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스쿨 DxD 5 - Novel Engine, 명계합숙의 헬캣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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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5권의 주인공을 봤을 때는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인 효도 잇세이가 아니라 사지에 가까워 보였다. 레이팅게임을 두 번째를 하는 리아스의 팀과 이제 처음 하는 소나의 대결에서 사지의 투혼은 그야말로 절대적 위기였다. 사지와의 대결에서 하렘왕을 꿈꾸는 잇세이는 조금 다른 방향을 틀어야 할 것이다. 사지와 잇세이 둘 다 같은 학년에 폰이고, 전설의 드래곤의 세이크리드 기어가 심어져 있으나, 적룡제인 드레이그의 영혼을 가진 잇세이라도 사지가 담고 있는 마음에 대해 서로 우위를 논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다.

 

사지와 잇세이의 차이는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군주인 소나와 리아스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우위를 둘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지는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어도 항상 소나 옆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고, 잇세이는 언젠가는 리아스에게 벗어나야한다는 운명적인 회의심을 가지고 있다. 리아스의 선홍색보다 진한 붉은 머리카락과 엄청난 크기의 가슴에 매료되어 모든 것은 리아스의 가슴에서 시작되는 잇세이나, 그는 자신의 하렘왕이 되는 것을 필연적으로 본다.

 

군주인 리아스에게 자신은 어울리지 않은 남자라는 착각과 그저 애완동물처럼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변 상황을 보자면 그는 이미 그레모리가문의 작은 나리로 인정 받을 만큼 리아스의 부모와 마왕 서젝스 루시퍼에게 인정받는다. 그러나 생각을 많이 깊이 할 수 없고, 오로지 눈앞에 있는 불을 향하여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그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달려갈 뿐이다. 그래서 잇세이에겐 미래에 대한 계획과 의지보다는 지금의 현실에만 충실하다.

 

그것이 사지와의 차이다. 사지는 잇세이와 달리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자신을 보려고 한 것이다. 리아스의 가슴을 보고 만지고 느끼는 효도에게 군주의 사랑이 질투 날망정 사지는 잇세이에게 자신의 신념을 굳히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적룡의 힘을 가진 잇세이에게 레이팅게임에서 아웃을 시킬 정도로 희생시킨 것이다. 사지는 처음부터 자신이 잇세이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도 바보처럼 덤비고 또 덤비고, 이가 빠지고, 얼굴이 퉁퉁 붓고, 팔이 부러져서 주먹도 날리지 못해도 계속 잇세이에게 덤빈다.

 

마치 이것은 잇세이가 피닉스와 레이팅게임에서 이기지 못해도 리아스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아주 순수하고 강하고 진심어린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 마음만큼 사지도 소나에 대한 애정과 존경, 의지를 담고 있었다. 물론 게임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리아스의 승리나, 힘보단 지혜와 단결, 눈물과 아픔을 각오한 희생한 소나의 팀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적룡제 잇세이의 아웃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절대적 힘을 가진 잇세이는 소나일행에게 넘기지 못한 세계다. 너무 강력한 힘을 빨아들일 경우 몸이 견디지 못해 도마뱀의 혀를 자신의 심장에 연결한 사지, 아케노의 빛의 번개를 역으로 돌릴 만큼 힘도 능력도 없이 탈락한 소나의 비숍의 모습을 보면 그 힘의 우위는 이길 수 없더라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사실 북유럽의 전설의 신인 오딘과 마왕 루시퍼가 몸소 찾아와 사지에게 훈장을 안겨준 모습과 그것에 감동하여 바보처럼 우는 사지, 그런 사지를 보며 냉정한 모습을 유지만 하던 소나의 눈물은 매우 값진 승리이다. 하지만 그들의 패배 속에 얻은 진실한 승리는 매우 이 작품에서 새로운 전개성을 가진다. 이 작품은 분명히 이분법의 해체와 절대적인 선에 대한 저항성을 가진다. 라이트노벨이라도 비록 하렘왕을 추구하는 잇세이라도 왜 악마는 여자 쪽이 많은지, 그리고 천사와 타락천사는 여자보다 남자가 많은 점이다. 그것은 구조적인 특성으로 보면 납득할 것이다.

 

남성↔여성(그래서 악마는 여자가 많고, 천사와 타락천사가 남자가 많은 점은 타락천사로 되는 천사들은 대부분 인간여자를 사랑하여 그들에게 인간이 알 수 없는 지식을 전해주면서 타락한다고 하며, 실제 작품에서 아자젤은 인간여성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천사와 악마의 싸움을 달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천사(타락천사)↔악마, 이성↔감정, 자제↔욕망, 빛↔어둠, 하늘↔어둠 이런 공식이다. 전자는 절대적 영역의 선을 의미하며 후자는 그 선에 대한 대비가 되는 존재다.

 

그러나 이것은 하이스쿨 DXD에서 기독교적인 절대적 관념을 해체한 점에서 위의 논리는 기존 서구사상의 절대적 가치를 전도하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악마라는 리아스를 보면 강인하면서 부드럽고 지성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누군가에게 해를 특별히 입히거나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하게 인간세상에서 다른 이들과 조화를 추구한다. 소나의 경우 학생회장으로서 자신의 학교에 누구든지 그 평화를 방해하면 천사나 타락천사 심지어 자신의 친구인 악마의 군주인 리아스조차 용서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선천적 존재적 실체보단 그 실체가 현재 나아가려는 가치에서 선악의 이분법은 이미 정해진 점이다. 악마를 데몬 daimon(영어로 damon)은 기독교에서 악마라고 하나, 발터 벤야민의 <괴테의 친화력>이란 문학비평도서를 보면 daimon이란 고대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논하기를 인간과 신의 중간지점에 있는 존재라고 한다. 즉 daimon란 결코 나쁜 존재가 아니라 단지 나쁘게 되어야할 존재로 변할 것이다. 생각하면 헤르만 헤세의 소설인 <데미안>에서 막스 데미안의 이름 역시 악마를 연상케 한다. 싱클레어는 절실한 기독교 집안이나, 그에게 데미안은 분명 이질적인 사고를 지녔지만 그에게 이끌리고 그와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

 

분명 될 수 없었지만, 전쟁터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데미안처럼 된 점은 자신이 이미 스스로 새로운 존재적 인식을 했다는 점이다. 니체가 인간의 허무주의 니힐리즘을 극복하기 위해 초인이 되어야 하고, 영원회귀라고 한다. 그렇지만 니체가 말하는 A지점에서 B지점에 온 인간이 다시 회귀한다는 것은 원래의 A가 아니라 A-1, B-1, C-1과 같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점이다. 물론 웃자고 보는 하이스쿨 DXD에서 라이트노벨에서 무슨 철학인지, 그리고 잇세이의 성적번뇌가 심오하냐는 점에서 없다고 할 수 없다.

 

효도의 에로파워는 그야말로 에로스, 삶에 대한 의지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효도의 한계였고, 파워로 사지에게 이겨도 의지로서는 패배한 점이다. 왜 이런 동기가 생겼는가? 명계에 모인 젊은 악마들이 서로 인사를 나눌 때, 마왕 서젝스가 리아스의 이종사촌인 사이라오그에게 목표를 묻자 그는 “저는 마왕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라고 외친다. 강력한 힘을 가졌고, 패기마저 넘치는 그에게 명쾌한 답변이다. 그 뒤에 리아스에게 묻자 “저는 그레모리의 차기당주로 살아가, 레이팅게임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가까운 장래의, 목표입니다.”라고 한다.

 

리아스의 경우 피닉스의 대결에서 패배한 점과 앞으로 상급악마가 되어 그레모리 가문을 이어가는 당주로서 강한 군주로 이어가려고 했다. 다소 사이라오그보다는 멀리 내다보며 자신의 포부를 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리아스의 친구인 소나는 “명계에 레이팅게임 학교를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레이팅게임에서 이제 막 입문한 하급악마나 전생악마들은 공평한 승부를 펼칠 수 없었다. 이미 있다고 해도 그것은 특권층인 고급악마나 상급악마에게 열린 권한이었다. 소나는 이 공간을 모두 공개하려고 했다.

 

명계의 신분제도를 보면 상당히 유럽의 중세를 닮아있다. 마왕, 대왕, 대공 등의 직위와 그리고 레이팅게임의 폰, 나이트, 비숍, 룩, 퀸, 킹과 같은 직급마저 존재한다. 여기는 상하조직체계가 위엄 있게 잡힌 세계였다. 그런데 그 권한을 이제 악마가 된 존재나 힘이 없는 하급악마에게 열자는 것은 귀족사회에서 국한된 권한은 18세기 영국에서 왕이 있으면서도 의회가 존재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입헌군주제, 즉 왕이 있어도 충분히 민주주의를 실시가능한 나라를 만들려는 점이다.

 

그러나 나이가 지긋한 악마 모두는 비웃고, 오로지 침묵을 지키는 소나, 그 옆에서 항의하는 사지만 있다. 사지는 잇세이와 동류다. 바보에다가 하나만 알고, 자신의 군주인 두 공주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높게 여긴다. 그것은 악마가 강력한 암시효과나 권력체계가 아닌 순수한 자신의 의지라는 점이다. 사지가 왜 악마가 되고 그렇게도 소나를 따를까? 사지는 문제아고 공부도 못한다. 그러나 자신은 미래에 대한 목표가 있다. 레이팅게임 학교에서 폰에게 교육시키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목표가 선생님이란 말을 부모님에게 드리니 모두 크게 놀라워했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즉 소나의 의지였다. 사지는 스스로 쓸모없는 인간이라 여겼으나, 소나를 만나고, 그녀를 향한 마음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부여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인간에게 많은 권력과 재물이 아니라 인간이 속한 사회에서 유용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고 사지의 의지는 공공선이란 합리성이 아니라 공동선이란 합당한 가치관을 추구했다.

 

롤즈의 정의론적인 관점에서 사지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킬 권리를 부여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교육이란 제도로서 그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지와 소나의 가치관은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타인들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점이다. 승부에서 패배해도 서젝스가 두 사람에게 비록 시간이 걸려도 그것을 위해 노력하란 말의 의미는 상당히 인상 깊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신규세력으로서 비웃음을 사더라도 그 의지는 꺾어내지 않았다.

 

그리고 승리를 해도 패배의 맛을 본 리아스와 잇세이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리아스는 싸움은 힘만이 아니란 점을 알았으나 실제로 잇세이의 탈락으로 그 부분을 다시금 새겼으며, 효도는 새로운 능력에 눈을 떴다. 밸런스 브레이커로 용의 갑주를 착용하는 것이 자유롭게 되었다. 단지 2분이란 대기시간과 30분 이내만 출력가능한 점이다. 또한 효도의 가슴에 대한 욕망이 이제는 여자의 무의식마저 통하게 되었다. 리아스의 가슴과 소나의 가슴과 대화할 때 참으로 인상 깊었다. 버스트링궐에서 잇세이는 사지의 책략에 의해 혈액이 소모되어 탈락되기 전에 여자들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리아스는 언제나 효도를 걱정하며 안타까워했고, 소나는 자신의 책략을 이야기해준다. 그것은 바로 영상으로 리아스와 권속들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평소 레이비판이란 강력한 마왕의 여동생인 소나가 평소 매우 냉정하고 점잖고 이성적인 여성이나, 그녀의 무의식은 언니인 레이비탄과 유사했다. “혹시 마음속 말이 들리는 기술을 개발할 걸까☆소나 어떡해☆” 마치 마법소녀의 코스프레를 하면서 학교를 돌아다니던 레이비탄과 같은 말투를 하고 있었다.

 

언니의 마법소녀 행동에 부끄럽다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 숙인 소나회장이 오히려 레이비탄과 같은 속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상냥하면서도 기품 있는 여성상을 지닌 그녀에게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지처럼 바보 같은 남학생을 자신의 권속으로 보내고, 상급악마들이 모인자리에서 그를 데리고 왔다는 자체로 보면 소나 역시 상당히 사지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는 점이다. 아마 사지가 잇세이에게 이길 수 없고, 처참하게 당할 것을 알면서 그를 보낸 것은 소나가 사지에 대한 믿음이 깊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침실에서 서젝스의 격려를 받는 사지 옆에서 소나가 눈물을 흘릴 이유는 없다.

 

이렇게 신흥악마들이 서로의 꿈을 위해 몸부림 칠 때 백룡과 그리고 그의 일행들은 무서운 음모를 진행했다. 코네코의 언니는 강력한 요괴고양이고, 그 옆에 손오공의 후예, 성검 중에 가장 강한 엑스칼리버를 지닌 검사까지 나타나 위협을 하고 있었다. 잇세이가 강하게 될 수밖에 없는 점은 그들이 단순히 잇세이만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잇세이의 동료들까지 위협했기 때문이다. 아마 리아스가 독에 의해 위기를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잇세이는 밸런스 브레이커를 운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그 해방조건은 리아스의 가슴이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가슴에 대한 끊임없는 번뇌와 욕망에 사로잡힌 잇세이거만 정작 앞에서 바보처럼 망설이고, 도리어 리아스의 강한 의지에 눈을 뜬다. 야한 것은 잇세이인가? 아니면 리아스 내지 아케노인가? 성적욕망에서 젊은 남성이 여성보다 강하나, 여성도 강한 충동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단지 그 결정적 순간에 리아스가 효도를 앞선다는 점에서 효도는 하렘왕에 대한 미래를 더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회의감이 드는 점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사지와의 결투에서 효도가 자신이 리아스의 폰이나 언젠가 킹이 되어 권속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절대 맞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렘왕은 될 수 없다. 단지 여왕 아래 하렘이 성립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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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 루소전집 3
장 자크 루소 지음, 진인혜 옮김 / 책세상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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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대화>를 읽어보면서 나는 이토록 자신 안의 자신을 분리하여 변증법적인 논리와 이성, 경험으로 대화하는 점에서 매우 놀라웠다. 마치 이것은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각각의 사회지도인사와 지식인 그리고 많은 그리스 시민들과 대화한 것보다 더 철저한 대화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대화록에서는 상당히 이상론적인 인간상, 즉 인간의 가치와 진리란 idea에 있기에 그 idea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하나의 이상세계이기에 우리는 그 이상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철학(군주)적 실천이 필요한 것이라면, 루소는 이상이 존재하나 지금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어도 언젠가는 해야 하는 실천적 과제로 삼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루소가 왜 그렇게도 3장의 구분으로 자신을 비판하는 대화록을 적었는가? 그것도 자신은 자신이 아닌 자의 자신을 내놓아서 본래의 이름인 “Jean Jacques”에서 Jacques의 'c'자를 제외하여 “Jean Jaques”라고 명명했다. 루소라는 이름이 프랑스인을 만나 장 자크의 약자인 J.J. 이니셜로 대체했다. 그 J.J.는 장 자크의 이니셜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루소라는 본인이기도 하나 아니기도 했다. 어느 한 프랑스 신사 분을 만난 루소는 장 자크라는 인물에 대해 서로간의 판단력과 이성으로서 대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 루소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시민이었다.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지만, 어떻게 프랑스인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그의 천재적 기질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진보적인 정신력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르나, 그가 살던 시절은 그에게 철저한 삶이었다. 예전에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잠시 그의 사적인 내용을 들었는데, 그는 프랑스에서 추방되고, 국경을 지나칠 경우 체포령이 동원되고, 심지어 이 서적에서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외톨이로 만들어버렸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는 1772년부터 1776년까지라는 4년이란 시간을 모아 정리한 도서이다. 게다가 이 서적을 저술한 뒤에 1778년까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란 도서를 미완으로 남긴 채 서거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1778년으로 실존적 존재로서 끝났으나, 오히려 그 다음해부터는 그의 존재는 실존을 넘어 모든 것을 점화점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파리에서 바스티유감옥이 무너지고, 그 후에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목이 단두대 아래 사라졌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언급하다시피 일반의지를 강조했지, 전체의지를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 점은 분명히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이성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이었다. 하지만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는 프랑스혁명의 무력적 주축인 파리사람들은 전체주의적인 존재였고, 토크빌이 지적한데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그저 폭력에 의해 하나의 전체주의로 변질되었다. 루소는 그것을 우려했지만, 결국 그래 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 이후 공포정치를 하면서 그의 손에 보인 도서는 오직 1권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사회교과서나 세계사나 또는 정치사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프랑스혁명은 피해갈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 지금이야 루소라면 당연히 프랑스혁명의 정신적 지주이라는 점과 민주주의, 자유주의, 평등, 인권 등 수많은 미사어구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정작 그 주인공은 그런 세계를 당시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과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사상으로 인해 온갖 협박과 음해, 모함, 고독, 허무함으로 가득했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에서 루소가 장 자크에 대해 논하면서 어느 프랑스인과 조우한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지금에서 보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라는 세계적인 정치, 철학, 문학, 사상,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발전시켰으나, 루소가 살던 시절의 프랑스는 정말 감정적이고, 폭력적이고, 위험천만한 세계였다. 루소가 자신에게 처한 현실을 통곡하면서 적어내려간 사실 중에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루소가 그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고 악인이란 점이다.

 

그러나 그 악인에게 강도나 살인범과 같은 흉악범조차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도 루소라는 인물이 매우 위험하기에 다가올 수 없었다는 점이고, 그런다고 일반 프랑스 국민들 역시 루소에게 대하는 태도는 잔혹하기 짝이 없다. 일부로 그를 칭찬하는 척하면서 조롱을 날리는 부분들은 루소 자신에게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 상처를 받았어도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의 정신은 광기에 젖을 수밖에 없었는가?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생각난다.

 

광인이라고 하여 모두가 미친 것이 아니라 가끔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사상과 사유를 늘어놓을 수 있는 광인이란 존재다. 루소는 그런 존재에 가깝다. 그가 광인처럼 취급당하고 혹은 바보, 거짓말쟁이, 사기꾼, 위선자로 취급당한 점은 그가 광인이기 때문이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보면서 루소는 당대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외면당한다. 그의 서적은 그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시작해, 그의 서적을 왜곡하여 이상한 내용으로 이어지게 했으며, 사실과 무근한 내용이 만년설에서 굴러가는 눈처럼 계속 커져만 갔다.

 

심지어 그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조차 빼앗으려고 했다. 그의 집에 있는 잉크가 검은색이 아닌 거의 투명에 가깝게 했으며, 흰 종이에 흰 글씨로 적을 정도로 그에게 집필할 자유마저 박탈한다. 이때까지 그가 해온 업적도 부정하다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롱거리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더욱 잔인한 짓은 루소를 매우 싫어한 프랑스 관리가 그의 집 앞에 군악대를 보내어 연주를 하여 마치 위대한 사람에게 군인들의 열병 행사하는 것처럼 보여 루소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프랑스사람들은 그를 궁지로 몰아넣고, 이번에 그가 불쌍하다면 온정을 보낸 척하나 사실은 그가 마치 불쌍하여 거지에게 동정하는 듯이 대했다. 그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그를 더 이상 도망칠 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루소가 체포령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면서 빚만 늘어나고, 차후에는 자신을 제발 조용히 어디에 가두어 달라고 할 정도였다. 덫이 널린 잔디밭에 토끼 1마리를 몰아넣고 비웃는 사냥꾼처럼 루소는 최악의 상황에 매달린 상태에서 이 글을 적었다.

 

그가 보내온 지난 세월에서 이제 60대의 노인이 되어 도망칠 기력도 없고 항의할 기력도 없는 상태에서 루소에게 남은 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고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고할 수밖에 없었다. 루소는 이 서적을 완성 후에 복사본을 나누어주며 그의 억울함을 단 소수의 사람이라도 좋으니 알아달라고 했으나, 그것마저 무산되었다. 그러나 운명의 아이러니인지 역사의 후자에서 루소는 민주자유주의의 선구자로 되었다. 왜 모든 선구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가는 것인가? 생각하면 플라톤 역시 그런 피해자 중에 한 명일 것이다. 그가 무척이나 존경한 소크라테스가 이성과 논리를 중시했어도 그리스사회는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독백을 들게 했다.

 

플라톤이 자기 서적에 주인공이 자신보다 소크라테스를 내세우는 것은 아마 그 죽음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며, 지성과 논리를 중시하지 않고 idea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은 당시 사회에 대한 소원함이 묻어있을 것이다. 그래도 플라톤은 자신에 대해 가장 반대되면서 가장 자신과 동등한 입장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제자가 있었으나, 루소는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던 점으로 루소의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는 플라톤 이상으로 철저한 문장일 수밖에 없다.

 

당장 눈앞의 현실에서 그 고통과 상실감으로 메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스스로 심판하여 가상의 프랑스인, 그 중에 프랑스인 중에서 신사적인 인물을 내세웠다. 루소가 자신에 대한 반대적 자신의 의견들을 보면, 여태까지 프랑스인들이 루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런 이성적 사고와 논리적 사유를 지닌 자조차도 루소에 대해 알아간다는 변증법적 대화에서도 현실의 두려움으로 앞에 나가 루소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풀어줄 수 없다는 점을 토로한다.

 

그렇지만 정말 놀라운 사실은 루소라는 인물이 장 자크를 직접 만나고 난 후에 프랑스인에게 말하는 대목이다. 장 자크는 많은 조롱과 협박, 위협, 상실감에 젖어있어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쉽게 화를 내는 만큼 빨리 잊어버리고, 억지로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이기 바란다는 점이다.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해도 그의 눈매는 어느 젊은이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에게 자신의 심정을 나누고 싶었으나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장 자크가 조금 뒤에 태어나 더 오래 살아 독일 쾨니히베르크에 살던 칸트와 만났다면 좋은 토론상대라도 되었을 테지만,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단지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칸트가 미에 대한 기준의 기준을 정하면서 루소가 사치품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선처를 바라는 것에 대해 동의한 점에서 당시 유럽에서 프랑스는 매우 지적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심지어 루소 스스로가 유럽에서 프랑스는 야만을 유지한 나라로 지정한다. 서적을 읽다보면 <에밀>과 <사회계약론> 등의 서적과 편지에서 루소는 프랑스의 의사를 매우 비판했다.

 

그들은 환자에게 어차피 인간에게 1번의 죽음을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보다는 그 죽음에 대한 공포로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이다. 아이에 대한 교육에서 유모에 대한 선정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중세유럽 사회에서 부인들은 자신의 젖을 아이에게 먹이지 않고, 유모에게 돌보게 했다는 점에서 여성의 가슴이 페미니스트 인문학자의 관점에서 생명의 젖줄보다는 철저하게 가리게 했다는 점이다. 단지 그 가슴을 공개되는 것은 오직 그 부인의 주인인 남편에게만 허락된 점이다.

 

<애밀>이 비단 저런 부분만 지적한 것만 아니고, 루소가 유모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인식만을 비판한 것만은 아니나, 프랑스에서는 남녀노소를 불구하도 모두 자신들의 벽에 갇힌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벽에 갇혀있는 프랑스 안에서 갇혀있어야 할 사람은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오직 루소였다. 루소가 비정상인이라는 것이 프랑스의 당시 시대적 현실이다. 그런 오해와 편파적 관점이 루소에게 자신에 대한 변명을 떠나 자신에 대한 비판을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이 가능하다는 실존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다소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볼 수 있으나, 역사적 사실과 루소의 자서전 성향이 담긴 이 서적을 비교하면 충분히 그의 입장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큰 전환이 되는 사건을 만든 인물들을 보면 대체로 그 시대에 억압받거나 탄압당하거나 혹은 목숨까지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추방되고,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멕시코로 추방되어 스탈린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그 이전의 루소는 프랑스 안에서 아무런 몸짓도 할 수 없이 모든 프랑스인들을 피해 도망치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데도 살아있지 못한 호모 사케르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루소를 보면서 우리는 루소의 비참한 현실과 답답한 지식인의 고독만 볼 것인가? 악인이 정말 악인이었는지? 아니면 선인이 선인이었는지? 루소가 장 자크에 대한 대화에서 프랑스인에게 묻는다. 그를 악인이라고 보면 그를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하 악의를 품고 단 혼자인 그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정당한 것인지 말이다. 지금 이 서평을 적는 나라는 인물은 다소 현실에 대한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부분이 있다. 악인은 정말 악인이었기에 악인인가? 아니면 저항조차 못하는 약자를 악인으로 몰고 가는가? 루소가 추구하는 일반의지에서 우리가 가져할 의지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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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16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순규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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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문학소설로 최초로 읽은 서적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었지만, 사실 그의 작품을 문학소설이 아닌 다른 경로로 알게 된 것은 ‘푸른 문학’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매드하우스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보통 그 업체에서 만드는 작품들이 대부분 격렬한 액션과 폭력, 그리고 충격적인 장면으로 가득하기에 다소 ‘푸른 문학’이란 애니메이션에서 나츠메 소세키를 만났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나츠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반항아인 다자이 오사무까지 그곳에서 만났으니,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다.

 

분명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가라타리 고진이란 사상가 및 문학평론가의 글에서 나츠메 소세키 이후로서 일본문학에 위대한 작품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도대체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이 어떤 존재이기에 가타라니 고진이란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 참고로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내의 사상가로 유명한 인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상가다. 그의 저서인 <트랜스 크리틱>의 경우 칸트와 마르크스를 넘어라는 주제로 현대사회의 자본, 국가, 국민의 습성이 뭉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함을 밝히고, 칸트와 마르크스로 통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어째든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을 평소 문학소설에 대한 정보에서 잡아내는 것보다 전혀 다른 매체에서 나는 접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 사상가의 글귀에서다.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의 특징을 찾아내라고 하면 간단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의 글을 읽으면 무척이나 인간의 내면을 세심하게 찾고 그리면서 그 내면 안에 가려진 우리 인간의 현재를 그리고 있다. 게다가 그 대상자는 작가 자신이란 자아비판 역시 비켜나갈 수 없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1900전후의 일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지식인이면서 한편으로 그는 위장병이란 못 쓸 병을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주인공인 간게쓰 선생은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고양이마저도 간게쓰 주인이 곧 죽는다고 혼자 생각한다. 물론 고양이는 마지막에 술에 취해 물항아리에 빠져 죽지만, 그것도 아주 고맙다고 생각한다. 고양이에게 이성적 판단력이 있다는 과학적 사실은 무근하나, 우화적인 요소로서 당시 일본 근대화의 물결을 그렇게도 비꼬아 보는 지식인의 눈은 <마음>이란 소설에서도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죽음의 그림자 역시 나츠메 소세키는 알고 있었다.

 

<마음>이란 소설에서 주요 인물은 나, 선생님, 선생님의 아내, 선생님의 친구 K, 선생님의 아내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의 형님, 나의 매제 정도로 끝난다. 페이지가 중편소설임에도 등장인물 수는 많지 않은 것이 왠지 모르게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보이는 특징인 것 같았다. 거대한 역사적 현실보다는 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인간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점에서 시대에 쓸려가기보단 시대에 대해 역행과 더불어 비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마음>의 선생님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간게쓰 선생처럼 위장병으로 죽을 운명이 아니라 단지 자살을 택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마음>이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든 나츠메 소세키가 보는 죽음이란 모든 것의 종료와 동시에 암울한 비극보다는 자신에게 부여된 억압과 괴로움에서 해방이란 새로운 존재적 사실을 보인다. 아니라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그도 역시 초인(超人)을 꿈꾸는가? 마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위해 같이 보면 좋을 서적인 <선악의 피안>처럼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은 그런 인간의 윤리적인 요소에 큰 중점을 두었다.

 

단지 애니메이션의 <마음>과 문학소설의 <마음>의 차이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원작 소설의 3부에 해당되던 내용만 나오고, 1부와 2부에 대해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인 젊은 시절의 선생님은 자기의 독백이란 시점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 영상에서 관찰하기 좋은 3인칭 관점으로 풀어간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과거의 자신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기 위해 긴 편지를 적었기에 현재 선생님은 3인칭이 되어 과거의 자신을 서술하고 있다. 즉, 그것은 과거의 선생님과 현재의 선생님은 동일인물이나, 선생님은 마치 과거에 대해 3인칭적인 요소로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에서는 과거의 회상은 완벽히 선생님의 입장으로 보고 있다면,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선생님만 아니라 K와 선생님의 아내까지 심리를 묘사한다. 그것은 선생님의 심리적 요소만 중시한 것이 아니라 3남녀의 심리까지 중시했다. 과거 메이지 전의 시대의 젊은 여성이라면 아직까지 전통적 여성에 가까우나, 오히려 애니메이션에서는 선생님의 아내이기 전의 아가씨의 태도는 상당히 도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미쟝센 요소 중에 도라지꽃과 해바라기 꽃의 대비는 무척이나 인상 깊다고 본다.

 

그렇지만 애니메이션의 연출력과 표현력의 극대화는 분명 즐거움을 준 것은 분명하나, 뭔가 석연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단순 22분의 2편으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는 말인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에게 배신당해 어느 미망인의 집에 은거하는 대학생이란 설정에서 그의 인간관에 대한 부분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실은 그가 K의 죽음을 만들게 한 동기성립 후 결혼했다고 하나, 그에게 남은 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이었다.

 

그렇다면 그 죄의식은 무엇인가? 소설 <마음>은 그것을 중시했다. 선생님을 처음 본 나라는 인물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이끌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과 아니 도쿄대학의 교수보다 나라는 인물에게 선생님은 더 큰 존재였다. 왜 그럴까? 선생님은 다른 사람과 달리 아주 사람들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태도가 거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기 싫었다. 그것은 아마 K의 죽음에서 비롯된 자신의 죄의식이었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선생님은 아내를 사랑하나, 사람들을 싫어한다. 아내도 사람이기에 아내도 싫어한다. 하지만 분명 선생님은 아내를 사랑하니 이런 모순적 결합은 무엇이라 하여야 하겠는가?

 

그런다고 선생님은 아내에 대해 극진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언제나 아내를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좋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K의 죽음으로 바꾼 아내의 사랑, 누군지 모를 사람의 무덤 방문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풀어가지 않을 죄의식에 자신을 가둔 것이다. 시기적으로 이 소설은 1914년에 나온 점에서 메이지시대가 종료되고 소화시대가 도래함을 알리고 있다. 메이지왕이 죽자, 그의 장군 하나가 자살하고, 그 후에 장군의 아내 역시 자살한다. 선생님도 역시 그들의 죽음에서 자신도 그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는가? 아니라면 나라는 대학졸업생이 있기에 고백을 하고,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을 남기기 위해 편지는 적었는가?

 

솔직히 보자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러일전쟁 이후 간게쓰에게 러일전쟁 승리축전을 위한 행사에 와서 모금해달란 장면에서 간게쓰는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한다. 나츠메 소세키의 관점은 모르나, 적어도 러일전쟁에 대해 우습게 보는 태도를 내비친 점에서 중인전쟁의 중역자인 그 장군마저 정말로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인가? 이 소설의 나라는 인물의 아버지는 메이지왕, 그의 장군, 장군의 아내에 대한 죽음에서 자신도 죽어간다고 여기나, 선생님은 그들의 죽음 이전에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게다가 신장병이라든지 혹은 신경병이라든지 단어로 통해 나츠메 소세키가 마치 그 선생님을 자신에게 투명하려는 느낌도 들었다.

 

지식인으로 가져야 할 세상의 안목 역시 중요했다. 선생님은 부모님을 여의고, 숙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나 막상 알고 보니 숙부는 부모님의 재산을 도용하고, 자신을 속인 것이다. 세상물정을 몰랐던 선생, 가족에게 배신당한 선생, 혼자서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봐야한 선생, 그리고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려한 선생님이 역으로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절대적 악인은 없고 어제 나에게 미소 짓는 자가 오히려 나에게 뒤에서 비수를 찌르지 모를 세상에 <마음>이란 소설은 윤리적 가치에 대해 무척이나 냉담한 느낌을 준다.

 

남에 대한 비판과 모멸감에서 자신도 그런 모멸과 증오에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그것도 모른 채 흘러가는 순간 파탄을 맞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 대한 전반적 고찰이란 쉽지 않다. 그 심리적 순간과 판단에 대한 오류와 착각, 그리고 뒤틀리기 시작하는 운명의 장난과 파괴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여생까지 좌우하게 된다. 나라는 인물은 왠지 모를 선생님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심으로 다가갔으나, 뒤에 가면 도리어 선생님이 나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자신의 자리 잡은 어둠의 죄의식을 처음으로 고백할 수 있었고, 그것은 영원한 비밀의 동지로 남길 수 있었다.

 

자신의 죄를 알게 하고, 자신은 그 편지를 적을 10일은 자살을 유보하고, 아마 나의 손에 닿을 쯤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용서되지 않으나, 그 죄에 대하여 진실을 알리는 순간 자신의 마음 안에 응어리는 풀리게 된다. 그 응어리를 풀지 못함에 선생은 죽지 못해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과 아내의 사랑에는 항상 K라는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쉽게 죽음을 선택하면 자신의 죄에서 도망치는 겁쟁이가 되는 모습에서 선생님의 고뇌는 간단하지 못한 문제다. 이런 인간의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을 세심하게 그려간 <마음>, 어렵지 않은 문체이나 상당히 인간상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던져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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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친화력 - 신화, 구원, 희망 새로운 질서 1
발터 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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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친화력> 이 서적을 읽는 순간,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발터 벤야민이란 문학평론가 혹은 철학사상가의 괴테에 대한 친화력으로 오판했다는 사실이다. 부제처럼 “신화, 구원, 희망”이란 3가지 단어로서 벤야민이 괴테라는 독일의 위대한 문학가에 대해 어떤 식으로 풀어가고, 그의 작품들이 지금 살아가는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가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괴테의 친화력은 괴테가 문학도로서 우리에게 친화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괴테의 작품 중에서 <친화력>이란 작품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과 같은 괴테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독자로선 이 책의 서평을 적어가는 것은 말 그대로 모험이 아닌가 싶다. 아니라 차라리 번역자가 발터 벤야민의 문필을 번역하는 것에 치중하기보단 번역자가 발터 벤야민의 사상으로 통해 보는 한국사회에 대한 고찰이 훨씬 나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었다. 벤야민이란 사람은 기본적으로 문예이론에 대한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의 사회문제연구소의 학자들과 빼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오죽했으면 최근에 내가 읽어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하버트 마르쿠제 등과 같은 철학자 이름 위에 발터 벤야민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상가와 철학자로서 벤야민을 추구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보단 여기서는 오히려 문학비평가 발터 벤야민을 읽는 점에서 번역자의 초반서문에 내가 더 집중했다는 사실만으로 주객전도(主客顚倒)도 일어난 점이다.

 

그런다고 하여 이 책을 보는 것에서 비록 <친화력>이란 소설을 읽지 않음에도 낯선 느낌을 받지 않음은 그 이전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란 도서를 봤기 때문이다. 문예이론에 대한 연구도서에서 근대문학가인 프란츠 카프카, 마르셀 프루스트 등의 작품을 소개하고 거기에 대한 비평을 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비평은 상당히 깊숙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소설이란 문자텍스트를 마치 살아있는 그림처럼 생생하게 글로서 나타낸다. 그의 비평가로서 역할을 단순히 작품을 신격화 내지 깔아뭉개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자체를 살아있는 화산으로 발휘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벤야민의 글을 적는 습성이 당연히 <괴테의 친화력>에서 빠져 나올 리가 없다.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문예이론의 경우 작품에 대한 비평은 전체적인 장에서 1가지의 장일뿐이나 괴테의 친화력은 오히려 그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벤야민의 문학비평에 대한 부분을 여기서 잘 드러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단지 아쉬운 점은 <독일비애극의 원천>까지 읽어봤다면 그의 문학적 세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벤야민에 관하여 저술한 기존의 도서들은 그를 문학비평가보다 오히려 철학자와 사상가로 보았다. 물론 문학비평에서 철학이나 사상이 배제될 수 없겠지만, 중심점은 분명히 문학보다 사상이란 점이다. 그런 점에서 괴테의 친화력은 벤야민의 관점에서 괴테의 작품뿐만 아니라 괴테의 인생과 주변 인물간의 관계까지 고려하여 그의 작품이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고찰한 점이다. 잊을 수 없는 점은 벤야민의 친구 여동생과 나눈 편지에서 그 편지내용으로 통해 괴테의 문학적 방향까지 잡아나가는 부분은 왠지 모르게 놀라운 부분이었다.

 

대개 어느 인물이 다른 사람들과의 편지로 통해 그의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만, 그 편지로 통해 그의 변화까지 보려고 한 점에서 세세한 관찰력이 돋보인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작품 속에서 인물의 동작과 행위, 어떤 사물과 그 배경, 건물까지 완벽한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고 보았다. 작은 행동이 후에 미칠 영향을 보고, 그것이 하나의 상징성으로 떠오른 점이란 점에서 벤야민의 주제설정은 독특했다. 단지 아쉬운 점은 이 소설과 괴테의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상세한 의미를 발견하기가 곤란했다.

 

단지 알 수 있는 점은 벤야민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 정도를 아주 조금 알아갔다는 정도만 만족해야할 점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주객전도가 되어버린 이 서적에 담긴 벤야민의 문학적 감각보다 벤야민이 바라보는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한 감각이 더 이끌린다는 점이다. 옮긴이의 서문을 찾아보면,

 

“결단 없는 선택은 인간을 희생의 제물로 만들지만 ‘죽음에의 도약’에 의해 매개된 사랑의 구원은 우주를 바꾸어 놓는다..(중략), ‘결단 없는 선택은 인간의 희생으로 이어진다.’는 명제는 실제로는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 맹점을 가장 잘 지적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벤야민의 이 명제가 가진 의미는 단순히 사랑에 대한 해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결단 없는 선택’은 결국 결단을 위험 하는 ‘독재정치’와 지근거리에 있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나치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대중 민주주의의 핵심적 비밀을 가리킨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현대 민주주의는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에의 도약’이라는 결단을 포기하고 대신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환상을 먹고사는 희생제의의 체제인 셈이다.”

 

번역자의 벤야민으로 통해 보는 현대사회의 전체주의적인 민주주의 맹점은 다시 나온다. 인터넷으로 우리는 id를 입력하라고 한다. id란 즉 아이디라고 하여 우리의 이름이기도 하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으로 보면 이드라는 것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인터넷 세대에서 우리는 정작 민주주의라는 대의에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언어폭력과 구분짓기 그리고 이원화의 갈등으로 통해 보는 테러리즘이 오히려 민주주의가 되지 않은가 싶다. 독재자가 죽을 때 결단 을 내리기만 한 민주화 시대인물들은 오히려 그 민주주화란 유령에 얽매이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퇴보했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 서거한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보다 그의 죽음으로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폭력 속에 가려우진 민주주의, 혹은 주인이 없는 노예라는 정치적 투쟁가를 비판한다. 물론 그것이 벤야민이 파시즘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그런 관점이 다소 문학비평 속에 녹아있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괴테의 친화력을 돌아보는 점은 뭔가 모르게 멀지 않은가 싶다. 물론 역자 역시 너무 멀리 나가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을 보내나, 적어도 벤야민의 서적으로 벤야민에 대해 알려면 그의 사상을 조금 염두할 필요가 있다. 벤야민 역시 파시즘을 비판한 지식인이면서 독일의 나치즘을 피해기 위해 국경을 넘어가던 도중 그 꿈이 좌절되어 스스로 자살한 인물이다.

 

그런다고 <괴테의 친화력>을 읽으면서 너무 괴테만은 생각하지 말자. 첫 장부터 시작하자 조금 후에 매우 익숙한 인물과 그의 서적이 나온다.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부터 하여 다른 도서가 소개된다. 칸트의 입장에서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남녀 간의 성적 행위를 두고 동물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는 모양이었다. 기본적으로 괴테의 친화력은 괴테 서적만 보고 해결될 도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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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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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라는 도서에 대해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습지생태라는 점으로 환경적으로 습지환경에 대한 환경생태학적인 연구보고서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을 집어 들고 저자를 보면서 순간 생각이 달리하게 되었다. 작가의 이름은 최규석이었다. 최규석이란 작가는 예전에 조금 익혀 들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연상호 감독이라는 애니메이터의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이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그리고 그 작품의 감독과 관객이 직접 대화하는 GV에 참석하면서 그들의 관계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연상호 감독과 최규석 작가에 대해 알게된 동기는 남산타워 인근에 위치한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방문하여 <셀마와 단백질과 커피>라는 인디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면서다. 이 작품은 3가지 다룬 주제로 정한 옴니버스형태의 작품으로 그중에 <사랑은 단백질>이란 코믹한 애니메이션이 2명의 친구가 만든 작품이었다.

 

물론 <돼지의 왕>과 연상호 감독과의 GV를 하기 전에 먼저 <사랑은 단백질>에서 그 작품 내의 씁쓸하고 웃기기도 하나 한편으로 뭔가 마음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돼지가 직접 자기 몸을 잘라내어 가게 이름도 내 다리 족발이라고 하지 않은가? 아니면 닭이 자신의 병아리를 치킨 후라이드로 만들어 오면서 자기의 몸과 자기의 자식을 희생하여야 하는 서민들의 비극을 코믹하게 아이러니화한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을 바라보면 거리에 앉은 부랑자와 걸인, 좌판에 걸터앉은 가난한 상인들, 이 모두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가던 이웃이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낙담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사랑은 단백질>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이 작품을 잘 보면 어느 작업실 같은 장소에 3명의 남자가 머물고 있었다. 그 중에서 인상 깊은 남자는 후라이드된 치킨을 아주 맛있게 먹어주는 안경남자였다.

 

사실 그 안경남자는 실존하는 인물의 모습을 캐리커처하여 하나의 캐릭터를 부여한 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생각 없이 살아가는 마음 편한 사람으로 말이다. 문제는 그 캐릭터가 <습지생태보고서>에도 여전히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여 최규석 작가의 일상을 습지생태라고 한 것이고, 그 보고서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아주 리얼하게(물론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반-리얼리티 미학이나) 보여줬다는 사실이다.

 

가진 것도 없는 청춘들, 담배를 입에 물고 오늘 하루 기어 다니는 그들의 모습에서 왠지 나 역시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똑같은 모습과 행동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이 겪는 대학생활의 현실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왜곡과 모순으로 에워 쌓여 마침내는 코믹으로 승화한다. 주인공 최규석은 내가 알기로도 분명히 상명대학교 출신이고, 연상호 감독 역시 상명대학교 출신으로 알고 있다.

 

그들의 만화학도와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학생들을 보면 201111월 청주시 청주대학교와 같은 해 5월 천안시 남서울대학교에서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학술대회가 기억난다. 만화가들이 좁은 시장, 인력수급의 비정규직화, 관심 없는 사회로 만화가들이 술로서 버틸 수밖에 없는 한 그림은 왠지 마음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물론 내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전공도 아니고, 그 쪽 분야에 업무종사자도 아니나, 적어도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보면 습지생태보고서는 만화학도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자들의 비참함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한 웃음은 왠지 모르게 내게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게 한다. 다소 적나라하고 다소 직설적이고 다소 능란한 모습을 보여줘도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가진 이야기다. 공간은 비록 습지라는 작은 방이나 그 방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에선 우리 현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확대할 수 없는 것이나, 적어도 어느 정도 공감대는 충분하다는 점이다.

 

예전에 최규석 작가의 아기공룡둘리 오마주에서 원작가 김수정 작가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둘리의 인물들이 세월이 지나고 현재로 보여주던 장면이 있었다. 매우 슬프고도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었다. 둘리는 무척이나 구박하던 길동이의 무덤아래 소주를 가지고 간 둘리는 길동이를 그리워하며 그대로 죽는다. 다른 친구들은 각자만의 현실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다소 최규석 작품에는 현실에 대한 냉소함이 강렬하다.

 

냉소하기에 습지생태보고서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우울하고 비참한 청춘에 대해 그렇게도 냉소적이면서도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그 재능이 말이다. 습지생태연구소에 보면 작가의 교수가 등장하는데, 혹시 학회에서 봤을지 모를 인물이다.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출신들이 사무실을 개업하여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결국 그 사무실이 외로운 공간으로 되었다고 한다.

 

습지생태보고서에 나오는 수많은 만화학도와 애니메이터들의 꼬인 현실은 작품이 나오던 배경은 작가가 대학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그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유효하다는 점에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다. 올해 KBS방송국에서 88만원 세대에 대한 습지생태보고서란 드라마가 나온 것 같은데, 이 이야기는 단순히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찾고 싶으나, 보이는 것은 냉소적인 상황인 것이 핵심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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