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스쿨 DxD 4 -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인가? 힘인가? 이번 하이스쿨 dxd 4권에서는 그것이 최고의 질문이었다. 효도 잇세이와 함께 하는 적룡은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에 이끌리고, 반대로 백룡의 발리는 힘을 추구하는 사람에 이끌린다. 붉은 용과 하얀 용은 서로 다른 길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효도는 분명히 강력한 힘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바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 자체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시작도 끝이 없는 어느 누군가가 지탱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하렘의 왕으로서 살고자 하나, 막상 하렘의 왕이 되어도 자신은 항상 리아스 그레모리의 “폰”이란 사실을 인정한다. 킹이 인정한 부하가 새로운 이불피스를 받은 후에 그 부하가 킹이 되어도 원래의 킹에게 영원한 폰이란 사실을 잇세이는 인지한다. 결국 모든 것을 여자로서 만족하려는 번뇌에너지를 펼치지만, 정작 중요한 시기에는 오로지 리아스에게만 향한다. 이번 편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아마 학교수업에서 학부모의 참관수업일 것이다.

영어교사가 점토를 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물체를 만들어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잇세이만은 오로지 리아스 그레모리의 형상을 만든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마음에 우러나온다. 그가 가진 리아스에 대한 마음은 매우 음흉하고 야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순수하고도 깨끗하다. 그가 가진 적룡제의 손에서 강력한 힘이 발생하는 것은 결국 리아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다. 사랑이라 하여 아가페적인 인간의 욕심을 떠난 이성적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육체적이나, 그 육체적 사랑에 정신적 존경과 심리적 신뢰라는 바탕을 잇세이는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으로 리아스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에는 존경이란 단어가 강력하기에 리아스의 귀여움을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잇세이가 전형적인 하렘의 주인공이라 보기 어려운 점은 하렘의 주인공은 어느 히로인이든 메인이 정해져 있더라도 결론에서는 항상 우유부단하나, 그는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본능에 충실하다. 단지 그 본능은 리비도라는 성적무의식 에너지보다는 에로스라는 강한 삶의 영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권에서 효도는 억울하게 죽어가면서 리아스의 붉은 머리를 강하게 생각했고, 다시 태어나면 그 후의 침묵은 리아스와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력했다. 결국 그 의지로서 리아스의 권속들이 소환된 것이 아니라 군주인 리아스가 직접 다다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켜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때로는 야한 짓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효도 잇세이의 사는 방법이고, 그 삶은 에로스라는 삶에 대한 욕망이다. 효도는 그것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

세계의 정복은 관심은 없고, 오로지 하렘 왕을 추구하나, 결국에 리아스 앞에서 멈추는 남자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런 욕심이 없으며, 순수하고도 악랄했다. 본래 순수하다는 점은 그만큼 감정의 기복에 휘둘리기 쉬운 점이다. 그는 이때까지 심각한 적의를 레이나레와 피닉스에게 내세웠지만, 기존의 적의와 이번 4권의 적의는 매우 심각했다. 백룡이 적룡의 힘이 약한 숙주에게 붙은 점에서 적룡의 힘을 억지로 깨우려 한 것이다. 그 방법은 간단했다. 잇세이의 소중한 사람을 빼앗는 방법이란 점이다.

백룡의 발리는 잇세이가 보통 인간의 자식이고, 아직 초짜배기 악마라서 힘이 약해 실망한다. 그는 오로지 힘을 추구하고, 힘으로서 모든 것을 찾으려는 파괴주의자다.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은 그에게 존재했다. 이 세상 모든 강자와 붙어보고 만약 그 강자마저 없다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보다 강한 자가 있다면 그는 죽음을 달갑게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잇세이에게 순수한 분노를 안겨준 그가 오히려 잇세이의 강해짐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잇세이는 강해졌다. 비단 아자젤이란 타락천사의 도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보라는 속성을 가진 잇세이의 특징이었다. 바보 같은 그이기에 욕심은 없었고, 단지 자기 일상과 망상을 소중하게 여길 뿐이다. 그리고 그를 더욱 분노의 악마로 만든 것은 백룡의 절반효과이다. 그 절반효과가 그레모리 리아스에게 닿게 되면 혹은 다른 부원에게 닿게 되면 분명 가슴이 절반으로 된다는 점이다. 사실 이번 4권에서 천사 미카엘, 악마 루시파와 레비아탄, 타락천사 아자젤이 모여 회의하는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잇세이는 회의 내용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로지 리아스의 가슴만 보고만 있었다. 회의 내용 중에 90%는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가 나쁜 바보지만, 오로지 리아스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회의 중에 두려움에 힘겨워한 리아스를 위해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는 것이다. 그의 다정한 3권에서 키바의 눈에 비친다. 부스터의 힘을 리아스로 전이하는 순간, 키바의 눈에 2사람은 신뢰로서 대하며, 애정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잇세이가 가진 리아스에 대한 절실함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10초마다 1번 증폭되던 에너지는 백룡의 행동에 격분하여 순식간에 부스터를 수십 번 넘게 외친다.

그의 순수하고도 번뇌로 넘친 에너지는 결국 에로스라는 점이다. 삶의 근원이며, 자신의 모든 것이며, 자기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리아스에게로 말이다. 하지만 3권부터 나오나, 적룡은 잇세이가 리아스를 안아주길 바란다. 역대의 적룡제의 숙주들은 여자들에게 인기는 많았으나, 그 강력한 힘에 의해 빨리 죽었다는 사실이다. 잇세이가 오래 살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적룡제는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잇세이는 그런 기회가 있어도 그러지 못한다. 아마 4권에서 등장한 레이나레에 대한 트라우마일 것이다. 여자 친구인 유마가 사실 타락천사라는 점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인생이 바뀐 것은 분명 바꿀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그렇기에 잇세이는 리아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더욱 지키려 한다. 하지만 리아스의 탄식처럼 가까이 있어도 멀게만 느껴지던 잇세이였다. 잇세이에게 여전히 리아스는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저 먼 곳의 언덕이었다. 사실 그 언덕은 손앞에 있었으나, 잇세이는 여전히 멀게만 느꼈다. 단지 리아스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느끼고 싶다고 말이다. 물론 리아스는 잇세이에게 단순한 키스보단 깊은 키스를 해준다. 잇세이는 그런 리아스의 사랑을 단순히 그레모리 가문은 권속들은 매우 아끼며, 특히 리아스는 그 중에서 상냥하고 다정한 군주라는 사실로만 생각한다.

덕분에 아시아와 아케노의 공세에도 여전히 바보 같은 행동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아케노가 리아스에 대해 묻자, 효도는 직설로서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 잇세이이기에 하이스쿨 dxd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바보라는 점에서 자신이 손해 보더라도 친구를 위해 동료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하프 뱀파이어인 개스퍼의 등장에서 잇세이는 인간도 뱀파이어도 아닌 개스퍼를 위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사실 하이스쿨 dxd를 보면 조금 특이한 사항이 리아스의 권속들이 중간적인 인물이다.

먼저 아케노를 보면 타락천사의 딸이나 어머니는 인간이고, 키바는 악마가 되어도 성마검을 휘두르며, 성검을 휘두르는 제노비아, 성모 마리아의 치유력을 가진 아시아, 그리고 적룡제와 하나인 잇세이에서 어느 누구도 완전한 신체를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완전하지 못한 불안정한 존재였다. 그래서 소외라는 그림자를 받아 들이야 했다. 특히 기구한 운명은 개스퍼, 키바, 아시아, 잇세이처럼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죽음이 비합리와 부정의 그리고 부당함이 겹쳤기에 그 불안정은 힘으로 바뀌었다.

겉으로는 번뇌와 야한 글과 일러스트로 보이는 하이스쿨 dxd이나 그 내면에는 인간사회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이분법에 대한 윤리적 회의감을 여실히 보인다. 어느 한 곳에 속하지 못하기에 절망에 빠진 존재, 오직 하나를 보고 왔으나 무참하게 버림받은 존재, 자신이 믿은 신념에 배반당한 존재에서 리아스의 권속들은 우리 일상에서 보이는 타자의 격리를 보여준다. 아케노가 악마의 날개와 타락천사의 날개를 각각 가지고 있어서 잇세이에게 보여준 고백에서 잇세이는 자신을 살해한 타락천사는 미워도, 아케노가 타락천사의 피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케노는 아케노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아케노에 대해 선배로서 좋아한다고 말해준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와 다르거나 자기와 일부 섞인 존재에 대해 상당한 배척을 한다. 특히 반반 정도 섞인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한곳에 발을 들이지 못할 비참함을 안겨준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은 자신의 주변을 사랑하기보단 그 주변의 이외의 존재를 사랑하라고 한다. 여전히 생각하나 하이스쿨 dxd는 니체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음이 많이 느껴진다.

내가 하이스쿨 dxd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목차 뒤에 나온 대사를 주목한다. 이번에는 타락천사 총수인 아자젤이 말한다. “신이 없는 세계는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나? 신이 없는 세계는 쇠퇴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너도 나도, 이렇게 기운차게 살고 있지 않은가? -신이 없다 하여도, 세상은 돌아간다고”, 한 때 신을 사랑했던 아자젤이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옳다. 신이 없었기에 키바는 독가스 아래 죽어갔고, 성녀로 추대된 아시아는 마녀로서 타락천사에게 살해되고, 잇세이는 영문도 모르게 살해되었다. 신이 진정 존재했다면, 이들의 죽음은 부당함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다고 하여 신은 그 쪽 신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4권에서는 악마, 타락천사, 천사는 모두 2분법적인 대립각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서로 싸우지 말자는 것이다. 결국 악마, 타락천사, 천사는 모두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나온 것처럼 ‘악은 처벌이나 종말이 아니라 거짓과의 결합일 따름이다’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이번 4권에서 리아스의 가족들이 나온다. 서젝스는 장난꾸러기 오빠이고, 그의 퀸은 서젝스에게 딴죽을 걸 정도로 센스가 있다. 리아스의 아버지는 딸 바보인 신사적인 아버지다.

결론은 도덕이란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권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윤리라는 영역에서 악마인 잇세이의 모습에서 그가 나쁜 존재인가? 착한 존재인가? 라는 의문에서 쉽게 답을 내놓을 수 없다. 아시아의 죽음과 키바의 죽음에서 그들의 악마부활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을 나누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갈라지게 되는 구조라는 점이다. 여기서 미카엘의 모습을 보자. 그는 분명 천사의 수장이고, 강력한 힘을 지닌 대천사다. 그러나 악마졸개인 잇세이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심지어 그에게 무기조차 선사한다.

잇세이가 억울하게 죽은 아시아와 키바, 그리고 신앙심을 유지하는 아시아와 제노비아에 대해 항의하는 모습에서 미카엘은 분노하기보단 오히려 키바의 감정을 안아준다. 시스템의 오류와 신이 준 인간에 준 선물인 세이크리드 기어조차 사과한다. 악마가 되어도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리는 아시아와 제노비아, 그녀들은 악마지만 신과 천사를 존경하고 여전히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선악의 경계도 없이 악마와 천사를 떠나, 진정 이 장면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내용인가? 여전히 잇세이의 번뇌를 유도하는 코믹함은 좋으나, 그 코믹함에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환상이란 공간 속에 인간의 숨은 합리적이지도 않은 이성에 대한 도전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똑똑한 바보들 - 틀린데 옳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의 심리학
크리스 무니 지음, 이지연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조중동이 소개한 게 웃기네, 폭스뉴스와 동급 아래에 있는 애들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똑똑한 바보들 - 틀린데 옳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의 심리학
크리스 무니 지음, 이지연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나라는 사람은 이 책에 비유하자면 환경주의자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단순히 환경주의자라서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라는 전공을 선택했기에 환경주의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상당히 관념적으로 환경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연적인 유물론적 영역에서 환경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지구환경이 오염되는 것이 일반화된 정보보단 전공지식과 과학적 기술정보에 의해 논리성을 부여하는 것이니 그만큼 다를 수밖에 없다.

 

막상 <똑똑한 바보들>이란 도서를 보면서 생각난 도서는 예전에 보았던 <지상의 위험한 천국>이란 서적인데, 그 부제에는 American Fascists라는 명제가 붙어 있었다. 즉 미국의 전체주의자라는 의미이다. 똑똑한 바보들과 지상의 위험한 천국에는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더라도 근본적인 연결고리는 맞물러 있었다. 내가 바로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나는 환경공학을 전공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과학이란 정확한 사실을 그리고 그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진술에서 과학의 부정은 결국 비합리성인 사고관념으로 가득하다는 것만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책에서 그런 비합리적 사고로 무장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심리, 그 속에 무엇이 차이인지 보여준 내용이 있었다. 과거 한국에 이런 일이 있었다. 구미시에 폭우로 인해 흙탕물이 수돗물에서 나온 적이 있었다. 수돗물에서 흙탕물이 발생될 가능성은 몇 가지 있으나, 그 중에 예를 들자면

 

(1) 원수의 지나친 흙탕물이란 조건 - 그러나 정수시설을 가게 되면 모두 스크린과 침사지, 응집조에 의해 제거된다. (2) 정수시설의 문제 - 정수시설의 문제라면 그 정수시설에 나온 물을 공급받는 가구들은 모두 흙탕물이 나와야 하나 나오지 않았고, 어느 지역에 한정되었다. (3) 물의 송수과정에서 파이프나 관로 등이 손상을 받아 흙탕물이 유입될 경우 - 이 경우가 가장 확률이 높은 것으로 기본적으로 송수관로 주변에 하중이나 지형변화 등이 일어날 경우 관의 손상을 받아 주변 흙탕물이 상수로 유입될 가능성이 높다. (4) 각 가구마다 관로가 손상 받을 경우 - 동시다발적으로 흙탕물이 유입되었다면 수만 가구의 수도관이 고장 난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3)번의 문제가 가장 클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문제를 두고 어느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이 적국의 간첩이 한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 사건이 일어날 무렵에 엄청난 폭우와 폭우에 따른 토사유출이 발생했다. 기본적으로 토사유출이 발생하면 지반이 무너지거나 인근지역의 지면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으며, 토사누적으로 인해 지반붕괴 및 균열이 발생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부분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도로 밑에 상수관로 흐르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 매장된 깊이가 매우 깊지 않다. 가끔 도로변에서 상수관로가 터져 아스팔트 위로 올라가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그 발언을 하는 사람과 그 발언을 믿는 사람, 게다가 그 발언을 하는 사람을 그 위치에 올려놓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과학적 사고는 무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런 과학적인 논증으로 통해 어이없는 일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에게 별로 큰 충격이 아니었다. <똑똑한 바보들>에서 보인 그 어이없는 사고들은 거의 충격적이었다. 내가 왜 <지상의 위험한 천국>을 언급했냐면, 기본적으로 환경을 배우면 생물학 내지 생태학을 배우게 된다. 게다가 기상의 기본적 정보, 대기과학, 수질과학, 토양지하수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익히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충격을 받은 사실은 공룡이 등장한 것은 수천만 년 전의 일인데, 그 원원을 아담과 이브가 동산에서 사과를 먹었다는 이유로 공룡이 멸종한 것이다. 공룡화석을 방사선 원소 측정을 해보면 분명 수천만 년 전의 뼈들이다. 그런데도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한국의 보수와 진보에서는 그나마 환경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는 편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미 초월하여 이미 정확한 사실을 부정함으로서 스스로의 pata-physics한 공상소설을 만들고 있다.

 

지구과학에서 온난화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매년 탄산가스와 메탄가스의 증가로 지구의 기온이 높아지고,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해면수위 13m를 상승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극악의 상황은 아니나, 적어도 일부 국가의 토지가 해수면에 의해 잠식당하는 경우도 있고, 해일이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도 증가추세다. 기본적으로 태풍의 경우 적도부근에서 대기운동과 더불어 수증기의 압축에너지로 인해 거대한 폭풍이 발생한다. 이 원인은 지구의 과잉적인 온도증가다.

 

문제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지구온난화에서 예전에 미국이 탄소배출의 저감을 합의하는 교토의정서에 미국이 탈퇴했다는 사실이다. 탄소배출에서 대부분 문명국가에서 에너지원인 화석에너지의 소모 그 자체가 탄산의 배출과 지나친 낙농업의 확장은 소의 메탄가스 발생을 확대시킨 점이다. 당연히 대기업의 입장에서 이윤추구에 방해되는 세계조약에 반대할 입장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있어서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눈을 가리고 귀를 닫고, 억지로 거짓 논리를 펼치는 점이다.

 

그들의 비논리적 태도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국 현재 대통령인 오바마가 미국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이슬람 쪽이라고 믿는 사람이 엄청 많다는 사실과 911테러에서 이라크가 알카에다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있다고 부풀린 사실이다. 심지어 부시도 직접적 발언을 하지 않았는데도, 보수주의자 미디어인 폭스에선 그런 것들은 계속 내보낸 점이다. 당시 테러사건 이후 미국에선 많은 사회적 혼란이 있었고, 그 혼란에 대한 불안 심리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적 행위도 있었다. 쌍둥이 빌딩 2블럭 옆에 이슬람 사원이 건축된다는 사실이 그 쌍둥이 빌딩에 세워지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라고 불리는 미국인들에 의해 엄청난 폭력과 협박에 시달렸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가 가장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적이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국가의 헌법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와 각각의 자율성을 추구한다. 문제는 종교가 너무 깊이 국가와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린 점이다. 진화론을 없애고, 창조론을 믿게 하는 점부터 괴상하고, 인체 DNA구조에서 성체로서 대체할 수 있다는 미신은 비합리적이다. 도저히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들은 마구 생산하고 있다. 게다가 이것에 대한 반박마저 새로운 가설과 논증으로 만들고 있으나, 그런 유사한 문제는 미국 공화당 부시의 주변 정치조력자마저 내치는 상황으로 연결된다.

 

과학적 사고는 무슨 일을 하든 필연적인 부분이나, 그 사고자체가 위협이 되는 것에서 우린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이 책에선 뇌과학으로 통해 분석하고자 했다. 일단 우리 뇌에는 끊임없이 진화를 했기에 용량이 크다는 점이 있지만, 사람마다의 능력과 직업, 취미에 따라 뇌스캔을 해보면 어느 부분이 활성화 되어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결론은 뇌로 통해 저런 정보의 오류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란 가설이다.

 

단적으로 이 책에선 모두 보수주의자를 비과학적이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1960년대 진보주의자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같이 보수주의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 내린다. 단지 그 기준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하는가이다. 공화당의 1960년대에서 경제학적으로 매우 합리적이나, 당시 그 합리성을 제기한 경제학자가 2010년대의 미국 공화당을 보면 환장할 지경이란 것이 문제다. 왜 그런가에서 뇌의 실험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어떤 주제와 텍스트를 볼 때 관심을 가지며 보는 시간이 있다. 어느 글을 보면서 전체적으로 보면서 판단하는가? 아니면 제목과 문장 첫줄만 보고 결정하는가? 개방적인 사고를 하는 진보주의적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보다 같은 글에 대해 더 오래보며, 상반된 내용이라도 다 같이 보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오직 자기입맛에 맞는 정보만 보고, 상세한 내용은 제대로 안보고 결정하는 셈이다. 주변에 보면 우리가 신문을 보는 경우 제목과 본문의 내용이 안 맞는 경우가 있다.

 

‘어느 사람이 어떤 사람을 죽이려고 생각했다’에서 제목에서 보인 정보는 사람을 살해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반면, 본문을 보면 그 내용과 전혀 다른 의도로 가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은 정보를 다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제목의 선전에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한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정보의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적인 프로파간다의 계략에서 똑똑한 바보가 된다. 머리에 그대로 복사기를 상황에 따라 같은 것들을 복사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런 부류가 대다수로 될 경우 하나의 정의 내지 교조주의로 흐르게 된다.

 

사람이 과학적이고 합리적 사고를 위해 뇌가 있으나, 한편으로 가장 비합리적으로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느 책을 인용하면 “파스칼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미친 사람은 미쳤다고 하지 않고, 미치지 않은 사람 역시 미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두 부류 다 어느 곳에는 미친 영역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또한 옳다고 증명하기 위해 미친 행위를 어김없이 보이는 것이 주변에서 보이고 들리는 현실이다.

 

미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미친 짓을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의 행동일 것이다. 물론 합리적이고 이성적 보수주의자들은 대화와 소통으로 풀어간다. 진보주의자들이 개방과 유연성을 중시해도, 그들 역시 극단적 영역이 없지 않아 있기에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보고 듣고 판단하느냐이다. 대통령이 기독교 문화와 갈등중인 이슬람 문화권이라는 발상조차 어이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관계없는 국가면 몰라도 한국인인 나도 아는 사실은 자국민 미국인마저 농락당하고 있고, 그것을 확실하게 여긴다는 것은 결국 이것은 <똑똑한 바보들>의 복제품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현실의 비극을 절실히 보여준다. 이 책이나 나 역시 진보와 보수는 어느 행위나 사고행위에 장단점을 지니고 있기에 합리적인 접점을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시작하려면 먼저 이성적, 과학적, 객관적 사고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 - 국가 채무와 증세 문제, 양극화의 해법과 복지 논쟁까지
변양균 지음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최근 경제가 어렵다 내수가 어렵다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다. 아마 그 말은 우리가 해방 이후 계속된 말이고, 해방이전 일제총독부 시절과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은 언제나 그 가난이란 짊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명해보거나 그 투명에 따라 자신이 마치 이룬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그 착각의 욕망에서 이루어지는 자는 결국 자신이 아닌 타인이라는 점에서 다시금 현실의 자아를 되찾고, 거기에서 비판적 사고보다는 또 다른 욕망의 대상자를 찾아 떠난다.

 

그런 점들은 많은 현실의 왜곡된 모습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가령 재벌비리가 터져도 그 재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적 시야보다는 그저 넘어가주자는 식이다. 만일 그 비리나 부정한 사례가 일반 국민이나 힘없는 서민이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단 일절의 친절과 배려는 있을까? 한 번 나는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신화적인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원리에 대한 구체적 절차구명은 매우 어려울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에 대한 핵심적 요약문은 이미 정해져있다. 나도 거기에 갈 수 있다는 혹은 내 자식들이 거기에 갈 수 있다는 희망고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희망고문 아래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의 벽을 인정하는 것보단 그 벽을 타고 올라가려고 한다. 문제는 벽의 높이는 사람이 일정한 시간을 두고 올라갈 수 있는 높이가 아니라 무한대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환경은 다르나 넘고자 하는 장벽의 높이는 각 개인에게 맞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장벽에 맞출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정된 공간에 높은 장벽에서 누구나 탈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곳에 가기를 열망하고 또 열망한다. 현실에서는 계속 아웃-소싱으로 인원을 줄이고, 정규직보단 비정규직, 국내보단 국외로 나가는 현상 속에서 계속 멈추지 않은 신화의 열기에 식을 줄 모른다. 남은 모르지만 우리 아이는 될 것이고 말이다. 결국 그 아이가 각 개인이 모이고 모이면 수천 내지 수만의 개인이 생길 것이고, 그들은 자기와 같은 얼굴을 가진 자를 두고 싸워야 한다.

 

거울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더니 인상을 찌푸리면서 비난하는 것과 같다. 결국 자기 살만 깎아먹는 경제정신이 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요새 한참 유행이 되어가는 경제민주화라는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올라온 건 2012년이다. 그렇지만 막상 경제민주화는 1980년대도 확연히 존재했다고 한다. 노동착취와 임금저하로 인해 그 자본을 독식하는 경제구조에서 경제민주화란 이미 그때부터 추구해온 가치다.

 

자본주의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력, 즉 돈이다. 문제는 자본의 차이에 따라 그 임금을 받아가는 가장과 식솔들의 삶이 현저하게 차이나는 점이다. 그나마 그때는 3저 현상이라 물가, 금리, 원유 등이 저렴하여 경제성장에 큰 차질이 없었다. 수출주도형 국가라는 점에서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 후 수출하는 한국경제구조로 본다면 당시로는 이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IMF 금융위기와 더불어 원유가격 상승, 원자재 가격 폭등 등은 무역으로 의존하는 한국으로서 심각한 딜레마가 아닐 수가 없었다.

 

IMF만 생각해도 끔찍한 것 같았다.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 고민에 빠지고, 생계에 힘겨워 하던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게다가 기업의 구조조정에서 경제회생에 대한 안전장치마저 위협 당했다. 문제는 그 모든 부담은 모두 평범한 국민들에게 갔다는 점이다. IMF 금융위기 시절 대기업을 비롯한 대형업체들은 IMF 시기에도 국가적으로 지원을 받았고, 이제는 그 위기에서 탈출하자 공룡기업이 되었다.

 

중소기업이 줄어들고, 일자리도 부족하고, 임금도 불안하다. 대기업 위주성장의 한계점이 무엇이냐면, 대기업에서 고용을 늘리는 것이 아닌 점과 많은 서민들은 오히려 중소기업에 많이 고용되어야 할 형편이다. 중소기업이 임금저하와 근무조건이 좋지 않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여 중소기업에서 인력부족, 취업자들은 일자리부족이란 아이러니로서 보인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출주도형 국가란 점에서 사람에 대한 인적자본은 우선시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인적자본을 양성하지 못할 경우 어떻게 될까?

 

한국에서 수출을 주도하기 때문에 기술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기술발전사업을 국가에서 하는 것도 한계점이 있으며, 대기업에서도 할 수 있는 영역도 한계가 있다. 결국 중소기업 연구소로 하여금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키어 신자유주의 세계무역체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기술력의 발전은 결국 대량생산을 얼마나 작은 투자금액으로 대규모의 효과를 보는가이다. 그 효과에서 인력에 대한 임금은 분명 회사 입장에서는 축소해야할 목표일 것이다. 한국의 생산품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구조에서 이제 점차 서비스로 변모하고 있다.

 

생산직이 서비스직으로 이직되면서 같은 업종이 서로 경쟁하여 다시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위기에 빠진다. 게다가 골목상가의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대기업의 상업적 도전은 결국 국민 전체로 하여금 경제구조의 위기로 몰린다. 우선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동의하는 점들은 대기업들이 자본을 순환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시장이 계속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어느 소비자들이 구매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가 조건 되지 않을 시에는 대기업의 상품은 결국 재고품이 되고, 소비는 없이 생산만 하여 상품이 돌지 않을 시 공황이라는 경제적 문제가 발생된다.

 

공황은 결국 기업, 국가, 국민 모두 죽음의 나락에 빠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한국에서 이미 서민층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그 후에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음을 뉴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세계경제체계에 그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국내와 동일하게 할 경우 국내 시장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지금 그런 문제가 실제로 일어났고, 그 문제로 국회와 정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계속 가정 부채는 늘어가고 있다는 통계수치에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 하는가?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 경제민주화에 대한 실천적 과제를 이미 지난 참여정부 시절에 내놓았다는 점이다. 당시 내가 군복무를 하는 시절이었기에 어떻게까지 여론이 매몰차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단지 이 책이나 다른 책에서 보듯이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란 칭호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 2007년 국민소득은 21,000 달러를 넘었고, 지금 그 정권이 이양 된지 5년이 다 되어도 그 수치는 변동이 없다.

 

그러면 경포대에서 대통령은 경제를 포기를 했는가? 아니면 경제를 포지티브를 했는가? 이 책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지라고 했다. 왜 복지인가? 단순히 복지를 지원에 대한 막연한 포퓰리즘이 아니라, 먼 미래를 보고 구조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대안으로 가기를 원했다. 최근 청년실업난에 일자리 부족에서 취업희망자에 대해 일자리를 늘려주는 것이 문제다. 제일 중요한 사항은 지금 1번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적정 수준의 임금에 직업의 지속성이 얼마나 부여되느냐이다.

 

한국의 최고 고질병 중에 하나가 유아출산저하와 노인고령화이다. 일한 사람들은 없어지고, 노인들조차도 노동시간이 늘어간다. 출산 후 육아문제로 영유가 부족해질 경우, 먼 미래 군부대에서 근무할 군인이 부족해 국방전력에도 큰 부담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은 나라에서 가장 투자할 대상은 사람이라는 점이고, 그것은 복지라는 필수불가결적인 선택지이다. 최근 복지에 대하여 반대하던 세력도 복지를 외치고 있다. 그 이유는 최근 물가상승과 더불어 집세가 너무 비싼 이유다. 아파트 1채를 구매하기 위해 부부가 돈을 빌려서 십 년 가까이 빚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남편 혼자 벌어 생계가 가능한 가정경제구조가 이제부터는 부부가 벌어서 같이 해결해야하는 실정이다. 물론 여성의 경제참여도가 여성 사회참여에 대한 점에서 긍정적이나, 그렇게 참여해도 실제 서민경제에 큰 발전이 없는 것 역시 문제라는 점이다. 그런다고 해서 무조건 복지만 우선하란 것이 아니다. 그 복지로 통해 경제성장을 보게 하는 것이 좋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의무교육이 중학교까지이나 학생들이 대학교까지 진학하여 고급기술과 전문지식을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산업체나 연구소, 행정업무에 사용하면 그것 역시 경제적 효과로 볼 수 있다.

 

그들로 하여금 자유경제시장에 대응이 될 수 있는 인재육성은 시장경제에서 보자면 플러스면 플러스지, 결코 마이너스가 아니다. 우수한 인재가 많아야 국가경쟁력이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연구자들의 성과에 의해서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원의 고갈과 에너지의 부족, 환경오염에 대한 심각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는 오로지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그것을 복지적 정책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환경공학 전공자의 눈에 본다면 한국은 도시와 농촌의 개발의 차이로 인해 도시가 점차 과잉 성장했고, 농촌은 사람들이 얼마 살지 않을 정도로 황폐화되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 도시개발을 이루어지고 있는 점에서 더 이상 한국은 개발위주로 산업구조가 아니라 관리유지 산업구조로 갈 수밖에 없다. 생산의 이윤보다는 오히려 관리유지라는 지속적 안정적 이윤이 더 효율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비스 산업을 단순히 옆집 통닭, 피자집, 미용실 같은 것으로 동네방네 꾸밀 수는 없다.

 

일자리를 늘려주면서 같은 직종의 경쟁자들로 인해 피해가 가지 않은 폭 넓은 경제구조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래서 경제학은 경제만 보는 게 아니라 사회, 문화, 체육, 교육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로 봐야 한다. 각 항목마다 경제라는 칭호가 붙지 않아도 경제와 무관하지 않다. 경제를 살린다는 것은 경제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 외의 다른 시야도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것의 기초는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인 소양이다. 흔히 착각하는 것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은 손을 강조하는데, 적어도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려면 사람들의 시장 자유에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정하자. 어느 사람이 빵을 사는 이유는 그 빵집가게가 장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계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는 그 빵집을 사려는 사람처럼 그 빵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여건이 잘 구비되어 있는가이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의 자유에서 윤리성을 강조했지만, 지금의 경제에서 윤리성은 없이 야만이란 폭식만 존재한다.

 

노무현이 추구한 따뜻한 경제학에서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보수진영에선 좌파대통령, 진보진영에선 신자유주의 신봉자라고 했다. 사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보력과 대응력이 안이했다. 이미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이후 세계의 냉전구조가 탈이데올로기로 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자체가 확고한 이데올로기로 되었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어진 것과 다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부른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재벌들에게 모든 이윤이 돌아갈 경우 국가에서는 재벌에게만 세금을 거둘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리버 여행기 - 원전 완역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9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걸리버 여행기는 예전에 소인국에 대한 스토리 부분만 알고 있었다. 그 후에 나오는 대인국과 하늘을 나는 나라, 그리고 말의 나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적은 없었다. 단지 대인국에 가서 모험을 한다는 점까지는 알았다. 그 모험으로 가득한 걸리버 여행기, 그는 과연 세계를 돌았다고 하면서 정말 돌았을까?

 

이 글을 적기 전에 다른 문화평론가의 서평과 더불어 글쓴이 후기를 보고 어림짐작한 부분이 맞음에 나는 조금 놀랐었다. 왜냐하면 걸리버의 최후 모험이자 그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크게 후회하게 만든 말의 나라에서 보인 이야기들이다. 말의 나라에서 걸리버가 인간이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고, 사나운 고릴라처럼 행동하던 야후를 보고, 그와 달리 아주 현명하고 침착하며 모든 것을 이성적인 판단아래 삶을 살아가는 후이늠에게 깊은 존경과 애정을 보여준다.

 

문제는 말의 나라 주민인 후이늠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방식들이 마치 플라톤이 국가정체로 통해 보여준 것과 같은 점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그리스 철학의 시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살아생전에 한 번도 책을 엮은 점이 없었으나,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전해 온다. 대부분의 플라톤의 서적은 개인이 문장을 나열하여 가는 논문식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으로 진행하는 대화라는 점이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 서사의 1번째는 신화라는 비이성적 영역이라면, 대화는 이성적 사고를 추구하는 합리의 추구이다. 문제는 합리적 이성이라고 해도 그 당시의 관습과 문화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도덕이란 것은 통시태적인 보편성이지, 윤리처럼 공시적인 보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최종적인 걸리버의 이상향은 플라톤이 추구하는 군주정이었다.

 

철학의 정치지도자가 이성의 판단 아래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하며, 그 지배는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겉으로 이 책을 봐서는 매우 진보적인 인물로 평가될 수 있을 줄 모르나, 막상 그의 결말에 다다르면 오히려 보수적인 존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해설서의 주해처럼 소인국은 영국을 의미하면서, 땅도 좁은 영국이 해상무역권 제패를 위해 바다로 나가는 점에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

 

해상무역과 봉건사회로 침투하는 전 자본주의적인 경향은 돈과 제물이란 것들이 결국 인간을 욕망덩어리를 만들어버리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참된 군주란 철학적인 만큼 강한 육체가 필요하고, 재산에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재산을 멀리하고 운동을 장려하며 이성적 철학을 목적함으로서 이상적 국가를 바란 것이나, 현실의 인간들에게 모두 부질없는 일임일 아이러니적으로 반영한다.

 

소인국에서 보자면 겉으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나, 실상 인간에 대한 정도 없으며, 자식도 자식이 아닌 하나의 도구로 취급한 점으로 본다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 도덕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겉을 보면 항상 신사처럼 보이나, 그 뒤를 알아보면 온갖 모략과 음모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다. 걸리버가 소인국 황제의 부탁에 따라 다른 소인국을 정복했고, 왕궁에 불이 나서 모두 위기에 빠져 오줌으로 불을 껐는데, 그것이 역죄로 몰린 것이다. 다행히 걸리버가 호의를 베풀어준 대신의 도움으로 몰래 도망칠 수 있으나, 인간에게 가진 이중적 자세는 당시 작가가 보던 영국인 줄 모른다.

 

그리고 대인국에 가면서 사람들이 거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진짜 중요한 것들은 대비하지 않고, 마치 태평천하를 보는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안이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걸리버가 대인국에 도착해 처음 만난 처음 주인 농부는 걸리버에 대해 상당한 노동착취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좋아하는지 사실 국가정체에서는 각 계급별로 신분을 나누더라도 그 하위에 있는 사람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했다.

 

물론 실제 고대그리스 시대의 노예들은 매우 심한 노동과 착취에 시달렸기에 그들의 민주주의는 진실한 민주주의가 아닌 귀족주의에 불과했다. 한국의 역사로 보자면 조선시대 사대부와 같은 것이다. 아마 자신들의 문명수준이 뛰어나지 않으나 단지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에 만족하면서 농민이나 괴롭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초반에 걸리버는 영국이란 나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상대나라의 단점과 더불어 자신의 나라 역시 단점으로 가득한 것을 느낀다. 그 부분은 기술이 발달하나 아무 소용없는 하늘의 나라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골몰히 무엇을 연구한다. 하지만 정작 필요하고 알맞은 물건들은 생산되지 않는다.

 

아마 영국의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인 것처럼 해상무역과 상대국가의 교전이 늘어가는 점이 필요적으로 기술의 발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그런 기술발전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차라리 후이늠들이 거주하는 나라에서 농업과 축산업을 하기를 바란다. 말의 나라에서 보인 이성국가에 너무 눈에 팔렸을까? 걸리버는 말의 나라에서 추방된 후에 사람을 멀리하고, 마치 자신이 말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미친 자로 보나, 걸리버의 눈에는 오히려 세상이 미친 것 같았다. 후이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거짓말이란 단어의 존재성과 그 의미조차 몰랐다. 걸리버의 말이 거짓처럼 들리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농담의 한 부분이었다. 실성한 사람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걸리버는 영국의 집으로 갔으나, 그 영국이란 곳을 무척이나 싫어한 것 같다.

 

가족들과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대화조차 피하며, 심지어 인간냄새를 맡기 싫어 자기 혼자 따로 지내려 한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후이늠 나라의 동족이나 지능이 떨어진 말들과 그 말을 돌보는 마부 정도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추구하는 것은 나쁘다고 하지 않겠지만, 그가 하는 행동들은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볼 수 있다. 이성이란 것 역시 이성적인 행동이 인정되는 부분에서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후이늠이 완벽한 지성을 가진 생물이라고 해도 과학의 발달은 결국 이성의 발달과 맞물린다.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걸리버인가? 아니면 당대 사람인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걸리버가 보는 인간의 이중적 잣대는 지금의 유효하다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