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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원전 완역판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9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걸리버 여행기는 예전에 소인국에 대한 스토리 부분만 알고 있었다. 그 후에 나오는 대인국과 하늘을 나는 나라, 그리고 말의 나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적은 없었다. 단지 대인국에 가서 모험을 한다는 점까지는 알았다. 그 모험으로 가득한 걸리버 여행기, 그는 과연 세계를 돌았다고 하면서 정말 돌았을까?
이 글을 적기 전에 다른 문화평론가의 서평과 더불어 글쓴이 후기를 보고 어림짐작한 부분이 맞음에 나는 조금 놀랐었다. 왜냐하면 걸리버의 최후 모험이자 그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크게 후회하게 만든 말의 나라에서 보인 이야기들이다. 말의 나라에서 걸리버가 인간이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고, 사나운 고릴라처럼 행동하던 야후를 보고, 그와 달리 아주 현명하고 침착하며 모든 것을 이성적인 판단아래 삶을 살아가는 후이늠에게 깊은 존경과 애정을 보여준다.
문제는 말의 나라 주민인 후이늠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방식들이 마치 플라톤이 국가정체로 통해 보여준 것과 같은 점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그리스 철학의 시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살아생전에 한 번도 책을 엮은 점이 없었으나,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전해 온다. 대부분의 플라톤의 서적은 개인이 문장을 나열하여 가는 논문식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으로 진행하는 대화라는 점이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 서사의 1번째는 신화라는 비이성적 영역이라면, 대화는 이성적 사고를 추구하는 합리의 추구이다. 문제는 합리적 이성이라고 해도 그 당시의 관습과 문화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도덕이란 것은 통시태적인 보편성이지, 윤리처럼 공시적인 보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최종적인 걸리버의 이상향은 플라톤이 추구하는 군주정이었다.
철학의 정치지도자가 이성의 판단 아래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하며, 그 지배는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겉으로 이 책을 봐서는 매우 진보적인 인물로 평가될 수 있을 줄 모르나, 막상 그의 결말에 다다르면 오히려 보수적인 존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해설서의 주해처럼 소인국은 영국을 의미하면서, 땅도 좁은 영국이 해상무역권 제패를 위해 바다로 나가는 점에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
해상무역과 봉건사회로 침투하는 전 자본주의적인 경향은 돈과 제물이란 것들이 결국 인간을 욕망덩어리를 만들어버리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참된 군주란 철학적인 만큼 강한 육체가 필요하고, 재산에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재산을 멀리하고 운동을 장려하며 이성적 철학을 목적함으로서 이상적 국가를 바란 것이나, 현실의 인간들에게 모두 부질없는 일임일 아이러니적으로 반영한다.
소인국에서 보자면 겉으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나, 실상 인간에 대한 정도 없으며, 자식도 자식이 아닌 하나의 도구로 취급한 점으로 본다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 도덕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겉을 보면 항상 신사처럼 보이나, 그 뒤를 알아보면 온갖 모략과 음모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다. 걸리버가 소인국 황제의 부탁에 따라 다른 소인국을 정복했고, 왕궁에 불이 나서 모두 위기에 빠져 오줌으로 불을 껐는데, 그것이 역죄로 몰린 것이다. 다행히 걸리버가 호의를 베풀어준 대신의 도움으로 몰래 도망칠 수 있으나, 인간에게 가진 이중적 자세는 당시 작가가 보던 영국인 줄 모른다.
그리고 대인국에 가면서 사람들이 거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진짜 중요한 것들은 대비하지 않고, 마치 태평천하를 보는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안이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걸리버가 대인국에 도착해 처음 만난 처음 주인 농부는 걸리버에 대해 상당한 노동착취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좋아하는지 사실 국가정체에서는 각 계급별로 신분을 나누더라도 그 하위에 있는 사람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했다.
물론 실제 고대그리스 시대의 노예들은 매우 심한 노동과 착취에 시달렸기에 그들의 민주주의는 진실한 민주주의가 아닌 귀족주의에 불과했다. 한국의 역사로 보자면 조선시대 사대부와 같은 것이다. 아마 자신들의 문명수준이 뛰어나지 않으나 단지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에 만족하면서 농민이나 괴롭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초반에 걸리버는 영국이란 나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상대나라의 단점과 더불어 자신의 나라 역시 단점으로 가득한 것을 느낀다. 그 부분은 기술이 발달하나 아무 소용없는 하늘의 나라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골몰히 무엇을 연구한다. 하지만 정작 필요하고 알맞은 물건들은 생산되지 않는다.
아마 영국의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인 것처럼 해상무역과 상대국가의 교전이 늘어가는 점이 필요적으로 기술의 발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그런 기술발전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차라리 후이늠들이 거주하는 나라에서 농업과 축산업을 하기를 바란다. 말의 나라에서 보인 이성국가에 너무 눈에 팔렸을까? 걸리버는 말의 나라에서 추방된 후에 사람을 멀리하고, 마치 자신이 말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미친 자로 보나, 걸리버의 눈에는 오히려 세상이 미친 것 같았다. 후이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거짓말이란 단어의 존재성과 그 의미조차 몰랐다. 걸리버의 말이 거짓처럼 들리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농담의 한 부분이었다. 실성한 사람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걸리버는 영국의 집으로 갔으나, 그 영국이란 곳을 무척이나 싫어한 것 같다.
가족들과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대화조차 피하며, 심지어 인간냄새를 맡기 싫어 자기 혼자 따로 지내려 한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후이늠 나라의 동족이나 지능이 떨어진 말들과 그 말을 돌보는 마부 정도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추구하는 것은 나쁘다고 하지 않겠지만, 그가 하는 행동들은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볼 수 있다. 이성이란 것 역시 이성적인 행동이 인정되는 부분에서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후이늠이 완벽한 지성을 가진 생물이라고 해도 과학의 발달은 결국 이성의 발달과 맞물린다.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걸리버인가? 아니면 당대 사람인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걸리버가 보는 인간의 이중적 잣대는 지금의 유효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