시, 서울특별시 등과 같이 살아가는 시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폴리스국가의 그 시민이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고 운영하는 국민 한 사람이 정치적 지도자적 자질을 갖춘 그것이 시민이다. 어떻게 보면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가 사람을 3가지로 보는데, 대중(mass), 선동가(mobs), 시민(people, 책에서는 인민)으로 구분했다.
노무현이 원한 사람들은 바로 시민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존 롤즈라는 미국 정치적 자유주의적으로 글을 적은 철학자의 도서에서도 그런 점을 추구한 점을 알 수 있다. 만민법(The Law of Peoples)이란 도서를 보면 존 롤즈라는 철학자가 독일 관념철학의 대부인 임마누엘 칸트의 구성주의적 자유주의를 추구하여, 만민법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단순히 어느 나라만의 시민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시민이었다.
평화와 공존, 공공선보다는 공동선으로서 좀 더 넓은 시야로 보이기를 바랐다. 상대주의 철학과 시민주의를 꿈꾸는 노무현의 사상을 보면 롤즈의 철학과 많은 연관성이 보인다. 그리고 롤즈의 철학에 영향을 준 칸트 이외에 존 스튜어트 밀을 본다면, 존 스튜어트 밀 역시 공리주의적 자유주의자로서 당시 영국의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 소외된 사람의 인권을 중시하고 개선하려 했다. 노무현의 정치철학은 바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했으며, 최소 수혜자들도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려고 했던 점이 보인다. 최근 롤즈의 도서를 보면서 노무현의 정치적 노선이 바로 그런 인간다움에 대한 철학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현실 속의 인간이 아니라 우리 관념 속에 형이상학적 영역에 놓인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죽어도 죽지 않은 인간이라고 했는가? 혹은 그는 새로운 신화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신화는 억압, 욕망, 해방이란 단어가 이래저래 들어가 있다. 그의 신화는 억압된 현실에서 해방하고 싶은 욕망의 신화일 것이다.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보편적 인권을 누리는 세계를 말이다.
ps 끝으로 이 책의 문제점은 너무 오타와 잘못된 내용이 많이 들어간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