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 루소전집 3
장 자크 루소 지음, 진인혜 옮김 / 책세상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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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대화>를 읽어보면서 나는 이토록 자신 안의 자신을 분리하여 변증법적인 논리와 이성, 경험으로 대화하는 점에서 매우 놀라웠다. 마치 이것은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각각의 사회지도인사와 지식인 그리고 많은 그리스 시민들과 대화한 것보다 더 철저한 대화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대화록에서는 상당히 이상론적인 인간상, 즉 인간의 가치와 진리란 idea에 있기에 그 idea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하나의 이상세계이기에 우리는 그 이상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철학(군주)적 실천이 필요한 것이라면, 루소는 이상이 존재하나 지금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어도 언젠가는 해야 하는 실천적 과제로 삼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루소가 왜 그렇게도 3장의 구분으로 자신을 비판하는 대화록을 적었는가? 그것도 자신은 자신이 아닌 자의 자신을 내놓아서 본래의 이름인 “Jean Jacques”에서 Jacques의 'c'자를 제외하여 “Jean Jaques”라고 명명했다. 루소라는 이름이 프랑스인을 만나 장 자크의 약자인 J.J. 이니셜로 대체했다. 그 J.J.는 장 자크의 이니셜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루소라는 본인이기도 하나 아니기도 했다. 어느 한 프랑스 신사 분을 만난 루소는 장 자크라는 인물에 대해 서로간의 판단력과 이성으로서 대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 루소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시민이었다.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지만, 어떻게 프랑스인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그의 천재적 기질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진보적인 정신력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르나, 그가 살던 시절은 그에게 철저한 삶이었다. 예전에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잠시 그의 사적인 내용을 들었는데, 그는 프랑스에서 추방되고, 국경을 지나칠 경우 체포령이 동원되고, 심지어 이 서적에서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외톨이로 만들어버렸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는 1772년부터 1776년까지라는 4년이란 시간을 모아 정리한 도서이다. 게다가 이 서적을 저술한 뒤에 1778년까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란 도서를 미완으로 남긴 채 서거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1778년으로 실존적 존재로서 끝났으나, 오히려 그 다음해부터는 그의 존재는 실존을 넘어 모든 것을 점화점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파리에서 바스티유감옥이 무너지고, 그 후에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목이 단두대 아래 사라졌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언급하다시피 일반의지를 강조했지, 전체의지를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 점은 분명히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이성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이었다. 하지만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는 프랑스혁명의 무력적 주축인 파리사람들은 전체주의적인 존재였고, 토크빌이 지적한데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그저 폭력에 의해 하나의 전체주의로 변질되었다. 루소는 그것을 우려했지만, 결국 그래 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 이후 공포정치를 하면서 그의 손에 보인 도서는 오직 1권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사회교과서나 세계사나 또는 정치사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프랑스혁명은 피해갈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 지금이야 루소라면 당연히 프랑스혁명의 정신적 지주이라는 점과 민주주의, 자유주의, 평등, 인권 등 수많은 미사어구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정작 그 주인공은 그런 세계를 당시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과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사상으로 인해 온갖 협박과 음해, 모함, 고독, 허무함으로 가득했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에서 루소가 장 자크에 대해 논하면서 어느 프랑스인과 조우한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지금에서 보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라는 세계적인 정치, 철학, 문학, 사상,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발전시켰으나, 루소가 살던 시절의 프랑스는 정말 감정적이고, 폭력적이고, 위험천만한 세계였다. 루소가 자신에게 처한 현실을 통곡하면서 적어내려간 사실 중에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루소가 그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고 악인이란 점이다.

 

그러나 그 악인에게 강도나 살인범과 같은 흉악범조차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도 루소라는 인물이 매우 위험하기에 다가올 수 없었다는 점이고, 그런다고 일반 프랑스 국민들 역시 루소에게 대하는 태도는 잔혹하기 짝이 없다. 일부로 그를 칭찬하는 척하면서 조롱을 날리는 부분들은 루소 자신에게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 상처를 받았어도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의 정신은 광기에 젖을 수밖에 없었는가?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생각난다.

 

광인이라고 하여 모두가 미친 것이 아니라 가끔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사상과 사유를 늘어놓을 수 있는 광인이란 존재다. 루소는 그런 존재에 가깝다. 그가 광인처럼 취급당하고 혹은 바보, 거짓말쟁이, 사기꾼, 위선자로 취급당한 점은 그가 광인이기 때문이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보면서 루소는 당대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외면당한다. 그의 서적은 그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시작해, 그의 서적을 왜곡하여 이상한 내용으로 이어지게 했으며, 사실과 무근한 내용이 만년설에서 굴러가는 눈처럼 계속 커져만 갔다.

 

심지어 그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조차 빼앗으려고 했다. 그의 집에 있는 잉크가 검은색이 아닌 거의 투명에 가깝게 했으며, 흰 종이에 흰 글씨로 적을 정도로 그에게 집필할 자유마저 박탈한다. 이때까지 그가 해온 업적도 부정하다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롱거리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더욱 잔인한 짓은 루소를 매우 싫어한 프랑스 관리가 그의 집 앞에 군악대를 보내어 연주를 하여 마치 위대한 사람에게 군인들의 열병 행사하는 것처럼 보여 루소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프랑스사람들은 그를 궁지로 몰아넣고, 이번에 그가 불쌍하다면 온정을 보낸 척하나 사실은 그가 마치 불쌍하여 거지에게 동정하는 듯이 대했다. 그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그를 더 이상 도망칠 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루소가 체포령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면서 빚만 늘어나고, 차후에는 자신을 제발 조용히 어디에 가두어 달라고 할 정도였다. 덫이 널린 잔디밭에 토끼 1마리를 몰아넣고 비웃는 사냥꾼처럼 루소는 최악의 상황에 매달린 상태에서 이 글을 적었다.

 

그가 보내온 지난 세월에서 이제 60대의 노인이 되어 도망칠 기력도 없고 항의할 기력도 없는 상태에서 루소에게 남은 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고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고할 수밖에 없었다. 루소는 이 서적을 완성 후에 복사본을 나누어주며 그의 억울함을 단 소수의 사람이라도 좋으니 알아달라고 했으나, 그것마저 무산되었다. 그러나 운명의 아이러니인지 역사의 후자에서 루소는 민주자유주의의 선구자로 되었다. 왜 모든 선구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가는 것인가? 생각하면 플라톤 역시 그런 피해자 중에 한 명일 것이다. 그가 무척이나 존경한 소크라테스가 이성과 논리를 중시했어도 그리스사회는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독백을 들게 했다.

 

플라톤이 자기 서적에 주인공이 자신보다 소크라테스를 내세우는 것은 아마 그 죽음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며, 지성과 논리를 중시하지 않고 idea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은 당시 사회에 대한 소원함이 묻어있을 것이다. 그래도 플라톤은 자신에 대해 가장 반대되면서 가장 자신과 동등한 입장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제자가 있었으나, 루소는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던 점으로 루소의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는 플라톤 이상으로 철저한 문장일 수밖에 없다.

 

당장 눈앞의 현실에서 그 고통과 상실감으로 메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스스로 심판하여 가상의 프랑스인, 그 중에 프랑스인 중에서 신사적인 인물을 내세웠다. 루소가 자신에 대한 반대적 자신의 의견들을 보면, 여태까지 프랑스인들이 루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런 이성적 사고와 논리적 사유를 지닌 자조차도 루소에 대해 알아간다는 변증법적 대화에서도 현실의 두려움으로 앞에 나가 루소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풀어줄 수 없다는 점을 토로한다.

 

그렇지만 정말 놀라운 사실은 루소라는 인물이 장 자크를 직접 만나고 난 후에 프랑스인에게 말하는 대목이다. 장 자크는 많은 조롱과 협박, 위협, 상실감에 젖어있어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쉽게 화를 내는 만큼 빨리 잊어버리고, 억지로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이기 바란다는 점이다.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해도 그의 눈매는 어느 젊은이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에게 자신의 심정을 나누고 싶었으나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장 자크가 조금 뒤에 태어나 더 오래 살아 독일 쾨니히베르크에 살던 칸트와 만났다면 좋은 토론상대라도 되었을 테지만,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단지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칸트가 미에 대한 기준의 기준을 정하면서 루소가 사치품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선처를 바라는 것에 대해 동의한 점에서 당시 유럽에서 프랑스는 매우 지적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심지어 루소 스스로가 유럽에서 프랑스는 야만을 유지한 나라로 지정한다. 서적을 읽다보면 <에밀>과 <사회계약론> 등의 서적과 편지에서 루소는 프랑스의 의사를 매우 비판했다.

 

그들은 환자에게 어차피 인간에게 1번의 죽음을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보다는 그 죽음에 대한 공포로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이다. 아이에 대한 교육에서 유모에 대한 선정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중세유럽 사회에서 부인들은 자신의 젖을 아이에게 먹이지 않고, 유모에게 돌보게 했다는 점에서 여성의 가슴이 페미니스트 인문학자의 관점에서 생명의 젖줄보다는 철저하게 가리게 했다는 점이다. 단지 그 가슴을 공개되는 것은 오직 그 부인의 주인인 남편에게만 허락된 점이다.

 

<애밀>이 비단 저런 부분만 지적한 것만 아니고, 루소가 유모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인식만을 비판한 것만은 아니나, 프랑스에서는 남녀노소를 불구하도 모두 자신들의 벽에 갇힌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벽에 갇혀있는 프랑스 안에서 갇혀있어야 할 사람은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오직 루소였다. 루소가 비정상인이라는 것이 프랑스의 당시 시대적 현실이다. 그런 오해와 편파적 관점이 루소에게 자신에 대한 변명을 떠나 자신에 대한 비판을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이 가능하다는 실존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다소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볼 수 있으나, 역사적 사실과 루소의 자서전 성향이 담긴 이 서적을 비교하면 충분히 그의 입장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큰 전환이 되는 사건을 만든 인물들을 보면 대체로 그 시대에 억압받거나 탄압당하거나 혹은 목숨까지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추방되고,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멕시코로 추방되어 스탈린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그 이전의 루소는 프랑스 안에서 아무런 몸짓도 할 수 없이 모든 프랑스인들을 피해 도망치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데도 살아있지 못한 호모 사케르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루소를 보면서 우리는 루소의 비참한 현실과 답답한 지식인의 고독만 볼 것인가? 악인이 정말 악인이었는지? 아니면 선인이 선인이었는지? 루소가 장 자크에 대한 대화에서 프랑스인에게 묻는다. 그를 악인이라고 보면 그를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하 악의를 품고 단 혼자인 그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정당한 것인지 말이다. 지금 이 서평을 적는 나라는 인물은 다소 현실에 대한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부분이 있다. 악인은 정말 악인이었기에 악인인가? 아니면 저항조차 못하는 약자를 악인으로 몰고 가는가? 루소가 추구하는 일반의지에서 우리가 가져할 의지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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